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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든 헤레라의 <프리다 칼로>

영화 <프리다Frida> 2003년

by 노용헌

죽음이 1년도 채 남지 않은 1953년 4월. 47세의 프리다 칼로는 고국 멕시코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병세가 매우 악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참석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멕시코시티 현대 미술관이 문을 여는 오후 8시, 구급차 한 대가 문 앞에 멈춰 섰다. 평소 즐겨 입던 멕시코 의상을 차려입은 화가는 들것에 실려서 전시실에 설치된 침대로 옮겨졌다. 침대는 그녀의 바람대로 남편인 위대한 벽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사진과 그녀가 숭배한 정치가 말렌코프와 스탈린의 사진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마분지로 만든 해골들이 휘장에 매달려 있었고, 휘장 밑에 달린 거울이 그녀의 초췌한 얼굴에 떠오른 밝은 표정을 비추었다. 200여 명의 친구들과 팬들이 차례로 프리다 칼로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자정이 넘도록 함께 멕시코 민요를 불렀다.

이 행사는 그 특별한 여인의 인생에 있어서 절정인 동시에 독립된 순간이었다. 또 인간 프리다와 화가 프리다의 여러 자질을 입증해 주었다. 그녀는 육체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의연한 태도를 보였으며 불굴의 투지를 소유했고, 경이로움과 특별함에 집착했으며 화려한 가면을 씀으로써 자신의 사생활과 기품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이렇듯 전시회의 오프닝은 평생 동안 그녀 작품의 중심 소재였던 바로 그녀 자신을 극화한 것이었다. 그녀는 길지 않은 생애 동안 200여 점의 작품을 남겼으며 그중 다수가 자화상이었다.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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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가 열여덟 살이던 1925년 9월 17일. 하교 길에 탔던 버스가 전차와 충돌했다. 그녀는 사고 현장에서 말 그대로 쇠기둥에 박혔다. 척추가 부러지고 골반이 부서지고 한쪽 발이 으깨졌다. 그날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29년 동안 그녀의 삶은 고통과 병마와의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그녀는 “수술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아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끝내 가질 수 없었고(부서진 골반 때문에 자꾸 유산을 했고, 세 번 이상 중절을 해야 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곧잘 배신을 당했으며, 때로는 버림받았다. 가슴 아픈 일이었다. 프리다는 공작이 날개를 펼치듯 자신의 환희를 과시했지만, 그것은 깊은 슬픔과 내면세계, 자신만의 강박 관념을 감추기 위한 눈가림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나만의 현실을 그린다.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림을 그린다. 나는 언제나 별 생각없이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그린다. 이것이 내가 아는 전부다,” 프리다 칼로의 머리에 떠올라 화폭에 옮겨진 것은 20세기의 가장 독창적이고 획기적인 이미지들 가운데 하나였다. 피 흘리고 흐느끼고 찢기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녀는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여기서 그녀가 보여주는 놀라우리만치 솔직한 모습은 유머와 판타지로 완화된다. (P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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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1월 2일은 멕시코 최대의 명절인 ‘죽은 자의 날’이다. 이날을 기념하여 샌프란시스코의 미션디스트릭트에 위치한 민족 미술관에서는 독자적으로 ‘프리다 칼로 헌정전’을 열었다. 쉰 명 정도의 예술가(대부분 멕시코계 미국인이었다.)가 다양한 작품을 전시했다. 처음에 이들은 ‘프리다 칼로의 상징주의 정신’에 바탕한 작품을 출품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전시실 뒤쪽 벽에는 사자(死者)를 위한 전통적인 제단이 설치되었는데, 촛불, 설탕 해골, 밀짚 십자가, 사람 뼈 모양의 ‘죽은 자의 빵’, 설탕으로 만든 새를 넣은 관, 프리다의 미니어처가 누워 있는 장난감 침대 등으로 꾸며졌다. 나머지 벽면과 전시실은 초대 작가들의 작품으로 채워졌는데, 몇몇은 자신의 초상화를 프리다의 초상화와 나란히 놓고 프리다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듯했다. 프리다는 정치 영웅이자 혁명 투사로, 고통받는 여성, 학대받는 아내, 아이 없는 여인, ‘멕시코의 오필리아’로 그려졌다.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죽음으로 고통받으면서 동시에 죽음에 저항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초대 작가 중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경의를 표혔다. “프리다는 멕시코계 미국인 여성 앞에 문화의 의미를 완벽하게 구현해 보였다. 그녀는 우리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녀의 작품은 자기 연민의 기색을 띠지 않는다. 그녀에겐 힘이 있다.” (P41)

프리다 칼로의 이야기는 시작하는 곳과 끝나는 곳이 같다. 론드레스 거리와 아옌데 거리가 만나는 모퉁이에 서 있는 이 집은 밖에서 보면 멕시코시티 남서쪽 외곽에 위치한 코요아칸의 오래된 주택가의 여느 집과 다를 것이 없다. 단층 회벽 건물인데, 담장은 밝은 푸른색이며 유리창이 많고 나무 그림자가 흔들려 회벽은 활기차 보인다. 창에는 연두색 덧문이 달려 있고 대문에는 프리다 칼로 박물관이라고 쓰여 있다. 이곳은 멕시코에서 가장 특별한 명소들 중 하나이다. 한 여인의 그림과 유품이 모두 남아 있는 가정집이 박물관으로 바뀐 곳이다.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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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가 태어나고 3년 후에 멕시코 혁명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전국 각지에서 봉기가 있었고, 치와와(지도자는 파스쿠알 오로스코와 판초 비야)와 모렐로스(지도자는 에밀리아노 사파타) 군대가 집결했다. 이러한 상황은 10년간 지속된다. 1911년 5월 오래된 독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실각하여 추방되었다. 혁명군 지도자 프란시스코 마데로는 1912년 10월 대통령에 당선되지만, 1913년 2월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장군의 배신으로 암살당한다. 교전 중인 양쪽 군대가 국립 왕궁과 사우다델라에서 상대편을 폭격하여 엄청난 파괴와 살상을 저질렀던 ‘피의 열흘’ 직후의 일이다. 북부에서는 베누스티아노 카란사가 마데로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들고일어났다. 그는 ‘헌정군’ 초대 사령관을 자처하며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우에르타를 공격했다. 악랄한 권모술수와 유혈 사태가 끊이지 않았다. 1920년 11월에 카란사의 장군 알바로 오브레곤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비로소 상황은 진정 국면을 맞았다.

프리다는 세상을 떠나는 해까지 10년 동안 일기를 썼다. 이 일기는 지금 프리다 칼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여기서 프리다는 반정군 혁명군이 멕시코시티로 진군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자랑한다.(문학적 효과를 위해 허구를 가미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P50-51)


프리다는 여섯 살에 소아마비에 걸려서 아홉 달 동안 방에서 나올 수 없었다. “처음에는 오른쪽 다리가 끔찍하게 아팠다. 근육이 아래로 몰리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내 작은 다리를 욕조에 담그고 호두로 만든 약물과 뜨거운 수건으로 문질렀다.”

어른이 되었을 때 프라다는 자신의 내면에 몰입하는 면과 외향적인 면이 묘하게 결합된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성격은 병상에 누워 있던 어린 시절에 내면세계의 백일몽과 바깥세상의 인간 관계 사이에서 심한 불일치를 경험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녀는 상상 속의 친구를 갖고 싶다는 꿈, 슬픔을 달래 줄 벗을 갖고 싶다는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두 명의 프리다>(1939)라는 자화상의 기원에 대해서 그녀는 이렇게 설명했다.

여섯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 또래의 작은 여자 아이와 상상 속에서 우정을 나누는 강렬한 체험을 했다. 당시 내 방 창문으로는 아옌데 거리가 보였다. 나는 첫 번째 창에 입김을 불어 김이 서리게 했다. 그리고 숨을 한 번 내쉬고는 ‘문’을 그렸다. (프리다는 여기에다 자기 방 창문을 그렸다.) 너무나 기쁘고 다급한 마음에 나는 이 ‘문’을 통해 상상에 빠졌다.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평원을 가로질러 가다가 마침내 ‘핀손(Pinzon)'이라는 낙농장에 도착했다. 나는 ’핀손‘의 ’O'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 ‘지구의 내부’로 빨려 들어갔다. 그곳에서 내 ‘상상의 친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나 피부색은 기억나지 않는다.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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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프리다는 네 주민 중 하나를 바라본다. 발가벗은 임산부는 콜럼버스 이전 시대 점토 조각이다. 멕시코의 인디언 쪽 뿌리를 상징하는 동시에 여자 아이의 미래를 상징한다. 신상은 어른 프리다처럼 만신창이다. 발의 앞부분이 없고, 머리는 부서진 것을 다시 붙였다. 프리다가 친구에게 들려준 설명에 따르면, 신상이 임신한 것은 자신이 죽었지만 산 것을 자신 안에 간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디언의 진실이다.” 그리고 그녀가 발가벗은 이유는 “그들이 섹스를 비롯한 바보 같은 짓들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다상은 콧수염을 기르고 면도를 하지 않은 덩치 큰 남자로 푸른 색 작업복을 입고 있다. 선언문을 낭독하는 사람 같은 몸짓으로 폭약에 둘러싸여 도화선을 쥐고 있다. 발기한 생식기를 암시하는 자세이다. 그는 수동적인 임산부 신상에 대응하는 남성으로, 자기 안의 분노와 소음을 이기지 못하고 자폭하는 파괴적인 지도자를 상징한다. 땅에 드리워진 긴 그림자는 여자 신상의 다리 사이를 지나간다. 그의 그림자는 작은 여자 아이와도 이어진다. 여자 아이는 유다상, 점토상과 함께 가족을 이룬다. 프리다는 유다상에서 위협 대신 유머를 발견했다. 프리다의 유다상은 기쁨과 즐거움과 무책임에 대한 변명이며, 종교와는 무관하다. 그녀에 따르면 “유다상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시끄럽고, 아름답고, 산산조각남으로써 색깔과 형태를 갖는다.”

얼굴을 찡그린 해골은 멕시코 아이들이 ‘죽은 자의 날’에 갖고 노는 작은 해골을 확대한 모습으로 “죽음이 아주 즐거운 농담”임을 의미한다. 임산부 신상과 마찬가지로 해골 역시 어린아이의 시각으로 바라본 것으로 여자 아이의 미래를 상징한다.

해골 뒤의 중경에는 밀짚 인간이 있다. 판초 비야 같은 혁명적인 산적이라도 되는 듯 모자를 쓰고 탄창을 두르고 밀짚 당나귀를 타고 있다. 그는 멕시코 생활의 불안과 비애를 암시한다. 가난과 긍지와 소망이 뒤섞인 가슴 아픈 인물이다. 프리다는 그가 “약자인 동시에 너무나 우아하며, 없애기도 너무 쉽기 때문에” 그림에 넣었다고 말했다.

이는 멕시코를 바라보는 기이한 시각이었다. 판지, 밀짚, 점토로 만들어진 민중이 끔찍한 역사에서 살아남은 하루살이 같은 존재임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브제는 개인적인 의미도 지닌다. 그녀가 키웠던 원숭이나 그 밖의 애완동물처럼 그들은 그녀에게 일종의 가족이었다. 공허하게만 느껴지는 세상에서 그들은 그녀에게 친숙한 안정감을 주었다. 네 명의 주민은 이 슬프고 극적인 풍경 속에서 그녀와 함께 있다. 이중 셋은 <상처 입은 탁자>(1940)에 다시 등장한다. 나중에 프리다는 자신의 멕시코적 페르소나를 창조함으로써 멕시코의 다섯 번째 주민이 되었다.

프리다가 ‘다섯 번째 멕시코인’이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소아마비는 그러한 변화의 시작이었다. 그녀는 평생 병으로 약해진 다리를 증오했고, 기다란 멕시코 민속 의상으로 가리고 다녔다. 그리고 가장 멕시코인다운 멕시코인이 됨으로써 불구가 된 몸과 마음의 상처들을 상쇄하려 했다. (P5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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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그녀에게 카메라 사용법과 필름을 현상하고 손질하고 덧칠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어린 프리다는 이런 고된 작업을 잘 견뎌 내지 못했지만, 아버지의 꼼꼼한 솜씨나 섬세한 세부 표현과 같은 특징들은 나중에 그녀의 그림에서도 나타난다. 사진 수정 작업에 필요한 미세한 붓놀림과 소규모의 화폭은 프리다의 제2의 본성이 되었고, 아버지가 찍은 인물 사진의 형식성은 그녀가 초상화에 접근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프리다는 아버지와 자신의 예술에 비슷한 점이 있음을 인정했다. 자기 그림이 아버지의 달력 삽화 사진과 같다고 말한 적도 있다. 다만 자기는 외적 현실이 아니라 머릿속에 있는 달력을 그린다고 했다. 기예르모 칼로의 그림들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꼼꼼했고 대체로 사실주의적이었다. 소재는 주로 정물과 낭만적인 농장 풍경이었다. 그의 그림 자체가 프리다에게 영향을 준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사진작가인 동시에 화가였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화가가 되라고 격려해 준 화가 아버지를 둔 여성 화가로는 마리에타 로부스티(틴토레토의 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안젤리카 카우프만 등이 있다. (P61)


알바로 오브레곤은 1920년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호세 바스콘셀로스를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바스콘셀로스는 과학인 세대 이후의 명철한 법률가이자 철학자로, 반(反)디아스 투쟁에 투신했던 인물이다. 바스콘셀로스의 목표는 멕시코 교육을 진정 멕시코적인 교육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멕시코 교육은 ‘우리 피, 우리 말, 우리 사람’ 위에 세워져야 했다. 문맹과의 전쟁을 선포한 그는 시골에 1,000개의 학교를 세우도록 지시했고, 교사들을 지휘하여 책을 들고 (그리고 깃발도 높이 들고) 오지로 진군했다. 도서관을 설치하고 운동장과 수영장을 건설하고 야외 예술학교를 조직했다. 그는 플라톤의 <대화>나 단테의 <신곡>, 괴테의 <파우스트> 같은 고전을 염가로 출판하게 했으며, 문맹자를 위한 무료 공연을 마련하고 벽화를 의뢰했다. 디에고 리베라.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 같은 화가들은 노동자들이 받는 만큼의 임금만 받고서 공공장소에 멕시코의 역사와 문화를 찬양하는 벽화를 그렸다. 바스콘셀로스는 예술이 사회 변혁을 고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철학은 직관의 철학으로, 이전의 ‘과학인’들이 숭배했던 논리나 경험주의와는 상반된 것이었다. 그는 “인간이란 감각을 통해서 접근할 때 더 잘 주무를 수 있는 존재다. 아름다운 형태와 모양을 바라볼 때, 아름다운 박자와 가락에 귀 기울일 때, 인간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것처럼.”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위대함을 믿었다. 이런 신비주의적인 신념은 “신성한 영혼이 우리 종족을 통해서 말씀하시리라.”는 말로 집약된다.

이러한 열정과 적극적 행동주의, 분노와 개혁주의적 열광의 분위기는 프리다가 진학할 당시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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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생각만 나면 움찔하게 되는 일들이 있다. 이 또한 그런 일 가운데 하나였다. 전차가 나무로 만든 버스를 들이받았고, 그로 인해 프리다 칼로의 인생이 바뀌었다.

그 당시 멕시코시티에서 교통사고는 흔한 일이었고, 무수한 레타블로의 주제가 되었다. 시내버스가 첫선을 보인 때라 전차는 텅텅 비어도 버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버스가 투우사처럼 기세 좋게 달리는 것은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였다. 앞 유리에 성녀 과달루페를 매달기만 하면 운전사는 불사신이 된다고 믿는 것 같았다. 프리다가 타고 있던 버스는 칠도 새로해서 유난히 산뜻해 보였다.

사고는 1925년 9월 17일 오후 늦게 일어났다. 멕시코 독립 기념일 다음날. 가볍게 내리던 비가 막 그친 후였다. 소칼로 맞은편의 회색 정부 청사는 그날따라 더욱 우울해 보였다. 코요아칸 행 버스는 거의 만원이었지만 알렉한드로와 프리다는 뒤쪽에 나란히 앉을 수 있었다. 버스가 쿠아우테모친 모퉁이와 마이오 5번가에 정차했다가 칼사다르트랄판 쪽으로 회전하는 순간, 소치밀코 발 전차가 다가왔다. 전차는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달렸다. 마치 브레이크가 없는 것처럼, 일부러 들이받으려는 것처럼. 프리다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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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처럼 학교 복도를 돌진하던 여학생, 전차나 버스를 날렵하게 오르내리던 여학생, 차가 움직일 때 타고 내리기를 좋아하던 여학생, 그녀는 이제 석고 붕대에 둘둘 말려 움직일 수도 없게 되었다. 프리다는 이렇게 말했다. “이상한 교통사고였다. 격렬하다기보다는 고요하고 느릿했다. 그러고는 모두를 해쳤다. 특히 나를.”

그녀는 요추 세 군데, 쇄골과 세 번째, 네 번째 갈비뼈가 부러졌다. 오른쪽 다리 열한 군데에 골절상을 입었고, 오른발은 탈구되고 으깨졌다. 왼쪽 어깨는 관절이 빠졌고, 골반 세 군데가 부러졌다. 강철 난간은 그녀의 복부를 글자 그대로 꼬치에 꿰듯이 수평으로 관통하여, 왼쪽 옆구리로 들어가 질로 나왔다. 그녀는 자기 말대로 “처녀성을 상실했다.”

병원은 오래된 수녀원 건물을 손본 것으로, 병실은 어둡고 휑하고 천장이 높았다. 그녀를 수술한 의사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생각했다. 살아날까? 다시 걸을 수 있을까? 오랜 친구의 말에 따르면 “의사들은 몽타주 사진을 제작하듯 프리다의 몸을 조립해야 했다.” 프리다는 의식을 되찾자 가족을 찾았다. 그러나 부모님은 올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렇게 회고했다. “어머니는 충격으로 한 달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상심한 나머지 병이 났다. 근 20일이 넘도록 아버지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는 집안에 초상 한번 난 적이 없었는데.” 아드리아나는 남편 알베르토 베라사와 함께 코요아칸 친정 근처에서 살고 있었는데, 사고 소식을 듣고는 너무 놀라 기절해 버렸다. 프리다의 가족 중에 소식을 듣고 즉시 달려온 사람은 마틸데밖에 없었다. (P9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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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프리다의 삶은 서서히 망가져 가는 육체와의 지난한 투쟁이었다. 그녀는 항상 피로를 느꼈고, 척추와 오른쪽 다리에 거의 항상 통증이 있었다. 어느 정도 건강을 되찾은 후에는 다리를 저는 것이 눈에 띄지 않았지만, 그녀의 뼈는 계속 망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오랜 친구 올가 캄포스는 어린 시절부터 1951년까지 그녀의 병력을 기록한 서류를 보관해 왔다. 캄포스에 따르면 프리다는 사고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29년 동안 적어도 서른두 번의 외과 수술을 받았으며, 대부분 척추 수술과 오른발 수술이었다. 작가 안드레스 에네스트로사에 따르면 “프리다는 날마다 죽어 갔다.” 에네스트로사 역시 오랫동안 프리다와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사고 후 1년 만에 처음으로 상처가 재발했다. 프리다가 1926년 9월에 알레한드로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다. 골격 전문외과 의사가 척추 세 대가 어긋난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오른발에 특수장치를 달았고, 석고 깁스 때문에 몇 달 동안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사고 당시 적십자 병원의사들은 그녀를 퇴원시키면서 척추 검사를 소홀히 한 것 같다. 프리다는 말했다. “아무도 나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심지어 엑스선 사진도 찍어 보지 않았다.” 그녀의 편지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은 집안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형편이 나아진 후에는 치료가 소용이 없었다. 이 기간 중에 프리다는 알레한드로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두 번째로 석고 깁스를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어요. 이따위 것 때문에 거의 100페소나 되는 돈을 길바닥에 뿌렸어요. 도둑놈 두 명에게 주었으니, 길바닥에 뿌린 거나 다름없죠. 실은 의사에게 줬거든요.”

어렸을 때 프리다는 소아마비를 이겨 내기 위해 몸을 많이 움직이는 운동 선수가 되려고 했었다. 그러나 사고 후에는 몸을 추스르기 위해 가능한 한 움직이지 않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녀가 자기 인생을 변화시킬 일을 찾아낸 것은 거의 우연이었다. “그때는 어렸기 때문에 이러한 불행도 그다지 비극적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나에게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었다. 의학 공부가 아니라도 괜찮았다. 그래서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P106-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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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죽음은 그릴 수 있었지만(자기의 죽음은 은유적으로, 타인의 죽음은 사실적으로 그렸다.) 자기에게 닥쳤던 사고는 그릴 수 없었다. 사고가 나고 몇 년 후에 그녀는 자기가 당한 사고 장면을 그리고 싶은데 그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닥쳤던 사고는 너무나 ‘복잡하고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에 분명한 이미지로 정리할 수 없었다. 현재로서는 디에고 리베라의 사위가 소장한 연도 미상의 연핋솨 한 점이 사고를 묘사한 유일한 작품이다. 거칠고 미숙한 구성이 암시하는 것처럼. 프리다는 그림의 소재와 마주하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기 때문에 제대로 윤곽을 잡을 수 없었다. 악몽 같은 화면 속에서 시간과 공간이 붕괴된다. 두 대의 차가 충돌하고 부상자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데, 코요아칸의 집이 나오는가 하면 프리다는 두 번이나 등장한다. 한번은 석고 깁스를 하고 들것에 누워 있고, 또 한번은 아이의 커다란 머리를 등장해서 잃어버린 발레로를 생각하고 있는 듯 앞을 보고 있다.

프리다는 사고 장면을 그릴 수는 없었지만, 사고를 통해서 성숙한 화가로 다시 태어나 자신의 깨달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자기 몸에 일어난 일들을 통해서 자신의 정신세계를 구현했던 것이다. 그녀의 얼굴은 언제나 가면이었으며, 그녀의 육체는 그녀의 감정처럼 벌거벗고 상처 입은 상태였다. 알레한드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통을 ‘순간순간’ 상세하게 알려 주고 싶어 했던 것처럼, 그림에서도 고통의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그녀는 자기 몸을 뒤집어 보인다. 자기의 상상력이 엑스선이라도 되는 듯 혹은 외과의사의 메스라도 되는 듯, 심장을 가슴 앞에 꺼내 놓고 부러진 척추를 내보인다. 프리다의 판타지가 자기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자기에 대해서 깊게 천착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의사를 꿈꾸던 소녀가 그림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녀에게 그림은 심리적 외과 수술이었다.

프리다는 말한다. “나를 그린 것은 혼자일 때가 많았기 때문이고, 내가 가장 잘 아는 소재가 나이기 때문이다.” 병상에 누워 있는 아이들이 산맥과 계곡을 자기의 팔다리 모양으로 이해하는 것처럼, 프리다는 자신을 하나의 세계로 인식했다. 그녀는 과일이나 꽃을 그릴 때도 자기라는 필터를 통해서 대상을 보였다. 프리다는 “나는 다른 많은 사람을 닮았고, 다른 많은 사물을 닮았다.”라고 했다. 그녀의 그림에 나오는 많은 것이 그녀를 닮았다. 그녀는 이런 말도 했다. “그때(사고 당시)부터, 눈으로 본 대로 그려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렇듯 사고가 인생 행로를 바꾸어 놓은 이후, 나는 수많은 장애로 인해 정상적인 소망을 이룰 수 없었고, 이루지 못한 소망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림은 프리다 칼로의 생존을 위한 투쟁인 동시에 자기 창조였다. (P12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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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초에 에르만 캄포는 쿠바의 망명 혁명가 홀리오 안토니오 메야를 주축으로 하는 공산주의 모임에 프리다를 소개해 주었다. 알레한드로나 테캄포와 마찬가지로 메야 역시 법과대학 학생이었다. 메야는 학생 신문 <트렌 블린다도(Tren Blindado)>와 반제국주의 동맹 기관지 <엘리베라도로(El Liberador)>의 편집장이었으며, 공산주의 출판물 <엘마체테(El Machete)>에도 글을 썼다. 그러나 프리다는 그가 이탈리아계 미국인 사진작가 티나 모도티의 애인이라는 사실에 더 흥미를 느꼈다. 나중에 그는 1929년 1월 10일 모도티와 거리를 걷다가 쿠바 정부가 보낸 저격수에게 암살당했다.

모도티는 캘리포니아에서 활동하던 훌륭한 사진작가 에드워드 웨스턴의 조수이자 동료였고, 1923년에 그와 함께 멕시코로 왔다가 그가 떠난 후에도 계속 멕시코에 머물면서 공산주의 정치에 점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주로 화가 사비엘르 게레로와 메야와의 연애 관계를 통해서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던 것 같다. 그녀는 재능 있고 아름다웠으며 매혹적이었다. 또한 감수성이 예민하고 활기가 넘쳤으며, 세속적이면서도 어딘가 딴 세상 사람 같은 느낌을 주었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1920년대 멕시코 예술계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대표적인 예술계 인사는 화가 헤안 샤를로, 로베르토 몬테네그로, 베스트 마우가르드, 나우이 올린, 미겔과 로사 코바루비아스 부부, 작가 아니타 브레너. <멕시코 민중 생활>을 편집한 프란세스 투로, 유명한 벽화가 오로스코, 시케이로스, 리베라 등이었다. 프리다와 모도티는 곧 친한 친구가 되었다. 나이 어린 신참 화가인 프리다는 모도티를 통해서 자유분방한 예술가와 공산주의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이끌렸다.

이들의 세계는 알레한드로의 세계와는 사뭇 달랐다. 많은 예술계 인사가 반 칼리스타의 기치 아래 알레한드로와 함께 싸웠지만, 프리다의 세계와 알레한드로의 세계는 거리가 있었다. 프리다는 1928년 6월에 알레한드로와 헤어졌고, 알레한드로가 프리다의 친구 에스페란사 오르도네스를 사랑하게 되면서 이들의 관계는 완전히 끝났다. (P12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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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는 티나 모도티의 소개로 공산당에 가입했고, 거기서 디에고 리베라를 만났다. 사랑이 떠나간 자리에 새로운 사랑이 들어섰다.

프리다가 디에고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마흔한 살이었고, 멕시코에서 가장 유명한 동시에 가장 악명 높은 화가였다. 멕시코 역사상 디에고보다 많은 벽화를 그린 사람은 없었다.

그는 대단히 능숙하고 신속하게 그림을 그렸고 때로는 대지의 마력에 홀린 듯했다. 그는 말했다. “나는 단순한 ‘화가’가 아니다. 나는 나무가 꽃과 열매를 생산하듯 그림을 생산하는 생물적 기능을 수행하는 인간이다.” 그는 일 중독자였고 정치적 요청이든 질병이든 사소한 일상의 문제든 일을 방해하는 모든 것에 짜증을 냈다. 한번에 며칠씩 쉬지 않고 작업을 하곤 했다. 그럴 때는 작업대 위에서 밥을 먹었고, 필요하면 거기서 잠도 잤다.

그는 친구들과 구경꾼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그림을 그렸다. (P128)


그것은 장중하고 민주적인 주제였으며, 리베라를 비롯한 화가들은 예술뿐 아니라 정치에서도 이러한 주제를 환영했다. 개혁주의적 열망을 간직한 사람들이었다. 혁명 후 노동자 농민 조직이 우후죽순처럼 퍼져 나간 것을 기화로, 이들은 1923년 9월에 리베라의 집에 모여 ‘기술자, 화가, 조각가 조합’을 결성했다. 리베라,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 페르난도 레알, 사비에르 게레로(당시 티나 모도티의 애인)가 집행 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억압받는 민중에 대한 공감과 멕시코 예술에 대한 신념을 천명했다. “멕시코 예술은 위대하다. 민중으로부터 솟아나기 때문이다. 멕시코 예술은 공동체적이다. 우리의 미학적 목표는 예술적 표현의 사회화이며, 부르주아 개인주의의 타파이다. 우리는 소위 이젤 예술을 거부하며, 지식인 무리가 만드는 모든 예술을 거부한다. 그런 예술은 본질적으로 귀족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규모 예술 형식을 환영한다. 그런 예술은 공공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낡은 사회에서 새로운 사회로 이행하는 시대이다. 이런 때 미의 생산자들은 대중을 위한 가치 있는 예술의 구현을 목표로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예술의 최대 목표가 개인의 쾌락이 되어 버린 지금, 우리의 최대 목표는 만인을 위한 미를 생산하는 것, 투쟁을 선도하고 고취하는 미를 생산하는 것이다.”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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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의 의상은 일종의 팔레트였다. 그녀는 날마다 세상에 보여 주고 싶은 자기의 이미지를 선택했다. 그녀가 옷을 차려입는 광경을 보았던 사람들은 그녀가 의상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 완벽주의와 꼼꼼함을 기억한다. 그녀는 블라우스를 입기 전에 바늘을 들고는 여기저기에 레이스나 리본을 달았다. 어떤 벨트가 어떤 치마에 어울릴까를 결정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그러고는 “괜찮아요?”, “좋아요?”라고 묻곤 했다. 화가 뤼실 블랑슈의 기억에 따르면 “프리다는 옷에 대해 미학적 태도를 취했다. 그녀는 색채와 형상으로 하나의 그림을 만들었다.”

이국적인 복장과 더불어 프리다는 머리도 다양한 모양으로 꾸몄다. 멕시코 어느 지역의 전형적인 머리 모양을 하기도 했고, 스스로 고안한 머리 모양을 하기도 했다. 머리를 위로 틀어 올리기도 했는데, 그럴 때는 관자놀이가 아플 정도로 단단하게 끌어당겨 모직 리본으로 묶은 다음 매듭이나 핀, 빗이나 싱싱한 부겐빌레아 꽃으로 장식했다. 한 친구에 따르면, 프리다는 머리에 빗을 꽂을 때 빗살을 머리에 박으며 “요염한 피학성”을 과시했다. 몇 년 후에 몸이 약해졌을 때는 여자 형제나 조카, 가까운 친구에게 머리를 맡기며 “머리를 빗겨 줘.” 혹은 “빗으로 머리를 다듬어 줘.”라고 부탁했다.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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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의 입장에서 보자면, 멕시코 정부와 미국 자본주의자들의 의뢰를 수락하는 것은 공산당의 분노를 사게 될 위험도 있었지만, 동시에 프롤레타리아를 찬양하고 교화하는 공공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기회였다. 생각해 보면, 레닌도 혁명가들에게 부르주아 사회 내부에 균열을 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미국이라는 나라보다 좋은 곳이 있겠는가? 미국은 기계 시대의 전초 기지인 데다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혁명이 무르익은 듯하지 않은가?

리베라는 자신의 혁명적 목적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공산당에서 제명된 후 무엇을 하겠느냐는 한 뉴욕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나에게 남겨진 길은 단 한 가지. 나의 (혁명 예술) 이론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산업국가에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나는 위장 간첩으로 (미국에) 와야 했다.” 그는 자기 그림이 공산당의 선전에 이용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예술은 햄과 같다. 민중을 살찌우니까.”라고 단언했다. (P164-165)


결혼식 초상화는 또 다른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디에고는 신부를 약간 외면한 채 양팔을 옆구리에 대고 있다. 프리다는 그의 어깨 쪽으로 머리를 숙이고 있으며, 양팔은 그가 있는 쪽을 향해 있다. 부부가 맞잡은 두 손은 캔버스 중앙에 위치해 있어서, 결혼으로 맺어진 둘의 결속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시사한다. 그림에서도 암시되듯이, 처음부터 프리다는 디에고를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인생에서 가장 큰 정열을 쏟는 것은 예술이며,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그의 진실한 사랑은 아름다움과 멕시코와 마르크스주의와 인민과 여자들(그것도 많은 여자들)과 초목과 대지에 바칠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프리다에 따르면, 디에고는 틀에 박히고 개인적인 모든 관계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그는 친구가 없고 동지만 있다. 그는 아주 다정다감하지만, 결코 자기를 바치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가 그의 최고의 동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P175-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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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는 죽은 아기를 그리고 싶었다. 유산되던 순간의 아기 모습을 정확히 보고 싶었다. 입원한 다음날 그녀는 한 의사에게 관련 삽화가 들어 있는 의학 서적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 병원에서는 책속의 그림이 환자에게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의학 서적을 보는 것을 금했다. 프리다는 몹시 화를 냈다. 디에고가 중재에 나서서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다루는 이 환자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오. 프리다는 그것을 가지고 할 일이 있어요. 그녀는 예술 작품을 만들려는 것입니다.” 결국 디에고가 의학 서적을 구해다 주었고, 그녀는 신중하게 남자 아기 연필화를 완성했다. 이때 그린 것으로 보이는 또 다른 연필화 두 점이 있는데, 이것들은 그녀가 이전에 그렸던 그 어떤 그림보다 초현실주의적이고 환상적이다. 프리다는 침대에서 자고 있다. 그녀의 꿈을 나타내는 이상한 이미지와 마취 상태에서 보았던 순간적인 환영들이 고리 모양의 길다란 줄을 통해 그녀의 머리와 연결되어 있다. 뿌리가 달려 있는 손, 덩이줄기 같은 발, 도시의 빌딩들, 디에고의 얼굴 등이 그려져 있다. ‘자동 기술’이라는 초현실주의 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이미지는 자유 연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 같다. 그중 한 그림에서 프리다는 침대 커버 위에 나체로 누워 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침대 밖으로 흘러내려 마룻바닥을 기어가는 뿌리들의 그물망으로 변형된다. (P195)


프리다의 1994년 일기를 보면, 아이를 갖지 못하는 슬픔이 여전히 컸음을 알 수 있다. “나는 모든 것을 팔았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나는 환상을 믿지 않는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 그런 거창한 것은 믿지 않는다. 이름을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형태들, 물에 빠진 거미를 바라보지 않는다. 아이들은 세월이고 여기가 나의 끝이다.” 그림은 불임이라는 강박 관념에 대한 최고의 해독제였다.(불임은 그녀의 수많은 자화상의 배경으로 사용되는 사막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녀는 자신이 죽던 해에 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그림은 고통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림은 삶에 의해 완성된다. 나는 세 아이를 잃었다. 그림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해 주었다. 일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P20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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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프리다는 디트로이트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다. 그녀가 규칙적으로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었다. 디트로이트에서 그림을 그린 것은 다만 “시간을 견디기가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이었으며, 시간이 좀 더 가볍게 흘러가게 되자 거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녀는 8개월 반 동안의 맨해튼 체류 기간 동안 단 한 작품밖에 그리지 못했으며, 그나마 그 한 점도 이곳에서 완성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대신에 책을 읽고 집안을 돌보고 친구들을 만나고 영화를 보고 쇼핑을 했다. 놀이도 즐겼다. ‘카다베르 엑스키스’(cadaver exquis; 멋진 시체)라는 게임이 있었다. 이것은 오래된 실내 놀이인데 초현실주의자들은 이 게임을 우연의 신비를 탐구하는 기법으로 차용했다. 첫 번째 사람이 상체를 그리고 종이를 접으면, 두 번째 사람이 그 그림을 보지 않고 다음 부분을 그린다. 프리다가 그린 괴물은 너무나 웃겼다. 그녀는 소름 끼치는 상상력의 소유자였다. 그녀가 성기를 즐겨 그린다는 점은 그녀의 일기와 그림에서도 볼 수 있지만, ‘멋진 시체’에서는 이러한 성기 애호가 절정에 달했다. 뤼시엔 블로흐는 이렇게 회상한다. “프리다가 최악이었다. 그녀가 그린 어떤 그림을 보면 얼굴이 화끈했다. 나는 쉽사리 얼굴을 붉히는 사람이 아닌데..... 그녀는 정액을 뚝뚝 떨어뜨리는 커다란 성기를 그렸다. 나중에 종이를 펴 보니 정장을 한 가슴이 큰 여자의 상반신에 성기가 이어져 있었다. 디에고는 ‘알다시피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더 외설적이야.’라고 말하면서 웃어 댔다.”

프리다의 ‘외설’과 새로 생긴 짓궂은 자신감은 그녀가 뉴욕 언론을 골탕 먹이는 방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P218-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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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디에고처럼 최선의 노력과 에너지를 쏟으며 일할 때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예술이 ‘신성하다’거나 하는 따위의 바보 같은 생각은 갖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여느 벽돌공처럼 열심히 일합니다. 미국에서 작업이나 활동을 하는 것에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네들의 단점까지 좋아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단점이 너무 많아요. 그들이 사는 방식, 역겨운 청교도주의, 신교도의 설교. 끝도 없는 허례허식, 모든 것에 ‘격식’을 따지는 것, 다 바보 같습니다. 나는 멕시코 사람들이 도둑놈, 미친년의 자식, 뚜쟁이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 그런지 몰라도 여기서는 아무리 끔찍한 짓을 저질러도 약간의 유머 감각은 살아 있어요. 반면에 그링고는 아무리 예의 바르고 ‘격식’(?)을 차려도, 태어날 때부터 ‘얼간이’입니다. 또 그들의 생활 방식은 얼마나 짜증스러운지요. 그 빌어먹을 파티에서는 좀스러운 칵테일 몇 잔을 삼킨 후에 그림 판매에서 선전 포고까지 모든 일이 결정됩니다. (그들은 흥겹게 취하는 법도 모릅니다.) 그들은 그림 파는 사람이나 전쟁을 선포하는 사람이 ‘중요한’ 명사라는 것을 명심하고 있지만,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주요 인사’에게 온갖 아첨을 다합니다. 그 사람도 제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난 자식이라는 것은 그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그링고에 대한 또 다른 생각들도 말해 보겠습니다. 좀스러운 칵테일이나 ‘파티’ 없이도 살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될 수 없습니다. 제일 짜증 나는 일은 그링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야심을 갖는 것, 성공적인 ‘인물’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이상의 무엇이 되고 싶은 야심은 조금도 없습니다. 나는 자만심을 경멸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굵은 똥’이 되는 것에 더 이상 관심이 없습니다.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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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 주머니에 찌른 채 중절모를 비스듬히 쓰고 있는 살인자는 여자의 처참함만큼이나 끔찍해 보인다. 사실 이 그림은 ‘마초(macho)'와 그의 먹이 ’칭가다(chingada)'라는 전형적인 인물들을 보여 준다. 칭가다란 문자 그대로 ‘당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멕시코에서 가장 흔한 욕설이자 프리다가 자주 쓰던 말이다. 옥타비오 파스는 이 동사(chingar: 비틀다. 압박하다)가 폭력을 명시하는 단어라고 설명한다. “스스로 일어나 다른 사람을 무력으로 관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동사는 남성적이고 능동적이며 잔인하다. 고통을 가하고 상처를 입히고 흔적을 남기며 원한에 사무친 만족감을 유발한다. 이러한 행동을 가하는 사람은 능동적이고 공격적이고 폐쇄적인 반면에, 당하는 사람은 수동적이고 무력하고 개방적이다.” 프리다는 자기가 살인자를 이렇게 그린 이유가 “멕시코에서는 살인이 상당한 만족감을 주는 자연스러운 행위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가 이 장면을 그린 것은 살해당한 여자의 고통에 공감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자기 역시 ‘삶에 의해 살해당할’ 지경에 처해 있다는 것이었다.

‘삶에 의해 살해당할’ 지경이라니? 리베라 부부가 멕시코로 돌아온 후 몇 달 지나지 않아 단란한 새 생활을 시작하고 싶다는 프리다의 소망은 깨졌다. 디에고가 그녀의 동생 크리스티나와 연애를 시작한 것이다.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프리다는 디에고가 좋아하던 긴 머리를 잘라 버렸고 테우아나 의상도 더 이상 걸치지 않았다. 닥쳐 온 고통이 너무 커서 도저히 기록할 수 없다는 듯, 그녀는 자기 경험을 그리는 대신 자신의 고통이 투사된 다른 여자의 불행을 묘사한 <작은 칼자국 몇 개>를 그렸다. (P236-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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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사다의 판화는 아무리 폭력적인 것이라 해도 익살스러운 요소를 담고 있어 프리다의 마음을 끌었다. 프리다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웃음’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다. 웃음을 터뜨리는 것, 자기를 내던지고 가벼워지는 것, 이것이 바로 힘이다. ‘비극’처럼 우스꽝스러운 것도 없다.” 1935년 말이 되자 프리다는 크리스티나와 디에고의 관계를 무시해 버리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은 깊이가 있고 전염성이 강했다. <작은 칼자국 몇 개>는 프리다의 너털웃음이었고, 이 폭소의 위력은 고통을 몰아낼 수 있을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희망과 마찬가지로 유머도 그녀가 인생이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게 해 준 버팀목이었다. (P245)


<추억>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심장을 끄집어내는 장면은 사랑의 고통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러한 직접적이며 가혹한 상징도 멕시코 문화의 맥락에서는 별로 기괴해 보이지 않는다. <죽음의 병풍> 등의 멕시코 식민지 시대 회화 역시 프리다의 작품처럼 소박하고 직설적인 방식으로 고통을 표현했다. <죽음의 병풍>을 그린 무명 화가는 시체들이 자기 심장을 꺼내 커다란 절구에 넣고 찢는 장면으로 “하느님은 회개하는 겸손한 가슴을 멸시하지 않으신다.”라는 구절을 형상화했으며, 천사가 인간의 심장을 압축기로 으깨는 장면에서 “너의 심장을 부수고 으깨라.”라는 명령을 표현했다. 식민지 시대와 마찬가지로 현대 멕시코에서도 ‘신성한 심장’은 무수한 형태로 등장한다. 가시관을 쓴 심장을 비롯해서 하나같이 상처 입고 피 흘리는 모습이다. 목각 그리스도의 벨벳 치마에 은제 심장을 꽂거나 심장 모양의 붉은색 쿠션을 만들고, 혈관이 보이는 심장이 가시관을 쓰고 있는 그림을 그린다. 성스러운 심장이 종교적 열정을 상징하는 불꽃으로 타오르는 그림도 있고, 심장 위쪽의 절단된 동맥에서 싹이 트는 그림도 있다. 프리다도 큐피드가 성스러운 심장을 들고 있는 모습과 “잠자는 심장을 깨우라.”는 글자가 수놓인 베갯잇을 갖고 있었다. 그녀가 <추억>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바로 이런 종류였다. 심장은 터지고 양팔이 없고 영혼은 셋으로 나뉘어 어느 것도 온전치 않다.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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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는 국립예비학교 마지막 해에 동성애에 입문했고 그 일로 큰 상처를 받았다. 그녀의 동성애는 디에고의 자유분방한 사상 세계에 발을 들인 후에 다시 나타났다. 여자 간의 사랑이 흔하고 또 용인되는 세계였다. 남자들은 ‘작은 집’(여기서는 ‘첩’의 뜻)을 소유했고, 여자는 여자를 소유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프리다는 자신의 양성애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디에고도 프리다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뤼시엔 블로흐는 디트로이트에서 느긋한 일요일 아침 식사를 즐기던 중에 리베라가 갑자기 프리다를 가리키며 “프리다가 동성애자라는 것 알고 있지?”라고 해서 깜짝 놀랐던 일을 기억한다. 당황한 사람은 뤼서엔뿐이었다. 계속해서 디에고는 프리다가 스티글리츠 화랑에서 조지아 오키프에게 짓궂은 수작을 걸었던 이야기를 해 주었고 “남자는 여자보다 성적으로 단순하기 때문에 여자가 훨씬 더 교양 있고 예민하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프리다는 웃고만 있었다. 디에고에 따르면 남자의 성기는 “한 군데뿐”이지만, 여자의 성기는 “온몸에 있으니까 여자들끼리는 훨씬 더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프리다는 여자 친구와 레즈비언 친구가 많았다. 동성애로 인해 남성적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리스 미소년 같았다. 남자 아이 같으면서도 매우 여성적이었다.

프리다는 자신의 사생활을 은연중에 작품에 드러내곤 했으며, 동성애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두 명의 여자가 등장하는 일련의 자화상들은 그녀의 자기애와 정신적 이중성을 암시하는 동시에 동성애 성향을 드러낸다. (P255)


프리다는 디에고와 마찬가지로 트로츠키에 열광했지만, 트로츠키 당원이 되지는 않았다. 멕시코에서 트로츠키 당은 몇몇 지식인과 무역 조합 관계자로 구성된 가난한 소규모 집단이었기 때문에 적극 가담자가 아니고서는 당원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36년 7월 18일에 일어난 에스파냐 내전은 그녀의 정치적 양심을 자극하였다. 그녀가 보기에 프랑코의 반란에 맞서는 에스파냐 공화국의 투쟁은 ‘전 세계 파시즘을 분쇄할 가장 강렬한 희망’을 의미했다. 프리다와 디에고는 공화파 지지자들과 함께 에스파냐 민병대 후원회를 구성했다. 당시 에스파냐 민병대는 경제적 도움을 얻기 위해 멕시코에 와 있었다. ‘해외 분과’ 소속의 프리다는 멕시코 바깥 사람이나 조직과 접촉하는 일을 담당했다. (P260-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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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이 자기를 버렸을 때 그에게 선물했던 프리다의 첫 번째 <자화상>은 순진하고 애교에 넘치는 모습으로 애인에게 돌아오라고 애원한다. 한편 트로츠키에게 선물한 초상화에서는 유혹적이고 세속적인 프리다가 애인을 버린 후에 초상화의 형태로 자기를 되돌려 줌으로써 골탕을 먹인다. 이듬해에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인이자 수필가 앙드레 브르통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트로츠키의 서재에 걸려 있는 프리다 칼로 드 리베라의 자화상을 오랫동안 사모했다. 그녀는 나비 같은 날개 옷을 입고 정신의 장막을 걷었다. 찬란한 독일 낭만주의 시대에 살았던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 젊은 여성의 등장을 지켜볼 수 있는 것은 우리 시대의 특권이다. 그녀는 모든 유혹의 재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천재 남성들의 사회에도 익숙한 여성이다.” 프리다는 트로츠키에게 선물한 <자화상>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플랑 창과 나>, <강아지와 나>, <벌어진 상처를 기억하며>에서도 유사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브르통은 이런 평가를 내렸다. “이보다 더 철저하게 여성적인 예술은 없다. 최대한의 유혹을 위해서라면 극단적인 순수함과 사악함 사이를 기꺼이 오간다. 프리다 칼로의 예술은 폭탄에 두른 리본이다.”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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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통의 집에서 나온 후로 건강도 회복되었지만, 프리다는 파리가 퇴폐적인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유난히 싫어했던 것은 보헤미안의 공허한 포즈였다.

이들이 얼마나 개 같은지 당신을 모르실 거예요. 그들은 빌어먹게 ‘지적’이고 후져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요. 나랑은 너무나 안 맞아요. 이런 파리의 ‘예술적’ 견공들과 관계를 갖느니 차라리 톨루카(멕시코의 도시) 시장 바닥에 앉아서 토르티야를 팔겠어요. 그들은 몇 시간씩 ‘카페’에 죽치고 앉아서 자기네 소중한 엉덩이를 데우면서 자기들이 신이라고 생각하고는 더없이 환상적인 난센스를 상상하고,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이론들만 떠벌리며 공기를 오염시킵니다. 자기 집 부엌에는 다음날 아침에 먹을 것도 없으면서, 그들은 아무도 일하지 않으며, 자기들을 ‘예술가’에 ‘천재’라고 추켜올리는 부자 견공 무리에 빌붙어서 사니까요. ‘똥’, 바로 똥이 그들의 참모습입니다. 디에고나 당신(머레이) 같은 사람은 찾아볼 수 없어요. 그들은 그저 쓸데없는 소문이나 남의 험담을 떠벌리고 ‘지적’ 토론을 하느라 시간을 낭비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진짜 ‘남자’일뿐더러 ‘예술가’는 아니에요. 이런! 이곳에 온 것은 시간 낭비가 아니었어요. 왜 유럽이 망해 가고 있는지, 왜 이 사람들 전부가(잉여 인간들) 그 많은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만들어 냈는지 알겠어요. 목숨 걸고 맹세하건데, 이 땅과 이곳 사람들을 죽을 때까지 혐오하겠어요. 이들은 허위와 망상이 너무 심해서 나까지 미쳐 버릴 것 같아요.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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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초현실주의자라기보다는 초현실주의가 발굴한 작가였다. 그러나 1938년에 초현실주의와 직접 접촉한 이후 그녀의 작품에는 뚜렷한 변화가 생겼다. 이를테면 <루터 버뱅크>나 <헨리 포드 병원> 같은 1930년대 초반 작품은 멕시코 민중 미술에 기초한 소박한 양식과 판타지를 보여 주는 반면에, 1938년 이후의 그림은 보다 복잡하고 예리해졌으며 보는 이를 불편하게 할 정도의 강렬함이 더해졌다. 개성적인 윤곽은 뚜렷해지고 음영은 흐릿해지면서, 1929년 <자화상>의 짓궂은 고집과 트로츠키에게 헌정한 <자화상>의 악마적이고 여성적인 매력 대신 새로운 신비와 매력, 자기 인식의 심화가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는 프리다가 살아온 고통의 세월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초현실주의가 잠재 의식을 예술적 내용의 원천으로 삼았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브르통의 이론은 그녀의 가장 초현실주의적인 작품 <물이 준 것>의 수수께끼와 심리적 인유에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이 작품이 자기에게 특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작품은 욕조의 몽상을 보여 준다. 욕조 위로 염려와 회상, 성욕과 고통과 죽음의 이미지가 둥둥 떠 있다. 분위기는 모호하고 차분하며, 기억은 막연히 떠오를 뿐 분명하게 잡히지 않는다. 이런 비현실감은 전반적으로 투명한 회색과 청색의 색조와 유달리 엷은 색칠로 유지된다. 불합리하게 병치된 정밀한 디케일이 많다는 점에서 달리와 비슷한 느낌을 주지만, 보스와 브뤼겔을 존경했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프리다의 전 작품 중 가장 복잡한 것으로, 일부러 의미를 모호하게 표현했다. (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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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프리다는 <두 명의 프리다>가 ‘자기 인격의 이중성’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그녀가 두 번 나오는 다른 자화상(<숲속의 두 누드>와 <희망의 나무>)처럼 <두 명의 프리다>는 자기 양육의 이미지이다. 프리다는 자기를 위로하고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강하게 만든다.

여기서는 다른 종류의 이중성도 작동된다. 프리다는 몇 시간씩 거울에 비친 자신의 영상을 음미하며 그림으로 재현했고, 그러는 동안 자기가 두 가지 정체성(관찰하는 자이자 관찰당하는 자. 내면에서 느껴지는 자아이자 외부에서 보이는 자아)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은 점점 강해졌을 것이다. 그녀의 육체는 누드이거나 주름과 리본이 달린 옷을 입었거나 상관없이 화가의 관찰 대상이다. 예쁜 물건이라는 수동적 역할을 맡은 여성, 고통의 희생자, 자연의 생장 순환에 동참하는 존재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반면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녀는 그려지는 대상이 아니라 그리는 주체로 자기를 인식한다. 이처럼 그녀는 능동적인 화가인 동시에 수동적인 모델, 여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가를 탐구하는 냉정한 관찰자인 동시에 여성적 감정을 온몸으로 느끼는 열정적 담지자가 되었다. 이러한 여성과 남성의 양극성을 인식했던 리베라는 프리다를 ‘여성 화가이지만 남성 화가’라고 불렀다. (P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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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보니토가 있는 자화상>에서 프리다는 밋밋한 짙은 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어 죽음을 애도하는 느낌을 주고 있다. 아버지의 죽음. 전물자들의 죽음, 그리고 어쩌면 보니토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다. 그림에서 보니토는 그녀의 어깨 위에 앉아 있다. 그녀의 얼굴을 에워싼 나뭇잎은 문자 그대로 생명체로 들끓는다. 애벌레에 파먹인 잎도 많다. 생명은 소멸되게 마련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프리다의 머리와 나뭇잎 사이에 거미줄이 처져 있고, 여기에 애벌레 한 마리가 걸려 있다. 거미줄은 프리다와 세계를 연결하는 고리이다. 프리다는 불행할 때마다 삶을 붙잡는 방법들을 강구했다. 이러한 방법 중에 세월이 지나고 생활 반경이 줄어듦에 따라 점점 더 중요해진 것은 자기와 자연의 관계를 습관의 문제(애완동물을 사랑하고 꽃을 가꾸고 과일 그릇을 정리하는 문제처럼)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믿음을 재확인하고 죽음과 파괴가 지배하는 세상에 영원한 뭔가를 세우기 위해 리베라 부부는 1942년에 ‘아나우아카이(Anaahuacalli)’를 건축하기 시작했다. 아나우카이란 기괴하고 음울한 신전 박물관으로, 코요아칸 근처 페드레갈(‘돌이 많은 땅’이라는 뜻) 지역의 용암층에 위치했다. (P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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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의 학생들은 모두 그녀의 수업에 아무런 체계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자기 생각을 학생에게 강요하지 않았으며, 학생의 재능이 각자의 기질에 따라서 발전하게 내버려 두었다. 다만 학생이 자기 비판적이 되도록 이끌었다. 그녀의 지적은 날카로웠지만 결코 퉁명스럽지 않았다. 비판이나 칭찬을 하면서도 그것이 얼마든지 틀릴 수 있는 개인적 관점일 뿐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비판과 칭찬의 파장을 조절했다. “여기는 색채가 좀 더 강해야 할 것 같다. 이것과 이것의 균형이 맞아야 하는데 이 부분이 썩 잘된 것 같지 않아. 나라면 이렇게 하겠어. 하지만 나는 나고 너는 너지. 내 생각은 하나의 의견일 뿐, 틀릴 수도 있어. 도움이 된다면 내 말대로 하고, 아니면 네 생각대로 해라.” 다음은 그녀의 학생이었던 아르투로 가르시아 부스토스의 말이다. (P417)


좌파는 프리다를 열혈 공산주의자로 보는 경향이 있는 반면, 정치에 무지하거나 무관심한 사람들이나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녀를 비정치적 인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흥미롭게도 그녀를 정치적 인물로 보는 것은 남자 제자들이다. 그녀의 여자 제자 파니 라벨은 그녀가 정치적 입장을 취한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휴머니스트였지 정치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어쨌든 프리다는 적어도 1940년대부터 예술의 사회적 측면을 강조했으며 어린 제자들의 정치의식 계발에 관심을 가지면서 마르크스주의 문학을 추천하거나 자기와 디에고의 정치 토론에 끌어들였다. 그녀에 따르면 회하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자기가 정치적인 작품을 제작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학생들이 사회를 의식하고 ‘멕시코적’ 사실주의라는 리베라의 전통을 따르도록 장려했다.

결국 ‘프리다 사단’은 인민을 위한 예술이라는 이상을 공유하는 좌익 화가 단체를 조직했다. ‘청년 혁명 예술가’로 알려진 이 단체의 회원은 마흔 일곱 명으로 늘어났고, 장날마다 멕시코시티 여러 곳의 노동자 거주지를 순회하며 다양한 전시회를 열었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자기들의 정치 의식이 형성된 것이 프리다 덕분이라고 말한다. (P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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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는 모리요 사파에게 보낸 편지에서 1946년에 그린 <희망의 나무>가 “빌어먹을 수술의 결과일 뿐”이라고 말했다. 여기에서는 울고 있는 프리다가 누워 있는 프리다를 지키듯 앉아 있다. 울고 있는 프리다는 붉은색 테우아나 의상을 입고 있고 누워 있는 프리다는 병원의 이동식 침대 위에서 시트로 알몸의 일부만을 가리고 있다. 누워 있는 프리다는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은 것 같다. 그녀의 등에는 깊은 수술 자국이 남아 있다.(그녀가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린 것과 똑같은 상처인데 아물지 않은 채 피가 흐르는 것만 다르다.) 앉아 있는 프리다는 선홍색 허리띠가 달린 연분홍 정형 장치를 자랑스럽게 들고 있다. 이것은 프리다가 마라톤 치료에서 승리했음을 보여 주는 트로피이며 프리다 특유의 반어적인 표현이다. 그녀의 가슴을 지탱하는 버팀대를 보면 그녀 또한 정형 장치를 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프리다를 지탱해 주는 것은 등판 받침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가 오른손에 들고 있는 깃발이다. 연두색 깃발에는 붉은색 글자로 “희망의 나무여, 굳세게 자라라.”라고 쓰여 있다. 프리다가 친구들에게 자주 들려 준 말로, 그녀가 즐겨 부른 베라크루스 노래의 첫 소절이다. 노래는 “내가 작별을 고할 때 눈물 짓지 말라.”는 구절로 이어진다. 희망의 나무가 어떤 사람의 은유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특히 이 그림의 경우에 희망의 나무가 은유하는 것은 수호자 프리다이다. 그녀는 동정하며 눈물을 흘리지만 꼿꼿하게 앉아 있다. 노래를 기초로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은 리베라의 교육부 3층 프레스코 벽화와 포사다의 유행가 인쇄물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프리다가 노래를 차용하는 것은 언제나 개인적 드라마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출발점으로서만이었다. “희망의 나무여, 굳세게 자라라.”는 그녀의 구호이자 모토였다. (P445-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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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텍의 참배자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다. “나는 꽃입니다. 나는 깃털입니다. 나는 신들의 북이고 거울입니다. 나는 노래입니다. 나는 꽃을 비처럼 내리게 하고, 나는 노래를 비처럼 내리게 합니다.” 이것은 프리다의 생각과 비슷하다. 그녀는 자기가 산이고 나무라고 말했으며, 일기에는 인간이라는 존재 또한 우주라는 단일한 흐름의 일부이고 인간이 인간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수백만의 다른 존재들”을 거쳐야 한다고 적었다. 아스텍 사람들에게는 특정한 동물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앵무새는 말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초자연적 생물로 여겨졌으며 인간의 머리를 가진 새로 그려졌다. 또 아스텍 사람들은 인간 하나가 태어날 때 어디선가 동물 하나가 태어나며, 사람의 운명은 탄생일을 상징하는 동물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마찬가지로 프리다는 자기가 변신 능력을 갖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머리는 꽃이, 그녀의 팔은 날개가, 그녀의 몸은 사슴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태도는 초현실주의와도 관련이 있겠지만 그 진정한 기원은 멕시코 문화 전통의 일부인 생명에 대한 마술적 접근 방식이다. (P448-449)


프리다는 심장을 꺼내서 심장 모양의 팔레트에 올려 놓았다. 그녀가 예술을 창조하는 물감이 바로 이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심장-팔레트를 애정의 징표이자 고통의 증거로 의사에게 바친다. 다른 손에는 끝이 뾰족한 붓뭉치를 들고 있다. 붓이 붉은색 물감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면 즉각적으로 수술 기구가 연상된다. 프리다에게 있어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는 심리적 수술이다. 자기가 영혼을 절개하고 그 안을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그녀의 붓은 심장이라는 이름의 팔레트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붉은색을 띠게 된다. (P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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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는 일기에서 고통과 고독과 자살에 대한 이상한 묵상을 하고 있다. 죽음의 손길을 환영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당시의 자살 기도를 후회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녀는 죽음을 ‘거대하고’, ‘너무나 조용한 출구’라고 했다.

고용한 고통

소란한 아픔

쌓이는 ‘독’

사랑은 나를 떠나고 있었다

그때 나의 세계는 이상한 세계였다

범죄적 침묵과

경계하는 낯선 눈빛이

악을 오해했다

한낮의 몽롱함

나는 밤을 살지 않았고

당신은 자살하고 있다!!

당신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음울한 칼날로

그게 나의 잘못이었나?

나는 나의 엄청난 죄악이

고통만큼 크다는 것을 인정한다

나의 사랑, 내가 통과한 곳은 거대한 출구였다

너무나 조용한 출구였다

그래서 나는 죽음으로 갔다

나는 완전히 잊혀졌기에

그것은 나의 최고의 행운이었다

당신은 자신을 죽이고 있다!

당신은 자신을 죽이고 있다

누군가는 ‘결코 당신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강한 손을 잡았다

‘내가 여기 있다’, 그래서 그들이 살 수 있다

프리다 (P518-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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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불편을 네 시간 동안 참아가며 “양키 암살자들 물러가라!”라고 외치는 대중의 함성에 동참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자기의 존재가 시위에 참여한 동지들에게 중요한 의미로 받아들여졌음을 알고 만족을 느꼈다. 그녀는 한 친구에게 “나의 평생 소원은 단 세 가지, 디에고와 함께 사는 것,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 공산당원이 되는 것이다.”라고 털어놓았다.

그녀는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도 오랫동안 누리지 못했다. 시위에 참여한 이후로 폐렴이 떨어지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며칠 후 그녀는 의사의 말을 어기고 잠자리를 빠져나와 목욕을 했다. 이로 인해 그녀의 병세는 악화되었다.

프리다는 자기가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일기의 마지막 부분에 해골들을 그리고 포사다의 <해골들>에 나오는 것 같은 의상을 입혔다. 그녀는 굵은 글씨로 “죽은 자들의 소동”이라고 썼다. 그녀에게 죽음은 삶에서 발생하는 사실이자 영원한 순환의 일부이며 우리가 직시해야 할 어떤 것이었다. “우리가 안락이나 ‘평화’를 찾는 것은 죽음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 순간 죽으니까.” 카추차 회원인 마누엘 곤살레스 라미레스는 프리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그녀를 찾아왔다. 그때 프리다는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자세히 말했다. 곤살레스 라미레스의 회상에 따르면, “그녀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어색하지 않았다. 두려워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누운 자세로 땅속에 묻힐 것을 걱정했다. 누운 자세로 끝없는 고통에 시달렸기 때문에 무덤 속에서까지 누워 있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화장을 부탁했다. (P533-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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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최후의 작품은 거실에 걸려 있다. 이 그림의 배경이 되는 화창한 하늘은 비교적 밝은 부분과 비교적 어두운 부분으로 양분되어 있으며, 하늘을 배경으로 멕시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과일인 수박이 놓여 있다. 통째로 있는 것, 이등분된 것, 사등분된 것, 더 잘게 잘라진 것들이 있다. 물감을 다루는 솜씨는 다른 후기 정물화에 비해서 보다 능숙하고 형태 면에서도 윤곽과 구성이 탄탄하다. 프리다는 자기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힘을 모아 이 환희로 가득 찬 최종 진술에 쏟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잘게 잘린 과일 조각을 통해 그녀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받아들이지만, 감미로운 붉은 과육을 통해 생명의 충만을 찬양한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여드레 전, 죽음이 한 발 한 발 다가오던 바로 그때 프리다 칼로는 핏빛 물감에 적신 붓으로 자기 이름과 날짜와 자신이 죽음을 맞게 될 장소인 ‘멕시코 코요아칸’이라는 글자를 맨 앞의 선홍색 과일 조각 위에 썼다. 그러고는 커다란 대문자로 자신의 삶을 향해 ‘인생 만세(VIVA LA VIDA)'라는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P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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