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길버트 그레이프> 1993년
어니는 저능아다. 곧 열여덟 살이 되는데, 그날은 생일 파티를 크게 열어줄 생각이다. 병원에선 어니가 열 살까지만 살아도 운이 좋은 거라고 했었다. 열 번째 생일이 지난 후에도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고 그랬었다. 그래서 밤마다 누이들과 나는, 그리고 엄마도, 내일 아침에 어니가 다시 깨어날 수 있을까 걱정하며 잠자리에 든다. 어니가 살기를 바라는 날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날도 있다. 지금 같아선 달려오는 자동차 앞으로 녀석을 밀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P8)
나는 신을 봤다. 이 여자애가 바로 신이었다.
무슨 말이든 얼른 해야겠는데,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등 뒤로 다가갈 때 그 애가 이렇게 말했다.
“사마귀. 수컷이 암컷한테 몰래 다가가지. 수컷은 짝짓기를 하고 싶거든. 하지만 조심하지 않으면 암컷이 돌아서서 머리를 씹어 먹을 거야. 그래도 수컷은 본능 때문에 계속 짝짓기를 해. 하지만 나머지 몸뚱이가 일을 끝내면 암컷이 남은 것마저 먹어치우지. 이게 사마귀들의 짝짓기 방식이야. 재미있지? 내 이름은 베키야.”
그 여자애는 뒤로 돌아서더니 안경을 내리며 나를 쳐다봤다.
“어.” 내가 한 말은 이게 전부였다. (P59)
(...) 나는 녀석에게 가르쳐주려 애쓴 것들이 그 머릿속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들어갈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 죽고 싶어 진다. 아니, 죽는다고 부산을 떨고 싶지조차 않다. 그냥 존재하지 않고 싶어진다.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P71-72)
“이 일에 시간이 걸린다는 거 알아. 그래도 그렇게나마 우리는 뭔가를 하고 있잖아. 그렇게 나마 엄마의 삶을 낫게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잖아.”
버팀목을 대고 받침대를 얼기설기 짜넣는 것과 엄마의 삶을 낫게 만드는 것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엄마가 더 오래 살지는 모른다. 하지만 언제부터 더 나은 것과 더 낡은 게 같은 뜻이 된 거지? (P103)
“한 번만 더 어니를 때렸다간 그냥…….”
엘렌은 얼굴을 가렸지만 내가 자기 눈물을 똑똑히 볼 수 있을 만큼만 가렸다.
집안의 남자이자 그레이프로서 난 많은 걸 참고 살았다. 누나, 여동생, 엄마, 이 마을. 뭐든 참아낼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아무도 어니를 건드리면 안 된다. 아무도. 어니를 위해서라면 사람도 죽일 수 있다. (P106)
집안의 남자이자 그레이프로서 난 많은 걸 참고 살았다. 누나, 여동생, 엄마, 이 마을. 뭐든 참아낼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아무도 어니를 건드리면 안 된다. 아무도, 어니를 위해서라면 사람도 죽일 수 있다. (P108)
그녀에게 다가가 쏘아붙였다.
“왜 나를 선택했죠? 응? 누구라도 차지할 수 있었잖아요. 랜스 닷지를 가질 수도 있었잖냐고요! 그런데 당신은 날 선택했어요. 지금이라도 이 마을엔 기꺼이 당신에게서 음…… 한 수 배우려는 아이들이 많아요. 잘생긴 애들, 근육질 애들, 농장의 일꾼 타입 같은 애들. 그런데 대체 왜 나를 골랐느냐고요!”
“그래. 다른 사람을 가질 수도 있었지. 하지만 난 너를 선택했어.”
“왜요? 왜 그랬죠? 네?”
“왜냐하면.”
“얼른 말해요.”
“왜냐면 네가 너희 가족을 절대로 떠나지 않으리란 걸 알았으니까. 넌 절대로 엔도라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으니까.” (P135)
“왜 나를 선택했죠? 응? 누구라도 차지할 수 있었잖아요. 랜드 닷지를 가질 수도 있었잖냐고요! 그런데 당신은 날 선택했어요. 지금이라도 이 마을엔 기꺼이 당신에게서..... 한 수 배우려는 아이들이 많아요. 잘생긴 애들, 근육질 애들, 농장의 일꾼 타입 같은 애들. 그런데 대체 왜 나를 골랐느냐고요!”
(...)
“왜냐하면.”
“얼른 말해요.”
“왜냐면 네가 너희 가족을 절대로 떠나지 않으리란 걸 알았으니까. 넌 절대로 엔도라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으니까.” (P140)
그녀의 말, “네가 절대로 엔도라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는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보여주겠어.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모두에게 보여주고 말겠어. 엔도라의 가운데 신호등이 녹색에서 노란색으로, 다시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차를 멈추고 기다렸다. 일리노이나 켄터키까지 갈 수 있을 만큼 기름을 채웠고, 평생 먹어도 남을 만큼의 음식이 있었다. 나는 새로 출발할 수 있었다.
녹색 불이 들어왔다. 지금이 기회였다. 하지만 나는 우리 집이 있는 골목으로 접어들면서 전조등을 깜빡였다. 모자란 내 동생이 길에 나와서 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라는 걸 확신한 녀석이 집으로 달려들어갔고,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누나와 엘렌이 현관에 나와 섰다. (P141-142)
지하실에서 목을 맨 아버지를 발견했을 때도, 누나의 말에 따르면 형은 아무렇지 않게 계단을 올라와 빵을 굽고 있던 에이미 누나랑 엄마 앞에서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형은 교환원에게 구급차를 보내달라고 했다. “아버지가 목을 맸어요.”
(...) 제니스 누나는 목을 매단 아버지를 발견한 충격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했다. 형이 비명을 지르거나 울거나 난리를 치지 않았다고 해서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만큼 깊은, 대단히 깊은 상처를 받았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건 어니의 열여덟 번째 생일 파티가 평소와는 다르리라는 것뿐이다. 그리고 엄마가 마루를 뚫고 떨어지지 않는다면, 어니가 자다가 죽지 않는다면, 엘렌이 덜컥 임신을 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그레이프가 벼랑 끝으로 더 내몰리지만 않는다면, 어쩌면 우리는 괜찮을 것이다. (P146)
“길버트, 저 사람은 왜 그랬을까? 왜 그 아들은 온 가족을 죽였을까?”
“왜냐면, 왜냐면 그가.......”
“왜냐면 그들을 미워했기 때문에?”
“미워한 게 아니에요. 왜냐면 그 사람 생각에는.......”
“가족들이 미웠을 거야. 그래도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모르겠어요, 엄마.”
“네 아빠가 택한 것과 같은 길로 떠날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 않니? 그 방법을 찬성한다는 건 아니란다. 천만의 말씀이지. 그게 아니라면 그냥 저 문으로 나가서 떠나버릴 수도 있었잖아.”
“네, 하지만......”
“네, 하지만 뭐?”
“가족들을 떠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나 보죠.”
“그럴까, 그럴 수 있었는데.”
“어쩌면 자기 없이는 가족들이 살아갈 수 없다고 느꼈거나. 자신이 꼭 필요하다고. 그러니까 그들의 그.....”
“그들의 뭐?” 엄마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들의 생존에.”
엄마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TV소리를 다시 켰다. (P159)
“우리가 여기 있는 건 마루를 손보기 위해서야. 위층에 있는 바다코끼리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터커가 귀를 막았다. “제발! 너희 어머니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너희 어머니는 훌륭한 분이셔!”
나는 앉아서 새끼손톱에 낀 때를 벗겼다.
“잔인한 놈!” 녀석이 소리쳤다.
나는 엄마가 바닥을 뚫고 떨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야말로 잔인한 짓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엄마가 원하는 게 그거라면 죽게 내버려둬야지. 최소한 우리 아빠는 인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어. (P166-167)
엄마가 결혼 상대를 정하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다. 온 마을 남자들은 전부 엄마를 원했고, 엄마는 마음에 둔 사람을 오래도록 비밀로 간직했기 때문에 결국 앨버트 로렌스 그레이프를 선택했을 때 다른 남자들은 저마다 마음에 뒀던 각자의 2위, 3위, 심지어 5위와 6위에게 달려갔다. 위로상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랬던 엄마의 몸이 세 배로 불어났으니 마을 여자들로서는 정의가 살아 있다는 기분을 느낄 만도 했다. (P182)
“길버트, 우상과 거짓 선지자들에게 등을 돌리고 하나님께 의지하렴.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신단다. 하나님은 늘 그러셨어.”
“뭐, 어쨌든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
“하나님께서 너의 죄를 사하여주시길.”
“그리고 저는 그분의 죄를.” (P185-186)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건, 우리 아버지가 엔도라의 루터교회에서 오랫동안 성가대 솔로를 했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 성가대 역사상 최악의 솔로이기는 했어도, 아버지는 그걸 혼자 해낼 용기를 지녔던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랬던 사람이 목에 밧줄을 걸었다는 건 엄청난 충격이었다. 아버지는 화요일에 목을 매고 목요일에 묻혔다. 임신중이었던 엄마와 에이미 누나와 래리 형과 제니스 누나와 나, 그리고 아기였던 어니는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 맨 첫 줄에 앉았다. 다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 하필 그날 성경 봉독 시간에 자살이 지옥으로 가는 확실한 길이라는 짧은 언급이 있었다. 불과 얼마 전에 우리가 나타난 걸 보고 용기를 얻었던 신도들은 엄마가 일어나서 우리를 데리고 중앙 통로를 걸어 밖으로 나가자 말문이 막혔다. 오스왈드 목사는 성경 읽기를 멈췄고, 체구가 큰 만큼 신심도 제일 깊은 안내원 킨저 씨가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라는 미소를 머금고 헌금용 등나무 바구니를 든 채 엄마의 앞을 막아섰을 때 신도석에 앉은 부인들은 수군거렸다. 엄마는 걸음을 멈추고, 엘렌이 들어 있었던 커다란 배를 내밀며 오르간 앞에 앉은 스테이플스 부인한테까지 들릴 만큼 큰 소리로 킨저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앨버트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밝히셨으니 나도 하나님에 대한 내 입장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엄마는 임신 8개월의 몸으로 문을 밀어젖혔고, 에이미 누나가 울어대는 어니를 안고 그 뒤를 따랐다. 그 다음이 래리 형과 제니스 누나였고, 내가 맨 끝이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교회에 다니지 않게 됐다. 일요일 아침 시간은 우리가 유일하게 누리는 순수한 행복의 시간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신을 찬양할 때 우리는 잠옷차림으로 서로에게 음식을 던지고 TV에 나온 목사들을 비웃었다. (P186-187)
“길버트.”
계속 웃었다.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그런 웃음이었다.
“아무도 네가 마지막으로 울었던 게 언젠지 기억하지 못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길버트, 기다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전력질주를 했다.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호이스 씨네 마당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중앙로를 건너, 램슨식품점을 지나, 램프카페 앞을 달려갔다. 메퍼드 씨네 뒷마당을 지나다가 새 모이용 물그릇을 넘어뜨렸다.
집에 돌아온 다음에는 곧장 위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걸어잠갔다. 다리와 팔의 땀을 닦고 얼굴에 흐르는 땀은 베개에 머리를 파묻어 말렸다. (P213)
그 애가 전에 사귀던 여자들에 대해 물었고, 나는 딱 한 명 있었는데 벌써 오래전 일이며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다.
“후회하는 것처럼 들린다.”
“응.”
베키가 말했다. “나는 절대로 후회하고 싶지 않아. 후회라는 말은 세상에서 제일 추한 말이야.”
내가 생각하는 제일 추한 말은 가족, 엔도라, 예수 그리스도였다. “나는 후회라는 말에 아무 유감 없어.” (P213-214)
“어떤 정의를 내리거나 설명을 시도하기 쉽지 않은 사람은 바로 너야.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뭘 원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거지. 넌 여행도 가지 않고 책도 읽지 않고 자신을 계발하지도 않아. 시카고행 티켓을 줘도 넌 비행기를 타지 않을 거야. 뭐든지 안전제일인데, 그게 두렵기 때문이지 게으르기 때문인지는 통 모르겠어. 물론 나는 널 사랑하고 어떤 식으로도 너한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넌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서 아주 솔직하게 네 삶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어. 간단히 말하자면, 너 스스로 뭘 원하는지 모른다는 게 너무 빤하게 보여. 넌 겁에 질린 꼬맹이야.” (P229)
닭똥같이 굵은 누나의 눈물이 길가에 떨어져 고이도록 우리는 거기 서 있었다. 누나가 내 셔츠로 얼굴을 닦더니 코를 훌쩍이며 행복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좋은 사람 만나야지, 길버트, 특별한 사람.”
우리는 계속 걸었다. “됐어.” 내가 말했다.
“아냐, 그래야 돼. 왜냐면 길버트, 너는 희생을 했으니까. 그리고 고마워. 너는 늘 그 자리에 있어줬고, 이젠 좋은 사람을 만날 자격이 있어.” (P252)
“언젠가는 너도 자식을 세상에 내놓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날이 올 거다. 누군가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그 눈의 원인이라는 걸 알 때의 느낌.” 엄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할 말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얘기 하나 해줄까. 너를 보면 내가 신이라는 느낌이 들어. 여신이라고 해도 좋고. 하여간 신과 같은 존재! 그리고 이 집은 나의 왕국이야. 그래, 길버트, 이 의자는 내 옥좌, 그리고 길버트 너는 희미한 갑옷을 입은 나의 기사야.”
“빛나는 갑옷이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죠?”
“아니, 내가 한 말 그대로다. 넌 빛나지 않아, 길버트. 희미하지. 알아듣겠니? 너는 희미하게 가물거려. 이제 그만 가서 자거라.” (P265)
엘렌 너는 아예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산다는 건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사람이 태어나는 게 선택이라고, 살고 싶다는 소원이 이루어져서 이 별에 태어난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제비뽑기와 같다. 어떤 사람은 살아야 하는 반면에 또 어떤 사람은 삶을 뭉개버린다. (P268)
창밖을 내다봤다. 뒷모습을 보니 누나의 상태나 야외용 탁자의 상태나 어슷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외용 탁자를 보면 그 집의 목가적인 수준을 판단할 수 있다. 우리 집 탁자는 그 자체가 하나의 고발장이나 다름없었다. 우리는 균열이 가고 껍질이 벗겨졌다. 우리는 썩었다. (P270)
그대 램슨 씨가 큰 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있니?”
“아무 일도 없어요.” 램슨 씨가 칸막이 사무실로 돌아갈 때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전부 다 끝내줘요. 엄마는 바비큐소스만 바르면 당신 팔이라도 뜯어먹을 태세고, 멍청한 얼간이 형이랑 마녀 같은 누나는 여길 떠났고, 못돼 처먹은 여동생은 간밤에 예수 그리스도랑 뒹군 모양이고,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할 큰 누나는 하루가 다르게 점점 뚱뚱해지고, 어디에 꼭꼭 숨어버린 모자란 동생은 또다시 물에 겁을 집어먹었죠.”
“뭐라는 거니, 길버트?” 램슨 씨가 사무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장님.”
“다 들었는걸. 무슨 말을 하고 있었잖아. 길버트, 얘기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얘기하렴.”
“그냥, 저번에 하신 말씀이 옳았다고 중얼거렸어요. 인생이요.”
램슨 씨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인생에 깜짝 놀랄 일들이 가득하다고 하셨잖아요. 엄청나고 멋진 놀라운 일들. 그 생각을 하던 중이었어요.”
“그렇단다, 얘야. 바로 그게 인생을 바라보는 올바른 태도지.” (P270-271)
“너는 엔도라가 좋은가 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도 여기 있는 걸 보면 그런 게 틀림없지. 내가 디모인에서 일 하는 동안 길버트 너는 쭉 여기 있었잖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7년간 난 많은 걸 보고 많은 일을 했는데 너는 내내 엔도라에만 틀어박혀 있었다니. 재미있지 않냐. 어떻게 두 인생이 이렇게 다를 수 있는지.”
“재미있네.” 내가 말했다.
랜스가 말을 멈추더니 감자를 케첩에 찍어서 잠시 담배처럼 들고 있다가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말들도 달리는 거겠지. 미국이라는 나라가 위대한 이유도 그 때문이고, 같은 마을에서 태어난 두 사람이 이렇게 다른 인생을 살게 되는 곳이 또 어디 있겠니. 대단한 나라야.”
“그래.”
랜스는 그쯤에서 말을 멈추고는 감자를 계속 집어먹더니 아예 내 치즈버거에까지 손을 뻗었다. 접시를 앞으로 밀어줬다. 유명하다는 건 그런 것인 모양이었다. 남의 음식을 집어먹는 것. (P277)
카버 씨네 집을 나서면서 중얼거렸다. “사람을 때리면 안 되지. 남자는 사람을 때리면 안 되는 거야.”
카버 씨에게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어떤 아버지는 이런 삶을 살지 않을 용기가 있었다고. (P288)
베티 카버 부인은 가게에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머리가 흐트러졌고 어쩐지 미친 여자 같은 그 분위기는 남편을 죽였을 거라는 의구심에 설득력을 더했다. 한편으론 왜 그렇게 오래 뜸을 들였는지 궁금했다.
“너는 내가 그를 죽였다고 생각하지. 네 눈을 보면 알 수 있어. 나는 예전부터 네 눈을 보면 모든 걸 알 수 있었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당신이 카버 씨를 죽인다는 거.”
“길버트.” 그녀가 말했다. 마치 빵 한 덩이를 더 달라거나 뭔가의 가격을 확인해달라는 듯한 말투였다. “오래 전부터 이미 죽어 있던 사람을 어떻게 죽일 수 있겠니?” (P301)
나는 진짜 넥타이 매는 법을 일부러 배우지 않았다. 목에 매듭을 걸었던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였다. (P303)
“너는 자신과 너무 동떨어져 있어.”
“아냐, 그렇지 않아.” 그 애가 떨리는 내 손을 보지 못하도록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으며 말했다.
“감정. 길버트, 사람이라면 그게 있어야 해.”
“나한테도 있어, 감정.”
“흥.”
“아주 많이.........”
“넌 오래 전에 감정을 느끼는 걸 그만뒀어. 너를 봐. 엄마가 거의 돌아가실 뻔했는데 나랑 같이 걷고 있잖아.”
“그래, 그건...... 왜냐하면 그건 음, 내가 살려고 애를 쓰기 때문이야. 모르겠어?” (P322)
엘렌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목에 핏줄까지 세웠다. “간밤에 엄마가 거의 죽을 뻔했어. 그래서 기독교인 친구들한테서 위로를 받은 거야! 그래, 술도 좀 마셨어. 그게 뭐! 정말 싫어. 지가 내 아버지인 줄 아는 멍청이 오빠도 싫고, 이 집구석이 싫어!”
내가 조용히 말했다. “행여 너만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
“뭐? 뭐라고 하셨어요, 아빠?”
“뭐라고 했냐면, 여기가 싫은 게 너 하나뿐이라고는 생각하지 말라고!” (P330)
그리고 밤이 되면 온 마을 사람들이 얼간이 중에 얼간이를 보겠다고 TV앞으로 달려갈 것이다. 버거반은 거의 다 지었고, 학교는 불에 타서 사라졌다. 어니는 얼마 안 있으면 열여덟 살이 된다. 그리고 나는 랜스 닷지 덕분에 별안간 세상을 똑바로 보게 됐다. 내가 할 일은 분명해졌다. 나는 여기를 떠날 것이다. 엔도라를 뜰 것이다.
“길버트, 왜 갑자기 싱글벙글이니?” 누나는 수건을 적셔서 엄마의 얼굴을 닦아주며 물었다.
“응?”
“그렇게 웃는 얼굴은 오랜만인 걸.”
“뭐.....”
누나는 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했기에 생전 가야 보기 힘든 그런 즐거운 표정을 지었는지 궁금해했다. 누나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뭔데 그래, 길버트?”
내 미소의 어느 구석에도 이 가족은 없었다. 미시간에서 온 그 여자애도 마찬가지였다. 떠나겠다는, 여기서 도망치겠다는 결심, 새로운 인생. 내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은 이유는 오로지 그것 때문이었다. (P340)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엄마는 말을 계속 했고, 나는 떠날 사람이었다. 나는 여길 떠날 것이다. 어니의 생일 파티가 끝나면 트럭을 몰고 떠날 것이다.
일찍 잠이 깨어 방을 둘러봤다. 침대에 누워 몸을 둥글게, 공처럼 둥글게 말았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엔도라를 떠나도 나는 갈 곳이 없다. (P347)
사진 속의 남자는 아빠였다. “와.”
“놀랄 만큼 닮았어. 믿어지지 않지. 응?”
“그러네.”
“길버트, 너는 여러 면에서 아빠랑 똑같아. 지나치게 성실한 게 단점인 것도. 만약 아빠가 여길 떠났더라면....”
“누나......”
“만약 아빠가 집을 나가버렸다면, 아마 아빠는...... 어쩌면, 난 네가 아빠처럼 되는 걸 원치 않아.”
“하지만 나는 절대.....”
“그건 모르는 거야. 아무도 모르는 거야.” (P353)
“길버트?”
“네?” 나는 동물원에서 동물 구경하듯이 그 앞에 서서 엄마를 꼼꼼히 뜯어봤다. 머리는 새집 같고 피부는 창백했다. 핏기라곤 전혀 없었다.
“너는 내가 말을 할 때면 항상 너한테 말을 한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생각해?”
“아니요. 나는 그냥......”
“너희 아빠.”
“네?”
“난 네 아빠한테 말을 하고 있었어. 가끔 그런단다. 아직도 너무 화가 나. 너무 화가 나서 그 인간을 죽이고 싶을 정도야.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네, 알아요.”
“자기 손으로 그래버렸지.” 엄마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돌덩이 같은 팔꿈치로 기우뚱거리는 탁자를 짚었다. “그리고 내가 말을 하면 네 아빠가 뭐라고 하는지 아니? 뭐라는 줄 알아.....?”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나는 그냥.....” 내가 엄마의 말을 자르며 대답했다.
“그래. 미안하다고 그런단다.”
엄마는 잠시 그렇게 앉아 있더니 내가 “에이, 엄마”라고 말하자 퉁퉁 부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에 섞여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내뱉었다.
그러다 가까스로 생각이 정리될 만큼 진정했는지, 한 번에 한 마디씩 내뱉었다. “미안하다고. 앨버트가. 다시. 살아오는 건. 아니야. 그런다고. 지금 우리의 이 꼴이. 지워지는 건 아니야.”
그 말들이 한참 허공을 맴돈 후에야 나는 이렇게 물어볼 용기를 냈다. “무슨 말씀이세요?”
“내 자식들이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라는 뜻이야. 내 집이 가라앉고 있다는 뜻이야. 이 바닥 봤니? 내가 이 집을 쓰레기통에 처넣고 있잖니.”
“그렇지 않아요.”
“마루를 좀 봐. 이 휘어진 꼴을 보라고.”
“엄마, 그건 그렇지.....”
“듣기 좋은 소릴랑 집어치워. 나를 봐라, 길버트. 그리고 진실을 말해. 진실을.”
말이라는 걸 깡그리 다 잊어버리고 싶었다. 두 살짜리가 되고 싶었다.
“이렇게 말해봐. 보니 와츠 그레이프. 나를 따라 해, 길버트.”
따라 하지 않았다.
“엄마를 따라서 말해.”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보니 와츠 그레이프는.....”
고분고분 따라 했다. “보니 와츠 그레이프는.....”
“우리 엄마다......”
“우리 엄마다......”
“그리고 나는 엄마가 싫다......”
입을 다물었다.
“따라 해. 나는 엄마가 싫다.”
집 밖으로 나가려고 몸을 틀었다.
“길버트? 길버트!”
“알았어요.” 엄마를 쳐다보고 소리쳤다. “엄마가 싫어요. 너무너무. 지독하게. 나는, 엄마가, 싫어요.”
엄마의 눈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그 눈으로 아주 오랫동안 강렬하게 나를 쳐다봤다. 엄마는 내 미움을 즐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마음이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어서 집 밖으로 뛰쳐 나갔다.
한참을 달린 후에 맥주 두 캔을 마시고 담배 한 갑을 피우고서야 방금 전의 대화를 잊어버리려는 시도를 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실패했다. (P374-376)
“길버트, 길버트.....”
시그러운 소리를 들은 엄마는 무조건 내 잘못이라고 확신하고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길버트, 길버트!” 그리고 어느 틈에 누나도 몸을 부들부들 떨며 내 뒤에 서 있었다. 누나마저도 우리 집 사람들이 제일 많이 하는 그 말을 내뱉었다. “길버트.” (P378)
“길버트.”
“안녕하세요.”
내 앞에는 램슨 씨가 서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말이 없었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서로 얼굴을 쳐다보지 못한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사장님, 저는 음..... 어니의 생일 케이크 때문에...... 보시면 아시겠지만......” (P383)
자동문 앞에 서자 치과 대기실에 어울릴 법한 노래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렛잇비>. 그래, 그냥 놔두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램슨 씨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가 같은 시간에 여기에서 마주쳤을 때의 모습, 고개를 숙이고 미국의 똥구멍을 핥는 우리의 모습이.
나는 푸드랜드에서 사라졌다. (P384)
녀석을 진정시켜서 얼음을 얼굴에 대도록 만들기까지는 20분이 걸렸다. 어니는 절반쯤 때를 벗은 채 조용히 침대로 갔다. 나는 말없이 문 밖에 서서 녀석이 숨죽여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어니 때리지 마, 우리 어니 건드렸다간 가만 안 둘 줄 알아.” 평생을 이러고 살았는데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게 불에 탄 재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이렇게 간단하게, 이렇게 순식간에.
이런 인간에게는 증오도 과분했다. (P393)
엄마가 문을 밀어 여는데, 눈이 빨갛게 충혈됐다.
“엄마, 괜찮아요?”
“길버트, 나는 내가 증오하는 신에게 매일 기도했다. 한 가지만 기도했어. 내가 이 날을 볼 수 있게만 해달라고. 이때까지만 어니를 살려달라고.”
“알아요.”
“엄마 말 끊지 마라. 나는 신이라는 그 빌어먹을 개자식에게 기도했어. 내 아들이 열여덟 살이 되는 걸 보게만 해준다면 당신을 용서하겠다고. 이제 용서했다. 그리고 이제, 케이크를 좀 먹어야겠구나.” (P405)
“그래, 비슷해. 파티가 끝났고, 성공적이었고, 엄마는 방으로 올라갔고, 어니는 깨끗하고, 래리 형은 말을 하고, 모든 게 전보다 나아졌어. 전부 좋아졌어.”
“길버트, 잘됐다. 그게 뭐든.”
“끝났어. 모든 정신적인 상처. 모든 감정. 끝났다고 말해줘.”
베키는 아무 말도 없었다.
“여긴 안정이 되고 있어. 그래, 새로운 시작. 즉각적인 싸구려 해법을 찾는 건 아냐. 다만 약간의 확신이 필요해.” (P428)
엄마는 입은 반쯤 벌리고 눈을 감은 채 미용실에서 다듬은 멋진 머리를 하고서 온몸으로 침대를 뒤덮었다. 엄마의 손을 잡았다. 이 온기도 머잖아 사라질 것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습들, 대체 뭐지? 나를 낳는 엄마의 모습.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나를 처음으로 품에 안는 엄마의 표정.
누나가 다시 한 번 “아아아아아아!”하고 소리를 질렀다. 어니는 움찔했지만 잠을 깨지는 않았다.
여자들이 아이를 낳으면서 비명을 지르는 건 고통이 심하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삶이라는 건 녹아내리는 얼음처럼 얼마나 쉽게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버리는지. 비명을 지를 수 있는 건 오로지 살아 있는 목숨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P435)
“내려놔, 누나. 수화기 내려놔!” 내가 소리쳤다.
제니스 누나는 잠시 멈췄다가 농담하냐는 듯이 쳐다보더니 다시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전화 끊으라고! 나는 아직 엄마를 음, 보낼 준비가 안 됐어.”
제니스 누나가 부드럽게 말했다. “길버트, 이제 보내드려야 해.”
“나는 사람들이 엄마의 몸에 손을 대게 할, 엄마를 데려가게 할 준비가 안 됐다고. 알았어?”
“하지만.....”
“그 사람들이 지금 엄마를 데려가봐야 뭘 어떻게 하겠어? 엄마를 발가벗겨서 아침까지 차가운 방에 침대보 같은 거 한 장 덮은 채 놔둘 거잖아. 하비 박사님이 이미 사망확인서에 서명을 했어. 난 아침까지 기다리고 싶어.”
(...)
제니스 누나가 말했다. “해 뜨기 전에 전화하자. 밖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거 싫어.”
“그래.” 엘렌이 말했다. “엄마도 사람들이 모이는 거 원치 않을 거야.”
에이미 누나는 한두 시간쯤 후에 전화를 하자고 했다.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해. 실감이 나지 않아.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내가 말했다. (P441-442)
엄마를 갑자기 성모 마리아처럼 생각하기로 작정했다는 건 아니다. 엄마는 늘 화가 나 있었지만, 그리고 엄청나게 뚱뚱했지만, 그래도 우리 엄마였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자신안에서 엄마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엄마가 완전히 떠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엄마는 우리 속으로 들어왔고, 이제는 우리가 삶을 계속 꾸려나가야 했다. (P445)
누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안 돼에에에에에!”
어니가 귀를 막았고, 다른 사람들은 하던 동작을 멈춘 채 나를 쳐다봤다.
“걸지 마. 전화 걸지 마. 사람들이 엄마를 꺼낼 때쯤이면 아침일 거야. 사람들이 모여들 거야. 그리고 맥버니 영구차가 나타나겠지. 사람들이 엄마를 영구차에 넣을 거야, 엘렌. 그리고 사람들은 말을 하고 또 할 거야. 수군댈 거야. 엄마를 보면서 우월감을 느끼겠지. 그리고 농담을 하고. 엄마를 비웃을 거야.”
엘렌이 고개를 돌렸다. 제니스 누나는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농담거리가 아니야. 사람들은 엄마를 보면서 웃고, 엄마를 찔러대고, 이러니저러니 떠들어댈 거야! 사람들이 그렇게 하도록 놔둘 수 없어!”
“알았어, 길버트, 쉬이, 쉬이이.”
“엄마는 그것보다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어. 엄마한테는 자격이 있다고....”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에이미 누나가 나를 안으려 했지만, 나는 몸을 빼면서 말을 계속했다. “엄마는 아름답고, 아무도 우리 엄마를 보면서 웃으면 안 돼....... 아무도 그러면 안 돼......!”
전화를 거는 소리도 없고, 반박을 하는 소리도 없고, 오로지 내가 흐느끼는 소리뿐이었다.
엘렌이 말했다. “엄마는 아름다워. 누가 뭐라고 하고 어떻게 생각하든, 엄마는 아름다워.” (P447-448)
“길버트가 옳아. 엄마를 집 밖으로 옮기려면 크레인이 필요할 거야.”
제니스 누나는 말했다. “그게 대체.....?”
에이미 누나가 말했다. “길버트가 한 말이 다 옳아. 사람들은 웃고 엄마의 삶이 어쨌느니 저쨌느니 평가하려 들 거야. 그리고 그래, 엄마는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어.” (P449)
불은 아름다웠다.
베키와 해돋이를 보러 가기로 했던 약속이 생각났다. 그건 다른 날로 미뤄야겠다.
불길이 점점 높이 솟구칠 때 내 가족들의 얼굴을 살폈다. 래리 형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했고, 제니스 누나는 무지개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넋이 나갔고, 엘렌은 눈을 감은 채 불이 타들어가며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에이미 누나와 어니는 소파에 함께 앉아 있고, 어니는 뭔가를 끊임없이 묻고 또 물었다. 나무들 사이로 경찰차의 경광등이 번쩍였다. 나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서 한쪽 손은 래리 형의 어깨에 얹고, 다른 손으로는 엘렌의 팔을 꽉 잡았다.
어니가 에이미 누나에게 말했다. “불빛이다. 번쩍번쩍 불빛이야.”
사이렌 소리가 온 동네에 울리고, 엄마 방의 벽이 불길에 허물어져 내릴 때 에이미 누나가 말했다. “그래, 어니. 불빛이야.” (P4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