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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실 해밋의 <그림자 없는 남자>

영화 <그림자 없는 남자> 1934년

by 노용헌

‘하드보일드의 원조’라고 평가받는 미국의 소설가 대실 해밋의 소설은 <붉은 수확>을 비롯해 <데인 가의 저주> <몰타의 매> <유리 열쇠> <그림자 없는 남자> 등 다섯 편이다. 해밋은 1920~1930년대에 무미건조한 묘사와 극사실주의를 표방한 탐정 소설들을 써내, 셜록 홈스식 수수께끼 탐정 소설이 주류를 이루던 당시 출판 시장에 큰 바람을 일으켰다. <베를린 천사의 시>로 유명한 영화 감독 빔 벤더스는 해밋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해밋>을 제작하기도 했다. 해밋의 작품들은 대체로 폭력과 속임수, 범죄가 난무하는 비정한 세계와 그 속에서 벌어지는 유혈극 등을 감정을 배제한 극사실주의적 서술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작가 자신이 핀커튼 탐정 사무소에서 일했던 경험도 있으며, 당시 직장 선배를 모델로 삼아 <붉은 수확> <데인 가의 저주>의 주인공 탐정을 창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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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림자 없는 남자>(The Thin Man)는 1934년 개봉한 범죄 코미디 영화로, 대실 해미트의 마지막 장편소설인 <그림자 없는 남자>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W. S. 밴 다이크가 감독을 맡았으며, 윌리엄 파월과 머나 로이가 각각 탐정과 그의 아내 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저예산으로 제작됐지만 흥행에 크게 성공했으며 이후로도 후속작이 연달아 나왔다. 한편으로 파월과 로이가 각각 맡은 부부 캐릭터는 이후 부부 탐정을 다루는 영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아카데미상 4개 부문(작품·남우주연·감독·각색상)에 후보로 올랐으나 수상에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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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발명가 클라이드 밀러 와이넌트의 비서 32세 줄리아 울프의 시신이 어제 오후 늦게 그녀의 자택인 이스트 54번가 411번지의 아파트에서 발견되었다. 시신을 발견한 사람은 와이넌트의 전 부인 미미 조젠슨으로 전남편의 현주소를 알아내려 그곳에 갔던 것으로 밝혀졌다.

유럽에서 6년을 보내고 지난 월요일 돌아온 조젠슨 부인은 살해된 여자 집의 초인종을 누르다 약한 신음 소리를 듣고 엘리베이터 보이 머빈 홀리에게 알렸으며, 그는 다시 아파트 관리인 월터 미니를 불렀다. 그들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을 때 울프 양은 가슴에 32구경 총알 네 발을 맞은 채 침실 바닥에 쓰러져 있었으며,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경찰과 구급차가 도착하기 전 숨을 거두었다.

와이넌트의 변호사 허버트 매컬리는 10월 이후 와이넌트를 본 적이 없다고 경찰에 진술하였다. 그는 어제 와이넌트가 전화를 걸어 와 만날 약속을 하였으나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으며, 현재 의뢰인의 행방은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매컬리의 말에 따르면 울프 양은 지난 8년간 와이넌트의 비서로 일해왔다. 그는 또한 그녀의 가족이나 개인 사정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고 살인 사건에 대해서도 더 이상 알려 줄 수 있는 바가 없다고 하였다.

검시관에 따르면 총상은 자해라 볼 수 없으며.....

나머지는 그런 사건이 있을 때마다 경찰이 내놓는 흔하디흔한 말이었다.

“그가 죽였다고 생각해요?”

내가 다시 신문을 내려놓자 노라가 물었다.

“누구? 와이넌트? 혹시 그랬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지. 돌아도 단단히 돈 사람이거든.” (P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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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 와이넌트, 조젠슨이 얽히고설킨 이 사건에서 지금까지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 4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루벤 커피숍에 들러 노라가 신문을 펼쳤고, 가십 칼럼에 다음과 같은 글이 한 줄 적혀 있었다.

“트랜스 아메리칸 탐정 사무소의 전(前) 스타 닉 찰스, 줄리아 울프 살인 사건을 해결하러 오다.”

그리고 그로부터 여섯 시간 후, 노라가 흔들어 깨워 눈을 떠 보니 총을 든 한 사내가 침실 문간에 서 있었다.

그는 중간키에 통통하고 피부색이 어두운 비교적 젊은 남자로, 턱이 넓적하고 눈 사이가 좁았다. 검정색 중산모에 꼭 맞는 검정색 코트, 짙은 색 양복과 검은색 신발 차림이었는데, 마치 모두 15분 전에 산 것 같았다. 뭉툭한 검정색 38구경 자동 권총은 어디도 가리키지 않은 채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들어오라고 할 수밖에 없었어요, 닉. 꼭 당신을......”

노라였다.

“당신과 이야기를 해야 해. 그게 다야. 하지만 꼭 해야만 해.”

총을 든 사내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음산했다.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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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가 의식을 되찾는 데는 5분이 걸렸다.

그녀는 한쪽 볼에 손을 대고 앉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손에 수갑을 찬 모렐리가 두 형사 사이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경찰들이 그를 잠깐 가지고 논 것 같았다. 노라가 나를 노려보았다.

“이 바보. 날 기절시킬 것까진 없었잖아요. 그를 잡을 줄 알고 있었다고요. 그 장면을 보고 싶기도 했고.”

그녀가 말했다.

경찰 한 명이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여기 가슴에 털 난 여자 분이 한 명 있군요.”

그가 존경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녀가 그에게 씩 웃어 보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내 쪽을 본 순간 미소가 싹 사라졌다.

“닉, 당신.....”

나는 대단치 않다고 말하고 너덜거리는 잠옷 자락을 들어올렸다. 총알이 왼쪽 젖꼭지 아래로 약 10센티미터 길이의 홈을 파놓은 것이 보였다. 엄청난 양의 피가 흘렀지만 상처는 대단히 깊지 않았다.

“안타깝게 됐군. 몇 센티미터만 더 위로 갔으면 제대로 됐을 텐데.”

모렐리가 말했다. (P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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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실 소파에 편안히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석간신문을 올려 보내 달라고 했다. 신문에 따르면 줄리아 울프를 살해한 혐의로 모렐리를 체포하려고 하자 그가 나를 쏘았고, 나는 상태가 너무나도 위중해 아무도 만날 수 없으며, 심지어는 병원으로 이송되지도 못했다고 하였다. 한 신문은 내가 두 발을 맞았다고 했고 세 발을 맞았다고 한 신문도 있었다. 신문에는 모렐리의 사진과 함께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쓴 13년 묵은 내 사진도 있었다. 기억하기로 아마 윌스트리트 폭발 사건을 맡고 있을 때 같았다. 줄리아 울프 살인 사건에 대한 후속 기사들은 거의 단순한 억측에 불과했다. 신문을 읽고 있을 때 단골 손님 도로시가 도착했다. (P6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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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버트가 자리에 앉았다.

“물어볼 게 있는데요, 보는 것만으로 상대가 약물 중독자인지 알아낼 수 있나요?”

그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 왜?”

“그냥 궁금해서요. 만성 중독자라도요?”

“중독 정도가 심할수록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챌 가능성이 높아지긴 하지. 하지만 그것이 약물 때문인지 확신하기는 어렵단다.”

“한 가지 더요. 칼에 찔리면 당시에는 무언가에 곽 눌린 느낌만 들고 조금 지나야 아프기 시작한다는데, 정말인가요?”

“그래, 꽤 날카로운 칼로 상당히 세게 찔리는 경우라면 그렇지. 총알도 마찬가지란다. 처음엔 충격만 느낄 뿐이야. 그나마 소구경 강철 코팅 총알은 충격도 적지. 출혈이나 고통 같은 건 상처에 공기가 들어간 다음에야 시작되고.” (P80-81)


“그런데 이제 탐정 그만두었다고 그 사람한테 왜 말 안했어요?”

“그랬으면 뭔가 뒤집어씌우려 한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런 인물한테 한 번 탐정은 영원한 탐정이지. 그리고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느니 차라리 거짓말을 하는 편이 낫지. 담배 있나? 어떤 면에서는 그는 나를 정말로 믿고 있어.”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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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 남자 둘이 차에서 기다리고 있어. 그가 돌아오면 붙잡으려고 경찰이 잠복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그가 로즈워터라는 게 확실해?”

그녀가 홱 돌아서더니 날카롭게 물었다. 얼굴에서 두려움은 거의 다 사라지고 목소리도 최소한 인간처럼 들렸다.

“경찰은 확신하는 것 같더군.”

우리는 한참을 서로 노려보았다. 둘 다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조젠슨이 줄리아 울프를 죽였을까 봐, 혹은 그가 체포될까 봐 두려운 게 아니었다. 그가 그녀와 결혼한 이유가 어떻게든 와이넌트에게 해코지를 하려던 것이라 생각하니 겁이 난 것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러한 생각이 웃겨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가 깜짝 놀라더니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싱긋 웃었다.

“절대로 믿지 않을 거예요. 그이가 직접 말해 줄 때까지.”

그녀가 말했다. 목소리는 이제 매우 부드러웠다.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할 건데요?”

나 역시 부드럽게 대꾸했다.

그녀의 어깨가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더니 아랫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그이는 내 남편이에요.”

그 말은 웃겼어야 했다. 대신 나는 갑자기 짜증이 났다.

“이봐요. 미미, 나 닉이에요. 나 기억나요? ‘닉’이라고.”

“나를 좋은 사람이라 여기지 않는 거 알아요. 당신은 내가 마치......”

그녀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그냥 넘어갑시다. 와이넌트가 범인이라는 증거를 찾았다고 했죠? 그거나 들어 봅시다.” (P162-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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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듣고 있었어요. 사람을 연구하는 데 관심이 있다면 그런 기회를 그냥 놓쳐 버리는 건 정말 어리석잖아요. 사람이란 누군가 같이 있을 때랑 옆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할 때 정말 다른 법이니까요. 물론 다른 사람이 그런 개인적인 것까지 보고 있다는 걸 알면 싫어하겠지만..... 새와 동물도 과학자들이 몰래 숨어 지켜보고 있는 게 싫겠죠.”

건물을 나서자 길버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많이 들었니?” 내가 물었다.

“오, 중요한 부분은 거의 다요.”

“그럼 어떻게 생각하는데?”

그는 입을 앙다물고 이마를 찡그리더니 분석적으로 말했다.

“정확히 뭐라고 말하기가 어려워요. 엄마는 때때로 뭔가 숨기는 데 능하지만 없는 걸 지어내는 데는 영 재주가 없거든요. 웃기죠? 아마 아저씨도 아실 거예요. 거짓말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거짓말을 제대로 못한다는 걸. 보통 사람보다 거짓말에 잘 속아 넘어가기도 하죠. 그런 사람이라면 남이 거짓말을 할까 봐 경계할 것 같잖아요? 그런데 그럼 사람들이야말로 무슨 말이든 거의 다 믿어 버리거든요. 아저씨도 그런 거 느꼈죠?” (P172-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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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스는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닫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나는 그녀와 함께 부엌으로 갔다.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닉,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다른 사람이랑 똑같죠.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고, 이쪽이든 저쪽이든 별 생각 없는 사람도 있고.”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치마 두른 사람이라면 무조건 쫓아다니는 해리슨과 함께 사는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요?”

“모르겠어요, 엘리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난 당신이 자기 행동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당신이 어떻게 하든 내가 간섭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그것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문제가 될 법한 말은 절대 안 하죠? 내가 오로지 돈 때문에 그를 떠나지 않는다는 거 알고 있죠? 당신한테는 대단치 않은 돈일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난 어렵게 자랐거든요.”

그녀가 씁쓸하게 말했다.

“이혼을 하면 위자료를 받잖아요. 한 번 생각해 보는 것도.....”

“술이나 마시고 얼른 가버려요.” (P192-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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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안에는 허버트 매컬 리가 붉은색 옷을 입은 갈색 머리의 통통한 여자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에게 손을 흔들고 음식을 주문한 뒤 그들에게 다가갔다.

“여기는 닉 찰스, 이쪽은 루이즈 제이콥스. 앉지. 새로운 소식 있나?”

그의 질문에 내가 답했다.

“조젠슨이 로즈워터야.”

“말도 안 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보스턴에 아내도 있는 모양이더군.”

“그를 보고 싶군. 난 로즈워터를 알고 있으니까, 만나서 확실히 하고 싶다고.”

그가 느릿느릿 말했다.

“경찰에서는 확실하다고 보는 것 같아. 그를 찾아냈는지는 잘 모르겠네. 그가 줄리아를 죽인 것 같나?”

매컬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런 협박을 했어도 로즈워터가 누굴 죽일 사람이라곤 생각지 않아.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협박 당시에 내가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거 기억나지? 또 무슨 일이 있었나?”

나는 곧장 말하지 않고 잠시 머뭇거렸다. (P195-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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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뭉친 손수건을 들고 나를 향해 돌아섰다. 내가 다가가자 그녀가 손수건을 열어 안에 든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7~8센티미터 길이의 시계 체인으로 한쪽은 끊어져 있고 다른 한쪽은 작은 금 나이프가 달려 있었다. 여자 것으로 보이는 손수건에는 갈색 얼룩이 묻어 있었다.

“뭐요?” 내가 물었다.

“그 여자 손에 쥐어져 있었어요. 나만 남겨두고 모두 나갔을 때 발견하고 그것이 클라이드의 것인 줄 알아챘죠. 그래서 가져왔어요.”

“그의 것이 확실한 거요?”

“그래요. 봐요, 고리가 금, 은, 구리로 되어 있죠? 그가 발명한 제련 기술을 이용해 처음 뽑아낸 것으로 만든 거예요. 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게 누구 건지 알 걸요. 이거랑 똑같은 제품은 없으니까.”

그녀가 나이프를 뒤집어 반대편에 새겨진 C.M.W라는 머리글자를 보여주었다.

“그의 머리글자잖아요. 이 나이프를 본 적은 없지만 이 체인은 어디서든 알아볼 수 있어요. 클라이드가 오랫동안 이걸 차고 있었으니까.”

“그걸 다시 보지 않고도 묘사할 수 있을 정도요?”

“물론이죠.”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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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드가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여기 이 체인과 나이프를 바닥에서 주웠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줄리아 울프가 와이넌트와 몸싸움을 하다가 끊어져 떨어진 것이겠죠. 그리고 지금까지 이걸 숨겨온 이유를 말해 줬습니다. 탐정님과 저 사이니까 하는 말인데 합리적으로 판단하면 전혀 말이 되지 않아요. 물론 이 사건에서 합리적인 판단 같은 건 통하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탁 터놓고 말해서 그녀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감이 안 옵니다. 정말이에요.”

“중요한 건 그녀의 수작에 말려들지 않는 겁니다. 거짓말을 하는 걸 잡아내면 그녀는 순순히 인정하고 또 다른 거짓말을 지어내지요. 그래서 그걸 또 잡아내면 거짓말이라는 걸 인정하고 또 다른 거짓말을 합니다. 그렇게 계속되는 거죠. 사람은 대부분, 심지어 여자들도 세 번째나 네 번째 거짓말을 들키면 진실을 털어놓거나 아예 입을 다물기 마련인데 미미는 아니에요. 계속해서 다른 거짓말을 지어낼 겁니다. 그러니까 조심해야 해요. 안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말을 믿게 될 테니까. 그것도 그녀가 진실을 말한다고 판단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녀를 불신하는 데 질려버리기 때문에.” (P24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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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괴상한 편진가?” 내가 물었다.

“아니, 전화를 했더군. 오늘 밤에 만나기로 했지. 자네와 함께 말이야. 직접 만나기 전까지 자네가 그를 위해 일을 할 생각이 없다고 전했더니 오늘 밤 만나자고 하더군. 물론 경찰도 데리고 갈 걸세. 더 이상은 그를 이런 식으로 보호할 핑계를 찾을 수가 없거든. 정신 이상을 근거로 정신 병원 감금 정도로 마무리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하고 싶은 전부야.”

“경찰한테도 이야기했나?”

“아니, 전화 온 게 그들이 떠난 직후였네. 어쨌든 자네를 먼저 만나고 싶었어. 자네한테 빚진 걸 잊지 않았다고 알려주고 싶었거든. 그리고.......”

“그런 말 말게.”

“아니야.” 그가 노라를 향해 물었다. “그가 포탄 구멍에서 내 목숨을 구해 준 이야기는 안 했겠죠?”

“이 친구 바보라니까. 이 사람이 누굴 쐈는데 못 맞혔고, 나는 그를 쏴서 맞혔거든. 그게 전부야. 그건 그렇고 경찰은 조금 기다리게 하는 게 어떤가? 자네랑 나만 먼저 나가서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자고. 그가 살인자라고 확신이 들면 그때 가서 그를 깔고 앉아 호루라기를 불어도 괜찮잖아.”

내 제안에 매컬리가 피곤한 기색으로 미소를 지었다.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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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달라진 건 형사님 때문이죠.”

“그건 사실이 아니죠. 이보십시오. 찰스 씨, 그럼 당신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제게 모든 걸 내보이셨다고 맹세할 수 있습니까? 제 눈을 쳐다보고 똑바로 말할 수 있어요?”

거기다 대고 그렇다고 말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차피 날 믿지 않을 테니까.

“실질적으로 그렇죠.”

“실질적으로 그래요? 그렇죠.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이 내게 ‘실질적 진실’을 말했었죠. 내가 원하는 건 망할 놈의 실질적 진실이 아니라 결과를 내 줄 무언가란 말입니다.”

나는 그가 어떤 기분일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형사님이 찾아낸 사람 중 진실 전체를 아는 사람은 없었을지도 모르죠.”

이 말을 들은 그가 불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렇죠? 이보세요, 찰스 씨, 전 지금까지 제가 찾아낼 수 있는 모든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당신이 조금 더 찾아주실 수 있다면 그들과도 기꺼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래, 와이넌트도 그래요. 지금 그를 찾아내기 위해 전 부서 모든 사람이 밤이고 낮이고 일하고 있지 않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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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줄 알았습니다. 직접 나섰는지, 누굴 통해 소개를 받았는지 몰라도 파리에서 그녀와 만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답니다. 거기서부터 나머지 역시 쉬웠죠. 그의 말에 의하면 여자가 첫 눈에 제대로 넘어갔답니다. 여자가 금세 결혼할 생각을 하더라 이거죠. 당연히 그는 말릴 생각이 없었고. 여자는 와이넌트한테 매달 생활비를 받는 대신 한 번에 왕창 돈을 받았습니다. 20만 달러, 맙소사! 매달 돈을 받다가 재혼을 하면 못 받을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조젠슨은 현금이 가득 담긴 서랍 열쇠를 얻은 셈이 된 거죠. 그렇게 결혼을 했습니다. 그의 말을 빌리면 결혼은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 무슨 산맥에서 한 가짜랍니다. 둘을 결혼시킨 건 스페인 신부였는데 결혼한 땅은 사실 프랑스 영토였으니 결혼은 법적으로 성사가 안 된 거라고 하더군요. 아마 중혼 죄를 피하려고 그런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중혼이든 아니든 신경도 안 써요. 중요한 건 그가 돈을 손에 넣었다는 거고. 그렇게 돈이 홀랑 떨어질 때까지 화려하게 살았다는 겁니다. 그러는 내내 그녀는 그가 파리에서 만난 크리스천 조젠슨인 줄만 알았고, 우리가 보스턴에서 그를 잡아들일 때까지도 전혀 몰랐다고 하더군요. 여기까지도 그럴 듯하게 들립니까?”

“그렇군요. 결혼 이야기도 제가 볼 땐 사실인 것 같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P289-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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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시신이라뇨?” 매컬리가 되물었다.

“시신이 토막 나 석회에 덮였거든요. 그래서 보고에 따르면 남은 살점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옷가지는 한데 뭉쳐져 있고, 뭔가 단서가 될 정도는 남아 있어요. 끝이 고무로 된 지팡이도 일부가 남아서 그가 발을 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리고.....”

그때 앤디가 들어왔다.

“어떻게 됐지?”

앤디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가 들어오거나 나가는 걸 본 사람은 없습니다. 왜, 너무 말라서 한 장소에 두 번 서 있어야 그림자가 생기는 사람, 뭐 그런 농담 있잖습니까?”

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농담 때문이 아니었다.

“와이넌트는 그렇게 깡마르진 않았습니다. 물론 마른 편이기는 하죠. 그러니까...... 그 수표나 사람들한테 보낸 편지 두께 정도랄까?”

내가 말했다.

“무슨 소립니까?”

길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얼굴은 점점 붉어지고 눈초리는 분노와 의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죽었어요. 벌써 오래 전에 죽었고 편지와 각종 서류상으로만 살아있다 이겁니다. 그 뚱뚱한 남자의 옷에 감싸인 뼈가 그의 것이라는 데 돈을 걸겠어요.”

“확실한가, 닉?”

매컬리가 내게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P329-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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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컬리가 벌떡 일어섰다.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닉, 하지만 난.....”

“진정하시오. 이야기를 마저 들어봅시다.”

길드가 차갑게 말했다.

“매컬리가 와이넌트를 죽이고, 줄리아를 죽이고, 넌하임도 죽인 겁니다. 이제 어떻게 하고 싶어요? 다음 희생자가 되고 싶어요? 지금 와이넌트를 직접 보았다고 증언해 그를 돕고 나서는 건가요? 그는 지난 10월 이후 와이넌트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그게 그에게 가장 큰 약점이긴 하죠. 하지만 그렇게 도와줘도 그는 절대로 당신을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언제 마음을 고쳐먹을지 모르니까. 당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잖아요. 게다가 지금껏 살인에 쓰인 바로 그 총으로 당신을 해치워버리고 와이넌트에게 뒤집어씌우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쉽죠. 지금 이렇게 구는 이유는 도대체 뭡니까? 서랍에 담긴 보잘 것 없는 채권 몇 장을 위해서? 와이넌트가 죽었다는 게 증명만 되면 아이들을 통해 손에 넣을 수 있는 유산에 비해 아무것도 아닌 돈을 위해?”

“이 개자식!”

미미가 매컬리에게 소리 질렀다. (P33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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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죄가 입증될 때까지는 누구나 결백한 거잖아요. 그리고 그가 결백하다는 여지를 남길 이유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건 배심원들의 몫이지, 수사관이 아니라, 수사관이라면 살인자라 믿는 놈을 잡아다 감옥에 처넣고 모든 사람이 그가 범인이라고. 믿게 만든 다음에 그의 사진을 신문마다 싣게 하는 법이야. 그러면 가지고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지방 검사가 최고의 가설을 만들어 내고, 수사관이 여기저기에 추가로 살을 붙이지. 그러면 그가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뿐 아니라 신문에서 그 사람을 알아본 사람 등이 나타나 우리한테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런 다음에는 곧장 놈을 전기의자에 앉히게 된단 말씀이야.” (그로부터 이틀 뒤, 브루클린에 사는 한 여자가 등장해 매컬리가 조지 폴리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아파트를 빌린 사실을 증언했다.)

“하지만 그건 빈큼이 너무 많아 보이는데.”

“살인이 수학적으로 저질러진다면 해결 역시 논리와 수학으로 가능하겠지. 하지만 대부분이 그렇지 않고, 이 사건 역시 마찬가지야. 옳고 그름에 대한 당신 의견을 반박하는 건 아니지만 그가 가방에 넣어 시내로 들고 가기 쉽도록 시신을 토막냈을 거라고 말하는 건 그게 가장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이지. 그건 아마 10월 6일이나 그 이후였을 거야. 왜냐하면 그때야 비로소 작업실에서 일하던 두 명의 기계공 프렌티스와 맥노튼이 해고되고 작업실이 문을 닫았으니까. 그래서 그는 와이넌트에게 뚱뚱한 남자의 옷과 지팡이, 그리고 D.W.Q.라는 머리글자가 새겨진 벨트를 걸친 다음 바닥에 묻었지. 시신을 손상시키기 위해 석회를 썼는지 다른 것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옷가지는 상하지 않도록 잘 조작되었어. 그런 다음에 그 위로 다시 시멘트를 발랐지. 경찰 조사와 언론 발표가 진행되는 동안 아마 그가 옷과 지팡이, 시멘트 같은 걸 어디에서 구했는지 알아낼 기회가 충분히 있을 거야.” (시멘트는 추적할 수 있었다. 주택 지구에 있는 석탄과 목재 거래 업자로부터 산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것들은 어떻게 구했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 (P337-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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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리한 증거를 숨겨 자신을 도우려 한 미미를 화나게 할 편지를 도대체 왜 보내겠어? 그것 때문에 난 그녀가 체인을 내놓았을 때 그게 조작된 거라고 생각했지. 다만 그걸 거기 심어 놓은 것이 그녀일 것이라고만 생각한 것이 문제였지. 매컬리에게는 모렐리도 걱정스러운 대상이었어. 엉뚱한 사람에게 혐의가 갔다가 그것이 해소되면서 오히려 진실이 발각될까 두려웠거든. 미미는 괜찮았지. 그녀 때문에 모든 게 와이넌트의 소행처럼 보일 테니까. 오직 와이넌트가 의심을 받아야만 와이넌트가 죽었다는 사실이 비밀로 지켜질 수 있었어. 사실 매컬리가 와이넌트를 죽이지 않았다면 다른 이들을 죽일 이유도 없었어. 이 모든 음모에서 가장 확실한 것, 그리고 그 모든 음모를 해결할 유일한 열쇠는 와이넌트가 죽었다는 사실이었지.“ (P34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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