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적 그리고 사랑이야기> 1989년
적 그리고 사랑 이야기(Enemies: A Love Story)는 미국에서 제작된 폴 마줄스키 감독의 1989년 드라마 영화이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의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안젤리카 휴스턴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폴 마주르스키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그는 여전히 졸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야드비가!”
야드비가가 문간에 나타났다. 그녀는 폴란드 여자였다. 장밋빛 뺨, 들창코, 연한 빛깔의 눈동자, 머리칼은 아마(亞麻)처럼 밝은 색이었는데, 뒤로 넘겨 둥글게 말아 괸 하나로 고정시켰다. 광대뼈가 볼록했고 아랫입술이 도톰했다. 한쪽 손에는 대걸레를 들고 다른 손에는 작은 물통을 들고 있었다. 옷은 이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디자인의 빨간색과 초록색 사각 무늬가 찍힌 드레스였고, 발에는 낡은 실내용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야드비가는 전쟁이 끝난 후 1년 동안 헤르만과 함께 독일의 수용소에 있었는데, 이젠 벌써 3년째 미국에 살고 있는데도 여전히 폴란드 시골 처녀의 싱그럽고 수줍음 많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는 화장도 전혀 하지 않았다. 영어는 몇 마디만 겨우 배웠을 뿐이다. 오죽했으면 헤르만이 그녀에게서 아직도 립스크의 여러 가지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까. 침대에 누워 있을 때 그녀는 캐모마일의 향기를 풍겼다. 지금 부엌에서는 빨간 무가 익어 가는 냄새, 햇감자 냄새, 딜 냄새, 그 밖에도 여름과 흙을 연상시키는 냄새, 그리고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립스크에서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P12-13)
헤르만은 유대인 대학살로 온 가족을 잃었다. 그나마 헤르만이라도 살아남은 것은 야드비가가 고향 마을 립스크의 건초 다락에 그를 숨겨 준 덕분이었다. 그녀의 어머니조차 그가 숨어 있는 곳을 알지 못했다. 1945년 해방이 된 후 헤르만은 한 목격자를 통하여 자신의 자식들이 끌려가 죽임을 당한 뒤 아내 타마라마저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헤르만은 야드비가와 함께 독일로 갔다가 난민 수용소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후 미국 비자를 얻고 세속 결혼식을 통해 그녀와 결혼했다. 당시 야드비가는 기꺼이 유대교로 개종하려 했지만 헤르만은 자신조차 더 이상 따르지 않는 종교를 그녀에게 짐 지우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여겼다. (P14)
누군가 두고 간 이디시어 신문이 좌석에 놓여 있었다. 헤르만은 신문을 집어 들고 헤드라인을 훑어보았다. 한 인터뷰에서 스탈린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공존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중국에서는 인민군과 장제스 군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신문의 안쪽 지면에서는 난민들이 마다네크, 트레블링카, 아우슈비츠 등 수용소의 참상을 고발한 기사가 있었다. 북부 러시아의 강제 노동 수용소를 탈출한 목격자의 증언도 있었다. 그곳에는 랍비,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사제, 시온주의자, 트로츠키파 등등이 수용되어 금을 캐면서 굶주림과 각기병(脚氣病)으로 죽어 간다는 것이었다. 헤르만은 자기가 이 같은 참사에 웬만큼 단련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렇게 새로운 잔혹 행위를 대할 때마다 번번이 충격을 받곤 했다. 이 기사는 언젠가 반드시 평등과 정의에 바탕을 둔 체제가 확립되어 세상의 질병을 치유할 것이라는 희망적인 말로 끝을 맺었다.
<그래? 아직도 세상을 치유하겠다고 열심이란 말이지?> 헤르만은 신문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더 나은 세상>이니 <더 밝은 내일>이니 하는 말들이 그에게는 고통받으며 죽어간 이들의 유해를 모독하는 일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희생자들의 죽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는 식의 상투적 표현을 들을 때마다 분노가 솟구쳤다. <그렇다고 내가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나 역시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데.>
헤르만은 서류 가방에서 원고를 꺼내 읽으며 메모를 했다. 그가 생계를 꾸려 가는 방법도 지금까지 그가 겪어 온 다른 일들에 못지않게 괴상망측한 것이었다. 그는 한 랍비의 대필작가가 되었다. 그래서 그 역시 사람들에게 에덴동산 같은 <더 나은 세상>을 약속하고 있었다.
헤르만은 원고를 읽으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데라가 우상을 팔았듯이 랍비는 하느님을 팔아먹고 있었다. 헤르만이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뿐이었다. 랍비의 설교를 듣거나 그의 수필을 읽는 사람들도 대부분은 완벽하게 정직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현대 유대교의 목표는 딱 하나였고, 그것은 바로 이교도들을 흉내 내는 일이었다. (P31-32)
전쟁 당시는 물론이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헤르만은 가족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후회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근본적인 생각까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자기 자신도 인류 전체도 신뢰하지 못하는 그는 자살 직전의 우울한 기분으로 살아가는 숙명론적 쾌락주의자였다. 종교는 거짓말만 늘어놓는다. 철학은 처음부터 무력한 것이었다. 진보라는 이름의 헛된 약속은 모든 시대의 희생자들을 모독하고 그들의 얼굴에 침을 뱉는 짓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라는 것이 정녕 인식의 한 형태, 또는 이성의 한 범주에 불과하다면 과거도 오늘 못지 않은 현재일 것이다. 그러므로 카인은 계속 아벨을 살해하고 있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아직도 제데키아의 아들들을 죽이고 제데키아의 두 눈을 뽑는다. 케셰니에프의 학살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아우슈비츠에서는 유대인들이 영원히 불타고 있다. 스스로 삶을 끝맺을 용기도 없는 자들이 이런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자신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기억을 질식시키고 마지막 한 가닥 희망마저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P47-48)
“아무것도 안 타요, 엄마, 아무것도 안 탄다고요. 우리 엄마는 참 이상한 버릇이 있어요. 엄마가 해놓고도 뭐든지 내 탓을 하는 거예요. 요리만 했다 하면 다 태워 버리면서 내가 뭘 좀 만들어 보려고 하면 금방 탄내가 난다고 하시거든요. 우유를 엎질러 줄줄 흐르게 해놓고 오히려 나한테 조심하라고 핀잔이죠. 이건 틀림없이 히틀러 때문에 생긴 병이에요. 우리 수용소에 남들을 밀고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잔 자기가 한 짓도 모조리 남이 했다고 일러바쳤죠. 병적인 행동이었지만 우스꽝스럽기도 했어요. 미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정신병자도 괜히 미친 척할 뿐이죠.”
그러자 시프라 푸아가 툴툴거렸다. “다들 제정신인데 네 어미만 미쳤다는 소리구나.”
“그런 뜻이 아니에요. 엄마,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우기지 마세요. 앉으세요. 헤르만, 어서 앉아요. 헤르만이 작은 우표 상자를 갖다 줬어요. 이젠 편지를 쓸 수밖에 없겠네요. 오늘은 당신 방을 청소해 두려고 했는데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결국 못 했어요. 전에도 말했지만 하숙생이면 하숙생답게 굴어야죠. 방을 깨끗하게 치워 달라고 요구하지 않으면 먼지 구덩이 속에서 살게 되는 거예요. 너무 오랫동안 나치들한테 이것저것 강요당하며 살다 보니 이젠 아무것도 자발적으로 할 수 없게 되어 버렸어요. 무슨 일을 하려면 독일군이 총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야 되는 거죠. 이 미국 땅에 와서 난 오히려 노예 제도가 별로 비극적인 게 아니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무슨 일이든 얼른 해치우기 위해서는 그저 매가 제일이거든요.” (P52-53)
마샤는 식사 중에도 담배를 피웠다. 음식을 한 입 먹고 담배 한 모금을 빠는 것을 번갈아 가며 하고 있었다. 그녀는 요리마다 조금씩 맛만 보고 접시를 밀어 버렸다. 그러나 헤르만에게는 계속 음식을 건네주면서 많이 먹으라고 권했다. “여기가 립스크의 그 건초 다락이고 당신의 시골뜨기가 돼지고기 한 짐을 갖다 줬다고 상상해 봐요.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는지 어떻게 알아요? 그런 일이 또 일어날 수도 있어요. 유대인 학살은 자연 현상이니까, 유대인들은 학살당해야 한다, 그게 하느님의 뜻이라고요.”
“얘, 너 때문에 가슴이 미어진다.”
“그래도 사실인걸요, 아빠는 뭐든지 하느님께서 주신 거라고 하셨어요. 엄마도 그러시잖아요. 하지만 하느님은 유럽에서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하는 걸 그냥 내버려 두셨는데 미국에선 유대인들이 몰살당하지 않도록 막아 주실 거라고 믿을 이유가 있을까요? 하느님은 관심도 없어요. 하느님은 그런 분이라고요. 내 말이 맞죠, 헤르만?”
“그걸 누가 알겠어?”
“당신은 모든 질문에 똑같은 대답을 하는군요. <그걸 누가 알겠어?> 누군가는 알고 있겠죠! 하느님이 정말 전지전능하다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민족을 지켜 주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냥 천국에 앉아서 침묵만 지키고 계시는 건 우리한테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다는 뜻이라고요.” (P56-57)
이윽고 시푸라 푸아가 돌아왔다. “자, 과일 절임 가져왔다. 잠깐, 좀 식혀야 돼. 내 딸이 나에 대해 또 뭐라고 했지? 뭐라고 그래? 얘가 하는 말을 누가 들으면 내가 철천의 원수인 줄 알 거야.”
“엄마, 그 속담 아시잖아요. <친구들로부터 나를 지키는 일은 하느님께 맡기고 나는 원수들로부터 나 자신을 지켜야 한다.>”
“네가 원수들로부터 너 자신을 어떻게 지키는지는 나도 다 봤다. 그래, 놈들이 내 가족과 내 민족을 학살했는데 내가 아직도 살아 있는 걸 보면 네가 옳았던 거겠지. 마샤, 이건 다 네 책임이야. 너만 아니었다면 난 지금쯤 지하에서 편히 쉬고 있을 테니까.” (P60)
마샤가 레온 토르치네르와 헤어진 것도, 그리고 이교도 여자의 남편인 헤르만 브로데르와 불륜 관계를 갖고 있는 것도 시프라 푸아에게는 1939년부터 시작되었던 참사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그때 이후로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시프라 푸아는 헤르만을 <우리 헤르만>이라고 부르며 허물없이 대했다. 유대교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매일 하느님께 기도를 드릴 때마다 레온 토르치네르가 마샤와 이혼해 주기를, 그리고 헤르만이 이교도 아내와 결별하기를, 그리하여 시프라 푸아 자신이 죽기 전에 딸을 데리고 결혼식장에 입장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런 날이 오기는 힘들 것 같았다. 시프라 푸아는 그것을 자기 탓으로 돌렸다. 그녀 자신이 부모에게 반항했기 때문이고, 메이에르를 푸대접했기 때문이고, 마샤가 한창 자랄 나이에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서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 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저지른 잘못 중에서도 가장 큰 잘못은 죄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죽었는데도 자기만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P64-65)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녀 역시 아무도 만나러 나가지 않았다. 마샤는 난민 친구들도 멀리하고 있었다. 첫째는 그들과 친하게 지내는 레온 토르치네르를 피하기 위해서였고, 둘째는 헤르만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코니아일랜드에서 헤르만을 본 적이 있는 사람과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니까.
두 사람은 식물원에 들러 온실의 인공적인 환경 속에서 자라는 꽃과 야자수와 선인장 등등 무수히 많은 식물들을 구경했다. 헤르만은 유대 민족도 온실 식물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대한 믿음, 미래의 정의 실현에 대한 희망, 그리고 성서의 약속 등을 자양분 삼아 낯선 환경에서도 잘 살아가기 때문이다. 성서는 유대인들에게 끊임없이 최면을 건다. (P76)
옛 철학자나 사상가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런 시대가 올 것임을 미리 내다보지 못했다. 허둥지둥하는 시대, 서둘러 일하고, 서둘러 먹고, 서둘러 말하고, 심지어는 죽는 것까지 서두른다. 어쩌면 그렇게 급히 재촉하는 것이 하느님의 한 속성인지도 모른다. 전기와 자기의 신속한 흐름, 그리고 은하계들이 우주의 중심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는 속도를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하느님은 성미가 급한 분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느님은 천사 메타트론을 다그치고, 메타트론은 천사 산달폰을 닦아세우고, 그 다음은 세라핌, 케루빔, 오파님, 에렐림의 순서로 차례차례 이어지고, 결국 분자와 원자와 전자들도 미친 듯이 바쁘게 움직인다. 시간 그 자체도 시간이 쫓기면서 무한한 공간과 끝없는 차원 속에서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P82-83)
“헤르만? 신문에서 광고를 본 건가? 자네한테 알려 줄 소식이 있네. 놀라지 말게. 나쁜 소식은 아니니까. 오히려 그 반대야. 걱정하지 말라고.”
“무슨 일입니까?”
“타마르 라헬에 대한 소식일세. 타마라 말이야, 그 애가 살아 있어.”
헤르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들었는데도 생각보다 충격이 덜한 것으로 미루어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념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이윽고 그는 이렇게 물었다. “그럼 아이들은요?”
“아이들은 죽었다네.”
헤르만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별난 운명의 장난을 경험한 그로서는 더 이상 놀랄 일도 없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타마라가 총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도 있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얼른 생각이 안 나는군요.”
“그래, 총에 맞은 건 사실일세. 그런데 안 죽은 거지, 그리고 탈출해서 어느 친절한 이교도의 집으로 간 거야. 거기서 나중에 러시아로 건너갔고.”
“지금은 어디 있습니까?”
“우리 집에.” (P86)
그때 타마라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내가 겪은 일들을 전부 다 얘기한다는 건 불가능해. 사실 나 자신도 잘 모르거든.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끔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야. 그래서 많은 일들을 완전히 잊어버렸지. 우리가 함께 살던 시절에 있었던 일까지 말이야. 카자흐스탄에서 널빤지 위에 누워 있던 날이 생각나는데, 그때 난 1939년 여름에 내가 애들을 데리고 아버지를 찾아간 이유가 뭐였는지 기억해 내려고 노력했어. 그런데 분명히 내가 한 일인데도 도대체 왜 그랬는지 생각나질 않더라고.
우린 숲속에서 톱으로 나무를 잘랐어. 날마다 열두 시간에서 열네 시간 동안 그 일을 했지. 밤에는 너무 추워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 악취가 진동해서 숨을 쉴 수도 없었고, 각기병에 걸려 고생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어. 어떤 사람이 방금 전까지 멀쩡하게 이런저런 계획들을 얘기하다가 갑자기 조용해지곤 했지. 말을 걸어 봐도 대꾸가 없고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 보면 벌써 죽어 있는 거야.
아무튼 난 그날 거기 누워 이런 생각을 했어. <내가 왜 헤르만을 따라 치프케프로 가지 않았을까?> 그런데 아무것도 생각나질 않더라고. 사람들이 그러는데 이것도 일종의 정신병이래. 내가 그런 병에 걸린 거지. 어떨 땐 모든 게 생각나고, 또 어떨 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거야. 볼셰비키 놈들은 우리한테 무신론을 교육시켰지만 난 아직도 모든 것이 미리 예정돼 있다고 믿어. 그 잔인무도한 놈들이 우리 아버지 수염을 잡아 뜯는 바람에 볼살까지 뭉텅 떨어져 나갈 때 우두커니 서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도 내 운명이었던 거야. 그 순간에 우리 아버지를 보지 못한 사람은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리가 없어. 그때는 나 자신도 몰랐지. 만약 알았다면 나도 그 자리에서 아버지를 따라갔을 거야.
우리 어머니가 그놈들의 발치에 엎드려 싹싹 빌었지만 놈들은 군홧발로 어머니를 짓밟고 침을 뱉었어. 그리고 나를 강간하려고 했지만 때마침 생리 중이었지. 그때마다 내가 피를 얼마나 많이 흘리는지 당신도 알잖아. 아, 그랬는데 나중엔 멈추더라고. 그래, 생리가 없어진 거야. 먹은 것도 없는데 어디서 피가 나오겠어? 내가 어떤 일을 당했느냐고 물었지? 바람에 날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이리저리 떠돌아다닌 모래 한 알은 자기가 지나온 곳이 어디어디였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법이야. 그런데 당신을 숨겨 줬다는 그 이교도 여자는 어떤 사람이야?”
“우리 집 하녀였던 여자여. 당신도 알잖아, 야드비가.”
“걔랑 결혼했단 말이야?” 타마라는 웃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
“미안한 얘긴데, 걔는 머리가 좀 모자라지 않아? 당신 어머님도 걔에 대한 농담을 자주 하셨어. 한번은 왼쪽 신발을 오른발에 신으려 하더라고 말씀하시던 게 생각나네. 뭘 사오라고 돈을 주면 잃어버리기 일쑤였고.”
“그래도 내 목숨을 구해 준 여자야.” (P102-103)
“어디서 살아? 여기 뉴욕이야?”
“브루클린. 거기도 뉴욕의 한 지역이지.”
“나도 알아. 거기 주소도 하나 받아 둔 게 있거든. 내 수첩엔 주소가 잔뜩 적혀 있어. 거기 적힌 친척들을 찾아다니면서 누구는 이렇게 죽고 누구는 저렇게 죽었다고 일일이 얘기해 주려면 꼬박 1년은 더 걸릴 거야. 브루클린은 벌써 다녀왔어. 외숙모가 길을 가르쳐 주셔서 나 혼자 지하철을 타고 갔지. 거기서 어떤 집에 들렀는데 이디시어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더라고. 러시아어, 폴란드어, 독일어까지 다 써봤지만 그 집 식구들은 영어만 할 줄 아는 거야. 그래서 그 집 고모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전해 주려고 손짓 발짓을 총동원했지. 그런데도 애들이 깔깔거리기만 하더라. 애 엄마는 좋은 여자인 것 같았지만 유대인이라는 흔적은 아무것도 없었어. 사람들은 나치가 어떤 짓을 했는지는 수박 겉핥기식으로나마 조금은 알고 있어. 하지만 스탈린이 어떤 짓을 했고, 또 지금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 세계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야. 러시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조차 모든 내용을 아는 건 아니야. 그런데 당신 직업이 뭐랬지? 랍비 밑에서 글쟁이 노릇을 한다고?”
헤르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P104)
노인은 곧 말투를 바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지금은 윤리적 혼란기야. 정작 죄를 지은 자들은 그 막돼먹은 살인자들일세. 자신을 너무 탓하지 말게. 자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지.”
“외삼촌, 막돼먹은 놈들이라면 유대인들 중에도 수두룩했어요. 우리를 그 풀밭으로 끌고 갔던 놈들이 누구였는지 아세요? 바로 유대인 경찰이었어요. 그놈들은 날이 밝기도 전에 나타나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문짝을 때려 부수고 지하실부터 다락방까지 샅샅이 뒤졌어요. 그러다가 숨어 있던 사람들을 찾아내면 진압봉으로 사정없이 두들겨 팼어요. 그리고 도살장으로 끌고 갈 가축들처럼 밧줄 울타리 속으로 몰아넣었죠. 그중 한 녀석한테 뭐라고 한마디 했더니 어찌나 모질게 발길질을 해댔는지 내 평생 절대로 못 잊을 거예요. 그 멍청이들은 그래 봤자 자기들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몰랐던 거죠.”
“<무지는 만악(萬惡)의 근원>이라고 하잖니.”
“러시아 비밀경찰도 나치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었어요.” (P109-110)
<변호사를 만나 봐야겠어. 당장 변호사부터 찾아가야 해!> 그러나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미국 변호사들은 모든 문제에 대하여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어느 분을 더 사랑하십니까? 다른 분과는 이혼하세요. 불륜 관계도 끝내시고요. 그리고 일자리를 찾으세요. 정신과 의사도 만나 보세요.> 헤르만은 판사가 집게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이렇게 판결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당신은 미국의 호의를 악용했소.>
헤르만은 자신에게 고백했다. <난 세 명 다 갖고 싶어.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이야.> 타마라는 전보다 더 예뻐졌고 더 침착해졌고 더 흥미로워졌다. 그녀는 마샤보다 더 지독한 지옥을 경험했다 그런 그녀와 이혼한다는 것은 그녀를 다른 남자들에게 쫓아내는 짓이나 다름없다. 사랑에 대해서라면, 전문가들은 마치 그것을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다는 듯이 그 말을 사용한다. 일찍이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도. (P122-123)
“그럼 그냥 뉴욕 시내에서 지내도 되잖아.”
“푸른 풀밭과 맑은 공기가 그리워요. 수용소에 있을 때도 공기가 여기만큼 오염되진 않았죠. 엄마도 모시고 갔으면 좋겠지만 엄마는 나를 매춘부처럼 생각하잖아요. 하느님이 온갖 고통을 주는데도 엄마는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것 같아서 벌벌 떨죠. 사실은 히틀러가 한 짓이 바로 하느님이 원하는 일이었는데 말이에요.”
“그럼 당신은 왜 안식일마다 촛불을 켜는 거야? 속죄절엔 왜 금식을 하고?”
“하느님을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진짜 하느님은 우리를 미워하지만 우린 우리를 사랑해 주고 선민으로 선택해주는 우상을 생각해 낸 거예요. 당신도 그랬잖아요. <이교도들은 돌을 가지고 신을 만들었고 우리는 이론을 가지고 신을 만들었다.> 일요일 몇 시쯤에 올 거예요?”
“4시.”
“당신도 역시 신이기도 하고 살인자이기도 해요. 그럼 안식일 잘 보내요.” (P148)
한때는 창문이었던 한 구멍으로 캄캄한 밤하늘이 내다보였다. 하늘은 수많은 상형 문자가 적혀 있는 한 장의 파피루스였다. 헤르만의 시선은 히브리어의 모음 부호 <세골(∵)>과 비슷한 모양으로 배열된 세 개의 별에 고정되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세 개의 항성이었고, 아마 제각기 행성이나 혜성들을 거느리고 있을 터였다. 두개골에 연결된 작디작은 힘줄 하나로 저렇게 머나먼 물체들을 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그런데 접시 하나에 담을 만한 두뇌를 가지고 끊임없이 궁리하는데도 아무런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은 또 얼마나 희한한 일인가! 그들은 모두 말이 없다. 하느님도, 별들도, 죽은 자들도, 그리고 말을 할 줄 아는 것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못하는데...... (P163-164)
그의 정신은 고장 난 기계처럼 걷잡을 수 없이 폭주했다. 그는 또다시 시간과 공간과 <물자체(物自體)>를 통찰할 수 있게 해주는 묘약을 마시고 있었다. 그의 상념은 언제나 똑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즉 하느님은 --또는 어떤 존재이든간에-- 분명히 지혜롭지만 그가 자비롭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천상의 위계질서 속에 자비의 하느님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는 아마도 무력하고 별 볼일 없는 하위신(下位神)에 불과할 것이다. 말하자면 천상의 나치들 틈에 간신히 끼어 있는 천상의 유대인이라고나 할까. 그러므로 이 세상을 떠나 버릴 용기조차 없는 사람은 그저 립스크의 건초 다락이나 시프라 푸아의 작은 골방 따위에 숨어들어 술이나 아편에 의지하며 그냥저냥 살아갈 뿐이다. (P165)
헤르만은 속죄절 전전날의 낮과 밤을 마샤의 집에서 보냈다. 시프라 푸아가 제물로 바칠 암탉 두 마리를 사두었는데, 한 마리는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한 마리는 마샤를 위해서였다. 그녀는 헤르만의 수탉도 사고 싶어 했지만 그가 한사코 만류했다. 헤르만은 얼마 전부터 채식을 해볼까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류가 말 못하는 짐승들에게 하는 짓도 나치들이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만행과 다를 바 없다고 역설했다. 어째서 애꿎은 닭이 인간의 죄를 씻는 데 이용되어야 하는가?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왜 그런 제물을 용납하시는가? 이번에는 마샤도 헤르만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러자 시프라 푸아는 만약 마샤가 그 의식을 거부한다면 자기가 집을 나가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마샤는 마지못해 승낙하고 암탉을 머리 위에서 빙빙 돌리며 정해진 기도문을 외웠지만 그 닭들을 의례(儀禮) 도살업자에게 가져가는 일만은 끝까지 거절했다. (P193)
루블린에서 마샤를 만났을 때 나는 마샤가 그 밀수꾼을 위해 정조를 지키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머지않아 남자관계가 아주 복잡하다는 걸 알게 됐죠. 유대인들 중에서도, 연약한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고, 거기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강철처럼 강인한 사람들이었어요. 하지만 알고 보면 그 사람들도 모두 상처받은 사람들이죠. 그런 문제점들이 지금 슬슬 하나둘씩 표면화되고 있어요. 앞으로 백 년만 지나면 게토가 무슨 이상향처럼 왜곡돼 버릴 겁니다. 우리 후손들은 그곳에 성자들만 살았다고 오해하겠죠. 하지만 그건 어처구니없는 거짓입니다. 첫째, 한 세대에 성자들이 얼마나 많이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둘째, 정말 독실했던 유대인들은 거의 다 죽어 버렸습니다.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저 살아남은 것만이 최우선 과제였어요. 일부 게토에서는 카바레 영업까지 할 정도였죠. 그런 곳에 카바레라니, 한번 상상해 보세요! 안으로 들어가려면 시체들을 넘어가야 했단 말입니다.
인류는 점점 선해지는 게 아니라 점점 약해진다는 것이 내 지론입니다. 말하자면 진화가 아니라 퇴화한다고 믿는 거죠. 지구상 최후의 인간은 범죄자에다 정신병자일 겁니다.
보나 마나 마샤는 나에 대해서 선생한테 아주 나쁜 얘기만 했겠죠. 하지만 사실 우리 결혼이 파경에 이른 것도 마샤 때문이었어요. (P215)
과거에 그 누가 --혹은 그 무엇이-- 러시아 비밀경찰이나 나치의 앞잡이 노릇을 하거나 도둑 또는 투기꾼 또는 밀고자가 되어 살아가던 수많은 유대인들을 제지할 수 있었을까? 헤르만 자신의 경우를 본다면, 그 무엇이 그로 하여금 지금보다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지 않도록 붙잡아 줄 것인가? 철학도 아니고, 버클리도 아니고, 흄도, 스피노자도, 라이프니츠도, 헤겔도, 쇼펜하우어도, 니체도, 후설도 아니다. 그들은 모두 이런저런 도덕론을 설파했지만 유혹에 견딜 수 있는 저항력을 심어 주지는 못했다. 스피노자를 신봉하는 사람도 나치가 될 수 있고, 헤겔의 현상학에 정통한 사람도 스탈린주의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단자론(單子論)과 <시대정신>과 맹목적 의지와 유럽 문화를 믿는 사람도 얼마든지 끔찍한 만행을 저지를 수 있다. (P224-225)
헤르만은 다시 소리쳤다. “타마라는 살아 있단 말이야! 살아 있다고! 제발 진정해! 이 멍청한 촌뜨기야!”
“오, 성모 마리아님! 내 심장이야!” 야드비가는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그러더니 곧 유대인 여자는 성호를 긋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두 손을 맞잡았다. 그녀의 두 눈이 당장이라도 툭 튀어나올 것만 같았고, 그녀의 입술은 외침을 내뱉지도 못한 채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타마라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설마 야드비가가 나를 알아볼 줄은 상상도 못했어. 지금의 내 모습은 우리 엄마도 못 알아볼 텐데 말이야.” 그러더니 폴란드어로 이렇게 말했다. “자, 마음 좀 가라앉혀, 야지아. 난 시체도 아니고 너를 괴롭히러 온 유령도 아니야.”
“오, 주님!”
야드비가는 두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마구 때렸다. 헤르만이 타마라에게 말했다. “어쩌자고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야드비가가 놀라서 죽을 뻔했잖아.”
“미안해, 미안해. 난 내가 많이 변한 줄 알았어. 옛날과는 딴판이라고 생각했지. 당신이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었어.”
“적어도 미리 전화쯤은 해줄 수 있었잖아.”
그때 야드비가가 소리쳤다. “오, 하느님! 오, 하느님! 이젠 어떡해요? 난 임신까지 해버렸는데.” 그러면서 자신의 배에 손을 얹는 것이었다.
타마라는 놀라는 듯했지만 금방이라도 폭소를 터뜨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헤르만은 그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당신 미친 거야, 아니면 술 취한 거야?”
그 말을 하자마자 헤르만은 그녀에게서 술 냄새가 풀풀 풍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주일 전에 타마라는 곧 병원에 가서 골반에 박힌 총알을 제거할 거라고 말했었다. “독주까지 마시기 시작한 거야?”
“인생에서 부드러운 것들을 맛볼 수 없는 사람은 으레 독한 것들에 맛 들이기 마련이지. 당신은 아주 편안한 보금자리를 갖고 있었네.” 문득 타마라의 말투가 달라졌다. “나랑 살 때는 언제나 엉망진창이었는데 말이야. 당신 원고나 책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지. 그런데 여긴 아주 깨끗하잖아.” (P250-251)
그 방에 모인 사람들은 책 한 권을 쓰는 데 5천 달러의 보조금을 받았다는 어느 교수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그 교수와 그의 책을 싸잡아 조롱했다. 헤르만은 여러 대학이나 재단, 장학금 제도, 보조금 등의 이름과 함께 유대 문헌과 사회주의와 역사학과 심리학 등을 다룬 각종 출판물의 제목을 들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다. <도대체 어떤 여자들일까? 어쩌면 저렇게 유식하지?> 그는 자신의 초라한 행색을 의식하면서 혹시라도 그들이 자기를 대화에 끌어들일까 봐 걱정했다. <나 같은 사람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아. 난 그냥 ‘탈무드’ 학자로 사는 건데 그랬어.> 그는 의자의 방향을 틀어 다른 사람들을 더욱더 외면했다.
헤르만은 소일거리를 찾으려고 책장에 꽂힌 플라톤의 ‘대화편’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펼쳐 보니 ‘파이돈’이었고, 그곳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얼핏 생각하면 미심쩍겠지만 철학에 대하여 진지한 관심을 가진 이들은 결국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탐구하고 있는 것이오.> 거기서 몇 페이지를 휙 되넘겨 보니 이번엔 ‘소크라테스의 변명’이었는데, 헤르만의 시선이 닿은 곳에 이런 말이 있었다. <더 나은 자가 더 못난 자에게 해를 입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오.>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나치들이 유대인들을 몇백만 명이나 학살한 것도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이었을까? (P286)
“그 사람이랑? 도대체 무슨 헛소리죠? 취한 거예요. 아니면 남편과 나 사이에 문제를 일으키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예요? 모세 페이페르에 대해서라면 아는 것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아요. 누가 들으면 그 사람과 내가 애인 사이였다고 오해하겠어요. 그 사람은 아내가 있었고 다들 그 사실을 알고 있었잖아요. 둘 다 살아 있다면 아마 지금도 같이 있겠죠.”
“글쎄, 난 아무 말도 한 했어. 질투하실 필요는 없어요. 저기, 성함이 뭐였죠? 브로데르? 그냥 브로데르라고 해두죠. 전쟁 때는 우리 모두 인간이 아니었어요. 나치 놈들은 우리를 가지고 비누를 만들었죠. 유대인 비누, 그리고 볼셰비키 놈들한테는 우리가 혁명을 위한 똥거름에 불과했어요. 똥거름한테 뭘 기대하겠어요? 나 같으면 차라리 그 시절을 역사에서 지워 버리고 싶어요.”
그러자 마샤가 중얼거렸다. “이 사람 너무 취했네요.” (P291)
혼자 남은 헤르만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허리를 굽혀 아까 의자 근처의 책꽂이에서 보았던 성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책장을 뒤적거리다가 ‘시편’ 부분을 찾았다. <여호와여, 내가 고통에 빠졌사오니 부디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번민으로 인하여 눈과 혼과 몸이 쇠약해지니, 이는 내가 슬픔 속에 인생을 보내며 한숨 속에 세월을 보내는 까닭이라, 나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기력이 떨어지고 뼈마디가 날로 약해지나이다. 나의 적들로 인하여 내가 이웃에게조차 질책의 표적이 되었으며 나를 아는 이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나이다.>
헤르만은 그 말들을 읽어 보았다. 이 문장들이 온갖 상황과 시대와 풍조를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나 시기적절하게 느껴지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세속적인 글들은 제아무리 잘 썼다 해도 세월이 흘러가면 타당성을 잃어버리기 마련이건만. (P306)
마샤가 요양원에 취직한 이후 헤르만은 더 이상 자기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다는 기분을 느낄 수 없었고 또한 그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론뿐만 아니라 행동에서도 숙명론자가 되었다. 그래서 기꺼이 외부의 힘에 몸을 맡겼다. 그 힘이 운명이든 섭리이든 아니면 타마라이든 상관없었다. 헤르만의 유일한 고민거리는 환각 증상이었다. 지하철을 타면 반대편 열차에 타고 있는 마샤가 보였다. 서점 전화벨이 울리면 마샤의 목소리가 들렸다. 몇 초가 지난 뒤에야 비로소 마샤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제일 자주 걸려 오는 전화는 선친이 물려준 책들을 팔거나 기증할 수 있느냐고 묻는 젊은 미국인들의 전화였다. 그들이 어떻게 레브 아브라함 니센의 서점을 알고 있는지 헤르만은 짐작할 길이 없었다. 노인은 지금까지 어디에도 광고를 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헤르만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였다. 레브 아브라함 니센이 그를 신뢰하는 것, 타마라가 기꺼이 그를 도와주는 것, 그리고 그녀가 야드비가에게 지극 정성이라는 것 등등. (P324)
헤르만의 인생철학에 의하면 생존 그 자체가 속임수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미생물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는 그것을 파괴하려는 집요한 세력들을 따돌리며 대를 이어 간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치프케프의 밀수꾼들이 장화나 블라우스 속에 담배를 감추는 등 온갖 암거래 품목을 몸에 지닌 채 법을 어기고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먹여 가며 몰래 국경을 넘었듯이 모든 원형질이, 혹은 원형질의 집합체들이 남의 눈을 속여 가며 시대에서 시대로 이어지고 있다. 먼 옛날 바닷가 갯벌에서 최초의 박테리아가 나타났을 때도 그랬고, 먼 훗날 태양이 재가 되어 지구상 최후의 생명체가 얼어 죽는다든지, 아무튼 마지막 생물학적 사건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멸망하게 될 때도 그럴 것이다. 동물들은 일찌감치 존재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고 도피 및 은신 능력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런 와중에도 확실성을 추구하다 오히려 몰락을 자초하는 것은 인간뿐이다. 유대인들은 가마득한 옛날부터 범죄와 광기를 통하여 은근슬쩍 생존해 왔다. 그들은 가나안과 이집트에도 몰래 잠입했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자기 누이라고 거짓말했다. 알렉산드리아, 바빌론, 로마에서부터 바르샤바, 우치, 빌나의 게토에 이르기까지 장장 2천 년에 걸친 유랑 생활이 결국 속임수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성서와 ‘탈무드’와 주석서들은 유대인들에게 한 가지 전략만을 가르치고 있다. 악을 만나면 도망쳐라, 위험을 만나면 숨어라, 정면 대결을 피해라, 세상에 존재하는 포악한 세력들을 최대한 멀리해라, 유대인들은 군대가 시가전을 벌일 때 지하실이나 다락방으로 숨어 버리는 도망자들을 결코 비난하지 않는다. (P326)
두 사람은 서둘러 옷을 입었고 마샤가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했다. 그들은 시프스헤드 만(灣)의 지하철역까지 걸어갔다. 만은 햇빛에 반짝거렸고 배들로 북적거렸다. 그중에는 이른 새벽에 바다로 나갔다가 방금 돌아온 배들도 많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물속에서 헤엄치던 물고기들이 지금은 갑판 위에 뒹굴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흐리멍덩했고 입가엔 상처가 있었고 비늘은 피투성이였다. 돈 많은 낚시꾼들이 물고기의 무게를 달아 보며 자기가 잡은 것들을 자랑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짐승이나 물고기를 죽이는 광경을 볼 때마다 헤르만은 언제나 똑같은 생각을 했다. 즉 동물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모든 인간이 나치라는 생각이었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을 마음대로 다루면서 잘난 체하는 모습은 차별주의적 성향의 가장 극단적인 예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힘이 곧 정의라는 사고방식이다. 헤르만은 채식주의자가 되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야드비가는 매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고향 마을에 있을 때, 그리고 나중에 수용소에서도 충분히 굶주렸는데 이 풍요로운 나라 미국에서까지 굶주릴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웃 여자들은 야드비가에게 율법에 따른 도살과 카시루트야말로 유대교의 근본이라고 가르쳤다. 암탉이 의례 도살업자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도살업자는 암탉의 목을 자르기 전에 기도문을 암송하기 때문이다. (P338)
헤르만은 자기 방으로 갔다. 여자가 전화로 누군가에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찰관이라니? 경찰관을 어디서 데려오란 말이에요? 이러는 동안에 할머니가 돌아가실지도 모른다고요!”
그때 마샤가 빽 소리쳤다. “의사! 의사! 엄마가 죽어 가요! 이건 자살이야! 순전히 나를 괴롭히려고 이러는 거라고!”
그러더니 곧 길게 울부짖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헤르만이 전화했을 때 마샤가 도난 사건에 대해 얘기하면서 냈던 그 소리와 비슷했다. 평소의 목소리와는 전혀 달라서 마치 고양이가 울부짖는 듯 야성적인 소리였다. 그녀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마구 쥐어뜯으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마치 대려죽일 듯한 기세로 헤르만에게 덤벼들었다. 이웃집 여자가 경악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가슴에 갖다 댔다.
마샤가 다시 절규했다. “당신이 원한 게 바로 이거였어! 원수들! 철천지원수들!”
그녀는 숨이 차서 헐떡거리다가 고꾸라질 듯이 허리를 꺾었다. 이웃집 여자가 수화기를 팽개치고 마샤의 양쪽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마치 숨통이 막혀 죽어 가는 아이를 구하려는 사람처럼 마샤의 몸을 마구 뒤흔들었다.
“살인자들!” (P348-349)
그는 그곳에 앉아서 현재의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건초 다락에 숨어 있을 때만 하더라도 이 세상에 뭔가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거라는 환상을 품었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치도 여전하고, 미사여구도 여전하고, 헛된 약속도 여전하다. 교수들은 여전히 살인의 이데올로기, 고문의 사회학, 강간의 철학, 공포의 심리학 따위에 대한 책을 쓴다. 발명가들은 새로운 살인 무기를 만들어 낸다. 문화와 정의에 대한 대화는 만행과 불의에 대한 대화보다 더 혐오스럽다. 헤르만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똥물 속에 빠져 버렸다. 내가 바로 똥이다. 탈출할 방법이 없다. 가르친다고? 가르칠 것이 뭐가 있단 말이냐? 그리고 내가 무슨 자격으로 남을 가르친다는 거냐?” 그는 랍비의 저녁 파티에서 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메스꺼움을 느꼈다. (P354)
랍비는 타마라와 어린 마샤를 자주 찾아왔다. 종종 타마라의 서점 앞에 차를 세워 놓고 들어와 이 책 저 책 뒤적거리기도 했다. 그는 타마라에게 손님들을 보내 주었다. 그리고 그가 보내 주는 다른 이들은 그녀에게 책을 공짜로 주거나 헐값에 넘기곤 했다. 랍비는 타마라의 서점에서 한 블록쯤 떨어진 커낼 가의 묘비 제작자에게 의뢰하여 마샤 모녀의 합동 묘비를 만들었다.
타마라는 헤르만을 찾으려고 이디시어 신문에 몇 번이나 심인 광고를 실었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그녀는 헤르만이 자살했거나 아니면 미국 땅 어딘가에 숨어 폴란드에서의 건초 다락 생활을 재현하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어느 날 랍비가 타마라에게 새로운 소식을 알려 주었다. 랍비 최고 회의가 대학살을 이유로 규정을 완화시켜 이젠 남편에게 버림받은 아내들도 재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타마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생각해 보죠. 헤르만과 재혼하는 거라면요.” (P3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