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 2004년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그동안 지켜오던 메시지와 새로운 시도가 변주된 교집합을 이루고 있다. 감독은 반전과 자연 친화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이번에도 차용하고 있다. 2D 애니메이션이 주는 한 폭의 수채화같은 배경이나 주변 캐릭터에 생기를 불어넣어 극 전체를 활기를 띠게 하는 구도 설정도 여전하다.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 역시 기존 작품에서 익숙하게 봐 왔던 그만의 세계. 반면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점과 원작 소설이 있다는 점은 확연히 다르다. 그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일본 신화를 바탕으로 한 자국용이었다면 이번에는 세계적인 프로젝트를 염두에 뒀다는 설명이 된다.
안개 속에서 거대한 고철덩어리가 움직이면서 문을 연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은 지브리 스튜디오의 그 어떤 작품보다 질감이 풍부하고 색의 조화가 뛰어나다. 중세 유럽을 모델로 한 마을과 대자연의 풍광을 안은 듯한 호수와 만년설의 배경은 꿈결을 걷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바람에 일렁이는 머리카락과 동선을 따라 바뀌는 그림자의 세밀한 부분까지 채색할 정도로 꼼꼼한 장인정신은 이번 작품에서도 예외 없이 빛을 발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1권 <마법사 하울과 불의 악마>, 2권 <압둘라와 하늘을 나는 양탄자>, 3권 <요정이 된 하울>. 〈하울의 움직이는 성〉 1권에서는 하울과 소피가 서로의 단점을 보듬어 주며 어른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렸다면, 2권에서는 밤의꽃 공주를 구하는 양탄자 상인 압둘라를 돕는 과정이, 3권에서는 주인공 책벌레 소녀 샤메인이 마법사인 외고조부 집에 가면서 벌어지는 다양한 캐릭터들을 접하고 갖가지 사건을 겪는 동안 온실 속의 화초에서 벗어나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여 준다.
[1]
마법의 장화나 투명 망토 같은 것들이 정말 존재하는 잉거리 나라에서 딸 셋 중의 맏이로 태어난다는 것은 여간 불행한 일이 아니다. 누구나 알다시피, 자식들이 자신의 운명을 찾아 나선 다면 맏이가 제일 먼저, 그리고 제일 비참하게 실패하기 때문이다.
소피 해터가 바로 세 자매 중의 맏이였다. 차라리 가난한 나무꾼의 딸이었다면 성공할 가능성도 조금은 있었을 텐데 그것마저 아니었다. 소피의 부모는 잘 사는 편이었고 마켓치핑이라는 번창한 도시에서 여성용 모자 가게를 열고 있었다. 다만 친어머니는 소피가 두 살, 여동생 레티가 한 살이었을 때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가장 젊은 점원이었던 이름이 패니인 금발의 아름다운 아가씨와 재혼했다. 패니는 곧 셋째 마사를 낳았다. 그렇다면 소피와 레티는 당연히 ‘못생긴 언니들’이 되어야겠지만 사실은 제 자매가 모두 대단히 예뻤다. 사람들은 그중에서도 레티가 제일 아름답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패니는 세 자매에게 똑같이 다정다감했고 마사만 편애하는 일은 조금도 없었다. (P9-10)
몇 달 후 마켓치핑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높고 시꺼먼 성 하나가 불쑥 나타나서 높고 가느다란 탑 네 개로 시꺼먼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그 마녀가 황야를 떠나 다시 돌아왔고 이제 오십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온 나라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모두들 겁에 질려 있었다. 혼자서는 아무도 밖에 나가지 않았고, 특히 밤에는 더욱 그랬다. 게다가 더 무서운 것은 그 성이 한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때로는 북서쪽 황무지에 높고 시꺼먼 얼룩처럼 내려앉았고, 때로는 동쪽 바위산 위로 솟아올랐고, 또 때로는 언덕을 내려와 북쪽 마지막 농장 바로 너머에 있는 히스 덤불 속에 자리잡았다. 가끔은 그 성이 네 개의 탑에서 더러운 잿빛 연기를 마구 쏟아내며 움직이는 장면을 보게 될 때도 있었다. 한동안은 모두들 그 성이 머지않아 골짜기까지 곧장 내려올 것이라고 믿었다. 시장님도 임금님께 도움을 청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성은 언제나 언덕 주위를 떠돌아다닐 뿐이었고, 머지않아 그것이 마녀의 성이 아니라 마법사 하울의 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하울도 못된 마법사였다. (P11)
소피는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해하면서 그렇게 말을 끝맺었다. 그러나 귀부인이 말했다.
“누구라도 황야의 마녀에게 대항하려고 하면 언제나 내가 나타나니까. 아가씨에 대한 소문을 들었어, 해터 양. 그런데 난 아가씨가 경쟁자로 나서는 것도 싫고 그 건방진 태도도 마음에 안 들어. 그래서 아가씨를 막으려고 온 거야, 자.”
그녀는 소피의 얼굴을 향해 뭔가를 던지는 동작으로 손바닥을 쫙 펼쳤다.
소피는 떨리는 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부인이 황야의 마녀라는 말씀인가요?”
두려움과 놀라움 때문에 목소리도 이상해진 것 같았다.
“그래, 이건 아가씨가 감히 내 일을 방해했기 때문에 내리는 벌이야.”
소피는 쉰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제가 뭘 방해했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뭔가 잘못 아신 거예요.”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는 이젠 완전히 공포에 질린 얼굴로 소피를 쳐다보고 있었다.
“잘못 안 게 아니야, 해터 양, 가자, 개스턴.”
마녀는 홱 돌아서서 가게문 쪽으로 걸어갔다. 남자가 그녀를 위해 공손히 문을 열어 주고 있을 때 마녀가 다시 소피를 돌아보았다.
“그건 그렇고, 아가씨가 마법에 걸렸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을 거야.”
그녀가 떠나갈 때 가게문에서 장례식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소피는 그 남자가 왜 그렇게 쳐다보았을까 생각하면서 두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말랑말랑한 가죽 같은 주름살들이 만져졌다. 그녀는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에도 주름살이 있었고, 온통 뼈와 가죽만 남아서 손등엔 굵은 핏줄이 드러났고, 손마디는 나무 옹이 같았다. 회색 치마를 다리 위로 걷어올리자 깡마르고 늙어빠진 두 발과 발목이 나타났다. 신발 속이 울퉁불퉁해진 듯한 느낌이었다. 다리는 아흔 살쯤 먹은 사람의 것 같았다.
소피는 거울 앞으로 다가가면서 자기가 절뚝거리며 걸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울 속의 얼굴은 꽤 차분했는데, 그것은 이미 예상했던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야위고 마른 노파의 얼굴이었다. 갈색으로 시들어 버린 얼굴, 가늘고 새하얀 머리카락. 그녀의 누렇고 진물이 흐르는 눈이 소피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몹시 슬퍼 보였다.
소피는 그 얼굴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할멈. 그래도 꽤 건강해 보이는걸. 더구나 너한테는 이 모습이 훨씬 잘 어울려.” (P36-37)
소피는 째지는 소리로 외쳤다.
“문 열어!”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좋아, 그렇다면 뒷문을 찾아보지.”
그녀는 절뚝거리며 성의 왼쪽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그쪽이 가깝기도 했고 약간 내리막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모퉁이를 돌지 못했다. 불규칙하게 생긴 시꺼먼 주춧돌 앞에 이르자마자 다시 보이지 않는 벽이 가로막았다. 그래서 소피는 마사에게서 배우긴 했지만 할머니도 젊은 아가씨도 알아서는 안 되는 어떤 낱말을 불쑥 내뱉고 나서 시계 반대 방향, 즉 성의 오른쪽 모퉁이가 있는 쪽으로 터벅터벅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그곳에는 장애물이 없었다. 그녀는 모퉁이를 돌아서 그쪽 성벽의 한복판에 있는 또 하나의 커다랗고 검은 성문을 향해 열심히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그런데 그 문에도 장애물이 있었다.
소피는 성문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거야 정말 푸대접도 이만저만이 아니네!”
바로 그때 성벽 쪽에서 시꺼먼 연기가 구름처럼 왈칵 쏟아졌다. 소피는 기침을 했다. 이번엔 화가 났다. 그녀는 늙었고 허약한 데다 추웠고 온몸이 아팠다. 밤은 다가오는데 이 성은 멀쩡히 버티고 앉아 그녀에게 연기만 뿜어대고 있었다.
“하울에게 꼭 따져야겠어!”
그렇게 말하면서 소피는 다음 모퉁이 쪽으로 힘차게 걸어갔다. (P47-48)
신기한 일이었다. 난롯불 속에서 주황색 불꽃은 바로 그 초록색 눈썹 밑에만 있어서 정말 눈인 것 같았는데, 그 눈은 각각 한복판이 보라색으로 반짝거려 마치 두 개의 눈동자처럼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소피는 그 주황색 불꽃들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마법이 풀리면 미처 돌아서기도 전에 심장을 뜯어먹히고 말겠지.”
그때 난롯불이 물었다.
“심장을 뜯어먹히는 게 싫어서 그래?”
말을 한 것은 분명히 난롯불이었다. 소피는 그 말이 들려올 때 난롯불의 보라색 입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장작이 지글지글 치익치익 타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그 음성은 거의 소피의 음성만큼이나 쉰 목소리였다. 소피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싫을 수밖에, 그런데 넌 뭐니?”
보라색 입이 대답했다.
“불꽃 마귀.”
그리고 지글지글 하는 소리보다 칭얼거리듯 치익치익 하는 소리가 더 커지면서 이렇게 말을 이었다.
“난 계약 때문에 이 벽난로에 묶여 있는 거야. 이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지.”
그러더니 이내 씩씩하게 따닥거리는 목소리로 바뀌었다.
“그런데 넌 뭐야? 마법에 걸린 모양인데.”
꿈꾸듯 몽롱하던 소피는 그 말에 정신을 바싹 차렸다. 그리고 소리쳤다.
“아는구나! 그럼 마법을 풀어 줄 수도 있어?”
그러자 물결치듯 이글거리는 침묵이 흘렀다. 불꽃 마귀의 일렁이는 파란 얼굴 속에서 그 주황색 눈들이 소피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이윽고 마귀가 말했다.
“강력한 마법이군. 내가 보기엔 황야의 마녀가 걸어 놓은 것 같은데.”
“맞았어.” (P54-55)
소피는 마법사 하울에게서 확답을 얻어 내려고 다른 방법을 써 보았다.
“내가 앞으로 한 달 동안 여길 청소하려면 우선 이 성의 나머지 부분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겠어. 지금까지 이 방 하나와 화장실밖엔 못 찾았거든.”
마이클과 하울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소피는 깜짝 놀랐다.
아침 식사를 거의 끝마칠 때쁨 되어서야 비로소 소피는 그들이 웃었던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하울에게서 확답을 듣는 것도 힘들었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어떤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하기를 싫어하는 것 같았다. 소피는 그에게 묻는 것을 그만두고 대신 마이클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하울이 말했다.
“말씀드려라, 그래야 귀찮게 굴지 않으실 테니까.”
마이클은 이렇게 대답했다.
“다른 부분은 없어요. 할머니가 보신 곳 말고는 위층 침실 두 개가 전부예요.”
소피가 소리쳤다.
“뭐야?”
그러자 하울과 마이클이 다시 웃어 댔다. 마이클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 성은 하울님과 캘시퍼가 고안했고, 캘시퍼가 유지하고 있어요. 성의 내부는 사실은 포트헤이븐에 있는 하울님의 낡은 집이고, 실제로 존재하는 부분은 그것뿐이죠.”
“하지만 포트헤이븐은 여기서 몇십 마일이나 떨어진 바닷가에 있잖아! 정말 못된 짓이야! 이 거대하고 꼴사나운 성을 언덕 위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게 만들어 마켓치핑 사람들을 잔뜩 겁주가니, 도대체 그게 무슨 짓이야?”
그러자 하울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할머니는 참 말도 많네요! 난 힘과 심술을 과시해서 사람들한테 깊은 인상을 심어 줄 필요가 있었다고요. 왕이 나를 좋게 평가하면 곤란하니까요. 그리고 작년에 아주 막강한 누군가를 화나게 했으니까 당분간 피하는 게 좋을 것 같고.”
누군가를 피하는 방법치고는 엉뚱해 보였지만 소피는 마법사들의 사고 방식이 보통 사람과는 좀 다르겠거니 생각했다. (P70-71)
소피는 빗자루에 기대고 서서 하울이 방 안을 가로질러 걸어가 기타를 집어 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울이 빗장에 손을 대자 이렇게 물었다.
“빨간색은 킹스베리, 파란색은 포트헤이븐, 그럼 까만색은 어디로 통하는 거야?”
“정말 오지랖도 넓으시네! 그건 내 피난처로 통하지만 거기가 어딘지는 알려드릴 수가 없네요.”
그가 문을 열자 움직이고 있는 드넓은 항무지와 언덕이 나타났다.
마이클이 조금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쯤 돌아오세요. 하울님?”
그러나 하울은 못 들은 체하면서 소피에게 말했다.
“내가 없는 동안에 거미를 한 마리도 죽이면 안 돼요.”
그리고는 나가서 문을 쾅 닫아 버렸다. 마이클은 캘시퍼와 의미심장한 시선을 주고받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캘시퍼는 따닥따닥 심술궂게 웃었다.
하울이 어디로 간 것인지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P78)
“한 가지만 분명히 말해 봐. 도대체 하울은 그 불쌍한 여자들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내가 듣기론 여자들의 심장을 뜯어먹고 영혼을 빼앗는다고 하던데.”
그러자 마이클이 거북스럽게 웃었다.
“그렇다면 할머니는 마켓치핑에서 오셨군요. 우리가 이 성을 처음 만들 때 하울님이 저를 그리로 보내서 나쁜 소문을 퍼뜨리게 했거든요. 제가...... 음...... 제가 그런 말을 퍼뜨렸어요. 아줌마들이 흔히 쓰는 말이잖아요. 어떤 면에서는 옳은 말이지만 사실은 아니에요.”
캘시퍼는 이렇게 말했다.
“하울은 몹시 변덕스러운 녀석이야. 어떤 여자든지 그 여자가 자기를 사랑하게 될 때까지만 관심을 갖는다고. 그 뒤로는 거들떠보지도 않아.”
그러자 마이클도 열심히 거들었다.
“하지만 그 여자가 사랑에 빠지기 전에는 한시도 편히 쉬지 못해요. 그때까지는 도무지 제 정신이 아니라고요. 그래서 저는 언제나 여자가 하울님에게 푹 빠지기를 간절히 기다리죠. 그래야 상황이 좋아지니까.”
캘시퍼가 한 마디 덧붙였다.
“여자들이 하울을 찾아 낼 때까지는 그렇지.”
소피는 경멸한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똑똑한 사람이라면 여자들한테 가짜 이름을 말해 줬을 텐데.” (P100-101)
그러자 마이클이 소리쳤다.
“이야호!”
그리고 소피를 빙글빙글 돌리며 의자로 데려가 털썩 내려놓았다. 소피는 의자에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어젯밤엔 차라리 할머니가 하울님의 머리를 새파랗게 물들여 버렸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젠 아무래도 좋아요. 하울님이 ‘레티 해터’라고 말했을 때는 제가 직접 파란색으로 염색해 놓고 싶더라니까요. 할머니도 하울님의 성격을 잘 아시잖아요. 그 아가씨가 자기를 사랑하게 만들고 나면 다른 여자들처럼 곧바로 차 버릴 게 뻔하죠. 그런데 그게 바로 우리 레티였다고 생각하니 저는..... 아무튼 아시다시피 하울님은 그 여자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고 했는데, 저는 그게 저를 가리키는 말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오늘 부리나케 마켓치핑으로 달려갔던 거예요. 그런데 아무 일도 아니었어요! 하울님은 똑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아가씨를 쫓아다니고 있는 모양이에요. 레티는 하울님을 만난 적도 없다니까요.”
소피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정리 좀 해 보자. 우리가 말하는 레티 해터는 체자리 빵집에서 일하는 그 레티 해터지?”
마이클은 신이 나서 소리쳤다.
“그야 물론이죠! 저는 레티가 거기서 처음 일하기 시작할 때부터 그녀를 사랑했어요. 그러다가 레티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였죠. 레티를 좋아하는 남자는 몇백 명쯤 되니까요. 하울님이 그 중의 한 명이었더라도 놀랄 일은 아닌데 정말 다행이에요! 그걸 축하하려고 체자리 빵집에서 케이크를 사왔어요. 어디다 뒀더라? 아, 여기 있네요.”
그는 분홍색과 흰색의 상자를 소피에게 내밀었다. 상자에서 양파 조각이 툭 떨어져 그녀의 무릎에 나뒹굴었다.
소피는 이렇게 물어 보았다.
“얘야, 넌 몇 살이니?”
“지난 오월제 날에 열다섯 살이 됐어요. 캘시퍼가 성에서 불덩어리를 쏘아 줬어요. 정말 그랬지, 캘시퍼? 아, 잠들었군요. 할머니는 제가 약혼을 하기엔 너무 어리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저는 아직도 견습 기간이 삼 년이나 남았고 레티는 더 많이 남았지만..... 우린 결혼하기로 서로 약속했고 기꺼이 기다릴 거예요.” (P120-121)
그러자 하울이 웃었다.
“그럼 해 주시는 거죠?”
“알았어. 언제쯤 가는 게 좋겠어?”
“내일 오후요. 마이클이 하인으로 따라갈 거예요. 국왕도 할머니가 오신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는 걸상에 걸터앉아서 소피가 해야 할 말들을 아주 분명하고 진지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소피는 하울이 녹색 오물을 쏟아 낼듯하던 분위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젠 상황이 그의 뜻대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피는 하울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 하울이 설명했다.
“내가 할머니한테 바라는 건 아주 미묘한 일이에요. 국왕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운송 마법 같은 일을 나한테 맡기도록, 그렇지만 자기 동생을 찾는 것 같은 일은 도저히 믿고 맡길 수 없도록 해야 되니까요. 내가 황야의 마녀를 화나게 했다는 것도 말씀하시고, 내가 아주 착한 아들이라는 것도 설명하세요. 그러면서도 내가 사실은 전혀 쓸모가 없는 녀석이라는 것을 국왕에게 납득시켜야 해요.”
하울의 설명은 대단히 구체적이었다. 소피는 꾸러미들을 두 손으로 잔뜩 움켜쥐고 그의 말을 모조리 기억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임금님이라면 이 늙은이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할 거야!
한편 마이클은 줄곧 하울 곁에서 얼쩡거리며 그 난해한 마법 주문에 대해 물어 보려고 했다. 그러나 하울은 더욱 미묘하고 구체적인 내용들을 자꾸 생각해 내면서 손을 내저어 마이클을 쫓아냈다. (P172-173)
임금님이 말했다.
“자, 마법사 하울의 어머니가 무슨 일로 짐을 만나러 오시었소?”
그 순간 소피는 자기가 지금 임금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에 별안간 기가 꺾이고 말았다.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저 남자, 그리고 국왕이라는 위대하고 중요한 존재, 그 둘은 비록 하나의 의자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전혀 다른 인물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소피는 다시 현기증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하울이 국왕에게 말하라고 일러 주었던 그 자세하고 미묘한 말들을 깡그리 잊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무엇이든 말해야만 했다.
“그 아이가 저를 보내면서 전하의 동생분을 찾으러 갈 수 없다는 말을 전하라고 했어요, 전하.”
소피는 임금님을 쳐다보았다. 임금님도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한심한 상황이었다.
“그게 정말이오? 마법사가 나한테 얘기할 때는 기꺼이 일을 맡으려는 것 같았는데.”
이때 소피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생각이라고는 자기가 하울에 대해 험담을 하러 왔다는 것뿐이었다.
“그건 거짓말이었어요.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던 거죠. 하울은 뺀질뺀질한 녀석이거든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전하.”
“그렇다면 내 동생 저스틴을 찾는 일도 뺀질뺀질 피하려고 하는군. 알겠소. 젊은 분도 아닌데 거기 좀 앉아서 마법사의 핑계가 뭔지 말씀해 주시겠소?” (P211)
소피는 더욱더 열심히 바느질에 몰두했다. 지금이야말로 그 회색과 주홍색 옷이 앵거리언 선생의 가슴에 더 큰 상처를 주기 전에 하울의 몸에서 벗겨 낼 기회였다. 물론 하울이 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 들어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울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어쨌든 하울은 어퍼폴딩에 가서 저스틴 왕자를 찾다가 레티를 만난 것이 틀림없었다. 가엾은 레티! 그렇게 생각하면서 소피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쉰일곱 번째의 파란 삼각천을 촘촘하게 꿰맸다. 이제 마흔 몇 장이 남았을 뿐이다.
머지않아 하울의 힘없는 외침이 들려왔다.
“아무나 좀 도와 줘! 난 여기서 무관심 속에 죽어간다고!”
그러나 소피는 콧방귀만 뀌었다. 마이클이 새 마법을 내팽개치고 뜀박질로 계단을 오르내렸다. 소피가 열 장의 파란 삼각천을 꿰매는 사이에 마이클은 레몬과 꿀, 책 한 권, 기침약, 그리고 기침약을 먹기 위한 숟가락 따위를 들고 연거푸 위층으로 달려 올라갔고, 그 다음엔 코막힘약, 목을 뚫어주는 사탕, 양치질용 물약, 펜, 종이, 책 세 권, 버드나무 껍질을 달인 물 따위를 날라 주었다. 그 동안에도 사람들은 연신 문을 두드렸고, 그때마다 소피는 깜짝 놀랐고 캘시퍼는 불안한 듯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아무도 문을 열어 주지 않았으므로 어떤 이들은 오 분 동안이나 줄창 두드려 댔다. 자기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그 생각이 옳았다.
그때쯤 소피는 그 파란색과 은색 옷에 대해서도 점점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 옷은 자꾸자꾸 작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수의 삼각천들을 꿰매어 붙이려면 옷 솔기가 천을 많이 잡아먹기 때문이었다. (P234)
하울은 씁쓸하게 대답했다.
“감기는 치료 방법이 없으니까요. 머릿속에서 온갖 물건들이 빙빙 돌아요. 아니, 어쩌면 물건들 속에서 내 머리가 빙빙 도는 건지도 모르죠. 마녀의 저주에 담긴 내용을 줄곧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 마녀가 나를 그렇게 속속들이 알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남에게 속속들이 알려진다는 건 정말 심각한 일이죠. 물론 지금까지 들어 맞은 것들은 모두 내가 한 일들이지만 말예요. 이젠 나머지 일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중이에요.”
소피는 그 알쏭달쏭한 시를 다시 떠올려 보았다.
“어떤 것들 말이야? ‘지나간 세월들은 다 어디 있는지’?”
“아, 그건 알아요, 내것이든 남의 것이든. 원래부터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죠. 마음만 먹으면 내 세례식에 참석해서 나쁜 요정 흉내를 낼 수도 있다고요. 어쩌면 벌써 그런 짓을 해서 문제가 생겼는지도 모르죠. 아무튼 내가 기다리는 건 세 가지뿐이에요. 인어, 흰독말풀 뿌리, 정직한 사람을 나아가게 하는 바람. 그리고 어쩌면 내가 백발이 되어 버릴지도 모르죠. 그렇다고 그걸 확인하려고 마법을 풀어 보진 않겠지만, 어쨌든 그런 일들이 실현되기까지는 겨우 3주밖에 안 남았어요. 그때가 되면 마녀가 나를 사로잡는 거죠. 하지만 럭비 클럽 동창회는 하짓날 전날이니까 적어도 거기까진 참석할 수 있겠네요. 나머지는 벌써 오래 전에 일어난 일들이고요.” (P241-242)
“나도 바깥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하고 싶어.”
소피는 캘시퍼가 불에 태울 수 있도록 향긋한 풀잎들을 따다주었고, 덕분에 성 안에는 화장실만큼이나 진한 향기가 진동했다. 그러나 캘시퍼는 자기가 정말 원하는 것은 말동무라고 말했다. 모두들 하루 종일 꽃집에 나가 있으니 자기만 늘 혼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피는 아침마다 적어도 한 시간씩은 마이클에게 꽃집을 맡겨 놓고 캘시퍼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자기가 바쁘더라도 캘시퍼가 심심하지 않도록 수수께끼 놀이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캘시퍼는 여전히 불만이었다.
“하울과의 계약은 언제 깨뜨려 줄 거야?”
그렇게 묻는 일이 점점 더 많아졌다. 소피는 그때마다 답변을 회피했다.
“노력중이야. 곧 해결될 거라고.”
그러나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소피는 어쩔 수 없을 때 말고는 그 문제를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펜트스테먼 선생이 했던 말, 그리고 하울과 캘시퍼가 했던 말을 모두 종합해 보았을 때 소피는 그 계약에 대하여 제법 그럴듯하고 매우 무시무시한 결론을 얻게 되었다. 만약에 계약을 깨뜨린다면 하울과 캘시퍼는 둘 다 끝장이라는 것이 소피의 믿음이었다. 하울은 죽어도 괜찮지만 캘시퍼는 달랐다. 그리고 하울도 마녀의 저주 중에서 나머지 부분들이 이루어지지 않게 하려고 꽤나 열심인 것 같았으므로 소피로서는 확실히 도움될 일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때로는 개 인간 때문에 자꾸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다. 그는 몹시 우울해 했다. 마음껏 즐거워하는 시간이라고는 매일 아침 덤불 사이로 난 푸른 오솔길을 따라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뿐이었다. 그 시간 이외에는 하루 종일 슬픈 표정으로 소피를 졸졸 따라다니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를 위해 소피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래서 하짓날이 가까워지면서 날씨가 점점 더워지자 오히려 기뻐했다. 개 인간이 마당에 있는 그늘에 드러누워 헥헥거리는 시간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P289-290)
“하울은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을 조금 닮은 소피라는 분을 아는데요.’ 그러자 레티는 아무 생각 없이 ‘우리 언니예요.’하고 말해 버렸죠. 그러고 나서는 몹시 걱정하기 시작했어요. 하울이 자꾸 언니에 대해 캐물었거든요. 레티는 그때 차라리 혀를 깨물고 싶었다고 하더군요. 당신이 찾아왔던 그날 레티가 하울에게 상냥하게 대했던 이유는 하울이 어떻게 당신을 알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였어요. 하울은 당신이 노인이라고 말했어요. 페어팩스 부인도 당신을 만났다고 했고요. 레티는 울고 또 울었어요. ‘소피 언니한테 뭔가 끔찍한 일이 생긴 거예요! 그리고 더 심각한 건 언니가 하울의 손길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할 거라는 점이에요. 소피 언니는 너무 착해서 하울이 얼마나 냉혹한 인간인지 모른다고요!’ 그러면서 어찌나 슬퍼하던지, 난 그때 잠깐이나마 다시 사람으로 변해서 내가 당신을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소피는 커다란 반원을 그리면서 제초제를 확 뿌렸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레티도 참! 그애는 정말 마음씨가 너무 곱다니까. 그래서 내가 이렇게 사랑하지. 나도 그애를 몹시 걱정하고 있었어. 하지만 감시견 따위는 필요없다고!”
“필요해요. 어쨌든 전에는 필요했어요. 내가 너무 늦게 도착한거죠.”
소피는 제초제가 담긴 물뿌리개를 든 채로 홱 돌아섰다. 퍼시벌은 걸음아 날 살려라 잔디밭으로 뛰어들어 제일 가까운 나무 뒤로 몸을 숨겨야 했다. 달아나는 그의 등 뒤에서 잔디가 죽어가면서 기다란 갈색띠 같은 자국을 남겼다. 소피가 소리쳤다.
“다들 꺼져 버려! 너희 패거리엔 아주 질렸어!”
그녀는 연기가 피어 오르는 물뿌리개를 길 한복판에 던져 버리고 잡초들을 헤치며 돌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걸으면서 중얼거렸다.
“너무 늦었다고? 웃기지 마! 하울은 냉혹하기만 한 게 아니라 아주 구제불능이야! 게다가..... 난 늙은이란 말이야.” (P312-313)
마녀가 이번에는 음침한 불꽃들을 향해 다시 손짓을 하자 두 개의 기둥 사이에서 일종의 왕좌 같은 것이 드르르 굴러나와 마녀 앞에 멈추었다. 그 위에는 초록색 제복을 입고 반짝거리는 긴 장화를 신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처음에 소피는 머리를 옆으로 기울이고 잠을 자고 있어서 안 보이는 줄 알았다. 그런데 마녀가 다시 손짓을 했다. 남자가 똑바로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그의 몸에는 머리가 붙어 있지 않았다. 소피는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저스틴 왕자의 몸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엄마였다면 기절했을 거야. 당장 머리를 도로 붙여 놔! 저러고 있으니까 너무 끔찍하잖아!”
그러자 마녀가 대꾸했다.
“머리는 둘 다 벌써 몇 달 전에 처분해 버렸어. 마법사 설리먼의 해골은 그 녀석의 기타와 함께 팔아치웠지. 저스틴 왕자의 머리는 쓸모없는 나머지 조각들과 함께 어딘가에서 돌아다니고 있어. 저 몸은 저스틴 왕자와 마법사 설리먼을 완벽하게 섞어 놓은 거라고. 이제 하울의 머리만 있으면 완벽한 인간이 만들어져. 우리가 하울의 머리를 갖게 되면 잉거리엔 새로운 국왕이 탄생하고, 난 왕비가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거지.”
“너 미쳤구나! 사람들을 가지고 조각그림 맞추기를 하다니! 그리고 내 생각에 하울의 머리는 네가 원하는 일들을 아무것도 해 주지 않을 거야. 어떻게든 뺀질뺀질 빠져나갈 거라고.”
그러자 마녀는 교활하고 비밀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하울은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될 거야. 우리가 녀석의 불꽃 마귀를 지배할 테니까.” (P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