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이 기억을 본다

[13화 기억은 모래시계]

by 노용헌

공기처럼 기억은 늘 우리 자신과 함께 있기 때문에 기억의 중요한 역할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런데 기억은 단순하고 일상적인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에서부터 자기를 인식하고 세계와 관계를 맺게 하는 것까지 나와 나의 삶, 그리고 세계를 직조하고 구성하는 데 있어 중추 역할을 한다. 기억은 삶의 연속성을 유지해준다. 매 순간이 과거로 구성되는 현재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시키는 수단으로 기억은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기억이 없었다면, 우리에게 있는 것은 텅 빈 공백이거나 다른 누군가가 남긴 자국일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종(species)으로서 우리를 만드는 것이 있다면, 일관된 진정성을 느끼게 하는 그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억이다.”

-서길환, 기억과 망각의 이중주, P30~31-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넘 오래전 일이라서....”

“적어둔 메모들도 어딘가에 있을 텐데....”

“어디에 뒀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사갈 때 버렸는지도 모르고.....”

건망증이 심해서, 어디다 흘리고 다니는 게 많은 나다. 음식점에 들어갈 때는 우산을 들고 들어갔는데, 먹고 나서 계산을 하고 나올 때는 빈손이었다. 집에서 나올 때는 항상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 놓고 나왔는지, 전원 스위치는 끄고 나왔는지 몰라 다시 집에 들어가 확인하곤 한다. 건망증 증세는 예전보다 더 심해진 듯하다. 휴대폰, 컴퓨터 등 디지털 기기 사용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고, ‘디지털 치매’가 갈수록 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수많은 기억들은 하드에 꽉 차있어 공간이 부족하여 자꾸만 에러가 나고 있을지도. 은행의 비밀번호, 이메일(구글, 네이버, 다음)의 비밀번호 등등 기억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메모를 해 두지면 역부족이다. 숫자 네자리도 외우기 힘든데, 영어 대문자+영어 소문자+특수문자를 어떻게 외우는가. 젠장, 컴퓨터에 저장된 메모장이 언제 사라져버렸단 말이다. 랜섬웨어(Ransomware)로 싹 다 밀었는지도 모르지.... 생각을 모아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쓸 수 있는 기능은 한계치에 도달했다. 알츠하이머나 기억상실증과 같은 병적인 망각증세도 없는데 왜 나는 기록해두었던 것도 조금만 지나면 까먹는지. 잘 사용했던 한글 문서도 말썽을 부린다.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복사하기 단축키(Ctrl+C)와 붙이기 단축키(Ctrl+V)가 안 된다.


기억은 모래시계 같다.

가끔은 편두통이 시작되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좌뇌에서 우뇌로 이동하듯이 전류가 흐른다. 기억이 이동하고 있었다. 기억은 모래 알갱이와 같다. 0과 1사이의 컴퓨터 픽셀(pixel)처럼, 또는 사진의 은입자처럼 알갱이(granule)로서 위치하고 있다. 알갱이들은 서로간의 충돌에 의해서, 자극을 줄 때마다 에너지를 변화시킨다. 잃기도 하고, 퇴색되기도 하고, 새로운 물질로 생성되기도 한다. 모래해변을 걷다보면 신발 밑창에 어쩌면 굴러 들어온 알갱이처럼 기억은 들어왔다가 나갔다를 반복한다. 알갱이 하나하나는 하나의 기록이자, 기억이었다. 기억은 알갱이가 가진 데이터(data)이고, 이러한 데이터의 집합은 정보(information)이다. 정보는 데이터 하나만 유실되게 되어도, 왜곡되어진다. 정보는 사실 부정확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부정확한 요소들이 부정확한 기억을 생성하기 때문이다. 사진이 그 스스로는 정확하고, 명료하다고 이야기하지만, 기억으로서는 부정확하고, 불명료하다. 우연한 사건들은 어쩌면 불명료한 기억들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관찰자로서, 목격자로서, 증언자로서 주체는 그 기록을 명료하고, 명징하게 하기 위해, 꼼꼼히 기록을 하게 된다. 그것이 문자이든, 소리이든, 냄새이든, 어떤 정보라도 덧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


“기초과학연구원(IBS) 지하실험연구단이 이끄는 ‘코사인-100 국제 공동 연구팀’은 1998년 이탈리아 그랑사소 지하실험실의 암흑물질을 찾기 위한 ‘다마’(DAMA) 실험이 포착했다는 신호가 암흑물질 후보 물질 ‘윔프’(WIMP)에 의한 것이 아님을 입증했다고 4일 밝혔다.”


입자물리학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우주는 4%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나머지는 밝혀지지 않은 암흑물질이 27%, 그리고 암흑에너지 69%로 구성돼 있다고 말이다. 윔프(WIMP)는 암흑물질 후보 물질 중 하나이다. 우리 세계는 아마도 이런 알지 못하는 암흑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의 이성은 이런 암흑물질을 이해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상상이 덧붙여진다. 기억은 이런 상상(허구)이 80~90%이고, 나머지 사실(fact)은 10%도 채 안될 것이다. 사진의 입자 또한 은 알갱이(입자)로 이루어져 있다. 은은 빛을 받으면 검게 변한다. 검게 변한다는 것은 기억을 기록하고 있는 셈이다. 은(silver)은 빛의 기록물질인 셈이다. 물질 정보는 빛에 의해서 기록되어진다. 모래시계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듯이 좁은 공간, 그것은 블래홀(black hole)의 지점이다. 시공간의 물질 정보들은 이 블랙홀의 암흑 공간으로 이동되고, 탈출된다.

블랙홀 공식.jpg

고전 역학에서 탈출 속도란 천체에서 영원히 벗어나기 위해 지면에서 물체가 가져야 하는 최소 속력을 의미한다. 이것을 Ve라 하면, 천체로부터 무한히 멀어졌을 때(r/m→∞) 속력이 0m/s가 된다. 기억이 블랙홀로 탈출되는 지점은 어떻게 벌어지게 될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끔은 이런 블랙홀에 기억은 빠져들곤 한다. 마치 빛이 넘 많이 들어오는 역광일 때이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태양이 너무 눈 부셨기 때문에 살인을 했던 것처럼. 기억은 정보를 처리할 수 없다. 첫 번째는 빛이 너무 밝아서 순백색의 소음으로 뒤덮일 때이고, 두 번째는 빛이 없는 암흑물질로 어떤 자극도 주지 않을 때이다. 기억은 자극이 필요하다. 그것이 어쩌면 기록의 행위일지도.


버스 창가에 앉아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비가 갑자기 쏟아져 내렸다. 비는 창문에 빗방울로 맺혔다. 빗방울 하나하나는 저마다의 기억을 담고 있듯이, 유리창에서 목소리를 낸다. 우두두둑..... 비바람이 거세지면 눈물처럼 주루룩 흘러내린다. 기억은 빗방울이고, 빗물은 망각이다. 기억은 고정되지 않고, 망각의 빗물로 흘러내린다. 단지 속도의 차이일 뿐이다. 삶은 고정되지 않고 빗물처럼 흘러내린다. 모든 것은 머물러 있지 않고 흐른다(panta rhei). 기억 또한 각인된 고정된 고정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입자는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소립자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루프 양자 중력(Loop Quantum Gravity)은 공간과 시간도 알갱이라고 말한다. 모든 실체는 정보에서 나온다(It from bit). 이러한 작은 실체들이 알갱이다. 무수히 많은 알갱이들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모래시계의 모래 알갱이들처럼 끊임없이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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