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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로랑의 <내 몸이 사라졌다>

애니메이션 <내 몸이 사라졌다> 2019년

by 노용헌

애니메이션 <내 몸이 사라졌다>는 제레미 클라핀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2019년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BIFF)에 초청됐다. 제7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애니메이션 사상 최초로 비평가주간 그랑프리와 세계 4대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중 하나인 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크리스탈 작품상과 관객상을 수상한 명작이다. <내 몸이 사라졌다>는 잘려진 손 하나가 해부학실을 빠져나와 자신의 주인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그린 독창적이고 철학적인 프랑스 애니메이션이다. '아멜리에', '웃는 남자' 등의 각본에 참여한 기욤 로랑의 소설 '행복한 손(Happy Hand)'이 원작으로 몸에서 떨어진 손의 여정을 강렬하고 감각적인 영상으로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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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에서 태어났다. 나우펠이라는 버젓한 이름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를 늘 나프나프라고 불렀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열두 살이 될 때까지 프랑스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게끔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아들이 네 살 되던 해에는 그를 재우면서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을 읽어주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자 나프나프는 프랑스어의 의미, 언어학적 특성, 문법과 문장구성이 얼마나 미묘한지 깨우치기 시작했다. 양산이 배꼽의 여성형이 아니라는 것과, ‘치즈 위 구더기’나 ‘대머리 위 이’ 같은 말은 금상첨화라는 뜻의 ‘케이크 위 체리’처럼 다른 속뜻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프랑스어는 그의 첫 장난감이었으며, 그는 25년간 이 장난감을 완벽히 깨부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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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감옥과도 같은 프랑스 교육 시스템에는 진로를 조사하는 과정이 포함돼 있었다. 설문지에 ‘희망 직업’을 적으라는 문항이 있었는데, 나프나프는 ‘파라오의 수호자’, ‘수난을 겪는 브랜디 제조자’, ‘빙빙 돌며 춤추는 탁발승’같이 남다른 수사를 사용해 장래희망을 써냈다. 누군가가 그에게 나우펠Naoufel의 철자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으면, 언제나 괴사Nérose의 N, 관절염Arthrit의 A, 다래끼Orgelet의 O, 두드러기Urticaire의 U, 누공Fistule의 F, 습진Eczéa의 E, 나병(Lére)의 L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하지만 자신의 프랑스어 능력과는 무관하게 그는 점차 열등하고 무기력하고 외로운 사람이 되었다.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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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아티에에 머무른 지 2년이 되었을 때, 나우펠의 부모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나우펠을 가엽게 여긴 친절한 이웃이 그를 집으로 데려가서 학년을 마칠 때까지 돌봐주었다.

부모의 죽음 이후, 나프나프는 한동안 아무것도 삼킬 수 없었다. 이웃 아주머니는 죽고 나면 지금처럼 아무것도 먹을 수 없을 거라고 했다. 일리가 있었다. 나우펠은 인조 악어가죽 수첩에 ‘아무것도’ 는 죽은 자들의 음식이라고 썼다. 그는 죽은 자들의 음식을 먹고 싶지 않아서 그날부터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으나, 키는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성장이 멈춰버렸다. 그렇게 그는 어른의 성숙함을 지닌 채 열두 살 아이의 몸에 갇힌 난쟁이 나프나프가 되었다.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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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그는 사촌 여동생의 합법적인 감시자인 남편의 주소를 알아내려고 독사 하르픽을 다시 찾아갔다. 독사는 입술을 핥으며 새로운 소식들을 뱉어냈다. 나프나프는 독사의 이야기를 통해 피펫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압데라우프가 여동생에게 했던 ‘포주’ 행위와 순결을 강요한 아버지의 통제가 맞물려, 셰에라자드는 동네에서 ‘피펫’이란 매력적인 별명으로 불렸다. 독사 하르픽은 나우펠에게 그가 숭배하는 피펫에 대해 사실대로 얘기해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고, 이야기를 옮기며 아주 즐거워했다. 독사에 따르면, 순결한 오럴 섹스 아가씨라고도 불리는 피펫은 나우펠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다며 사람들한테 자랑하고 다녔다. 어리석은 난쟁이 숫총각 나프나프는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는 그녀의 미소를 되찾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P32~33)


어느 이른 아침이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경찰관 두 명이 그를 증인으로 불러 참고인 조사를 하려 했다. 그 전날, 아미나타가 버려진 옛 철길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것이다. 강간당했고 불에 탄 상태였다.

독사 하르픽이 나프나프에게 그 근처에서 불이 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감정이 격해진 나프나프는 예전에 자신이 전화로 신고한 덕분에 아미나타가 탈출할 수 있었다고 경찰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지나가는 말로 자기도 보복당해 불에 탈 수 있다고 말했다. 경찰관들은 비밀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라우프 패거리의 혐의를 확인한 그들은 그의 손을 꽉 잡고 열렬하게 악수한 후 떠났다.

나프나프는 불길한 예감을 안고 필리파르의 목공소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자발적인 증언 때문에 이후에 어떤 일도 생기지 않기만을 기도했다. (P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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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전날, 나프나프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커피를 어찌나 마셔 댔는지 왼쪽 눈꺼풀의 실핏줄이 끊임없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SOS 신호였다. 복도 바닥의 삐걱대는 소리를 커피메이커에서 나는 소리가 덮어버렸을 때, 그는 밖에서 어깨로 쿵쿵쿵 세 번 쳐서 문이 부서지는 장면을 상상했고, 그 후에 일어날 일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라우프의 복수단 서너 명이 그를 붙잡아 천창 밖으로 내던져서 그는 녹슨 홈통에 몇 분 동안 매달린다. 그들은 스카치 접착제 한 통을 지붕 위에 남김없이 짜내고 끈적끈적한 접착제가 그의 손가락에 닿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성냥을 켠다. 불붙은 손가락이 하나씩 풀리면서 그는 결국 7층에서 아스팔트 바닥으로 추락한다. 떨어진 충격이 블랙홀처럼 그를 빨아들이면 아미나타가 손을 내밀어 어둠의 터널에서 빠져나오게 도와준다. 그들은 빛이 가득한 곳으로 나오는데, 그곳에서는 성인들이 자신들의 후광은 원반처럼 던지면서 놀고 있고, 부활한 밤비의 어머니가 그들을 맞이한다. 공중에 뜬 천사들은 반짝이는 색종이 조각 같은 비듬을 비처럼 내리기 위해 머리를 흔든다. (P42)


다음 일요일에 아미나타의 어머니가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막다른 골목 모퉁이로 왔다. 그녀는 법정으로 가는 길에 손을 잡아주어 고맙다며, 부모가 물려준 상아 조각품을 선물로 건넸다. 자그마한 아이의 손을 조각한 것이었다. “이 손이 행운을 가져다줄 거예요.” 그녀가 장담했다. 건물 아래에서 그녀는 숨이 막힐 정도로 나우펠을 꽉 끌어안고는 자신의 모국어로 무언가를 진지하게 말한 후 떠났다. 나우펠을 목이 메어 그녀가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우펠은 협박으로 사용하는 스툴 위에 작은 상아 손을 올려놓았다. 그러나 상아 손이 진짜로 행운의 부적인지 심각하게 의심할 날이 곧 닥칠 예정이었다. (P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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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아래쪽 벤치에 장갑 한 짝을 둔 채 깜빡 잊고 그냥 간 모양이었다. 나우펠은 한 시간 가까이 난간에 팔꿈치를 괴고 서서 장갑이 눈에 덮여 서서히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버려진 장갑이 그의 눈앞에서 추억처럼 희미해졌다. 장갑과 눈 덮인 벤치를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어지자 정원 전체가 사람의 흔적을 지워버린 것만 같았다. 바로 그때 눈이 그쳤다. 그는 사라진 장갑과 벤치를 한참 바라보았다. 달콤한 공기에 취한 기분이었다. “죽는다는 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일 뿐이다.” 아무리 애써도 부모의 얼굴 또한 눈에 묻힌 장갑처럼 기억에서 시나브로 사라질 것이다. 자신도 역시 언젠가는 여기에 없을 것이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자신이 더 이상 풍경의 일부가 되지 않을 그날에 가까워졌다. 인생의 초고에서 마지막 페이지가 넘어가면 눈처럼 하얀 페이지만 남을 터였다. (P4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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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손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나머지 신체를 모두 잃는 것이다. 손은 꼭 필요하긴 하지만 손이 없다고 해서 죽지는 않는다. 해부될 운명을 기다리며 냉장고 안에 있는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낮은 온도 속에서 의식과 감각이 점점 희미해진다. 울고 있는 갓난아기에게 엄지손가락을 내주던 자그마한 내 손이 생각난다. 나는 아기가 입에 넣을 수 있도록 물건을 집어주곤 했다. 나는 아기와 외부 세계를 잇는 유일한 중개자였다.

기억을 빠른 속도로 되감으며 생각하니 코딱지를 파거나 신발 끈 묶는 법을 배우던 일, 손가락을 입에 물리고 잠을 재우던 일까지 내가 기꺼이 견뎌냈던 모든 일이 떠오른다. 나는 처음부터 그가 오른손잡이일 거라는 걸 알았다. 수두에 걸렸을 때는 몰래 긁어주기도 했다. 그는 나를 선택했고, 나는 때가 되면 그에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나에게는 그를 특별한 운명으로 이끌 재능이 있다고 깊이 확신했다. 하지만 나 자신조차도 그의 소명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작은 단서라도 찾으려고 애썼다. 그가 내 손가락 사이에 색연필을 끼워 넣었을 때 소름이 돋았다. 그는 디자이너나 화가 혹은 건축가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소형 오르간으로 연주하는 첫 음을 들었을 때는 피아니스트가 된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림이나 조각이나 문학과 마찬가지로 음악도 그의 손에서 멀어졌다. 그가 손에 황금을 쥐고 있었다는 나의 확신은 여전히 변치 않았다. 내가 ‘그의 두 손에’라고 말하는 것은 비유적인 표현일 뿐이다. 다른 왼손은 조수, 즉 제3의 바이올린에 지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P5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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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왜 잃고 나서야 그 가치를 불현듯 깨닫는 것일까? 아무리 하찮은 일을 하더라도 만족하며 살겠다고 마음먹은 참이었는데, 왜 하필이면 지금 나는 안경을 쓴 연구원에게 해부당할 위기에 처한 걸까? 이 순간 가장 후회되는 것은 내가 잘려 나간 존재에 대해 품었던 원망이다. 어쩌면 인생에서 실패했을 때보다 거장이 되었을 때 겸손함을 유지하는 게 더 어렵지 않을까? (P52)

라시드의 ‘사촌’이 그를 대신해 원형 톱의 작동을 멈췄다. 그러고는 즉시 뒤로 물러나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우펠을 바라보았다. 필리파르와 방문객인 조제트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프나프를 쳐다보았다. 그는 두 사람이 자기를 공격한 자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들 눈에는 ‘사촌’이 톱을 멈추기 위해 사고가 난 직후에 급하게 뛰어든 걸로 보인 모양이었다.

나프나프는 그의 속임수를 비난하고 싶었으나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은 듯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제가 가서 도움을 청할게요.” 가짜 사촌이 말하며 급이 자리를 떴다.

조제프와 필리파르는 창백해진 얼굴로 나우펠의 발치를 응시했다. 두 사람의 시선을 따라가던 나우펠은 그들을 공포로 밀어 넣은 존재를 발견했다. 피투성이가 된 손이 마치 바닥에서 빠져나오려는 듯 손가락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신발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반사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운동화는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피로 이미 젖어 있었다. 나프나프는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오른쪽 팔뚝에서 피가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팔뚝 끝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의 뇌는 여전히 모든 신체기관을 너무나 잘 통제해서 바닥에 떨어져 있는 손도 움직일 수 있었다. 필리파르의 시선이 다시 나우펠의 얼굴로 돌아왔다. 나우펠이 어떤 식으로든 어떤 말로든 반응하기를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나프나프는 힘겹게 할 말을 찾다가 드디어 내뱉었다. “죄송한데, 제가 손을 잃었나요?” 만족스러운 대답은 나오지 않았고 그는 그대로 기절했다. (P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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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불명 상태에서 서서히 깨어나고 있지만, 움직일 에너지를 되찾으려면 나의 자존심을 자극해야 한다. 손은 되는대로 살아갈 권리가 없다. 손은 통제와 관능의 기관이며, 손짓을 통해 자율적이고 보편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인체의 기관 중에 이만큼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절단된 게 발이었다면 그 발은 운명을 벗어날 용기도, 의지도 없었을 것이며, 발가락에 꼬리표를 단 채 냉장고 선반에 멍하니 남아 있었을 것이다. ‘발처럼 멍청하다’라는 말은 흔하게 사용되지만, 손과 관련된 경멸적인 표현을 하나라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생각해보면 무능한 발가락을 가진 발은 실패한 손이자 발육이 부진한 미숙아다. 나는 손이라는 우월한 기관이 지닌 장점을 이용해 관절을 하나씩 풀고 힘겹게 길을 떠난다. 그렇게 벽의 굽도리를 따라가다가 냉장고 근처에서 멈춘다. (P60)

사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좀 더 신속히 대응했더라면 나우펠의 손을 접합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제트와 필리파르는 구조 요청을 한다고 했던 자칭 사촌이 돌아오기를 헛되이 기다렸다. 그들이 기다리다 못해 직접 신고했을 때는 이미 30분 이상 시간이 훌쩍 지났다. 구급차가 교통 체증을 뚫고 오는 동안, 두 사람은 절단된 손을 천에 싸서 냉장고 안의 두 병의 소비뇽 와인 사이에 보관했다. 그리고 이웃 여자에게서 아이스박스를 빌려 그 안에 손을 넣고 생탕투안 병원으로 옮겼다. 의사는 가져온 손의 상태를 살펴보더니 접합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말했다. 열흘 후, 나우펠은 절단되어 퉁퉁 부은 손목 부위를 벨포 붕대로 감은 채 퇴원했다.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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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덧없는 존재다. 눈앞의 쾌락에 너무 일찍 날개를 태워버리거나 누릴 시간도 없는 ‘행복’을 위해 인생을 희생하지 않으려면, 완전히 절충하며 살아야 한다. 많은 사람이 통찰력을 발휘하기보다는 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리석게 행동한다. 또한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갑자기 삶의 방향을 바꿔야 할 때까지는 헛된 기대를 품으며 자신을 속이고 사는 걸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겸손함이 부족하면 현재를 살지 못하는 건 분명하다.

갑자기 실소가 나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체에서 가장 고귀한 기관이 바로 손이라고 자랑하던 내가 겸손함을 운운하다니! 발에다 천하고 어리석다는 낙인을 찍었던 내가! 결국은 관점의 문제일 뿐이다. 숙력된 손은 노예나 마찬가지다. 명령에 복종하여 하찮거나 사소한 무수한 일을 수행하는 것이 손의 기능이니 말이다. 그래서 손을 잘 쓰는 사람을 ‘잡역부’라고도 부르지 않는가? 희열을 정점은 손이 아니라 발이다. 누군가를 ‘발밑’에 두면 ‘손안’에 두는 것보다 자신의 가치가 훨씬 더 올라간다. 그러니 손을 받침대 위에 올려놓고 떠받들어야 한다던 내 생각은 틀렸다.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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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있는 생명의 불꽃을 되살리는 데는 가느다란 햇살 한줄기로도 충분하다. 희망이 조금 보인다. 그래도 몸을 뒤덮은 장미 가시와 멍과 동상을 보니 지난밤의 끔찍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럴 힘도 없다. 그러나 잘 알고 있다. 운명이 내 손을 잡으러 선뜻 와주지는 않으리란 사실을.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든 혼자서 앞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어떤 기적에 의해 내 생명의 빛이 다시 켜졌는지는 몰라도, 나는 결국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고 눈곱만큼씩이나마 아픈 몸을 끌고 가는 데 성공한다. (P88~89)

나우펠은 입가에 조소를 머금고 집으로 돌아왔다. 주머니 속에서 꼭 쥐고 있는 작은 스프레이에는 알라딘 램프의 지니보다 훨씬 유능한 지니가 들어 있었다. 만일 UN이 소방헬기에 이것을 비치해놓는다면, 전쟁이 발발한 모든 지역에 살포하고 나서 전투원들에게 눈 가리고 술래잡기 놀이를 하라고 확성기로 명령만 해도 세계 평화는 해결될 것이다. 이 스프레이로는 무엇이든 가능했다. 셰에라자드에게 뿌려서 그녀가 모든 사람 앞에서 나우펠에게 사랑을 애걸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는 자기 구역의 진정한 주인이었다!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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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가 젖병을 달라고 울며 보채서 아기 엄마는 미사가 끝나기 전에 성당을 떠난다. 담요 밑에서 꿈틀거리는 작은 생명체가 불과 2~3센티미터 떨어져 있다. 무심코 손가락을 앞으로 내밀다가 덧버선을 신은 작은 발에 닿는다. 손가락은 물러서지 않고 접촉을 시도한다. 비극적인 절단 사고 이후 처음으로 인간과 직접 닿은 이 순간이 나를 강렬하게 물들인다.

우리는 좀 더 멀리 두 블록 떨어진 건물에 들어선다.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아기 엄마가 포대기로 싼 아이를 들어올리기 전에 매트리스 아래로 뛰어들고, 그들이 방에서 나가자마자 푹신한 카펫 위로 재빠르게 내려가서 근처에 있는 옷장 밑에 숨는다. 왠지 모를 희망에 부푼 나는 행복한 잠으로 빠져든다.

갑작스레 잠에서 깬다. 거대한 빨판이 내 손등의 피부를 움켜쥐고 있다. 가해자는 나를 삼키는 데 실패하자 그 대신 은신처에서 끌어내려 안간힘을 쓴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나는 카펫을 거머쥐고 손톱으로 옷장 뒤쪽을 꽉 붙든다. 포식자가 마침내 나를 놓아준다. 보아뱀처럼 보이지만 보아뱀이 아니라 진공청소기다.

괴물이 멀어지자마자 그 탐욕스러운 주둥이가 닿지 않는 옷장 바닥 널에 달라붙는다. 오후가 되자 엄마와 아이가 산책에 나선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는 즉시 집 안을 재빨리 탐색한다. 방 두 개, 작은 거실, 욕실이 하나인 아파트다. 세면도구를 얼핏 살펴보니 엄마와 아기 단둘이 살고 있는 듯하다. 세면대에 물을 받아 거품을 내고 한 시간 동안 몸을 담근다. 그러고는 들키지 않으려 아기방으로 돌아간다. 이번에는 옷장 밑이 아니라 옷장 안으로 들어간다. 잠옷과 유아복의 솜털 같은 촉감이 생기 넘치는 작은 몸으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에 불을 지핀다. 옷장 안 한쪽에 남성복 몇벌이 쌓여 있다. 나는 아기에게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밤이 되기만 기다리면서 옷걸이에 걸린 플리스 후드 재킷의 모자를 아늑한 해먹으로 삼아 잠이 든다. (P98-99)


나프나프는 비슷비슷한 부류들에 묻혀 살아가는 불쌍한 익명의 남자처럼 보였으나, 장갑에 손을 끼워 넣듯 그들의 뇌에 자신의 의지를 집어넣기 위해서는 단지 ‘칙’하고 스프레이를 분사하기만 하면 되었다.

조물주나 다름없는 그는 흥분된 마음으로 역에서 역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며 스프레이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상상했다. 예를 들어 매우 근심한 시크교도 노인이라면 노인이 터번을 풀고 즉흥적으로 신나는 리듬 체조를 하게끔 시키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었다. 노르역 터미널의 해산물 상인에게 명령하여 역 광장의 노숙자들에게 굴을 쟁반째 가져다주게 하는 일도 전혀 어렵지 않았다. 잘난 척하는 중산층 여성이 맞은편에 있는 식품점에 들어가서 소시지 줄로 줄넘기하며 나오도록 하는 일도 가능했다. 나우펠은 자신만의 판타지에 푹 빠진 채 다락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하곤 했다.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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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은 나우펠에게 카메라 렌즈를 들이댔고, 록키 오로르는 귀덮개 같은 걸로 둘러싼 장대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흔들었다. 마르틴 루터 퀸은 나프나프에게 자기소개를 짧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모습을 들킨 토끼처럼 당황한 나우펠은 이름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이 동네에서 오랫동안 살았다고 했다. 그리고 천연두 바이러스가 인간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지구에 살았고 앞으로도 더 오래 살아남을 거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며 횡설수설하며 말을 더듬었다. 문득 병원에 있던 노인의 수첩에 실린 시오랑의 문구가 떠올랐다. “저는 하이에나의 절망을 상상하는 능력이 놀라울 정도로 뛰어납니다.” 마르틴 루터 퀸이 그의 출신을 물으며 나우펠의 말에 끼어들었다. 그는 셰익스피어가 《햄릿》에 쓴 유명한 대사를 본떠 “모로코 사람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 그것이 문제죠”라고 말했다. 그 말에 가브리엘만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P107)


아침 산책을 하다가 갑자기 내 몸의 나머지 부분이 바로 저기에 있다는 확신에 압도당한다! 그러나 그 감각은 곧바로 사라진다. 나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개의 리드줄을 놓고 자갈을 깐 포장도로로 뛰어들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 사이로 최대한 빨리 비집고 들어가 허겁지겁 뛰어다니다가 공황이 오기 직전에 멈춰 선다. 내 존재가 나를 버리고 있다! 내 몸이 점점 더 멀어진다! 소리를 크게 질러 부르고 싶지만 내 존재를 알릴 방법도, 목소리도, 캐스터네츠도, 길바닥에 내 이름을 표시할 분필도 없다. 신호는 이미 끊겼다. 내 몸과 영혼이 나 없이 떠나버렸다. 심지어 내 동생인 왼손도 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 모든 희망이 무너져 내린다. 나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망연자실하여 그곳에 머무른다. 래브라도는 나를 다시 입에 물고 데려가려고 주인에게 억지를 부려 발길을 돌리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내 운명은 이미 정해졌다. 제일 먼저 사람들에게 밟히고 혐오감에 휩싸인 눈들에 둘러싸인 후, 대학 연구실로 되돌아가 실습용 해부 교재로 쓰일 것이다. 하지만 의지가 꺾였는데도 나도 모르게 살아남아야 한다는 충동이 불끈 솟아오른다. 나는 인도 위에 서 있는 오토바이 바큇살에 손가락을 걸고 옆에 달린 짐가방의 덮개를 열어 그 안으로 들어간다. (P11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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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이 집 문을 두드리면 자리를 내주라”는 아랍 속담이 있다. 하지만 불행이 집 안으로 들어와 눌러앉으면 어찌할까? 문밖으로 내쫓을 때마다 창문을 통해 다시 들어온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날, 사촌 여동생 피펫 이후 처음으로 나우펠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그는 가브리엘이라는 소녀를 찾기 위해 껍질을 깨고 나왔다. 촬영팀을 러시아 할머니 집으로 데려가기 전에, 그는 예전에 사촌이 자신을 화약 고문의 공범으로 만들었던 공터의 울타리 앞에서 세 사람과 만나기로 약속했다.

나프나프는 가브리엘이 두 명의 보호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잠시 멈칫했다. 가브리엘은 생각보다 훨씬 예뻤다. 그녀를 실물보다 더 미화해서 기억한 것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은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야말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다리의 털이란 털이 모두 곤두서서 다리가 털 달린 작대기로 변해버린 것만 같았다. 그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에서 오렌지꽃 향기가 났다. 나프나프는 향에 취해 과감히 한 발짝 내디뎠다. 바로 그때였다. 너무나도 사악한 운명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잘 있었나, 나프나프.” 조롱 섞인 인사말이 날아왔다. “라우프!” 나우펠은 얼굴에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P116-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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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걸음 걷다가 가브리엘이 침묵을 깨고 대뜸 나우펠이라는 이름의 소리가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가브리엘은 예의상 즉시 고개를 돌렸지만, 나우펠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고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나우펠은 ‘괴사, 관절염, 다래끼, 두드러기, 누공, 습진, 나병’의 앞 글자에서 따온 자기 이름의 철자가 ‘은총Grâce, 편안함Aisance, 아름다움Beauté, 웃음Rire, 지성Intelligence, 우아함Élégance, 경쾌함Légèreté, 빛Lumière, 광채Éclat’라는 단어들의 앞 글자로 이루어진 가브리엘이란 이름의 철자와 대등한 상대가 되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나우펠이란 이름이 천편일률적이고 단조로운 롤러코스터 같은 데 비해, 가브리엘이란 이름은 뒷발로 딛고 일어선 말처럼 힘차고 우아했다. (P13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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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기를 기다릴 때, 가브리엘은 왠지 즐거운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나우펠에게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순간 육체적 충동이 일었지만 즉시 억눌렀다. 그는 눈빛에 반응하여 행동하는 대신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가 하는 말의 요지는 간단했다. 지금껏 그녀를 계속 생각했다는 것, 눈이 참 예쁘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정말 아름다우며 키스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모든 말이 마구잡이로 뒤섞여서 한꺼번에 전달됐다. 나우펠은 가장 가까운 맨홀이 홀연히 열려 자신을 삼켜주기만을 고대하며 침묵에 빠졌다. 가브리엘은 너무 큰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어떤 말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프나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우펠은 자신을 완전히 무너뜨릴 문장을 듣지 않기 위해 주머니에서 스프레이를 꺼냈고, 그녀에게 망각의 기체를 뿌렸다.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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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펠은 더는 아무것도 재지 않고 건물로 올라가 젊은 여자의 집 문을 두드렸다. 발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딸깍거리는 소리가 났고, 다음 순간 가브리엘이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는 생기가 가득했고, 알 수 없는 다정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우펠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 가브리엘이 천천히 그의 얼굴로 다가왔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을 때 나우펠의 팔이 가브리엘의 등을 감쌌다. 그리고 모든 게 잠잠해졌다. 그의 손들이 티셔츠 아래로 미끄러졌다. 그렇다. 정확히 그의 두 손이었다. 나우펠은 마치 다시 두 손을 갖게 된 것처럼 비단결 같은 그녀의 피부를 보듬었다. 부모, 순수함, 오른손. 삶이 그에게서 앗아간 것들이 신비롭게도 순식간에 전부 돌아왔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녹색 눈을 가진 젊은 여성을 팔로 감싸 안는 것뿐이었다. (P162~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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