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게이샤의 추억> 2006년
아서 골든의 소설 <게이샤의 추억>을 원작으로 한 2005년 영화. 시카고로 유명한 롭 마샬이 연출하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 장쯔이가 주인공이다. 제78회 아카데미 시상식 미술상, 촬영상, 의상상 수상작/음악상, 음향상, 음향편집상 후보작이다.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조용한 방에 앉아 당신과 내가 녹차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오래 전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난 당신에게 이렇게 말을 건넨다.
“내가 아무개 씨를 만났던 그날 오후는 내 인생에서 최고의 오후이자 최악의 오후였어요.”
그러면 당신은 찻잔을 내려놓고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래요? 지금 생각해보니 어느 쪽 같아요? 최고였어요, 아니면 최악이었어요? 둘 다일 수는 없을 테니까요.”
다른 때 같으면 난 이런 경우 웃어버리고 당신 말에 동의하겠지만, 사실 내가 다나카 이치로 씨를 만났던 그날은 정말 내 생애 최고의 날이자 최악의 날이었다. 손에서 나던 생선 비린내가 향수 냄새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는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를 알지 못했더라면, 난 결코 게이샤(일본의 기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난 교토의 게이샤로 태어나지도 않았고, 또 그렇게 되기 위해 길러지지도 않았다. 사실 난 교토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동해 연안의 요로이도라고 불리는 작은 마을에서 어부의 딸로 태어났다. 일생을 통틀어 요로이도나 내가 자랐던 집, 부모님 그리고 언니에 대해 얘기했던 사람은 불과 몇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게이샤가 되었는지 혹은 게이샤가 된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도 결코 입을 열어본 적이 없다. (P5)
팔자에 끼어든 물과 나무 덕택에 부모님은 서로 균형을 이루면서 살았다. 두 분이 낳은 자식들도 그런 성분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 자매는 철저하게 한쪽만 닮아 부모님을 놀라게 했다. 나는 엄마를 빼닮고 엄마의 그 특이한 눈을 물려받은 반면, 언니 사추는 심할 정도로 아버지를 닮았다. 사추는 나보다 여섯 살이 더 많았는데, 나이가 좀 더 든 사람답게 내가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을 사고처럼 보이도록 하는 남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당신이 스토브 위의 냄비에서 수프를 한 그릇 퍼달라고 부탁한다면, 우리 언니는 수프를 푸는 게 아니라 운 좋게 사발에다 쏟아 붓는 것처럼 수프를 퍼줄 것이다.
부모님은 사추와 나 외에 다른 자식을 더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아버지는 함께 고기를 잡을 수 있는 아들을 원했다. 그러나 내가 일골 살이었을 때 엄마의 병이 점점 더 심해졌다. 엄마는 골수암 비슷한 병을 앓았지만, 당시 나는 그게 무슨 병인지 전혀 짐작도 못 했다.
엄마가 고통을 잊는 유일한 방법은 잠이었다. 엄마는 고양이처럼 잠을 자곤 했다. 그 말은 곧 아무 때나 잠이 들곤 했다는 뜻이다. (P9)
비틀거리는 집 앞으로 나 있는 길은 바닷가 절벽을 따라 이어지다가 마을을 향해 내지(內地)로 휘어졌다. 그런 날에 그 길을 걷기란 힘든 일이었지만, 사나운 바람이 복잡한 내 마음을 해방시켜 주었다는 점에 있어서는 고마웠다. 바다는 거칠었고, 파도는 뭐든지 잘라버릴 것처럼 날카로웠다.
세상과 내가 닮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란 폭풍과도 같은 것일까? 휩쓸고 지나가면 초라함만 남는다.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마을이 눈앞에 보일 때까지 달려 내려갔다. 요로이도는 바다가 굽어 들어오는 입구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보통 때 같으면, 바다는 어선으로 점점을 이루고 있을 테지만, 오늘은 돌아오는 어선 몇 척만이 눈에 뜨일 뿐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물방개처럼 수면을 찰싹이면서 말이다.
폭풍은 이제 본격적으로 다가왔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머리 위 구름은 석탄처럼 새까맸다. 후미에 있던 어부들이 비를 막는 천막안으로 사라지더니, 나중에는 완전히 다 가버리고 없었다.
폭풍이 내 쪽을 향해 언덕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메추라기 알만한 빗줄기가 한 차례 내리쳤다. 그 빗줄기가 두 번째로 내리쳤을 때, 나는 바다에 빠진 사람처럼 흠뻑 젖어버렸다. (P12-13)
주위에 밤이 엄습해오자 나는 무서움을 느꼈다. 도시의 불빛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 그렇게 놀란 적도 없었다. 다나카 씨 집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보았던 전등을 제외하고는 그런 전깃불은 처음이었다. 창문마다 불이 켜져 있었으며 사람들은 노란 백열등 아래 거리를 걷고 있었다. 멀리 있는 작은 물건조차 보일 정도였다. 또 다른 길로 접어들자, 다리 건너편에서 있는 미나미자 극장이 눈에 들어왔다. 기와를 이은 지붕이 너무나 장대해서 나는 그곳이 궁전인 줄 알았다.
마침내 인력거는 목재 가옥들이 들어선 골목으로 내려갔다. 그 집들은 모두 나란히 늘어서 있어서 마치 대문이 하나로 연결된 것 같았다. 그 광경은 나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끔찍한 상실감을 느끼게 했다.
좁은 길을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는 기모노 차림의 여자들이 보였다.
인력거가 어느 문 앞에 멈추자, 베쿠는 나더러 내리라고 했다. 그도 내 뒤를 따라 내렸는데, 그때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사추가 따라 내리려고 하자, 베쿠가 뒤를 돌아보면서 그 긴 팔로 사추의 등을 밀어버린 것이다.
“넌 여기 있어, 넌 다른 데로 가게 될 거야.”
나와 사추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서로의 감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던 적은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단지 순간에 불과했으며, 그 뒤로 기억나는 거라곤 내 눈에 눈물이 고여서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뿐이다. (P41)
“여쭤봐도 된다면, 부인...... 여긴 뭐하는 곳이죠?”
“여긴 오키야란다. 게이샤들이 사는 곳이지. 너도 아주 열심히 일하면 게이샤가 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이제 조금 후면 할머니와 어머니가 너를 보러 내려오실 텐데, 내 말을 아주 잘 듣지 않으면 다음주가 될 때까지 대답을 못 얻을 게다. 그 두 사람은 널 직접 보고 판단하고 싶어하셔. 할수 있는 한 깊숙이 몸을 굽혀 절을 하고 눈은 쳐다보지 말아라. 우리가 할머니라고 부르는 그 나이 든 여자는 일생 동안 누구도 좋아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 말에는 신경 쓰지 말아라. 할머니가 네게 질문을 하시더라도 넌 대답하면 안 돼, 절대로! 내가 대신 대답해줄 테니까. 네가 깊은 인상을 주어야 할 사람은 어머니야. 어머니는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단지 한 가지만 마음에 두신단다.”
그 한 가지가 무엇인지 알아낼 겨를도 없이, 정면 입구 홀 쪽에서 삐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조금 후에 두 여자가 복도로 내려왔다. (P46)
나도 호박 말처럼 하고 싶었지만, 할머니는 이미 복도에 나와 현관 홀을 가로질러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할머니는 15분 정도 지나서 나를 놓아주었지만, 그때까지 호박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마침내 출발할 수 있게 되자, 호박은 내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빨리 걷기 시작했다.
“저 늙은 할망구는 정말 잔인해! 저 할망구 목을 문지르고 나면 소금물에다 꼭 손을 씻도록 해.”
“왜 그래야 해?”
“우리 엄마가 늘 그랬어. 악은 접촉을 통해 세상에 퍼진다고. 나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해. 왜냐하면 어느 날 아침 엄마는 지나가던 악마와 스치는 바람에 죽었거든. 너도 네 손을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할머니처럼 쪼그라든 늙은 장아찌가 되어버릴 거야.”
호박과 내 나이가 같고 인생의 특이한 입장이 같다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 두 사람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자주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지만 해야 할 허드렛일이 너무 많아서 식사시간에도 만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오키야에서는 호박이 나보다 연장자였기 때문에 호박이 먼저 식사를 했던 것이다.
“호박아, 너, 교토에서 태어났니? 억양을 들어보면 그런 것 같은데.”
“난 삿포로에서 태어났어. 하지만 다섯 살 때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자 아빠가 삼촌과 살라고 나를 교토로 보냈어. 작년에 삼촌이 직장을 잃고 나서 이곳으로 보내졌지.”
“왜 다시 삿포로로 도망가지 않니?”
“아빠가 삼촌을 저주한데다가 작년에 돌아가셨어. 난 도망갈 수가 없어. 갈 데가 없거든.”
“내가 언니를 찾으면, 너도 우리와 같이 가자. 함께 도망가는 거야.”
호박이 수업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을 고려해본다면, 그녀도 내 제안에 기뻐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시죠 거리에 다다른 우리는 말없이 길을 건너갔다. 그 길은 바로 베쿠가 사추와 나를 역에서 데려온 그날 지나왔던 그 길이었다. (P60-61)
국 한 그릇을 먹은 우리는 될수 있는 대로 재빨리 학교로 돌아왔기 때문에 호박은 교실 뒤에 앉아 샤미센을 조립할 수 있었다.
샤미센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샤미센이야말로 특이하게 생긴 악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샤미센을 가리켜 일본 기타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사실 기타보다는 훨씬 작다. 나무로 된 가느다란 목 끝 부분에는 줄을 감는 막대못이 세 개 달려 있고, 몸통에는 북처럼 고양이 가죽이 덮여 있다. 그 악기는 따로 분리하여 가방이나 상자 속에 담아 운반할 수 있다.
어쨌든 조립을 끝낸 호박은 혀를 쑥 내민 채 샤미센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말하는 게 좀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호박은 음감은 별로 신통치가 않아서, 음조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파도에 실린 보트처럼 아래위로 오르락내리락했다. 교실은 곧 샤미센을 든 여학생들로 꽉 찼다. 학생들은 상자 속에 든 초콜릿처럼 질서 있게 간격을 유지하며 앉았다. 나는 사추가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계속해서 문 쪽을 쳐다보았으나, 사추는 결코 오지 않았다.
잠시 후 선생님이 들어왔다. 선생님은 날카로운 목소리와 작은 체구를 한 늙은 부인이었다. 그 선생님의 성은 미추미였는데, 우리는 그녀 앞에서만 미추미라고 불렀다. 미추미는 네추미(‘쥐’라는 뜻)와 아주 흡사하게 들리기 때문에 우리는 그녀가 없는 곳에서는 네추미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쥐 선생님. (P65)
기모노는 복잡한 의상이다.
우선, 가정주부와 게이샤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기모노를 입는다. 가정주부가 기모노를 입을 때는 온갖 패딩을 사용하여 허리 부분에서 주름이 잡히지 않게끔 한다. 그 결과 가정주부는 절간 복도의 나무 기둥처럼 완전히 원통 모습이 되고 만다.
그러나 게이샤는 기모노를 자주 입기 때문에 패딩이 거의 필요 없고 주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모노를 입는 첫 단계는 알몸 상태에서 코시마키라고 부르는 비단 슬립을 이용해 엉덩이를 감싸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고 나서는 짧은 소매의 기모노 속셔츠를 입고 허리 부분을 단단히 묶은 뒤 뒤에 패드를 댄다. 그 패드는 약간 부풀어오른 베개처럼 생겼는데, 제자리에 단단히 묶기 위해 끈이 달려 있다. 하추모모는 전통미가 느껴지는 작은 엉덩이와 가냘픈 몸매, 그리고 오랜 경험으로 인해 패딩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옷을 완전히 차려 입게 되면, 지금까지 입은 옷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다음 입게 되는 속옷은 실제로는 전혀 속옷이 아니다. 게이샤가 춤을 출 때나 혼자 거리를 걸을 때, 종종 기모노가 바닥에 끌리지 않도록 왼손으로 기모노 자락을 치켜 올릴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무릎 아래로 속옷이 노출된다. 그런 까닭에 속옷의 무늬와 천은 기모노와 조화를 이루어야만 한다.
아줌마는 하추모모가 입을 속옷에다 매일 실크 깃을 달고 그 다음날 아침에는 빨기 위해 떼어냈다. 게이샤 견습생은 빨간 깃을 달지만 하추모모는 견습생이 아니었으므로 하얀 깃을 달았다.
방에서 나온 하추모모는 지금까지 묘사했던 옷들을 모두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옆쪽으로 딱 맞게 단추를 채우는 타비라는 하얀 양말도 신고 있었다.
베쿠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하는 일이 얼마나 필요한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기모노는 누가 입든지 간에 모두 길이가 똑같아서 아주 키가 큰 여성을 제외하고는 남는 천을 오비 아래 접어 넣어야만 했다. (P75)
나는 그 생각을 떨쳐버리고 싶었지만, 바람이 스스로 멈출 수 없듯이 나도 마음속에서 그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 걸음 물러나 문에다 등을 기대고는 현관 돌계단 위에 앉아 울기 시작했다. 다나카 씨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은 우리를 부모님에게서 떼어내 나는 하녀로, 언니는 더 나쁜 곳으로 팔아버렸다. 나는 그 사람을 친절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 난 얼마나 어리석은 아이였던가!
난 결코 요로이도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아니 내가 만약 그곳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내가 다나카 씨를 얼마나 증오하는지 말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P95-96)
“널 75엔 주고 샀어. 그게 내가 쓴 돈이야. 그런데 네가 기모노를 한 벌 망쳤고, 브로치도 훔쳤고, 이제 팔까지 부러뜨렸지. 그래서 네 빚에다 치료비를 더해야겠다. 거기에다 네 식비와 수업료를 더해야지. 그리고 바로 오늘 아침, 미야가와초 구역의 타추요 여주인한테 들은 얘긴데, 네 언니가 도망쳤다는구나. 그 여주인은 나한테 진 빚을 아직 갚지 못했어. 그런데 이제 더 이상 그 빚을 갚지 않겠다더구나! 그러니 네 빚에다 더할 수밖에, 하지만 그렇다고 뭐가 달라지겠니? 어차피 넌 벌써 네가 갚을 수 없을 정도로 빚을 졌는데.”
사추는 도망쳤다. 하루종일 그 생각을 하면서 보냈는데, 마침내 그 대답을 듣게 되었다. 언니를 위해 기뻐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네가 게이샤로 10년이나 15년 정도 일하고 나면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해. 게이샤로 성공하는 경우 말이다. 하지만 도망치려는 아이한테 누가 한푼이라도 투자하려고 하겠니?”
그런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나는 어머니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때까지 유쾌하게 말하던 어머니는, 내가 사과하자 파이프를 테이블에 올려놓더니 턱을 쑥 내밀었다. 그 모습은 마치 싸울 태세를 갖추는 동물 같은 인상을 주었다. (P115-116)
부모님이 돌아가셨으며, 언니도 영영 나를 떠났다는 소식을 다나카 씨가 편지로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나도 다른 많은 가련한 여자아이들처럼 별 볼일 없는 게이샤로 인생을 마감할 행운을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처음 다나카 씨를 만났던 그날 오후가 내 생애 최고의 오후이자 또한 최악의 오후였다고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줄 믿는다. 왜 최악의 오후였는지는 이제 설명이 된 듯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최고의 오후라는 수식어가 가능할까. 언뜻 돌이켜보면 그날 이후, 다나카 씨는 나에게 고통만을 가져다주었는데 말이다.
그는 내 운명을 영원히 바꿔버렸다. 삶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그냥 한 방향으로 흘러가다가 새로운 길을 가도록 강요하는 무엇인가를 만나면 완전히 다른 곳으로 흘러가 버린다. 다나카 씨를 못 만났더라면, 내 인생은 작은 냇물처럼 우리 비틀거리는 집에서 바다로 흘러 들어갔을 것이다. 다나카 씨는 날 세상에 내보냄으로써 그 단순한 이치를 바꿔버렸다. 하지만 세상으로 나간다고 해서 꼭 집을 뒤로하고 떠날 필요는 없었다. 다나카 씨의 편지를 받았을 때는 기온에서 6개월 정도 생활한 후였는데, 그때까지 나는 단 한순간도 우리 가족의 미래를 포기해본 적이 없었다. 기온에서는 나의 반쪽만 생활하고 있었으며, 다른 반쪽은 집으로 돌아가는 꿈속에서 살고 있었다. 꿈은 그토록 위험할 수도 있었다. 불꽃처럼 화려하지만 때때로 우리를 완전히 소진시킬 수 있는 존재가 꿈이었다. (P122)
바로 그 다음날 오후, 마메하는 나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였다. 마메하는 테이블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난 조심스럽게 예의를 갖춰 절을 한 뒤 테이블 쪽으로 가서 다시 한번 절을 올렸다.
“마메하 상, 어떻게 이런 결정을 내리셨는지 저로서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얼마나 감사드리는지 이루 설명할 수가 없어요.”
“아직은 감사할 것 없어. 아직 아무 일도 안 일어났으니까. 어제 내가 다녀간 뒤 니타 여사가 뭐라고 했는지 알고 싶구나.”
“글쎄요, 어머니는 당신이 왜 제게 관심을 보이시는지 약간 어리둥절해 했어요..... 어리둥절하긴 사실 저도 마찬가지구요.”
마메하가 뭐라고 말하리라 기대했으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추모모 말은.......”
“하추모모의 말을 전하느라 시간 낭비할 필요 없어. 하추모모가 네 실패를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는 너도 이미 알잖아. 그건 니타 여사도 마찬가지고.”
“왜 어머니가 제 실패를 바라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성공해야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텐데요.”
“내가 스무 살까지 네 빚을 다 못 갚으면 나는 여사에게 큰 빚을 지게 되어 있어, 어제 난 여사와 일종의 내기를 한 셈이지.”
하녀가 우리에게 차를 접대하는 동안에도 마메하의 말은 계속됐다.
“네가 성공하리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그런 내기를 하지 않았을 게다. 그리고 네가 내 동생이 되고자 한다면, 아주 엄격한 조건이 있다는 사실도 알아두어야 해.” (P160-161)
게이샤는 샤미센 외에도 많은 기예를 공부해야 한다. 사실 ‘게이샤’란 말의 원래 뜻은 ‘장인’ 혹은 ‘예술가’이다.
아침 첫 수업은 추추미라고 불리는 일종의 장구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게이샤가 왜 추추미를 배우느라 고생해야 하는지 궁금하겠지만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연회나 온갖 종류의 비공식 모임에서, 게이샤는 보통 샤미센 반주나 노래에 맞춰 춤을 춘다. 그러나 매년 봄마다 열리는 ‘고도의 춤’ 같은 무대 공연을 위해서는 여섯 명 이상의 샤미센 연주가들이 앙상블을 이루게 되고, 여러 종류의 북과 피리도 배경에 깔리게 된다. 그래서 게이샤는 한두 가지 악기에 능통해야 함은 물론, 다른 악기들도 조금씩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추추미는 다른 악기들처럼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연주하는 악기이지만 어깨 위에 올려놓고 연주한다는 점에서, 허벅지 위에 걸쳐놓은 커다란 오카와나 의자 가장자리에 앉아 굵은 북채로 두드리는 타이코와 구별된다. 북은 어린아이도 연주할 수 있는 악기처럼 보이지만, 사실 북을 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큰 타이코의 경우 팔을 교차시킨 뒤 북채를 역타로 흔드는데, 이를 우치코미라고 한다. 그리고 한 팔로 내리치면서 동시에 다른 쪽 팔을 치켜드는 방법도 있는데, 이는 사라시라고 부른다. 모든 방법마다 다른 소리를 만들어내지만, 수많은 연습을 한 뒤에야 가능하다. (P163-164)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는지, 마메하가 나를 보고 웃었다.
“기운 내, 치요. 이 수수께끼에는 해답이 있어. 내 단나는 마음씨 좋은 남자여서 내 기모노대부분을 사주었어. 그래서 내가 하추모모보다 더 성공한 거지. 난 돈 많은 단나가 있지만 하추모모는 없거든.”
나는 마메하가 말한 단나가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그 말은 아내가 남편에게 사용하는 호칭이었다. 아니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랬다. 하지만 게이샤가 단나라고 할 때는 남편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었다. 게이샤는 결코 결혼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니 적어도 결혼한 여자는 더 이상 게이샤로 남을 수가 없었다.
파티가 끝나고 나면, 어떤 남자들은 시시덕거리는 정도로 만족하지 못하고 좀더 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남자들 중에는 내가 사추와 만났던 미야가와초의 그 불쾌한 집으로 가서 땀 냄새를 풍기며 만족을 얻는 경우도 있다. 어떤 남자들은 흐릿한 눈으로 기댄 채, 옆에 앉은 게이샤에게 화대가 얼마 정도 되는지 용기를 내어 물어보기도 한다. 급이 낮은 게이샤라면 자신에게 떨어질 수입을 기대하면서 그런 제안을 선뜻 받아들인다. 그런 여자들도 자신을 게이샤로 부르고 또 등록소에 이름이 올라가 있긴 하지만, 그녀가 정말 제대로 된 게이샤인지 알아보려면 우선 어떻게 춤을 추는지, 샤미센은 얼마나 잘 연주하는지, 그리고 다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진짜 게이샤는 남자들에게 함부로 몸을 내맡김으로써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남자에게도 결코 몸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게이샤도 다른 사람들처럼 열정이 있는 까닭에 그들도 똑같은 실수를 범한다. 위험을 감수하는 게이샤는 그런 사실이 발각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일을 통해 자신의 명성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고, 단나와의 관계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오키야 여주인의 분노를 살 수도 있다. 자신의 열정을 따르기로 마음먹은 게이샤는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P169)
마메하는 분명히 일류급 게이샤에 속했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사실 그녀는 일본 전역에서 가장 유명한 두세 명의 게이샤 중 한 명이었다.
당신은 그 유명한 게이샤 마메추키에 대해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 게이샤는 1차 세계대전 전에 수상과 스캔들을 일으켰던 여자였다. 그녀가 바로 마메하의 언니였다. 두 사람의 이름에 ‘마메’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어린 게이샤가 언니 이름에서 자신의 이름을 따오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마메추키 같은 사람을 언니로 두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마메하는 성공적인 경력을 보장받은 셈이었다. 그런데 1920년대 초반에 일본 관광청은 처음으로 국제 홍보 캠페인을 시작했다. 홍보 포스터에는 교토 동남부 한 사찰의 아름다운 탑 사진과 함께 수줍어하는 게이샤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벚나무 옆으로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한 모습을 드러낸 그 주인공이 바로 마메하였다. (P171)
이치리키의 여주인이 참석한 예식은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녀가 술잔이 담긴 쟁반을 가져오자, 마메하와 나는 그 술을 함께 마셨다. 내가 세 모금 마시고 나서 마메하에게 건네주면, 그녀도 세 모금 마셨다. 세 가지 다른 잔을 사용해서 술잔을 건네고 나자 예식이 모두 끝났다. 그 이후로, 난 더 이상 치요가 아니었다. 난 견습 게이샤 사유리였다.
견습생활 첫 달 동안, 견습생으로 불리는 어린 게이샤는 언니의 허락 없이 혼자서 무용이나 향응을 베풀어서는 안 되며, 옆에서 지켜보면서 배우는 것 외에는 사실상 별로 일을 하지 않았다.
사유리라는 내 이름에 대해 말하자면, 마메하는 자신의 점쟁이와 함께 오랜 시간을 들여 그 이름을 골랐다. 이름은 어떻게 들리느냐 하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글자의 의미도 중요했다. 그리고 이름을 쓸 때 획순도 중요한데, 행운이나 불행을 가져다주는 획순이 있기 때문이었다. 내 새 이름의 ‘사’는 ‘함께’라는 의미이고, ‘유’는 십이지의 닭을 의미하는데, 그건 내 팔자의 다른 요소들과 균형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리’는 ‘이해’를 의미했다. 점쟁이는 마메하의 이름에서 내 이름을 따오면 어떻게 지어도 불길하다고 했다.
난 사유리란 이름을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더 이상 치요라고 불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예식이 끝난 후에 우리는 점심으로 붉은 콩과 쌀을 섞어 지은 밥을 먹으려고 다른 방으로 갔다. 경사스러운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상하게 불안을 느끼며 밥을 집적거렸다. 찻집 여주인이 뭔가를 물어보면서 나를 사유리라고 부르는 순간, 난 왜 내 마음이 그렇게 거북한지 깨달았다. 맨발로 호수에서 비틀거리는 집으로 뛰어가던 치요라는 소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반짝거리는 하얀 얼굴과 붉은 입술을 한 사유리란 여자가 치요를 없애버린 것이다. (P192-193)
당신이 아직 모르고 있을 터이니 설명해주겠다. 일본 해군의 대위였던 노부는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던 1910년 서울 외곽지대에서 폭탄으로 심한 상처를 입었다. 노부의 영웅적인 이야기는 일본 전역에 알려져 있었는데도 나는 그를 만날 당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노부가 만약 회장과의 만남으로 ‘이와무라 전기’의 사장이 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는 전쟁 영웅으로 잊혀졌을 것이다.
학교에서는 기예만을 가르쳤기 때문에 난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어쨌든, 러일전쟁이 끝나갈 무렵, 일본 정부는 조선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했으며, 그 뒤 몇 년 동안, 일본은 조선을 통합할 결정을 내렸다.
조선인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노부는 그런 일들을 통제하기 위해 소규모 부대의 일원으로 조선에 갔다. 어느 늦은 오후, 부대 지휘관을 데리고 노부는 경성 근교 마을을 방문했다. 포탄이 날아오는 요란한 소리가 들리자, 지휘관은 도랑 아래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나이가 많았던 그는 조개가 바위 아래로 기어가는 것처럼 속도가 느렸다. 포탄이 터지기 바로 직전, 그는 발 디딜 곳을 찾느라 애쓰던 중이었다. 지휘관을 구하려고 노부는 그 위로 몸을 덮쳤다. 밑에서 불편함을 느낀 지휘관은 기어 나오려고 애쓰다가 떨어진 포탄에 목숨을 잃었고 노부는 심하게 다쳤다. 수술을 받은 노부는 왼팔 팔꿈치 위를 잘라내야 했다. (P230)
이와무라 전기는 1931년 4월에 2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내가 시라카와 강둑에서 회장을 만났던 바로 그 시기였다. 잡지를 들추기만 하면 모든 잡지에서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날짜를 알아낸 나는 기념행사에 관한 기사를 더 알아내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다. 자료 대부분은 골목길 건너편 오키야에 살았던 늙은 할머니가 죽고 난 후 내버려진 잡동사니 중에서 찾아냈다.
내가 알아낸 바에 의하면, 회장은 1890년 생이었는데, 말하자면 회색 머리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는 40을 갓 넘긴 나이였다. 그날 난 그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회사의 회장일 거라는 인상을 받았으나, 그런 내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 모든 기사를 읽어본 결과, 이와무라 전기는 일본 서부 지역의 주요 라이벌인 ‘오사카 전기’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회장과 노부는 뛰어난 협력 관계로 인해 큰 회사의 총수들보다 더 많이 알려져 있었다. 어쨌든, 이와무라 전기는 혁신적인 회사로 알려졌고 명성도 좋았다.
회장은 17세의 나이로 오사카의 작은 전기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곧 그는 그 지역 공장에서 기계 배선을 설치하는 사람들을 감독하게 되었다. 당시 가정과 회사 내에서 전등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었기 때문에, 회장은 원래 한 개의 백열전구를 위해 만들어진 소켓에 두 개의 전구를 사용할 수 있는 장치를 고안해냈다. 하지만 그 전기회사가 그 장치를 생산하려 하지 않자, 스물두 살의 나이로 회장은 회사를 나와 자신의 회사를 설립하였다.
몇 년 동안은 사정이 어려웠다. 그러나 1914년, 회장의 회사는 오사카 군사기지에 설치할 전기배선 계약을 따냈다. 노부는 전쟁의 상처로 인해 어느 곳에서도 직장을 얻기 힘들었기 때문에 아직 군대에 남아 있었다. 그때 그에게 이와무라 전기의 작업을 감독하는 업무가 주어졌다. 그와 회장은 금방 친구가 되었으며, 이듬해 회장이 일자리를 제공하자, 노부가 받아들였다. (P241-242)
다음날 아침 일찍, 기차가 교토 역에 도착할 때까지도 내 감정은 가라앉지 않았다. 호수에 돌 하나가 떨어지면, 돌이 바닥으로 가라앉고 난 후에도 물은 계속 흔들리는 법이다. 이초다 씨보다 한 발짝 앞서서 나무로 된 계단을 내려와 승강장을 빠져나가면서, 나는 문득 내가 모든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는 충격을 받게 되었다.
유리가 끼워진 게시판 안에는 ‘고도의 춤’ 공연을 위한 새 포스터가 붙어 있었는데, 난 걸음을 멈추고 그 포스터를 바라보았다. 공연까지 두 주가 남아 있었다. 그 공연에는 해마다 주제가 있었는데, 예를 들면 ‘고토의 사계절’이나 ‘헤이케 이야기의 명승지’ 같은 것이었다. 그 해의 주제는 ‘떠오르는 태양의 찬란한 빛’이었다. 그 포스터는 1919년부터 거의 모든 포스터를 그려온 우치다 코사부로가 그린 것으로, 초록과 오렌지색 기모노를 입은 한 견습생 게이샤가 아치형의 나무 교각 위에 서 있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긴 여행을 끝난 뒤였고, 기차에서도 잠을 별로 자지 못해 난 몹시 지쳐 있었다. 난 포스터의 아름다운 배경을 잠시 어리벙벙하게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러다가 기모노를 입고 있는 여자에게 주의를 빼앗겼다. 그 여자는 떠오르는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눈은 푸른 회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난 몸을 지탱하기 위해 난간을 꼭 붙들어야 했다. 우치다가 그린 그 교각 위의 여자는 바로 나였다! (P304)
결국, 게박사는 내 미주아지를 위해 11,500엔을 지불하기로 동의했다. 그 액수는 그때까지 기온에서 미주아지를 위해 지불된 금액 중에서는 최고의 금액이었다. 다른 게이샤 구역에서도 아마 최고의 금액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게이샤의 시간당 수당이 4엔이었고, 훌륭한 기모노 한 벌도 1,500엔 정도면 살 수 있었다. 그렇게 큰 액수처럼 안 들릴지 모르겠지만, 한 노동자가 일 년 동안 버는 돈보다 훨씬 많은 액수였다.
난 사실 돈의 가치에 대해 잘 몰랐다. 대부분의 게이샤들은 현금을 갖고 다니지 않는 것을 자랑스러워했고, 어디에 가든지 물건 값을 달아놓는 데에 익숙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뉴욕에서도 나는 같은 식으로 생활하고 있다. 난 나를 아는 가게에 가서 쇼핑을 하는데, 점원들은 내가 원하는 물건을 친절하게 다 적어놓는다. 월말에 계산서가 날아오면, 내 똑똑한 비서가 대신 지불을 한다. 그래서 난 내가 얼마나 많은 돈을 쓰는지, 그리고 향수 한 병 값이 잡지 한 권보다 얼마나 더 비싼지 모른다. 하지만 친한 친구가 언젠가 해준 적이 있는 말을 당신에게도 전해주고 싶다. 그는 1960년대 한동안 일본의 재정 차관을 지낸 사람이었으니까 난 그의 말이 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현금 가치는 해가 갈수록 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1929년의 마메하의 미주아지는 1935년의 내 미주아지보다 사실상 가격이 더 높았다는 것이다. 마메하의 미주아지가 7,8천 엔 정도였고, 내 미주아지는 11,500엔이나 되었지만 말이다. (P320)
2년 동안 파티나 각종 행사에 참석한 후 -그동안 공부를 계속하면서, 할 수 있는 한 많은 시간을 내어 무용 발표회에 참석하였다- 나는 견습생에서 정식 게이샤가 되었다. 1938년 여름, 내가 열여덟 살이 되던 해였다. 우리는 그런 변화를 ‘색깔을 바꾼다’고 표현했는데, 그건 견습생들이 붉은 깃을 다는 반면에, 게이샤는 하얀 깃을 달기 때문이었다. 만약 당신이 견습생과 나란히 있는 게이샤를 보게 된다면, 깃 외에도 서로 다른 점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정교하고 소매가 긴 기모노를 입고 오비를 늘어뜨린 견습생을 보다가 게이샤를 보면 좀더 단순하면서도 더 여성스러운 면모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깃을 바꿔 단 그날은 어머니의 일생 중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아니 적어도 내가 본 중에서 어머니는 가장 기뻐했다. 견습생과 달리, 게이샤는 조건만 적당하다면, 남자에게 차를 따르는 일 이상을 할 수 있었다. 마메하와의 관계와 기온에서의 내 인기를 생각할 때, 내 위치는 어머니를 충분히 흥분시킬 수 있었다. 어머니의 경우, 흥분이란 다른 말로 곧 돈이었으니까.
뉴욕으로 거처를 옮기고 나서, 나는 ‘게이샤’라는 단어가 서양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알게 되었다. 우아한 파티에서 때때로 나는 젊은 여성이나 아니면 훌륭한 옷과 보석으로 치장한 여성들을 소개받곤 했다. 내가 한때 교토의 게이샤였다는 말을 들으면, 그녀들은 입가에 일종의 미소 같은 것을 짓지만, 입 끝이 제대로 올라가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대화의 부담은 우리를 소개했던 사람의 몫이 되었다. 왜냐하면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난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여자들은 ‘세상에, 내가 창녀하고 얘기하고 있었다니....’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면, 그 여자는 자기보다 한참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돈 많은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고 자리를 떠났다. 우리가 공통점이 많다는 사실을 왜 그 여자들은 깨닫지 못하는 걸까? 내가 한때 그랬듯이, 그 여자도 남자로부터 금전적인 지원을 받는 여자였다. (P333-334)
“우리로서 어쩔 수 없는 일들은 그냥 눈감아버리는 거지 간단하게 처리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가? 그날 밤 미치노조가 취했을 때, 뭔가 좀 알아냈지. 자네는 그 오키야의 딸이 되었더군.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척하지 말게. 자네가 가진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자네의 의무니까. 만약 배를 드러내고 둥둥 떠다니는 물고기처럼 인생을 표류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배를 드러낸 채 강물 위를 둥둥 떠다닌다? 인생이 정말 우리를 싣고 가는 강물 이상이라고 믿고 싶어요.”
“만약 인생을 강물에 비유한다면, 잔잔한 평원을 흐르는 물살도 있을 거고, 거친 계곡을 흐르는 물살도 있을 걸세. 어느 물살을 타느냐는 선택할 수 있지. 만약 자네가 가진 유리한 점들을 다 이용한다면....”
“물론 그런 유리한 점들을 갖게 된다면 좋겠죠.”
“자네가 눈을 돌리기만 하면, 그런 것들은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네. 나는 가진게 없더라도, 그러니까 다 먹고 남은 복숭아씨나 뭐 그런 것밖에 없다 하더라도 그냥 내버리지 않지. 복숭아씨를 뱉을 때가 되면,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 던져서라도 그걸 이용하겠네!”
“노부 상, 지금 복숭아씨를 어떻게 버리는지 가르쳐주시는 건가요?”
“내 말뜻을 잘 알면서 농담하지 말게. 사유리, 우리는 닮은 점이 많네. 몇 년 전 스모 경기에서 자네를 처음 보았을 때, 몇 살이었나? 열네 살? 난 그때 이미 자네의 재능을 알아보았네.”
“노부 상은 언제나 날 실제보다 더 좋게 평가하시는군요.”
“자네 말이 맞을 수도 있지. 하지만 사유리, 자네에게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네. 그런데 이제 보니 자네는 자네 운명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있어. 자신의 행복을 그런 장군 같은 사람에게 묶어두다니! 자네도 알겠지만, 난 자네를 소중히 생각했네. 그 생각을 하면 정말 화가 나, 그 장군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자네 인생에서 사라지고 말 걸세. 젊음을 그런 식으로 날려버리고 싶은가? 바보처럼 행동하는 여자는 바보네. 안 그런가?” (P360)
요로이도 시절, 난 쌀쌀한 봄날 수영을 한 뒤 호수 옆 바위에 누워 햇볕을 쬐곤 했다. 해가 갑자기 구름 뒤로 사라지면 차가운 공기가 쇳조각처럼 내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이었다. 현관 홀에 서서 돗토리 장군의 불행한 소식을 접한 순간, 난 바로 그런 느낌을 받았다. 햇살이 영원히 사라져버린 차가운 공기 속에, 벌거벗고 서 있으라는 선고를 받은 기분. 헌병이 찾아온 뒤 1주일 만에, 우리는 다른 집에서는 벌써 오래 전에 빼앗겼던 물건들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비축해둔 식량, 속옷 등등, 우린 그동안 계속해서 마메하에게 차를 대주고 있었다. 마메하는 누군가에게 부탁할 일이 있을 때 차를 선물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물건을 빼앗기고 나서부터는 그녀의 물품 사정이 더 나아, 대신 우리에게 물건을 대주게 되었다. 그 달 말경, 이웃 조합에서 우리 족자와 도자기들을 몰수해 ‘회색시장’에 내다 팔기 시작했다. 회색시장은 암시장과 조금 달랐다. 암시장에서는 주로 연료용 기름, 음식, 금속 등 배급품이나 불법 거래 물품을 취급했지만, 회색시장은 주로 주부들이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 귀중한 물건을 파는 곳이었다. 그러나 우리 오키야의 물건들은 벌을 주려는 목적으로 팔려 나갔기 때문에 현금은 다른 사람 손으로 넘어갔다. 가까운 오키야의 여주인이었던 이웃 조합의 회장은 우리 물건을 압수해 갈 때마다 아주 미안해했다. 그러나 그건 헌병이 내린 명령이었다. 모두들 복종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전쟁 초기가 먼 바다로 향하는 들뜬 항해의 시작이었다면, 1943년 중반은 파도가 거세게 휘몰아친 때였다. 우리는 모두 물에 빠져 죽는 줄 알았고 사실 많은 사람이 빠져 죽기도 했다. 단순히 생활이 비참해지는 정도가 아니었다. 감히 말을 꺼내지는 못했지만, 우리 모두는 전쟁의 결과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즐겁게 지내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지내는 것을 비애국적인 행동이라고 여겼으니까.
그 시기에 들었던 가장 농담 비슷한 이야기는 어느 날 밤, 게이샤 라이하가 했던 말이었다. 군사 정부가 일본의 모든 게이샤 구역을 폐쇄하리라는 소문이 나돌아, 우리 모두 앞날을 걱정하고 있던 시기였다.
“우린 그런 일들을 생각하면서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돼. 과거를 제외하면, 미래보다 더 암울한 것도 없으니까.”
별로 재미없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 얘기를 듣고 눈가에 눈물이 맺힐 때까지 웃었다. 언젠가 게이샤 구역이 정말 문을 닫게 되면, 우리의 터전은 공장으로 옮겨 갈 운명이었다. (P380-381)
그 다음해 1월 어느날 아침, 나는 눈을 맞으며 배급표를 들고 쌀가게 앞에 줄을 서 있었다. 그때 옆집 가게 주인이 머리를 내밀더니 추위 속에서 소리를 내질렀다.
“드디어 일어났소!”
우리는 모두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농부들이 입는 옷을 입고 그 위로 두꺼운 숄만 둘러 몸이 얼어붙은 나는 그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상관도 하지 않았다. 그 무렵, 우리는 아무도 기모노를 입지 않았다.
마침내 내 앞에 있던 게이샤가 눈썹에서 눈을 쓸어 내리면서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았다.
“전쟁이 끝났어요?”
“정부가 게이샤 구역을 닫겠다고 발표했소, 당신들은 모두 내일 아침 등록소에 가서 보고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게 안에서 들리는 라디오 소리에 한참 동안 귀를 기울였다. 문이 다시 덜거덕거리며 닫히자, 눈 내리는 소리만이 주위를 감쌌다. 내 옆에 있던 게이샤들의 얼굴에서 절망을 엿볼 수 있었다. 우리는 그때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를 공장 생활에서 구해줄 남자는 누구일까라고. (P382-383)
내가 성공한 젊은 게이샤였으니까, 노부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나를 구해주었을 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힘든 시기의 게이샤는 거리에 떨어진 보석과 달라서 아무도 주우려고 하지 않았다. 기온에 있던 수백 명의 게이샤들은 전쟁으로부터 보호해줄 둥지를 찾고자 애썼지만 그런 둥지를 찾은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니 아라시노 가족과 함께 지내는 동안, 난 점점 노부에게 빚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다음해 봄, 게이샤 라이하가 소이탄에 맞아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난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이었나를 새삼 깨달았다. 라이하는 과거를 제외하면 미래만큼 암울한 것도 없다는 말을 해서 우리를 웃겼던 그 게이샤였다. 라이하와 그녀의 어머니는 유명한 게이샤였으며, 그녀의 아버지는 수미토모 집안의 일원이었다. 기온의 우리들이 보기에는 라이하가 가장 안전하게 전쟁에서 살아남을 것 같았다. 사망할 당시, 그녀는 도쿄에 있는 아버지의 별장에서 어린 조카에게 책을 읽어주다가 봉변을 당했다. 라이하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바로 그 공습에서 위대한 스모 선수 미야기야마도 목숨을 잃었다. 두 사람 모두 비교적 편안하게 지낸 사람들이었다.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이던 호박은, 자신이 일하고 있던 오사카 근처의 렌즈 공장에 대여섯 차례 폭탄이 떨어졌는데도 용케 살아남았다. 누가 전쟁에서 살아남을지, 아니면 누가 목숨을 잃을지, 그것만큼 예측하기 힘든 일도 없었다. (P391)
“그러니까 자네 말은.... 견습생이었을 때에도 그때 말을 건 사람이 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스모 경기장에서 다시 회장님을 보는 순간 전 한눈에 알아보았어요. 솔직히 회장님이 저를 기억해주시다니 놀랍기만 하군요.”
“그럴까? 사유리. 자네는 종종 거울을 들여다봐야 할 것 같군. 특히 눈물로 눈이 젖어올 때 말일세. 왜냐하면 그럴 때의 자네 눈은..... 아, 난 설명할 수가 없어. 그 눈에 나 자신이 그대로 비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네. 나는 많은 시간을 거짓말이나 하는 남자들과 마주보며 지내지. 그런데 여기, 절대로 나를 쳐다보는 법이 없는 여자가 이제는 똑바로 자신의 눈을 쳐다보게 하는군 그래.”
그러고 나서 회장은 말을 잠시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자네는 왜 마메하가 자네 언니가 되었는지 의아해한 적 없나?”
“마메하가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이 일과 마메하가 무슨 상관이죠?”
“자네는 정말 모르고 있군. 그렇지?”
“회장님, 뭘 모른다는 말씀이세요?”
“사유리, 마메하에게 자네를 보살펴주라고 말한 사람이 바로 날세. 마메하에게 내가 만났던 회색 눈의 아름다운 여자에 대해 얘기했지. 그리고 자네를 보살펴달라고 도움을 청했네. 필요한 경우 비용도 지불하겠다고 말했어. 그러자 몇 달 지나지 않아 마메하가 자네를 맡게 되었네. 그 이후에 그녀가 한 말에 따르면, 마메하의 도움이 없었다면 자네는 절대 게이샤가 되지 못했을 거라고 하더군.”
회장의 말이 내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설명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난 마메하가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나를 맡은 줄 알았다. 하추모모를 기온에서 몰아내기 위해 말이다. 하지만 회장 때문에 마메하 밑에서 지도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가 내게 했던 모든 말들을 다시 돌이켜보았다. 그리고 그 뒤에 숨은 참된 의미를 알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내 눈에 갑자기 떠오른 사람은 마메하가 아니었다. 무릎 위에 놓인 내 손에 시선이 머물자, 난 그 손 자체도 회장이 만든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시 난 기분이 유쾌해졌으며 두려움과 함께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난 그에게 절을 하고 감사의 말을 전하기 위해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었다.
“회장님, 용서해주세요. 하지만 저로서는 회장님께서 이 모든 일에 대해 좀 일찍 말씀하셨더라면 좋았을 거예요. 제겐 정말 중요한 일이니까요.” (P466-467)
내가 처음 기온에 갔을 때는 8백 명의 게이샤가 일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수가 채 60명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은 견습생 수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회장이 뉴욕을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회장과 나는 센트럴 파크를 함께 산책했다. 우리는 예기치도 않게 지나간 일에 대해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러다가 소나무 사이로 나 있는 길에 이르자 갑자기 회장이 걸음을 멈추었다. 회장은 가끔 자신이 자랐던 오사카 외곽의 소나무 얘기를 했다. 회장이 그 소나무들을 생각하면서 걸음을 멈추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허약한 두 손을 지팡이에 의지하고 눈을 감은 채 과거의 향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있었다.
“때때로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일들이 내가 보는 것보다 더 사실적이란 생각이 드네.”
그는 말을 하면서 한숨을 지었다.
나는 열정이란 나이가 들면서 사라지는 감정이라고 믿었다. 마치 컵에 담긴 내용물이 점차 공기 중으로 사라지듯이 말이다. 아파트로 돌아온 회장과 나는 숱한 동경과 욕구를 풀어헤치며 술을 마실 대로 마셔댔다. 달콤한 잠에 빠진 나는, 기온의 연회에 참석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어떤 중년 남자는 자신이 깊이 사랑했던 부인이 정말 죽은 게 아니라고 설명해주었다. 왜냐하면 함께 했던 즐거운 시간이 마음속에 살아 있기 때문이었다. (P483-484)
사람들이 인생을 이끄는 힘이 무엇인지는 자신할 수 없지만, 나는 마치 돌이 땅으로 떨어지듯 회장에게 이끌렸다. 내가 다나카 씨를 만난 때는 내 입술이 찢어졌을 때였다. 우리 엄마가 죽을 무렵, 잔인하게도 난 팔려나가는 신세가 되었다. 마치 바다에 이르기도 전에 바위투성이의 절벽으로 떨어지는 강물처럼 말이다.
이제 그 사람은 갔지만 나는 아직도 그를 소유하고 있다. 내 풍부한 기억속에 말이다. 당신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난 다시 한 번 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종종 파크 애버뉴를 지날 때마다 이국적인 주변 환경에 이상한 느낌을 받곤 한다. 노란 택시들이 경적을 울리며 곁을 지나가고, 가방을 든 여자들이 거리 모퉁이에 기모노를 입고 서 있는 작은 일본 노인네를 보고서는 당혹스런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내가 다시 요로이도로 간다면 그곳이 정말 더 이국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젊었을 때는, 만약 다나카 씨가 나를 비틀거리는 집에서 빼내오지 않았더라면 결코 내 인생이 그렇게 고달프지 않았으리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우리의 세계가 바다에 넘실거리는 파도보다 더 생명이 짧음을.
우리의 모든 몸부림과 승리는 종이 위의 물감처럼 그 자국을 남기는 법이다. (P484-4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