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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홍 Oct 26. 2021

파 한 단

어머님의 인생 같은...

어머님 텃밭에서 가져 온 파 한 단 : 사진  by연홍
힘 없이 꺾인 파 한 단과 함께
시골 어머님께서 올라오셨다. 올해 여든다섯 되셨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백년가약(百年佳約)을 맺었던 남편(아버님)은 3년 전 속절없이 하늘나라로 떠났다.


아버님 살아 계실 때 명절을 맞아 시골집에 가보면

한창 때는 '에헴' 기침 한 번만으로도 온 가족을 긴장케 했다던 아버님께서

가부장의 무게를 내려놓으시고, 아낙네처럼 퍼질러 앉아 자상하게 마늘도 까주셨다.

뒤뜰에 장작도 가득 패 놓아 쟁여 놓으시고,

숯불을 피워 생선을 굽도록 준비도 해주시며

살뜰하게 집안일을 살피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그러나 읍내 작은 두부 공장집 귀한 딸이었던 어머님은 평소엔 그리 얌전하시던 분이

아버님과 엮이기만 하면 뭔가 심사가 틀어졌는지 혼자 중얼중얼 불평하시면서

투닥투닥 말싸움을 걸고, 서로 큰 소리 내다가는 또 서로 토라지기도 자주 하셨다.

언뜻 보면 꼭 투견 닭 두 마리 같았지만
내 눈에는 신혼부부 사랑싸움처럼 보였다.


젊은 시절 어머님이라고 꿈이 왜 없으셨으랴.
여성에게 배움을 허락하지 않았던 유교문화로 인해 초등학교 1학년 겨우 글을 깨우칠만하니
"더 이상 여자는 배우면 안 된다."
라는 친정아버지의 엄명에 따라 제대로 글도 못 깨우친 한이 처음 가슴팍에 쌓였다.


가난하지만 허우대가 멀쩡한 총각(아버님)이 결혼 후엔 서울 가서 산다니...

중매쟁이 말만 철석같이 믿고 결혼을 했다.

그런데 서울 간다던 남편은 아예 시골에 터를 잡고

시부모와 시동생들 틈바구니 속에 밀어 넣고는 큰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7남매를 낳아 키워야 했다.


시부모님 일찍 돌아가시고, 시동생들도 다 분가하고,  7남매도 장성하여 뿔뿔이 흩어져

두 분이서만 단 둘이 살다 보니

옛날 옛적 쌓였던 불만 불평들이 이제야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3년 전, 아버님을 먼저 떠나보내실 때만 해도
"내 걱정은 할 것 없다. 잘 가셨지 뭐."
라며 장례식장에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어머님이셨다.


그런데 아버님 가신 지 1년도 안 되어

그렇게 정정하시던 어머님께서 갑자기 기력을 잃고 못 쓰게 되셨다.


어르신들 하는 말로 '천생연분'에서 '평생 원수'가 되어 서로 투닥투닥 싸우시긴 했어도

서로에게 의지하던 그 힘과 기운이 알고 보면 '사는 재미' 아니셨으랴. 


이번에 서울 병원에서 지어먹던 약이 떨어져 낭군이 모셔왔는데

몇 달 안 본 사이에 걸음조차 제대로 걷기 힘들어하셔서 놀랐다.

다행히 총기는 여전하셨다.

"힘이 없어서 거름을 안 주었더니 파가 힘이 하나도 없다.

그래도 흙 화분에다 심으면 겨울 내내 먹을 수 있을게다, "

사진  by연홍
밑동을 잘라 씻어 놓으니 금세 퍼렇게 살아난다. : 사진  by연홍

잎이 꺾여 축축 처진 파를 그대로 흙에 묻으면 금방 갈변현상이 와서 못 먹게 되리라.

그래서 밑동만 잘라 뿌리를 흙에 묻고

푸른 잎은 깨끗이 씻어 놓았다. 물기를 먹은 잎이 금세 퍼렇게 살아난다.

금방 먹을 것은 냉장고에 나머지는 썰어서 냉동실에 보관했다.


겨울이 가까우면 늘 파 한 단을 큰 묶음으로 사서 하던 방식이다.

아파트 생존 방식...

이번에는 어머님 덕분에 좀 더 빨리 겨울 준비를 하게 됐다. 

허연 뿌리만 남은 밑동이 꼭 어머님 인생 같다 : 사진  by연홍
시퍼런 이파리들이 싹둑 잘려 스티로폼 화분에 심긴 파뿌리들을 보니
꼭 우리 어머님 같다.


시퍼런 젊음을 싹둑 잘라 층층시하 시집살이하며 가족들에게 다 나눠주고

이제 허연 머리 같은 파뿌리만 남은 것이...


비록 밑동만 남았어도 허연 뿌리는 죽지 않고 살아서

금방 시퍼런 후손 새 이파리들을 쭉쭉 길러내 화분 가득 파밭을 이룰 것이다.


어머님 고생 많으셨어요...

고맙고 고맙습니다! 

사진  by연홍

몇 달만에 본 어머님께서 걸음을 잘 걷지 못해 아들이 등에 업었다.

사진에는 크게 나왔지만 아버님 돌아가신 후 어머님 몸집이 반토막이 되셨다.


어머님과 하룻밤 같이 있어보니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자꾸 생각났다.


어린아이로 태어나 어른이 되었다가 노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노인 아기로 변하는 것 같다.

그렇게 겉모습만 늙었을 뿐이지 마음은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

저 하늘나라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물론 겨울을 준비하는 가을 나무가 단풍으로 물든 이파리들을 훨훨 벗어버리듯이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육신의 장막은 훌훌 다 벗어버린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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