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슬픔이란 빚을 갚는 중이에요]
나는 달아나고 싶다. 내가 아는 것으로부터, 내 것으로부터, 내가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달아나고 싶다. 나는 홀연히 떠나고 싶다. 불가능한 인도나 모든 것이 기다리는 남쪽의 섬나라가 아니라, 어딘가 알려지지 않은 곳, 작은 마을이나 외딴 장소, 지금 여기와는 아주 다른 곳으로, 나는 이곳의 얼굴들을, 이곳의 일상과 나날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나는 낯선 이방인이 되어 내 피와 살 속에 뒤섞인 위선에서 벗어나 쉬고 싶다. 휴식이 아니라 생명으로서 잠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싶다. 바닷가의 작은 오두막, 아니 험난한 산비탈 벼랑의 동굴이라 할지라도 내 이런 소망을 채우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 의지는 그렇지 못하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안 지나 나는 작은 출판사에 취직을 했었다. 바로 직장을 구한 것도 어머니가 진 빚 3천만원과, 대학 등록금의 학자금 대출금을 갚기 위해서였다. 매월 갚는 학자금 대출은 거의 갚아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빚은 남아 있고, 또 은행에서 빌린 마이너스 2천만원의 대출이 있다. 계속해서 일을 해야 했고, 일을 하는 것은 삶의 여유나, 목돈을 모아 미래를 계획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빚은 더 많은 빚을 만들 뿐이었다. 삶이 태어나면서 빚을 지고 살아간다. 인생은 빚을 다 갚게 될 때 결국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더 우울해진다.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밤 늦게 돌아온 원룸 집은 어두컴컴하다. 현관문을 열고, 내 방에 작은 스탠드(stand)의 불을 키고 앉았다. 책상위에 어지러진 책과, 노트들을 한켠으로 정리하고 편의점에서 사온 캔맥주로 목을 축인다. ‘아, 오늘도 빚을 벗어나, 스탠드의 불빛을 본다.’
책상위에는 집 근처 서점에서 사온 <빚 갚는 기술>이란 책이 놓여져 있었다. 저자는 오노레 드 발자크(Honore de Balzac)이다. <고리오 영감>이란 소설로 유명한 작가인데, ‘뭐 이런 책도 다 있나 싶어’하며, 사온 책이다. 평생 빚에 쫓기며, 빚쟁이를 피해 숨바꼭질하듯 수없이 이사 다니며 글을 썼다고 하던데, 하여간 위대한 작가도 이런 괴상한 글을 다 쓰는가 하고 궁금하기도 하고, 뭐라 썼는지 읽고 싶었다. 발자크에게 글은 살기 위해서, 부채를 갚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출판사의 독촉은 그가 반드시 갚아야 하는 빚으로 그의 원고들은 차압당하는 빚이었다. 계속해서 쓰고 지우고, 다시 교정을 보고... 빚의 채무에 발버둥을 쳤다. 도대체 언제 다 갚을 수 있는 거야, 라고 말하면서... 멍하니 불빛만 바라보았다. 서랍에 넣어 두었던 메모장을 꺼냈다. 오늘 할 일은 뭐였더라.
빛이란 글자에서 한 획을 빼면 빚이 된다. 삶은 빛과 어둠이 교차하면서 지속적으로 진행된다. 낮과 밤이 있듯이, 마치 기쁨과 슬픔은 혼재해 있다. 기쁨과 슬픔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조증과 울증은 일생의 주기의 한 사이클(cycle)이다. 자전거 페달의 바퀴를 돌릴 때마다 달라진다. 단지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뿐이다. 시계추의 움직임처럼 왔다 갔다 하니까. 대학 강의 시절 제출한 원고들에는 빨간 줄이 그어져 있다. 원고들은 글자 한 가운데를 빨간 펜으로 죽죽 그어져 있고, 삭제 표시인 X나 사선이 그어져 있고, 돼지꼬리도 있다. 단어들은 삭제되거나 첨가되어 있다. 내 노트는 온통 빨간 줄로 그어져 있다. 썼다 지웠다, 무한 반복된다. 기억이 망각과 함께 무한 반복되는 것처럼. 망각은 빨간 줄이다. 기억을 일시적으로 지운다. 기억과 망각의 이중주는 리듬과 멜로디처럼 서로 상호보완적이다. 사진은 빛으로 그린 그림이다. 사진은 기록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글은 그 기억을 지우는 작업이다. 빛의 한 획을 지우고, 망각이란 빚으로 향하고 있다. 글을 쓰는 이유는 망각을 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슬픔이란 빚을 지우기 위해서....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한 손에는 원죄인 빚을 주고, 한 손에는 그 빚을 갚으라는 자유의지를 주었다. 끊임없이 굴러 떨어지는 돌을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Sisyphos)에게도 자유의지를 주어 돌을 밀어 내고 있듯이 말이다. 우리는 만약 죽어서 가게 되는 연옥의 법정에서 판관은 물을 것이다. “너는 너의 빚을 다 갚았느냐고?” 죽음은 자신의 원죄, 빚에서의 해방이다. 자살은 빚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거나 도망가기 위한, 개인 파산선고이다. 그 빚에 자유로운 인간은 아무도 없다. 나는 언젠가 거리에서 구걸을 하는 노숙인들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땅바닥에 코를 처박고, 두 손을 모아 구걸을 한다. 그들은 빚을 갚을 능력(자유의지)을 상실했다. 아니 파산했다고 봐야 할지 모른다. 돈을 벌어야 빚을 갚을 수 있는데 말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너의 채무는 얼마이니, 돈을 벌어야 한다고, 채권자(신)는 몸값을 매겨놓았다. 삶의 차용증명서이다. 인생은 공수레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라는 말은 틀린 말이다. 어쩌면 보이지는 않은 빚을 가지고 태어났고, 빚을 다 갚아야 죽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진 짐 보따리를 풀면 빚이 수두룩 쏟아져 나올 것이다. 비로소 깨달았다. 아 삶은 내가 가진 빚더미이구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빼앗긴 마음에도 봄은 올까?”
돈이 많으면 마음이 넉넉해질까, 마음이 넉넉해지면 돈 걱정을 안 할 수 있을까. 마음의 빚을지지 않을 수가 있을까. ‘타인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루도 폐를 끼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give-and-take)’라고 말하기도 하고, 가는 정이 고와야 오는 정도 곱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도 않고,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도 잘 사는 사회라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대로 생각하면, 자신의 존재가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은 사회, 그런 사회가 존재할 수 있을까 말이다. 질병 때문에 일을 못하게 되거나 장애를 가지거나, 어떤 이유로 우리는 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사회에서는 사회에서 교환가치가 없는 사람이 되곤 만다. 나는 나의 빚을 갚을 능력을 상실한 사람이다. 그런 상상을 하게 되면 더욱 우울해진다. 나는 과연 사회에 빚진 마음을 다시 돌려줄 수 있을까.
은정(恩情), 은혜(恩惠), 의리(義理), 인정(人情), 보살핌, 도움, 지원, 은덕(隱德), 선행. 뉴스에는 가끔 이런 미담기사들이 나오곤 한다. 폐휴지나 빈병을 팔아 모든 돈을 모아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들에게 기부를 했다는 할머니나, ‘남성당 한약방’을 운영하며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다는 김장하 선생 같은 사람들을 보면 아, 저런 사람들도 있구나 싶다. 누군가에게 슬픔을 지우고 기쁨을 나눠준다면. 그런 상상을 해본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빚이라는 글자에서 한 획을 더해 빛이 되는 상상을 해본다.
“선배, 이번 주말, 부여에 사진 찍으러 가는데 같이 갈 수 있어요?”
“거기에 뭐가 있는데.”
“신동엽 문학관도 있고, 바람도 쐬러 갔다 올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