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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랑 Apr 26. 2022

너와 내가 만든 세상

제주 포도 뮤지엄 전시 '너와 내가 만든 세상' 후기


워크숍 일정으로 제주에 잠시 다녀왔다.  10개월 만의 방문이었던지라 들뜰 법도 했건만, 여행이 아닌 비즈니스로 산뜻한  바람을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운이 주욱 빠진  짧은 비행을 했다. 제주와 김포를 오가는 이동 간격이 점점 좁아져서 그런 건진 몰라도 하늘을 나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홀로 유유히 비즈니스석에 탑승해  표정을 읽지 못한 이사님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팀원들도 다들 비슷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예보에 있던 비라도 줄기차게 내렸으면 오히려  실망스러웠을 터인데 하필 날씨도 끝내주게 완벽해버렸다.


이런 울적한 마음을 다음 달엔 기필코  달째 밀린 휴가를 사용하여 D 제주 5 날씨를 만끽하면 되는 것이라고 애써 달래고 있었기에, 협력사 담당 직원의 몸살감기로 오후 미팅 하나가 취소되었을  겉으로 수십 가지 종류의 걱정의 말을 내비친 것은 단연코 온전한 진심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남의 아픔에 찰나라도 쾌재를 부른 것은 역시나 화로 돌아오게 되는 것인지, 얼른 숙소 침대로 직행할 계획에 누구보다도 빠르게 이동한 행위는 며칠 전부터 회사 별장에서 휴가를 즐기고 계시던 사장님을 호텔 복도에서 무방비 상태로 맞닥뜨리는 길로 인도했다. 그는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하시는 펄떡대는 신입을 세워두고 근처 포도 뮤지엄에  들렀다 오지 않겠느냐고 호탕하게 밀어붙여주셨다.  모르겠다고 대답하면 당신이 직접 가셔서 도슨트까지   심산이신  같아 당장 다녀오겠다고 줄행랑을 쳤다. 물론 금방 잊어버리실  뻔했지만, 혹시라도 다음  프로젝트 보고하는 날에 불현듯 기억하시고 전시 어땠느냐고 물어보시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반강제적으로 '너와 내가 만든 세상' 전시를 보고 오게  것이었다. 햇병아리 졸병은 장군님 말을 거역할  없는 것이니까.




전체 테마를 '혐오'로 잡고 한/중/일 작가들의 여러 작품들을 엮어 새로운 시각적 해석을 제시한다는 명목의 전시였는데, 여러 명이 애를 써서 만든 것 같긴 했으나 사실 그 노력 여하와 관계없이 참으로 형편없는 전시였다. 보도 자료를 확인해보면 관광객도 꽤나 많이 찾았고, 워낙 유명한 작가들 작품을 모아 시의 적절한 주제를 풀어냈다 보니 연이은 호평도 받았던 것 같지만 적어도 내게는 깊이 없이 그저 자본의 힘으로 쳐 바른 것 같다는 생각만 들게했다. 워낙 각 분야의 '저명한 전문가'들이 참여한 전시에 감히 제도권 아래 학사 학위 덜렁 들고 있는 사람이 반기를 들어봤자일 것이므로 딱히 기획자들의 변명을 듣고 싶은 것도 아니니 아무런 숙안 없는 사람이 지껄이는 非전문적인 감상일 뿐이라는 것부터 적는다. 어차피 한 달 뒤에 전시도 마무리된다고 하여 관람객을 줄이고자 하는 마음도 딱히 없다. 애초에 그럴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지지 않았으므로 타격도 없겠지만서도, 아무튼 간 No Offense 란 말씀이시다. 게다가 이 전시가 하등 쓸모없는 이야기만 해대고 있다고 말을 해 보았자 이런 뒤틀린 구조 속에서는 이렇게 발화하는 글쓴이만 또다시 혐오로 가득 찬 "MZ 세대" 20대 여성으로 프레임 씌워질 것이라는 게 돌아버리게 웃기는 지점이다. 물론 사장님이 여쭤보시면 재미있는 작품이 많았다고 할 것이다. '전시'가 어땠느냐고 묻는 대답에는 약간 빗나간 문장이지만, 적어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서 이리저리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것 같다.




우선, 진기종 같이 요즘 아주 핫한 작가의 작품으로 시작해서 장샤오강, 권용주, 쿠와쿠보 료타, 강애란까지 회화 설치 등에서 유명한 작가들은 죄다 긁어왔다. 그러다 보니 생기는 당연한 문제점은 하나의 맥락을 관통하기가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여러 작가를 모아 둘 수밖에 없는 대개의 전시 기획에서 으레 생기는 고민이긴 하지만, 고심해서 작품 먼저 고르는 것과 작가를 먼저 섭외해두고 그들의 작품을 짚어내서 주제에 끼워 맞추는 것은 분명 다르다. 그리고 이걸 나같이 조예가 얕디 얕은 사람도 드러내 놓고 느낄 수 있게 배치한 것은 기획 시의 방점이 대단히 그런 쪽에 기울어져 있었다고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최수진 작가의 <벌레 먹은 숲> 작품에 기존에 없던 앵무새가 난데없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이를 확신했다. 전시 테마공간에서 가짜 뉴스를 전파하는 군중을 표현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앵무새 오브제를 등장시켰는데, 그게 작가들 전시품에 왕왕 들어가 있었다.




둘째로, 전시에서 다분히 의도적으로 특정 전쟁, 일부 사건만을 언급하며 '혐오'의 역사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여성, 노인, 장애인, 그리고 성소수자, 아동, 가난 등의 거대 담론이 배제되는 것이 크게 다가왔다. 전시품이 있는 곳을 제외하고 몇 군데에 연결되어 있는 테마 공간에서는 계속 기획자들 입장에서 해석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혐오의 표현들과, 그 혐오의 표현으로 일어난 끔찍한 제노사이드에 대해 장대하게 공포심을 심는 것에 주력한다. 하지만 일단 그 전달 자체가 극심하게 자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다. 전 세계에서 혐오를 표현하는 방법이 거의 같은 수준에서 이제껏 이루어졌다는 것쯤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그다음 단계를 논하는 것보다는 폭발하는 굉음을 들려주는 방 안에 관람객을 가둬놓고 혐오로 인한 세계대전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혐오가 얼마나 군중을 맹렬한 범죄자로 변모시키는지 등을 보여주는 지극히 1차원적 전달 방식을 채택해버렸다. 그리고 기획자들이 주장하는 그러한 무지성 혐오 표현의 이미지로 거리에 나와 여성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꽤나 자주 보여 주었는데, 이는 정말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었다. 거리에 나와 '과격한' 행동을 하는 여성들이 마치 혐오를 조장해내는 폭력의 가해자임을 강조하고 있다 보니 그즈음부터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기 시작했다. 주요하게 다뤄지는 혐오 표현 중 여성만 골라 죽이는 살인 사건을 보도한 신문도 등장했다. 처음엔 당연히 이것 자체가 여성 혐오 범죄라는 줄 알고 넘어갔다. 허나 다시 보니 저렇게 '여성만 죽이는'이라고 '몰아가는' 가짜 뉴스를 전파하는 군중들의 공감대에 심대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전적으로 믿어 혐오의 감정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지양하자는 취지는 알겠고, 혐오 표현의 미러링에 대한 소소한 우려를 전한 것이라면 잠시 이해하고 지나갈 수 있겠다. 만약 그 미러링을 있게 한 선제적인 혐오와 뿌리 깊은 Feminicide에 대해 설명했다면 말이다. 그렇지만 '여성을 골라 죽이는'이라는 '혐오 표현'(?) 이 젠더 갈등을 일으키는 주범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이후의 전시 기획에 신뢰를 가지려야 가질 수가 없었다.




절대적인 적대가 제거된 시대에 등장한 타자화의 감정과 같은 혐오 시대의 정치적 배경이나, 고용의 불안정성과 양극화를 심화시킨 신자유주의라는 경제적 배경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고 이를 표하는 인지적 관점, 사회적 관점에 대한 시사점을 꿰뚫는 것도 전혀 아니었다. 원자화된 개인의 심리적 소외와 불안을 소개하거나, 혐오의 정동에 대한 적극적인 주체화의 열정이라든가 복고적 반동주의 등에 대한 정황적 성찰도 아니었다. 그저 군중 단위의 혐오의 표현들이 얼마나 기존의 질서를 뒤흔들어 개인과 사회를 망가뜨리고 있는지 주창하고 있었다. 혐오에 혐오 표현으로 대응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 여전히 수많은 담의가 필요하다는 것에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혐오적 반응과 혐오가 매한가지라는 주장이 논리적으로는 맞을  있어도, 미러링이 대두되어야만 기존의 혐오가 조금이라도 가시화되는 이러한 시대 상황에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고 투쟁하는 사람들 모두를 무턱대고 뭉뚱그려 극한의 혐오 종자로 비난할  있을지는 의문이다. 해당 기획 전시에서 당초 '혐오'라는 표현에 대한 숙고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장애인이 비장애인에게 혐오의 표현을 쓴다고 해서 그것이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혐오하는 개념과 절대로 같아질  없다는 것을 짚고 갔어야 한다.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의 유구한 혐오와 차별에 대한 저항을 비장애인에 대한 장애인의 혐오라고 칭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임을 나름대로 혐오에 대한 전시를 기획하는 사람들한테조차도 설명해야 하는 환경에 살고 있다니 어처구니없다. 또한, 동일한 가닥에서 여성이 남성혐오의 주체가 되는 것이 불가하다는  정도는 정리했어야 한다. 혐오란 소수자를 향한 타자화, 분노이며 오직 강자가   있는 언어다. 약자는 강자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위치가 동등해질 순간을 위해 분노하고 몸부림친다. 무조건적이고 폭력적인 혐오의 행태와 그에 대한 저항과 투쟁을 동일시하고 그러한 과정에서 파생되는 모든 표현을 반사회적, 반윤리적으로 몰아가는 전시 자체가 각종 소수자 권리 투쟁의 성격을 무력화하는 새로운 형태의 프로파간다라고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혐오가 무엇인지, 우리는  혐오의 시대에 살아가게 되었는지  흐름에 대한  어떠한 정의도 내리지 않은  오로지 지극히 주관적으로 '듣기에 거북한' 표현들을 전부 혐오 표현이라 규정한  마치 그것이 객관적인 잣대로 설정된  마냥 본인들이 대단한 논의를 형성하여 사회에 날카로운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고 구는 꼴이 우스웠다.




마지막으로  기획에서 사용한 예술의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리며 신과 황제의 권력을 추앙하게 하던 예술은 이미    전에 지나고 이제 우리는 기존의 왜곡된 권력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며 사회에 반동을 일으키고 패러다임을 부수는 현대 예술이라는 시공간에  있다. 그런 예술을 하는 훌륭한 작가들을 데려다놓고   있는   정도라면 꽤나 한심스럽다. 흔히 기득권의 견고함을 다지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본질에서 한참 벗어난 '서로를 혐오하는 것을 멈추세요'  강화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마치 대규모 학살과 테러, 전쟁과 같은 모든 것이 혐오의 정동에 선동된 군중의 탓인 것처럼 현대인에게 경각심을 감히 '일깨우고' 있었으며 여성혐오, 장애인혐오에 대항하는 사람들을 혐오 시대의 대단한 원인 제공자로 몰아가고, 홀로코스트, 제주 4.3 사건 등에 새겨진 개개인의 삶의 고통을 명확한 2 가해의 형식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전시를 보면서 내내 D 졸업 작품이 생각났다. 그는 모두가 으스러지는 재난 상황을 구태여 폭력적으로 표현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평소 따뜻한 봄꿈을 스케치할  사용하던 색감을 흉사의 정면에 칠해버렸다. 아주 특별한 작품이었다. 선로에 대한 몰이해 상태에서는 환상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재앙의 눈에서 외면에 대한 처량한 반성, 소외에 대한 섬찟한 불안 그리고 아름다움을 감지하는 오류가 한꺼번에 몰려와야 한다. 혐오 한가운데에 밟혀 사멸하는 이들에게 보내야  것은 올곧게 뻗는 동정만이 절대 아니어야 한다. 언제나 D 해내듯, 예술에겐 분명히 그러한 왜곡을   주먹 비틀어낼  있는 맥이 있기 때문이다.




2022년 대한민국에서는 이미 지난 몇 년 간 한 차례 젠더 갈등이라는 이름으로 요란하게 끼워맞춘 여성 혐오의 역사를 지나며 새롭게 시도되는 장애인 혐오의 세태가 존재한다. 따라서 이 전시가 몇 개월이라도 늦게 기획되었더라면 요즈음의 장애인 이동권 시위 사진을 버젓이 이딴 전시의 기획 1페이지로 선전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 분노가 일었다. 이 전시에서는 모든 사건과 예술 작품을 신파적인 카타르시스로 오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리한 발상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아무 이유 없이 서프레제트가 존재하지 않았듯, 당연히 비장애인이 - 당연히 무결하지 못한 나 자신을 포함하여 -  내뱉어대는 지극히 일상적인 혐오보다 필사적으로 이동권 하나를 외치는 장애인들이 혐오를 조장하는 사람들일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이 기획자들이 사는 세상엔 마치 여성 혐오 범죄가 없는 것처럼, 장애인 혐오와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No Kids Zone 따위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꼴 자체가 이들이 주장하는 그 대단하신 "Perverse Empathy" 같아 보인다. 기획자들이 이 전시를 통해 지양하고자 하는 혐오와, 그 혐오를 줄이는 방법은 무엇이라는 것인지 황당무계하다. 물론 역사에 혐오로 인해 파생된 비극적인 사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본인들도 무엇을 혐오로 불러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정도로 이를 분류하고 정의내리는 방법이 명민함과 거리가 멀다. 이들만의 세계관 속에서 명명되는 혐오 표현의 해악성에 대해 관람객들로 하여금 돌아보게 하려는 것 같은데 이것은 마치 결국은 피해자까지 더 조롱 받게 된 학교 폭력 현장의 '멈춰!' 라는 슬로건을 뒤흔들어대는 턱없는 대처와 같다. 본질과 구조적 시스템에 대한 세심한 진찰 없이 외국의 사례를 끌고 와 대한민국 학생들에게 '폭력 멈춰!' 라는 말을 하게 하는 것과 이곳의 '혐오 멈춰!' 와 다를 바가 무엇인지.




"혐오의 굴레를 극복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노력한 결과 제주도는 희생자들의 땅이 아니라 상생의 미래를 위한 화해와 평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라고까지 당당하게 소개글에 써 놓은 것만 봐도 이 사람들은 혐오에 대해 심히도 안일하게 표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주를 평생토록 희생자들의 땅으로 만들자는 것이 절대 아니다. '혐오의 표현'에서 '벗어나려고' 제주도가 '노력'했기 때문에, '상생을 위한 상징'이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혐오의 역사 속으로 관객들을 안내할 의도였으면 그 궤적부터 제대로 나타낼 것이지 무작정 '혐오'로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을 기리며 상생을 위해 분투하자고 하며 폭력에 희생된 사람들의 사진을 극적으로 잔뜩 전시해두다니,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전세계 각종 언어로 표현된 혐오의 표현이 이렇게나 많으니, 우리들은 참으로 혐오 표현을 많이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하면, SO WHAT. 우리 모두가 잘못했으니 혐오를 개인 차원에서 줄이면 이 구조적 혐오가 해결된다는 것인지, 여성운동이나 이동권 시위를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검열을 통해 '덜 과격한' 방식으로 평화를 이룩해나가자고 타이르는 것인지, 우리가 그런 무시무시한 '가해자'들이 범하는 혐오의 움직임에 휘말리고 있다는 것인지. 제목까지 '너와 내가 만든 세상'인 것까지 완벽한 전시였다. 너와 내가 만드는, 혐오가 없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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