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언노운Unknown> 2011년
영화 <언노운Unknown>은 2010년 브뤼셀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금까마귀상을 수상한 하우메 콜렛 세라 감독이 연출을 맡은 영화이다.
“당신이 초인종을 눌렀나요?”
나는 그에게 여기서 뭘 하느냐고 물었다.
“여기서 뭘 하느냐뇨?”
“우리 집에서 말입니다.”
“당신 집이라고?”
그가 하도 진심으로 놀라는 바람에 나는 당황스러웠다. 나는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그의 이목구비를 똑바로 보면서, 내 이름은 마틴 해리스라고 밝혔다. 남자는 펄쩍 뛰듯 놀랐다. 여러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서 서로 부대낀다. 한없이 터무니없고 황당한 생각들이다. 아내는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고, 내가 병원에 있는 사이 그를 집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리즈!”
남자와 내가 한목소리로 외쳐불렀다. 팬티와 검은 셔츠 차림의 리즈가 욕실 문간에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아파트 안쪽으로 한 발짝을 떼자 남자가 가로막고 선다. 리즈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그녀는 그 남자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고 있었다.
“아니야, 뭔가 착오가 있나봐.”
남자가 대답한다.
리즈가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간통 현장을 들킨 아내의 표정이 아니다. 마치 모르는 남자가 다가와 귀찮게 굴 때 외면하고 돌아서는 여자 같다.
“당신이 알아서 해.”
그녀가 말한다. 그러곤 부엌으로 사라진다. 내가 한 걸음을 옮기자 남자가 팔을 들어 나를 제지한다. 나는 소리쳤다.
“리즈! 도대체 무슨 짓이야?”
“우리 집사람 가만둬!”
그의 집사람? 그 뻔뻔함에 기가 질려 입이 다물어지질 않는다.
남자는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데 나보다는 말랐고 목소리는 더 굵직하고 얼굴은 각이 졌고 금발 머리가 덥수룩하다. 그리고 리즈가 JFK 공항에서 내가 사준 에르메스 파자마를 입고 있다. 나는 손목으로 확 쳐서 남자의 팔을 뿌리쳤다. (P6-7)
타임스위치가 꺼졌다. 나는 벽에 기대서서 숨을 가다듬었다. 목구멍은 콱 막혔고, 머릿속은 텅 비었고, 명치께에는 나쁜 예감이 결국 사실로 드러났을 때 느껴지는 불안감과 안도감이 뒤섞여 떠돌았다. 오늘 눈을 뜬 이후 아내의 휴대전화로 연방 전화를 했지만 연락이 닿질 않았다. 내가 일주일 동안 종적을 감췄는데도 아내는 걱정이 안 되었는지 실종 신고를 하지 않았고, 경찰서에 갔더라면 내가 입원한 병원을 알 수 있었을 텐데 경찰을 찾지도 않았다. 그리고 오늘 아침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둑한 계단참에 우두커니 서서 우리 집 문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갑자기 문이 열리고 리즈가 깔깔 웃으며 나와 자기 공범을 내게 소개하고, 오늘은 만우절이라고 말하며 내 목에 매달렸으면, 하고 생각했다. 오늘은 10월 30일이다. 그리고 그녀는 장난을 치는 타입이 아니다. 애인을 만들 타입도 아니다. 난 그렇게 믿었다. 단 이 분 만에 나는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채로 내 집에서 쫓겨난 신세가 되었다. (P9-10)
“사생활 침해로 고소하겠습니까, 선생?”
금발 사내의 회색 두 눈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나는 과거 사실들을 환기시킴으로써 상황이 어이없이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막아보려 하지만, 형사가 나서서 정리해버린다.
“이 선생은 마틴 해리스라는 이름의 신분증이 있는데 당신은 신분증을 잃어버렸고, 이 선생은 당신이 아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남편 되시면 부인도 그것을 확인해주셨고, 또 이웃들까지도 맞다고 하는데, 더 할 말이 있어요?”
입술은 달싹이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형사는 남자를 바라보며 나를 고소하겠느냐고 다시 한번 묻는다.
“아뇨, 안 그래도 일이 많은데 시간을 너무 허비했어요. 이 일은 그냥 잊어버리렵니다. 물론 저 사람이 우리를 그만 괴롭혀야 되겠지만.”
“알아들었어요? 해리스 씨한테 고맙다고 해요. 또다시 이분 집 주위를 얼씬거리다간 공공도로에서 소란을 피운 혐의로 잡아넣을거요! 알았어요?”
말들이 내 머릿속을 빙빙 돌며 서로 얽히다가 나를 바닥에 못박아버린다. 나는 정체불명의 그 남자에게 달려들 힘조차 없는데, 그는 호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은 채 인사를 하고는 휑하니 나가 버린다. 자유롭게, 내 여권을 가지고, 내 아파트로, 내 아내에게. 현기증이 덮쳐와 탁자 쪽으로 갔다. 다른 이들은 벌써 내 존재를 잊었다. 내 고소 건은 모니터에서 사라졌다. 지워져버렸다. (P35-36)
“기억한다고 믿는 것일 수도 있죠. 당신이 정말 누구인지는 잊어버린 걸 수도......”
그녀는 아주 다정한 목소리에 효과적인 신중함과 요긴한 과감함을 담아 말했다. 어떤 환자에게 가망이 없음을 선고할 때, 인격 존중과 도의적 진실을 고려하여 선택하게 되는 그런 목소리. 그러더니 내 팔에 손을 얹고 아주 친절하게 확인사살까지 해준다.
“그럴 수도 있어요.”
“그렇죠.”
차갑고 단호한 내 말투에 그녀가 흠칫한다. 나는 휴대전화를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내가 머릿속에 떠오른 전화번호를 막 힘없이 누르는 모습을 보고 있다.
“병원으로 다시 가보면 어때요, 마틴? 나는 그냥 내가 느낀 대로,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한 것뿐이지 사실 아무것도 몰라요. 재활 치료를 하는 의사들은 아마 이런 환자들을 만나봤을 테니까......”
“그랬겠죠.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더니, 어이쿠, 다른 사람이 내 행세를 하고 있는 경우를. 기억도 같고, 직업에, 성격에, 가진 문제까지 같은.....”
“나는 당신을 믿고 싶을 뿐이지 비교는 할 수 없어요. 당신이 벌써 말했잖아요. 나는 이전의 당신을 모른다고.” (P40)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뮈리엘. 당신은 나에게 힘이 돼요. 하도 사기꾼 취급을 당하다보니, 결국은 나조차 진실을 의심하게 되더군요. 이런 경우는 상상도 못했어요.”
“난 그런 경우를 알아요. 이혼하는 동안 전남편이 나를 모함하는 거짓말을 어찌나 많이 만들어냈던지, 뒷수습을 하는 데 몇 달이 걸렸는지 몰라요. 그게 아니라고 설득하면 할수록 아이들이 나를 더 안 믿더군요. 결국엔 나도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믿게 하려고요. 결국 딸을 되찾았을 때, 그 아이는 거의 자살 직전이었어요. 내가 당신 문제를 남의 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단지 내가 당신을 센 강에 빠뜨렸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요.”
나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폴 드 케르뫼르가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면서 말을 걸었다.
뮈리엘의 말에서 다시 힘을 얻은 나는 벌떡 일어나 그를 마주보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뮈리엘이 부드럽게 나가라는 격려의 뜻으로 내 왼손을 잡고 손가락을 꼭 쥐었다.
“마틴하고 일하는 것, 아주 재미있어요.” (P56-57)
“자, 이런 얘기는 쓸모가 없어요. 그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요. 폴, 그리고 인후염이고 뭐고 간에 당장 이리 오라고 해요. 내가 한 시간 전에 그 남자를 봤는데, 목소리도 몸 상태도 아주 좋아 보였다고요!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하세요. 내 얘기는 절대로 하지 말고. 의심 살 만한 말도 하지 말고......”
“잠깐, 잠깐. 당신이 몬산토가 보낸 스파이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증명하죠?”
내 입이 떡 벌어졌다. 뮈리엘이 그게 뭐냐고 케르뫼르에게 묻는다.
“GMO. 즉 유전자 변형 작물을 개발하는 다국적 기업이에요. 딴에는 세계 기아 퇴치를 위해서라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매년 재구매해야 하는 종자들의 세계 시장을 손안에 넣는 게 목적이죠.”
그는 검지로 나를 가리켜 보이며 점점 흥분이 고조되는 목소리로 내가 몬산토가 보내서 온 사람이라면 내 목적은 유전자 변형 식물의 위험에 대한 그와 마틴의 연구가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캐내려는 거라고 뮈리엘에게 설명했다.
“우리가 당신 앞에서 모든 걸 다 보여주리라고 기대하는 건 아니겠지. 응?”
그가 나에게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너무 쉽지 않겠소? 앞일이 궁금하다면 당신네 우두머리들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거요!”
“그만 해요. 폴. 난 모든 걸 이미 다 알아요. 알겠어요? 다 안다고요. 왜냐하면 내가 바로 나니까요. 몬산토가 사람을 보냈다면, 그건 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 남자일 겁니다. 그렇다면 모든 게 다 설명이 돼요. 당신 말이 맞아요.” (P60-61)
“어떻게 식물에 관심을 가지게 됐죠?”
케르뫼르가 누구를 향해서랄 것 없이 물었다.
나와 남자는 우리가 올랜도에서 태어났고, 아버지가 디즈니월드의 정원사였고, 어릴 적 우리의 보금자리였던 거대한 놀이공원에서 가장 관심을 끈 것이 바로 자연이었노라고 번갈아가며 대답했다. 내가 남자에게 재빨리 물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제일 처음 가르친 게 뭐지?”
내가 말해놓고도 큰 충격을 받았다. 그에게 마치 우리가 쌍둥이 형제라도 되는 양 말을 건넨 것이었다. 남자는 내 눈 속에서 답을 찾는 듯 말없이 나를 바라본다.
“뱀을 미워하지 말라는 것.”
마침내 그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식물이 숨 막혀 죽으면 안 되니까.”
“왜 그런 거죠?”
뮈리엘이 그에게 물었다.
내 목에 덩어리 하나가 턱 걸렸다. 남자는 딱 내가 썼을 법한 단어들을 써가며, 뱀이 모기 유충을 먹고 살아서 식물 잎의 호흡을 막는 살충제를 덜 쓰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는 폴리네시안 호텔의 무성한 무궁화와 대나무 숲 속에서 아버지가 처음으로 내게 뱀을 쓰다듬어보게 하던 순간을 떠올린다. (P72-73)
“아마 당신은 기억상실이 아니라고 믿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기억상실이란 반드시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그보다 더 복잡하지요. 선을 다시 잇기를 거부한다는 뜻도 포함될 수 있어요.”
“무슨 선이요?”
의사는 침을 삼키고, 손목시계의 금속 부분을 만지작거린다.
“코마는 매혹적인 미지의 땅이라서, 우리는 이론적인 정보를 가지고 그것을 측정하거나 단계를 매길 뿐입니다. 내가 당신이 코마에 빠진 동안 글래스고 코마 테스트에서 11점 중 4점을 기록했다고 일러주거나 당신의 유발전위를 측정해 알려준다 한들, 앞으로 당신한테나 나한테나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당신은 벌써 코마에서 깨어났는데요. 우리는 더듬어보고, 확인하고, 분류하지만, 사실 아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마저도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서 아는 것이죠. 당신은 백 명에 두 명꼴로 나타나는, 내가 다시 수면 위로 불러들인 환자 가운데 한 명이에요. 의사들끼리는 ‘영접한다’는 표현을 씁니다만, 나는 별별 환자들을 다 봤습니다. 혼란스러워하는 환자, 허탈감에 빠진 환자, 혹은 충만감에 기운이 넘치는 환자, 그중엔 죽음의 경계에서 빛의 터널과 천사를 봤다는 사람, 병상 주변에서 사람들이 한 이야기를 하나하나 다 듣고 기억하는 사람, 그런가 하면 고통스러운 기억이나 경중(輕重)한 상처들을 지워버리는 코르사코프 증후군을 겪는 사람, 자신의 정체성을 부분적으로 혹은 전부 잃어버린 사람, 그것을 즉시 되찾는 사람, 몇 년에 걸쳐 조금씩 되찾는 사람......” (P80-81)
“선생님, 내가 깨어난 뒤에 한 가지 말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아마도 정신을 잃었을 때....”
그는 잠시 나를 말줄임표 속에 내버려두더니 내 말을 대신 끝냈다.
“NDE예요. 그렇죠?”
다시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게 뭡니까?”
“임사체험. Near Death Experience입니다. 육체를 빠져나가니 자신의 몸이 저 아래에 보였고, 커다란 사랑과 행복의 물결이 당신을 터널로 끌어들이는 느낌이 들었겠죠. 그러더니 빛으로 이루어진 형체가 나타나 아직 당신의 때가 아니니 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일깨워주었을 테고요.”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팔걸이 위에 올린 팔이 경련하듯 오그라들었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통계죠. 코마 환자의 35퍼센트가 그런 경험을 말해요. 그건 뇌의 질식과 잇따르는 글루탐산염 분비가 빚어내는 단순한 화학적 환각일 뿐입니다. 과다한 글루탐산염은 시냅스의 정보교환을 과도하게 촉진해요. 뉴런 표면에 너무 많은 문들이 열리는 거죠. 이 문들을 NMDA 수용체라고 부르고요. 그러면 그 결과는 뭐냐. 너무 많이 만들어진 칼슘이 뉴런을 침범해, 뉴런은 죽게 됩니다. 따라서 뇌는 급하게 NMDA 수용체를 차단하는 물질을 만들어내야 되는데, 그 물질이 바로 케타민입니다. 해리성 마취제인 케타민이 육체를 이탈해서 허공을 떠돌고 빛의 형체를 가진 존재를 만난다는 느낌을 주는 거예요.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안심하라는 듯한 의사의 미소를 보자 적개심과 실망감이 뒤섞여 들끓었다. 그는 만년필 뚜껑을 열고, 미간을 찌푸리며 펜촉을 흡묵지(吸墨紙) 위에 문질렀다. 지금도 새하얀 터널이, 그토록 강렬하면서도 전혀 눈부시지 않던 그 빛 속을 부유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멋지고 활기차던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 정원사 작업복을 입은 아버지는 나직이, 입술도 떼지 않고 내게 말했다. 마틴, 두려워말고 내 몸으로 돌아가라. 너는 두 번째 삶을 살게 될 거야. 그 삶을 어떻게 살지는 오직 너만이 결정할 수 있어.
“그리고 당신이 깨어났을 때, 케타민의 환각성이 당신을 실제와 단절시켰기 때문에 기억에 미치는 글루탐산염의 자극 효과가 더욱 배가된 겁니다. 그래서 코마 상태에서 당신이 짜놓은 시나리오가 당신이 현실에서 접할 수 있는 온갖 모순괸 정보들보다 훨씬 더 무거운 진실의 무게를 가지게 된 거고요. 내 이야기를 당신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도 나로선 놀랍지 않아요.”
“하지만 선생님은 임사체험을 믿지 않는다면서 왜 텔레파시니, 타인의 뇌를 스캐닝하는 뇌파니 하는 것들은 믿는 겁니까?”
“난 믿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에게서 임사체험 이야기를 끌어내고 싶었습니다. 환각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건, 첫 번째 진료라는 걸 고려하면 대단한 성과예요.” (P85-87)
나는 난롯가의 자리로 돌아왔다. 의사가 거슈윈의 곡이냐고 묻는다. 나로서는 알 턱이 없다. 계속되는 질문을 피하고자 그냥 손이 많이 굳었다고 대답했다. 의사도 더는 묻지 않는다. 타오르는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헛되이 수색을 계속한다. 그리니치의 집을, 내가 태어난 집을, 브루클린에 있던 친척의 집을, 그리고 예일대 기숙사를..... 피아노의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고, 솔페주를 배우거나 스케일을 익히는 내 모습도 전연 떠오르지 않는다. 피아노는 내 역사 속에 없다. 그런 기억은 없다. 그런데도 나는 피아노를 칠 줄 안다.
의사가 잔을 다시 채우고 땅콩을 내게 권한 뒤 접시를 자기 무릎에 올려놓는다. 그가 나의 혼란을 눈치챘는지는 알 수 없다.
“선생님, 환생을 믿으세요?”
“어떤 의미에서요? 전생 개념 말인가요?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아이들이 재활용된 시체들이라는? 그 이론에 따르면 지난 생을 잘못 살면 다음 생에 불운하거나 아프거나 가난하게 태어나 그 대가를 치른다죠? 아뇨, 그건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자기 암시일 뿐이에요.”
“지구 인구의 3분의 2가 그걸 믿어요.” (P117)
“이런 이야기 아십니까?”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생쥐를 대상으로 실험해보면, 뇌의 80퍼센트를 들어낸 뒤에도 여전히 미로 속에서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
“그게 저하고 무슨 관계가 있죠?”
“그리고 하버드 대학의 맥두걸 교수가 증명한 바로는, 미로에서 길을 외웠던 생쥐들과 아무런 생물학적 연관이 없는 다른 쥐들도 몇 년 뒤 결국 같은 속도로 출구를 발견했다죠. 마치 그 미로에 과거 경험의 기억이 저장돼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해리스 씨, 기억은 어디에 저장돼 있는 걸까요? 뇌의 내부일까요, 아니면 바깥일까요? 환자의 측두엽 해마의 특정 지점에 여러 차례에 걸쳐 전기자극을 가하면, 곧바로 중요한 기억을 불러들이기는 하는데 그 기억이 매번 동일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요? 우리의 뇌는 저장고라기보다는 오히려 송수신기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더 멀리 나가볼게요. 산소공급이 안 되고 코마 상태에서 기능이 완전히 정지된 뇌가 어떻게 장기적으로 기억을 저장하고 다룰 수 있는 걸까요? 임사체험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죽음의 경계에서는, 아마 영매가 접신하는 경우도 비슷할지 모르겠는데, 우측 측두엽이 갑자기 활동을 시작해 자신도 모르는 새에 몸 바깥에 있는 일종의 데이터뱅크와 접속하는 것은 아닐까요? 당신의 데이터뱅크일 수도 있고.... 떠도는 영혼의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당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남편 것일 수도 있고요.”
나는 잔을 내려놓고 그가 내미는 땅콩 접시를 사양했다.
“그런데 왜 늘 같은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겁니까? 왜 저쪽 남자가 내 데이터뱅크를 해킹했을 거라는 말은 안 하는 거죠?”
“왜냐하면 아내분이 그쪽을 남편이라고 하니까요.” (P120-121)
의사는 말을 맺게 해달라는 의미로 한 손을 들었다.
“당신이 코마에 깊이 빠졌고, 대뇌피질은 외부의 자극과는 무관하게 전기활동을 하고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예? 분리된 당신의 의식, 이것을 당신의 ‘유체’라고 부릅시다. 유체가 리즈의 방으로 이동합니다. 가봤더니, 예를 들어 리즈가 그 남자와 섹스를 하고 있었다고 가정합시다. 조금 전 당신 말은 달랐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황인 거죠. 그래서 급기야 꿈속에서 그 남자를 가리는 차폐용 영상으로 리즈가 길에서 모르는 남자에게 키스하는 상황이 등장하는 거죠. 그런데 리즈의 방으로 갔던 바로 그 순간, 질투심과 죽지 않겠다는 일념이 서로 결합해 당신의 유체가 그 연인의 의식을 포획합니다. 로시타 로페스의 사례에서 본 것처럼 아주 끈질기게, 그 경우와 다른 점이라면, 그다음에 어떤 결정적인 작용이 일어나 당신은 당신의 능력을 그대로 간직한 채 코마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이죠. 아마 내 자리를 절대로 넘겨줄 수 없다는 당신의 집착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침투의 흔적은 당신이 점령했던 연인의 기억 속에 그대로 남은 거죠. 하나의 의식이 여러 곳에 공존하는 이유, 지금 이 순간 당신 말대로라면 진위를 가릴 수 없이 모두 진짜인 두 명의 마틴 해리스가 공존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는 내가 흡수한 것을 소화시킬 시간을 주려는지 잠깐 뜸을 들였다.
“하지만 이 경우 내가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당신 아내가 왜 당신을 기억에서 말소하고 점령된 쪽을 선택했는가 하는 거예요.”
나는 잔을 내려놓았다. 나도 그 부분은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건 전부 다 가정에 불과해요.” (P132-133)
나는 저 남자가 왜 가짜인지 안다. 그의 얼굴에서, 기질에서, 초연함에서 알 수 있다. 그는 수치스러움의 경험이 없는 사람이다. 여자아이들의 눈에 담긴 멸시를 쫓아내려고 애쓴 적이 없다. 감자튀김 냄새를 풍긴 적도 없다. 지금 이 주장이 내가 곧 받게 될 신원 증명에 비하면 하잘것없다는 걸 알지만, 이것은 나의 폐부 가장 깊은 곳에서 공명하는 진실이다. 부끄러움의 결핍,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를 향한 증오가 더욱 끓어오른다. 내가 응시하는 덧창 너머에서 그가 리즈와 사랑을 나눈다는 생각을 떠올렸을 때 보다 더욱 격렬하게, 마치 내가 그를 원망하는 이유가 그가 가짜라서기보다 충분히 진짜가 아니라서인 듯이. (P141)
호텔 직원 하나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퇴각하여 조금 전 나를 숨겨준 보리수로 돌아갔다. 내가 지금 느끼는 질투에 더 이상 폭력성 따위는 들어 있지 않다. 이건 낭떠러지다. 자유낙하다. 그녀에게는 대체 몇 명의 연인이 있으며, 그녀는 내 인생에 몇 명의 남자를 끌어들일 참인가? 뒤라스 가의 아파트에 안착한 남자로는 벌써 성에 차지 않는 것인가? 그녀는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나를 죽일 셈인가? 그녀는 환자다. 미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침묵, 충돌, 결혼의 권태 아래 숨은 우울로 얼룩진 그 시절에 이미 잠복해 있었다. 그 분절점이 제니 존스 쇼 때문에 그녀에게 손찌검을 하고 만 순간이었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문제의 진짜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내게 한 번도 납득할 만한 이유를 내놓지 않았던, 그녀가 변호사 사무실에서 해고됐던 일? 그녀를 두고 지구촌 곳곳의 숲을 찾아 탐사를 떠났던 일? 아니면 집에서 50마일 떨어진 실험실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던 나의 일상? 일을 마치고 돌아와 그녀가 어딘가 이상하게 여겨질 때마다 그녀는 내 연구가 어떻게 돼가고 있냐고 물음으로써 화제를 딴 데로 돌렸고, 처음에는 정말로 내 일에 대단히 매료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나는 물밑을 보지 못했다. 나는 나의 예상, 나의 실험, 깜짝 놀랄 만한 발견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녀는 홀린 듯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안심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그녀를 꿈꾸게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편안히 잠들었다.
사진가가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먼저 나간다. 그는 ‘취재 차량’ 딱지가 붙은 스쿠터에 올라탔다. 삼 분 뒤, 이번엔 그녀가 호텔을 나와 올 때와 똑같은 표정으로 지하철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도 기계적으로 뒤따른다. 그 남자가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왜 만남이 이토록 짧은지, 왜 그녀가 저토록 심드렁하게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만 신경 쓰는지 애써 알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속도를 높여 따라붙다가 생각을 바꿨다. 여기서는 아니다. 미행 도중에는 아니다. 힘의 우위에 있는 상태에서는 아니다. (P144-145)
“당신이 진짜라고 내가 확신하게 된 순간이 언제인 줄 알아요? 범인을 찾아낸 수국 얘기를 했을 때예요. 그리고 저쪽 남자가 어린 시절 얘기를 했을 때, 추억을 이야기하는 건 그쪽인데, 정작 눈 속에서 그 시절을 다시 살고 있는 건 당신이더라고요. 아버지가 미키마우스 모양으로 깎았다는 나무 이야기며, 핫도그 이야기며, 롤러코스터 이야기며...... 나 기분이 너무 좋아요. 마틴! 잼 줄까요?”
다시 태어나는 여자는 아름답다. 내 사건과, 그녀가 그 속에서 떠안은 역할과, 기를 쓰고 끝까지 소신 있게 지켜낸 나에 대한 믿음을 거치면서 그녀는 변했다. 나는 흥을 깨는 말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조사 보고서는 내 주머니에 그대로 들어 있다. 나는 아름다워진 그녀를 바라본다. 그건 그녀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입가의 주름이 미소와 열정과 우리가 함께 먹는 커다란 파이에 묻혀 사라졌기 때문이다. (P165-166)
자동차가 노랗게 변한 등나무로 덮인 대문을 지났다. 내 시선이 금이 쩍쩍 간 돌기둥에 가서 멎었다. 거기에 이 빌라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파란 잎. 충격의 파동이 머릿속을 쿵쿵 울린다. 천천히 무너지는 둑처럼, 무너졌다가 새롭게 조합되는 풍경처럼. 나는 눈을 감고 목덜미를 머리받이에 깊이 기댔다. 그리고 영상들이 제자리를 찾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디 안 좋으세요, 마틴?”
“아니, 아니에요. 좀 피곤해서. 곧 괜찮아질 거예요.”
그는 더 말하지 않는다. 다시 눈을 떴다. 보리수 아래의 자갈 오솔길. 자동차를 대 ㄴ지점 바로 앞의 유리새시로 외부와 차단된 계단. 버드나무에 묶어둔 오토바이가 낯익다.
“파란 잎이라, 이름이 재미있네요.”
내가 이 집에 처음 오는 방문자다운 거리낌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어떻게 붙여진 이름인가요?”
“모르겠습니다. 아마 옛날에 이 집에 작가가 살았거나 했겠죠.”
공기는 따뜻하고, 소음은 멀고, 가꾸지 않은 정원은 이웃집들을 가려버린 거대한 측백나무 그늘에 잠겨 어슴푸레한 빛만 감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낙엽들이 바스락거린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내가 반대 방향으로 뛰어내려갔던 테라스의 여섯 계단을 올랐다. 문이 바닥의 타일과 마찰하면서 삐걱대는 소리, 검은 쇠문살에 끼인 불투명한 유리가 댕그렁 흔들리는 소리가 귀에 익다. 그리고 이 냄새, 습기와 전기 난방이 뒤섞인 냄새. 괘종시계의 초침 소리와 라디에이터 돌아가는 소리.
트레이닝복 차림의 젊은 남자가 부엌에서 커피를 준비하고 있다. 로드니가 그와 나를 서로 소개한다.
“이쪽은 파스칼, 여기 사는 제 친구입니다. 그리고 이족은 마틴 해리스 교수님.”
우리는 서로 인사하며 반갑다고 말했다. 엊그제 경찰서 앞에서 나에게 담뱃불을 빌리던 그 남자다. (P190-191)
“시작하시죠, 박사님.”
랠프가 총구를 느슨하게 내 머리에 붙인 가운데, 박사가 피우던 시가를 내려놓고 내게 다가와 눈을 들여다보며 조용하고 느린 음성으로 입을 뗀다.
“이제 긴장을 풀어요. 내가 넷을 세면 당신은 완전히 이완됩니다. 하나, 당신은 생각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집니다. 여덟을 세면 당신은 지금 서서히 벗어나고 있는 각성 상태로 되돌아옵니다.”
나는 그에게 대체 이게 무슨 쇼냐고 묻는다.
“둘, 당신은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됩니다.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 의식의 경계가 후퇴하고 내 말에 따라 자리를 옮깁니다. 셋.”
숫자가 커지면서 나도 더 반항하지 않는다. 시선을 고정하고 입은 헤벌린 채, 박사가 익히 보아온 말 잘 듣는 실험대상이 된다.
“당신은 완전히 이완됐습니다. 이제 긴장은 조금도 남지 않았습니다. 일곱, 하는 소리와 함께 내가 당신에게 당신이 누구인지 말할 테니, 당신은 내 말이 진실인지 대답합니다. 일곱, 당신은 마틴 해리스, 식물학자이며 엘리자베스 라카리에르의 남편입니다.”
“맞아요.”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박사의 눈썹께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정말 믿을 수가 없어.”
네츠키가 했던 말을 또 한다.
“연극을 하고 있을 가능성은요?”
“뭐하러 그러겠소? 제거될까봐 여기서 도망친 자가 왜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다시 들어오겠소?”
“그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예요?”
랠프가 신경질적으로 묻는다.
“코마의 부작용이오. 부차적으로 심은 기억이 본래의 기억을 갈아치웠어.”
박사가 내 코앞에서 손가락을 튕긴다.
“여덟!”
그는 시가를 뻐끔뻐끔 피우며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관찰한다.
그리고 일 분여 뒤, 게걸스럽게 즐거워하며 말을 잇는다.
“만일 내가 당신이 가공의 인물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지난 사흘 동안 견지했던 진심을 담아 나를 변호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만큼은 내 진심이 아주 믿을 만하다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그것을 조종할 수 있으니까.
“당신에게 이 말을 하는 데 나만큼 적임자도 없지. 당신을 만든 사람이 바로 나니까.”
“박사님이 네 머리에 나무 가꾸는 책이며 디즈니월드 브로슈어며 예일대 연감 등등을 쑤셔넣었다. 알아들어?”
“그보다는 좀더 복잡한 일이었지.”
박사가 정정하고 나선다.
“나는 당신에게 마틴 해리스의 정체성, 일대기, 기본 성격, 그리고 일련의 식물학 지식을 프로그래밍했다오. 진짜 행세를 할 때 필요한 것을 길어 쓸 수 있도록.”
“스티븐 러츠, 뭐 생각나는 것 없어?”
나는 다른 반응 없이 기계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너야.” (P194-196)
“자, 마지막 기도나 하라고, 동지. 우리 모자라는 마틴 해리스 씨께서 신을 믿는다면 말이지만.”
그가 총에 장전하는 동안 나는 왜, 왜를 연발했다.
“네가 지금까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좀 알아야 돼, 스티븐. 그리고 널 임무에서 뺀 뒤로 네가 우리한테 얼마나 골칫거리였는지도.”
“무슨 임무?”
그는 한숨을 쉬며 총구로 내 얼굴 윤곽을 따라 더듬었다.
“네가 손을 다치는 바람에, 다른 저격수를 네 자리에 심고 너를 여기에 데려다놨지. 너는 겁을 집어먹고 튀었고, 우리는 트럭을 타고 따라가 너를 센 강에 쳐박았어. 처음엔 익사한 줄 알았고, 다음엔 코마에 빠져 못 깨어나는 줄 알았는데, 웬걸. 자기 집이라면서 아파트에 들이닥쳐 소란을 피우더군. 현장에서는 도무지 없앨 수가 없었어. 경찰을 찾아가지 않나, 대사관에 신고하지 않나, 탐정을 고용해 조사를 의뢰하지 않나, 아무튼 네 후임의 정체가 드러나도록 갖은 방법을 쓰더군. 물론 네 대역이 너만큼 믿음직스럽지 못하기도 했지. 네츠키에게 주어진 시간이 엿새밖에 없었거든.”
나는 넋이 나간 목소리로 그 모든 게 다 무슨 목적을 위한 것이냐고 물었다.
“무엇의 목적? 식물학자를 만든 목적? 그 아이디어를 낸 건 너였어. 인터넷에서 아파트를 찾은 것도 너고. 창문에서 엘리제 궁정원이 보이기 때문에 경찰에서 세입자들의 신원을 관리하거든. 또 집주인 마음에도 차야 했고, 집주인의 연구를 뒷받침할 수 있는 동료가 세입자로 나타나는 기막힌 우연을 연출한 거지.”
내 삶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과 함께 산산조각 난 처지가 된 나는 의자에 몸을 축 늘어뜨리고 앉아 줄곧 도리질을 했다. 그리고 끝까지 받아들일 수 없는 양, 나는 마틴 해리스라고 쉬지 않고 중얼거렸다. 랠프가 이젠 질렸다는 듯 나를 쏘아보았다.
“이놈의 최면,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군.”
그는 으르렁거리며 총구를 내 입에 쑤셔넣었다. (P199-200)
나머지 이야기는 나도 남들처럼 뉴스를 보고 알았다. 금요일 밤. 가스 누출 사고로 뒤라스 가에 사는 두 남녀가 목숨을 잃었다. 토요일 오전, 대통령은 프랑스 대통령과 엘리제 궁에서 오찬 회동을 가졌다. 언론 사진 촬영을 위해 계단에서 양국 대통령이 악수하는 순간, 폭발음이 들리면서 그곳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안전 요원들은 즉시 사진기자들을 에워쌌지만, 알고 보니 헛소동일 뿐이었다. 그것을 댈러스 테크닉이라고 부른다. 즉, 내 대신 투입된 저격수를 엄호하기 위해 미리 취해둔 조처였다. 저격수가 표적을 겨냥하는 동안 사브리나가 미리 손써둔 카메라가 펑 수리를 내면서 사진기자가 총을 쏜 양 오도하려던 것이다. 그리고 사진기자를 체포하는 데 이목이 집중되는 동안, 두 사람은 지역 전체가 봉쇄되기 전에 여유롭게 아파트를 떠나는 것이 원래의 계획이었다.
플래시를 터뜨렸다는 이유로 계속 잡아둘 수는 없었으므로, 사진기자도 이틀 뒤 풀려났다. 공식적으로는 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발드마른의 골짜기로 추락해 죽은 것으로 돼 있다. 불에 타버린 미니밴의 잔해에서는 적어도 한 명 이상의 탑승자의 흔적이 나왔다.
오늘은 그 모든 일이 나와는 아무런 관련 없는 머나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몇 주가 흐르면서, 예전에 내 삶을 가득 채웠던 사람들은 추상적인 존재가 돼버렸다. 최면을 걸 때 사용한 몇 마디를 통해 창조된 정원사 아버지만큼도 실재하지 않는 존재들, 그 아버지는 육신을 갖추고 코마 속으로 나타나 이렇게 말했었다. 너는 두 번째 삶을 살게 될 거야. 그 삶을 어떻게 살지는 오직 너만이 결정할 수 있어. 당시의 삶을 벗어나지는 못하면서도 거부하던, 내 무의식의 목소리. (P204-205)
그 외의 모든 것, 어린 시절부터 주입된 차가운 폭력성. 군대에서의 경험, 훈련소에서 익힌 거짓 동지애, 죽음에 대한 무감각, 타인의 피를 지불하고 구한 희귀서들은 거죽의 흔적만 남겼을 뿐이다. 나의 정신은 훈련과 세뇌의 결과물이었지만, 어느 날 최면이 거기에서 나를 꺼내주었다. 이식된 누군가가 나를 점령한 덕분이다. 축적된 정보를 하나의 인간으로 형상화한 코마의 신비 덕분이다. 내가 정말로 다른 사람이라고 믿었던 그 엿새 동안 내 머릿속에서 생긴 변화의 결과를 나는 지금까지도 새롭게 발견하고 있다.
내가 진심으로 구원이라는 것을 믿게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의심 속에서도 나는 애쓰고 있다. 그래서 나는 운명을, 회귀를, 후회를 거부한다.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이미 저지른 악이 아닌, 앞으로 행할 수 있는 선이다. 거기에는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들여야 하겠지만, 어쨌든 나는 내 의지가 가진 능력을 믿는다. 나는 분명 나라고 믿었던 그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P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