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눈에 갇힌 외딴 산장에서> 2024년
<눈에 갇힌 외딴 산장에서>는 히가시노 게이고 산장 시리즈이다. <가면산장 살인사건>, <하쿠바 산장 살인사건>.
가사하라 아쓰코가 그렇게 묻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구가 가즈유키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턱으로 책장 맨 위 칸을 가리켰다.
“저기요. 다섯 종류의 책이 각각 일곱 권씩 꽂혀 있어요.”
그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며 아쓰코가 숨을 살짝 삼켰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중에서 한 권을 뽑아 들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게 되었다’군요.”
“밴 다인의 ‘그린 살인 사건’과 엘러리 퀸의 ‘Y의 비극’도 있어요.”
“일곱 권씩 있다는 건, 우리 모두 이걸 읽으라는 뜻인가.....”
“그럴지도 모르죠.”
구가 가즈유키가 살짝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적어도 우연은 아닌 듯합니다. 전부 새 책인 걸 보면 일부러 일곱 권씩 사다 놓았을 거예요.”
“선생님이 직접 가져다 놓으셨을까요?”
“책을 가져다 놓은 사람은 아까 그 오다라는 주인장이겠지만, 선생님이 부탁했을 거예요. 의도가 뭔지는 몰라도, 단순히 장난이라면 별로 좋은 취미라고 할 수는 없겠네요. 하나 같이 등장인물이 잇달아 죽는 내용이거든요.” (P16-17)
거기까지 읽고 나서 아쓰코는 잠시 숨을 돌렸다가 읽기를 계속했다.
“자, 그럼 상황 설정에 관해 설명하겠다. 여러분이 있는 곳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산장이다. 실제로는 코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지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여러분은 그와 같은 산장에 찾아온 일곱 명의 손님이다. 관계는 현실 그대로, 한 연극에 출연하는 젊은 배우들로 한다. 산장을 찾은 이유는 무엇이든 상관없다. 기분 전환을 하러 왔다고 해도 좋고, 배역 연구를 위한 합숙이라고 해도 좋다. 각자 좋을 대로 설정할 것. 여러분은 그 산장에서 뜻밖의 상황과 맞닥뜨린다. 그것은 바로 기록적인 폭설이다. 그로 인해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고 만다. 눈의 무게 때문에 선로가 끊겨 통신망조차 이용할 수 없다. 설상가상으로 마을로 장을 보러 간 펜션 주인도 돌아오지 못한다. 여러분은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식사를 준비하고 목욕물을 데우며 함께 밤을 보낸다. 눈은 계속해서 내리고, 구조대는 오지 않는다. 현재 여러분이 놓인 상황은 대략 이렇다고 보면 된다. 그런 가운데 앞으로 일어날 일에 잘 대처하기 바란다. 그리고 그때 자신의 심리 상태와 각자의 대응 방식 등을 최대한 극명하게 마음에 새기도록, 그 모든 것이 작품의 일부로서 대본과 연출에 반영될 것이다. 모쪼록 이번 작품의 성공을 위해 전력을 기울여 주기 바란다. 그럼 건투를 빈다. 도고 신페이가.
추신, 실제로는 전화를 사용할 수 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오다 씨나 내게 연락할 것. 다만 전화를 사용하거나 외부 사람과 접촉하는 시점에 이 시도는 중단된다. 또한 그럴 경우 이번 오디션 합격은 즉시 취소된다.”
가사하라 아쓰코가 고개를 들었다.
“쓰여 있는 내용은 여기까지야.” (P21-23)
“그랬죠. 한마디로 곤경에 처한 햄릿이 된 거죠. 하지만 요 몇 년 동안 연극계 전체에 그런 경향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고전 지향이랄까요.”
“창작 대본보다는 대중에게 익숙한 작품을 공연하는 편이 수월하긴 하죠. 상업주의가 그 바탕에 깔려 있는 점은 양쪽 다 마찬가지지만요.”
혼다 유이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또 음미하듯이 위스키를 마셨다. 말투는 여전히 거칠지만, 이토록 열변을 늘어놓는 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역시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셰익스피어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구가 씨가 연기한 ‘오셀로’, 정말 좋았어요. 오디션 때 말이에요.”
“아아, 그거요. 간신히 쥐어짠 연기였죠.”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는 짐짓 겸손을 떨었다.
“혼다 씨는 그때 아마 ‘햄릿’을 연기했죠?”
“말도 마세요. 어처구니없게도 잔뜩 긴장해서는 말이죠.”
혼다는 떫은 감이라도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았어요. 다들 틀에 박힌 연기를 했지만 혼다 씨만은 빛이 났어요.” (P47-48)
침입자가 거의 등 뒤에 다가섰을 때까지도 가사하라 아쓰코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피아노 연주에 몰두해 있었다. 음악은 그녀에게만 들렸고, 정적 속에서 건반을 두드리는 소리만 나지막이 들렸다.
침입자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가사하라 아쓰코도 기척을 느꼈는지 연주하던 손을 멈췄다. 어쩌면 피아노 표면에 그림자가 비쳤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돌아볼 틈은 없었다. 침입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헤드폰 줄로 뒤에서 그녀의 목을 졸랐다.
가사하라 아쓰코가 잠깐 뭔가 소리를 내는 듯했다. 하지만 아마도 그녀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몸이 크게 뒤로 휘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그녀는 목을 파고 드는 헤드폰 줄을 벗겨 내려고 몸부림쳤다. 의자가 넘어지고, 그녀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러나 침입자는 힘을 늦추지 않고 계속해서 그녀의 목을 옥죄었다.
마침내 가사하라 아쓰코의 손발에서 힘이 빠지고 온몸이 축 늘어졌다. 그런 후에도 침입자는 그녀의 죽음에 쐐기를 박듯이 한동안 손의 힘을 늦추지 않았다.
그녀가 완전히 죽었다고 확신했는지 마침내 침입자가 헤드폰 줄을 손에서 놓았다. 그리고 입구 쪽으로 가서 방의 불을 끈 다음 가사하라 아쓰코의 목에서 헤드폰 줄을 벗기고 사체를 질질 끌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마룻바닥을 스치는 소리만 들렸다. (P57-59)
놀라서 달려온 다섯 명 앞에 다카코가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이런 게 바닥에 떨어져 있었어.”
아마미야 쿄스케가 손을 뻗으려고 하는데 다도코로 요시오가 낚아채듯 종이를 가져갔다.
“......뭐야.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뭐라고 쓰여 있는데?”
유리에가 물었다.
“설정 2. 가사하라 아쓰코의 사체에 관해서. 사체는 피아노 옆에 쓰러져 있다. 목에 헤드폰 줄이 감겨 있고, 목이 졸린 흔적이 있다. 옷차림은 빨간 스웨터에 청바지. 이 종이를 발견한 사람을 사체의 첫 발견자로 한다. 그렇게 쓰여 있어. 글자가 삐뚤빼뚤하네. 아마도 필적을 숨기려는 거겠지. 아무튼 아쓰코는 살해당한 걸로 설정된 모양이야.”
다도코로가 종이를 유리에에게 건넸다. 다른 사람들도 그녀 옆에서 종이에 적힌 글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군.”
아마미야 쿄스케가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 손바닥을 가볍게 쳤다.
“어제 얘기했던 것처럼 역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는 설정이었어. 하지만 아쓰코가 살해당하는 배역일 줄이야.....”
“그녀는 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 (P67-68)
계단을 올라가다 보니 문 바깥에 쪽지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 아까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어, 저게 뭐지?”
다가가서 쪽지를 떼어 봤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지면이 온통 눈에 덮여 있다. 발자국은 없다.”
“뭐지, 이거? 무슨 말일까......”
“상황을 설명하는 거겠죠. 아무래도 범인이 붙인 듯합니다.”
비상구가 안쪽에서 잠겨 있어서 범인이 이곳을 통해 도주했을 가능성은 일단 배제했지만, 보조 열쇠가 있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눈 위에 발자국이 없다면 그럴 가능성마저 지워야 한다.
나는 나카니시 다카코와 펜션 안으로 들어가서 세면실과 화장실 창문을 살펴보았다. 양쪽 모두 단단히 잠겨 있는 데다, 설령 열려 있다 해도 사람이 드나들 만한 크기는 아니었다. 빈방들도 들여다봤지만 마찬가지였다.
그 정도로 확인을 마치고 우리는 라운지로 돌아갔다. 이미 아마미야 교스케와 혼다 유이치가 돌아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도코로 요시오는 유리에와 단둘이 있을 기회를 잡았으니 일부러 느긋하게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 뻔하다. (P90-91)
“아까 문득 떠올랐는데, 이번 살인사건은 동기가 뭐라고 되어 있을까?”
혼다의 말에 다들 음식을 먹다 말고 그를 주목했다.
“동기라......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테이블을 응시하며 아마미야 교스케가 대답했다.
“그런 게 있겠어?”
다도코로 요시오가 반문했다.
“알다시피 이 게임의 목적은 눈에 갇힌 산장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각각의 등장인물이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명확히 파악하는 거야. 아침에도 말했지만, 범인 역할을 맡은 사람은 누구든 죽일 수 있을 때 죽였을 뿐이라고 생각해. 그러니 동기를 따져봐야 무의미할 것 같아.”
“하지만 동기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도 부자연스러워요.”
구가 가즈유키가 말했다.
“오히려 최우선적으로 화제에 오를 만한 일이죠. 가령 가사하라 아쓰코 씨가 죽어서 득을 보는 사람이 누구일까, 라든가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아마미야 교스케가 나섰다.
“우리가 이 연극 속의 인간관계를 모르는데 무슨 수로 살해 동기를 따지겠어요. 가사하라 아쓰코라는 배우가 살해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연기하는 인물이 살해당한 건데 말이죠.”
“도고 선생님의 지시 중에 ‘관계는 현실 그대로, 한 연극에 출연하는 젊은 배우들로 한다.’라는 대목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맞아, 나도 기억해.” (P113-114)
다도코로가 왔다 간 후 일단 방을 나왔던 유리에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어둠 속에서 몇 분이 지났다.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침대 다리가 삐걱거렸다.
잠시 후 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다도코로 요시오 때보다 한결 신중한 소리였다.
유리에는 스탠드 스위치를 켰다. 그러나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왜 이러지. 그녀가 어둠 속에서 중얼거렸다.
빛이 없는 상태에서 그녀는 문 앞까지 갔다.
“누구세요?”
대답이 없다. 대신 똑, 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두 번 들렸다.
다시 “누구세요?” 하며 유리에는 도어락을 풀고 문을 빼꼼 열었다.
그 순간 둔탁한 소리가 났고, 그와 동시에 유리에가 신음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문틈으로 검은 그림자가 미끄러지듯이 들어와서 그녀를 덮쳤다. 그녀는 팔다리를 버둥거렸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두 그림자가 겹쳤다.
잠시 후 유리에는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침입자는 아쓰코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몸을 질질 끌고 방을 나갔다. (P141-142)
“이 살인극은 연극이 아니야. 우리가 연극이라고 생각할 뿐, 죄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야 앞뒤가 맞아. 범인은 원래 꽃병을 쓰레기통에 버릴 생각이었어. 그런데 예상치 않게 피가 묻자 뒷마당에 버리고 대신 이 쪽지를 써서 쓰레기통에 넣은 거야. 요컨대 아쓰코도 유리에도 진짜로 살해당했다는 얘기야.”
“말도 안 돼!”
다도코로 요시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놀라서 녀석의 얼굴을 봤다. 핏기가 가신 얼굴에 입술까지 하얬다. 그 입술을 파르르 떨며 그가 말했다.
“그 입 다물어. 멋대로 지껄이지 말라고!”
“응, 그러지.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으니까.”
혼다 유이치가 그 자리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달리 설명할 방법이 있으면 해 보든지.”
“그만들 해! 소리만 꽥꽥 지르면 다야?” (P181)
“왜 안 된다는 거야? 왜 전화를 못하게 막냐고!”
두 사람의 손에서 풀려난 다도코로가 씩씩거리면서 소리쳤다.
“아직 희망이 있으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아마미야 쿄스케가 입을 열었다.
“희망? 무슨 희망?”
“어쩌면 이것도 대본일지 모른다는 희망. 혼다도 입으로는 실제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머리 한구석으로는 이렇게 생각할지 몰라. 이것 역시 도고 선생님이 짜 놓은 대본이 아닐까 하고.”
그렇게 말하고 나서 아마미야는 서 있는 혼다를 올려다보았다.
“그렇지? 아니야?”
혼다가 피식 웃으면서 눈썹 옆을 긁적거렸다.
“그런 생각이 전혀 없다고는 말 못 하겠지. 도고 선생님이잖아.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어.”
“맞아, 피 묻은 흉기도 빨간 털실도 우리한테 발견될 것을 전제로 가져다 놓은 소도구인지도 몰라.”
“난 그런 생각은 꿈에도 못 했는데.”
나카니시 다카코가 넋 놓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느새 눈물은 마른 듯했다.
“만약 도고 선생님이 계획한 일이라면, 도대체 왜 그런 일을 벌이는 거지?”
“그야 물론 우리를 혼란에 빠트리기 위해서지.”
아마미야가 대뜸 그렇게 대답했다.
“아쓰코가 죽었을 때, 종이에 뭐라고 적혀 있든 결국 우리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고 진지하게 임하지도 않았잖아. 선생님은 그럴 걸 미리 알고 우리를 본격적으로 추리극의 세계로 이끌려고 이런 장치를 해 놓았을지도 몰라.”
그러나 아마미야의 얘기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다도코로 요시오가 격렬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어쩔 건데? 앞으로도 살인범과 몇 시간이나 같이 있어야 한단 말이야.”
“내일이면 끝나. 어떻게든 내일까지만 버티면 된다고.”
“난 싫어, 전화할 거야.”
다도코로가 다시 일어서려고 하자 혼다가 그의 어깨를 위에서 꾹 눌렀다.
“오디션이 물거품이 되고 말텐데.” (P193-194)
아마미야 교스케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우선 범인은 이런 생각을 했을겁니다. 오디션에 합격한 사람을 모두 이 산장에 불러들인 다음 목표한 인물을 죽여야겠다고요. 그렇다면 범인이 맨 먼저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그야 우리에게 초대장을 보내는 일이었겠죠.”
다카코가 말했다.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편지에는 이런 단서가 있었어요. 이 일을 발설해서는 안 된다. 질문은 받지 않는다. 늦거나 빠진 자는 실격이다. 이 세 가지 단서 조항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우리가 여기 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범인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목적 달성에 집중할 수 있다는 얘기죠.”
“도고 선생님이 워낙 비밀주의자니까 그 정도 단서는 딱히 이상하다는 생각을 못 했어요. 선생님 취향이 꼭 이렇거든요.”
‘취향’이라는 말을 아마미야 교스케는 강조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제 가설을 조금 더 들어 보세요.”
목이 마른지 구가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범인은 도고 선생님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냄으로써 우리를 이 산장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그런데 범인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몇 가지 있었어요. 첫째, 여기에 도착한 우리가 도고 선생님이나 외부 사람들과 연락하지 않도록 하는 것. 둘째, 도고 선생님이 오지 않더라도 우리가 동요하지 않고 이 산장에 머물도록 하는 것. 셋째, 누군가 살해당하더라도 나머지 사람들이 소란을 피우지 않도록 하는 것.”
“그러고 보니 문제가 많네.”
혼다 유이치가 중얼거렸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범인은 이 문제점들을 단번에 해결하는 묘안을 마련했어요. 그건 바로 우편으로 배달된 지시서입니다. 지금부터 이곳에서 연극이 시작된다. 너희들은 등장인물이다. 외부와의 연락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배역을 소화한다.... 그야말로 도고 선생님다운 이 지시는 범인이 치밀하게 세운 책략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일단 첫 번째 문제였던 외부와의 연락을 두절시켰죠. 두 번째 문제도 해결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요. 그리고 세 번째 문제 말인데, 범인은 가사하라 아쓰코 씨를 살해한 후 사체를 우물 속에 숨겼습니다. 그러고서 레크레이션 룸에 가사하라 씨가 살해된 것으로 한다는 내용의 쪽지를 남겨 놓았어요. 우리는 그 쪽지를 읽고도 누구 하나 놀라거나 소동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연극이 시작된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죠. 살인이 일어났음에도 아무도 뜻밖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겁니다. 그건 책장에 꽂혀 있던 몇 권의 추리 소설이 우리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켰기 때문입니다.”
“그 책에도 범인의 의도가 숨어 있었다는 얘기구나.”
나카니시 다카코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렇게 볼 때 이 모든 일은 사실은 범인이 주도면밀하게 계획한 것입니다. 가사하라 아쓰코 씨가 살해당했을 때 우리는 함께 출입구를 조사했어요. 그때 출입구마다 ‘지면이 온통 눈에 덮여 있다. 발자국은 없다.’라고 쓰인 쪽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건 우리의 의식을 시체를 숨긴 우물에서 멀어지도록 하려는 장치였다고 해석할 수 있어요.” (P206-209)
“그건 각자가 판단할 일이겠죠. 우리 눈에는 불합리해 보이지만 범인으로서는 중대한 의미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불합리하다는 점에서 의문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죠?”
아마미야가 물었다.
“3박 4일이 지난 후 범인은 뭘 어쩔 작정일까요. 아마도 우리는 이 산장을 나서는 순간 도고 선생님에게 전화를 하겠죠. 그러면 사실이 낱낱이 밝혀질 겁니다. 뭔가 사정이 있어서 선생님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도쿄에 도착했을 때 가사하라 씨와 모토무라 씨가 보이지 않는다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겠죠. 누군가 경찰에 신고할 테고, 그러면 저 우물도 조사하게 될 겁니다. 만일 거기서 사체가 나오면 우리는 전원이 용의자로서 경찰의 수사 대상이 됩니다. 범인이 그 점을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경찰이 범인을 특정하지 못할 거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했을 리는 없습니다. 그럼 도주할 계획일까요? 얼굴과 이름이 알려진 상태에서 대체 어디로 도주하겠습니까?”
무대에 설 때의 버릇이 나오는지 후반으로 갈수록 구가의 말에 억양이 붙었다. 본인도 그런 사실을 깨달았는지 구가는 말을 마치고 나서 짐짓 헛기침을 한 번 했다. (P222-223)
라운지. 오전 8시 20분.
모두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이윽고 한 명이 슬금슬금 일어났다.
그자는 잠시 우리를 둘러보면서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 천천히 엉덩이를 들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누워 있는 아마미야 교스케에게 다가갔다.
그자가 아마미야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은 정말로 잠이 들었는지 확인하려는 것일 터이다.
아마미야 교스케는 정말 잠이 든 듯했다.
그자는 아마미야 교스케의 목에 양손을 댔다.
그러나 곧바로 힘을 주지는 않았다. 뭔가를 기다리는 듯이 그 자세를 유지했다.
20초쯤 지났을까. 그자는 천천히, 체중을 실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
순간 아마미야 교스케가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그는 범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비틀었지만 범인은 그가 저항하지 못하도록 그에게 올라탄 채 몸통을 조였다. 아마미야는 마치 허공에서 뭔가를 잡으려는 것처럼 손발을 허우적거리더니 급기야 경련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움직임이 멈췄다.
범인도 한동안 그 자세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몸을 일으킨 범인은 아마미야 쿄스케의 두 다리를 잡더니 가사하라 아쓰코와 모토무라 때처럼 질질 끌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 희생양은 여자들에 비해 상당히 무거운 듯했다. 그럼에도 범인은 라운지와 식당을 지나 주방으로 들어갔다.
약 10분 후, 범인이 라운지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종이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그는 그걸 아마미야 쿄스케가 누워 있던 자리에 놓았다. 그리고 스테레오로 다가가 스위치를 조작했다.
일련의 작업을 마친 그자는 조금 전 자신이 누워 있던 자리에 다시 누웠다. (P275-276)
“별 것 아닙니다. 성냥개비를 몰래 두 사람의 몸 위에 올려 놓았지요. 한 개는 나카니시 씨의 머리 위에, 또 한 개는 다도코로 씨의 어깨 위에.”
“왜요?”
다카코가 물었다.
“범인을 특정하기 위해서죠. 몸을 일으키면 성냥개비가 떨어질 테니까. 만약 둘 중 한 사람이 범인이라면 표시가 나겠죠. 물론 백 퍼센트 확실한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몸을 뒤척이는 통에 성냥개비가 굴러떨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하고 구가 가즈유키가 말을 이었다.
“아까 음악 소리에 눈을 뜨자마자 살펴보니 두 사람 모두 얌전히 잤는지 성냥개비가 제가 올려놓은 상태 그대로 있더군요. 즉, 두 사람은 범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럼, 하고 나카니시 다카코가 혼다를 바라보았다. 다도코로도 덩달아 혼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직 나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
혼다가 다소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일 수도 있잖아.”
구가 가즈유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무의미한 저항은 그만해요. 내가 진상을 알게 된 시점에 이 일은 모두 끝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정말이야, 유이치? 네가 범인이야?”
다도코로 요시오가 관자놀이를 파르를 떨며 물었다. 혼다 유이치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부답이었다.
“네, 혼다 유이치 씨가 범인입니다.”
구가 가즈유키가 그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그걸 깨달은 건 어젯밤이었어요. 성냥개비를 올려놓은 건 말하자면 그걸 확인하는 차원에 불과했고요. 하지만 다도코로 씨. 내 얘기를 조금 더 들어 봐요. 이 사건은 한마디로 설명하기 힘들 만큼 복잡합니다.”
“어떻게 복잡한데요?”
그 질문에 구가가 주머니에서 검은색 조그만 상자를 꺼냈다.
“이게 뭔지 알아보시겠습니까?”
혼다가 아, 하고 입을 반쯤 벌렸다. 그 모습을 멀뚱멀뚱 바라보던 다도코로 요시오는 “마이크 같은데.” 하고 중얼거렸다.
“도청기입니다.”
“도청기요?”
나카니시 다카코가 튀듯이 다가와 바로 앞에서 그 물체를 바라보았다.
“이게 어디 있었어요?”
“라운지 선반 맨 아래 칸에 테이프로 고정되어 있더군요.” (P283-285)
“사건은 삼중 구조였습니다.”
구가 가즈유키가 말했다.
“모든 것이 연극이라는 상황 속에서 실제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이게 아마도 아사쿠라 마사미 씨가 세운 이중 구조의 복수 계획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혼다 유이치 씨가 그 상황마저 연극으로 꾸민 거죠. 그래서 삼중 구조입니다.”
“네? 그럼 결국 전부 연극이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살해되는 역할을 맡은 세 사람의 협조를 얻어서 혼다 씨가 꾸민 연극이었습니다. 관객은 단 한 명, 말할 필요도 없이 아사쿠라 마사미 씨죠.”
“어떻게 이런.....”
할 말을 잃은 다도코로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동작을 멈췄다.
그때 나카니시 다카코가 숨을 헐떡이며 레크레이션 룸으로 들어왔다.
“세 사람과 연락이 닿았어. 역시 살아 있었어.”
“아아.”
다도코로 요시오가 신에게 감사라도 드리듯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마주 잡았다.
“다행이다. 아아, 다행이야. 살아 있었어. 정말 다행이야.”
“세 사람 모두 곧장 이리로 올 거예요. ‘페어 하우스’가 요 바로 옆에 있는 펜션이더라고요. 세상에! 유리에가 전화를 받았는데, 구가 씨가 모든 걸 밝혀냈다고 말했더니 깜짝 놀라던걸요.” (P297-298)
“도대체 왜......”
다도코로는 도무지 납득이 안 간다는 듯이 몇 번이나 고개를 내저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살인극을 보려는 것이었습니다. 혼다 씨가 복수를 실행하고, 그 장면을 아사쿠라 씨가 본다는 거죠. 전에 토론한 적이 있죠? 범인이 왜 이런 장소를 선택했는지에 관해서요.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혼다와 아사쿠라 마사미를 보았다.
“내부를 보여 주실 수 있을까요?”
“괜찮겠어?”
혼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응.”
나는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카니시 다카코와 다도코로 요시오도 내 뒤를 따랐다.
“우아......”
다카코는 말문이 막히는 듯했다.
중간 벽을 제거한 창고는 복도처럼 길쭉한 모양이었다. 그 안으로 끝까지 들어가니 삼면의 벽에 폭이 딱 얼굴 정도인 네모난 구멍이 나 있었다. 거기에 눈 위치를 맞추려면 쭈그려 앉아야 하지만, 휠체어에 앉으면 꼭 들어맞는 위치일 것이다.
“어머, 유리에의 방이 보여!”
오른쪽 벽에 난 구멍을 들여다보던 나카니시 다카코가 외쳤다.
“그렇구나! 매직미러 장치야.”
“이쪽에서는 라운지가 보여요.”
정면의 구멍을 들여다보고 내가 말했다. 복도 난간 너머로 라운지와 식당 일부가 보였다. 레크리에이션 룸과 유리에의 방 사이에도 거울이 붙어 있는데, 그것도 역시 매직미러일 것이다.
“그리고 식당은.... 라운지 쪽에 있는 테이블만 보이는군요. 하지만 우리가 저기 앉아 있었으니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테이블에서 각자 앉는 자리가 어쩐지 정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것도 혼다 유이치가 교묘하게 유도한 듯했다.
“이 구멍은 스피커 뒤쪽으로 나 있는 것 같은데.”
레크리에이션 룸을 들여다보며 다도코로 요시오가 말했다.
어슴푸레한 공간 속에서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바닥에 펜 라이트가 떨어져 있기에 주워 들고 켜 보았다. 헤드폰과 튜너가 눈에 들어왔다.
“도청기용인가 봐요.” (P310-311)
“아마미야도 연락했더라. 다들 걱정한다고.”
“아마미야? 그 친구가 연락했어?”
“응. 아쓰코와 유리에게도 전해 달라고 얘기해 두었으니까 조만간 면회하러 올지도 몰라.”
아마미야 교스케도 모토무라 유리에도 살아 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마도 그들은 타이어에 펑크가 나서 도중에 발이 묶였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한 짓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복수할 요량으로 전화해서 그런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 리얼한 연기에 나는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
한편 나는 의사에게 내 몸 상태에 관해 듣게 되었다. 외상은 대단치 않지만, 하반신의 움직임을 관장하는 중추 신경이 망가졌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허리 아래로는 근육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하반신이 없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며칠을 계속해서 울었다. 자신의 행동에서 비롯된 일이라고는 해도, 그 경위를 생각하니 마음속에서 증오심이 끓어올랐다. 물론 그 세 사람에 대한 증오다. 나는 엄마에게 그들의 면회를 철저히 막아달라고 했다.
퇴원은 의외로 빨랐지만, 휠체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혼다 유이치가 찾아온 것은 마침 퇴원하는 날이었다. 한동안은 아무도 만나지 않을 작정이었고, 특히 극단 사람들의 얼굴은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라면 만나 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다 유이치는 누구보다 내 연기를 높이 평가해 준 사람이고, 늘 친절하게 대해 준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게 호감을 품은 듯한 느낌도 막연히 있었다. 크리스마스에는 목걸이를 선물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를 연애 상대나 결혼 상대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저 좋은 친구일 뿐이었다.
혼다 유이치는 꽃다발과 클래식 CD, 만화책, SF 액션 영화 비디오를 가져왔다. 하나같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이런 것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기에 눈물이 핑 돌만큼 기뻤다.
그는 내 다리에 관한 일이나 스키, 연극과 오디션 같은 화제는 건드리지 않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풀어 놓았다. 아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왔을 것이다. (P324-325)
나는 갓 퇴원한 병원에 다시 가서 응급 처치를 받았다. 한심하게도 칼날이 동맥에는 미치지도 않았으며 피부에 상처를 내는 데 불과했다. 의사는 그대로 내버려 두어도 피가 멈췄을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자살조차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혼다 유이치와 단둘이 있게 되자 그는 도쿄로 돌아가려고 역까지 갔다가 아무래도 내 표정이 마음에 걸려서 다시 돌아왔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했다. 세 사람이 집으로 찾아왔던 일, 그리고 자살하려고 했던 이유를, 그는 나의 고통과 슬픔, 분노를 이해해 주었다. 휠체어에 앉은 내 무릎에 얼굴을 묻고 느껴 울기까지 했다. 세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 줄 거야. 마사미 앞에 무릎을 꿇리고, 마사미가 납득할 때까지 용서를 빌도록 하겠어, 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혼다 유이치에게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사과한다고 해서 내 미래를 돌이킬 수는 없으므로, 설령 그들이 한때 죄책감에 시달린다 해도 시간이 흐르면 나를 잊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빛나는 미래가 있으니까. 나는 혼다 유이치에게 말했다. 너도 지금은 이렇게 애달파하지만, 언젠가는 장애가 있는 여자 따위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고, 어쩌다 떠오르면 ‘그런 일도 있었지’하며 한숨이나 내쉬고 말 거라고, 내 말에 그는 얼굴을 붉히며 힘주어 말했다.
“나를 못 믿는 거야? 나는 언제까지고 마사미 곁에 있을 거야. 마사미가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게.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P326-327)
“마사미가 여전히 숨기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의 말에 아사쿠라 마사미가 놀란 듯 그를 돌아다봤다.
“난 숨기는 거 없어.”
“아니, 난 알고 있어. 그러니까 마사미가 왜 타이어에 그런 장난을 쳤는지 이해할 수 있었고.”
그가 나를 향해 있던 시선을 천천히 옆으로 옮겼다.
“마사미는...... 교스케를 좋아하고 있어.”
“컥.”
목이 메는 듯한 소리를 낸 사람은 나카니시 다카코였다. 그러나 나 역시 그녀 못지않게 놀랐다.
“유이치, 그건.....”
“괜찮아. 숨길 필요 없어. 내가 반한 여자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으니까.”
혼다 유이치가 자조적으로 웃으면서 나를 봤다.
“구가 씨는 그녀의 줄리엣 연기를 칭찬했죠?”
“네.”
“하지만 그 멍청한 심사 위원들은 그걸 알아보지 못했어요. 유리에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어서 말이죠. 물론 그게 유리에의 잘못은 아닙니다. 자, 문제는 왜 마사미가 굳이 줄리엣을 선택했느냐 하는 건데요.”
그 이유를 알 리 없는 나는 고개를 갸유뚱했다.
“그건 바로 교스케가 로미오였기 때문입니다.”
나도 모르게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듣고 보니 그랬다.
“마사미는 아무 말 안 했지만.”
그가 양손을 그녀의 어깨에 살포시 얹었다.
“그런 게 꿈이 아니었을까? 좋아하는 남자랑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기하는 거 말이야. 이렇게 말하기는 뭐하지만, 마사미의 캐릭터로 볼 때 줄리엣 배역이 마사미에게 돌아오기는 힘들었을 거야. 뭐, 그 점이 또 내 취향이기는 하지만.”
아사쿠라 마사미는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모습으로 보아 혼다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런 만큼.”
혼다가 다시 인상을 썼다.
“너희가 마사미에게 한 짓은 절대 용서할 수 없어. 특히 교스케 너 말인데, 로미오 역에게, 그것도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에게 ‘너는 줄리엣 역에 어울리지 않아’라는 말을 듣는다면 충격이 얼마나 크겠어. 거기에 교스케와 약혼했다는 소문이 떠도는 유리에나 아쓰코까지 동조한다면 말이야.”
“하지만.” (P334-335)
“미안해, 용서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 하지만 어떻게든 갚게 해 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테니까. 뭐든 말만 해.”
가사하라 아쓰코와 모토무라 유리에도 그녀 앞에 쓰러져 흐느꼈다.
“세 사람 다 연극을 그만두겠대.”
혼다가 말했다.
“그리고 너를 위해 뭔가 하고 싶대.”
“그래?”
아사쿠라 마사미가 세 사람을 내려다보며 반문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너희들이 내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어.”
세 사람이 동시에 얼굴을 들었다.
“왜냐하면,”
아사쿠라 마사미가 말을 계속했다.
“우선은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야. 이제 겨우 살인범이 될 뻔한 위기에서 벗어난 처지니까.”
“마사미......”
혼다 유이치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사쿠라 마사미는 자신의 어깨에 놓인 그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너희들, 연극을 그만두어서는 안 돼.”
그녀가 세 사람에게 말했다.
“연극을 한다는 건 참 멋진 일이야. 새삼 그런 생각이 드네.”
지금까지 감정을 꾹꾹 누르고 있던 아사쿠라 마사미가 끝내 눈물을 흘렸다.
내 옆에 서 있던 다도코로 요시오도 훌쩍거렸다. 나카니시 다카코는 아예 엉엉 울고 있다.
이런 모질지 못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이런 신파극으로 그 눈 높은 관객들을 만족시킬 수 있겠어? 게다가 탐정 역인 내 존재가 완전히 빛을 잃었는데 말이야.
내가 이 추리극의 마무리를...... 완벽하게 하려고 얼마나 애를......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눈시울이 시큰거리잖아! 이런 일로 울다니, 바보같이..... 이 정도 일로 울면 신파라고, 신파. 울지 마, 울지 말라고, 울지 말란 말이야.
어느 틈에 다가왔는지 나카니시 다카코가 내 옆에 서서 “여기요.”하며 흠뻑 젖은 손수건을 내밀었다. (P343-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