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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카 고타로의 <골든 슬럼버>

영화 <골든 슬럼버> 2009년

by 노용헌

“오, 가네다. 드디어 나온다.” 히구치 등 뒤에 있는 손님이 나지막이 중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가로로 길쭉한 텔레비전 화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차들이 느릿하게 굴러 들어왔다. 순간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눈이 내리는 건가 싶은 착각이 들었지만, 가만히 보니 색종이 쪼가리였다. 흩날리는 반짝이 종이와 테이프가 시골길 퍼레이드 냄새를 풀풀 풍겼다. 그래도 화려하게 끓어오르는 들뜬 기분만큼은 제대로 전달됐다. 앞서 길을 안내하는 순찰차가 카메라 앞을 느릿하게 가로질렀다. 그리고 뒤이어 차체가 기다란 오픈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온다, 나온다. 가네다.” 또다시 뒷자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텔레비전이 높은 곳에 있다 보니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아나운서가 흥분한 목소리로 “가네다 총리입니다.”라고 연이어 외쳤다.

오픈카 뒷자석에 앉아 손을 흔드는 총리가 화면에 비쳤다. 카메라가 줌인으로 그의 옆얼굴을 크게 잡았다. 쉰이라는 젊은 나이에 총리가 된 인물이니만큼 강한 카리스마와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짙은 눈썹과 높은 코, 번쩍번쩍 빛나는 커다란 눈에 차분한 동작이 그윽한 멋을 풍기는 잘생긴 중년 배우를 연상케 했다. 거기다 세련된 청결감과 호락호락하지 않은 교활함까지 엿보였다. 그가 소속된 자유당 의원들이 “고생을 안 해봐서 흰머리가 없다.”라고 야유했던 말마따나 덥수룩한 머리는 새까맸고, 일자로 보이는 입술은 웃는 건지 앙다문 건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옆에 앉은 날씬한 부인은 온화하고 차분해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훌륭한 가문 출신임을 느끼게 했다.

히라노가 텔레비전 속 가네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 저 사람한테 꽤 기대가 커.”

히구치의 뇌리에 얼마 전 본 텔레비전 영상이 지나갔다. 중후하고 노련한 상대 후보와 토론하며 대치하던 모습, 학창 시절 럭비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는데 양복 차림이 어찌나 맵시 나는지 굳이 몸매를 따지자면 섬세하고 가냘팠고, 태도와 언동은 부드러웠지만 상대를 꿰뚫어 보는 시선은 날카로웠다. “아직 젊은 사람이라 지나치게 이상론을 펼친다.”라는 핀잔을 듣자, “저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가가 됐습니다.”라고 조용히 말한 사람이었다.

“참, 남편은 그러던데.” 히구치가 말했다.

“저런 미인한테 장가가서 행복하겠다고?”

“아니, 그게 아니라.” 히구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라를 위해서라면 자기 인생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정치가는 얼마 없다고.”

“그렇겠지. 정치가가 죽게 되는 건. 병에 걸리거나 비리가 들통 나 자살하는 경우뿐이니까.”

“가네다가 그 얼마 없는 사람 같대. 우리 남편이.”

“동감이야.”

처음에 히구치는 텔레비전에 비친 그 물건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달팽이 못지않게 느릿느릿 나아가는 오픈카 위로 하얀 물체가 낙하했다. 마치 빌딩 간판 위에서 숨고르기를 하던 새가 퍼레이드를 향해 하강하는 듯했다. 하지만 새치고는 지나치게 꼬리가 길었다. 색종이 쪼가리나 종이테이프일 거라고 어렴풋이 생각하며 히구치는 멍하니 화면을 지켜보았다.

텔레비전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비딱하게 떨어지던 물체가 오픈카 쪽으로 다가간다.

“무선 비행기?”

그렇게 중얼거린 이가 히라노였는지 등 뒤 손님이었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자신이 속으로 뱉은 말인지도 모른다.

느리게 프로펠러를 돌리며 허공을 헤매듯 고도를 낮추는 물체. 그것은 헬리콥터 모형의 무선조종기였다. 갑자기 텔레비전에서 짧은 파열음이 들렸다. 화면 중앙에 하얀 연기가 번진다. 영상이 일그러졌다.

텔레비전이 고장 난 거라고 생각했다. 영상이 돌아왔다. 큰길에 연기가 가득하다. 그리고 연기 사이로 갈팡질팡하며 달아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불길이 흔들린다.

메밀국수 집은 일순간 쥐 죽은 듯 침묵에 휩싸였다.

“폭탄입니다. 폭탄입니다.”

화면에는 그렇게 정신없이 반복하는 아나운서 목소리만 들렸다. (P20-22)

“다나카 군. 방금 찾아온 문병객. 어떤 놈인지 알아?” 호도가야가 말했다.

“제가 어떻게 알아요?”

“들으면 아마 놀랄걸?”

“그럼 전 안 들을래요.”

회사에 다녔다면 정년퇴직을 하고도 남을 나이에, 그다지 내놓고 자랑할 만한 일을 해온 것 같지도 않은데, 그는 입만 열면 수상쩍은 과거를 떠벌리고 싶어 했다. 어떤 범인과 술친구였다는 등 큰형님이 종종 일거리를 맡겼다는 둥 순 거짓말 같은 무용담을 주워섬겼다. 실제로도 험악한 인상의 문병객이 많긴 했지만, 하도 “대단한 문병객이 왔다 갔어.” 하며 자랑하는 통에 아주 진저리가 난 터였다.

그때 병실 입구에서 누군가 목발을 짚은 채 노크를 했다. 옆방 독실에 입원한 소년이었다.

“어, 웬일이야?” 대답한 것은 다나카가 아니라 호도가야였다.

“다나카 군.” 소년이 입을 열었다. 중학생한테 군이라는 소리를 듣다니. 아니꼽긴 하지만 친근함의 표현이려니 하고 참아준다. “텔레비전 봤어?”

“텔레비전?” 다나카는 시선을 돌려 사이드보드에 얹힌 텔레비전을 본다. 리모컨을 들어 전원을 켠다. 정액카드로 언제든 볼 수 있는 시스템으로 이어폰을 꽂으면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무슨 일인데.”

“사건이야. 사건.” 하고 말하더니, “이거 따분한 입원 생활도 안동안 견딜 만하겠어.” 라며 웃고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사건이라니 무슨 소리야, 하는 다나카의 눈에 심각한 표정의 남자가 보인다. 마이크를 든 사람의 이마에 붕대가 감겨 있다. 어디서 많이 본 장소라고 생각한 찰나, 센다이 시가지라는 걸 깨달았다. 남북으로 뻗은 히가시니반초 거리였다.

“맞다, 오늘 퍼레이드 하지?” 옆 침대의 호도가야가 말했다. “가네다 오잖아. 가네다 총리.”

“아아.” 하고 대답한 순간, ‘가네다 총리 암살. 무선조종 헬기 폭탄’이라는 글자가 날아든다. 뭐? 하고 눈을 의심하며 반사적으로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이제야 간신히 잠잠해졌습니다만, 도로는 여전히 매우 혼잡합니다.” 부상을 당한 모양인 텔레비전 속 아나운서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나카는 무의식중에 텔레비전에 빠져들었다. 문득 돌아보니 호도가야도 텔레비전 앞에 이어폰을 꽂고 앉아 있었다.

방송은 혼잡과 흥분. 자동차 경적과 경찰의 성난 목소리로 가득했다. 결코 정리된 보도는 아니었지만 10분 정도 듣다 보니 상황 파악이 됐다. (P26-27)

“그, 자폭테러 후에 미국에서 곧바로 애국법이 생겼잖아.” 중학생은 청산유수였다.

“뭔가 좋은 거 같은데?”

“이것도 이름 붙이는 기술 문제야. 애국이라니까 얼핏 듣기에 그럴싸하지만 들여다보면 웃기는 소리지. 정부가 사람들의 통화 기록과 이메일 내용까지 죄다 본다는 거니까.”

“무슨 소리야, 그게?”

“전에는 의심스러운 놈이 있으면 수사영장을 발급받아서 정보를 입수했지만, 이제는 어디에 어떤 테러범이 숨어 있을지 모르니까 아예 전 국민의 정보를 깡그리 모아다 뒤질 수 있게 됐다는 소리야. 세상이.”

“미국, 자유를 존중하는 나라 아니었냐?” 다나카는 비꼬듯 말해본다.

“테러를 방지할 수만 있다면 정부의 감시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진 거 아닐까? 사실 일본만 해도 센다이에서 감시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선선히 받아들였잖아.”

“그렇게까지 감시받는다고 생각은 안 하지. 살인범만 잡힌다면 감수할 수 있다고.”

“뭐, 그런데 내 생각엔 말이지, 그 기루오 사건 날조된 거 같아.”

“날조?”

“감시 시스템 도입하려고 꼼수를 쓴 거라고. 겁을 줘서, 분명해. 겁만 좀 주면 어지간한 일은 두루뭉술하게 받아들이는 게 이 나라 국민성이니까. ‘놀랐어요?’ 라니, 대사에 너무 냄새가 나지 않아? 만화도 아니고 말이야.”

다나카는 웃었다. 중학생인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사가 그리 단순한 게 아니란다. “국민들이 그렇게 데데한 줄 알아?”

“실제로 도입됐잖아.” (P35-36)

퍼레이드 시작 전, 북적대는 인파 속에서 남보다 머리 하나는 큰 거대한 체구의 남자가 마스크를 쓴 채 휴대전화를 어색하게 조작했다. 역 앞 빌딩 꼭대기 전망대에서 양복을 입은 남자 몇 명이 지도를 펼쳐놓고 있었다. 현장에서 수십 미터 떨어진 뒷골목에서 흰색 자동차에 탄 두 남자가 말싸움을 했다. 남자 둘이 육교 위에서 치한 이야기를 했다. 한 사람은 어느 모로 보나 변장을 한 것 같았다. 폭발 직전 인파 속에서 젊은 여자가 별안간 팔을 흔들었는데 그게 무슨 신호처럼 보였다.

제가끔 모순되는 것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각종 목격담이 방송국으로 몰려들었다.

“사실인지 거짓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내보내면 더 혼란스러워지지 않을까요?” 보조 진행자로 나온 여자 탤런트가 묻자 사회자는 우물대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바로 해설자 한 사람이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니, 너무 조심스럽게 접근하기 보다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시야를 넓히는 게 중요합니다. 지나치게 신중하다 보면 늑장 보도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하며 거들었다. 본심을 말하자면 “시청률만 오른다면야 진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일 것이다.

노동당의 아유카와 마코토도 기자회견을 시작했다. 총리 선거에서 믿을 수 없는 패배의 쓴잔을 마셨지만, 의원 수로는 여전히 가네다가 속한 자유당을 압도하는 전후 일본을 끌어온 여당 당수이니만큼 카메라 앞에서 위풍당당하고 지극히 차분했다. “가네다 총리의 명복을 빕니다.” 하고 얌전히 입을 뗀 아유카와는, “노동당이니 자유당이니 따질 때가 아닙니다. 한시라도 빨리 범인을 체포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P37)

2년 전, 인기 절정의 아이돌 가수가 강도를 당한 사건이 있었다. 고향이 센다이라 휴가 때 몰래 돌아와 임대한 아파트에서 쉬곤 했던 그녀가 혼자 집에 있다가 강도의 습격을 받았고, 그때 배달을 하러 우연히 그곳에 방문한 이가 아오야기 마사하루였다.

인터폰을 눌러도 대답이 없자 짐을 도로 가져가려고 부재중 연락표를 기입하던 아오야기는 문 안쪽에서 쿵쾅대는 소리와 여자 비명 비슷한 소리를 들었다. 환청인가 싶었지만 심장이 두근거려 한 번 더 인터폰을 눌렀고, 기척이 없자 쭈뼛거리며 현관문 손잡이를 돌렸다. 잠기지 않은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웬 남자가 여자를 덮치고 있었다. 아오야기는 허겁지겁 범인에게 달려들었다.

“그 빌라에 아이돌 린카가 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남자 리포터가 질문한다.

“아니요. 몰랐습니다.” 아오야기는 겁먹은 듯 대답한다.

“언제 알았죠?”

“아, 저기.” 그는 당황해서 우물대며 “저는 그런 데는 먹통입니다. 텔레비전을 잘 안 보거든요.” 하며 몸 둘 바를 몰라 한다.

리포터들이 웃는다. “대단히 유명한 스타예요. 정말 텔레비전을 안 보시나요?” (P41-42)

오전 8시에 열린 사사키의 회견에서 새로운 정보가 나왔다.

하루 전 정오가 지난 시각, 다시 말해서 가네다 총리의 퍼레이드와 교과서 창고 빌딩 앞에서 벌어진 폭발사건 직후, 바로 옆 좁은 차도에서도 작은 폭발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자동차가 불타올랐고 근처 콘크리트 담이 무너졌다. 처음에는 무선조종 헬기 폭파의 여파인가 싶었지만 조사 결과 차 안에서 폭발이 일어났음이 밝혀졌다.

운전석에서는 남자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남자 사체 머리에서 총에 맞은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현재 신원을 조사 중입니다만 타다 남은 면허증을 확인한 결과. 센다이 시 아오바 구에 거주하는 모리타 신고 씨로 밝혀졌습니다. 모리타 씨는 현재 도주 중인 것으로 알려진 아오야기의 대학 동기로 확인되었습니다.”

“아오야기 마사하루를 용의자로 단정한 결정적 단서는 뭡니까?”

기자가 질문했다.

“어제 폭파사건 직후 교과서 창고 빌딩 주변에서 경찰이 거동이 수상한 남자를 발견했습니다. 불심검문을 시도했으나 그대로 달아났고, 곧장 출동한 다른 경찰과 함께 추적했으나 또다시 도주했습니다.” (P45)

20년 전, 센다이에서 가네다 사다요시 총리 암살사건이 일어났을 때 매스컴은 지극히 당연하게도 야단법석을 떨었다. 이제 와 차분히 돌아보면 도가 지나친 광적인 소란이었다. 텔레비전과 신문은 경찰청 발표를 거르지 않고 내보냈고 진위가 불확실한 일반인 제보까지 줄줄이 방송하며 시청자들을 선동했다. 아오야기 마사하루를 범인으로 지목한 근거는 상황 증거뿐이었지만, 기이할 정도로 초기부터 실명이 텔레비전에 노출되었다. 놀라운 일이지만 지금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니 그러려니 할 뿐이다.

이 조사서를 쓰기 전에 당시 상황을 알아본 결과, 일개 논픽션 작가인 필자조차도 그 일이 얼마나 이상했는지 알 수 있었다. 평화의 시대에는 누구나 정론을 뱉어낸다. 인권을 주장하고 정공법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폭풍이 일면 이성을 잃는다. 무엇이 옳은지 생각할 여유조차 없이 소동에 휩싸인다. 다 그런 법이리라. (P69)

“모리타. 이해가 잘 안 돼.” 아오야기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우물거린다.

“빚을 갚느라 허덕이고 있는 나에게 올해, 얄궂은 연락이 왔어. 뭐, 수상쩍은 거래인 거지. 모종의 일에 협력해준다면 빚을 없애주겠다는 꾐이었어.” 모리타는 수시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모종의 일?”

“널 치한사건 현장에서 달아나게 만들거나 이렇게 어떤 장소에 데리고 오는 일이야.”

“이게 일이라고?” 아오야기는 차 안을 살핀다. 손에 들고 있던 페트병이 눈에 들어온다.

“나도 자세한 내용은 몰랐어. 처음에는 센세키센 전철을 타고 가다 널 찾아내서, 플랫폼에서 치한으로 오해를 받고 있는 것 같으면 달아나게 하라는 지시였어. 얄궂은 일이란 생각은 했지만 널 도와주는 거니까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 아니, 나 자신을 세뇌했어.”

“실제로 네 덕분에 살았는데.”

“그렇지 않아.” 모리타는 또 울상을 짓는다. 그답지 않다는 생각에 아오야기는 가슴이 아파왔다. “놈들은 널 치한으로 체포하고 싶었던 게 아니야. 그 현장을 목격시키기만 하면 되는 거였어.”

“놈들? 목격? 누구한테?”

“그곳에 있던 승객들에게. 네가 앞으로 죄를 지었을 때 누가 ‘저 녀석 성희롱도 한 적 있어’라고 말한다면 더 설득력이 있겠지.”

“내가 뭘 한다는 거야?” 아오야기는 자신이야말로 울고 싶은 심정이라며 웃고 싶어졌다.

“나도 전모는 몰라. 오늘도 너를 이 차에 태우고 12시까지 재워두라는 지시를 받았을 뿐이야. 얌전하게 있도록. 페트병에 든 물을 마시게 하라면서 말이야.” (P121-122)

“케네디 암살 때, 범인으로 몰린 오즈월드는 사실 CIA 정보원이었다고 하잖아.”

“그런 말이 있었지.”

“오즈월드는 사건 전에, 거리에서 공산당 관련 전단을 뿌렸어. 명령을 받았으니까. 그것도 역시, 오즈월드가 그런 운동가였다는 인상을 주려는 수작이었지.”

“그런 말도 있었고.”

“네 치한사건도 비슷한 걸지 몰라. 너를 달아나게 만들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부터 이상한 낌새는 느꼈지만, 생각을 다 뿌리쳐왔어.”

“모리타, 흥분부터 가라앉히고 말해.”

“이건 널 큰 사건에 휘말리게 하려는 준비 작업 아닐까.”

“모리타, 대체 무슨 소리야?”

“회사 그만둔 뒤, 이상한 일 없었어.”

아오야기는 모리타의 강한 어조에 반론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순순히 기억을 더듬는다. 이상한 일이라면, 그, 운전면허증이 마쓰시마에서 발견된 일 정도다. “실업급여를 받으러 고용안정센터를 다녔는데, 딱히”까지 말했다. “아아”하며 한 가지를 떠올렸다. 이노하라 고우메가 퍼뜩 뇌리를 스친다. (P124)

“넌 도망쳐.”

“너도 가자.”

“어디로?” 장난기라고는 전혀 없는, 진지한 눈으로 모리타가 말했다. “옛날에, 비틀스 이야기를 하다가 애비 로드 메들리에 대해 다 같이 수다를 떨었잖아.”

“뭔 소리야?”

“애비 로드의 메들리.”

비틀스의 열한 번째 앨범이 <애비 로드>였다. 실제로는 이 뒤에 <렛 잇 비> 앨범이 나왔고 그게 마지막 작품이 됐지만 녹음 자체는 <애비 로드>가 더 나중이었다. 즉 비틀스가 마지막으로 녹음한 앨범이 <애비 로드>라는 말이다. 이미 분열된 밴드를 폴 매카트니가 어렵사리 뭉치게 했고, 앨범 후반의 여덟 곡은 각각 따로 녹음한 곡을 폴 매카트니가 이어 붙여서 장대한 메들리로 완성했다. 메들리의 마지막 곡이 <디 엔드>라는 게 참 깔끔하다고 모리타는 곧잘 말했다.

“그 곡 중에 <골든 슬럼버>, 아까 네가 자는 내내 흥얼댔어.”

“자장가라서?” 직역하면 황금 졸음쯤 되는데, 가사 내용은 거의 자장가였다. 폴 매카트니가 쥐어짜는 소리로 높직이 부르는 노래는 신비한 박력으로 가득하다.

“시작 부분 기억나?” 그렇게 말한 뒤 모리타는 첫 부분을 흥얼댔다. “Once there was to get back homeward."

"옛날에는 고향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는 의미던가?“

“반사적으로, 대학 시절 함께 놀던 때가 떠올랐어.”

“대학 시절?”

“돌아갈 고향이라는 말을 들으면 머릿속에는 늘, 그 시절 우리가 떠올라.” 모리타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P127)

총성이 들렸다.

아니, 소리에 앞서 차 뒷부분이 부서졌다. 조각 난 부품이 땅바닥에 흩어진다. 경찰이 발포한 것이다. “꼼짝 마! 바닥에 엎드려!” 하고 외치더니 천천히 다가온다.

차 안에 있는 모리타를 봤다. 막무가내로 발포하는 경찰과, 텔레비전에 나온 자신을 보며 아들에게 자랑해주는 친구 중, 과연 누굴 믿어야 할까?

아오야기는 땅을 박차고 그대로 달아났다.

길을 대각선으로 달렸다. 권총을 겨누는 자들에게 등을 보이는 데는 담력이 필요했지만 신중하게 행동할 때가 아니다. 어떻게 뛰든, 맞으면 맞는 거다. 근처 건물에 숨어들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골목으로 달아날 것인지 고민했다. 건물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다.

“기다려!” “거기 서!” 경찰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날아온다. 찌르는 듯 날카로운 목소리라 멀리 떨어진 그들의 팔이 쑤욱 앞으로 뻗어와 미끄러지듯 날갯죽지 밑을 졸라맬 것 같았다.

모퉁이에 술집이 보였다. 담당 구역은 아니지만 택배기사를 할 무렵 몇 번인가 지난 적 있는 길이다. 머릿속에 지도를 펼쳤다. 왼쪽으로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에 샛길이 나온다. 나올 것이다.

백발의 남자가 앞치마에 손을 훔치며 가게 밖으로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뭐가 이리 시끄러워”하고 뒤를 보며 안에 있는 이에게 말을 했다. 달려오는 아오야기를 못 본 모양이다. 자칫 부딪칠 것 같아 옆으로 몸을 틀었다. (P133)

올려다보니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꼼짝 마, 쏜다.” 베란다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간이 철렁 내려앉아 로프를 놓칠 뻔했다.

남자는 난간 밖으로 몸을 내밀고 로프를 움켜쥔 아오야기를 내려다보는 자세로 빈틈없이 총구를 겨누고 있다. 쏜다는 말이 단순한 위협이 아님은 확실했다. 자신을 노려보는 양복 차림의 남자는 눈썹이 옅고 턱이 길쭉한 남자였다. 30대쯤 되었을까. 파충류 같은 표정이었다.

총구가 아오야기의 몸을 겨누고 있다. 방아쇠에 손가락이 걸려 있다.

맞겠다. 하며 아오야기는 몸을 떤다. 왼손만으로 로프를 잡은 채 오른손은 재킷 주머니로 움직였다. 로프를 쥔 왼팔에 알통이 불끈 솟는다. 무거운 짐을 운반하던 무렵의 감각이 되살아난다.

머리로 이해하기에 앞서 몸이 먼저 공포를 느낀다. 총에 맞으면 끝장이야. 맞으면 끝장이야, 하고 초조해하면서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낸다. 다트의 화살이다.

화살을 똑바로 쥔다. 왼팔에 힘을 주며 상반신을 뒤로 젖힌다. 표적이고 뭐고 없었다. 언제 상대가 방아쇠를 당길지 모른다. 쏜다, 곧 쏜다. 초조감뿐이다. 젖 먹던 힘을 다해 오른팔을 위로 치켜들고, 왼손으로는 로프를 꽉 움켜쥔다. (P177)

모리타는 말했다. “너, 오즈월드가 될 거야” 하지만 뉴스만 보아서는 아직 그런 정보는 공개되지 않았다.

지나친 생각이었어. 모리타, 가네다 총리가 누구에게 살해당했는지는 몰라도 내가 범인이라니, 뉴스에도 안 나오잖아.

아오야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동시에, 모리타의 슬픈 표정과 가즈의 대사, 자신을 쫓아오던 남자들의 거친 태도를 떠올렸다.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던 남자와 자신이 던진 다트 화살. 총에 맞은 술집 주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발포된 산탄총과 패밀리 레스토랑의 깨진 유리가 머릿속을 잇달아 지나갔다.

관자놀이를 더듬는다. 긁힌 상처에서 난 피는 대강 마른 상태였다. 뚫어져라 거울을 보며 ‘지나친 생각이 아니야’하고 현실을 깨닫는다. 자신이 쫓기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아직 정보가 공개되지 않았을 뿐이다. 조만간 공개된다. 그렇게 되면 홍수와 같은 대소동이 일어나리라. 탁류가, 자신은 물론이요 자신과 관련 있는 모든 사람의 생활을 만신창이로 엎을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위장 근처가 꽉 죄여온다. (P235-236)

“나는 범인이 아니야.” 다시 한 번 강하게 말했다.

“범인들이야말로 그렇게 말하지. 자신이 범인이라고 말하는 범인은 없어.”

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단정적으로 나불대는 남자의 거만함에 배알이 뒤틀린 것은 사실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오야기는 “그렇다면 내가 범인이다.” 하고 지껄이고 있었다.

순간 상대가 침묵한다.

“자, 이러면 난 범인이 아닌 게 되나?” 반격에 성공한 건가?

“사태 파악을 못하는군.”

“참, 모리타는? 모리타는 어떻게 했지.”

“모리타?” 상대는 시치미를 떼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당황한 눈치였다. 잠시 뒤 “아아, 자네 친구 말인가. 자네가 살해한 그 친구?” 하고 말을 이었다.

“살해를 해? 무슨 뜻이지?”

“차에 폭탄을 설치해놓고 폭파했잖아.”

아오야기는 순간 말을 잃는다. 낮에 택시 타기 직전에 들린 폭발음이 생생하게 귓전에서 살아나 머릿속이 텅 빈다. 모리타라는 단어가 휑뎅그렁해진 뇌리에 꿈틀대며 떠오른다.

“뭘 새삼스럽게.” 상대의 말소리가 들린 뒤 전화가 끊긴다. 아오야기는 공중전화 앞에 멍하니 서 있다. 주저앉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견뎌낸다.

“인간의 최대 무기는, 습관과 신뢰야.” 모리타의 말이 머리를 스친다. 모리타는 어떻게 된 거지? 머리를 세차게 흔든다. 죽을힘을 다해 머릿속에서 그를 떨쳐낸다. 수없이 흔들어 찰싹 들러붙어 있던 ‘모리타’를 떨쳐낸다. (P243-244)

“정보를 통제하고 조절하는 거지. 자네는 범인이지만 증오해야 할 역겨운 인간이 아니야. 용서받을 수는 없지만 동정 못 할 것도 없지. 그런 범인상으로 만들어줄 수 있어.”

“정보를 조작하겠다고?”

“이미지.” 사사키는 짧게 말했다. “이미지란 게 그런 거 아닌가? 별다른 근거도 없이 사람은 이미지를 갖게 되지. 세상은 이미지로 움직여. 맛은 똑같은데 어느 날 갑자기 레스토랑이 번창하는 것은 이미지가 좋아졌기 때문이야. 서로 모시려고 아우성치던 배우의 일감이 떨어지는 건 이미지가 나빠졌기 때문이고. 총리를 암살한 남자인데도 큰 미움을 받지 않는 것은 공감할 수 있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지.”

사사키가 자신을 진범으로 보는지 어떤지는 둘째 치더라도, 아오야기는 왜 그가 곧장 경찰에 끌고 가지 않고 자수를 권하는지 의문이었다. 비상사태이고 대사건이니까. 앞뒤 가리지 않고 경찰에 넘기면 될 텐데 거래라도 하는 양 말을 꺼내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조금씩 이해가 됐다. 아마 그는, 아니 그들은 사건을 매끄럽게 수습하고 싶은 것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진상을 밝히는 게 아니다.

가네다 총리가 암살된 진짜 이유나 동기, 방법, 그리고 진짜 범인에는 관심 없다.

그들은 그저 만인이 끄덕일 만한 형태로 매듭짓기를 바랄 뿐이다. (P259)

“어이, 손 내놔.”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아오야기는 흠칫 떨었다. 언제 왔는지 사사키가 옆에 앉아 있다. 수갑을 한 손에 쥐고 아오야기의 팔을 잡아당겼다. “나가지, 차를 갈아탈 거야.”

세단이 움직이지 못하게 된 탓에 차를 갈아타려나 보다. 아마도 휴대전화로 다른 차를 수배한 모양이다. 아오야기는 그저 몸을 맡겼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양손에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나와”하며 그가 잡아끌었다.

바깥으로 나가자 하늘이 캄캄했다. 가로등이 늘어서 있어 거리는 밝았다. 세단이 가드레일과 경자동차 사이에 낀 채 정지해 있었다. 움직이지 못할 만도 하다.

찻길을 달리는 차는 수없이 많았지만 딱히 정차하는 차는 없었다. 귀찮은 상황을 피해 가듯 모두들 차선을 바꾸어 쌩쌩 지나갔다. 인도에서는 행인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사사키가 수첩 같은 걸 번쩍 쳐들고 “비상사태, 물러나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행인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다시 빙 둘러섰다.

고바토자와가 양팔을 앞으로 뻗어 검은색 점퍼의 남자를 떼밀었다. 남자는 세단에 등짝을 부딪쳤고, 차체가 흔들렸다. 빈혈에 걸린 중학생처럼 그는 비틀거렸다. 인도 어디선가 비명이 들렸고, “누구 경찰 좀 불러요!” 하고 외쳤다.

“저희가 경찰입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사사키가 곧바로 대꾸했다. (P267-268)

잠시 후 “야지마 피디라고 합니다.” 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대신 전화를 받았다. “아오야기 마사하루 씨인가요?”

“그렇습니다.” 얼결에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죄송합니다만 아오야기 씨 이름을 사칭해서 연락하는 분이 워낙 많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랑스럽게 떠벌리는데, 선생님처럼 누명이라는 사실을 보도해달라는 분은 드물어서요.” 그래서 흥미를 느낀 모양이었다.

“나는 결백하니까요.” 아오야기는 짧게 말했다. 너무 긴 문장으로 말하다가는 목멘 소리가 섞여들 것 같았다.

“당신이 아오야기 마사하루 씨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 말에 곧바로 대답하지는 못했다. 자신이 자신이라는 증명 따위, 누가 할 수 있을까.

“만약 내가 아오야기 마사하루라는 걸 증명한다면 보호해주실 건가요?”

“보호?”

“전 경찰에 쫓기고 있습니다. 그런 사건은 일으키지도 않았는데.”

“경찰에 그렇게 말하면 되지 않습니까.”

혀를 찰 뻔했다. 다 포기하고. “그렇죠. 누구든 그렇게 생각하겠죠.”라고 뱉어내고 싶다. 말한다고 알아줄 상황이 아니다. 그러니까 텔레비전을 통해 세상에 호소하고 싶다고 말을 잇는다. 집요하게 추격해 오는 경찰과, 산탄총을 든 거대한 남자, 끊임없이 발포된 총이 머리를 스친다. “내 무죄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방송국에서 보호해줬으면 합니다.” (P312)

아까까지는 끔찍하지 않던 차가 강가를 좀 거닐다 온 사이에 움직일 성싶지는 않았지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뒤쪽의 좁은 길은 완만한 오르막이라 지친 몸으로 걷기가 쉽지 않다. 풀숲 덤불 사이로 노란색 차체가 희끗희끗 보였다. 배낭을 안은 채 종종거리며 달려간다. 아무 생각도 없었다. 주저앉아 앞바퀴에 손을 뻗는다. 열쇠가 있다. 운전석에 앉기가 무섭게 열쇠를 꽂는다.

앞 유리를 보며 숨을 내쉰다. 시동이 걸릴까?

손가락에 힘을 준다. 브레이크를 밟은 채 ‘걸려라’하고 속으로 빌었다. 실제로 소리 내어 말했는지도 모른다. 걸려라. 걸려라. 처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아오야기는 이해하지 못했다. 몸 아래쪽 땅바닥이 부르르 몸서리를 치더니 차진 비명 같은 소리를 냈다.

시동이 걸릴 듯한 소리가 들렸다. (P367)


꼴이 하도 한심하고 우스워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거울에 비치는 입가도 힘없이 무너졌다. 클러치를 밟고 기어를 1단에 넣으려다 말고 선바이저를 열어 접어놓은 종이를 꺼냈다. 바로 몇 분 전. 자신이 끼워 넣은 종이쪽지다. 이제 필요 없을 것 같았다.

꾸깃꾸깃 몽쳐서 주머니에 찔러 넣으려다 문득 펼쳐본다. 다 구겨진 종이를 펼쳤다가 흠칫 놀란다. 한순간이었지만 심장이 세차게 고동친다.

‘나는 범인이 아니야. 아오야기 마사하루.’ 자신이 쓴 글자가 남아 있다. 약간 비스듬하게 누운, 눈에 익은 글씨체다. 문체는 그 밑이었다. 아오야기의 글자보다 가늘고 예쁜 글씨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럴 줄 알았어.’

아오야기는 한동안 물끄러미 종이를 내려다봤다. 눈을 꾸욱 감는다. 눈에 익은 글씨체인지, 글을 쓴 진심이 무엇인지.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목구멍에서 소리가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얼른 안 가도 돼? 그렇게 말하듯 차가 계속 진동을 했다. ‘그럴 줄 알았어.’ 이 한 마디가 가슴을 꽉 죄어온다. (P368)

히구치도 모리타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가 “잘난 놈들이 만든 거대한 부조리에 쫓기게 되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도망치는 것뿐이지.”라고 진지한 얼굴로 한 이야기는 인상에 남았다. “거대한 부조리의 사냥감이 되면 어딘가 몸을 숨긴 채 달아나는 수밖에 없어.”

“뭔 소리래.”

“너 말이야. 바다에서 고래한테 습격을 받으면 어쩔 건데?”

“고래가 습격을 해?”

“습격하겠지. 그야. 인간이란 종족은 어딜 가도 환영을 못 받으니까. 그래. 너는 고래랑 싸울 거야? 무리잖아. 정면 승부를 낼 거야? 향유고래한테? 설마, 아오야기 정도는 배 속에 들어가면 그걸로 끝장이야. 피노키오가 아니잖아.”

“너도 배 속에 들어가면 끝장이잖아.”

“그러니까 가장 영리한 방법은.”

“영리한 방법은?”

“도망치는 거. 헤엄쳐서 도망치는 거. 그거밖에 없어. 꼴이 좀 우스워도 괜찮으니까 젖 먹던 힘을 다해 도망쳐.”

“헤엄쳐봐야 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니까.”

히구치는 그 대화를 머릿속으로 다시 재현하며 소파를 본다. 나나미는 역시 피곤했는지 잠귀신과 줄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가는 반짝 뜨고, 또 감았다가는 반짝 뜨고 있다.

풀장의 기억을 끄집어내다 싶어 엉켰는지 다른 화면까지 머릿속에 튀어나왔다. (P380)


“형이 상대하는 건 터무니없이 거대하고 추상적인 적이에요. 아마도, 국가나 권력이라고 불리는 것들.”

“아까부터 계속 그 이야기 중이잖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무개 장관인지, 모 사장인지, 어떤 놈들이 배후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본적으로 총리를 죽였다는 건 의도가 모호잖아요. 아까 말한 이권 이야기처럼.”

미우라가 갑자기 어려운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아오야기는 바싹 긴장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말이에요. 멍하게 있는 동안에 법률은 만들어지고, 세금이나 의료 제도는 바뀌고, 그러다 또 어디서 전쟁이 나도 그런 흐름에 반항할 수 없도록 되어 있잖아요. 좀 그런 구조라고요. 나 같은 놈이 멍하게 있는 사이에 자기들 마음대로 다 밀어붙이죠. 전에 책에서 읽었는데, 국가란 국민의 생활을 지키기 위한 기관이 아니래요. 듣고 보니 그렇더라고요.”

청산유수로 지껄이는 그를 앞에 두고 아오야기는 다소 당황하면서도 “거인이 적인 나에게 승산은 없다는 소리야?” 하고 묻는다. (P400-401)

황금 낮잠. 머릿속으로 단어가 떠오른다. 따뜻하고, 자신을 감싸 안아주는 햇살을 찾고 싶어진다. 그대로 그 황금을 몸에 휘감고 잠들고 싶었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셈판이야, 하며 핏대를 세우고 싶은 분노를 조금씩 가라앉힌다. 왜 내가 이런 꼴을, 하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싶지만 참는다. 주먹을 세게 움켜쥔다. 아버지가 방송국 리포터에게 달려들던 그 우스꽝스러운 영상을 죽어라 떠올린다. 그런 아버지가 훨씬 더 범인 같잖아. 머리에 떠오른 좀 전의 아버지 영상이 마치 태양이 만든 푸근한 양달처럼 자신을 채우기 시작한다.

“욱하는 객기만 부릴 게 아니라, 좀 냉정하게 순서를 밟는 게 인간이라는 동물이야.”

옛날에 자신이 했던 말이 다시금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순서를 밟아가며, 생각한다.”

지금 내가 가진 무기에는 대체 어떤 것이 있을까. 조용히,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곡 하나하나를 이어 붙여 메들리를 만드는 심정으로, 자신이 가진 정보를 꿰매 붙였다. 이나이 씨의 첩첩이 쌓인 골판지 상자 옆에 놓인 작은 코드가 눈가에 비쳤다. 핀마이크 같았다. 휴대전화에 접속하는 것이다. 멀거니 그것을 바라보며 머리를 회전시킨다. (P454)

지금 경찰 쪽에서는 아오야기가 인질을 데리고 오지 않은 데 놀라고 또 동시에 맥이 빠졌을 것이다. 다른 속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쏘지 말고 기다려”하는 지시를 내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봐야 긴 시간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 바로 앞에서, 텔레비전 시청자들 앞에서 총에 맞을 가능성은 희박하리라 믿고는 있지만 제로는 아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무방비로 노출된 몸에 총탄이 박혀 있을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통증은 없는지 자신에게 묻는다. 아직은 맞지 않았다. 아직은 맞지 않았다, 하고 확인해가며 나아간다. 정신이 아뜩해질 것만 같지만 견뎌냈다.

이 조명 뒤, 자신을 비추는 카메라 뒤편으로는 수많은 사람이 총리를 암살한 범인의 낯짝이나 보자며 텔레비전을 뚫어져라 보고 있을 것이다. 그중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아오야기를 범인으로 믿고 있는지는 짐작도 할 수 없다. 어쩌면 그 사실은 아무려나 상관없는 사람이 대부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범인이냐 아니냐 하는 점은 나중 문제일 뿐, 좌우간 이,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소동을 축구 관전하듯 바라보고 있을 게 분명하다.

어디선가 바이크 달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신문 배달을 하는 바이크이리라.

그렇구나, 하고 아오야기는 새삼 깨닫는다. 지금 이렇게 자신이 엄청난 사태에 직면한 순간에도 신문 배달부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다. 집집마다 신문이 배달되고, 아침이 오며 하루가 시작된다. 회사나 학교로 가 “그 중계 보느라 졸려 죽겠다.” 라고 푸념을 해대며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생활로 돌아간다. 마치 월드컵 일본전이 끝난 다음 날처럼.

아오야기는 걸음을 멈춘 뒤 양팔을 더욱 번쩍 들고는 가슴을 폈다. 시선을 위로 보낸다. 카메라는 어디에 있을까.

이것으로 적어도, 이 순간까지는 자신이 이곳에 존재했다는 증명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가짜가 아닌 진짜 아오야기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나는 범인이 아니다. 그 진실을, 이 광경을 보는 사람들 중 누군가는 알아줬으면 했다.

또다시 바이크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로 달려가는 걸까. 고생이 많으시네요, 하고 낯모를 배달부에게 인사를 건네고 싶어진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디에 계실까. 누명임을 증명할 수는 없었지만, 팔은 흔들 수 있었다. (P492-493)

“그곳 사장 아들이, 매스컴에 아주 치를 떨어서 말이야. 폐점시간이 다 될 때까지 파친코 가게에 틀어박혀 있다기에 직접 가게까지 찾으러 갔어. 그래, 이야기를 했더니 그 아들이 아주 의욕이 넘치더라고. 나도 주눅이 들 정도로 아주 적극적으로 나오던데.”

“도도로키 사장님의 아들이?” 자신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아오모리에 있는 기업에서 근무한다는 아들 이야기는 자주 들었다. “공장을 이어받았군요?”

“그 아들, 두말도 없이 바로 거들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이제부터 폭죽을 설치하러 다닐 예정이야. 나머지는 내일, 자네가 팔만 흔들면 점화를 해주지. 갑자기 터진 불꽃을 보면 다들 놀랄 거 아니야. 그 틈에 맨홀로 달아나.”

대체 어디에서 쏘아 올릴 생각이냐고 묻자, 호도가야는 “뭐, 그건 기대해” 하며 웃더니 “만약 그 맨홀로 도망을 치게 되면”하고 덧붙였다. “중앙공원에서 서쪽으로 가. 그 우수관은 서쪽 공원 아래를 통과해서 히로세 강으로 나가게 돼. 건너편 낭떠러지로 쑥 나가게 된다. 이 말이야.”

“강으로?”

“관 끝에 널빤지로 된 수문이 있어. 뭐, 평소에는 수압을 이용해 맞은편으로 열리도록 하는 구조인데, 그 왜 인조 돌이라고, 위장을 해 놓은 거야. 경관을 해치지 않으려고 말이야. 그놈을 밀고 나와, 강도 얕으니까 걸어서 맞은편 기슭까지 가면 자동차학원 쪽으로 나갈 수 있어.”

“거기서부터는?”

“스스로 알아서 해.” (P503)

센다이에서 석 달 전 일어난 총리 암살사건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기사 중 하나는, 범인인 아오야기 마사하루가 불꽃과 함께 사라진지 며칠 뒤, 센다이 항에서 시체로 발견됐다는 이야기였다. 경찰은 시체가 익사한 아오야기 마사하루라고 발표했지만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어느 작가가, 유전자 감식을 하지 않은 것을 근거로 시체는 경찰이 사건을 매듭짓기 위해 날조한 가짜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던지고 있었다. 경찰은 상대도 하지 않는 모양이었고 신문 역시 왠지 재미 삼아 게재할 뿐인 눈치다.

“사건이 너무 엄청나다 보니 뭐가 뭔지 통 알 길이 없네. 이건 뭐.”

가마타는 중얼대며 게재된 아오야기 마사하루의 사진을 본다. 미남이니까 그 꼴을 당하는 거야, 하고 질투 섞인 생각을 했다. (P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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