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오래된 것의 가치
기록의 가치는 오래된 것이라야 제 맛이 난다. 장 맛은 오래되야 그 맛이 구수하고 제 맛이 난다. 사진의 가치는 오래될수록 그 의미를 더한다. 오래된 사진일수록 그 향수가 남는 것은 지난 시간의 녹녹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삶의 환경속에는 새로운 것들과 오래된 것, 낡은 옛 것이 공존하고 있다. 세상은 새로운 물건들로 바뀌어 가고 그 변화에 적응해간다. 오래된 물건들은 골동품이 되어가고, 심하게 헐고 낡은 것들에게선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이 된다. 편리함이나 경제적 가치에 치중하는 현대인에게 낡고 오래된 것의 가치는 있는 것일까? 필름사진도 이제는 오래된 것이 되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화했고, 빛이 바랜 손상된 사진도 이제는 디지털로 복원된다. 또한 시간이 정지된 사진 속 공간과 사물은 이제 오래된 기억속에 남는다.
흑백 사진의 오래된 느낌을 주기 위해 탈색된 색깔의 세피아 조색(sepia toning)을 하곤 한다. 조색의 목적은 화상을 보호하고 화이버 베이스(fiber base)를 사용하여 영구보존을 목적으로 셀레늄 조색(selenium toning)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세피아톤의 조색을 함으로써 향수를 느끼게 한다. 과거의 순간이 정지되어 있는 사진은 향수를 자극한다. 사진을 찍을 당시는 현재이지만 사진을 프린트하는 순간 박제된 과거가 되어 버린다. 손택 또한 사진이 향수를 북돋우는 기능에 주목했다. 영원으로 승화될 줄 알았던 순간의 찰나는 사진속에 박제되어 버린다. 순간의 복제기계 사진은 오래도록 기억될 기억의 순간들이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들이다. 마치 세월이 쌓이고 쌓인 퇴적층처럼 말이다.
필름 사진의 경우, 인화(printing, 印畵)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때 미감광 인화지에 빛을 쏘아 프린트물을 얻는다. 필름이든 인화지든 이 과정에서 현상(develop), 정지, 정착(fix)이라는 세 과정을 거치는데, 우리의 기억 또한 현상, 정지, 정착의 과정을 거친다. 잠상인 상태의 기억은 저장과정을 거쳐, 마치 뇌 속의 정착과정을 거쳐 기억으로 남게 된다. 정착화된 장기기억으로 남기 위해서 잠상(潛像)의 정착과정(기억의 부호화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필름을 현상하기 위해 암백에서 릴에 감아 현상액을 붓게 되는데 이때 릴에 엉겨붙으면 잠상들은 엉겨 붙어 제대로 된 사진현상이 되지 않고, 그 과정은 교반이라는 것을 통해서 기억은 필름속에 재생되어진다. 오래된 시간의 흔적은 필름의 현상과정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어떻게 찍혔을까하고 두근거리는 기대감으로 기다리던 필름 현상과 암실에서 상이 나타나고 코를 찌르는 톡 쏘는 냄새와 함께 기억은 새겨진다.
아론 시스킨드(Aaron Siskind)는 1940년대에 버려진 물건들과 낙서, 칠이 벗겨진 낡은 벽, 벽에 부착왼 포스터의 흔적 등의 표면을 클로즈업한 사진들을 찍었다. 시스킨드의 작업은 시간의 흔적이 담겨진 결과물로서의 표면의 디테일을 보여준다. 사진 자체는 디테일한 표면 그자체이지만 그 속에 담겨진 시간의 흔적들은 다의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그의 추상작품들에 대해 그는 말한다. “내가 주관적인 추상 작품을 주로 다루고 있는 것 같이 보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 발상은 어디까지나 현실의 객관적 기록을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인 것이다. 다만 표현의 양식이 시각적 추상으로 되어 있는 것은 나의 체질에서 온 것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의 사진의 의미는 대상의 물성과 함께 다의적이고 다층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