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이 기억을 본다

[7화 휴머니즘은 개한테나 던져줘]

by 노용헌

그사이 앙리는 사진기자가 되었다. 위험천만해 보이는 이 직업을 샤를람은 경멸조로 '쌈닭 사진가'라 부른다. 아프리카나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근동에서 벌어지는 그 모든 싸움질을 어쩌겠다는 걸까? 동족상잔에 빠져 있는 그 먼 동방의 나라들과 그가 대체 뭐가 '가까워서'? 분규와 살상이라면 유럽도 넌더리가 날만큼 겪지 않았던가. 아무튼 샤를람은 살육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제일차세계대전이 그의 청소년기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십 년 후에 닥친 제이차세계대전은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내며 더한층 암울한 그림자로 옥죄어왔고 그다음에는 식민지들의 독립전쟁이 확산되었다. 저마다 제 몫의 독립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제자리에 얌전히 머물러 있는 편이 좋다.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나자빠져 죽는지 가까이 가서 볼 필요가 뭐 있단 말인가. 결과는 언제나 매한가지다. 도살장의 악취, 그런데 앙리가 감히 그것들을 증언하겠다니 얼마나 가소로운 노릇인가! 각자의 증언은 상충하거나 모순되며, 전쟁으로 전쟁을 몰아내다보면 결국 모든 전쟁은 매한가지가 되고 만다. 게다가 어느 누구도 학살에 직접 연루된 이들을 대신해 증언할 수 없다. 희생자와 살인자의 위치가 왕왕 바뀌기도 하지 않는가. 그렇다. 둘은 뒤바뀔 수 있다. 선한 자들과 악한 자들의 집단을 반으로 싹둑 잘라 울타리 양쪽에 세워둘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도 저도 아닌 평범한 인간들이 존재할 따름이며, 이런저런 상황이 졸지에 그들을 꽁꽁 얼어붙게 하거나 미친 듯한 열광에 빠뜨릴 수도 있다. 오늘 고문당하는 사람이라도 상황이 바뀌기 무섭게 고문자가 될 수 있는 노릇이고, 어제 천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전능한 형리도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불의에 항의한다. 사람들에게 전권을 부여하고 온전한 방종을 허용해보라. 순식간에 대다수가 권리를 후안무치하게 오용하고 남용할 것이다.

-실비 제르맹, 숨겨진 삶-


그해 여름에 새로운 인터넷 언론을 만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작은 기획사에서 사진기자로 있던 나에게 새로운 제안을 해왔다. 사진중심의 언론사를 만들겠다고 야심차게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작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대여섯명의 사진기자들을 모집하고, 담당 사진 부장을 누가 맡느냐였다. 나이가 엇비슷한 사람이 4명이었고, 나머지는 신입으로 3명, 그리고 상황을 봐서 충원을 하려고 했다. 사무실은 마련되었지만, 사진기자들이 사용할 장비라든지, 여러 가지 사진 기획에 대한 논의가 필요했다. 기사 제작 도구인 집배신(CTS)에 대한 문제도 해결되어야 할 부분이었다.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작업에는 잡음이 일기 마련이다. 이런 저런 이유들이 있겠지만. 목소리를 키우는 사람과 조용히 따르려는 사람. 어쨌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켜야 한다는 것이 정글의 법칙처럼 작용한다.


A는 사진부장, B는 영상부장이라고 직함을 정하고, 서로간의 주도권을 쥐고자한 기싸움이 보이지 않지만 보였다. 되지도 않은 말싸움이란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인데도 말이다. 어쨌든 상대방을 누르고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깃발을 빼앗는 놀이에서처럼, 승자는 깃발을 빼앗아야 하니까. 기싸움을 하든, 뭐하든, 나는 관심이 없으니까 별 생각이 없었다. A와 B의 주도권 싸움은 내게 불똥이 튀었다. ‘참 가지가지한다. 고만고만한 녀석들이 말이다....’ B는 부원들의 사진 실력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이번 주 안에 탑골 공원에 가서 사진을 찍어 와라.” “내용은 각자 알아서들 하고.” 그의 말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뭐야 테스트를 하는 거야?, 별 미친놈 다 봤네.’ 그러면 실력이 없으면 자른다는 것인가? 뭐야 지가 인사권자여? 신입도 아닌데 말이야. 타임지에 사진이 실렸고, 분쟁지역에서 사진을 찍었다고는 하지만 자기 사진만 사진이고, 남의 사진은 형편없다는 건가 뭔가? 하여간 기분 더럽게 나쁘네.


1998년 수단의 대(大)기근으로 먹는 것조차 힘들었던 곳에서 <국경없는 의사회>와 함께 구호 캠프의 활동을 찍은 사진가가 있었다. 톰 스토다트(Tom Stoddart)의 사진은 서있기도 힘들 정도의 뼈만 앙상한 아이들의 끔찍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지구상의 한쪽은 비만으로, 한쪽은 기아(굶주림)로 고통 받고 있다. 같은 장소인 수단의 <굶주린 소녀>의 사진은 뱅뱅클럽의 일원이었던 케빈 카터의 사진도 떠오른다(카터는 이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받았지만, 아이를 구하지 않았다는 비난으로 이후 심리적 고통으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저울에 매달린 아이’ 사진의 세바스티앙 살가도 외의 많은 사진가들이 아프리카의 기아문제를 주제로 사진을 찍었던 것 같다. 사진은 충격적일수록 더 많은 모금을 할 수 있다고, 빈곤과 가난을 선정적으로 다루는데 일조(一助)한다. 사진가는 결국 이러한 논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사진가는 관찰자로서 기록자로서, 상황(사건)에 개입하지 말아야 하는가?” 또는, “기록도, 보도도 모든 사진은 사진가의 윤리적 태도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과연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사진의 도덕성 문제는 사진가의 도덕적 태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런 점에서 사진가의 관점은 사진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가 무슨 의도로, 무슨 생각으로 촬영했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은 사진은 껍데기의 위선(미적인 것의 탐닉)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단지 그는 무겁고, 어둡고, 암울한 주제, 촬영하기 힘든 주제를 선택해서 자신의 미적인 사진으로 포장하고 있는지도. 수잔 손택이 말했던 ‘타인의 고통’은 이제 넘쳐나는 사진에 의해 무감각해진다고 말하듯이, 잔혹함은 우리와 상관없이 익숙함으로 바뀐다. ‘재난과 고통이 예술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도덕(道德)이란 무엇인가?”

“선(善)이란 무엇인가?”


땅바닥에 선(line)을 긋고 이쪽은 선(善)하고, 저쪽은 악(惡)하다고 규정할 수 있을까? 사진가는 내부자(insider)인가, 외부자(outsider)인가?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선(line)들을 가지고 있다. 영화제작자에게 중요한 것은 연속성과 가상선이다.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고, 관객을 몰입시키기 위해서는 180도의 가상선을 긋고, 연속성을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움직임이나 위치, 내용과 시간이 일치되지 않는 연속성이 없다면, 관객은 외면하게 된다. ‘선을 넘지 말라’(180도 법칙)은 영화제작에 필수적인 요소인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들은 심정적(心情的) 기준인가, 보편적 기준인가.....


촬영하기 쉽지 않은 장소에서 촬영을 했다는 점에서, 그 사진가의 사진은 주목된다. 아무튼 그 사진이 이름난 신문이나 잡지에 게재되거나, 특별한 상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 사진가의 윤리적인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만약 그가 자신의 특별한 사진을 위해서, 금강송을 찍고 베어버린다든가, 육추(育雛)의 장면을 찍기 위해 어린 새를 학대하며 찍은 사진이라면, 사진가는 비난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재난이나 분쟁지역의 사진으로 유명한 사진가의 이면이 그 상금으로 단란주점의 술집에서 기이한 행동을 했다면, 그의 사생활은 그의 사진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까. 사진은 사진일 뿐, 그가 성추행을 하든 말든 그의 사적 윤리(그의 도덕적 취향)는 사진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 있다. 가뜩이나 사회는 사기꾼이나, 쓰레기들로 넘쳐나 있다. 휴머니즘을 논할 자격이 있을까. 휴머니즘과는 전혀 별개이다. 그저 특종을 낚고자 했을 뿐이며, 남들과는 특별한 무언가를 관음적(觀淫的)으로 찾고자 했을 뿐이다. 인식 수준은 자기만족일 뿐이다. 그들의 상황의 동정심도 아니고, 그들을 존엄한 인간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단지 사진적으로 포토제닉한 대상일 뿐이다. 나-타자는 연결되어 있지 않다. 나-자연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에게 이익이 되면 좋은 것이고, 나 외의 모든 것은 이용 가능한 대상일 뿐이다. 사진은 문제상황만을 보여줄 수는 있다. 전혀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방관적인 입장일 뿐이다. 나는 이상주의자도 예술가도 아니다. 그저 사진을 찍는 찍사이다. 스티커(sticker) 사진방에 찍혀지는 사진처럼, 현실을 복제할 뿐이다(리얼리티는 과연 현실인가?). 사진은 선한 사람을 악한 사람으로, 악한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탈바꿈 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성형미인을 만드는 건 포토샵이 아니라, 성형외과 병원에서 할 일이다. 오히려 도덕적이라고, 휴머니즘을 신봉하는 사진가인 듯이 위선을 떠는 게 더 역겹다고. 어차피 사진은 휴머니즘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그가 사회주의자이든, 생태주의자이든, 민주주의자이든 상관없이 자본에 의해 찍을 뿐이고, 돈벌이의 수단이자, 명예의 수단일 뿐이라고, 휴머니즘은 개한테나 던져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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