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걸리버 여행기> 1977년
<걸리버 여행기>(1996), <걸리버 여행기>(1939), <걸리버 여행기>(1960), <걸리버 여행기>(2011)
[제1부 릴리펏(소인국) 여행기]
나는 노팅엄셔 지방의 소지주인 내 아버지의 다섯 아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열네 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나를 케임브리지의 임마누엘 대학에 보내셨고, 나는 그곳에서 3년 동안 학업에 열중했다. 아버지의 보잘것없은 재산으로는 학비뿐만 아니라 생활비조차 감당하기가 버거웠기 때문에 나는 런던의 저명한 외과의사인 제임스 베이츠 선생의 조수 노릇을 하며 4년 동안 생활비를 벌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이따금 보내주신 얼마 안 되는 돈은 항해술과 수학을 배우는 데 투자했다. 여행 중에 매우 유용하게 써먹을 지식이었고, 나도 언젠가는 여행을 떠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이츠 선생의 병원은 그만둔 후에는 아버지 곁으로 돌아갔고, 아버지와 존 삼촌, 그리고 친척 어르신들의 도움으로 40파운드를 마련했다. 또 어르신들께서는 내가 라이덴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1년에 30파운드씩 송금해주겠노라고 약속하셨다. 그곳 대학에 2년 7개월 동안 머물면서 나는 의학을 공부했다. 먼 여행을 하는데 아주 유용한 학문이기 때문이었다. (P23)
이곳 바다에서 겪은 우리의 모험담을 일일이 열거해 독자 여러분들을 괴롭힐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단, 이 점만은 말하고 싶다. 우리는 남쪽 바다에서 동인도제도로 향하던 도중 거센 폭풍우를 만났고, 결국 앤틸로프 호는 반 디맨스 랜드 서북쪽으로 방향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위치를 측정해보니 남위 30도 2분이었다. 선원 가운데 열두 명이 과로와 상한 음식으로 명(命)을 달리했고, 나머지도 몹시 쇠약한 상태였다. 그날은 11월 5일이었다. 이곳에서는 여름이 시작될 무렵으로 안개가 자욱했다. 갑자기 선원 한 명이 배에서 사용하는 밧줄 길이의 절반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암초가 우뚝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바람이 너무 거세게 불어왔기 때문에 배는 곧장 암초를 향해 치달아 눈 깜짝할 사이에 좌초하고 말았다. (P25)
내가 몸을 움직이지 않자, 소인들은 활 쏘는 것을 멈추었다. 그러나 소리만 들어보아도 소인들의 수가 점점 불어나고 있다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또 오른쪽 귀로부터 35미터가량 떨어진 곳에서는 무슨 토목공사라도 하는지 한 시간 동안이나 뚝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느슨해진 말뚝과 줄 덕분에 소리 나는 쪽으로 머리를 돌려보니, 약 50센티미터 높이로 세워진 연단이 눈에 들어왔다. 소인 네 명이 거뜬히 서 있을 수 있어 보였고, 사다리 두세 개가 걸쳐 있었다. 연단에서는 고급 관리인 듯한 사람이 내게 일장연설을 늘어놓았지만, 나는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특이한 것은 연설을 시작하기에 앞서 연사가 “랑그로 데홀신!”이라고 세 번 크게 외쳤다는 점이다(소인들은 이후에도 이 말과 “톨고 포닉!”이란 말을 여러 번 했었고, 내게 무슨 뜻인지도 말해주었다). 외침이 멎자마자, 50여명이 다가와 왼쪽 머리카락을 잡아맸던 줄을 끊어주었다. (P30)
똑바로 일어설 수 있게 되자 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내 생애에 그토록 유쾌한 광경은 처음이었다. 나라 전체가 끝없이 펼쳐진 정원으로 가득 찬 것 같았고, 2평방미터쯤 되어보이는 울타리가 쳐진 밭들은 온통 꽃 천지였다. 밭 사이사이에는 조그만 숲이 있었고, 가장 큰 나무의 높이가 대략 2미터가 조금 넘는 듯했다. 왼쪽에 보이는 도시는 극장 무대에 걸려 있는 어느 도시의 풍경화 같았다. (P39)
그동안에도 황제는 나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논의하기 위해 자주 각료회의를 소집했다. 나는 한 고위관리와 절친한 친구가 되었는데, 고위층인 만큼 국가기밀을 많이 다루었다. 그 친구를 통해 각료들이 나 때문에 온통 걱정투성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혹시 내가 쇠사슬을 끊지나 않을까, 아니면 내가 너무 많이 먹으니 나라 전체가 극심한 식량난에 빠지지는 않을까 우려한다는 것이다. 각료들은 나를 아예 굶겨 죽이거나 얼굴과 양손에 독화살을 쏘아 죽여버리자고 결의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다가도 결정을 번복한 것은 내가 죽을 경우, 어마어마한 크기의 시체가 악취를 풍길 것이고, 그러면 도시에 역병이 돌거나 그 병이 전국적으로 퍼질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렇게 회의가 진행되고 있을 때, 장교 몇 명이 대회의실에 찾아왔다. 이들 중 두 명만 허가를 받아 들어갈 수 있었는데, 나를 못살게 굴었던 여섯 명에게 내가 어떻게 해주었는지 보고를 한 모양이었다. (P45)
내가 온순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하자 황제와 신하들은 물론이거니와 군대와 백성들까지도 내게 호감을 갖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도 머지않아 자유를 찾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나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이 상황을 내게 더욱 유리하게 만들어보려 했다. 소인들도 내가 위험하다는 생각을 차츰 버리게 되었다. 어떤 때에는 내가 바닥에 드러누워 있으면, 소인 대여섯 명이 내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기까지 하더니 결국은 어린아이들까지 내 머리카락 속에서 숨바꼭질을 할 정도가 되었다. 이 무렵 나는 소인들의 말을 잘 알아듣고, 말도 곧잘 하게 되었다. (P53)
내가 자유를 찾는 조건으로 서명한 규정 중 마지막 조항에 주목해주기 바란다. 황제가 릴리풋 사람들 1,728명 분의 고기와 술을 내게 매일 제공하겠다고 명시한 구절 말이다. 도대체 1,728이라는 숫자가 어떻게 나온 것인지 나중에 한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말하기를, 황제의 수학자들이 각도기로 내 키를 재어보고 내 키가 소인들 키의 열두 배가 넘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수학자들은 내 몸이 자신들과 유사하다고 판단하여 내 몸 하나가 소인 1,728명을 합한 것과 같으니 결국 릴리풋 사람 1,728명이 먹을 식량이 매일 필요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P63-64)
외국인들이 보았을 때에는 우리나라가 매우 융성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우리는 현재 두 가지 난국에 직면해 있소, 즉, 내부의 극심한 분열과 외부로부터의 강력한 적의 침입이라는 문제라오. 우선 내부 분열에 관한 문제에 대해 알아두시오. 그러니까 트라멕산과 슬라멕산이라는 두 당파가 서로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는 지도 벌써 70개월이 넘었다오. 두 당파는 구두 뒤축의 높낮이로 서로를 구분하오. 사실 높은 뒤축이 제국의 유서 깊은 헌법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은 공공연히 인정되고 있소. 그런데 폐하는 행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황제가 임명하는 모든 자리에 오로지 낮은 뒤축 사람들만을 쓰려고 하신다오. 당신도 이미 눈치챘을 거라 생각하오. 게다가 폐하의 구두 뒤축은 궁정에서 제일 낮아서 다른 신하들보다 적어도 1드럴(약 18밀리미터)이 낮다오. 두 당파의 대립이 너무나 심해서 이들은 함께 식사도 하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는데다가, 심지어는 서로 말도 하지 않는다오. 높은 뒤축 당파인 트라멕산이 우리보다 수적으로는 더 많지만, 사실 우리 슬라멕산이 모든 권력을 쥐고 있소. 문제는 제위를 이어받을 세자 저하가 높은 뒤축 당파 쪽으로 끌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오. 세자의 구두 뒤축 하나가 다른 쪽보다 조금 높다는 게 여실히 눈에 띄기 때문이오. 그래서 세자가 다리를 전다오. 내부적으로도 이렇게 어지러운 형국인데, 설상가상으로 블레푸스쿠 섬으로부터 침략 위협을 받고 있다오. 블레푸스쿠는 이 세상에 있는 또 다른 제국인데, 폐하의 제국과 비등한 영토와 국력을 자랑하고 있소. 그리고 당신만 한 거인들이 살고 있는 왕국과 나라가 지상에 또 존재한다고 당신이 주장하는데, 우리 철학자들은 이에 대해 무척 회의적이라오. 철학자들은 당신이 달이나 별에서 떨어진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소. 그도 그럴 것이 당신처럼 덩치 큰 사람이 100명만 있어도 폐하의 영토 안에서 나는 곡식과 가축은 얼마 못 가 바닥이 드러날 것이 뻔하잖소. 6천 개월을 유구하게 이어오는 우리 역사를 보더라도 릴리풋과 블레푸스쿠 이외의 다른 지역은 한 번도 언급된 바 없다오. 이 두 제국은 36개월 전부터 지독한 전쟁을 치르고 있소. 내 말해주리다. 전쟁이 일어난 이유부터 말하리다. 이곳에서는 태고 적부터 계란을 먹을 때 넓은 쪽을 깨서 먹게 되어 있었소. 그런데 지금 황제의 조부가 어렸을 때 넓은 쪽으로 계란을 깨다가 그만 손가락을 베었다오.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계란의 갸름한 쪽으로 깨어서 먹도로 칙령을 발표했고, 만일 이를 어길 시에는 사형에 처한다고 엄포를 놓았다오. 백성들은 새로운 법에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었소. 그래서 역사상 여섯 차례나 반란을 일으켰다오. 내란에 황제 한 분이 목숨을 잃었고, 왕관을 찬탈당한 황제도 있었다오. 이 반란을 계속적으로 선동한 것은 바로 블레푸스쿠의 군주들이었고, 반란이 진압되면 반역자들은 블레푸스쿠로 망명해버리고 말았소. 계란을 갸름한 쪽으로 깨뜨리지 않겠다고 끝까지 버티다가 처형당한 사람만도 지금까지 만천 명이나 된다오. (P69-70)
“최근에 당신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평의회의 여러 위원회가 은밀히 소집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틀 전에 황제가 최종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당신도 느꼈겠지만, 스카이레쉬 볼골람(갈베트, 즉 해군제독)은 당신이 제국에 나타났던 때부터 줄곧 당신을 적대시해왔소. 대체 그가 왜 당신을 그토록 미워하는지는 모르겠소만, 당신이 블레푸스쿠 함대를 무찌른 이후로 그의 증오심은 더욱 커졌다오. 그도 그럴 것이 그 일로 해군제독으로서의 명예가 실추되었으니까 말이오. 재정관 플림냅도 자기 부인 일로 당신을 미워한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오. 해군제독은 플림냅과 림톡 장군, 랄콘 의원, 발무프 대법원장과 결탁해서 반역죄와 그밖에 사형을 받을 수 있는 죄목들을 거론하며 당신을 탄핵하기 위한 공소장을 작성했소.” (P97)
릴리풋의 특사는 황제의 답장을 받아 본국으로 돌아갔고, 블레푸스쿠 황제는 자초지종을 내게 설명해주었다. 그러면서 내가 자기를 섬기려 한다면 자신의 비호를 받을 수 있다고도 했다. 물론 이 사실은 철저히 비밀에 부치라는 부탁과 함께 말이다. 황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제는 될 수 있는 한 군주나 각료를 믿고 싶지 않았다. 황제의 선의에는 깊은 감사의 뜻을 전했으나 대신 겸손하게 다음과 같은 부탁을 했다. 즉, 행운이든 불운이든 보트를 갖게 되었으니 바다로 나가 내 운명을 시험해보고 싶다고 청한 것이다. 그것이 두 제국 간에 불화를 일으키는 것보다 나을 듯하다는 뜻을 내비치었다. 황제의 반응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황제는 오히려 내 결정에 만족했다는 것이다. 물론 왕궁의 각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출발 일정을 서두르게 되었다. 왕궁에서도 내가 빨리 떠나주었으면 했기 때문에 순순히 나를 도와주었다. (P109-110)
[제2부 브롭딩낵(거인국) 여행기]
나는 대로에 접어들었다. 말이 대로지 섬사람들에게는 밀밭에 난 작은 두렁에 지나지 않았다. 길을 따라 얼마간 걸어갔는데,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추수가 가까워져 밀의 키가 12미터 정도까지 자란 바람에 사방을 다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시간이나 걸어 겨우 밭의 가장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밭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는 35미터가 넘었고,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나무의 높이는 도저히 잴 수 없을 정도였다. 이쪽 밭에서 다음 밭으로 넘어갈 때에는 계단을 지나쳐야 했다. 계단은 모두 네 개가 있었는데, 꼭대기에 이르면 또다시 커다란 돌을 밟고 지나가야 한다. 하지만 계단을 올라가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계단 하나의 높이가 무려 2미터 정도 되었고, 꼭대기에 있는 돌도 6미터나 되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울타리 사이에 혹시 구멍이라도 있을까 싶어 찾고 있는데, 저쪽 밭에서 누군가 계단 쪽으로 오고 있었다. 보트를 쫓아가던, 바다에서 보았던 그 괴물과 몸집이 똑같은 괴물이었다. 괴물의 키는 웬만한 성당의 첨탑만큼 컸고, 보폭도 내가 어림잡기로는 9미터는 되는 것 같았다. 나는 극도의 두려움을 느끼고 경악한 나머지 밀밭으로 달려가 숨어버렸고, 거기서 계단 꼭대기에 서 있는 괴물의 모습을 보았다. 괴물은 지나온 밭을 오른쪽으로 돌아보고 있었다. 괴물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쩌렁쩌렁 울려대는 나팔 소리는 저리가라였다. 소리가 하도 높은 곳에서 들려와서 처음에는 천둥이 치나보다 생각했다. (P120-122)
이렇게 정신이 혼란스러운데 갑자기 릴리풋 제국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왜일까? 릴리풋 사람들은 나를 세상에 다시없는 위대한 거인으로 우러러보았다. 그곳에서는 한 손으로 제국의 함대를 끌고 올 수도 있었고, 제국의 역사에 길이 남을 행동들도 펼쳐보일 수 있었다. 소인 수백만 명이 지켜보았다고 해도 그 후손들은 믿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나라에 와서 거인들의 손에 잡힌 단 한 명의 릴리풋 사람과 같이 보잘것없는 처지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억울하고 원통했다. 하지만 그것도 내가 겪게 될 힘든 일들과 비교해보면 한낱 작은 일에 불과했다. 인간이란 몸집이 클수록 더욱 야만적이 되고 잔인해지는 법이니, 이 엄청나게 큰 야만인들에게 잡혀 한입에 들어갈 간식거리가 되는 것 외에 내가 더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철학자들이 늘상 하는 말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 비교를 하게 되면 절대적으로 큰 것도, 작은 것도 없다고 하더니 꼭 그 꼴 아닌가! 릴리풋 사람들도 나에 대해 자신들이 작았던 것처럼 몸집이 작고, 나에게 대해주었던 것처럼 친절한 나라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면 좋겠다. 또 누가 아는가? 이렇게 몸집 큰 인간들도 우리가 아직 모르는 어떤 땅에서는 더 큰 인간들을 만나게 될지..... (P122-123)
10월 26일, 우리는 수도에 안착했다. 수도는 거인국 말로 로브룰그루드, 즉 ‘온 누리의 자랑’이라는 뜻이다. 주인은 왕궁에서 멀지 않은 시내 중심가에 숙소를 잡고 규격에 맞는 광고를 내걸어 나의 모습과 공연 내용에 대해 정확하게 소개했다. 또 너비가 90~120미터나 되는 큰 방도 빌렸다. 지름 18미터짜리 원탁을 갖다놓아 내가 그 위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하고, 가장자리로부터 약 1미터 되는 곳에 10미터 높이의 목책을 돌려가며 세워 내가 떨어지지 않도록 했다. 공연은 하루 10회, 구경꾼들의 탄복과 감탄을 자아냈다. 그 무렵 나는 거인들의 말을 꽤 잘 할 수 있었고 나에게 하는 말도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다. 또 글자도 익혀서 여기저기 써 있는 문장의 의미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집에 있는 동안 글룸달클리치가 내게 말을 가르쳐준 덕분이었고, 여행중에도 쉬는 시간에는 계속 말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주머니에 작은 책을 넣어가지고 왔는데, 샌스사판 지도책 <아틀라스 누보>보다 작은 크기였다. 이 책은 주로 어린 여자아이들을 위해 간략하게 종교에 대해 설명해 놓은 책이었다. 이것을 교재로 소녀가 내게 글자를 가르쳐주고 단어의 뜻을 알려주었다. (P141)
왕은 거인국에서 누구보다도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었고 철학, 특히 수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꼼꼼히 살펴보고, 똑바로 서서 걷는 것을 보고도 내가 태엽 장치로 움직이는 인형이리라 생각했다. 내가 미처 말을 못했는데, 거인국에서는 태엽 장치 인형이 매우 발달해 있었다. 왕은 어떤 천재적인 기술자가 나를 만들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말하는 것을 보고 또 내가 하는 말이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보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내가 어떻게 왕국까지 오게 되었는지 이야기해주자 무척 좋아했는데, 그래도 글룸달클리치와 농장주인 그리고 내가 짜고 만든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왕은 소녀와 그 아버지가 나를 비싼 값에 팔기 위해 몇 마디 말만 가르쳤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왕은 내게 다른 질문도 해보았고, 나는 계속 사리에 맞는 대답만 했다. 물론 외국인의 억양이 섞여 있고 어법도 많이 틀렸으며, 농장에서 배운 간단한 말 몇 마디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왕궁에서 쓰는 예법에는 맞지 않는 말투성이였다. (P145)
나는 거인국에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너무 작아서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황당한 사고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이제 이런 사건을 몇 가지만 소개해보고자 한다. 글룸달클리치는 나를 여행 상자에 넣어 왕궁의 정원에 데려가곤 했는데, 가끔씩은 나를 상자에서 꺼내 자기 손에 올려놓거나 아예 바닥에 내려놓아 걸어다니게 해주었다. 왕비의 난쟁이가 쫓겨나기 전 일이다. 한번은 난쟁이가 정원으로 우리 뒤를 따라온 모양이었다. 보모가 나를 땅에 내려주어서 난쟁이와 나는 키 작은 사과나무 근처에 함께 있게 되었다. 나는 재치를 부려본다고 바보같이 난쟁이를 사과나무에 빗대어 놀려댔다. 우리 영국처럼 거인국에서도 키 작은 나무를 난쟁이 나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러자 약이 바짝 오른 난쟁이는 기회를 엿보다가 내가 사과나무 밑을 걸어가자 나무를 마구 흔들어댔다. 그 바람에 사과 10여 개가 머리 위로 우수수 떨어져내렸다. 거인국의 사과 하나는 브리스틀 나무 술통만큼 어마어마했다. 내가 놀라 몸을 움츠리는 사이, 사과 하나가 내 등을 치는 바람에 나는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P162)
“그릴드릭, 나의 친구여, 자네는 조국에 대해 엄청난 찬사를 늘어놓았네. 자네는 입법자란 무지와 나태, 사악함의 소산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네. 또 법을 가장 잘 설명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법을 왜곡하고 남용하고 회피하는 일임을 가르쳐주었네. 몇 가지 제도 같은 것이 있는 듯한데. 물론 원문 자체는 그런대로 봐줄 만하지만 그 중 절반은 폐지되었고 나머지는 부패로 인해 완전히 퇴색하고 변질되고 말았군. 자네가 말한 것으로 미루어보면 어떤 자리를 얻으려 할 때 덕행을 요구하는 것 같지는 않네. 인품만 가지고 보통 사람도 귀족이 되고, 단순히 경건하거나 아는 것이 많다고 사제가 승진을 하고, 모범적인 행동이나 용기가 많다고 군인이 승진을 하고, 강직함 때문에 판사들이 승진을 하고, 애국심 때문에 의원들이 승진을 하거나 지혜롭다고 고문들이 승진을 하는 경우는 더더욱 없어보이네. 자네는 여행을 많이 다닌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게 해서라도 자네 조국의 수많은 악행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네. 결국 자네가 말해준 것과 내가 억지로 쥐어짜내서 자네에게서 얻어낸 답을 종합해보니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네. 그러니까 자네 종족은 대자연이 지금까지 지구상에 태어나게 한 가장 징그러운 벌레와 같이 해로운 존재라는 걸세.” (P186)
그런데 왕은 엄청난 위력을 가진 기계에 대한 설명을 듣고, 또 내 제안을 듣자 무척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가! 그가 표현한 대로 옮기자면, 어떻게 나처럼 하찮고 비굴하게 기어다니는 벌레 같은 존재가 그렇게 비인간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유혈 낭자한 파괴 장면을 어쩌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대포가 보통 발휘하는 위력을 설명했을 뿐인데 왕은 사악한 천재, 온 인류의 적이 처음 대포를 발명해낸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 인위적인 것이든 자연적인 것이든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일은 무척 기쁜 일이지만, 그런 비밀을 알고 있느니 차라리 자기 왕국의 반을 잃는 것이 낫겠다며, 내가 목숨을 보전하고 싶으면 화약 가루에 대해서는 아예 함구하라고 명했다. (P189)
나는 최대한 노력했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다만 내 상자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갑자기 스테이플이 박혀 있는, 창문 없는 벽이 무언가 딱딱한 것에 부딪쳤다. 암초에 부딪힌 것은 아닌 듯싶었다. 평상시보다 훨씬 몸이 더 튕겨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자 뚜껑 쪽에서 쇠줄 소리가 들렸다. 고리에 부딪힐 때 나는 철거덕거리는 소리였다. 이어 상자가 천천히 들어올려지더니 1미터 가량 올라갔다. 그래서 나는 다시 손수건을 맨 막대기를 빼들고 목이 터져라 도움을 외쳤다. 그러자 누군가가 크게 세 번이나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얼마나 신이 나던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 모를 것이다. 드디어 상자 위에서 버석거리는 발소리가 들렸고, 누군가가 구멍에 대고 큰 소리로, 그것도 영어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거기 누구 없소? 있으면 대답하시오.”
나는 소리쳤다.
“나는 영국인이오. 하늘도 무심한지 누구도 겪어보지 못했을 엄청난 불운을 겪었다오.”
그리고 이 감옥에서 어서 구해달라고, 이 세상에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의 이름을 걸고 사정했다.
“상자를 배에 단단히 묶어놓았으니 이제 안심하시오. 이제 곧 목수가 도착할 테니 상자 뚜껑에 구멍을 뚫어 당신을 빼낼 수 있을 거요.” (P201)
[제3부 라퓨타(날아다니는 섬), 발니바비, 럭낵, 글럽덥드립, 일본 여행기]
범선을 타고 항해를 시작한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람에 우리는 5일 간 북북동 방향으로, 그리고 다시 동쪽 방향으로 밀려갔다. 그 후 날은 개였지만, 강한 서풍이 쉴 새 없이 불어닥쳤다. 열흘째 되던 날. 설상가상으로 우리는 두 척의 해적선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해적선은 우리를 삼킬 듯이 달려왔다. 우리 범선은 화물을 많이 실은 탓에 속도도 매우 느렸고, 그렇다고 우리 스스로가 방어할 수 있는 여건도 못 되었다.
결국 해적선 양쪽에서 동시에 해적들이 건너왔고, 선두에는 두목들이 부하들을 이끌고 무섭게 들이닥쳤다. 나는 선원들에게 명하여 갑판에 모두 엎드리도록 했다. 해적들은 우리를 보더니 억센 밧줄로 꽁꽁 묶고, 보초를 세운 후 범선을 뒤지기 시작했다. (P214-215)
내가 섬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들이 나를 에워쌌다.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사람들은 신분이 높은 사람들인 듯했다. 사람들의 표정이나 몸짓을 보니 나를 무척 신기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도 그들을 보고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신기하게 생기고, 이상한 옷을 입고, 희한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의 머리는 곧게 서지 않고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한쪽 눈은 안으로 돌아가 있었으며, 다른 쪽 눈은 위를 향해 있었다. 옷차림 또한 이상했는데, 겉옷에는 해나 달, 별 모양뿐만 아니라 바이올린이나 플루트, 하프, 트럼펫, 기타, 하프시코드, 그리고 유럽에는 없는 별의별 악기들이 그려져 있었다. (P221)
내가 ‘날아다니는 섬’ 혹은 ‘떠다니는 섬’이라고 한 말은 이곳 말로 ‘라퓨타’라고 하는데, 그 어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곳 사람들은 ‘랖’은 고어에서 ‘높은’이라는 뜻이었고, ‘운트’는 ‘군주’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두 말을 합쳐 ‘라푼투’라고 하던 것이 변질되어 오늘날 ‘라퓨타’가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 해석은 너무 끼워맞추기식이라는 생각이 들어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학자들에게 나의 해석을 말해주었다. 즉, 라퓨타는 ‘랖 아우티드’로 해석할 수 있는데, ‘랖’은 ‘바다에서 춤추는 햇살’이라는 뜻이고, ‘아우티드’는 ‘날개’라는 뜻이라고 했다. 물론 내 주장이 맞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아니다. 어떤 뜻이 맞는지는 독자 여러분의 현명한 판단에 맡기겠다. (P225-226)
섬이 비행하는 동안 나는 섬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은 전혀 받지 못했다. 도착 다음날 열한 시경이었다. 왕이 귀족과 고위관리, 일반관리를 모두 거느린 채 손수 악기를 들고 쉼 없이 세 시간 내내 음악을 연주했다.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귀가 다 멍멍해졌다. 왜 연주를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데, 선생이 그 이유를 가르쳐주었다. 선생 말로는 이 섬의 주민들은 천상의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귀가 발달되어 있다는 것이다. 천상의 음악은 특정 시기에 연주되는데, 그래서 왕궁 사람들 모두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하는 악기 하나를 선택해 자기가 맡은 부분을 연습하는 것이라고 했다. (P226-228)
날아다니는, 혹은 떠다니는 섬은 완벽한 원형으로 지름이 7837야드, 즉 7킬로미터하고도 200미터나 되었다. 그러나 면적으로 치면 1만 에이커에 해당한다. 두께는 270미터나 되었다. 밑에서 섬을 올려다보면, 섬의 바닥은 굴곡 없이 평평한 금강석 판이었고, 최고 두께가 180미터에 달했다. 그 석판 위에는 여러 가지 광물들이 보통 땅에서 볼 수 있는 순서대로 쌓여 있고, 또 그 위에는 옥토가 3~3.6미터 높이로 쌓여 있다. 섬은 가장자리에서 중앙으로 갈수록 경사가 기울어 이슬이나 비라도 내리면 자연적으로 작은 냇물을 이루며 중앙으로 물이 흘러들어간다. 이렇게 흘러간 물은 커다란 저수지 네 곳에 모이게 되는데, 저수지의 직경은 800미터이고, 섬 한가운데 지점에서 182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P233)
내가 이곳에 도착하기 3년 전이었다. 왕이 영토를 순시하고 있는 동안 왕국의 운명을 판가름할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 이후 관련법까지 마련되었다고 한다. 왕이 순방한 첫 번째 도시는 린달리노라는 왕국 제2의 도시였다. 왕이 순방길에 나선 지 사흘 후였다. 평소 핍박이 심하다고 불만이 많았던 린달리노 주민들은 성문을 닫아버리고 총독을 인질로 잡아버렸다. 또 엄청난 속도로 부지런히 시내 네 모퉁이에 높은 탑 네 개를 세웠는데, 탑들은 정사각형을 이루었고 높이는 시내 중앙에 서 있는 뾰족 바위와 같은 높이였다. 주민들은 네 개의 탑과 중앙의 뾰족 바위에 커다란 천연자석을 붙여놓았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에 대비하여 엄청난 양의 연료를 준비해두었다. 만약 천연자석 계획이 실패로 끝나면, 섬의 금강석 바닥을 폭파시키려 한 것이다. (P239)
아카데미는 한 건물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양 길가에 늘어선 몇 채의 집이 모두 아카데미에 소속된 건물이었는데, 황폐해져가는 거리를 아예 사들여서 사용하고 있었다.
원장은 나를 매우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나는 며칠 동안 계속해서 아카데미를 방문했다. 방마다 한 명, 혹은 그 이상의 계획자들이 있었는데, 방은 모두 합쳐 500개도 넘는 것 같았다.
내가 처음으로 본 계획자는 몹시 말랐으며, 손과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긴 머리에 수염은 덥수룩하고, 여러 군데 그을린 자국이 있었다. 옷과 셔츠, 살갗도 모두 새까맸다. 이 사람은 오이에서 태양 광선을 추출해 유리병에 넣어 봉인한 다음, 여름에 날씨가 궂을 때 병을 꺼내어 공기를 데우도록 하기 위한 연구에 벌써 8년째 매달리고 있었다. 그는 8년 만 더 매달리면 총독의 정원에 싼 가격으로 태양 광선을 공급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그러면서 요즘 재고가 부족하니 자신이 재능을 살릴 수 있도록 격려금조로 조금만 도와달라고 했다. 특히 오이가 매우 비싼 계절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나는 돈을 조금 내놓았는데, 주인이 이럴 경우에 쓰라고 준 돈이 있었기 때문이다. 계획자들이 방문하는 손님에게 구걸한다는 것을 주인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다른 연구실로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러 그냥 되돌아 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안내를 맡았던 주인의 친구는 나를 앞으로 밀면서 무례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귓속말로 애원했다. 그러면 엄청난 원망을 들을 것이라고 해서 나는 코를 막지도 못했다. 이 방에 있는 계획자는 아카데미에서 연구한 지 가장 오래된 사람이었다. 얼굴과 수염은 누르스름했고, 손과 옷에는 오물이 묻어 있었다. 내가 인사를 하자 계획자는 나를 꼭 안아주었다. 어찌나 피하고 싶던지..... 계획자는 아카데미에 들어온 이후 사람의 똥을 처음의 음식 상태로 되돌려놓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즉, 똥에서 몇 가지 성분을 분리해내고, 쓸개즙에서 나온 색깔을 제거한 후, 냄새를 없애고, 남아 있는 침 성분을 제거한다는 것이다. 매주 아카데미 협회로부터 사람들의 오물이 가득 들은 통을 공급받는데, 통의 크기는 큰 브리스틀 나무통만 했다. (P250-251)
나는 여행하면서 얼마간 랭든이라는 민족이 살고 있는 트리브니아라는 왕국에 머문 적이 있다고 했다. 이곳 백성들은 모두 음모를 발견하는 자, 목격자, 밀고자, 고발자, 기소자, 참고인, 맹세하는 자들로 부하나 앞잡이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각료와 의원들의 성향이나 행동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 왕국에서 음모를 꾸미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정치가로서 자신의 개성을 살려보고자 할 때, 미치광이 행정부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줄 때, 백성의 불만을 누르거나 다른 곳으로 불만을 터뜨리도록 할 때, 백성의 재산을 몰수하여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려 할 때,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강화시키거나 약화시켜서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도모할 때 등이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미리 짜고 내란죄로 기소할 사람들을 정해놓는다. (P265)
내가 생각하기로 이 왕국이 속해 있는 대륙은 아메리카 대륙의 미개척지에서 동쪽으로, 즉 캘리포니아 서쪽을 향해 뻗어 있고, 북쪽으로는 태평양에 닿아 있는 듯하다. 라가도로부터 따져보면, 240킬로미터가 채 안 되는 거리다. 이 왕국에는 커다란 항구가 있는데, 루그낵이라는 큰 섬과 교역을 매우 활발하게 하고 있다. 루그낵 섬은 대륙에서 북서 방향, 정확히 북위 29도, 동경 140도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 섬은 일본의 남동 방향에 위치해 있는데, 일본과의 거리는 약 480킬로미터였다. 일본 황제와 루그낵의 왕이 맺은 동맹으로 두 나라 간의 해상 왕래는 매우 잦았다. 나는 이곳으로 발길을 돌려 유럽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고자 했다. (P267)
글룹둡드립이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마녀 또는 마술사의 섬’이라는 뜻이다. 섬의 규모는 영국 와이트 섬의 3분의 1 정도였으며, 과일이 사방 천지에 널려 있었다. 섬을 다스리는 사람은 마법사 종족의 족장이었다. 이들은 같은 종족끼리만 혼인을 하고, 가장 연로한 사람이 군주나 총독 자리를 승계받았다. 총독은 화려한 궁전과 6미터나 되는 돌담이 늘어선 3천 에이커에 달하는 공원을 소유한다. 그 공원 안에는 목장, 밀밭, 화단을 구분하는 낮은 돌담이 있었다. (P268)
이제 돌아갈 날이 되었다. 나는 글룹둡드립의 총독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고 두 신사와 함께 말도나다로 돌아와 루그낵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며 2주를 보냈다. 두 신사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나를 무척 따뜻하게 대해주었는데, 떠날 때에는 여비까지 챙겨주며 배에 오르는 모습도 지켜봐주었다. 항해는 한달 간 지속되었다. 항해 도중 강한 태풍을 만나 서쪽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290킬로미터나 되는 무역풍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1709년 4월 21일, 우리는 루그낵의 남동부에 있는 항구도시 클루메그닉의 강에 들어섰다. 배는 항구에서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돛을 내린 뒤 수로 안내인에게 신호를 보냈다. 30분도 안 되어 안내인 두 명이 배에 올랐고, 이들의 안내로 암초와 수심이 얕은 곳을 피해 넓은 항만으로 들어섰다. 도시의 성벽에서 180미터 정도의 거리에 있는 만은 함대가 자유로이 항해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나를 밀고하려고 했던 것인지 아니면 실수로 그랬는지 선원 몇 명이 내가 외국인이고,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이라고 안내인에게 일러바쳤다. 안내인들은 세관원에게 이를 고했고, 그래서 나는 엄격한 심사를 받은 후에야 상륙할 수 있었다. 세관원 관리는 발니바비 말을 사용했는데, 교역이 점차 활발해짐에 따라 이 도시에서, 특히 선원들과 세관원들은 대부분 발니바비 말을 사용했다. 나는 몇 가지 사항만 될 수 있는 대로 그럴듯하고 논리적으로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단, 내가 어디 출신인지는 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네덜란드인이라고 속였다. 그 이유는 나의 목적지는 일본이었고, 일본에 입국이 허용되는 유럽인은 오직 네덜란드인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세관원 관리에게 발니바비 해안에서 난파를 당해 암초 위에 있다가 라퓨타, 즉 그들이 더 자주 쓰는 말로 ‘날아다니는 섬’에 구조되었다고 이야기했다. 또 일본에 가려는 이유는 그곳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P282-283)
루그낵 사람들은 정중한데다가 포용심이 많으며, 동양에서 흔히 볼 수 있듯 자존심 또한 대단했다. 그래도 외국인, 특히 왕궁의 후원을 받고 있는 외국인에게는 무척 예의가 발랐다. 나는 최상류층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항시 통역사를 대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화를 나누는 데도 큰 불편함이 없었다.
그처럼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던 어느 날이었다. 귀족 하나가 나에게 스트룰드부룩, 즉 ‘불멸의 인간’들을 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전혀 없다고 답하고, 도대체 언젠가는 죽게 마련인 인간을 왜 그렇게 부르는지 설명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귀족이 말하기를, 왼쪽 눈썹 바로 위 이마에 붉고 둥근 점을 가지고 태어나는 아이가 간혹 있는데, 이런 아이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에 붉은 점은 3펜스짜리 은화 크기만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점도 커지고 색도 변한다. 12세에는 녹색으로 변하고 25세에는 짙은 청색, 45세에는 새까만 색이 되며, 이때 점의 크기는 영국 동전 1실링만 해진다. 이후에는 색이나 크기가 변하지 않는다. 귀족은 이런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어서, 남녀 할 것 없이 전국에 있는 사람 모두 통틀어 1,100명을 넘지 않으며, 수도에는 약 50명 정도가 있다고 했다. 최근에 태어난 스트룰드부룩은 3년 전 한 지방에서 세상에 첫 울음을 터뜨린 여자아이라 했다. 이런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가문의 혈통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우연의 결과이지만, 스트룰드부룩과 달리 그 자녀들은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죽게 된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P288-289)
스트룰드부룩들과 나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서로 관찰하고 기록한 것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어떤 단계를 거쳐 세상이 부패에 물들었는지 지적하고, 이를 각 단계마다 지적해서 인류에게 항상 경고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가르침을 줄 것이다. 우리가 모범적인 예를 보여주고 사람들이 이에 영향을 받으면, 우리의 경고와 가르침은 인간 본성이 끊임없이 타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시대든 인간 본성이 타락한다는 우려가 있었고, 그 이유도 정당하지 않았던가! (P291-292)
스트룰드부룩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두 나라 사람들은 가당치도 않은 얘기는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 자기가 나에게 스트룰드부룩에 대해 말을 꺼내자 내가 깜짝 놀란 것을 보아하니 생전 처음 듣는 얘기인 듯하고 또 믿지도 않는 눈치라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두 나라에 머물 때, 귀족은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은 전 인류의 공통된 바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또한 사람은 누구든지 한 발을 무덤에 들여놓으면 젖 먹던 힘까지 써서 다른 발은 절대 들여놓지 않으려 하는 법이라고 했다. 그러니 노인들이 매일 하루만 더 살기를 바라고 죽음을 끔찍한 악마로 여기며, 죽음으로부터 물러섰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오직 루그낵 섬에서만 더 오래 살고 싶어하는 욕망이 그리 간절하지 않은데, 그 이유는 스트룰드부룩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직접 눈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했다. (P292-293)
[제4부 후이늠국(말의 나라) 여행기]
나는 다섯 달 동안 집에서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내가 이렇게 즐거운 나날을 보내면서 이보다 더 행복한 것이 없다는 것을 터득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지만 나는 또다시 가엾게도 배부른 아내를 홀로 남겨둔 채 길을 떠나야 했다. 350톤급 상선 어드벤처 호의 선장이 되어달라는 솔깃한 제안이 귓속에서 맴돌았기 때문에..... 더군다나 나는 항해 경험도 풍부했고, 이제는 배에서 외과의 노릇만 하는 것도 지겨웠기 때문에 결국 선장이라는 제안을 수락하고 말았다. 물론 위급할 시에는 의사 역할도 담당하겠지만, 어쨌든 나는 새로운 외과의로 로버트 퓨어포이라는 유능한 젊은이를 채용하고 길을 떠날 채비를 했다. (P305)
나는 누군가가 갑자기 달려들까 봐 매우 조심하며 걸어갔다. 혹시 뒤나 양옆에서 화살이 날아오지나 않을까 겁도 났다. 평지에 이르자 사람들의 발자국이 많이 보였고, 암소 발자국도 조금씩 보였다. 그런데 대부분이 말 발자국이었다. 밭에는 동물 몇 마리가 한가로이 거닐고 있었고, 나무 밑에도 한두 마리가 쉬고 있었다. 그 동물들은 매우 이상하게 생겼고 기형인 것 같기도 해서 조금 겁이 났다. 결국 나는 동물들을 관찰하려고 덤불 뒤로 숨었다. 몇 마리가 내가 숨어 있던 곳으로 다가와서 나는 동물의 생김새를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얼굴과 가슴에는 두꺼운 털이 북실북실 나 있었고, 곱슬거리는 털과 직모가 섞여 있었다. 턱수염은 꼭 염소수염 같았고 등과 다리 앞쪽, 그리고 발에는 털이 길게 나 있었다. 그밖에 나머지 부분에는 털이 없어서 살결을 볼 수 있었는데 황갈색 피부였다. 꼬리는 없었고 양쪽 엉덩이에도 털이 없었는데, 항문에만큼은 털이 나 있었다. (P307-308)
말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야후’라는 말이 여러 번 들렸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녀석들이 대화를 나누느라 정신없는 동안 나는 야후라는 단어를 흉내내보려고 했다. 그리고 대화가 끝나자마자 말 울음소리를 흉내내며 아주 큰 소리로 야후라고 외쳤다. 그러자 말들이 깜짝 놀라는 모습이 역력히 드러났다. 회색 말은 야후라는 말을 두 번 반복했는데, 마치 내게 정확한 억양을 가르쳐주려는 것 같았다. 나는 최선을 다해 말을 따라하려 했고, 매번 발음이 더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물론 완벽해지려면 아직 멀었지만 말이다. 이번에는 적갈색 말이 다른 말을 가르쳐주려 했는데 발음이 훨씬 어려웠다. 알파벳으로 대충 옮겨본다면 Houyhnhnm, 즉 ‘푸아눔’이다. 처음 단어보다는 발음하기가 힘들었지만, 두세 번 더 해보고 나니 훨씬 좋아졌다. 내가 금방 말을 배우자 말들은 무척 놀라는 눈치였다.
말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아마도 나에 관해 논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만났을 때처럼 발굽을 툭툭 치더니 곧 헤어졌다. 회색 말은 나에게 앞장서라는 신호를 보냈고, 나는 더 나은 안내인을 만날 때까지는 그의 말을 듣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좀 천천히 걷자고 하자, 말은 ‘후운, 후운’하며 울었다. 나는 그 뜻을 짐작하고 너무 피곤해서 더 빨리 걸을 수 없다는 뜻을 내 나름대로 전했다. 그러자 말은 제자리에 멈춰섰고 나는 조금 쉴 수 있었다. (P313)
이곳에 도착한 지 10주 정도 지나자 나는 주인이 물어보는 것은 대충 다 이해할 수 있었고, 석 달째에는 웬만한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주인이 가장 알고 싶었던 것은 내가 어느 나라에서 온 것인지와 내가 어떻게 이성적인 동물의 흉내를 낼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느냐는 것이었다. 주인은 내 신체 중 자기가 볼 수 있는 부분이 머리와 손, 얼굴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를 야후와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야후는 매우 교활한데다가 사악하기까지 해서 짐승 중 가장 가르치기 힘든 동물이라는 것이다. 나는 바다 건너 아주 먼 나라에서 왔으며, 그 나라에는 나와 같은 종족이 많이 살고 있다고 했다. 또 내가 나무로 만든 좁고 커다란 통을 타고 왔다고 말했다. (P323)
주인은 바다 건너에 어떤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야만스러운 짐승이 나무통을 만들어 물 위를 마음대로 떠다니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주인 말로는 푸이눔 중 그 누구도 그런 통을 만들 줄 모르고, 또 야후들에게 통의 조종을 맡긴다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푸이눔이란 그들 언어로 ‘말’을 의미하며, 어원상으로는 ‘대자연의 완성’이라는 뜻이다. 나는 주인에게 지금은 표현력이 너무 부족하니 실력을 좋게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아울러 그렇게 되면 곧 주인에게 놀라운 사실을 알려줄 수 있으리라는 말도 덧붙였다. (P324)
수상의 자리에 오르는 길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아내와 딸 혹은 누이를 어떻게 잘 이용하느냐, 둘째는 어떻게 전임자를 배반하거나 음해하느냐, 마지막으로 어떻게 대중 집회에서 왕궁의 부패상을 미친 듯 공격하느냐, 현명한 군주는 마지막 방법을 선택한 사람을 간택하는데, 그 이유는 이런 열성자들이 군주의 의지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가장 아첨하고 비굴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각료들은 왕궁의 모든 관직을 주무르고 있어 상원의원과 하원의원 대부분을 매수하여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또 최후의 수단으로 주인에게도 이미 설명한 바 있는 면책법을 이용해 나라에서 약탈한 전리품을 챙겨 공직에서 물러나 안위를 도모한다.
수상 관저는 수상의 이익을 위해 훈련받는 학교와 같다. 시동이나 하인, 짐꾼들이 모두 주인을 따라하여 지방정부에서 각료가 되고, 오만, 거짓말, 뇌물 공여라는 세 가지 중요한 기술을 배워 뛰어난 기량을 발휘한다. 그리고 지위 높은 귀족들이 자기를 위해 만든 파벌을 갖게 되고, 가끔 뻔뻔함과 기민함을 발휘해서 자기 주인의 후계자가 되는 하인들도 있다. (P351)
어쨌든 나는 주인에게 나에 대해 높이 평가해주어 고맙다는 뜻을 전하면서 내가 낮은 신분 출신이며 기본적인 교육만을 받을 수 있도록 해준 평범하고 정직한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을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귀족은 주인이 생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귀족은 어려서부터 게으름과 낭비를 배우며 자랐고, 성년이 되자마자 정력을 낭비하여 추잡한 여자들과 놀아나다 입에 올리기도 수치스러운 병에 걸린다. 그러다 재산을 다 탕진할 즈음에 자신이 미워하고 경멸해 마지않던 비천한 가문의 못생기고 체격도 볼품없는 여자와 오로지 돈 때문에 결혼한다. 이런 결합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연주창에 걸리거나 곱추이거나 기형인 경우가 많고, 3대 이상 대를 잇는 집안이 별로 없다. 부인이 특별히 신경 써서 주위에서 건강한 지아비를 찾거나 하인을 찾아 종자를 개량하고 번식시키지 않는다면 말이다. 귀족가문의 혈통임을 보여주는 특징은 병든 몸, 말라서 움푹 파인 얼굴, 창백한 혈색이다. 육체적 결함과 더불어 우울, 나태, 무지, 변덕, 호색, 자만 등 정신적 결함 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건강하고 건장한 체격은 지체 높은 귀족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진짜 아버지는 하인이나 마부였을 것이라는 의심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고귀하신 분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어떤 법도 제정할 수 없으며 폐지하거나 수정할 수 없을뿐더러 일반 백성들의 재산에 관해서도 결정권을 행사하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그렇다고 이에 아무도 대항 못하고...... (P352-353)
내가 봐도 야후는 이 나라에서 질병에 걸리는 유일한 짐승이었다. 그래도 야후들이 걸리는 질병은 인간 세계의 말이 걸리는 질병보다 적었고, 병에 걸리는 이유도 학대를 받아서가 아니라 탐욕스러운 짐승의 불결하고 욕심 많은 습관 때문이었다. 질병을 가리키는 이름도 일반적인 명칭만 있을 뿐이고 짐승의 이름에서 차용해온 것이다. 그래서 흐네아-야후, 즉 ‘야후의-악’이라고 부르며 야후의 대변과 소변을 섞어 만든 것이 치료약이다. 약은 야후의 입을 강제로 벌려 먹인다. 나도 이 치료법을 자주 이용해 효과를 보아서 말인데, 대중의 안녕을 위해 고향 사람들에게 과식으로 생긴 모든 질병에 효과 만점인 특효약으로 이 약을 강력 추천한다. (P360)
옛날 달력으로는 1714년. 그레고리력으로는 1715년 2월 15일 오전 아홉 시. 나는 결국 절망적인 항해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바람도 잘 불어서 노만 저었는데, 곧 지쳐버릴 것도 같고 바람도 갑자기 멈춰버릴지 몰라 무작정 돛을 올려보기로 했다. 다행히 조수에 밀려 시속이 8킬로미터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주인과 그의 친구들은 내가 거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 해안가에 머물렀다. 늘 나를 아껴주던 갈색 말이 흐누이 일라 니햐 마쟈 야후라고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착한 야후야, 몸 조심해.”라는 말이었다.
나는 아무도 살지 않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구할 수 있는 섬을 찾아 볼 생각이었다. 그러는 편이 유럽의 우아한 왕궁에서 수상 노릇을 하는 것보다 더 행복할 듯했기 때문이었다. 야후들이 지배하는 사회에 다시 돌아가 산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정말 끔찍했다. 혼자서 살게 되면 적어도 사색을 즐길 수 있고, 누구도 쫓아갈 수 없는 푸이눔들의 덕에 대해서도 즐겁게 회고해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우리 종족이 저지르는 악행과 부패를 다시 저지르지 않아도 되었고 말이다. (P394)
내가 발견한 나라를 정복해서 왕의 영토를 넓히는 일에 내가 그리 적극적이지 않은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이런 경우 군주들이 적용하는 분배의 정의에 대해 의심쩍은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해적들이 폭풍우를 만나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표류해가다가 돛대 위에 망보는 소년이 육지를 발견했다 치자. 약탈과 강탈을 목적으로 해적들은 육지에 상륙한다. 그런데 내려보니 사람들은 더없이 순수하고 해적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해적들은 이 땅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 왕의 땅으로 공식 접수한다. 그리고 썩은 널빤지나 돌로 기념비를 세운 후 원주민 20~30명을 살해한다. 원주민 한 쌍을 견본 삼아 강제로 배워 태워 고국으로 돌아와 해적들은 사면을 받는다. 이제 신권이 부여됐다는 명목 하에 새로운 영토가 생긴 것이다. 서둘러 함대가 파견되고 원주민들은 쫓겨나거나 학살당한다. 보물을 빼앗기 위해 원주민의 군주들을 고문하고 온갖 비인간적인 행위와 욕정을 채우기 위한 행동이 허용된다. 이리하여 대지는 원주민의 피로 시뻘겋게 물든다. 이토록 숭고한 원정에 동원된 저주받을 도살자 무리가 바로 우상을 숭배하는 야만족을 개종시키고 개화시킨다는 근대의 식민지 군대인 것이다. (P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