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이 기억을 본다

[4화 슬픔을 헤아려본다는 것]

by 노용헌

슬픔이 마치 두려움과도 같은 느낌이라고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았다. 무섭지는 않으나, 그 감정은 무서울 때와 흡사하다. 똑같이 속이 울렁거리고 안절부절못하며 입이 벌어진다. 나는 연신 침을 삼킨다.

어떤 때는 은근히 취하거나 뇌진탕이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세상과 나 사이에는 뭔가 보이지 않는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 다른 사람이 뭐라 말하든 받아들이기 힘들다. 아니,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게다. 만사가 너무 재미없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란다. 집이 텅 빌 때가 무섭다. 사람들이 있어 주되 저희들끼리만 이야기하고 나는 가만 내버려 두면 좋겠다.

-헤아려본 슬픔, C.S. 루이스, P19-


슬픔에 대한 기억은 D와는 조금 다르다. 아니 완전히 다를 수 있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망각되어진 것들의 끄트머리에 있는 것이다. 1989년 여름. 여수 여객선 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남해안 섬에 갔을 때의 기억이다. 그녀는 백도에 갔던 것으로 기억하고, 나는 흑도에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해안의 섬들은 꽤 많은데, 백도는 무인도이고, 흑도는 사람이 거주하는 섬이었다. 우리의 시각은 백과 흑으로 갈리었다. 마치 흑백사진처럼 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백도 아니고 흑도 아닌 중간 수역(水域)이었다. 며칠 전 뉴스는 그러한 트라우마를 재확인시켜주었다.

“전남 여수 해상에서 조업 중이던 00호가 돌연 침몰하여 승선한 14명의 선원 중 1명이 실종되는 해상 사고가 발생했다. 새벽 1시 41분경, 여수시 삼산면 하백도 동쪽 17Km 해상에서 마지막 신호를 남기고 레이더에서 사라진 00호는 몇 시간 후 바다 깊숙이 가라 않았고, 실종자에 대한 수색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텔레비전에서는 뉴스 속보라고 방송이 나오고 있다.


30년이 지났고, 그 기억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어딘가 뇌의 끄트머리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을 것이다. 가끔은 나도 그런 생각이 꿈에서라도 나올까 싶기도 했지만, 나는 꿈에서 그 사건을 다시 만나지는 않았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삶에 지쳐서 일까, 삶이 바빠서 그랬을까. 직장동료 중 한 친구가 밤낚시를 가자고 제안을 해왔다. 이번에 좋은 기회가 있는데 대여섯 명 모아서 밤낚시를 가자고 했다. 나는 기분전환도 할 겸 흔쾌히 승낙을 했다. 그 모임에는 사진기자 몇 명과 프리랜서 작가도 몇 명 같이 가게 되었다. 여기에 D가 같이 갈 줄은 몰랐다.

“아니, 이번에 어떻게 가게 되었어요?”

“아, 사실은 가기 좀 꺼려했는데 아는 선배가 하도 졸라대서 가자고 했지. 마지못해 승낙은 했지만, 나는 물이 무섭기도 하고, 거기다가 밤낚시라고 하니 더 무섭기만 해.”

“요즘 방송에서 나오는 ‘도시어부’란 프로그램처럼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을 줄도 모르잖아요.”

“그 방송은 재미나 오락 같은 거 아닌가? 개그맨들도 나오고, 연예인들이 하는 거고 이번에 가는 밤낚시하고는 다를 것 같은데.”

“낚시도구도 없는데... 가면 현장에서 다 빌려준다고 하네요.”

“밤공기도 맡을 겸 같이 가게 되어서 기대되네요.”


여수의 밤거리는 화려했다. 노랫소리도 들리고, 포장마차들마다 전등을 달아 불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전의 기억들이 전등불빛에 점철되어 흔들렸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하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내가 왜 이런 여행을 오게 됐을까? 알 수 없는 끌림에 여기 와 있는 걸까? 풍경들은 수십 년간의 허물을 벗었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공간은 기시감(旣視感)인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기억들이 몰려와 금세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럴 땐 기억이 망각을 집어 삼킨다. 나는 모든 기억으로부터 도망치려 했지만, 제발 따라 오지마! 뒤를 돌아다보면 기억들이 그림자처럼 따라 오고 있었다. 기억은 하얀 빛이고, 망각은 검은 어둠이다. 빛과 어둠은 시계의 추처럼 반복되어 흔들린다. 흑백사진에 남겨진 기억은 하얀 부분으로 흩어져 있었다. 깨진 하얀색 바둑알들이 검은 바둑알 사이로 묻어져 있었다. 가끔씩 편두통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한다. 빛에서 어둠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이동하듯이. 그녀는 지금 어떤 기분일까. 망각했을까,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까. 그녀의 눈빛은 흔들려 보인다. 그럼에도 태연한 척 하고 있다. 아마도 기억과 망각의 장벽 사이에서 외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는 듯 위태로워 보였다.


여수의 바다 낚시 어종으로 볼락은 인기가 있었다. 공격적으로 미끼에 반응하기 때문에 루어낚시(lure fishing)로 제 맛이라고 했다. 선장은 새우모양의 가짜 미끼를 사용한다고 말한다. 볼락은 빛을 좋아하는 추광성 어종은 아니나 선상 낚시와 집어등을 켜고 하는 연안 밤낚시로 낚시꾼들에게 매우 인기가 많다고 했다. “줄이 엉키지 않도록 루어를 하나씩 던지세요. 고패질은 여기 먹을 게 있다고 볼락을 유혹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각각 낚시대를 대여 받았다. 낚시대를 처음 잡아보는 초보라서 걱정했지만 선장은 잡은 물고기를 끌어올릴 때 힘 조절을 잘해야 한다며 요령을 설명해주었다. 기억이 미끼가 되어 낚아질까. 어두운 망각의 바다에서 말이다. 간간이 빗방울도 떨어지는데 살짝 걱정이 되었다. “선장님, 비가 와도 배가 출항하나요?” “일기예보에는 그리 심하지 않다고 하니, 괜찮을 겁니다.” 우리 모두 걱정이 조금 되었다.


“선미와 선수 어디가 안전할까”

“예전 형의 기억들이 떠올라, 저 검은 바닷물 속에서 기억들이 맥주병처럼 오르락 내리락...”

그녀와 나는 배의 중간부분에 자리를 잡았다. 선미와 선수보다는 일행들의 중간에 끼어 있는 것이 안전할 듯싶었다. 혼자 있을 때보다 여럿이 함께 있으니 그나마 나았다. 나는 카메라를 두고 서울에서 고프로(GoPro) 액션캠을 준비해서 가져 왔다. 협소한 낚시배에서 이것저것 찍기에는 고프로가 나을 듯싶었기 때문이다. 휴대하기 간편하고, 옷이나 모자에도 고정할 수 있어서, 고프로를 장착하고 낚시하는 과정을 기록하려고 했었다. 다들 찌와 미끼를 끼워 바다에 낚시대를 드리웠다. 온갖 잡념들을 바다에 던지고 있었다. 물의 표면은 요동을 치고 있었다. 물은 기억을 토해내고 있는 중이었다. 물고기들의 입에서도. 강한 기억들을 내뿜고 있었다. 검은 물은 빛을 받아 흰색의 포말(泡沫)들을 만들면서....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빗방울이 심상치 않다. 낚시배는 풍랑에 매우 흔들렸다. 강한 조류와 높은 파도가 쳤다. 밤 바다에 비친 모습은 얼굴을 드러낸다. 호수에 비친 무언가에 얼굴이 내 모습인양, 또 다른 내가 나를 부른다.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둠은 무언가를 내게 말하고 있다. 야간비행을 하는 조종사에게 불빛은 흔들려 보이는 것처럼, 배 위에 달린 전등이나, 물에 비친 불빛들, 그리고 은빛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모습들이 모두 무얼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낮에는 들을 수 없던 소리들, 바스락 거리는 소리들도 어둠속에선 더 크게 잘 들린다. 불빛들마다 저마다의 슬픔을 간직하고 빛을 발한다. 꽁무니에서 나오는 반딧불처럼, 기억의 불빛들이 비친다. 비가 조금씩 내린다. 빗물에도 불빛이 비쳐서 은빛을 내고 있었다. 물속의 물고기들의 모습도 하얀 불빛이 스며든 은빛깔이다. 비가 조금씩 거세져 갔다. 배가 한쪽으로 쏠리면서 급격히 침몰했다.

“도와주세요! 배가 기울고 있습니다!”


배가 넘어가는 순간, 우리는 모두 바다로 뛰어들었다. 구명조끼를 입고 있으니 구조선에 발견되길 기다리면 될 듯 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멀리서 구조선의 불빛이 보인다. 선박이 노후화된 20년이 넘은 어선은 끄트머리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 일행 중 누가 실종되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쯤 시간이 흘렀을까. 더 이상 시간이 지나면 저체온증으로 우리 모두 죽을 것만 같았다. 다행히도 저 멀리 불빛이 보였다. 넘실거리는 물결 넘어, 저 멀리서 해양구조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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