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부터 오늘까지 십오 년이 흘렀다.
서수남 하청일같이 사이좋게 쏘다녔다.
이제 나는 정말 더 찾지 않는다.
어떤 해는 정신을 한 번도 못 보고 지나가도 정신을 모르던 시답잖은 날들에 비하면 아름답다. 』
방송인 홍진경 님이 쓴 『정신에게』의 일부이다. 방송에서 본 유쾌한 이미지와 상반되는 담백하면서도 농도 짙은 글이다. 이 글을 보고 홍진경 님을 더 알아가고 싶어 졌고 정신이란 이름을 가진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에게도 이런 글을 써주고 싶은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필사하면서 떠오른 사람은 혜원이었다.
그녀에게는 한 자 한 자 글을 정성스럽게 접어 예쁜 상자에 넣어 선물하고 싶다. 원래는 생일선물로 준비한 글이지만 생일이 며칠 더 지난 지금에도 전하지 못했다. 혜원이를 떠올리면 늦가을 벌겋게 익은 홍시처럼 마음이 물러진다. 도무지 시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홍진경 님의 글을 빌려 시작해야겠다. 그렇다고 우리가 눈물겹고 짠한 서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피도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지만 이토록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알게 해 준 그녀였다.
1학년 8반 대각선 앞자리 앉은 그녀는 14년이 흐른 지금도 내 옆자리에서 웃고 있다. 단지 시간이 쌓였다는 이유만으로 혜원이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혜원이에게는 언제나 달짝지근한 효소 냄새가 났다. 비염이 있었던 그녀는 투명한 생수병에 효소를 타서 매일 약처럼 마셨다. 그래서일까 달콤한 꽃향기에 나비가 날아들듯이 자연스럽게 나도 그녀와 친해졌다. 그 달큼한 내음이 싫진 않았지만 혜원이가 입만 벌리면 괜히 한번 찡그리면서 “너 또 효소 먹었냐-_-^?”라며 쏘아댔다. 이게 그냥 우리만의 장난이었다.
쉬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내 자리로 찾아오는 그녀가 좋았다. 혜원이가 나에게 온다는 것은 3미터 밖에서도 알 수 있었다. 달짝지근한 향기가 점점 가까이 오면 옆을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아 내고 괜히 교과서에 시선을 꽂아둔다. 그러면 그녀는 엉덩이를 들이밀고 내 의자를 3분의 2나 차지하고는 씨익 웃는다. 그러면 한숨을 쉬고 마지못해 놀아주는 척 책을 덮으며 그녀와 신나게 이야기를 나눈다. 같은 이야기여도 왜 그녀가 하면 웃길까. 서로를 반달눈이 되어 바라보며 배 아프게 웃었다. 나를 연신 때리며 웃는 그녀이지만 그녀의 작고 가녀린 손은 하나도 맵지가 않다. 이게 내가 혜원이를 생각하면 짠한 이유일 수도 있겠다.
올해는 그녀가 짝을 만나 결혼을 한다. 흙 묻은 삽처럼 우직하고 어쩐지 모르게 강아지똥처럼 귀여운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해하는 혜원이를 보면 나도 그 행복에 행복을 더해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섭섭한 마음이 들어 괜히 둘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고 싶다. 둘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는데 나도 모르게 얄미운 생각이 났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면 움직인 친구들은 벌칙으로 술래의 새끼손가락에 하나하나 끼워진다. 술래에게 걸린 친구의 손을 딱! 끊고 도망치는 아이처럼 서른이 된 어른이도 그러고 싶어졌다. 왜 심술이 나는 걸까 어차피 나도 혜원이랑 결혼할 것은 아닌데 말이다.
‘아마도 이젠 쉬는 시간이 돼도 내 자리로 오지 않겠구나.’라는 아쉬움 때문이겠지. 아쉬운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아쉬운 마음보다는 혜원이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크다. 혜원이가 내 옆에 있어준 것처럼 나도 그녀의 옆에 있을 거다. 혜원이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혜원이가 효소가 아니라 취두부를 먹고 내게 웃어주어도 이제는 찌푸리지 않고 이야기를 들어줄 거다.
혜원이가 내 의자를 3분의 2나 차지해도 난 반쪽 엉덩이로 앉으면 된다. 같이 앉는 게 더 소중하다.
혜원을 모르던 시답잖은 날들에 비하면 아름답다.
혜원 생일을 축하해
2023 1 16 윤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