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006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The Devil Wears Prada)는 안나 윈투어의 어시스턴트로 일한 경력이 있는 미국의 작가 로렌 와이스버거가 집필한 2003년에 나온 소설이다. 패션계와 패션 에디터들에 대해 다뤘으며, 작가 와이스버거 본인의 경험은 주인공 '앤드리아 "앤디" 삭스', 안나 윈투어는 상사 '미란다 프리슬리'의 모티브가 되었다. 물론 어느 정도 픽션도 가미되었다. 이 영화에서는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뉴욕의 패션 잡지사 에디터 미란다 프리스틀리의 공동 비서로 일하게 된 앤드리아 삭스(앤 해서웨이)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에밀리 블런트와 스탠리 투치는 공동 조연으로서, 각각 공동 비서인 에밀리 찰턴과 아트 디렉터 나이절역으로 연기하였다.
[1]
“앤-드리-아.”
가구가 별로 없는 썰렁한 사무실 안에서 그녀가 불렀다.
“차와 강아지는 어디 있지?”
나는 의자에서 튕겨져나와 12센티미터 힐을 신은 발로 화려한 카펫 위를 부랴부랴 달려가 그녀의 책상 앞에 섰다.
“차는 차고 담당자에게 맡겼고, 매들린은 경비원에게 맡겼습니다.”
나는 차와 개는 물론 나 자신에 관한 일까지 무사히 마무리했다는 자부심에 가득차서 대답했다.
“일을 왜 그따위로 하는 거지?”
그녀는 내가 그 방에 들어간 이후 처음으로, 보고 있던 위민스웨어 데일리 지에서 눈을 뗐다.
“분명히 말했지? 둘 다 내 앞에 대령하라고. 내 딸들이 여기로 오면 다 함께 나가야 한다고.”
“전 원하시는 게 이런 건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됐어. 당신의 무능함에 대해서 시시콜콜 알고 싶지 않아. 가서 차와 개를 데리고 여기로 와. 십오 분 후에는 떠날 준비가 돼 있어야 해. 알아들었어?”
십오 분이라고? 이 여자가 제정신인가? 아래층까지 내려가서 타운카를 타는 데만 일이 분이 걸릴 테고, 빌라까지 가려면 육 분에서 팔 분. 방 열여덟 개짜리 빌라에서 강아지를 찾고 제멋대로인 스틱 자동차를 주차장에서 빼내 사무실까지 스무 블록을 되돌아오려면 세 시간은 족히 걸릴 텐데?
“물론이죠. 편집장님. 십오 분이요.”
그곳에서 뛰쳐나오는 순간 온몸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스물세 해를 못 넘기고 심장마비로 죽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담배는 불을 붙이자마자 새 지미 추 부츠 위에 덜어져 모락모락 연기를 내며 타들어가더니 조그만 구멍을 냈다. 엿같군. (P18-19)
“자, 런웨이 편집장이 누군지 이름을 말해보겠어요?”
내가 앉은 후 처음으로 그 여자가 나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하얗다. 머릿속이 완전히, 하얗다.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여자가 이런 질문을 하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 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해? 난 지금까지 런웨이를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데. 런웨이에 관심 갖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건 패션잡지잖아. 제대로 된 글은 하나도 없고 배고파 보이는 모델들과 번쩍거리는 광고만 가득한 잡지!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방금 머릿속에 우겨넣은 다른 편집장들의 이름이 저마다 어울리지 않는 짝과 춤을 추며 뱅뱅 돌았다. 그런데 마음속 깊은 곳 어디선가 내가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사실 누가 모르겠어? 하지만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그 이름이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은 생각이 안 나네요. 하지만 알고는 있어요. 그분이 누구라는 것쯤은 다들 알잖아요! 지금 잠깐 생각이 안 나는 것뿐이에요.”
그녀는 잠시 나를 응시했다. 커다란 갈색 눈이 식은땀이 흐르는 내 얼굴에 와 꽂혔다.
“미란다 프리스틀리.”
그녀는 존경심과 공포심이 섞인 말투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분 이름은 미란다 프리스틀리예요.” (P32-33)
그 일자리가 절실해진 건 바로 그때였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고나 할까? 법대 입학 허가를 받거나 학교 신문에 에세이를 싣는 것과는 달랐지만, 성공을 갈구하는 나에게 그 일자리는 진정한 도전이었다. 내가 어설픈 사기꾼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더더욱 큰 도전이었다. 나는 런웨이에 발을 디딘 그 순간부터 내가 이곳에 속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내 옷과 머리 모양도 어울리지 않았지만, 특히 어울리지 않는 것은 내 태도였다. 난 패션에 무지했고 신경도 전혀 쓰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이 일자리를 가져야만 했다. 게다가 백만 명쯤 되는 여자들이 이 일을 너무나도 하고 싶어한다지 않는가! (P43)
월요일부터 출근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일단 지낼 곳이 없었다. 졸업하고 어쩔 수 없이 부모님이 있는 에이본에 내려갔고, 지난 여름 여행을 떠나면서 대부분의 물건을 거기에 가져다 두었다. 게다가 직장에서 입을 만한 옷은 모두 릴리의 소파에 쌓여 있었다. 나는 설거지를 하고, 릴리의 재떨이를 비우고,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을 큰 통으로 사다놓는 등 나름대로 노력했다. 그래야 릴리가 날 미워하지 않을 것 같았다. 주말엔 좀 오랫동안 사라져줘야 할 것 같아 일부러 알렉스 집에서 자기도 했다. 이 말은 주말 외출용 옷과 요상한 화장품들은 브루클린에 있는 알렉스의 집에, 노트북 컴퓨터와 위아래가 어울리지 않는 정장들은 할렘에 있는 릴리의 원룸에, 나머지 모든 것은 에이본의 부모님 댁에 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난 뉴욕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매디슨 애비뉴’는 업타운 쪽이고, ‘브로드웨이’는 다운타운 쪽이라는 걸 다들 어떻게 아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업타운이 뭔지도 모르는 내게 월요일부터 출근하라고? 나는 전화기를 붙들고 황급히 늘어놓았다.
“월요일부터는 힘들겠어요. 제가 지금 뉴욕에 사는 게 아니거든요. 집을 구하고 가구도 사려면 시간이 좀 필요해요.”
“아, 그래요? 알겠어요. 그럼 수요일이면 괜찮겠죠?” (P52-53)
일요일 밤. 내일이면 첫 출근이다. 도대체 뭘 입어야 할지 고민스러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같이 사는 여자애 둘 중에서 그나마 상냥한 편인 켄드라는 줄곧 머리를 들이밀고 도와줄 게 없냐고 나직하게 물어보았다. 날마다 그애들이 매우 보수적인 스타일의 정장을 입고 나가는 걸 본 터라 그들에게서 패션에 대한 조언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나는 성큼성큼 네 걸음이면 끝나는 거실을 하염없이 왔다갔다하다가 텔레비전 앞에 있는 소파 겸용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장 세련된 패션잡지의 가장 세련된 패션 에디터를 위해 일하게 된 첫날, 도대체 뭘 입고 가야 하는 거지? 내가 들어본 건 프라다(브라운 대학 시절 일본 여자애들 몇 명이 이 상표의 백팩을 메고 다녔다), 루이뷔통(우리 집 할머니들은 이 상표가 박힌 백을 들고 다니면서도 당신들이 얼마나 멋있는지 전혀 모르고 계셨다), 구찌(누가 그 이름을 모르겠는가?) 정도였다. 그러나 눈 씻고 찾아봐도 내게 그런 게 없었다. (P65)
구글에서 그녀에 대해 검색하다가, 미란다 프리스틀 리가 런던 이스트 엔드에서 태어났으며 미리엄 프린체크라는 본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가족은 그 동네에 사는 다른 정통 유대인처럼 비참하리만큼 가난했지만 신실한 사람들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가끔 임시직을 얻기도 했으나, 대개 히브리어 책을 공부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따라서 식구들은 그 지역에서 베푸는 생계 지원에 기대어 살아야 했다. 미리엄의 어머니는 미리엄을 낳다가 사망했고, 사실상 그 집에 들어와 아이들을 키워낸 사람은 바로 할머니였다. 그리고 아이들! 아이들은 모두 열한 명이었다. 그녀의 형제자매들은 대개 아버지처럼 블루칼라 직종에 종사했다. 그래서 그들 역시 기도와 일 외에 다른 것을 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들 중 두 명만 고학으로 대학을 졸업했으며, 모두 일찍 결혼해 자기들만의 대가족을 이루기 시작했다. 미리엄은 이런 식구들 사이에서 혼자만 남다르게 행동했다.
미리엄은 언니 오빠들이 가끔 여유가 생기면 살짝 쥐어주던 얼마 안 되는 돈을 알뜰히 모아놓고, 열일곱 살이 되자 바로 고등학교를 중퇴했다(안타깝게도 졸업 석 달 전이었다). 그녀는 수완이 능란한 영국 디자이너의 어시스턴트 자리를 얻어 매 시즌 패션쇼 준비를 도왔다. 그녀는 이제 막 움트는 런던 패션계의 가장 사랑받는 어시스턴스가 되었다. 동시에 밤마다 프랑스어를 공부하며 몇 년을 보낸 후, 파리에 있는 프랑스판 시크 지에서 수습 에디터로 일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그녀는 가족과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다. 가족들은 그녀의 삶이나 야망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 역시 전통적인 경건함만 추구하며 세련미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들이 난처하기만 했다. 시크 지에 입사한 스물네 살 때 이후로 그녀는 가족과 완전히 단절되었고, 미리엄 프린체크라는 이름도 미란다 프리스틀리로 바꾸었다. 어느 민족 출신인지 두드러지는 이름을 버리고 좀더 당당한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코크니 사투리와 거친 말투도 세심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쓰는 교양 있는 말투로 바꾸었다. 이십 대 후반이 되자 촌뜨기 유대인 여자애는 종교색을 찾아볼 수 없는 사교계 인사로 완벽하게 변신했다. 그녀는 잡지계의 상류사회로 빠르게 진입했다.
프랑스 런웨이을 십 년간 휘두른 뒤, 그녀는 회사 방침에 따라 미국 런웨이 사의 일인자로 등극했다. 더는 바랄 게 없었다. 그녀는 두 딸과, 미국에서 명성을 쌓고 싶어 안달이 난 당시 록스타였던 남편을 76번가와 피프스 애비뉴가 만나는 곳에 있는 펜트하우스로 이사시켰다. 그리고 런웨이의 새 시대, 즉 프리스틀리 시대를 열었다. 내가 첫 출근한 때는 그녀가 부임한 지 육 년이 되어가던 해였다. (P71-73)
내가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일어나자, 그는 즉각 나를 면밀히 뜯어보았다.
“흠! 이 여자는 뭐야?”
그가 무척 심한 가성으로 외쳤다.
“예뻐. 하지만 너무 건강해 보이는군. 그 옷은 전혀 안 어울려!”
“제 이름은 앤드리아입니다. 미란다의 새 어시스턴트예요.”
그는 눈을 위아래로 굴려 내 몸을 샅샅이 훑었다. 에밀리는 입꼬리를 올리며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견디기 힘든 침묵이었다.
“무릎까지 오는 부츠에 무릎 길이 스커트라. 지금 나 놀리는 거야? 뭘 모르는군. 문 옆에 검은색으로 씌어 있는 명판 못 봤어? 여긴 런웨이라고. 전 세계의 유행을 선도하는 잡지 말이야! 하지만 걱정할 건 없어. 자기, 이 나이젤이 그 싸구려 옷을 벗겨버릴 테니까. 곧 멋있어질거야.”
그는 엄청나게 큰 손을 내 허리에 대더니 내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나는 그가 내 다리를 바라보고 쯧. 하는 것을 느꼈다.
“흠. 괜찮아. 약속하지. 당신은 아주 괜찮은 재료야. 다리도 예쁘고, 머릿결도 괜찮고, 게다가 뚱뚱하지도 않아. 뚱뚱하지만 않으면 돼. 조금만 기다려. 자기.”
나는 화를 내고 싶었다. 내 하체를 붙잡고 있는 그에게서 몸을 빼고, 누군지 전혀 모르는 이 사람이(그것도 동료직원이) 내 옷과 몸매에 대해 불필요하게 단호하고 단정적인 말을 내뱉고 있다는 것에 대해 잠깐이라도 생각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롱이 아닌 웃음을 짓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친절한 녹색 눈동자가 좋아져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내가 통과했다는 사실이 기분 좋았다. 이 사람이 바로 나이젤이었다. (P104-105)
나는 런웨이에서 받은 휴대폰을 찾느라 허둥지둥 가방을 뒤졌다. 휴대폰은 미란다와 내가 숫자 일곱 개만큼의 거리에 있다는 걸 확인해주고 있었다. 마침내 가방 밑바닥에서 속옷과 뒤엉켜 있는 휴대폰을 찾아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본 후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휴대폰의 작은 액정화면을 보니 수신 불가 지역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나는 미란다가 전화했고, 그 전화가 바로 음성 메시지로 넘어갔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휴대폰이 증오스러웠다. 그 순간에는 새 뱅 앤 올루프슨 전화기까지 증오스러웠다. 릴리의 전화기와 전화기 광고, 잡지에 나온 전화기 사진과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까지 증오스러웠다. 미란다 프리스틀리와 일하고 나서부터는 내 일상에 끊임없이 불행한 부작용이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전화기를 끔찍이도 싫어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화벨 소리를 반가워한다. 누군가가 안부를 묻기 위해, 또는 만나자고 전화한 것일 테니까. 하지만 내게 전화벨은 두려움과 심각한 불안과 심장이 내려앉는 공포심을 일으키는 소리일 뿐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전화기의 수많은 기능을 신기해하고, 심지어는 재미있다고까지 여긴다. 그러나 내게 그런 기능들은 일을 하라는 명령에 지나지 않았다. 미란다와 일하기 전에는 통화중 대기 서비스를 그렇게까지 이용해본 적이 없었다. 런웨이에서 일한 지 며칠 만에 나는 통화중 대기 서비스(그녀가 내게 전화했을 때 통화중이라는 신호를 듣지 않게끔). 발신자 표시 서비스(필요한 경우 그녀의 전화를 피할 수 있도록). 발신자가 표시되는 통화중 대기 서비스(필요한 경우 다른 사람과 통화하는 동안 그녀의 전화를 피할 수 있게). 음성 메시지 서비스(그녀가 자동사서함 안내를 듣느라 내가 그녀의 전화를 피하고 있다는 걸 모르게끔)를 신청했다. 장거리 전화 요금을 제외하고도 한 달 이용료만 50달러가 나왔지만,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마음의 평화가 아니라 조기경보였다. (P162-164)
"사실이잖아. 그녀가 만족할 줄 모르고 약간 사이코 기질이 있는 사람이란 건 알아. 하지만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니? 넌 지금 구두에, 화장에, 머리에, 옷까지 다 공짜잖아! 날마다 회사에 나간다는 이유만으로 디자이너의 옷을 공짜로 얻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앤디, 너는 런웨이에서 일하는 거야, 알겠어? 백만 명쯤 되는 여자들이 네 일을 하고 싶어 죽을 지경일 거라고.“
바로 그 순간 난 깨달았다. 구 년 전 릴리를 알게 된 후 처음으로 그애가 날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친구들처럼 릴리도 지난 몇 주 동안 돌아버릴 것 같은 내 직장 이야기, 즉 가십거리나 흥미 만점인 얘기 따위를 재미있게 들었다. 그러나 정작 그 하루하루가 얼마나 힘겨운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날마다 거기 나가는 것이 공짜 옷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도, 이 세상의 모든 옷을 공짜로 준다 해도 견뎌내기 힘든 일이라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절친한 친구를 내가 경험하고 있는 진짜 세계로 데려가야 할 시간이었다. 릴리는 분명 나를 이해하게 될 거야. 이제 말해야 해. 그래! 정확히 내가 무슨 일을 겪고 사는지를 누군가와 나눌 때가 온 거야. 나는 동맹군을 갖게 되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막 입을 열려고 했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P169-170)
그 목록에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꽃, 가장 싫어하는 꽃, 의사들의 이름, 주소, 집 전화번호, 가정부, 좋아하는 스낵, 좋아하는 생수 상표, 속옷부터 스키 부츠에 이르기까지 옷에 관련된 모든 것의 치수가 다 적혀 있었다. 나는 그녀가 언제나 기꺼이 대화하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절대로 대화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의 목록을 따로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에밀리가 나와 함께 있는 동안 말해준 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적고 또 적었다. 모든 게 끝나자, 미란다 프리스틀리에 관해 내가 모르는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취향의 호불호를 노트 가득 채워넣을 정도로 그녀가 대단한 사람인가 하는 점만 빼고는,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 (P183)
그녀의 밝은 파란색 눈이 위 아래로, 양옆으로 왔다갔다하면서 내 흰 셔츠와 빨간색 갭 코르덴 치마와 버클이 채워진 낙타털 지미 추 샌들을 훑어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내게서 불과 3센티미터 떨어져 있었다. 그녀에게서는 살롱 샴푸와 최고급 향수의 기막힌 향기가 났고, 웬만한 거리에서는 보이지 않는 입과 목의 미세한 주름까지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오래 쳐다볼 수는 없었다. 그녀가 나를 열심히 관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다음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알고 있긴 한 건지 도무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a) 우리는 사실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b) 나는 그녀가 새로 채용한 사람이다. c) 나는 에밀리가 아니다.
“안녕하세요. 미즈 프리스틀리.”
나는 갑자기 끽끽거리며 말했다. 그녀가 아직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긴장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질주할 수밖에.
“당신을 위해 일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드리고.....”
입 닥쳐. 그 바보 같은 입 닥치라니까! 자존심도 없니?
그녀는 가버렸다. 내가 더듬더듬 말하고 있는데, 카운터를 다시 뒤로 밀고 가버린 것이다. 볼 건 다 봤다는 뜻이었다. 열이 확 뻗쳤다. 당황과 고통과 수치심이 범벅되어 얼굴이 달아올랐다. (P195)
미란다가 느닷없이 나타났다가 가버린 후, 에밀리는 오늘 밤 내가 ‘그 책’을 가지고 미란다의 집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 책’이란 전화번호부만 한 책으로, 곧 나올 런웨이 다음호를 실제 크기로 스프링 가제본한 것이었다. 에밀리의 설명에 따르면, 미란다가 퇴근하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디자인팀과 편집부 모두 하루 종일 미란다가 내놓는 의견들을 접수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그녀의 변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미란다가 쌍둥이 딸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다섯 시경에 퇴근하면, 그때부터 그날의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된다. 디자인팀은 새로운 레이아웃을 짜고 새 사진을 넣는다. 그러면 편집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미란다의 승인을 받은 것을 세심하게 매만진 후 프린트한다. 첫 페이지에는 언제나 미란다 프리스틀리의 이니셜인 ‘MP'가 둥근 글씨체로 대문짝만 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모든 에디터가 그날의 변경사항을 아트 어시스턴트에게 보내면, 그들은 모두 퇴근하고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남아 이미지와 짜놓은 레이아웃을 배열한 후 프린트해 뒷면에 왁스를 입히는 작은 왁싱 기계에 넣은 후 각 페이지에 맞게 끼워넣는다. 과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작업은 대개 밤 여덟시에서 열한시 사이에 끝났다. 그런데 그 일이 언제 끝나든, ’그 책‘을 미란다에게 갖다주는 일은 내 몫이었다. 물론 그녀는 거기에 의견을 다시 덧붙일테고, 다음날 그녀가 그걸 회사로 가지고 오면 모든 과정이 다시 되풀이되는 것이었다. (P202-203)
“이게 뭐예요?”
나는 옷가방을 열면서 물었다.
“앤디, 이걸 입어요. 해고되지 않으려면.”
그는 미소지었지만 내 눈길을 피했다.
“뭐라고요?”
“있잖아요. 음, 그러니까 당신 옷차림이 이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해요. 물론 이 옷들은 값이 비싸요. 하지만 길은 있어요. 클로짓에 이런 옷이 아주 많으니까 당신이 가끔 몇 벌 빌린다 해도 아무도 눈치 못 챌 거예요.”
그는 ‘빌린다’는 말을 할 때 손가락으로 따옴표를 만들었다.
“그리고 PR 사람들에게 전화해서 디자이너 브랜드의 할인카드를 구해달라고 하세요. 나는 삼십 퍼센트 할인밖에 못 받지만, 당신은 미란다를 위해 일하니까 공짜로 옷을 줄지도 몰라요. 이런 갭같은 걸 계속 입고 다닐 필요가 전혀 없다고요.” (P226)
에밀리와 나 사이에는 뿌리 깊은 증오가 있었다. 그녀는 ‘선임’ 어시스턴트였고, 나는 커피와 식사 담당에 미란다 아이들의 숙제를 도와주고 미란다가 디너파티에 쓸 최고급 접시를 사러 온 도시를 헤매는 일종의 개인 비서였다. 에밀리는 미란다가 쓴 비용을 처리하고, 출장 계획을 짜고, 몇 달에 한 번씩 그녀가 개인적으로 입을 옷을 주문하는(물론 이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지만) 일을 했다. 아침마다 내가 먹을 것을 사러 나간 동안 에밀리는 혼자서 모든 전화를 받고, 이른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이는 미란다를 수발하고, 그녀의 요구를 전부 처리해야 했다. 나는 에밀리가 민소매차림으로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그녀를 증오했다.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따뜻한 사무실을 나와 뭔가 가지러 가고, 찾으러 다니고, 모아오느라 온 뉴욕을 동동거리며 돌아다닐 필요가 없으니까. 반면 에밀리는 틈만 나면 사무실 밖으로 나갈 이유만 찾는다고 나를 미워했다. 내가 밖에 나갔다 하면 휴대폰으로 수다를 떨고 담배를 피우느라 필요 이상으로 오래 지체한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P253-254)
오, 그래요. 미세스 위트모어. 난 정말 운이 좋아요. 얼마나 운이 좋은 지 당신은 상상도 못 할 거예요. 어제 오후에 상사의 심부름으로 탐폰을 사러 갔는데, 나중에 잘못 사왔다며 대체 왜 제대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느냐는 잔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운이 좋답니다. 또 있어요. 난 아침마다 여덟시가 되기도 전에 땀과 음식으로 얼룩진 남의 옷을 드라이클리닝 맡겨야 해요. 오, 잠깐만요. 난 진짜 운이 좋아요. 징글징글하게 버릇없고 퉁명스러운 여자애 둘에게 애완동물을 한 마리씩 안겨주기 위해, 예쁜 프랑스 불독 강아지를 찾으러 삼 주 내내 세 개 주 접경지역을 온통 헤매면서 개 사육자들을 찾아다녀야 했거든요. 진짜예요!
“네. 정말 환상적인 기회예요. 백만 명의 여자들이 갖고 싶어 몸부림치는 기회죠.”
나는 기계적으로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 알렉스가 들어오네요. 바꿔드릴게요.”
“안녕, 앤디. 무슨 일이야? 잘 있었어?”
“묻지 마. 지금 여왕 폐하의 점심을 사러 가는 중이야. 오늘은 어때?” (P266-267)
그의 입이 타원형으로 꽉 오므라들었고, 이마에는 핏줄이 불뚝 튀어나왔다. 나는 그녀를 증오하는 만큼 그도 증오하고 싶었다. 하지만 순간 그가 가여워졌다. 이 사람은, 특출나지 못하고 딱 이만큼만 뛰어난 이 사람은 왜 미란다 프리스틀리를 그토록 경모하는 걸까? 왜 그녀를 기쁘게 하고,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그녀를 위해 베풀려고 이토록 애를 쓸까? 아무래도 이 사람이 내 일을 대신 떠맡는 게 낫겠어. 나는 당장 그만둬버릴 테니까. 그래, 그거야. 회사로 당당하게 돌아가서 그만두겠다고 말하자. 이런 행동을 누가 참아내? 무슨 권리로 사람들에게 이 따위로 말하는 거야? 지위? 권력? 아니면 명성 때문에? 그 거지 같은 프라다 때문에? 이런 행동이 용납되는 곳이 대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어? (P280)
괜찮아. 나는 생각했다. 한 끼쯤 걸렀다고 죽지는 않아. 분별 있고 차분한 동료들이 다들 한마디씩 하잖아. 다이어트를 하면 더 튼튼해질 거라고. 게다가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여자들은 2천 달러짜리 바지를 입어봤자 멋지지도 않아.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그리고 방금 내가 런웨이를 얼마나 잘 대표했는지를 생각하며 의자에 푹 파묻혔다. (P326)
[2]
“내가 원래 그런가보지!”
난 화가 난 나머지 소리를 질렀다. 알렉스가 날 보고 싶어하지도, 자기 친구들과 함께 만나자고 하지도 않아서였다. 아무리 릴리의 말이 맞다고 해도 알렉스까지 릴리의 편을 들자 짜증이 났다.
“이건 내 삶이야, 알아? 내 직업. 내 미래란 말이야. 내가 대체 어떻게 해야 해? 그냥 농담처럼 받아들이란 말이야?”
“앤디, 넌 내 말을 오해하고 있어.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 잘 알잖아.”
난 이미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릴리에 이어 이젠 알렉스까지? 미란다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했다. 그런데 이 두 사람마저? 하루 종일, 날이면 날마다? 너무해. 울고 싶었지만, 나오는 건 고함밖에 없었다.
“이게 웃기는 농담처럼 들리니? 너희에게는 내 일이 그렇게밖에 안 보여? 오, 앤디, 너 패션 분야에서 일하는구나. 그런 게 힘들어봤자 얼마나 힘들겠어?”
나는 조롱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일 분 일 초가 흐를 때마다 더욱더 나 자신을 증오했다. (P21-22)
“오, 미란다의 새 어시스턴트라.” 요상한 목소리의 여자는 한바탕 크게 웃었다. “이 세, 세, 세, 세상에서 가장 큰 행운을 잡았군. 안 그래? 그 극악무도한 마녀랑 일해보니까 어때? 계속 할 만한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이건 또 뭐람? 런웨이에서 일하면서 미란다에 대해 이렇게 대놓고 혹평하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 여자, 진심일까? 혹시 슬쩍 미끼를 던져보는 거 아냐?
“네, 저는 런웨이에서 많은 경험을 쌓고 있습니다.”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 일은 백만 명쯤 되는 여자들이 너무나도 하고 싶어하는 일이거든요.”
헉,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이내 하이에나가 울부짖는 듯한 괴성이 들려왔다.
“오, 오, 정말 엿, 엿, 엿같이 끝내주는군.”
그녀는 새된 소리를 지르는 동시에 헉헉거리며 키득키득 웃어댔다.
“그 여자가 당신을 웨스트 빌리지의 원룸 아파트에 가둬놓고 구찌 따윈 다 압수해버리고 그 따위 말을 하게 될 때까지 세뇌를 했나보지? 화, 화, 환상적이야! 그 여자 정말 대단해! 이 신참 아가씨야, 이번에는 미란다가 머리가 좀 돌아가는 하녀를 고용했다고 들었는데, 그 정보가 틀렸군. 마이클 코어스의 트윈세트와 제이 멘델의 끝내주는 모피코트를 갖고 싶겠지? 후후, 요 아가씨야. 당신은 잘해낼 거야. 자, 이제 그 말라깽이 보스를 바꿔봐.”
갈등이 됐다. 처음에는 그녀에게 입 닥치라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웬 아는 척이냐고 쏘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 여자는 말을 더듬는 것으로 모자란 예의를 보상하려 드는 거라고 생각하는 쪽이 마음 편했다. 그래도 전화기를 입에 바짝 대고 다급하게 속삭이고 싶은 마음이 훨씬 더 컸다. (P38-39)
“날 그렇게 부르지 마, 마저 들어. 미란다는 남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야. 가끔 그녀가 미치광이 같다는 것도 알아. 나 역시 한 번도 푹 자본 적이 없어. 그녀가 전화할 때마다 두렵고, 친구들의 이해를 전혀 받지 못하는 게 어떤 건지도 알아. 다 안다고! 하지만 그게 그렇게 싫다면, 그리고 그녀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불평밖에 늘어놓을 게 없다면, 왜 당장 그만두지 않지? 문제는 당신의 태도야. 미란다가 미쳤다고? 밖에 나가봐. 사람들은 그녀를 재능있고 멋지고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해. 오히려 그렇게 멋진 사람을 최선을 다해 돕지 않는 당신이 미쳤다고 생각할 거야. 왜 그럴까? 그녀가 멋지기 때문이야. 앤디, 이건 정말이야. 그녀는 진짜 멋지단 말이야!”
나는 이 말을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에밀리가 핵심을 찔렀다고 결론지었다. 내가 보기에도 미란다는 정말 뛰어난 에디터였다. 그녀의 승인 없이는 잡지에 단 한마디도 실을 수 없었다. 그나마 승인을 얻기도 힘들었다. 또 미란다는 이제껏 해놓은 모든 것을 무효로 만들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설사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고 힘들게 할지라도 수많은 패션 에디터가 촬영을 위해 옷을 협찬받지만, 자기가 원하는 스타일이 나오도록 옷을 고르고 그에 딱 맞는 모델을 찾아내는 에디터는 미란다뿐이었다. 실제 촬영이야 촬영담당 에디터가 하지만, 사실 그들은 미란다가 내리는 구체적이고 놀랍도록 세세한 지시사항을 그대로 따르기만 할 뿐이었다. 매호 팔찌, 백, 구두, 의상, 헤어스타일, 기사, 인터뷰, 작가, 사진, 모델, 장소 하나하나까지 그녀가 최종 결정을(때로는 사전 의견도) 내렸다. 매달 잡지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는 것은 전적으로 그녀 덕분이라는 생각은 나도 했다. 미란다 프리스틀리가 없다면 런웨이는 런웨이가 아닐 것이다. 아니,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P59-60)
그녀는 문 앞에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누구 구두를 신고 있는 거지?”
그녀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나는 검정색 슬링백을 다시 한번 내려다봤다. 지금 내가 신고 있는 이 구두가 ‘앤 테일러 로프트’에서 산 것이라고 서구에서 가장 세련된 이 여자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다시 한번 그녀의 얼굴을 흘끗 보았지만 도저히 말이 안 나왔다.
“스페인에서 샀습니다.” 나는 눈길을 돌리면서 말했다. “바르셀로나의 람블라스 거리에 있는 무척 아름다운 부티크인데, 거기서 이 새로운 스페인 디자이너의 상품을 팔고 있었어요.”
이런 말을 대체 어떻게 꾸며냈지?
그녀는 주먹을 꼭 쥐고는 입에 대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쪽 유리문으로 다가오던 제임스가 미란다를 보고는 바로 몸을 돌려 달아나는 게 보였다.
“앤-드리-아. 그 구두는 용납이 안 돼. 내 직원은 런웨이를 대표해야 해. 그런 구두는 내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어울리지 않아. 클로짓에서 괜찮은 구두를 찾아봐. 그리고 커피를 가져오도록.” (P133-134)
“여보세요. 열두 번쯤 말했는데 또 말해야 해요? 우린 그런 리뷰를 쓴 적이 없다고요. 미즈 프리스틀 리가 미친 여자라는 건 저도 알고 있고, 그 여자 때문에 당신 생활이 지옥 같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없는 기사를 어떻게 찾아내요?”
마침내 어느 수습기자의 입에서 이런 말까지 나왔다. 그는 페이지 식스에서 일하지만, 내가 요구하는 기사를 찾아 내 입을 막아버리는 임무를 맡은 사람이기도 했다. 인내심도 많았고 찾아주려는 열의도 컸지만, 결국 이 자선활동의 종착역에 도달하고야만 것이었다. 에밀리는 다른 전화로 그 신문의 푸드 섹션 자유기고가 한 명과 통화하고 있었다. 나는 제임스에게 그 신문의 광고부 직원인 그의 전 남자친구에게 전화해 도와줄 수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윽박질렀다. 미란다가 기사를 요구한 게 어제였건만, 시각은 벌써 오후 세시였다. 시킨 일을 바로 해내지 못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P139)
우리는 작은 전시장으로 들어섰다. 직사각형 테니스 코트만 한 크기였는데, 가운데에 스물네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로버트 이자벨이라는 이름이 괜히 저명한 게 아니었다. 그는 뉴욕의 파티기획자인데, 세부사항까지 꼼꼼하게 신경 쓰며 정확하게 지적하고 적절한 의견을 제시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파티기획자 중 그 정도로 신뢰받는 사람은 그가 거의 유일했다. 그는 유행을 따르되 지나치지 않았고, 화려하되 넘치지 않았고, 독특하되 기묘하지 않았다. 미란다는 로버트가 자신이 여는 모든 파티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나는 그가 캐시디와 캐롤라인의 생일파티를 맡은 것밖에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로버트가 열 살짜리 아이들을 위해 식민지 양식의 거실을 현대적이고 세련된 다운타운 라운지(마티니 잔이 갖춰진 바와 최고급 스웨이드로 만든 붙박이 의자, 완벽하게 난방이 되는 모로코 풍의 천막 모양 발코니 댄스장)로 바꿀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있는 사람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곳은 정말이지 눈부실 정도로 호화로웠다. (P164-165)
그 안에는 일라나가 가로 25센티미터 세로 33센티미털로 확대 해놓은 뱀으로 변신한 미란다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나는 마놀로 구두에서 발을 빼 주무르면서 몇 분 동안 그것을, 특히 미란다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위협적이고 야비한 모습이었다. 내가 날마다 보는 그 나쁜 인간과 똑같았다. 하지만 오늘 밤엔 그녀도 슬프고 무척 외로워 보였다. 이 사진을 냉장고에 붙여놓고 릴리와 알렉스와 함께 비웃어봤자, 발이 덜 아프거나 나의 금요일 밤이 다시 돌아올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그 사진을 찢어버리고 절뚝거리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P177)
“앤드리아. 난 단구증가증에 걸렸어. 전염성이 매우 높은 병이고 상태도 정말 심각해. 하루 종일 회사에 나가 있기는커녕, 커피 한잔 사러 문 밖에 나가는 것도 안돼. 미란다도 그걸 알고 있어. 그러니 이제 당신이 바짝 긴장해야 해. 파리에서 미란다와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아. 미란다는 수요일에 밀라노로 갈 거야. 당신은 파리에서 그녀를 만나기 위해 다음주 화요일에 비행기를 타야 하고.”
“미란다가 그 상황을 이해해줬다고요? 기가 막히는군요. 그녀가 진짜로 뭐라고 말했는지 얘기해봐요.”
나는 그녀가 단구증가증 같은 것을 결근 사유로 인정했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았다.
“그 작은 기쁨이나마 즐기게 해달라고요. 어차피 앞으로 몇 주 동안 내 삶은 지옥일 테니까.” (P189-190)
“앤-드리-아! 당신 시계는 지금 몇 시야?”
이건 함정이 있는 질문인가, 아니면 내가 늦었다고 야단치려는 서곡인가?
“글쎄요. 지금 제 시계는 아침 다섯시 십오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아직 파리 시간으로 바꿔놓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여기 시간으로 오전 열한시 십오분입니다.”
나는 우리가 할 지루한 여행을 되도록 즐겁게 시작하려고 경쾌하게 대답했다.
“끝없이 늘어놓는 건 여전하군. 앤드리아, 지난 삼십오 분간 무엇을 했는지 물어도 될까?”
“비행기가 몇 분 연착하는 바람에.....”
“당신이 만들어준 일정표에 따르면 당신 비행기는 오늘 아침 열시 삼십오분에 도착해야 하는데?”
“네, 일정표 상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까지 말해줄 필요는 없어. 앤드리아 앞으로 일주일 동안 절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야. 알겠어?”
“네, 잘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P229-230)
“앤-드리-아, 이 파티는 내가 파리에 살 때 친하게 지냈던 부부가 여는 거여. 그들이 나보고 어시스턴트를 데려와달라고 하더군. 이런 모임을 지겨워하는 아들을 좀 즐겁게 해주라고 말이야. 둘이 잘 지낼 거라고 믿어.”
그녀는 운전기사가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름다운 지미 추 펌프스로 싸인 발을 우아하게 내딛으며 나갔다. 내가 문을 열기도 전에 그녀는 세 계단을 올라가 거기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한 고용인에게 코트를 넘겨주었다. 나는 부드러운 가죽의자에 일 분 정도 기대앉아 방금 그녀가 남겨준 이 귀하고 새로운 정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고민했다. 헤어, 메이크업, 일정 재조정. 고민고민하며 스타일북을 뒤지던 일, 바이커 치크 부츠...... 이 모든 것이 오늘 밤 어느 부유한 부부의 오만한 아이를 돌보기 위한 것이었단 말이야? 그것도 오만한 프랑스 아이를! (P262-263)
“그앤 괜찮아요. 오늘 밤 그애가 필요로 하는 건 딱 하나밖에 없어요. 자기 베이비시터와 또 한번 키스하는 거.”
그러더니 그는 내 얼굴을 감싸안고 또다시 키스했다. 나는 저항하려고,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고 말하려고 입을 벌렸다. 하지만 그는 내가 열정적으로 키스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각하고 내 입 속에 혀를 밀어넣었다.
“크리스천!”
내가 조용히 꾸짖었다. 미란다가 자기 파티에서 내가 아무 남자와 이러고 있는 걸 보면 날 바로 해고해버릴 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대체 무슨 짓이에요? 놔요!”
나는 뒤로 물러섰다. 그는 여전히 부담스러울 정도로 매력적인 미소만 보여주고 있었다.
“앤디, 아직 상황파악을 못 하고 있군요. 여긴 내 집이에요. 우리 부모님이 이 파티를 열었고, 난 머리를 좀 굴려서 부모님께 부탁했죠. 당신의 상사가 당신을 데려오게 해달라고. 내가 열 살짜리 꼬마라고 그녀가 그러던가요? 아니면 혼자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지금 날 놀리는 거죠. 그런 거죠?” (P264-265)
“에밀리..... 아니, 엔-드리-아, 나를 위해 일한 지 얼마나 됐지?”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내 머리는 이 갑작스런 질문의 속뜻이 뭔지 파악할 정도로 빨리 돌아가지 않았다. 시킨 것을 찾지 못하거나 가지고 오지 못해서, 혹은 팩스를 빨리 보내지 못해서 나에게 왜 그렇게 한심하냐고 묻는 건 분명 아니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한 번도 내 삶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 면접일의 세세한 내용들을 머릿속에 담아두지 않았다면(내가 처음 일하러 나왔을 때 그녀가 전혀 모르겠다는 눈으로 나를 응시했던 걸 생각하면 담아뒀을 리 없지만), 그녀는 내가 어느 학교를 다녔는지(다녔을까?), 맨해튼 어디에 사는지(살긴 할까?). 내가 자기를 위해 동동거리지 않는 귀중한 시간에는 뉴욕에서 뭘 하며 사는지(할게 있나?) 아는 게 전혀 없을 것이다. 그 질문은 참으로 미란다다웠지만, 나는 직감으로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게 나에 대해 얘기하자는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달이면 일 년이 됩니다. 편집장님.”
“미래를 위해 도움 될 만한 것들을 배웠다고 생각하나?” (P273)
“얘야. 이미 의사와 수십 번도 더 얘기했단다. 그애는 최고의 치료를 받게 될 거야. 하지만 지금 릴리는 코마상태란다. 의사가 내게 안심하라고......”
“코마요? 릴리가 코마상태라고요?”
이젠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진정하렴. 이 소식이 충격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나도 이런 얘길 전화로 해야 한다는 게 싫구나. 네가 돌아올 때까지 조용히 있으려고 했지만, 그때까지 아직 사나흘이나 남았으니 지금쯤은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나도 릴리에게 최선을 다 할 거야. 너도 알다시피 그애는 우리에게 딸이나 마찬가지잖니. 그러니까 릴리는 외롭지 않을 거야.”
“지금 집에 가야겠어요. 아빠, 나 집에 갈래요! 걔한테는 저 말고는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내가 지금 바다 건너편에 있다니. 아, 그놈의 파티는 내일모레 밤에 열릴 텐데. 오직 그것 때문에 그 여자가 날 데려온 건데. 내가 안 나타나면 그 여자는 틀림없이 날 해고할 거예요.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생각을 해야 하는데......”
“앤디, 거긴 시간이 너무 늦었지? 이제 잠을 좀 자면서 생각할 시간을 가지렴. 나도 네가 당장 집에 오고 싶어하는 건 이해한다. 넌 그런 아이니까. 하지만 릴리는 지금 의식이 없어. 의사가 분명히 그랬단다. 앞으로 마흔여덟 시간에서 일흔두 시간 안에 릴리가 깨어날 확률이 아주 높다고. 그애의 몸은 지금 더 오래, 더 깊이 잠으로써 스스로를 치유하는 데 도움을 주려는 거라고. 물론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단다.” (P285-286)
예정보다 먼저 돌아가면 난 곧바로 해고될 테고, 그럼 일 년간 해온 노예살이가 허공에 흩어져버릴 거라는 명백한 사실을 알렉스에게 말할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릴리는 의식을 잃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 누워 있으니, 그곳에 내가 있건 없건 지금으로서는 그애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을 거야. 그러나 나는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구체적으로 떠오르기 전에 그 끔찍한 생각을 억눌러야 했다. 대안들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파티 준비를 최대한 도와준 다음 미란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일자리는 남겨달라고 애원해볼까? 릴리가 의식을 회복하고 다시 기운을 차리는 동안, 내가 최대한 빨리 거기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누가 설명해주면 안 될까? 고작해야 이틀쯤 더 있다 가는 거잖아. 밤새도록 춤추고 샴페인을 마신 뒤, 내 친구가 음주운전으로 코마상태에 빠졌다는 전화를 받은 꼭두새벽, 이 어두운 시간에는 두 생각 모두 어느 정도는 온당한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누군가가 둘 다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P290-291)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내 딸들이 당장 여권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지금이 전화로 수다나 떨 때라고 생각해? 내가 왜 당신을 파리로 데려왔는지 제대로 모르나보지?”
세 번째 벨이 울리자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난 ‘여보세요’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 저 제일 빠른 비행기를 타고 갈 거예요. JFK 공항에 도착하면 전화할게요. 이제 집으로 갈 거예요.”
나는 엄마가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를 탁 끊어버렸다. 미란다는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반쯤은 넋이 나간 상태였다.
나 때문에 순간적으로 그녀가 말을 잃은 것을 보자, 두통과 어지럼증에도 불구하고 웃음이 절로 나왔다. 불행히도 그녀는 금방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만약 내가 곧바로 애원하고, 설명하고, 도전적인 태도를 버렸다면 해고당하지 않을 가능성이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자제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가질 수 없었다.
“앤-드리-아,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 이런 식으로 여길 떠난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당신을.....”
“나쁜 년, 엿이나 처먹어.”
그녀는 남들에게 다 들릴 정도로 숨을 헐떡거렸고, 너무 놀란 나머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나는 꽤 많은 딱딱이들이 무슨 소동인지 보려고 우리 쪽으로 몸을 돌렸음을 감지했다. 그들은 우리를 가리키며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누군가의 어시스턴트가 패션계의 살아 있는 전설 중 한 명에게 그렇게(그것도 전혀 나직하지 않게) 말했다는 사실에 미란다만큼 경악하고 있었다.
“앤-드리-아!”
그녀가 갈퀴 같은 손으로 내 팔을 잡았지만, 나는 그걸 뿌리치고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말로 속삭이던 걸 멈추고 우리의 작은 비밀을 모든 사람이 듣게 해야 할 때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편집장님.”
나는 파리에 온 이래 처음으로 떨지 않고 침착하게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선언했다.
“내일 파티에 함께 할 수 없게 되었니요. 이해하시죠? 분명 파티는 무척 멋질 겁니다. 그러니 마음껏 즐기시길 빌겠습니다. 이상.”
그녀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난 가방을 어깨 위로 휙 올리고 발바닥에서 발가락까지 살을 에는 듯한 고통을 무시하며 또각또각 걸어나가 택시를 불렀다. 그런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이제 나는 집으로 갈 것이다. (P303-304)
지난 석 달 동안 로레타는 내 멘토이자 옹호자이자 구세주가 되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우리는 의기투합했고, 그후에도 그녀는 내게 참 잘해주었다. 널찍하지만 아수라장인 그녀의 사무실에 들어가 뚱뚱한(!) 그녀를 보자마자 그녀를 사랑하게 될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나를 앉히고 내가 일 주일 내내 써온 글을 한 글자도 빼지 않고 읽었다. 여러 패션쇼에 대해 비아냥거리며 쓴 글. 명사의 어시스턴트의 실체에 대해 재치 있게 비꼰 글. 삼 년 동안이나 사랑했던 사람과 이제 함께 할 수 없다는 게 얼마나 사람을 파멸시키는지(그리고 파멸시키지 않는지)에 관한 감상적인 글이었다. 우리는 죽이 잘 맞았고, 우리가 런웨이에서 겪은 악몽도 함께 술술 풀어놓았다(나는 여전히 악몽을 꾸고 있었다. 최근에는 부모님이 거리에서 반바지를 걸치고 있다는 이유로 파리 패션경찰의 총에 맞았고, 어찌된 일인지 미란다가 나를 입양하는 매우 끔찍한 꿈도 꾸었다). 칠 년이라는 나이 차가 있었지만, 우리는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그야말로 한 편의 소설 같았다. (P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