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이 기억을 본다

[5화 안과 밖의 기록]

by 노용헌

“나는 가장 적고 가장 허름한 것만을 주시했다. 지극한 사랑의 몸짓으로 하늘이 위로 솟아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나는 하나의 내면이 되었으며, 그렇게 내면을 산책했다. 모든 외부는 꿈이 되었고 지금까지 내가 이해했던 것들은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바뀌었다. 나는 표면에서 떨어져 나와 지금 이 순간 내가 선함으로 인식하는 환상의 심연으로 추락했다. 우리가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이해하고 사랑한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라 어떤 다른 존재였으며,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진정으로 나 자신이었다.”

-로베르트 발저, 연필로 쓴 작은 글씨-


사진가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바라보는 시선이다. 그 시선은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 두 가지이다. 카메라 렌즈가 어디로 향하는 가에 따라서 달라진다. 밖으로 향한 렌즈는 기록의 의미이고, 안으로 향해진 렌즈는 망각의 의미이다. 나는 이런저런 것들을 카메라를 이용해 기록한다. 사진을 찍는다. 광장에는 어느 노(老)화가가 세밀하게 펜화를 그리고 있다. 작은 풀이나 꽃들을 세밀화로 그리듯, 도심의 건물들을 그린다. 펜의 끝이 광화문의 처마 위의 잡상(雜像)을 향하고 있다. 아마도 명소들을 그리고 있는 것일 테다. 그림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사진은 순식간에 이미지를 포착한다. 사진으로 찍은 것을 나중에 다시 보완해서 그릴 지도 모른다. 아무튼 오래 앉아서 사물을 관찰한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들을 쌓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오래 보아야 알 수 있듯이 말이다. 사진이 남긴 기억은 불완전한 기억이다. 메모장에 적어놓은 기억 또한 불충분하다. 뭔가가 빠져 있다. 빠진 조각들을 꿰맞추는 작업은 기억의 편린들을 꿰매는 작업이다. 기억은 그렇게 불완전한 요소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기억을 붙잡아 두려고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에 남겨진 사건들은 무슨 내용인지 설명이 없거나, 촬영 당사자가 아니면 그 분위기의 느낌조차 맡기 어렵다. 사진은 분석도 아니고, 해석도 아니다. 단지 있는 것(보이는 것)을 찍을 뿐이다.


길을 걷다보면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간다. 백구과극(白駒過隙)이다. 사진가의 카메라는 날아가는 화살을 멈춰 서게 만든다. 날아가는(흘러가는) 화살은 시간이고, 사진은 그 시간이 동결(凍結)된 상태로 고정된다. 시선은 활동기의 영상에서 한 부분을 캡처한다. 그 기억이 사진의 상태이다. 우리는 관심이 없는 것은 흘러가고, 관심이 있는 것은 동결(凍結)된 기억이다. 세상은 관심 있는 것들과 관심이 없는 것들로 나누어진다. 수잔 손택은 참여적 사진(concerned photography)이라고 말했다. 관심이 있다는 것은 과연 참여적인 것일까. 대부분의 무관심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관심이 있는 사람조차도 참여는 선택사항이다. 그 사건에 참여를 할지 말지는 그의 의지에 달려 있고, 또한 목적이나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그가 참여를 하게 될지는 모르기 때문이다. 행위에는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제일 쉬운 것은 돈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마치 거지에게 적선을 하듯 말이다.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행위의 가장 기본적인 원동력이 되니까. 돈이 없으면 어떤 행위도 하기 쉽지 않다. 움직이는 것에는 돈이 수반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가 말이다. 심정적(心情的)으로 지지는 하지만, 더 이상의 참여는 없다. 세상은 참여하는 자와 방관하는 자로 나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라고 말했다. 고통에 슬퍼하고 애도하는 자가 있다면 철저히 나와는 다른 일이라고 생각하며 무관심한 사람도 있다. 더 심하게 혐오로 막말을 쏟아붓는 사람도 있다. 사진가는 경계에 서 있다. 참여하자니 사건에 개입하는 셈이 되는 것이 아닌가하고. 잠시 머뭇거린다. 뒤로 빠져 멀리서 지켜본다. 로버트 카파는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가까이 다가서라고 했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다.


#장면 1 내심외경(內心外境)

천막을 치려했다. 건설노동자 Y열사 시민 분향소를 설치하려던 중이었다.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나, 시청광장에서도 분향소천막이 설치된 적이 있었다. 지금은 천막이 있던 자리에는 화분으로 놓여져 있다. 천막이 있던 곳은 화분으로 바뀌어져 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누구는 천막을 치려고 하고, 누구는 막으려고 한다. 사진가는 안과 밖을 목격한다. 카메라는 관찰자이면서, 목격자이고, 증언자이다. 그러나 사진가는 보이는 것만을 볼 뿐이다. 사실 왜 그런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할 겨를이 없다. 기계적인 과정 속에서 손은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다. 내가 촬영한 장면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외경(外境)을 사진 찍고 있다. 상황의 겉표면을 찍는다. 관찰자에게 내심(內心)은 잠시 잊혀진 기억이다. 기록이 기억을 앞서간다. 분석이나 해석은 그 다음 나중 일이다.

“경찰은 지금 즉시 안전하게 빠지세요!”

“촛불 문화제 보장해라!!!”

“...61조 75조에 해당하는 불법행위입니다. 천막 설치를 하는 불법행위를 중단해주시길 바랍니다.”

“경찰은 나가라! 나가라!”

“공무집행방해로 현행범 체포하겠습니다.”

“분향소를 둘러싸고 다함께 해주십시오.”

“구사대 폭력 물리친 우리.... 해방 깃발 아래 나선다. 흩어지면 죽는다....”

#장면 2 화두참구(話頭參究)

뚜벅뚜벅 몇 분을 걸었다. 한 아주머니는 인근 음식점을 홍보하기 위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또 다른 사람도 있다. 세 명의 사람이 체조 비슷한 것을 하고 있다. 파룬궁(法輪功)이라고 기(氣)공체조를 통해 수련하는 사람들이다. 광화문 사거리까지 걸어오다 보면 이런 저런 사람들이 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그리고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있는 사람,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 외국에서 온 관광객, 도를 믿으라는 사람, 이순신장군상에 절을 하고 있는 사람, 국정원에 감시당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 부정선거를 외치는 사람, 기후환경을 지키자는 사람, 교통경찰관 등, 별의별 사람들이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찍은 사진들은 그들의 외관, 단편일 뿐이다. 그들의 스토리는 사실 인터뷰를 해야지 알 수 있다. 사진은 극히 일부분의 기억이고,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점점 더 그 맥락은 이해되지 않고 그 기억은 약해진다.


강남역 사거리 CCTV 철탑 위에도 한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광화문 사거리 건물과 국가인권위 건물 위에도 사람이 있었다. 해고노동자들이다. 그들은 고공농성 중이었다. 기업들이 정리해고에 따른 노동자들의 파업투쟁과, 그들의 외침은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무엇이 그들의 절박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사진가는 그들의 심정을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사람의 얼굴에는 수만 가지의 표정들이 있고, 이야기들이 있다. 도로시아 랭의 유명한 사진 <이주민 어머니의 초상>은, 그녀가 대공황 시기의 빈곤에 의해 이주하고 있는 한 어머니의 상심을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얼굴은 수많은 이야기를 전달한다. 랭은 “카메라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여주는 도구다.”라고 말했다. 과연 우리는 침묵의 언어인 사진을 통해서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을까. 같은 시기 또 다른 사진가 워커 에반스가 촬영한 여성의 모습이다. 그의 사진은 기념사진처럼, 아무런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아 보인다. 있는 그대로의 기록이 그의 객관적인 다큐멘터리 스타일이다. 에반스는 “나는 문서적 스타일을 추구한다. 감정을 배제하고 사실을 기록한다.”고 말했다. 나는 어떤 풍경을 보았던가. 어떤 서사를 보았던가. 사진가는 안과 밖의 문턱을 넘어서는 경계선에도 있지만, 그의 주관과 객관의 경계선에도 있다. 주체(subject)와 객체(object)는 경계를 구분짓고 있다. 사진가는 표현에 있어서 주관적으로 할 것인지, 객관적으로 할 것인지 선택의 경계선에 있다. 과연 나는 주관적으로(객관적으로) 보고 있는가 말이다.


“해고는 살인이다”

#장면 3 성의정심(誠意正心)

해고 노동자들의 오체투지 행렬이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그들은 두 손, 두 다리, 온 몸을 바닥에 부딪히고 있었다. 차가운 냉기가 온몸으로 전해질 것이다. 하얀 소복을 입고, 00노조 조합원들이 오체투지를 통해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하고자 했다. 그 행렬은 세월호 천막까지 왔고, 청와대 앞으로 가지는 못했다. 사진가의 눈 앞에는 한 사건(event)이 있었다. 사건이란, 그 상황은 우연적인 만남(accident)이다. 오체투지 행위를 하고 있는 우연적인 사건에 사진가는 카메라라는 도구로 기록을 한다. 카메라는 그 사건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개입을 하게 되고, 그 개입의 경계에 직면한다. 과연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전달자인가, 아니면 단지 엿보는 자인가. 사진은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믿었다. 과연 진실을 전달하는 메신저(messenger)인가. 가끔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오체투지를 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면서 나는 무력감을 느낄 때가 많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단지 오브제로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관음증의 환자들이 유리 창문(lens)을 통해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겨질 때 암울해진다. 우울한 세상은 더욱 불편하게 만든다. “이런다고 뭐가 바뀝니까?” 사진으로 세상이 정말 바뀔까. 혹여 정심(正心)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나는 묻고 또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