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의식La Cérémonie> 1995년
유니스 파치먼이 커버데일 일가를 살해한 까닭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뚜렷한 동기도 치밀한 사전 계획도 존재하지 않았다. 금전적 이득도 안전보장도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여파로 그녀의 무능력은 한 가족과 몇 안 되는 마을 주민에게는 물론 온 나라에 알려지게 되었다. 스스로에게 재앙을 불러왔을 뿐이다. 그녀의 뒤틀린 마음 한구석에서도, 어떤 이득도 없으리라는 생각은 줄곧 존재했다. 하지만 그녀의 친구이자 공범이었던 이와는 달리,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20세기 여성으로 가장한 원시인이라 생각하면, 그녀는 극도로 정상적인 정신 상태였다고 할 수 있으리라.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은 문명의 초석이다. 문맹은 기형으로 취급된다. 육체적으로 기형인 사람들을 겨냥하던 조롱의 방향이 문맹인 사람들 쪽으로 점차 바뀌어 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만일 문맹자가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조심스레 살아가려 한다면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눈이 나쁜 사람들의 나라에서 장님이 배척당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처럼. 유니스를 고용해서 그녀를 아홉 달 동안 집에 둔 사람들이 유별나게 많이 배운 축에 속했다는 사실은 유니스에게나 그들에게나 불운이었다. 만일 이 가족이 교양 없는 사람들이었다면 그들은 현재까지 살아 있었을 테고, 유니스는 활자가 완전히 부재한, 그녀 자신의 감각과 본능으로 구성된 비밀스러운 세계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갔으리라. (P7-8)
유니스 파치먼과 조앤 스미스라는 평범한 이름을 가진 여성이 일요일 저녁, 오페라를 보고 있던 커버데일 가족을 총으로 쏴 죽였다. 이 주 후 유니스는 이 범행으로 체포되었다. 글을 읽을 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더 깊은 사연이 존재한다. (P9)
로필드 홀의 정원에는 풀이 제멋대로 자라나, 잡초가 진입로 자갈을 헤치고 솟아나 있었다. 마을 아이가 깨뜨린 응접실 창문에는 판자를 쳐 놓았고, 여름 가뭄에 말라죽은 등나무가 낡고 말라빠진 그물처럼 정문 위에 걸려 있다. 새들이 아름답게 지저귀던 곳은 이제 폐허가 되어 버렸다.
이 저택은 찰스 디킨스가 이름 붙인, 희망, 기쁨, 젊음, 평화, 안식, 생명, 먼지, 재, 낭비, 욕망, 폐허, 절망, 광기, 죽음, 교활함, 우행, 말, 가발, 넝마, 양피지, 약탈, 판례, 은어, 헛소리, 사기꾼 같은 새들이 둥지를 틀기 적당한 ‘황폐한 집(찰스 디킨스의 소설 제목)’으로 변했다.
유니스가 와서 황량함만 남긴 채 떠나기 전에는 로필드 홀도 이렇지 않았다. 다른 이웃들의 집만큼 잘 관리되고 안락하며 따뜻하고 품격 있는 안식처였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안온하고 행복하게 지내며 오랫동안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운명이어야 했다. 하지만 사월의 어느 날, 그들은 유니스를 집에 들이고 말았다. (P10-11)
초인종이 울리자 폴라는 짙은 감색 레인코트를 입은 여자를 거실로 데려갔다. 그녀는 그 여자를 재클린에게 안내하는 일까지만 하고 위층으로 올라가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유니스 파치먼을 안내하느라 허비한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녀에 대해 격한 반감을 느꼈다. 유니스는 종종 다른 사람에게 그랬듯 그 순간 폴라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마치 얼음을 토해내는 듯한 차가움이었다. 어딜 가든 그녀는 따뜻한 공기에 냉기를 몰고 왔다. 나중에 폴라는 이 첫 번째 인상을 기억해내고 아버지에게 경고해 주지 않았다는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근거 없는 예감이었지만 결국에는 사실로 드러나고야 말았으니까. (P17-18)
커버데일 가족은 유니스 파치먼이 얼마나 일을 잘 할지, 자신들에게 공손한 태도를 취할지 궁금했다. 그녀에게는 개인 욕실과 텔레비전, 안락한 의자 몇 개와 푹신한 침대를 제공해 주었다. 짐말에게는 좋은 마구간과 여물통이 필요하니까. 그녀가 이에 만족해서 앞으로도 계속 머물러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들은 유니스 또한 한 명의 인간이라는 점을 간과했다. 유니스가 오기로 한 오월 구일 토요일이 되었지만, 커버데일 가족은 그녀의 과거가 어떠했는지, 이 집에 오는 일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는지, 자신들에게 닥친 것과 똑같은 희망과 공포를 그녀도 느꼈는지에 대한 고려는 하지 않았다. 그 시점에서 그들에게 있어 유니스는 기계에 지나지 않았다. 기계에게서 만족스러운 효과를 얻으려면 적당히 기름을 치고 움직이는 데 지장이 없도록 계단에서 거치적대는 물건을 치우기만 하면 족하다.
하지만 유니스는 한 명의 인간이었다. 멜린다의 말처럼 유니스는 살아 있는 존재였다. (P43)
그녀의 습득 능력에 근본적인 격차가 있다는 사실을 굳이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교사도 없었으니, 이를 바로 잡아 줄 교사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녀는 항상 어리둥절한 상태로 지루해하며 교실 맨 뒤에 앉아 이해할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 찬 교과서나 칠판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또는 언제나 자신을 묵인해 주는 어머니를 빌미로 삼아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열네 살 생일을 한 달 앞두고 졸업할 때가 되었어도, 자신의 이름으로 서명하는 일과 ‘고양이가 매트 위에 앉았다’와 ‘짐은 햄을 좋아하고 잭은 잼을 좋아한다’라는 문장을 읽을 수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대신 읽거나 쓸 줄 모른다는 사실을 감출 수 있는 각종 속임수와 수완을 깨우치게 되었다. (P45)
문맹은 일종의 시각 장애이다. 커버데일 집안 사람들이 이 말을 들었더라면, 그런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못했으리라. 왜 배우려 들지 않았지? 왜 야간 학교에 가거나 직업을 얻어 어머니를 돌볼 사람을 고용하고, 모임에라도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거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커버데일 집안과 파치먼 집안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깔려 있었다. 조지 자신부터가 그런 함의가 담긴 말을 그다지 의식하지 못한 채 입 밖에 내곤 했다. 그에게 어린 소녀란, 언제나 폴라나 멜린다처럼 애지중지하고 찬사를 바치면서 잘 가르치고, 사랑을 기울여 자신이 상위 10퍼센트에 속한다는 사실을 자각하도록 키워야 하는 존재였다. 유니스 파치먼은 그런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골격이 크고 빼빼 마른 데다 반항적이고 음침한 눈을 가진 소녀였다. 그녀는 찬송가나 그녀의 아버지가 면도할 때 부르곤 했던 길버트 앤 설리번의 소절 외에는 제대로 된 음악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P45-46)
문맹자의 생각은 그림과 아주 간단한 단어 몇 개로 기록된다. 유니스의 어휘는 굉장히 빈약했다. 그녀는 상투적인 문구를 반복하거나, 자신의 어머니나 길 아래에 사는 친척 아주머니인 샘슨 부인이 하는 말을 따라 할 뿐이었다. 사촌이 결혼했을 때 그녀는 질투심을 느꼈을까? 외판원과 외도를 하고 있던 유부녀에게서 일주일에 십 실링씩 더 뜯어내게 되었을 때 그녀의 마음은 신랄한 만큼 비통하기도 했을까? 그녀는 아무에게도 자신의 감정이나 인생에 대한 관점을 드러내지 않았다. (P49)
“좀 쉬는 게 좋겠어요, 파치먼 씨. 아버님은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몇 년쯤 더 사실수도 있지만.” 의사가 말했다.
하지만 그는 죽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P50)
유니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의 머리 뒤에서 베개를 빼서 얼굴에 대고 강하게 눌렀다. 그는 잠시 동안 몸부림치며 주변을 엉망으로 만들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어쨌든 폐는 그다지 건강하지 않았으니까. 유니스에게는 전화기가 없었다. 그녀는 걸어서 의사를 데려왔다. 의사는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즉시 사망 증명서에 서명했다. (P51)
그녀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런 일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도, 경험을 쌓은 적도 없었다. 커버데일 가족 같은 사람들은 그녀가 이제껏 알고 지내왔던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녀는 환경에 자신을 맞추거나 쉽게 적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파티에 가 본 적은 고사하고 초대받아 본 적도 없었다. 레인보 거리에서 살았던 집을 제외하면 집안 살림을 꾸려 본 적도 없었다. 그녀의 가족은 대대로 하인을 고용해 본 역사가 없었고, 아는 사람 중에 하인은 고사하고 파출부조차 써 본 사람도 없었다. 그야말로 끝없이 추락할 수밖에 없는 패를 쥐고 있었다. (P57)
그녀는 어린 시절에는 글을 읽는 법을 배우고 싶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차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글을 가르쳐 줄 사람이 없었다. 가르쳐 줄 사람을 구하는 행위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게 들킬 빌미를 제공할 뿐이었다. 그녀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비밀을 파헤치는 데 열중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람들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때 이후로 이런 식으로 남을 피하거나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행동은 습관처럼 굳어졌다. 그녀가 인간을 혐오하게 된 근원적인 이유는 반쯤 잊힌 채.
가구나 장식품, 텔레비전 같은 사물들은 그녀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물건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유니스는 커버데일 가족에게는 쌀쌀맞게 대했지만, 사물은 그녀로 하여금 이제껏 느꼈던 감정 중 가장 따뜻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도록 했다. (P67)
그녀는 활자로 도배된 세상이 끔찍했다. 활자를 자신에게 닥친 위협이라고 생각했다. 활자는 거리를 두고 피해야 할 대상이었으며, 그녀에게 활자를 보여 주려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였다. 활자를 피하려는 버릇은 몸에 깊이 배어 있었다. 더 이상 의식하고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따뜻한 마음이나, 타인을 향한 애정, 인간적인 열정이 솟아나는 샘은 이러한 이유로 오래전에 말라 버렸다. 이제는 고립된 상태로 지내는 일이 자연스러웠고, 이러한 자신의 상태가 인쇄물이나 책, 손으로 쓴 글자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행위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은 그녀의 동정심을 앗아갔고 상상력을 위축시켰다. 심리학자들이 애정이라고 부르는, 타인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은 그녀의 기질 안에서 설 자리가 없었다. (P74)
커버데일 가족은 참견꾼들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려는 선의를 품고 다른 사람 일에 끼어들었다. 타인에 대한 품평을 양해해 준다면, 자일즈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의 말을 인용하여 ‘그들의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기적인 인간이 되지 않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들은 자일즈가 본능적으로 아는 사실, 이기심이란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의 방식대로 살라고 요구하는 것임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P75)
현재에만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니스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상당히 다른 존재였다. 그녀에게는 당장 저녁 식사가 오 분 늦는 사태가 십 년 전에 겪은 크나큰 슬픔보다 더 중요했다. 미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안경을 수중에 지니고 가끔씩은 코에 걸치기까지 해야 하다 보니, 주변에 있는 활자에 점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언젠가 활자를 읽어야 하는 상황이 닥칠지도 몰랐으니까.
로필드 홀은 책 천지였다. 유니스에게 이곳은 예전에 샘슨 부인의 연체된 소설책을 반납하러 딱 한 번 가 봤던 투팅 공립 도서관만큼 책이 많아 보였다. 그녀에게 책은 알 수 없는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작고 평평한 상자와 다를 바 없었다. 거실의 벽 한쪽은 전체가 책장이었다. 응접실에는 커다란 유리문이 달린 붙박이 책장 두 개가 벽난로 양옆에 있었고, 다닥다닥 나뉜 칸에는 책들이 가득했다. 탁자 옆에도 책들이 있었고 선반에도 잡지와 신문이 놓여 있었다. 커버데일 가족은 항상 책을 읽었다. 유니스는 그들이 자신을 도발하려 책을 읽는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심지어 학교 선생들조차 재미로 그렇게 책을 많이 읽을 수는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자일즈는 손에서 책을 놓는 법이 없었다. 읽을거리를 주방까지 가지고 들어와서, 식탁에 팔꿈치를 괴고 앉아 그 속에 빠져들었다. 재클린은 신간 소설이라면 가리지 않고 읽었다. 조지와 함께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재독하기도 했다. 그들은 종종 디킨스, 새커리, 조지 엘리엇의 작품을 동시에 읽고 등장인물이나 장면에 대해 함께 토론하면서, 서로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곤 했다. 영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답지 않게 멜린다가 책을 가장 적게 읽었다. 하지만 그녀조차도 종종 정원이나 아니면 거실 바닥에 누워 문법책을 들여다보곤 했다.
사실 이는 자발적인 행동이 아니라 “계속 진도를 나가려면 다음 학기 전에 대명사 부분은 이해하고 있어야 하네. 알겠나?”라는 지도 교수의 경고 때문이었지만, 유니스가 이를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지금까지는 행복했지만 안경이 그녀의 행복을 파괴했다. 이 저택과 집 안을 채우고 있는 사랑스러운 물건들에는 만족하며 지냈다. 반면 그녀에게 있어 커버데일 가족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동안은 이 가족을 무시하면서 지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툭하면 꺼내서 계획을 짜곤 하는 여름휴가를 어서 빨리 떠나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형편이 되었다. (P85-86)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은 피처럼 우리의 혈관 속을 흐른다. 모든 말에 두 번에 한 번 꼴로 스며든다. 지시나 묵인을 공유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인쇄된 글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거나 읽은 내용에 대한 암시를 담지 않는다면,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P97)
잡담을 나눈 일은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조앤 스미스야말로 그녀와 가장 잘 지낼 수 있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녀를 교회로 데려가려는 기미가 보이는 건 자신의 인생에 참견하려는 듯해서 싫었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그들의 대화에서 특별히 위안이 되는 점을 발견했다. 활자에 관련된 이야기가 조금도 끼어들지 않았던 것이다. (P104)
조앤은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어쩌면, 그녀는 똑똑한데다 경험도 굉장히 풍부한 여자였다. 만일 조앤이 이를 알고 있었다면, 유니스에게 폭탄을 던져 그녀를 끌어내는 일은 그녀와 소원해질 위험 없이 엄청난 즐거움을 안겨 주는 유희인 셈이었다. 즉 그녀는 사람들이 죄인이기를 바랐다. 죄인들이 없으면 그녀는 현자가 될 수 없었으니까. (P137)
각자 속으로 상대의 모습이 바보 같다고 여겼지만, 이 때문에 사이가 소원해지지는 않았다. 우정이란 때로는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있다고 확신할 때 가장 돈독해지곤 한다. 유니스는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지만, 조앤은 굉장히 똑똑하니 자신이 무언가를 읽어야 하는 상황에 부딪친다면 언제든지 도움이 되리라 여겼다. 하지만 멍청한 새끼 양의 털을 뒤집어쓴 꼴을 하고 있는데다, 집안일에 대해서는 기대할 게 없고 행실도 지저분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조앤도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지만, 유니스를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노먼이 자신을 구타하겠다는 말뿐인 협박을 실천에 옮긴다면 그녀를 보디가드로도 써먹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왜 여경처럼 차려 입고 다닐까? (P141-142)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굉장히 드문 일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하지만 그 여자에겐 분명 뭔가 불쾌한 구석이 있어. 네게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될지도 모르지만, 너도 다 컸으니까 분명 보고 느낀 게 있을 거야. 그녀를 묘사할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구나.”
“혐오스럽다.”
“바로 그거야!” 조지는 적당한 단어를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단어를 자일즈가 기꺼이 말해 주었다는 사실에 굉장히 기뻐했다. “혐오스그래서 잠깐 도로에서 시선을 떼었다가, 길 한가운데를 느릿느릿 걷고 있던 메도즈 씨의 늙은 레브라도 리트리버를 치지 않으려 급하게 운전대를 돌려야 했다. “어디로 돌아다니는 거야. 이 멍청한 녀석.” 그는 안도하여 사뭇 다정한 목소리로 개를 쫓았다. “혐오스럽다, 바로 그거야. 그래, 등골이 다 오싹해졌다니까.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지, 자일즈? 참고 지내야 할까?” (P162)
멜린다는 모자를 벗어 의자 위로 던졌다. “하지만 스미스 부인에게 다시는 여기 오지 말라고 하셨다면서요, 아빠.”
“분명 그랬지.”
“오, 불쌍한 미스 파치먼! 다른 사람의 교우 관계에 간섭하는 건 엄청나게 봉건적인 짓이라고요. 주변에 아는 사람도 없고 갈 데도 없다고 걱정했잖아요. 이제 친구가 한 명 생겼는데 집에 데려오면 안 된다니요. 정말 너무해요.”
“멜린다......”
“나라도 잘 대해 줘야지. 아주 친절하게 보살펴 줄 거예요. 친구 한 명 없이 지내야 한다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에요.”
“내가 반대하는 사람은 그 기혼자 친구뿐이란다.” 조지는 짓궂은 말투로 말하고는, 멜린다가 여봐란 듯이 방을 나서는 모습을 보며 웃었다.
그리하여 그날 저녁 멜린다는 자신은 물론이고, 아버지와 의붓어머니, 의붓동생까지 죽음으로 곧장 몰아넣는 재앙을 불러일으킬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는 만큼, 세상은 사랑에 빠진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멜린다는 자신의 사랑에 고무되어 사랑과 행복을 하사하려 했지만, 그 대상이 유니스 파치먼이었다는 사실은 비극이었다. (P169-170)
“어디서 저런 끔찍한 여자를 데려왔어요?” 나중에 오드리는 재클린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님, 그 여자 정말 섬뜩하던데요, 사람 같지가 않아요.”
재클린은 자신이 모욕당한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조지처럼 안 좋은 말만 하는구나. 난 하인이랑 친구가 될 생각은 없어. 믿을 수 없을 만큼 유능한데다 쓸데없이 나서지 않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해. 그녀는 자신이 할 일을 분명하게 알고 있단다.”
“보아뱀도 그렇죠.” (P175-176)
조지는 망설이다가 손을 재클린의 어깨 위에 얹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여보. 저 여자를 내보냅시다.”
“오, 안 돼요. 조지!” 재클린은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빙글 돌렸다. “파치먼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못해요. 그딴 서류 하나 못 찾았다고 그럴 수는 없어요.”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에요. 저 여자의 거만함과 우리를 대하는 태도를 봐요. 요즘 우리 이름은 입에도 담지 않는 걸 눈치채지 못했어요? 주인님과 마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관둔 지 오래고, 난 그런 데 신경 쓸 정도로 속물은 아니지만, 예의 없는 태도와 거짓말은 참을 수 없어요.” (P193)
재클린은 몰라도 그는 깨닫고 있었다. 그들은 유니스 파치먼의 비위를 맞추면서 점차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재클린을 위하여 자기혐오에 빠져 가며, 자신의 가정부와 마주칠 때마다 방은 따뜻한지, 여가 시간은 충분한지 같은 질문을 하며 얼빠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번은 손님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기로 한 날 저녁에 집에 있어 줄 수 있을지 물어보기도 했다. 그의 따스한 마음은 털끝만큼도 보상받지 못했다. (P195)
마침내 재클린도 조지의 관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눈 때문에 유니스와 함께 집에 갇혀 있으니, 당혹감을 넘어서 불길한 느낌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녀는 먼지떨이와 걸레를 들고 방에서 방으로 끈덕지게 돌아다녔다..... 나중에 재클인이 조지에게 이야기하기로는, 마치 자신이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귀머거리 환자이고 유니스는 병원의 잡역부라도 된 것 같았다고 했다. 하루 일과가 다 끝나고 유니스가 오후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러 위층으로 물러간 이후에도, 그녀는 로필드 홀의 지붕을 어마어마한 무게로 누르고 있는 것은 눈뿐만이 아님을 느꼈다. 유니스는 살금살금 걸어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곤 했다. 때로는 대리석처럼 차갑게 빛나는, 눈에서 반사된 기이할 정도로 흰빛을 받으며 가만히 서 있기도 했다.
재클린은 자신이 유니스를 보면 움츠러드는 것보다, 그녀가 자신을 훨씬 더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커버데일 회사의 서류 사건은 유니스를 껍질 속에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그녀는 커버데일 가족들에게 말을 걸거나 그들이 자기에게 말을 걸도록 내버려 둔다면, 가장 큰 적인 활자가 들고 일어나 자신을 공격할 거라고 생각했다. 라디에이터 옆에 안락의자를 끌고 와 책을 읽는 모습이, 유니스의 비위를 맞추면서 그녀를 피하려 무언가를 읽는 모습이 무엇보다 그녀의 분노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재클린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P196-197)
재클린은 이따금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유령과 함께 사는 것 같아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특정 장소에 출몰하지만, 사람이나 사물에게 신경 쓰지 않은 채 대체로 자신의 방 안에서 조용히 지내는 유령이었다. 그녀는 자일즈가 이달의 인용문으로 붙여 놓은 ‘바라건대 내가 다시는 대죄를 저지르지 않기를, 그럴 수만 있다면 아무리 작은 죄라 할지라도’라는 문구는 어디서 따 왔는지 궁금했다. (P205)
유니스는 결코 사람들을 다룰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 그들이 내리는 가정과 결론을 알아차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결점이 탄로 나기 직전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결점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 나머지 그러한 생각에 지배되어, 실제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라고 오해하고 말았다. 멜린다가 이미 눈치챘는데도 자신을 놀리느라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추측한 바를 확인하기 위해 퀴즈를 풀자고 한다고 생각했다.
멜린다가 쥐고 있는 안경은 두 여자 사이의 허공에 떠 있었다. 유니스는 안경을 가져가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를 짜내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되지? 어떻게 빠져나가지? 대체 뭘 할 수 있는 거야? 어리둥절해진 멜린다는 손을 내리면서 가까운 거리에서 안경을 들여다보다가, 안경에 도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멜린다는 유니스의 벌개진 얼굴과 공허한 시선을 바라보았다. 이제까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던 퍼즐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왜 책이나 신문을 읽지 않는지, 왜 메모에 남긴 지시에 따르지 않는지, 왜 편지를 받은 적이 없는지.
“미스 파치먼, 혹시 실독증이에요?” 멜린다는 조용히 물었다.
유니스는 무슨 눈병 이름인가 보다 하고 애매하게 생각했다. “뭐라고요?” 그녀는 희망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미안해요. 그러니까 글을 모르는 거죠? 읽거나 쓸 줄 모르지 않느냐고요.” (P210-211)
“왜 우리한테 말하지 않았어요?” 유니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멜린다가 말을 꺼냈다. “다 이해했을 거예요. 실독증인 사람들은 많아요. 사실 수천 명이나 되는걸요. 작년에 학교에서 이에 대한 공부를 좀 했어요. 미스 파치먼, 내가 글을 가르쳐 줄게요. 할 수 있어요. 재미있을 거예요. 부활절 주간부터 시작할 수 있어요.”
유니스는 머그컵 두 개를 가져가 식기건조대 위에 놓았다.
그녀는 여전히 멜린다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남은 차는 싱크대에 부어 버렸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겉보기에는 가슴이 빠르고 무겁게 뛰고 있다는 내색을 하지 않은 채, 한눈에 봐도 감정이 없고 집념이 서린 눈초리로 멜린다를 응시했다.
“방금 네가 한 말을 다른 사람에게 하면, 너희 아빠한테 네가 남자랑 놀아나더니 애나 뱄다고 말할 거야.”
유니스가 너무 차분하고 태연하게 말을 꺼내서, 멜린다는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제껏 근심 걱정 없이 보호받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실제로 협박을 당해 보기란 난생처음이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들었잖아. 사람들한테 말하면 나도 사람들한테 네 이야기를 하겠다고.” 욕설은 그녀의 전문 분야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해낼 수 있었다. “넌 추잡한 매춘부라고, 귀찮은 년 같으니.”
멜린다는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일어나 긴 치맛자락에 걸려 비틀거리며 주방을 나섰다. 홀에 들어서자 다리가 떨려 거의 서있을 수도 없을 지경이어서, 괘종시계 옆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곳에서 두 주먹으로 뺨을 누른 채 시계가 여섯시를 치고 주방 문이 다시 열릴 때까지 앉아 있었다. 유니스 파치먼을 다시 본다는 생각만으로도 욕지기가 치밀어 올라, 그녀는 응접실로 도망쳐 소파에 몸을 던지고 울음을 터뜨렸다. (P212-213)
“왜 그렇게 울고 있었니? 임신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렇게 애석해하지는 않았을 텐데?”
멜린다는 희미하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그 여자, 미스 파치먼 때문이에요. 믿기 어렵겠지만, 아빠, 사실이에요. 그 여자가 이 사실을 알았어요. 분명 크리스마스 때 조나단이랑 통화하는 걸 엿들었을 거예요. 제가, 그러니까 파치먼의 비밀을 하나 알게 되었는데, 파치먼이 아빠한테 전부 말해 버리겠다고 저를 협박했어요. 바로 좀 전에요.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아빠한테 말하겠다고 했어요.”
“무슨 짓을 했다고?”
“믿지 못하실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멜린다, 물론 널 믿는다. 정말 그 여자가 너를 협박했니?”
“그게 협박이라면 맞아요.”
“정확히 뭐라고 했는데?”
멜린다는 그에게 털어놓았다. “매춘부라고 불렀어요. 끔찍했어요.”
이제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재클린이 입을 열었다. “반드시 내보내야겠어요. 지금 당장.”
“여보,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요. 당신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내 걱정은 하지 말아요. 내 평생 그렇게 끔찍하고 역겨운 말은 처음 들어 봐요. 감히 멜린다를 협박하다니! 바로 내보내야죠. 어서 가서 말해요, 조지.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조지는 아내의 말을 듣고 감사의 마음을 담아 그녀를 열렬하게 바라보았다. “그 비밀이란 게 뭐니, 멜린다?”
치명적인 질문이었다. 조지가 유니스를 해고할 때까지 질문을 참지 못했다는 사실은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딸의 대답을 듣고나자 그는 마음이 약해져 버렸다. 멜린다가 그 사실에 그다지 동요하지 않은 것과는 달리, 그는 유니스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P215-216)
조지가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왜 왔는지 알 거요. 미스 파치먼. 내 딸이 내게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더군. 유감이지만 내 가족을 협박하는 사람을 내 집 안에 둘 수는 없소. 그러니 가능한 한 빨리 나가 주시오.”
유니스는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간 광고가 시작했다. 화면에 이스트 앵글리아에 있는 상점 명단이 주루룩 떠 있었다. “괜찮다면 텔레비전을 끄겠소. 당신이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도 아니니까.”
유니스는 깨달았다. 그가 알고 있다. 그녀는 다른 모든 면에 대해서는 도통 세심하지 못했지만, 이런 일에는 극도로 민감했다. 조지 역시 그녀의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유니스의 얼굴이 벌개지고 일그러진 모습을 보니, 그가 던진 말에 부아가 치민 것 같았다. 그는 곱사등이의 혹을 놀려댄 셈이나 다름없는, 너무나 상스러운 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으니, 언제든지 나가 달라고 할 수 있소. 하지만 상황을 고려해서 일주일의 말미를 드리리다. 다른 일자리를 알아볼 시간이 필요할 테니. 하지만 그동안 이 방에만 머무르고 집안일은 내 아내와 볼럼 부인에게 맡겨 두시오. 당신의 능력에 대해 추천서를 써 줄 의향은 있소. 하지만 당신 개인의 인품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장도 해 줄 수 없소.” 그는 방을 나가 문을 닫았다.
유니스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고, 실제로 그녀는 울지 않았다. 방 안에 혼자 있으니 마음껏 감정을 표출할 만도 했지만, 그녀는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젓지도, 한숨을 쉬지도, 메스꺼운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그저 안락의자에 앉아 텔레비전을 켜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평소 때보다 조금 우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P217-218)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유니스가 속삭였다.
조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옷걸이에서 빨간색 실크 이브닝 가운을 꺼내 들었다. 그런 다음 옷의 목 부분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아래로 죽 찢었다. 옷의 앞부분은 그녀의 한쪽 손에, 뒷부분은 다른 쪽 손에 잡혀 있었다. 유니스는 놀라서 간담이 서늘해졌지만, 동시에 재미있기도 했다. 조앤의 광기 어린 행동에 그녀도 흥분하고 말았다. 그녀는 옷장 안에 손을 넣고 휘저어 자신이 여러 번 다림질했던 주름진 초록색 드레스를 꺼내, 옷의 상체 부분을 재클린의 손톱 가위로 마구 잘랐다. 그러자 조앤이 가위를 뺏어가서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로 옷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유니스는 잘린 옷 뭉치를 짓밟고, 액자 유리를 뒷굽으로 뭉개 버렸다. 그러고는 서랍을 열어 보석과 화장품, 리본으로 묶여 있는 편지들을 꺼내 사방으로 흩날렸다. 조앤이 광적으로 웃음을 터뜨리자, 유니스도 쉰 목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아래층의 음악 소리 때문에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P236)
조지는 조앤에게 다가가 총을 움켜쥐었다. 그때 유니스가 그의 목을 쏘았다. 조지는 신음 소리를 내며 식탁 위로 쓰러져, 식탁 가장자리를 잡으려 팔을 버둥거렸다. 경정맥이 끊어져 피가 샘솟아 올랐다. 조앤은 허둥지둥 물러나 벽에 붙었다. 유니스는 놀라서 숨을 멈춘 채, 그의 등에 나머지 한 발을 쏘았다. (P243)
“다른 사람들도 지금 죽여야 해.” 유니스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집안일을, 가령 바닥 닦는 일 같은 걸 해치워야 한다는 투였다.
유니스가 격려해 줄 필요도 없었던 조앤은 조지를 돌아보았다. 그는 죽었지만 시계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죽은 이후로 분침은 숫자판 10을 지나 12에 거의 근접해 있었다. 아홉시가 되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뒤돌아보고는, 고개를 들어 유니스에게 얼굴이 둘로 찢어질 정도로 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손과 얼굴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유니스가 짜 준 스웨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홀을 통과하는데, 음악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자일즈가 문을 열자 폭발적인 바리톤 목소리와 만돌린을 켜는 소리가 그들을 맞이했다. 그는 피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오, 세상에!” 그는 고함을 치며 몸을 돌렸다. 곧바로 조앤이 그에게 딱딱거렸다.
“도로 들어가. 우리는 총을 갖고 있어.” (P245)
유니스가 먼저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들의 노랫소리가 뒤섞여 그녀의 머릿속에서 으르렁댔다. 마침내 명령을 내리고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럴 수 있는 힘이 유니스의 몸에서 포효했다. 주방에서는 조금 주저하던 손이 이번에는 거침이 없었다. 단호하고 능숙하게 재장전한 총을 겨누었다. 하얗게 공포에 질린 재클린의 얼굴은 얼마 전 그녀에게 발렌타인 카드를 전해 주면서 비웃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남편을 찾으며 울부짖는 목소리는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다가 비꼬는 듯한 겉치레 인사를 건네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이 순간에는 그들이 울부짖으면서 애원하는 말들이 귀에 거의 들리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어떤 작용에 의해, 유니스의 머릿속에서 그들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활자로 바뀌어 버렸다. 그들은 책꽂이에 꽂혀 있는 존재이자, 흰 종이 위에 군데군데 박힌 검은 존재였다. 유니스가 증오했던 동시에 갈망해 마지않았던, 그녀의 영원한 적.
“앉는 게 좋을걸. 이게 다 네 탓이야.”
조앤의 웃음소리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조앤은 성경 구절을 외치더니, 총을 발사했다. 유니스는 숨이 막혔다. 비명 소리와 피가 튀기는 모습에 놀랐기 때문은 아니었다. 조앤이 먼저 총을 쏴버리면 그녀에게 뒤처질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유니스는 앞으로 나서며 총을 겨누었다. 한꺼번에 두 발을 모두 쏜 다음, 조앤이 쏜 총성을 들으며 재장전했다. 순식간에 탄약통 두 개가 비어 중국식 양탄자 위에 떨어졌다.
음악이 그쳤다. 분명 조앤이 텔레비전을 껐으리라. 총소리와 비명 소리도 그쳤다. 침묵은 더욱 깊어져,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맹렬하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켜 주며, 만질 수 있을 정도로 짙은 향유 냄새처럼 응접실을 가득 채웠다. 침묵은 유니스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들었다. 이 석기 시대 여인을 아예 돌로 만들어 버렸다. 그녀는 눈꺼풀을 떨구고 숨을 천천히 골랐다. 옆에 구경꾼이라도 있었다면 그녀가 선 채로 잠들었다고 생각했으리라.
유니스는 숨 쉬는 돌이었다. 지금까지 항상 그랬던 것처럼. (P246-247)
유니스는 여전히 총을 쥔 채 싸늘한 시선으로 자일즈와 멜린다의 시체를 바라보며,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두 사람의 시체는 생전 그 어느 때보다 가깝게, 서로 포옹하듯 붙어 있었다. 조앤은 유니스가 누구인지 잊어버렸다. 자신의 이름도, 과거도, 셰퍼도 부시도, 노먼도 깡그리 잊어버렸다. 그녀는 혼자였고 타이탄 여신이었으며 천사였다. 이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재미 삼아 커버데일 가족을 편드는 사악한 유령이 이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일에 끼어들어 방해하는 것 말고는.
조지의 피가 스웨터에는 물론 손과 얼굴에도 묻어 있었다. (P249)
유니스는 차를 한 잔 마시기로 했다. 전에 마시려고 준비했던 차는 조앤이 재클린의 침대에 모조리 쏟아 버려, 아직 차를 한 잔도 마시지 못했다. 그녀는 조지의 시체 주변에서 왔다 갔다 하며 차를 끓였다. 시체의 손목에 매여 있는 시계를 보니 아홉시 사십분이었다. 짐을 쌀 시간이었다. 그동안 런던에서 살던 시절에 사곤 했던 옷이나 음식, 사탕, 초콜릿 같은 물건에서 떨어져 지내다 보니, 아홉 달이 지났어도 소지품은 그다지 늘지 않았다. 단지 직접 짠 옷 몇 개만이 불어났을 뿐이다. 샘슨 부인의 여행 가방에 이곳에 처음 올 때 쌌던 순서대로 짐을 정리하면 되리라. (P254)
이제 더 이상 할 일은 없어 보였고, 경찰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유니스는 난장판을 만들어 놓은 이후 처음으로 조지의 시체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그다음에는 응접실로 다시 들어가 재클린, 멜린다, 자일즈의 시체 역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연민도 회한도 일지 않았다. 사랑, 기쁨, 젊음, 평화, 안식, 생명, 먼지, 재, 낭비, 가난, 폐허, 절망, 광기,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사랑을 제거하고 생명을 파괴하고 희망을 부수며 지성의 가능성을 훼손하고 기쁨을 종식시켰다. 유니스는 매장하는 사람들조차 신음을 흘릴 정도로 커버데일 가족의 시체를 썩어가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저 훌륭한 양탄자가 엉망이 되어 안타까웠고, 자신에게는 피가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P256-257)
유니스 파치먼은 올드 베일리, 즉 중앙 형사 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베리 세인트 에드먼드에서 열리는 순회 재판에서는 선입견을 갖지 않은 배심원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실제 수감 기간은 십오 년 남짓으로 예상되었다. 터무니없이 적은 형량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유니스는 이미 벌을 받았다. 배심원단의 평결이 나오기도 전에 참담한 꼴을 당해야 했다. 그녀의 변호사가 판사와 검사, 경찰, 방청객, 기자석에서 기사를 갈겨쓰고 있는 기자들 앞에서 그녀는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른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공표해 버린 것이다.
“문맹이라고요?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말입니까?” 매너튼 판사가 물었다.
그가 답변을 강요하자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새빨갛게 얼굴을 붉힌 채, 자신처럼 괴물이나 불구자가 아닌 사람들이 기사를 쓰는 모습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유니스의 기본적인 결점을 고치기 위해, 그녀를 격려하면서 개심시켜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확고부동하게 어떤 시도에도 거부 의사를 밝혔다. 너무 늦었다. 그녀를 바꾸기에는, 그녀가 저지르고 초래한 일들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먼지, 재, 낭비, 욕망, 폐허, 절망, 광기, 죽음, 교활함, 우행, 말, 가발, 넝마, 양피지, 약탈, 판례, 은어, 헛소리, 사기꾼 같은 이름을 한 새들이 날아다녔다. (P296-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