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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소공녀>

영화 <소공녀> 1995년

by 노용헌

영화 <소공녀>(1939), <소공녀>(1986)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3대 작품은 <소공자>, <소공녀>, <비밀의 화원>이다.

지금 이 순간 아이는 아버지 크루 대위와 함께 뭄바이에서 배를 타고 온 여정을 더듬고 있었다. 커다란 배를, 묵묵히 배 위를 오가는 라슈카르들을, 뜨거운 갑판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몇몇이 모여 일부러 말을 걸고는 자신이 대답할라치면 웃음을 터뜨리던 젊은 장교 부인들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아이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은 한때는 해가 이글거리는 인도에 있다가, 그 다음에는 바다 한복판에 있었으며, 지금은 희한한 탈것을 타고 낮이 밤처럼 어두운 낯선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하도 어리둥절해서 아이는 아버지에게 더욱 바짝 달라붙었다.

“아빠.”

아이는 행여 누가 들을세라 귀엣말하듯 나직하게 불렀다.

“아빠?”

“왜 그러니?”

크루 대위는 아이를 꼭 끌어안고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리 사라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여기가 거기예요?”

아이는 아버지의 품을 파고들며 속삭이듯 물었다.

“그래요, 아빠?”

“그래, 사라야. 맞다. 드디어 다 왔구나.”

고작 일곱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이는 아버지의 말에 배어 있는 슬픔을 느꼈다.

어찌 된 일인지 아이는 아버지가 마음의 준비를 시키기 시작한 몇 해 전부터 자신이 가야 할 그곳을 언제나 ‘거기’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자신을 낳고 얼마 안 되어 죽었으므로 아이는 어머니의 정도 몰랐을뿐더러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도 없었다. 그러니 젊고, 잘생기고, 다정다감한 부자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유일한 피붙이라고 여길 만도 했다. 둘은 언제나 함께 놀았고 서로를 아꼈다. 아이는 자신이 듣는 줄도 모르고 그네들끼리 하는 말을 듣고서 아버지가 부자라는 사실과 자신도 크면 역시 부자가 될 거라는 사실을 알았을 뿐, 부자라는 게 무엇인지 잘 몰랐다. 내내 멋진 방갈로에서 살았고, 자신에게 살람식으로 깍듯이 절하고 ‘미시 사히브’라고 부르며 무엇이든 제 뜻을 다 받아주는 하인들 속에서 자란 데다, 장난감과 애완동물에 자신을 떠받드는 아야도 있었던 터라 아이는 그런 걸 가진 사람들이 부자라는 걸 차츰 알게 되었다. 그러나 부자가 무엇인지 아이가 아는 건 그게 다였다. (P12-13)

마리에트가 짙푸른 교복 원피스를 입혀 주고 같은 색 리본으로 머리를 묶어주자, 사라는 자기 의자에 앉아 있는 에밀리에게 다가가 책 한 권을 쥐여 주었다.

“내가 아래층에 있는 동안 이 책을 읽고 있으렴.”

그러고 나서 사라는 자신을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마리에트에게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인형들이 자기들이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기 싫어한다고 믿어요. 어쩌면 에밀리는 정말로 읽을 줄도 말할 줄도 걸을 줄도 알지만, 사람들이 방을 나가고 없을 때만 그런 걸 할지도 몰라요. 그게 에밀리의 비밀이에요. 마리에트도 알겠지만, 인형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되면 부려먹을 테니까요. 그래서 자기네끼리 그 사실을 비밀로 하자고 다짐했을지 몰라요. 마리에트가 이 방에 있으면 에밀리는 그냥 앉아서 한곳만 물끄러미 보고 있겠지만 이 방에서 나가면 책을 읽기 시작하거나 창가로 가서 밖을 구경할지도 몰라요. 그러다가 누군가 방에 들어오는 기척을 들으면 얼른 달려가 의자에 풀쩍 뛰어올라서는 시치미를 뚝 떼고 내내 거기 앉아 있었던 척할 테죠.”

“콤 엘 레 드롤!(참 별스럽기도 하지!)”

마리에트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며 아래층으로 내려가 최고참 하녀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그러나 마리에트는 똘똘해 보이는 작은 얼굴에 예의도 아주 바른, 이 별스러운 계집아이가 벌써 좋아지기 시작했다. 예전에 시중들던 아이들은 버릇이 없었다. 사라는 어리지만 세련되고 살갑고 말씨도 고와서 ‘괜찮다면요, 마리에트,’라거나 ‘고마워요, 마리에트.’ 라고 말하는 것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 없었다. 마리에트는 사라가 마치 숙녀 대하듯 자신에게 고맙다는 인사말을 한다며 최고참 하녀에게 말했다.

“엘라 레르 뒨 프린세스, 세트 프리트. (어린애가 공주척럼 기품이 있다니까요.)” (P27-28)


어먼가드는 이 이상하고 신기한 친구에게 홀딱 반한 나머지 지금껏 본 그 어느 인형보다 마음에 쏙 드는 사람 같은 인형이었음에도, 에밀리보다는 사라에게 더 관심이 쏠렸다.

“앉자. 그럼 말해 줄게. 그건 아주 쉬워서 시작만 하면 거침없이 술술 잘 풀려. 그렇게 죽 계속 이어가면 돼. 게다가 참 멋진 일이기도 해. 에밀리, 잘 들어, 얘는 어먼가드 세인트 존이야. 어먼가드, 이쪽은 에밀리라고 해, 한번 안아볼래?”

“오, 그래도 돼? 정말, 내가 안아봐도 돼? 진짜 예쁘다!”

이렇게 말하고서 어먼가드는 에밀리를 품에 안았다.

짧은 세월이지만 이제까지 지루하게 살아온 어먼가드에게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려 아래층으로 내려가야 할 시간이 되기 전까지, 이 묘한 친구와 함께 지낸 한 시간은 꿈조차 꾸어본 적 없는 황홀한 시간이었다.

사라는 벽난로 앞 양탄자에 앉아 신기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몸을 살짝 웅크리고 앉은 사라의 초록빛 눈은 반짝반짝 빛났고 뺨은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인도며 항해를 비롯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중 어먼가드가 푹 빠져든 것은, 걷고 말할 뿐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형이 그런 능력을 비밀스럽게 간직해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방으로 돌아오면 ‘번개’처럼 빠르게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는 사라의 상상 이야기였다.

“사람은 그렇게 못 해. 있지, 그건 마법 같은 거야.”

사라가 진지하게 말했다. (P41)

언젠가 사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에게는 어쩌다 우연히 생기는 일이 많아. 내게는 좋은 우연이 많이 따랐어. 어쩌다 보니 늘 공부하고 책 읽는 게 좋았고, 배우고 읽은 걸 잘 기억하게 되었지, 또 어쩌다 보니 잘 생기고 다정하고 머리 좋고, 내가 좋아하면 무엇이든 다 해줄수 있는 아버지의 딸로 태어난 거고. 난 본래 착한 아이가 아닐지도 몰라. 갖고 싶은 걸 다 가질 수 있고 모두들 잘해 준다면, 누구라도 착해지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거 아닐까?”

그러고는 꽤 심각하게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진짜 착한 아인지 못된 아인지 어떻게 알아낼지는 나도 모르겠어. 어쩌면 난 끔찍한 아이일지도 몰라. 지금까지 그걸 아무도 모른다면, 그건 아마 내가 시련을 겪은 적이 없어서일 거야.”

“라비니아도 아무런 시련을 겪지 않았어. 근데 걔는 아주 못됐잖아.”

어먼가드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P45)


호화로운 물건들이나 교장이 자랑스레 내세우는 학생이라는 사실보다 더 많은 학생들을 끌어 모으고, 사라를 시샘하는 라비니아 같은 몇몇 아이들조차 자기도 모르게 꼼짝없이 사로잡히고 만 사라의 힘은 이야기를 잘하는 것이었고, 그것도 진짜 이야기든 아니든 상관없이 아주 그럴싸하게 풀어낸다는 거였다.

학창 시절에 자신이 다닌 학교에 입담 좋은 이야기꾼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이야기 좀 해달라고 졸졸 따라다니며 애걸하다시피 하는 아이들이 주위로 얼마나 몰려드는지, 그 인기 많은 이야기꾼을 빙 에워싸고 옹기종기 모여 앉은 무리에 끼여 같이 듣고 싶어 하는 아이는 또 얼마나 많은지 너끈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사라는 이야기를 구수하게 잘하기도 했지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자체를 무척 즐겼다. (P56)

마침내 이날 오후 그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자니 욱신거리던 그 조그마한 다리의 통증이 가시는 게 어찌나 놀랍고 기쁘던지 온몸의 고단함마저 싹 풀리는 것 같았다. 이글거리던 난롯불의 따뜻함과 아늑함이 마치 마법처럼 사르르 몸으로 스며들어 빨갛게 달구어진 석탄을 바라보던 아이의 꼬질꼬질한 얼굴에 웃음마저 지친 듯 느릿한 미소로 번지고, 고개는 저절로 수그러지고 눈이 스르르 감기더니 그예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사실 사라가 들어오기 전까지 베키가 그 방에 있었던 건 고작 10여 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아이는 100년 동안 잠들었던 <잠자는 숲 속의 공주>라도 된 양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가엾게도 베키의 모습은 잠자는 숲 속의 공주와는 안주 딴판이었다. 그저 추레하고 졸자라고 고생에 찌들 대로 찌든 부엌데기 아이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베키와 사뭇 달리 사라는 별천지에서 온 아이 같았다.

사라는 이날 오후에 특별히 무용 수업을 받았는데, 이처럼 무용 교사가 학교에 오는 건 일주일마다 있는 일이긴 하지만 꽤나 커다란 행사였다. 하여 학생들은 저마다 가장 예쁜 드레스를 차려입었고, 사라는 춤을 두드러지게 잘 추는 까닭에 언제나 가장 앞자리에 서는 만큼, 마리에트는 사라를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게 꾸며주라는 지시를 받았다.

마리에트는 사라에게 장밋빛 원피스를 입히고 진짜 장미 꽃송이를 사와 꽃봉오리로 화관을 만들어 칠흑같이 까만 사라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사라는 장밋빛 고운 나비처럼 미끄러지는 듯 나는 듯 교실 안을 돌도 도는 신나는 춤을 새로 배우면서 즐겁게 연습해서인지 행복감에 젖은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라가 나비처럼 내려앉는 듯한 춤사위로 방으로 살포시 들어섰을 때 그곳에 베키가 앉아 있었고, 베키가 고개를 꾸벅거릴 때마다 살짝 흘러내린 두건도 따라 대롱거렸다. (P63-64)

“피곤해서 그런 건 너도 어쩔 수 없잖아. 아직 잠이 덜 깬 모양이네.”

가엾은 베키는 너무 놀라서 멍하니 사라를 바라보았다! 말이야 바른 말로, 베키는 지금껏 어느 누구에게도 그처럼 상냥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명령을 받고 꾸중을 듣고 따귀를 맞는 데 이골이 났을 뿐이다. 그런데 이 사람, 눈부시게 아름다운 장밋빛 무용복을 입고 있는 이 사람은 자신을 죄인처럼 다루기는커녕, 너도 피곤해할 권리가 있고 나아가 잠잘 권리도 있다는 투로 말하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 위에 얹은 그 보드랍고 여린 손길은 생전 처음 맛보는 놀랍고도 감격스러운 느낌이었다.

“성, 성 안 나셔요. 아기씨? 마님께 일러바치지 안하실 거여요?”

베키가 어리벙벙해서 물었다.

“아니, 절대로 안 해.”

사라가 분명하게 말했다.

사라는 시커먼 석탄 가루가 군데군데 묻은 채 잔뜩 겁에 질린 그 얼굴이 무척 애달프고 안쓰러워 차마 보기 힘들었다. 그때 갑자기 신통한 생각이 퍼뜩 떠오른 사라는 베키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저기 말이야, 우리는 똑같아. 그러니까 나는 너와 똑같은 여자애일 뿐이야. 나는 네가 아니고, 너는 내가 아닌 것은 어쩌다 일어난 사고와 같아.”

베키로서는 무슨 말인지 통 모를 소리였다. 자기 머리로는 그처럼 엄청난 생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으며, 자기가 아는 ‘사고’란 누군가가 마차에 받혔거나 사다리에서 떨어져서 ‘병원’에 실려 가는 불행한 일을 뜻하는 말이었다. (P66-67)

“나도 잘 몰라. 그리고 사라 이야기라면 이제 관심 없어. 넌더리가 나.”

“맞아, 사라 얘기, 걔가 ‘척하는’ 것중에 공주도 있대. 항상 공주인 척한다는 거야. 수업할 때도 그런대. 그러면 공부가 더 잘 된다나 어쩐다나. 사라는 어먼가드도 자기처럼 만들고 싶은 모양인데, 어먼가드는 제 입으로 자기는 너무 뚱뚱해서 안 된다고 한다더라.”

“걔는 진짜 뚱뚱보지. 사라는 말라깽이고.”

이번에도 버릇처럼 키득거리며 제시가 말을 받았다.

“사라는 공주가 되는 건 겉모습이나 가진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한대. 오로지 생각하고 행동하기 나름이라는 거지.”

“걘 자기가 거지여도 공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할 거야. 이제부터 우리 걔를 공주 마마라고 부르자.” (P72-73)

열한 번째 생일을 몇 주일 앞둔 어느 날 사라는 아버지에게서 편지를 받았는데, 개구쟁이 소년처럼 쾌활하던 평소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건강이 썩 좋지 않아 보이는 것이, 분명 다이아몬드 광산 사업 때문에 무리한 모양이었다.

그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내 딸 사라야, 너도 잘 알다시피 아빠는 사업을 전혀 해본 적이 없어서 숫자나 서류 들을 처리하는 게 괴롭구나. 아무리 보아도 뭐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으니 더더욱 힘든 듯하다. 열만 심하지 않아도 엎치락뒤치락 잠을 못 이루거나 가까스로 잠이 들었다가도 꿈자리가 사나워 깨는 일은 없을 텐데. 우리 꼬마 마님이 아빠 곁에 있다면 진지하고 훌륭한 충고를 해주었겠지. 그렇지, 꼬마 마님?

그가 농담 삼아 사라를 부르는 여러 이름 중에 ‘꼬마 마님’이 있었는데, 그 까닭은 사라의 말투가 하도 애어른 같아서였다.

그는 사라에게 줄 아주 근사한 생일 선물들을 마련해 두었다. 그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건 파리에서 주문한 새 인형과 눈부시게 휘황찬란한 인형의 옷가지들이었다. 그 인형 선물이 마음에 드는지 물은 아버지의 편지에 사라는 뜻밖의 답장을 썼다.

아빠도 아실 테지만, 저도 이제 제법 나이를 먹었어요. 앞으로 살면서 인형은 두 번 다시 받지 않을 작정입니다. 이것이 제 ‘생애 마지막 인형’이 되겠지요. 이건 진지하게 드리는 말씀이에요. 제가 시를 쓸 줄 안다면, 틀림없이 ‘생애 마지막 인형’에 관한 시를 지었을 거예요. 사실 써보긴 했는데 우스꽝스러웠어요. 와츠나 콜리지나 셰익스피어가 지은 것과는 아주 달랐죠. 어떤 인형도 에밀리를 대신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이 생애 마지막 인형을 아주 소중하게 대할게요. 게다가 우리 학교 학생들도 틀림없이 무척 좋아할 거예요. 모두들 인형을 좋아하니까요. 열다섯 살쯤 되는 큰 학생들 중에는 인형을 갖고 놀 나이는 한참 지난 척하는 언니들도 더러 있지만요. (P81-82)

“그깟 다이아몬드 광산이요?”

민친 교장은 새된 소리를 지르며, 의자 등받이를 움켜잡았다. 지금껏 황홀하게 젖어 있던 꿈이 스러져가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다이아몬드 광산에 홀리면 부자가 되기는커녕 쫄딱 망하기 십상입니다. 친구 말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덤비고 사업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다이아몬드 광산이든 금광이든 둘도 없는 친구의 제안이든 피하는 게 상책이죠. 고인이 된 크루 대위는......”

민친 교장이 그의 말을 무지르며 숨넘어갈 듯 소리쳤다.

“고인이 된 크루 대위라뇨? 고인이라뇨? 지금 그 말은 설마 크루 대위가......”

배로 씨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는 죽었습니다. 악성 말라리아에 사업 문제까지 겹쳐서 그만, 악성 말라리아로 고생해도 사업에 부대끼지만 않았다면, 거꾸로 사업 때문에 아무리 시름이 깊었기로서니 악성 말라리아에 걸리지만 않았더라면 목숨은 건졌을 겁니다. 아무튼 크루 대위는 죽었습니다!”

민친 교장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배로 씨의 말을 듣는 순간 오싹 소름이 끼쳤다.

“사업 문제라면? 문제가 된 게 뭐였죠?”

“다이아몬드 광산과, 절친한 친구와, 파산이죠.”

민친 교장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이 헐떡이며 말을 토해 냈다.

“파산!”

“동전 한 푼까지 탈탈 털렸습니다. 그 젊은이는 돈이 너무 많았어요. 둘도 없는 친구는 다이아몬드 광산 사업에 미쳤고요. 그러니 자기 재산은 물론 크루 대위 재산까지 다 쏟아부었죠. 일이 틀어지니까 그 친구라는 작자는 자취를 감춰버렸고, 크루 대위가 그 사실을 안 건 이미 악성 말라리아에 걸린 후였어요. 그 충격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을 테지요. 제정신을 잃고 어린 딸내미만 미친 듯이 찾다가 죽었습니다. 땡전 한 푼 남기지 않고요.”

이제야 비로소 사태의 전말을 알게 된 민친 교장은 자신이 생전 처음으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을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내세웠던 학생도 든든한 후원자도 한꺼번에 잃어버린 것이다. 자신을 가지고 놀 만큼 가지고 놀다 모든 걸 다 빼앗아 간 것만 같았고, 그 장본인은 다름 아닌 크루 대위와 사라와 배로 씨 모두였다.

“그러니까 크루 대위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사라가 물려 받을 재산은 없다. 그 아이는 이제 거지다. 내 손에 맡겨진 아이가 재산을 물려받기는커녕 비렁뱅이가 되었다, 이 말인가요?”

민친 교장이 소리쳤다. (P96-97)

“넌 앞으로 인형을 가지고 놀 시간이 없을 거다. 일도 해야 하고 혼자 힘으로 실력을 쌓아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니까.”

사라는 묘한 빛을 띤 커다란 눈으로 민친 교장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모든 게 달라질 거다. 아멜리아 선생이 이미 다 설명한 줄 아는데?”

“예, 우리 아빠가 돌아가셨다면서요. 제게 한 푼도 남기지 않으시고, 그래서 전 아주 가난하다고 하셨어요.”

민친 교장은 그 모든 게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되새기며 새삼스레 화가 치밀어 올라 모질게 말했다.

“넌 거지다, 친척도 집도 없고 널 거둬줄 사람도 하나 없는 것 같더구나.”

순간 그 창백하고 홀쭉해진 작은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지만 이번에도 사라는 말이 없었다. (P108)

그랬다. 거기는 딴 세상이었다. 방은 천장이 비스듬했고 벽에는 회칠만 되어 있었다. 회벽에는 때가 더께더께 꼈고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곳도 있었다. 벽난로는 녹슬었고 철제 침대는 낡았으며 그 위에 놓인 딱딱한 침상에는 빛바랜 이불이 덮여 있었다. 몇 가지도 안 되는 가구는 그나마 아래층에서 쓰다 더는 못 쓸 만큼 낡아빠진 고물들을 옮겨 놓은 것이었다. 천장에는 우중충한 하늘 한 조각만 겨우 내다보일 만큼 작은 지붕 창이 긴네모꼴로 나 있었고, 그 아래엔 우그러진 빨간색 민걸상이 하나 있었다. 사라는 거기로 가서 앉았다. 사라는 좀처럼 울지 않는 아이였다. 지금도 울지 않았다. 무릎에 눕혀 놓은 에밀리의 얼굴을 두 팔로 꼭 끌어안고는 그 작고 검은 머리를 검정 천 위에 묻은 채로 아무 말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렇게 쥐 죽은 듯이 앉아 있는데 가만가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도 조심스럽게 두드려서 처음엔 그 소리를 듣지 못하다가 살그머니 문을 여는 기척을 듣고서야 사라는 눈물로 얼룩덜룩해진 가엾은 얼굴 하나가 삐죽 들여다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베키의 얼굴이었다. 남몰래 내리 몇 시간을 울다가 더러운 앞치마로 되는 대로 눈을 문질러 닦고 온 터라 사라가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던 것이다. (P112-113)

사라는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았고, 자신에게 거리감을 느끼고 어딘지 꺼림칙해할 게 뻔한 여자애들과 계속 가까이 지내려고 기를 쓰기에는 자존심도 너무 강했다. 말이야 바른말로 민친 기숙학교의 학생들은 남의 아픔에는 둔감하고 자기 현실에 충실한 아이들이었다. 워낙 풍족하고 편안하게만 살아왔던 터라 사라의 차림새가 누추하고 깡총하니 작아져 보기 흉하게 변하면 변할수록, 요리사가 급하게 찾을 때마다 구멍 난 신발을 신고 바구니를 팔에 낀 채 부랴부랴 저잣거리로 나가 야채와 과일을 사 오는 일이 사라의 일로 굳어지면 굳어질수록, 학생들은 사라를 잔심부름하는 하녀처럼 대하게 되었다.

“저런 애를 다이아몬드 광산을 가진 아이라고 생각했다니. 진짜 볼만하다. 꼬락서니가 참 가관이야. 저 앨 그다지 좋아한 적도 없지만 말도 없이 사람들만 빤히 쳐다보는 꼴은 정말 참을 수가 없어. 꼭 뭔가를 캐내려는 사람 같아.”

라비니아가 말했다.

때마침 사라가 지나다가 이 말을 듣고 재빨리 말했다.

“맞아요. 그게 바로 내가 사람들을 바라보는 이유예요. 사람들에 관해 알고 싶어서요. 그러고 나서 나중에 더 깊이 생각해 보죠.” (P118)

어먼가드에게 버림받았다고 느꼈을 때, 사라는 지독하게 외로웠다.

조금 뒤 사라는 무릎깍지를 끼고 어먼가드는 숄로 몸을 감싼 채 나란히 마룻바닥에 앉아 있었다. 어먼가드가 커다란 눈에 묘한 빛이 어린 사라의 작은 얼굴을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는 정말 못 견디겠어. 사라 넌 내가 없어도 살 수 있겠지만, 난 네가 없으면 못 살아. 난 지금까지 죽은 거나 다름없었어. 그래서 오늘 밤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다가 여기 올라와서 다시 친구 하자고 매달려 보자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거야.”

“네가 나보다 훨씬 착하구나. 난 자존심만 내세우고 너랑 다시 친하게 지낼 생각을 못 했거든. 너도 알다시피 지금까지 난 시련을 당한 셈이고, 그 결과 착한 아이가 아니라는 게 드러났어. 내가 걱정했던 대로 말이지, 어쩌면......”

사라는 신중하게 생각하는 듯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P125)

사라는 애써 제 마음을 달랬다.

“대답하는 거로 친다면 나도 대답하지 않을 때가 아주 많지. 아예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게 이롭기도 하니까. 사람들이 날 모욕할 때는 말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으니 입을 봉하고 그냥 빤히 바라보면서 생각하는 거야. 그러면 민친 선생님은 얼굴이 붉으라푸르락해지고, 아멜리아 선생님은 겁을 먹고, 다른 여자들은 움찔해. 쉽사리 성을 내지 않는 사람이 더 강하다는 걸 사람들은 알아. 화를 다스릴 줄 안다는 건 그만큼 강하다는 거니까. 벌컥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은 나중에 스스로 후회할 어리석은 말들을 하고 말지. 분노만큼 강한 게 없지만, 그보다 더 강한 건 분노를 참는 거야. 못살게 구는 사람에게는 차라리 대꾸를 하지 않는 게 좋아. 난 그런 사람들하고는 상대도 안 해. 그런 면에서 보면 에밀리는 나보다 더 나 같은지 몰라. 어쩌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조차 꿀 먹은 벙어리처럼 구는지도 모르지. 그냥 모든 걸 다 꾹꾹 가슴에 담아두고서.” (P152)

사라는 멍하니 보고만 있는 에밀리의 유리알 눈과 태평한 얼굴을 보다가 갑자기 가슴이 터질 듯한 분노에 휩싸였다. 작은 손으로 에밀리를 사정없이 내동댕이치며 뜨거운 눈물을 펑펑 쏟았다. 울음이라고는 모르던 그 사라가.

“넌 한낱 인형일 뿐이야! 아무것도 아닌 그냥 인형. 인형, 인형! 넌 나한테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어. 톱밥 덩어리일 뿐이니까. 애당초 마음이라는 게 없으니까 아무것도 못 느끼겠지. 넌 한낱 인형일 뿐이라고!”

두 다리가 치켜 들려 얼굴을 덮쳐누르고, 코끝은 납작해져 볼썽사나운 꼴로 누워 있으면서도 평정을 잃지 않는 에밀리의 모습은 자못 근엄해 보이기까지 했다. (P154)

‘당신은 지금 공주에게 그 험한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는 것도, 내가 손만 까딱해도 처형당하리라는 것도 모르고 있어요. 내가 당신을 살려 두는 건 난 공주지만 당신은 불쌍하고 어리석고 인정 없고 천박한 늙은이일 뿐 어른다운 구석이라고는 없기 때문이라는 것도 모르겠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사라는 무엇보다 즐겁고 유쾌했다. 설령 얼토당토않은 공상에 지나지 않을지언정 그렇게 생각하며 위안을 얻었고, 그럼으로써 마음이 넉넉해지니 좋았다. 이런 생각에 푹 빠져 있다 보면 주변에서 아무리 모질고 험한 말들을 쏟아부어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공주라면 품위를 지켜야 하는 법이지.’

사라는 속으로 다짐했다.

그리하여 하인들이 민친 교장의 말투를 고스란히 본받아 턱없이 오만하게 굴며 명령해도 사라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아주 정중하게 대답했으므로 오히려 하인들이 이상하게 여기며 뚫어져라 바라볼 때가 많았다. (P168)

캐리스포드 씨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몹시 괴로워하며 주절거렸다.

“이보게, 내가 장담할 건 아무것도 없네. 그 아이도 그 아이의 어머니도 직접 본 적이 없어. 랄프 크루와 나는 어릴 적엔 서로 무척 친했지만 학교를 졸업한 뒤로는 만나지 못하다가 인도에서 만났지. 난 그 광산이 보장해 줄 장밋빛 미래에 넋이 빠졌네. 그 친구도 마찬가지였고, 그 미래가 하도 어마어마하고 휘황찬란해서 우리 둘 다 반쯤 홀려 있었던 거야. 그래서 서로 만나도 다른 이야기를 할 겨를이 없었네. 내가 아는 거라 곤 오직 그 아이를 어딘가에 있는 학교로 보냈다는 거야. 지금은 내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

캐리스포드 씨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끔찍했던 지난날의 기억이 아직 건강하지 못한 머릿속을 휘저어 놓을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카마이클 씨는 근심 어린 얼굴로 그를 지켜보았다. 몇 가지 확인할 게 더 있었지만 캐리스포드 씨를 자극하지 않도록 차분하고 신중하게 물어야 했다.

“그래도 자네가 그게 파리에 있는 학교라고 생각한 까닭은 있을 게 아닌가?”

“있지, 그 아이 엄마가 프랑스 사람이었는데 딸아이를 프랑스에서 교육시키고 싶어 했다더군. 그래서 그 아이가 파리에 있을 거라 짐작했을 뿐이야.”

카마이클 씨가 말을 받았다.

“그렇군. 그럴 가능성이 꽤 높겠어.”

인도 신사는 몸을 앞으로 숙여 앙상하게 말라 유난히 길어 보이는 손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말했다.

“카마이클, 난 반드시 그 애를 찾아야 해. 살아 있다면 어딘가에는 있겠지. 그 아이가 지금 의지할 데도 돈도 없이 살고 있다면 그건 내 탓이네. 그런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정신이 온전할 수 있겠나. 광산 사업의 운이 갑작스럽게 뒤바뀌면서 우리의 환상 같던 꿈이 이루어졌건만, 크루의 가엾은 딸아이는 거리를 헤매며 구걸하고 다닐지 모른다 생각하면 말이야!”

카마이클 씨가 그를 진정시키려 애쓰며 다독였다. (P178-179)

민친 교장은 어먼가드의 책들을 집어 들고 식탁 위에 아직 남아 있던 것들을 이미 온갖 음식으로 뒤범벅되어 있는 바구니에 모조리 쓸어 담아 어먼가드에게 떠안긴 채 문 쪽으로 밀어붙이고 뒤따르며 말했다.

“궁금하든 말든 그건 내 알 바 아니니 냉큼 잠이나 자.”

비척거리는 가엾은 어먼가드를 앞세우고 민친 교장이 문을 닫고 나가자 사라만 덩그러니 홀로 남았다.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벽난로에서 가물거리던 한 점 불꽃마저 사그라지고, 남은 건 타다 만 시커먼 종이뿐이었다. 식탁은 텅 비어 황금 접시도, 멋진 레이스로 가장자리를 두른 냅킨도, 화려한 꽃 장식도 가뭇없이 사라지고, 그새 낡은 손수건과 종이 나부랭이와 쓸모없는 조화(造花)도 도로 바뀌어 바닥 여기저기에 나뒹굴고 있었다. 악공들도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고 비올과 바순 소리도 멈추었다. 에밀리는 벽에 기대앉은 채 매섭게 앞만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 잔치 따윈 없어, 에밀리. 공주가 다 뭐야. 바스티유 감옥에 갇힌 사람들만 있을 뿐이야.”

사라는 주저앉아 얼굴을 팔에 묻었다. (P233-234)


사라는 온종일 혼자 중얼거렸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설령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이 세상 어딘가에 천사처럼 마음씨 고운 내 친구가 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아. 그 사람이 누군지 영영 알 길이 없다고 해도, 그래서 끝끝내 감사하다는 말조차 못할지라도 앞으론 절대 외롭지 않을 거야. 아, 마법이 이렇게 고마운 일을 해줄 줄이야!”

지금까지보다 앞으로 날씨가 더 나빠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고, 당장 오늘만 해도 날씨가 몹시 사나워서 바람은 훨씬 더 차고 축축했으며 길은 더 질척거렸다. 해야 할 심부름도 더 많아졌고, 요리사는 더욱 까탈을 부렸고, 사라가 민친 교장의 눈 밖에 났다는 걸 알고부터 더더욱 야멸치게 굴었다. 그러나 마법이 스스로 친구임을 증명해 보인 바에야 그깟 일쯤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P247)

그러던 어느 날, 놀랍고 신기한 일이 또다시 생겼다. 어떤 남자가 학교를 찾아와 소포 몇 개를 전했다. 그 소포에는 모두 큼직한 글씨로 ‘오른쪽 다락방 소녀에게’라고 쓰여 있었다.

사라가 직접 학교 정문을 열어주고 받아 왔다. 커다란 소포 두 개를 현관 탁자에 올려놓고 사라가 주소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마침 계단에서 내려오던 민친 교장이 그 광경을 보았다.

“누구에게 온 것인지 그 학생에게 갖다주거라. 그렇게 우두커니 서서 들여다보지 말고.”

“저한테 온 거예요.”

“너한테?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누가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소를 보니 제 앞으로 온 거예요. 제가 오른쪽 다락방에서 자니까요. 베키 방은 왼쪽이고요.”

민친 교장은 사라에게 다가가 난데없이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소포를 바라보며 따져 물었다.

“무엇이 들어 있느냐?”

“저도 모르겠어요.”

“열어봐라.”

사라는 민친 교장이 시키는 대로 했다.

소포를 푸는 순간 민친 교장의 얼굴이 돌연 기기묘묘해졌다. 거기에는 예쁘고 편해 보이는 옷가지들이, 그것도 구색을 고루 갖춰 구두에, 스타킹에, 장갑에, 따뜻하면서도 예쁜 외투까지 들어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멋진 모자와 우산도 함께 들어 있었다. 하나같이 값비싼 고급품이었는데 외투 주머니에 핀으로 꽂아둔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날마다 입을 것. 때가 되면 다른 것으로 바꾸어주겠음.

민친 교장은 몹시 심란했다. 이 뜻밖의 사건은 속세에 찌들대로 짜든 교장의 마음에 이상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P253-254)

사라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숭이가 또 도망쳤어요. 어젯밤에 제 다락방 창문으로 왔기에 제가 안으로 들였습니다. 바깥이 몹시 추워서요. 시간이 너무 늦어서 바로 데려오지 못했어요. 신사께서 편찮으시다는 걸 아는데 혹시라도 폐가 될까 싶어서요.”

인도 신사가 묘한 기분이 드는지 우묵 팬 퀭한 눈을 사라에게서 떼지 못했다.

“마음 씀씀이가 참 슬거운 아이로구나.”

사라가 문가에 서 있는 람 다스 쪽을 보며 물었다.

“원숭이를 라슈카르에게 줄까요?”

“네가 그 사람이 라슈카르라는 걸 어떻게 아니?”

인도 신사가 슬며시 웃으며 물었다.

“아, 전 라슈카르를 알아요. 인도에서 태어났으니까요.”

사라가 떨어지지 않으려는 원숭이를 람 다스에게 건네주며 대답했다.

인도 신사가 얼굴 표정이 싹 달라지면서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 앉는 바람에 사라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인도 신사가 소리를 높였다.

“네가 인도에서 태어났단 말이지? 이리 와 보거라.”

이렇게 말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아보고 싶어 하는 눈치라, 사라는 가까이 다가가 인도 신사가 내민 손에 자기 손을 얹었다. 그렇게 가만히 서서 사라는 초록빛 회색 눈을 들어 인도 신사의 눈을 마주 보았다. 아무래도 인도 신사에게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옆집에 사느냐?”

인도 신사가 다그치듯 물었다.

“예, 민친 기숙학교에서 살아요.”

“하지만 넌 그 학교 학생이 아니잖니?”

사라의 입가에 야릇한 웃음이 어렴풋이 감돌았다. 사라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저도 제가 정확히 누군지 잘 모르겠어요.” (P267-268)

“네 아버지 성함이 무엇이냐? 말해다오.”

인도 신사가 물었다.

“우리 아빠 성함은 랄프 크루예요. 크루 대위, 인도에서 돌아가셨어요.”

이렇게 대답하면서 사라는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캐리스포드 씨의 파리한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고 그 모습을 본 람 다스가 주인 곁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카마이클, 얘가 바로 그 아이네, 그 아이야!”

초췌한 인도 신사가 가쁜 숨을 헉헉거리며 말했다.

그 순간 사라는 인도 신사가 죽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람 다스는 인도 신사의 입에 약병을 대고 약을 몇 방울 떨어뜨렸다. 사라는 옆에 서서 덜덜 떨고 있었다. 사라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카마이클 씨를 바라보았다.

“제가 그 아이라뇨?”

사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분이 네 아빠의 친구란다. 너무 놀라지 말거라. 우린 널 두 해 동안 사방으로 찾아 헤맸어.”

사라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면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꿈결인 듯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전 그 두 해 내내 민친 기숙학교에 있었고요. 바로 벽 너머에.” (P270-271)

“그 아이가 몹시 배고파 보였거든요. 저보다 훨씬 더 배고픈 아이였어요.”

빵 가게 여주인이 말했다.

“맞아, 그 아인 몹시 굶주렸어. 그 뒤로 몇 번이나 그때 일을 얘기했는지 몰라. 온몸이 축축하게 젖은 채로 앉아서 늑대 한 마리가 자기 배 속을 뜯어 먹기라도 하는 듯이 속이 아프고 쓰렸다고.”

“어머, 그 후에 그 앨 보신 적이 있나요? 지금 어디 있는지 아세요?”

사라가 반가운 듯 소리쳤다.

그 여주인은 여느 때보다 한층 더 선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알지, 알다마다. 지금 그 앤 저기 뒷방에 있어. 벌써 한 달이나 됐지. 이제 제법 얌전하고 예의 바른 여자아이 티도 나고 가게 일이랑 부엌일도 많이 거들어줘서 내가 아주 든든해. 그 아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 사람은 믿기 어려울 만큼 변했다니까.”

여주인이 작은 뒷방 문 앞으로 가서 아이를 부르자, 조금 뒤 한 여자애가 밖으로 나와 여주인을 따라 계산대 뒤에 섰다. 아닌 게 아니라 그 거지 아이는 깨끗하고 말끔한 옷을 입었고 지난번처럼 오랫동안 굶주린 모습도 아니었다. 수줍어하기는 해도 착해 보이는 얼굴이 이제 더는 미개인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굶주린 들짐승 같던 눈빛도 온데간데없었다. 아이는 단박에 사라를 알아보고서 꼭 앞으로 두 번 다시 못 볼 사람을 보듯 눈을 뗄 줄 몰랐다.

빵 가게 여주인이 말했다.

“보다시피, 배고플 때 오라고 했더니 이 아이가 왔기에 잔일을 시켰지. 그러고 가만 보니까 열심히 하려는 의지가 보여서 마음에 들더라고. 그래서 난 먹고 잘 곳을 마련해 주고, 그 대신 아이는 날 거들고 있는 셈이야. 다른 여자애들한테 빠지지 않을 만큼 아주 참하고, 어찌나 기특한지 몰라. 이 아이 이름은 앤이야, 성은 없고.”

두 아이는 한동안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윽고 사라가 손 토시에서 손을 빼 계산대 너머로 뻗자, 앤이 그 손을 마주 잡고서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정말 반가워. 방금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어. 주인아주머니께서 어쩌면 배고픈 아이들에게 건포도 롤빵과 갖가지 빵들을 나눠주는 일을 너한테 시키실지도 몰라. 모르긴 해도 너도 배고픈 게 어떤 건지 잘 아니까 그 일이 마음에 들 것 같은데.”

“예, 아가씨.”

앤이 고작 몇 마디밖에 하지 않았어도 사라는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앤은 사라가 인도 신사와 함께 빵 가게를 나서서 마차를 타고 아스라이 멀어질 때까지, 가만히 서서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P296-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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