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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리플리의 게임>

영화 <리플리스 게임> 2005년

by 노용헌

리플리 시리즈 역시 『재능 있는 리플리』를 원작으로 한 〈태양은 가득히〉(1960), 〈리플리〉(1999) 이외에도 여러 차례 영화화되며 화제를 모았다. 『지하의 리플리』는 로저 스포티스우드 감독, 배리 패퍼 주연의 〈지하의 리플리〉(2005)로, 『리플리의 게임』은 빔 벤더스 감독, 데니스 호퍼 주연의 〈미국인 친구〉(1977), 릴리아나 카바니 감독, 존 말코비치 주연의 〈리플리스 게임〉(2005)으로 영화화되었다.

“완벽한 살인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톰이 리브스에게 말했다. “그건 방구석에서나 꿈꾸는 게임일 뿐이죠. 미제 살인 사건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소리를 하느냐는 반박이 당연히 나오겠지만, 그건 달라요.” 톰은 지긋지긋했는지 큼직한 벽난로 앞을 서성였다. 벽난로 안에서 포근한 불꽃이 작게 타다닥 타올랐다. 톰이 거들먹거리면서 오만하게 말한 듯싶었지만, 리브스를 도울 수 없다는 게 요지였다. 톰은 일찌감치 쐐기를 박았다.

“당연히 그렇겠죠.” 리브스가 노란 실크 암체어에 앉아 깡마른 몸을 숙인 채 깍지 낀 두 손을 무릎 사이에 두고 있었다. 뼈만 남은 얼굴, 짧게 친 갈색 머리, 서늘한 회색 눈동자. 썩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흉터만 없었더라면 미남이었을 것이다. 오른쪽 관자놀이에서 시작해 뺨을 지나 거의 입까지 내려오는 흉터가 10센티미터도 훌쩍 넘게 그어져 있었다. 흉터 부위가 얼굴색보다 살짝 더 벌건 걸 보니 봉합을 대충했거나 아예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톰은 어쩌다 생긴 흉터냐고 묻지 않았다. 먼저 얘기를 꺼낸 건 리브스였다. “어떤 여자가 콤팩트로 이래 왔다니까요. 상상이 갑니까?” (아니, 톰은 상상할 수 없었다.) 리브스가 다급히 씁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리브스가 웃는 경우는 톰의 기억속에 몇 번 없었는데, 그때가 그중 한 번이었다. 그가 다르게 설명할 때도 있었다. “말에서 떨어졌는데 안장 발 받침대에 한참 끌려가는 바람에 그만.” 리브스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말할 때, 그 자리에 톰도 있었다. 톰은 리브스가 어디선가 지저분한 몸싸움을 벌이다가 뭉뚝한 칼에 맞은 자국일 거라고 짐작했다. (P7)

“아, 맞다, 당신 얘기 들은 적 있어요.” 그렇다면 트레바니인가 뭔가 하는 남자도 버나드 터프츠가 톰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에 앞서, 디키 그린리프도 톰이 죽였다고 생각하려나? 아니면 그 영국 남자가 몸이 아파서 아무에게나 닥치는 대로 시비를 거는 건가? 늘 복통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과민해서 그런 걸까? 그제야 톰은 트레바니 아내의 모습이 기억났다. 빼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밤색 머리칼에 다정하고 외향적인 성격으로, 손님들을 불러 놓고 의자가 몇 개밖에 없어서 앉을 데도 없는 비좁은 거실과 주방에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톰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 남자라면 리브스가 부탁하는 일을 해 주지 않을까? 톰은 트레바니에게 흥미롭게 접근할 방법이 떠올랐다. 판이 깔리기만 한다면 누구에게나 통할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번 경우엔 이미 판이 깔려 있었다. 트레바니는 자기 몸이라면 과하게 벌벌 떠는 사람이었다. 톰이 생각해 낸 방법은 장난인 동시에 고약한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 먼저 고약하게 군 건 트레바니였다. 톰이 칠 장난은 고작해야 하루 이틀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트레바니가 의사에게 달려가면 끝날 장난이었다. (P13)

3월 마지막 주 내내 톰은 캔버스를 가로로 놓고 노란 새틴 의자에 누운 엘로이즈의 전신 초상화를 그렸다. 엘로이즈가 포즈를 취해 주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소파에서 움직이지 않고 포즈를 잡아 주어 톰은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캔버스에 담을 수 있었다. 게다가, 왼손으론 머리를 받치고 오른손은 큼직한 예술 서적 위에 올려놓은 엘로이즈의 자태를 예닐곱 장 정도 스케치했다. 그중 가장 잘 그린 두 장만 빼고 나머지는 없애 버렸다.

리브스 마이넛이 편지를 보냈다. 혹시 괜찮은 생각이 떠오른 게 있냐고 묻는 내용이었다. 할 사람을 찾았느냐는 뜻이었다. 편지는 톰이 물감을 사러 자주 가는 가게 주인인 고티에와 얘기한 지 이틀 후에 도착했다. 톰은 리브스에게 답장을 썼다. “나도 생각해 보려고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만, 당신이 알아서 준비해야 할 겁니다.”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은 그저 예의만 차리는 거짓말이었다. 사교계의 여왕 에밀리 포스트라면 사교적 대화라는 시스템이 원활히 굴러가도록 기름칠하는 숱한 말 중 하나라고 했을 것이다. 리브스가 벨옹브르가 경제적으로 융택해지도록 도움을 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톰이 이따금 중계자나 장물아비 역할을 해 준 대가로 리브스에게 받은 돈은 세탁소 드라이클리닝 값도 충당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서 결코 손해 볼 일은 없었다. 리브스는 톰이 더와트 법인은 지킬 때 필요했던 가짜 여권을 만들어 파리로 급히 보내 준 적이 있었다. 리브스의 도움이 필요할 날이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

하지만 조너선 트레바니와의 일은 그저 게임에 지나지 않았다. 도박업으로 돈을 벌려는 리브스를 돕자고 톰이 장난을 치는 건 아니었다. 톰은 도박이라면 혐오했고, 도박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기로 했거나 다만 얼마라도 벌려고 하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도박은 포주 짓이나 다름없었다. 톰이 트레바니와 게임을 시작한 건, 호기심 때문이었다. 트레바니가 비아냥거리기도 했고, 톰이 거침없이 난사하는 총알이 과연 표적을 맞힐지 보고 싶기도 했다. 게다가 건방지고 독선적인 트레바니를 잠시나마 불안에 떨게 하려고 심술을 부리고도 싶었다. 때마침 리브스가 미끼를 던져서, 톰이 아예 트레바니를 노리고 그가 곧 죽을 목숨이라고 소문을 낸 것이다. 트레바니가 그 미끼를 물지는 않겠지만, 한동안 불안에 떨기는 할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그 소문이 얼마나 빨리 트레바니의 귀에 들어갈는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입이 가벼운 고티에가 두세 명한테 떠든다고 해도, 트레바니 본인에게 대놓고 물어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P28-29)

“도박은 함부르크에서 합법이 아닙니다만, 프라이빗 클럽에서 성행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도박이 불법이냐 아니냐는 요점이 아닙니다. 한 명, 가능하면 두 명을 모두 제거하고, 더불어 절도까지 해 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이제 제가 든 패를 다 보여 드렸네요.” 리브스가 진지하면서도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조너선을 응시했다.

사람을 죽여 달라는 거잖아. 조너선은 화들짝 놀랐지만 미소를 잃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제 이름을 어디서 들으셨는지 궁금하네요.”

스티븐 위스터는 웃지 않았다. “그건 신경 쓰지 마세요.” 위스터는 술잔을 든 채 방을 계속 서성였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조너선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혹시 9만 6천 달러면 구미가 당기실까요? 환산해 보니 4만 파운드고, 48만 프랑이네요. 신프랑으로 계산한 금액입니다. 한 명에게 딱 한 발만 쏘면 됩니다. 두 명에게 두 발을 쏠 수도 있겠죠. 그다음에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는 우리가 지켜볼 겁니다. 안전하고 실패할 리 없이 준비해 놓겠습니다.”

조너선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어디에서 무슨 소리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전 총잡이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하고 착각하신 것 같은데요.”

“아뇨, 안 했습니다.”

남자의 강렬한 안광에 조너선의 미소가 힘을 잃어 갔다. “착각하신 게 맞을 텐데요..... 어쩌다 저한테 전화하게 된 건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당신은....” 위스터의 표정이 전보다 더욱 힘겨워 보였다. “당신은 앞으로 몇 주밖에 살지 못할 사람입니다. 그건 본인도 잘 아시죠? 아내와 어린 아들이 있는데, 가실 때 몇 푼이라도 남겨 주고 가셔야죠?”

조너선은 얼굴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위스터가 대체 어떻게 소상히 아는 걸까? 그러다가 그는 모든 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가 조만간 죽을 거라고 고티에에게 말한 사람이 이 남자와 아는 사이라는 걸, 그 사람이 이 남자와 관계있다는 걸 간파한 것이다. 조너선은 고티에에게는 이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고티에는 솔직한 사람이지만, 위스터는 사기꾼이었다. 스카치를 마시다 별안간 입맛이 뚝 떨어졌다. “별,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도는군요. 요즘에요.”

이제 위스터가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문이 아닙니다. 의사한테 아직 제대로 듣지 못하셨군요.”

“당신이 내 주치의보다 더 잘 압니까? 내 주치의는 거짓말할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혈액암을 앓는 건 사실이지만, 상태가 더 나빠지진 않았다고요.” 조너선이 말을 멈추었다. “중요한 건, 내가 당신을 도울수 없어서 유감이라는 거죠, 위스터 씨.”

위스터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자, 기다란 흉터가 살아서 꿈틀대는 벌레처럼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조너선이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면 페리에 박사가 거짓말했다는 건가? 내일 아침에 파리 검사실에 전화해 몇 가지 물어보거나, 직접 파리로 올라가서 설명해 달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레바니 씨, 안타깝게도 못 들으신 게 확실합니다. 적어도 당신이 소문이라고 치부하는 그 얘기는 이미 들어서 알고 계시니, 제가 때를 잘못 잡은 건 아니네요. 이건 전적으로 당신의 자유의사에 달린 문제이긴 하나, 이런 상황에 이 정도 돈이면 괜찮지 않나요? 가게를 정리하고 여생을 즐기실 수 있어요. 예컨대 가족과 함께 크루즈를 타고 전세계를 돌아다녀도 부인께 남겨 드릴 돈은.....”

조너선은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어지럼증이 가셨는데도 계속 서 있고 싶었다. 위스터가 뭐라고 계속 떠드는데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 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함부르크에 사는 지인 몇 명이 9만 6천 달러를 마련해 줄 겁니다. 우리가 제거하려는 남자는 둘 다 마피아예요.” (P36-37)

조너선은 위스터를 위해서 사람을 죽일 생각을 이리저리 해 보고 있었다. 위스터를 위해서가 아니라 돈 때문이었다. 마피아 조직원이라니, 마피아라면 하나같이 범죄자들 아닌가? 왕복 교통비를 받는다고 해도 언제든 갚으면 그만이다. 당장은 은행 잔고가 부족해 찾을 돈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진심으로 몸 상태를 확인받고 싶다면, 독일(아니면 의료 분야라면 스위스)에 가면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세계 최고의 의사들이 포진한 독일 아니던가, 지금 조너선은 전화기 옆에서 ‘믈룅에 있는 종이 공급업체에 내일 전화할 것’이라고 메모를 적고 있었다. 그곳 역시 월요일인 오늘은 쉬기 때문이었다. 위스터의 제안이 실현 가능할지 누가 아는가? 조너선은 예컨대 독일 경찰이 쏜 총탄에 그의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모습도 상상해 보고, 이탈리아 마피아를 쏜 직후에 그가 체포되는 모습도 그려 보았다. 조너선이 죽어도, 시몬과 조르주는 4만 파운드를 받게 될 것이다. 조너선은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아무도 죽이지 않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도 함부르크에 가면 재미 삼아 한숨 돌릴 수는 있을 것이다. 함부르크에 가서 끔찍한 진단을 받는다고 해도, 어찌 됐든 사실을 알게 되는 것 아닌가. 위스터가 당장 돈을 부쳐 준다면? 옷도 안 사고, 술집에서 맥주도 안 사 마시고 꾹 참으면 석 달이면 갚을 것이다. 그는 아내에게 말을 꺼내기가 미안했다. 그가 다른 의사를, 그것도 명의를 만나겠다고 하면 시몬이 당연히 그러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조너선은 자기 용돈에서 제하기로 했다.

11시경, 조너선은 위스터가 사는 함부르크 자택으로 전화를 신청했다. 수신자 부담으로 걸지 않고 발신자 부담으로 건 것이다. 3~4분후, 조너선의 전화기가 울렸다. 평소 파리로 통화할 때보다 훨씬 깔끔하게 연결되었다.

“네, 위스터입니다.” 위스터가 경쾌하면서도 긴장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오늘 오전에 편지 받았습니다.” 조너선이 입을 열었다. “함부르크로 오라고 하신 거요.....”

“네, 못 오실 거 없잖습니까?” 위스터가 태연히 말했다.

“전문의의 진찰을 받아 보라고 한 얘기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당장 전신환으로 돈을 부칠 테니 퐁텐블로 우체국에 가서 찾으세요. 두 시간이면 들어갈 겁니다.” (P50-51)

“중요한 건, 그 남자가 U반을 타고 가다가 매일 오후 6시 15분경이면 슈타인슈트라세역에서 혼자 내린다는 겁니다. 회사에서 퇴근하는 직장인처럼 말이죠. 바로 그때를 노리려고요.” 위스터가 뼈만 남은 손바닥을 아래로 쫙 펼쳤다. “그 남자의 등을 조준해서 딱 한 발만 발사하면 돼요. 확인 사살을 위해 한 발 더 쏠 수도 있겠죠. 그런 다음 총을 버리면 됩니다. 식은 죽 먹기 아닙니까?”

많이 들어 본 구닥다리 표현이었다. “그렇게 쉬운 일을 왜 나더러 하라는 거죠?” 조너선이 정중히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난 초짜예요. 내가 다 망칠 거라고요.”

위스터가 못 들은 것 같았다. “전철역에 있는 사람들이 둘러싸겠죠. 몇 명만 에워싸도 누가 누군지 분간이 될까요? 경찰이 아무리 빨리 출동해도 서른 명, 아니 마흔 명은 그 주위를 둘러쌀 겁니다. 슈타인슈트라세역은 규모가 어마어마해요. 주요 철도의 종점으로 쓰이는 역이거든요. 경찰이 사람들을 둘러본다고 해도, 과연 당신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위스터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은 총을 버렸어요. 얇은 스타킹을 낀 손으로 총을 쏜 다음에 발사 직후에 스타킹을 벗어 버리는 거죠. 손에는 건 파우더가 묻지 않을 테고, 총에는 지문이 남지 않아요. 당신은 죽은 남자와는 접점이 전혀 없고요. 아니, 거기까지 갈 리도 없어요. 혹시나 경찰이 당신의 프랑스 여권을 봤다고 치자고요. 벤트첼 박사의 진료 예약이 된 상태이니 당신은 결백합니다. 내 말의 요점은, 다시 말해 우리의 요점은, 우리든 클럽이든 관련이 있는 사람은 안 된다는 겁니다.” (P56-57)

조너선이 알고 있는 게, 최소한 의심이 가는 게 있었다. 내일 아침 가짜 검사 결과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었다. 루돌프의 존재가 의심스러웠다. 의대생 루돌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필요 없는 존재였다. 영어라면 벨트첼 박사의 간호사도 할 줄 알았다. 설마 루돌프가 오늘 밤에 검사 결과지를 가짜로 만드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요령껏 바꿔치기하려나? 오늘 오후에 루돌프가 병원 용지를 슬쩍 집어 오는 모습이 상상 속에 떠올랐다. 아니 내가 미쳐 가는 건가, 조너선은 스스로에게 경고했다.

조너선은 호텔로 돌아가면서 지름길을 택했다. 빅토리아 호텔에 도착한 후, 열쇠를 받아 방으로 올라갔다. 신발을 벗고 욕실에서 타월을 적셔 침대에 누운 다음, 타월로 이마와 눈을 가렸다. 잠은 오지 않고 기분만 묘해졌다. 리브스 마이넛은 이상한 사람 같았다. 생판 남에게 6백 프랑을 송금하고 정신 나간 제안을 하면서 4만 파운드를 더 얹어 주겠다고 하다니, 사실일 리가. 리브스 마이넛이 그 돈을 절대로 줄 리 없었다. 리브스는 환상 속에 사는 사람 같았다. 사기꾼이 아니라 성격 파탄자 같아 보였다. 자기가 권력을 쥔 거물이라고 착각하는 타입 같았다. (P61)

칼이 조너선을 호텔에 데려다주더니 차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조너선은 5분에서 10분 정도 여유를 부려도 될 것 같았다. 시몬과 조르주가 쓰도록 집에 있는 치약을 가져오지 않은 데다가, 여태 새로 사지 않아서 칫솔에 비누를 묻혀서 이를 닦았다. 지탄 담배를 한 개비 피운 다음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윽고 옷장에 가서 큼직한 코트를 꺼냈다. 낡긴 해도 너덜너덜하진 않았다. 누가 입던 옷일까? 남의 옷을 입고 연기하는 척 하면 돼. 연극할 때 쓰는 빈총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럼에도 조너선은 자기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마피아 조직원에게 (바라건대) 매정하게 총을 쏠 것이다. 조너선은 자기가 연민조차 느끼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죽으면 죽는 거지 뭐. 각기 다른 이유로, 비앙카의 삶과 조너선의 삶은 가치를 잃고 말았다. 딱 하나 재미있는 게 있다면, 조너선은 비앙카를 살해하는 대가로 돈을 받는다는 점이었다. 조너선은 재킷 주머니에 총을 넣고 나일론 스타킹도 같이 집어넣었다. 한 손으로도 손에 스타킹을 끼울 수 있자, 조너선은 스타킹을 낀 손으로 총에 묻은 지문을 지웠다. 진짜 지문이든 상상 속 지문이든 지우려고 신결질적으로 총을 박박 닦았다. 격발할 때는 코트 자락을 한쪽으로 살짝 치워야 한다. 안 그랬다간, 코트에 총구멍이 뚫릴 것이다. 모자는 없었다. 리브스가 모자를 준비해 주지 않았다니, 신기했다. 이제 와 모자가 없다고 걱정하기엔 너무 늦었다. (P71)

시멘트 바닥에 떨어진 총을 누군가 집으려 하자, 최소 세 사람이 건드리지 말라고 말렸다. 관심이 없거나 급한 일이 있는 사람들만 계단을 올라갔다. 조너선은 비앙카를 에워썬 사람들 근처에서 왼쪽으로 조금씩 움직여 계단에 다다랐다. 어떤 남자가 “폴리차이(경찰)!”를 외치는 사이, 그는 재빨리 계단을 올라갔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몇몇 사람들과 속도를 맞추었다.

조너선은 지상으로 올라간 후에도 앞만 보고 정신없이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 안다는 듯이 적당한 속도를 유지했지만, 사실은 알지 못했다. 오른쪽으로 큰 기차역이 보였다. 리브스가 말했던 곳이다.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추격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오른손을 꼼지락거리며 스타킹을 벗었지만, 전철역 인근에 버리고 싶진 않았다.

“택시!” 기차역 방향으로 가는 빈 택시가 보였다. 조너선은 택시를 잡아탄 다음, 호텔이 있는 거리명을 댔다.

조너선이 뒷자리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경찰이 그가 탄 택시를 가리키며 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할까 봐 차창 밖 좌우를 살피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럴 리는 없었다. 그는 용의선상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런데도 조너선은 빅토리아 호텔로 들어서자 좀 전에 들었던 기분이 되살아났다. 경찰이 어찌어찌해서 그의 소재를 파악한 후, 로비에서 기다리는 건 아닐까.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조너선은 조용히 방으로 올라가 문을 닫은 후, 재킷 주머니를 더듬거리며 스타킹을 찾았다. 어디서 흘렸는지 스타킹은 사라지고 없었다.

저녁 7시 20분, 그는 코트를 벗어서 천 의자에 툭 걸쳐 놓고 담배를 찾았다. 깜빡하고 담배를 챙겨 가지 않았었는데, 한 모금 쭉 들이켜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화장실 세면대 한쪽 구석에 담배를 내려놓고 세수한 다음, 웃옷을 벗고 뜨거운 물에 수건을 적셔서 웃통을 문질렀다.

스웨터를 입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칼 씨가 로비에서 기다리십니다.”

조너선은 로비로 내려갔다. 리브스에게 돌려주려고 팔에 코트를 걸쳤다. 이 코트를 보는 게 마지막이길 바라며,

“근사한 저녁이네요!” 칼이 말했다. 이미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잘했다고 조너선을 칭찬하는 것 같았다.

차 안에서 조너선은 담배를 한 대 더 피웠다. 수요일 저녁이었다. (P74)

“어쩌다 프랑스까지 오시게 됐나요?” 톰이 물었다.

트레바니는 영국 친구와 프랑스에서 앤티크 가게를 열게 된 사연을 풀어놓았다. “당신은요?”

“아내가 프랑스에서 사는 걸 좋아해요. 저도 그렇고요. 이보다 더 쾌적한 생활은 상상할 수 없죠. 가고 싶을 때 여행 갈 수 있지, 자유 시간도 많지, 여가를 즐긴다는 얘깁니다. 제가 정원을 가꾸고 그림을 그리거든요. 일요일이면 붓을 잡는 아마추어 화가처럼 그림을 그리는 게 재미있어요. 내키면 두어 주 런던에 갔다 오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톰이 순진무구한 척, 해맑은 척 내민 카드였다. 돈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트레바니가 궁금해할지 모른다는 것만 빼곤 말이다. 트레바니도 디키 그린리프 사건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남들처럼 트레바니 역시 ‘연기처럼 사라진’ 디키 그린리프라는 특정 부분만 기억할 뿐, 나머지는 거의 잊었을 것이다. 나중에야 디키가 자살했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졌지만 말이다. 트레바니는 디키 그린리프가 남긴 유언장(톰이 위조했다)에 따라 톰이 상당액을 받는다는 것도 신문을 보고 알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작년에는 더와트 사건까지 있었다. 프랑스 신문에서는 더와트 사건보다, 톰의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간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 미국인 토머스 머치슨에 대해 관심이 더 많았다.

“좋으시겠어요.” 트레바니가 건조하게 말하며 윗입술에 묻은 거품을 닦았다. (P94)

누가 다가오고 있었다. 조너선이 고개를 들고 눈을 껌뻑거렸다. 톰 리플리였다.

리플 리가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반유리문을 열었다. “조너선, 그거 줘요. 올가미.” 리플 리가 조너선 옆에 서더니 창밖을 내다보는 척하며 속삭였다.

조너선은 놀란 나머지 별안간 머리가 멍해졌다. 톰 리플 리가 누구편일까? 마르칸젤로 편인가? 때마침 복도를 걸어오는 세 남자가 보였다.

톰이 조너선에게 바싹 몸을 붙여서 세 남자가 지나가도록 비켜 주었다.

남자들이 독어로 떠들며 식당 칸으로 들어갔다.

톰이 어깨 너머로 말했다. “올가미로 해 봅시다.”

조너선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했다. 리플리가 리브스의 친구라서, 이 계획을 알았구나. 조너선이 왼쪽 바지 주머니에 있는 올가미를 꺼내 톰에게 쥐여 주고는 딴청을 피웠다. 이제야 속이 다 홀가분하군.

톰이 재킷 오른쪽 주머니에 올가미를 쑤셔 넣었다. “필요할지도 모르니, 여기서 대기해요.” 톰이 화장실을 들여다보더니 빈칸으로 들어갔다. (P108-109)

“내가 녀석을 변기 칸 안으로 밀고 들어가 해치우면, 우리 둘이 녀석을 끌어내 기차 밖으로 밀어 버려야 해요.” 톰이 고개를 꺾으며 화장실 옆 출입문을 가리켰다. “내가 녀석을 끌고 변기 칸에 들어갈 테니,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문을 두 번 두드려요. 그런 다음 최대한 빨리 녀석을 치워 버리자고요.” 톰은 덤덤히 골루아즈를 한 개비 피운 다음 일부러 게으르게 하품했다.

톰이 화장실 칸에 들어가 있을 때 정점을 찍었던 조너선의 공포심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톰은 끝장을 보여 했다. 톰이 왜 이러는지 조너선은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톰이 일을 망치고는 나한테 다 떠넘기려는 걸까? 도대체 이유가 뭐지? 톰 리플리가 돈을 나누자고 할 공산이 더 커 보였다. 아니, 남은 돈을 아예 다 달라고 할지도 모른다. 순간, 조너선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보니 톰도 조금은 긴장한 것 같았다. 톰은 화장실 맞은편 벽에 몸을 기댄 채 신문을 들고만 있고 읽지는 않았다. (P111)

“그건 그렇고, 리브스한테는 당신 혼자서 했다고 해요. 내가 기차에 탄 걸 리브스는 몰라요. 모르는 게 훨씬 나아요.”

조너선은 정반대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던 터라 톰의 얘기를 소화하기까지 잠시 시간이 걸렸다. “난 당신이 리브스하고 친한 줄 알았어요.”

“친하긴 한데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닙니다. 서로 거리를 두죠.” 톰이 속으로만 생각하던 말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트레바니가 자신감을 가지도록, 겁먹지 않도록 적당한 말을 해 주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당신 말고는 내가 기차에 탄 걸 아무도 몰라요. 가명으로 표를 끊었거든요. 여권도 가짜였고, 올가미를 쓰라는 계획에 당신이 난감해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리브스하고 통화하다가요.” 톰은 시동을 걸고 라이트를 켰다. “리브스가 좀 미쳤죠.”

“미쳤다니 어떻게요?”

오토바이가 강렬한 헤드라이트를 쏘며 굉음과 함께 코너를 돌더니 톰의 차를 스쳐 지나가며 시동 소리를 삼켜 버렸다.

“리브스는 게임을 하는 사람이에요. 아시겠지만, 본업은 물건을 받아서 다른 데로 갖다주는 장물아비거든요. 스파이 게임 같은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는데, 적어도 아직까지는 잡히지 않았어요. 원래 잡혔다가 풀려나고 그러잖아요. 리브스가 함부르크에서는 꽤 성공했다는데, 아직 난 그 집에도 못 가 봤습니다. 리브스는 이쪽 일에 손을 대면 안 됩니다. 그럴 그릇이 못 된다고요.” (P125)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어. 리플리란 남자는 사기꾼이나 다름없어. 진짜 사기꾼일지도 몰라. 그 많은 사기꾼이 다 잡히는 건 아니잖아. 그래서 내가 하나 물어볼게. 당신 말이야. 그 큰돈, 어쩌다 보니 리플리 씨한테 받고 있는 거, 맞지?”

조너선은 시몬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그가 이미 뱉어 놓은 말을 사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돈이 리플리와 ‘그렇게까지’ 얽혀 있는 건 아니지만, 톰과는 무관하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 될 것이다. “내가 어떻게? 무슨 이유로?”

“리플리는 사기꾼이니까. 무슨 이유인지 누가 알겠어? 그 남자가 독일 의사하고 무슨 작당을 벌인 걸까? 당신이 말하는 의사라는 사람들이 진짜 의사는 맞아?” 시몬이 점점 히스테리를 부리며 핏대를 올렸다. 이미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조너선이 인상을 찌푸렸다. “여보, 페리에 박사한테 내가 받은 검사 결과지가 두 장이나 있어!”

“그 임상 시험이라는 게 굉장히 위험한 거 맞지? 위험하지도 않은데 그렇게 큰돈을 줄 리가 없잖아. 안 그래? 난 당신이 모두 다 말해 주진 않은 것 같아.”

조너선이 씩 웃었다. “톰 리플 리가 뭘 할 수 있겠어? 아무것도 못해. 미국 사람이 독일 의사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당신은 당신이 얼마 못 살까 봐 겁이 나서 의사를 만나러 독일까지 갔잖아. 당신이 조만간 죽는다고 소문을 낸 사람은 리플리야. 확실해.” (P141)

“벨옹브르가 언제까지 무사할 수 있을까? 어디에서 출몰할지 모를 마피아가 떠오르자 톰은 기분만 상했다. 아무 데서나 기어 나와 어디로든 쏜살같이 내빼는 바퀴벌레 같은 마피아. 그가 엘로이즈와 아네트 여사를 먼저 내보내거나 같이 나가서 집을 비우기라도 하면, 마피아가 벨옹브르에 불을 지를지도 모른다. 하프시코드가 불에 타거나, 폭탄이 터져서 산산조각이 나는 모습이 떠올랐다. 주로 여자들에게 보이는 집과 가정에 대한 애착을 그 역시 갖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P161)

“여보! 문 열어! 우리 얘기 좀 해!” 시몬이 고함쳤다.

톰이 조용히 말했다. “내가 택시를 다시 불러 줄 테니 밖에서 같이 기다려요. 나가서 다른 사람들하고 사업 얘기를 하고 있다고 둘러대라고요.”

조너선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빗장을 밀었다. 조너선은 현관문을 아주 살짝만 열고 몸만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시몬이 현관문을 벌컥 열더니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여보! 미안한데.....” 시몬이 집주인인 톰 리플리를 찾으려는 듯이 숨을 몰아쉬며 집 안을 둘러보다가 톰을 발견했다. 동시에 바닥에 너부러진 두 명의 남자도 보고야 말았다. 시몬이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핸드백이 손에서 스르르 빠지면서 대리석 바닥에 콩 하고 떨어졌다. “세상에!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조너선이 아내의 손목을 꽉 붙들었다. “보지 마, 저 사람들은.....”

시몬이 뻣뻣이 서 있었다.

톰이 시몬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부인, 겁먹지 마시죠. 녀석들이 집에 쳐들어와서요. 의식을 잃은 것뿐입니다. 얼마나 난감했는지! 조너선, 주방으로 모시고 가요.”

시몬은 걷지도 못하고 휘청거리는 몸을 남편에게 잠시 기댔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고 톰을 째려보았다. “둘 다 죽었잖아요! 살인자들! 말도 안 돼! 조너선! 당신이 여기에서 이러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

톰이 카트로 향했다. “부인께 브랜디를 드리면 어떨까요?” 톰이 조너선에게 권했다.

“종죠. 여보, 주방으로 가자.” 조너선이 아내를 데리고 시신 사리를 헤쳐 가려고 했지만, 시몬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톰은 위스키 병보다 브랜디 병을 따기가 힘들자, 카트에 있던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톰은 위스키 잔을 들고 시몬에게 다가가 점잖게 말했다. “부인, 처참하게 보이겠지만, 저놈들은 마피아예요. 이탈리아 마피아요. 우리 집에 절 죽이러 왔다고요.” 톰은 시몬이 몸에 좋은 약을 마시듯 얼굴을 찡그리지도 않고 위스키를 마시는 걸 보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조너선이 절 도와줘서 무척 고맙게 생각합니다. 조너선이 없었더라면.....” 톰이 말을 멈추었다. 시몬의 가슴 속에서 분노가 또다시 들끓고 있었다.

“이이가 없었더라면요? 이이가 여기에서 지금 뭐 하는 거죠?” (P195-196)

“머리 대고 눈 좀 붙여요. 조너선. 자도 돼요. 몸은 괜찮은 거죠?”

조너선은 몸 상태가 어떤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기운이 없긴 했지만, 그거야 자주 있는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생각하기가 두려웠다. 지금쯤이면 두 녀석의 살과 뼈가 검게 그을리며 타들어 가겠지. 개기 일식처럼 갑자기 슬픔이 조너선을 덮쳤다. 방금 전 몇 시간을 지워 버리고 싶었다. 기억에서 도려내고 싶었다. 하지만, 조너선은 현장에 있었고, 차를 운전 했으며, 시신 처리를 거들었다. 머리를 대자 선잠이 밀려왔다. 톰이 신나서 계속 떠들었다. 옆에서 이따금 맞장구쳐 주는 사람이 있다는 듯이 톰이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톰이 이렇게 한껏 들뜬 모습은 조너선에겐 처음이었다. 시몬한테는 뭐라고 하지? 조너선은 생각만 해도 맥이 풀렸다.

톰이 입을 다물지 않았다. “영어로 미사곡을 부르잖아요. 난 그게 참 난감하더라고요. 여기 프랑스 사람들은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 자기네들 말로 떠드는 강론을 이해했다고 칭찬하거든요. 그런데 영어로 미사곡을...... 성가대가 제정신이 아니거나, 아니면 거짓말쟁이만 모아 놓은 거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렇지 않아요? 존 스테이너 경 같은 합창곡 작곡자가.....”

차가 멈추자 조너선은 잠에서 깼다. 톰이 갓길에 차를 대고 웃는 얼굴로 보온병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톰이 권하자 조너선도 조금 홀짝였다. 그러고는 다시 출발했다.

새벽이 내려앉은 마음이 보였다. 조너선이 처음 보는 곳이었다. 동이 트는 모습을 보자 잠이 달아났다.

“20분만 더 가면 집이에요!” 톰이 해맑게 말했다.

조너선은 중얼거리다가 다시 눈을 살짝 감았다. 이제는 톰이 집에 있는 하프시코드 얘기를 떠들었다.

“바흐는 딱 듣는 순간 울림을 주죠. 한 소절만 들어도.....” (P204-205)

“돈이니, 시체니, 젠장! 독일 의사들이 건 판돈을 내가 보관하는 거라고 했다고요.” 판돈이니, 내기니 하는 말이 조너선에게조차 터무니없이 들렸다. 그 돈을 굉장히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충분히 설명했다고 해도, 시몬이 두 눈으로 목격한 두 구의 시신이 훨씬 더 생생하고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차가 꽤 속도를 내며 달리고 있었다. 나무를 들이박든, 도로에서 튕겨 나가든 조너선은 상관없었다. “한 마디로 말해, 사람이 죽었잖아요. 내가 살인을 거들었든, 직접 죽였든, 시몬은 바뀌지 않을 거예요.” 마가복음 8장 36절이 떠오르자, 조너선은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그는 온 세상을 다 얻은 것도 아니었지만, 영혼을 팔아먹은 것도 아니었다. 사실 그는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오히려 자존심을 믿는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었다. 조너선은 자존심만 챙기느라 시몬을 잃고 말았다. 그에게 시몬은 삶의 원동력이었다. 그렇다면 그게 자존심이 아닐까?

시몬이 조너선에 대한 태도를 바꿀 리 없겠지만, 톰은 잠자코 있었다. 집에 가면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진심이 아닌데도 위로와 희망이 담긴 말을 건네고 화해하라고 권하라고? 여자란 존재에 대해 과연 누가 뭘 알겠는가? 때론 여자가 남자보다 도덕심이 강했다. 그런데 유독 정치판의 사기꾼과 깡패가 결탁하는 경우에는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줏대없고 이중적 사고를 하는 경향이 월등히 강하다고 톰은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시몬은 대쪽 같은 청렴함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시몬이 성당에 다닌다고 조너선이 얘기하지 않았던가? 이쯤 되자 톰은 괜히 리브스 마이넛도 생각났다. 리브스는 별다른 이유 없이 예민하게 굴었다. 빌페르스로 빠지는 길이 별안간 나타나자, 톰은 서서히 차를 몰아 익숙하면서도 조용한 거리로 들어섰다. (P224)

“트레바니 부인?”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시몬의 비명이 신음으로 바뀌었다. 이제 징징거리는 소리가 복도를 따라 주방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건장한 사내가 시몬의 입을 틀어막은 채 거칠게 밀자, 시몬의 뒤꿈치가 질질 끌렸다. 남자가 주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톰은 왼편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와 남자의 모자 밑으로 보이는 목덜미를 망치로 후려쳤다. 남자가 의식을 잃진 않았지만, 시몬을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남자가 몸을 바로 세우려는 순간, 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망치로 남자의 코를 내리찍었다. 남자가 쓰고 있던 모자가 벗겨지자, 톰은 도살장에 끌려온 소에게 달려들 듯 남자의 이마를 정통으로 때렸다. 남자는 다리가 풀렸는지 풀썩 주저앉았다.

톰은 일어서는 시몬을 구석에 있는 청소함으로 데려갔는데, 복도에서는 보이지 않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집 안으로 한 명이 더 들어왔을 것이다. 적막이 흐르자, 톰은 녀석이 올가미를 쓰고 있다고 직감했다. 톰은 망치를 들고 복도를 따라 현관 쪽으로 이동했다. 최대한 조용히 움직였지만, 거실에 있는 마피아에게 인기척이 들렸을 것이다. 녀석은 조너선을 바닥에 눕혀 놓고 마피아의 유서 깊은 무기인 올가미를 당기고 있었다. 톰이 망치를 쳐들고 달려들자, 회색 정장에 회색 모자를 쓴 마피아가 올가미를 손에서 놓고 견대에서 총을 꺼내려 했다. 그 순간, 톰이 녀석의 광대뼈를 후렸다. 테니스 라켓보다 정확하게 망치를 휘두르자 녀석이 제대로 서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지려 했다. 톰이 재빨리 왼손으로 모자를 벗기는 동시에 오른손으로 다시 망치질을 했다.

쩍! 리바이어던처럼 시커멓고 작은 눈이 감기고 벌건 입술이 헤 벌어지면서 녀석이 바닥으로 쿵 쓰러졌다.

톰이 조너선 옆에 무릎을 꿇었다. 나일론 끈이 이미 조너선의 목을 파고 든 상태였다. 톰은 조너선의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며 끈을 느슨하게 풀어 주려고 애를 썼다. 조너선도 잇몸을 드러낸 채 손으로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버둥거렸지만, 역부족이었다.

느닷없이 시몬이 뭔가 손에 들고 옆으로 달려왔다. 편지를 뜯을 때 쓰는 칼 같았다. 시몬이 목 옆쪽에 칼끝을 걸자 올가미가 끊어졌다.

톰은 일어서다가 중심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래도 다시 일어나 정면 유리창 커튼을 치면서 커튼 사이를 10센티미터 남짓 벌려두었다. 마피아 두 녀석이 집에 들어온 지 1분 30초는 지난 것 같았다. 톰은 바닥에 떨어진 망치를 주운 다음 현관으로 가서 빗장을 다시 걸었다. 밖은 조용했다. 인도를 오가는 발소리와 지나가는 차 소리만 들렸다.

“여보.” 시몬이 불렀다. (P231-232)

“시몬 트레바니 부인은 이탈리아인 두 명이 아무 이유도 없이 집으로 쳐들어왔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그들이 초인종을 누르더니 집 안으로 쳐들어왔고, 트레바니 부인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편의 친구가 남편을 도왔고, 부부와 아들을 퐁텐블로 병원까지 데려다주었다고 진술했다. 남편은 병원에 도착한 당시 이미 숨진 상태였다.”

도왔다니, 톰이 집에서 마피아 두 명의 두개골을 박살 내는 것을 시몬이 보고도 ‘도왔다’고 진술했다는 게 놀라웠다. 조너선과 톰이 그간 총을 차고 나타난 마피아 넷을 상대했던 걸 돌이켜 보면, 망치로 간단히 해치우긴 했었다. 톰은 긴장이 풀렸는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웃음에 히스테리가 조금이라도 섞인들 누가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앞으로 신문에 자세한 후속 보도가 실릴 것이다. 만약 신문에 나오지 않더라도 경찰이 시몬에게 혹은 톰에게 직접 연락할 수도 있다. 보아 하니 시몬이 남편의 명예도 지키고 스위스에 있는 비상금도 지키려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이미 경찰에 훨씬 자세히 털어놓았을 것이다. 톰 리플리의 이름은 물론, 의심스러운 정황까지 진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신문에 트레바니 부인이 나중에 자세히 언급하기로 했다는 내용이 실렸을 것이다. 시몬이 아무 말 하지 않은 게 확실했다.

조너선 트레바니의 장례식은 5월 17일 수요일 오후 3시에 생루이 성당에서 거행됐다. 수요일이 되자 톰은 장례식에 참석하고 싶었지만, 시몬의 입장에서는 톰이 얼굴을 보여서는 안 되는 자리였다. 결국 장례식은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들을 위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톰은 장례식이 열리는 동안, 정원을 가꾸며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온실을 짓는 일 때문에 빌어먹을 일꾼들을 닦달해야 했다). 톰은 조너선이 총알을 막으려고 일부러 몸을 날렸다는 확신이 점차 강해졌다.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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