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판단중지epoche
사진은 시간과 공간을 정지시킨다. 시간과 공간이 정지된다는 것, 그것은 모든 판단이 정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판단이 정지된 사진 한 장은 판단을 중지하고 인식의 전환을 불러일으킨다. 현실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자신들이 본 현실은 한 단편이고, 각자는 다른 말들을 하게 되어 항상 오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철학에서 에포케(epoche)는 ‘판단중지’를 뜻하는 말이다. 모든 사물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이므로 일률적으로 어떠하다고 판단할수 없다는 것이 이들 철학자들의 주장이다. 우리가 본다는 것은 일정부분, 단편적인 사실을 보고 있기 때문에 사물의 정확한 판단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사물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서로 다른 판단을 할지라도 그들의 판단을 존중해주는 배려 또한 가져야겠다. 아마도 판단중지는 독단적인 인식으로 인한 폐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필요해 보인다.
고정관념과 선입관으로 우리는 사람들을 쉽게 판단한다. 내가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도 쉽게 설명할수 없는데, 내가 아닌 누군가의 다른 사람들을 나의 기준으로 그를 판단하는 것이 가능할까. 현재의 시간 속에서의 관계와 환경에 의해 그를 판단할 뿐, 시간에 따라 계속 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환상이나 편견은 사실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손바닥만한 우주에 불과하다. 사진은 모든 일체의 판단을 중지시키고 프레임 안에 둔다. 사각 프레임안에 고정된 판단은 보는 이에게 다른 인식을 받아들이게 한다. 사진을 다양하게 받아들인다는 것, 물론 작가가 의도하는 것도 있겠지만, 관객은 자신의 경험치에 의해서 받아들인다. 모든 구도의 공식에서부터 카메라의 가치 판단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편견과 선입견에 의해 만들어진 관례적인 공식들은 잠시 중지되어야 할 것이다. 때론 심사위원들이 가지고 있는 심사기준도 판단중지되어야 할 것이다. 규정지어진 사진은 그야말로 설명적이다.
새옹지마(塞翁之馬)에 얽힌 이야기처럼 판단과 삶은 연관되어 있고, 무수히 많은 판단속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판단은 구속적이다. 후설은 의식(노에시스)과 대상(노에마) 사이에서의 관계를 끊는 것, 판단중지를 통해서 경험을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분리시킨다. 대상에 대한 당연시된 생각을 괄호(판단중지)속에 묶어두고 판단을 보류한다는 것이다. 사진의 프레임은 아마도 후설이 말한 괄호치기(Einklammerung)가 아닐까.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대상이 괄호안에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사유와 인식의 과정을 가지게 되고, 사진 또한 그 과정을 거친다. 아날로그 필름의 경우 필름을 현상(Develop), 정지(Stop), 정착(Fix)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우리의 사유의 과정또한 현상이란 사유의 확산은 정지액에 넣어져, 판단은 정지되고, 정착과정을 통해서 고정되어진다. 시시각각 변화되어 가는 삶은 카메라에 의한 사진이라는 도구는 판단을 정지시키는 예술이 아닐지 모르겠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서 판단중지된 이미지를 보고 있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질지는 시간이란 흔적이 정지액과 정착액에 고정되어지는 순간 박제로서 내게 남겨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