회사에서 학술연구 하기 / AI 연구소에서 HCI 연구를 한다는 것
약 2년 가량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몇 달 전 한국으로 귀국했다. 현재는 한국의 IT 빅 테크 기업 중 하나의 AI 리서치 랩에 Research Scientist 포지션으로 조인하여 HCI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포닥 계약 만료 기간이 가까워짐에 따라 미국에 잔류하는 선택지와 한국으로 돌아가는 선택지가 있었는데, 필자는 여기에서 후자를 선택했다. 선택의 기로에서 필자는 두 가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1. 가족의 행복 (가족을 등진 미국에서의 성공이 의미있는가, 미국에서의 삶은 지속 가능한 삶인가)
2. 하고 싶은 연구를 하면서 내가 기르고 싶은 연구 역량을 기를 수 있는가
사람마다 상황과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에게 정답은 다를 것이다. 1번 문제의 경우 미국에 있으면서 여러 한국인 유학생들, 한국인 교수님들, 한국인 포닥 분들의 케이스들을 보면서 오랫동안 고민했다. 2년 간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필자에게 미국은 지속 가능하게 거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미국에 자리잡은 (교포가 아닌) 한국인 학자 분들이 미국이 살기 좋다고 말하면서도 몇 년에 한 번씩 한국에 꼭 다니러 가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모든 가족과 대부분의 친구들이 한국에 있는 필자와 필자의 아내는 삶에서 한국을 제외할 수 없다. 이런 점에 대해 다른 분들께 질문했을 때 다수는 미국에서의 성공과 기회를 최우선 가치에 두고 가족의 문제는 미뤄두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필자는 더 늦기 전에 그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한국에 사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이라고 최종 판단을 내렸다.
이것은 한국/미국의 문제라기보다는 교수직과 인더스트리 연구직 사이의 선택 문제라고 볼 수 있겠다. 흔히들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있는 직업은 교수뿐이라고 생각하지만, 분야별 특이성에 따라 업계에서도 그러한 기회가 주어지는 경우가 있다. 컴퓨터공학 관련 분야가 그런 경우고, Microsoft, Google, Facebook 등에서 학술 연구를 많이 한다. 현재는 머신 러닝 등 AI 제반 분야가 높은 활용도와 기술적 우수성의 높은 홍보 효과로 인해 심지어 스타트업에서도 학술 연구를 할 정도로 인더스트리 리서치가 활성화 되었다. 다만 HCI는 상대적으로 기반 기술의 연구가 일정 수준 올라와 '돈 많고 여유가 많아진 뒤' 신경을 쓰기 시작하는 분야다 보니 전 세계적으로도 HCI 학술연구를 지원하는 회사는 손에 꼽았다(여기서 학술연구를 지원한다는 말은 전업 Research scientist들이 학술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경우를 말한다). 필자가 박사를 졸업할 시기에만 해도 한국에는 이러한 업계 자리가 전무했다. 들으면 다 아는 모 대기업 R&D에서 수 년에 한 번씩 HCI 탑 티어 학회에 논문 한 편 나오는 정도. 하지만 1, 2년 전부터 한국의 빅테크 기업의 AI 연구소단 한 곳에서 HCI 리서치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한국행의 선택지가 하나 늘게 되었다.
교수직과 리서치 사이언티스트 자리를 두고 미국 사람들도 많은 고민을 한다. 연구주제의 자율성을 보장받는다는 가정 하에 두 포지션 사이에 몇 가지 차이가 존재하는데, 연구비 수주와 학생교육의 의무이다. 교수는 제안서를 써서 연구비를 따와야 하고, 학생을 가르쳐야 한다. 다만 테뉴어를 받으면 정년이 보장된다. 리서치 사이언티스트에게는 그런 의무는 없으나, 정년은 보장되지 않는다. 필자는 여기에서 '하고 싶은 연구를 하면서 현재 기르고 싶은 연구 역량을 기르기에 가장 도움이 되는 곳'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인더스트리를 선택했다. 우선 연구비 수주와 학생교육의 의무가 없다는 점은 여전히 본인이 연구 프로젝트의 실무 (디자인, 개발, 실험, 논문 작성 등)에 직접 시간투자를 할 여력이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박사과정과 포닥을 거치면서 훌륭한 분들께 지도를 받아왔으나, 보조바퀴가 달린 두발자전거를 타고 달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보호해주지 않는 환경에서 스스로 좀 더 연구를 해보고 싶었다. 대학에서 지도학생의 손을 빌려 연구를 진행하는 것도 의미있지만, 일단은 필자 본인의 손을 좀 더 더럽히고 싶었다. 심지어 현재 필자가 속한 곳에서는 리서치 인턴으로 석/박사과정 학생들을 채용할 수 있기 때문에 학생을 멘토링하는 경험도 할 수 있다.
필자가 본 인더스트리 리서치의 또 다른 강점은 공동연구의 용이함이다.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연구는 대부분 지도교수의 디렉팅 아래 학생들의 손으로 이루어지며, 이러한 구조로 인해 필자는 대학에 있으면서 생각보다 학제간 연구가 쉽게 성사되지 않는다는 점을 느꼈다. 예를 들어 HCI 연구 프로젝트의 진행을 위해 머신 러닝 전문가가 필요하다면 (1) 머신러닝 전문가인 지도교수를 찾아 멤버로 초청한다 -> (2) 그 교수는 본인이 직접 머신러닝 파트를 코딩해줄 시간과 여력이 없으므로 본인의 지도학생을 추가 멤버로 데려온다 -> (3) 커뮤니케이션 비용이 증가한다. 하지만 리서쳐들만 모여있는 수평적인 조직이라면 문제는 매우 간단하다. 그냥 내가 필요로 하는 경험과 역량을 가진 분에게 찾아가 프로젝트에 초청해서 같이 일하면 된다. 필자는 이러한 수평성이 최근 AI 분야에서 인더스트리 리서치 조직들의 탑티어 논문 등재량을 폭발적으로 증대시키는 데에 한 몫 하였다고 생각한다.
위에서는 필자가 본인의 커리어 패스에서 했던 중요한 선택들에 대해 설명하였다. 이 장에서는 필자의 포지션인 AI 연구소의 HCI 연구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보고자 한다.
현재 사용되는 수많은 디지털 서비스에는 전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AI 기술이 탑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근 수 년간 한국 빅테크 기업들이 AI 연구소를 설립한 배경이기도 하다. 최근 수 년 간은 고성능의 AI 모델을 연구로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큰 이익이 되었고, 시장을 선점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AI 모델의 서비스 적용을 위해서는 정확도 100%의 모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불완전한 모델을 활용해서 최적의 사용자 경험을 이끌어내는 디자인이 필요하다. 모델이 에러를 내지 않는 방향으로 사용자 인터랙션을 nudging한다든지, 모델이 에러를 내더라도 사용자가 큰 불편함 없이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recovery interaction을 지원한다든지,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HCI 연구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의 조직에서는 HCI 연구 조직을 키워나가려고 하고 있다.
한국에서 교수직은 구조적으로 그 수가 매우 한정될 수밖에 없다. 미국 대학의 경우 학교 정원을 학교의 예산만 충분하다면 마음대로 늘릴 수 있고, 이에 따라 교원의 수도 마음대로 확충이 가능하다. 하지만 한국은 수도권이 남한의 반을 차지하는 기형적인 구조로, 수도권 소재 대학들은 수도권 과밀 억제 정책으로 인해 정원을 늘리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교원 확충도 상대적으로 소극적이게 된다. 매년 한국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는 HCI 연구자는 적어도 수십 명 이상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졸업 후에도 본인이 하고 싶은 연구를 계속 할 수 있는 환경이 이들 모두에게 주어지지는 않는다. 신규교원 채용 TO도 부족할 뿐더러 한국 산업계에 HCI 리서치 포지션 또한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국 산업계에 더 많은 HCI 리서치 포지션이 생겨나 잠재성을 가진 연구자들을 더 많이 품을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