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이 기억을 본다

[12화 죽음보다 슬프다]

by 노용헌

육로로 숯재((炭峴[탄현])를 지나 황산벌로 해서 짓쳐 들어온 신라군 오만 명과, 수로로 기벌포(伎伐浦)를 거쳐 사자수(泗.水[사차수])를 거슬러 올라온 13만 당병(唐兵)은 서로 합세하여 물밀듯 소부리(所夫里) 서울을 에워싸고 어렵지 않게 사자성을 무찔렀다. 26세 성왕이 웅진(熊津)에서 도읍을 옮긴 지 123년 동안 금성탕지(金城湯池)를 자랑하던 사자성도 당(唐). 라(羅)연합군 앞에 낙성이 되고 만 것이다.

웅진으로 파천했던 마지막 임금 의자왕(義慈王)도 대세가 글러진 것을 깨 닫고, 당장 소정방(蘇定方)의 군문에 나아가 항복하고 말았다.

때는 신라 무열왕 6년, 고구려 보장왕(寶藏王) 18년, 백제 의자왕 19년 경신년 가을.

한창 당년에는 고구려와 두 손길을 마주잡고 승병백만(勝兵百萬)을 몰아 북으로 만리장성을 넘어 유연(幽燕)을 들부수고, 서로 황해를 건너 오월(吳越)을 짓밟던 크고 강하던 나라가 하루아침에 풀끝의 이슬보담도 더 하잘것없이 스러졌다.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고구려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 나라를 일으킨 후 678년, 역대(歷代)는 의자왕까지 31왕.

당나라 군사의 발굽은 사나운 이리떼 모양으로 호기롭게 오만하게 잔인하게 백제의 산과 강과 들과 집을 자욱자욱이 피로 물들였다.

-현진건, 흑치상지-


사실 우리는 안다고 말하지만, 도대체 뭘 알고는 있는 걸까? 의미는 보편적이지 않고 개별적이고, 언어는 모호하고 불안정하다. 역사는 ‘결론 내릴 수 없을’ 때가 더욱 많은 비과학적 사실들의 연속이고, 인간은 끝없는 자기모순화에 빠져 있을지 모른다. 단지 내가 느꼈던 감정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기억은 ‘과거에 있었음’을 증명하려고 하지만, 사실 미래에 해석될 기억일 뿐이다. 미래는 상상으로 뒤덮인 망각의 숲의 한 공간을 제시하고 있다.


할아버지 기일(忌日)이다. 천주교 집안이라서 제사상을 차리고 축문(祝文)을 하는 의례는 다소 생략되고, 대신 연도(煉禱)를 바치는 위령기도로 가족이 함께 드린다. 연도(煉禱)는 “연옥(煉獄)에 있는 영혼을 위한 기도”라는 뜻이다. 할아버지는 내가 3살 때 연탄가스로 돌아가셨고,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사실 별로 없다. 아버지의 할아버지(曾祖), 할아버지의 할아버지(高祖)는 더욱 알 수가 없다.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할아버지가 평안남도 진남포(鎭南浦)에서 크게 과수원을 했고, 해방 전에 자식들을 한양에서 공부해야 한다고 서울로 내려왔다고만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가 전부이다. 오래된 흑백 사진속의 할아버지의 식구들의 단체 사진이 놓여져 있다. 사진속의 인물들이 사실 누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사진을 찍기 위해 모여 있다. 기록을 하는 건 기억하기 위해서일까? 롤랑 바르트는 기록을 하는 건 나를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망각의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사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기념비적인 사진은 너무도 분명한 기록이지만, 비현실적이기도 하다. 단지 사진은 상상된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남긴 사진들, 그리고 내가 남긴 사진들, 수천 장의 기억들은 모두 사진속의 주체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기 때문에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죽음은 그런 기억들을 모두 가져가 버린다. 바르트가 다섯 살 때 엄마와 찍은 낡고 희미해진 사진 <冬園, Winter Garden>을 보면서, 바르트는 무엇을 느꼈을까. 그가 이야기했던 ‘That-has-been’은 사진의 노에마(noema) ‘거기에-있음(Dasein)’ 또는 ‘다루기 힘든 것(Intractable)’이다. 바르트가 엄마와의 기억을 사진을 통해서 하듯이, 사실 이러한 기억들은 사진속의 대상자들만이 느낄 수 있다. 제3자 또는 다른 사람이 봤을 때 그 기억들은 이미지들로만 남는다. 시절인연(時節因緣)이란 말이 떠오른다. 석가모니는 '모든 것은 인(因)과 연(緣)이 합하여져서 생겨나고, 인과 연이 흩어지면 사라진다.’는 말을 남겼다. 인과 연이 모두 끊어져 있는데 어찌 그 이미지의 속내용을 알 수 있을까 싶다.


기억의 시간은 흘러갈까? 아마도 망각의 강으로 흘러갈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레테(Lethe)의 이야기처럼 죽은 자들 모두는 망각의 샘물을 마셨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고향은 평안도(平安道)이고, 할머니의 고향은 함경도(咸鏡道)이다. 할아버지 형제들은 다섯 형제인데, 할머니 형제들은 몇 명인지 잘 모른다. 할머니 여동생이 교사였던 것만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 형제들의 세 분만 이남(以南)으로 내려왔고, 두 분은 이북(以北)에 있다고 했다. 할머니는 1908년 생(生)이시고, 슬하(膝下)의 자식들이 11남매이다. 아버지가 6번째인데, 아버지까지는 이북에서 태어나셨고, 그 아래 형제들은 이남에서 태어났다. 11남매 중 다섯 형제가 수도자(修道者)의 길을 걸었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할머니와는 어렸을 때 같이 지내 와서, 많은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보면, 그 기억들이 떠오른다. 사진을 보지 않아도 머릿속에 각인된 기록으로 남아 있다. 사진은 자신의 기억과 마주할 때 더욱 남다르다. 아마도 기억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을 만드는 과정인 정착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사진의 상(像)은 휘발(揮發)한다. 날아가 버린다. 그것을 고정한다고 해서 정착(Fix) 과정을 거치듯이 말이다. 모든 이미지는 고정되지 못하고 부유(浮游)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에게 잊혀지는 것이 부유하는 이미지의 속성이 아닐까. 사진은 따라서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마도 사진은 죽음 그자체인지도 모른다. 이미지의 죽음은 그것과 같다.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 잘 살고 있느냐고, 이미지는 리얼한 존재자(Reality)에게 전달하는 메시지이다. 해석불가능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리얼(real)하다고 말하지만, 리얼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럴듯하다고 느낄 뿐이다. 완전한 리얼은 사실상 환상(幻影)이라고. 윤두서(尹斗緖)의 자화상 그림은 얼굴 부분만 그려져 있다. 그가 입었던 옷자락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세월에 옷자락이 사라졌을까? 얼굴에서 뻗어나가는 그의 수염은 더욱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털 한 올 한 올이 마치 살아있는 듯 보이고, 털이 하나도 어떻게 꼬이지도 않았을까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비현실적인 느낌에 더해주는 것은 목도 없고, 귀도 없다. 어쩌면 우리가 기억하는 윤두서의 모습은 모두 기억이 상실된 미완성된 상태의 기억, 파편화된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남인 세력에 속해있었던 윤두서는 서인의 음모로 역모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고, 그런 그의 좌절감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 권력의 허망함을 깨달은 한 선비의 초상화는 그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 보인다.


기제가 끝난 뒤에 어머니는 이런 말을 했다.

“니 외삼촌도 이북으로 갔단다.”

“왜요?”

“조봉암과 같은 생각을 가졌었는데, 전쟁 중에 이북으로 갔어.”


해방 후 우리의 역사는 1946년 좌우합작운동도, 여운형 중심의 사회주의 계열 좌익은 좌우합작운동을 벌여 대화와 협력을 통해 대안을 모색하였지만 여운형이 암살되면서 흐지부지되었고, 1948년 4월,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의 남북협상도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나고 말았고, 5월 남한 단독으로 선거를 치르고, 제헌 국회의 국회의원을 뽑았다. 해방정국의 혼란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극단의 정치, 혐오의 정치에서 통합은 요원(遙遠)해 보인다. 1948년 북한과 사회주의 세력에게 변절자라고 욕을 먹어가면서 5.10 총선거에 출마했던 조봉암처럼, 혼란시기의 역사적 인물들의 평가는 각기 다른 해석을 가진다. 그는 무소속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농지개혁을 추진하던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초대 농림부장관이 되어 농지개혁을 단행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었지만, 이후 진보당 사건으로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감했다.


일제강점기 말기 현진건(玄鎭健)의 미완의 소설 흑치상지(黑齒常之)를 보고 있었다. 이 글은 그가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한 사건으로 1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고, 그 뒤 다시 동아일보사에 복직하여 학예부 부장을 지내면서 쓴 연재소설이었다. 그러나 내용이 사상적으로 불온하다는 일제의 강압으로 연재가 중단되었다. 이에 상심한 그는 이전보다 더욱 심한 폭음으로 결국 1943년 4월 25일 폐결핵과 장결핵으로 사망했다. <흑치상지>의 소설이 어떤 면에서 일본의 입장에서 위험하고, 불온한 글이었을까. 참 아이러니하게도 백제 패망에 부흥군의 장수였던 것인 그 이유에서였을까, 하지만 흑치상지는 백제의 부흥의 꿈을 완수하지도 못하고, 실패한 장수였고, 그 이후 당나라의 장수로 전공을 세웠지만 당에서 죽는 순간까지 그는 이방인이었을 뿐더러, 고구려의 고선지장군과 마찬가지로 백제의 유민(遺民)일 뿐이었다.


백제의 고위직인 대좌평(大佐平)을 지낸 사택지적(砂宅智積)이 절을 짓고 세운 비석인 사택지적비가 있다. 여기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 “慷身日之易往慨體月之難還穿金” “해가 쉬이 가는 것을 슬퍼하고 달이 어렵사리 돌아오는 것이 서러워서”라는 글귀에서 인생무상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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