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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요한 Jun 19. 2022

보약보다 라면이 더 좋은 이유

청년의 선물, '죽비'

  코로나19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서재는 단연 내가 가장 오랫동안 머무는 공간이다. 자연스레 이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케케묵은 잡동사니와 빛바랜 책이며 서류들이 서재를 점령하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미련으로 기생했던 것들과 결별을 단행했다. 정리와 비움은 새로운 발견과 채움을 위한 여유를 선물해준다. 

  서재를 정리하고 나니 새삼 눈에 들어온 물건 하나가 있었다. 죽비(竹篦)였다. 승려가 손으로 쳐서 소리를 내거나 직접 수도승의 어깨를 때려서 정신을 차리도록 하는 두 개의 대쪽을 맞추어 만든 불구(佛具)이다. “이게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내가 사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누구에게 선물 받았었나?” 먼지를 닦으면서 기억을 소환한다. 매끄러운 죽비에 미소가 흐른다.


  금방이라도 “형님! 안녕하세요?”하고 웃으면서 내 앞에 달려올 것만 같은 이제는 어엿한 초등학교 선생님인 세연이다. 처음 만났을 때 세연이는 대학생이었다. 호칭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망설이는 여학생에게 편하게 ‘형’이라 부르라고 했다. 대학 시절에 활동한 한 동아리에서 남자에 대한 호칭은 ‘형’, 여자에 대한 호칭은 ‘언니’라고 통칭해서 불렀던 기억이 났었다. 

  10년 전 어느 주말 특강으로 인연이 맺어진 청년이었다. 모 교수님의 개인 사정으로 대타로 강단에 섰던 특강이 청년들과 함께 하는 정기모임으로 이어질 줄 몰랐다. 사회적 관계망이 많지 않았던 20대 청년들이었다. 선배의 첫사랑, 첫직장, ≪데미안≫의 알이 깨지는 성장 스토리도 흥미로웠겠지만, 밥 사는 선배와의 만남 그 자체가 좋았을 것이다. 어느새 단골식당, 단골카페도 생겼지만, 자주 찾아오는 청년들도 늘었다. 세연이는 모임의 단골손님이었다. 입학, 시험, 졸업, 취업 등 사회적 통념의 시간표에 떠밀려 가는 20대 청년이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세연이는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인생의 본질적인 질문부터 고민이 많았었다. 


  세연이는 집에도 몇 번 온 터라 아내의 기억도 생생하다. 봄에는 작은 화분을 선물로 들고 오기도 했다. 꽃은 이후로 몇 년을 보았다. 그런데 어느 날은 죽비를 가지고 왔다. “형님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죽비를 맞은 것처럼, 문득 깨닫게 되는 게 있어요.” 하며 호호 웃었다. 생각지도 못한 죽비를 받아들고서 머쓱하며 나도 웃었다. 그날은 함께 식사도 했던 모양이다. 주방에서 말을 잇는다. “형님 이야기를 듣고 나면, 마치 보약을 마신 것처럼 힘이 나요.”  연이은 청년의 칭찬으로 어깨가 으쓱해질 순간이다. 바로 그때 죽비로 어깨를 내려치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저는 형님이 저와 라면도 끓여 먹고 군것질도 함께 하면 좋겠어요.” 아! 그 순간 내가 늘 좋은 것을 가르치려고만 했구나. 선생님으로만 다가갔던 지난 시간을 입에는 쓰나 몸에는 좋은 보약으로 치켜세워주었지만, 세연이에게는 설익은 밥이었으리라. 절망을 마주하는 사람에게는 그럴듯한 교훈보다 “네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구나.” 하는 공감이 먼저 절실할 것이다. 나는 우산을 빌려주는 사람은 되었지만, 우산이 없을 때 함께 비를 맞고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날 ‘청년의 죽비’는 오히려 내게 ‘따끔한 가르침’이 되었다.


  수년이 흐른 뒤  ‘청년의 죽비’는 아름다운 추억을 소환해주었고, 다시 한번 삶의 방식과 ‘관계’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주었다. ‘사람은 만남으로 자란다. 만남은 곧 기적이다!’ 청년들과 함께 시작한 모임의 슬로건이다. 청년들과 함께 나 자신도 성장했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었다. 갈라진 대나무 두 쪽이 부딪혀서 내는 소리가 정신을 깨우듯이,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만남이 곧 ‘보약’이고 ‘라면’이었으며, ‘죽비’였다. 서재에 있는 죽비를 바라보며 내 삶에 작은 기적을 선물한 만남들을 다시 생각한다. 소중한 만남이 더 기다려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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