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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사비아노의 <고모라>

영화 <고모라Gomorrah> 2008년

by 노용헌

2008년 마테오 가로네 감독에 의해 동명의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최고의 이탈리아 범죄영화’라는 찬사를 받으며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고,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후보작으로 선정되었다. 영화 〈고모라〉는 원작자인 사비아노가 시나리오 공동 집필을 맡아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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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인으로 배에서 들어올린 컨테이너가 공중에서 건들거렸다. 컨테이너를 크레인에 연결하는 스프레더가 움직임을 제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공중에 둥실둥실 떠 있는 것 같았다. 대충 닫아두었던 컨테이너 문이 활짝 열리자 십여 구의 사람 몸뚱이가 비 오듯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엔 마네킹 같았다. 그런데 땅에 부딪힌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 흩어지는 게 아닌가. 그 몸뚱이는 진짜 사람이었다! 남자, 여자, 심지어 몇몇 어린아이들의 몸뚱이가 컨테이너에서 쏟아져 나왔다. 모두 이미 죽어 있었다. 꽁꽁 언 채로, 마치 정어리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들은 중국인. 죽었지만 결코 죽지 않는 중국인이었다. 그들은 영생을 얻었다. 자신들의 신분증명서를 남과 맞바꾸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최후는 이러했다. 이것이 흔해 빠진 괴담이라면, 이들 몸뚱이는 어느 중국 식당의 요리재료가 되거나, 공장 옆 벌판에 파묻히거나, 배수비오 화산의 분화구에 떨어졌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여기 있다. 컨테이너에서 떨어져 내리는 그들의 목에는 이름이 적힌 꼬리표가 끈으로 매여 있었다. 그들은 나중에 중국으로, 그러니까 고향으로 돌아가서 묻히기 위해 돈을 따로 떼어두고 있었다. 사망한 다음에 필요한 귀환 항해 비용으로 월급의 1퍼센트씩을 공제한 터였다. 컨테이너 안의 공간 조금, 그리고 중국 땅뙈기 한 조각을 차지하기 위해 지불한 대가였다.

내게 그 이야기를 해주는 동안, 항구의 크레인 기사는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나를 보았다. 그래야만 겨우 말할 용기가 난다는 듯이, 그는 사람 몸뚱이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지만, 경보벨을 누를 필요조차도 없었다. 그저 컨테이너를 땅 위에 내려놓았을 뿐인데, 어디선가 열두어 명의 사람들이 나타나 땅에 떨어진 몸뚱이들을 다시 그 안에 집어넣고, 호스로 물을 뿌려 잔해를 씻어냈다. 원래 그런 식이었다. 그는 차라리 초과근무를 너무 많이 한 바람에 환상을 보았다고 생각하고 싶었으리라. 벌린 손가락을 오므려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 채, 그는 계속 울먹였지만, 나는 도대체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P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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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을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났을 때, 시안이 아파트에 와서 하룻밤을 지냈다. 그는 완벽한 이탈리아어를 구사했는데 단지 ‘르r’ 발음만은 오히려 ‘브v'에 가깝게 들렸다. 마치 토토가 영화에서 흉내 냈던 가난뱅이 귀족들의 말투 같았다. 시안 주(Xian Zhu)는 흣날 니노(Nino)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나폴리의 이탈리아인들을 상대하는 중국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폴리식 이름을 갖게 마련이었다. 워낙 흔한 일이다보니 이제는 어느 중국인이 자기 이름을 토니노, 니노, 피노, 파스콸레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니노 시안은 그날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았다. 대신 부엌 식탁에 앉아 한눈으로는 텔레비전을 흘끔거리며 계속 전화통화만 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영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시안의 목소리는 결코 낮아지는 법이 없었고, 혀는 마치 기관총처럼 요란하게 이빨 사이로 말을 토해냈다. 숨도 쉬지 않고 말을 늘어놓는 통에 질식사할 것만 같았다. 그의 경호원들이 풍기는 허세는 지독한 냄새로 변해 집 안에 침투했고, 당연히 내 방 안까지도 스며들었다. (P23-24)


밀수의 축선은 나폴리에서 브란디시까지 이어졌으니, 이는 값싼 담배의 유통로인 셈이었다. 밀수는 번창하는 사업이었고, 남부의 피아트 자동차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정부가 외면한 사람들의 복지체계이자 풀리아와 캄파니아 주민 2만 명의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다. 그리고 1980년대 초에 카모라의 엄청난 전쟁을 촉발시킨 원인이기도 했다.

풀리아와 캄파니아의 일족들은 세금을 피해 유럽에서 담배를 밀수했다. 이들은 몬테네그로에서 매월 수천 상자씩을 수입했는데, 1회 배송분만 5억 리라에 이르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카모라 일족들은 더 이상 담배 밀수 같은 하찮은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앙투안 라부아지에의 금언은 여전히 사실이다. 즉 이 세상에는 사라지거나 창조되는 것이라곤 없으며, 다만 그 형태가 변할 뿐이다. 이는 자연에서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역학에서도 최우선의 원리이다. 이제 담배 대신 소비재가 밀수업의 주역이 된 것이다.

살인적인 가격 전쟁이 전개되면서, 할인이야말로 대리점주, 도소매상들에게는 목숨줄이 되었다. 각종 세금과 견인 트레일러의 양이 늘어날수록 이윤은 적어지게 마련이었고, 이것이 상품과 돈의 회전을 막는 진짜 장애물인 셈이었다. 대기업들은 값싼 노동력을 찾아 동쪽으로 동쪽으로, 그러니까 루마니아나 몰다비아, 또는 중국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치 않았다. (P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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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엠마누엘레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이 별의 어느 한 곳에서는 열다섯이 그저 숫자에 불과했다. 이 빈민가에서 열다섯 살에 죽는다는 것은 갑작스러운 참변이라기보다는 예정된 사형집행에 가까웠다. 교회는 굳은 표정의 소년들로 가득 찼고, 간혹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밖에서는 소규모 성가대가 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다. “그는 아직 우리와 함께 있네. 그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으리......” 이 노래는 유명한 선수가 은퇴하며 등번호를 영구결번시킬 때 축구광들이 불러주는 전통적인 노래였다. 마치 그곳이 축구경기장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이들의 노래에는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사복형사들이 복도에 늘어서서 길을 트고 있었다. 모두 형사를 알아보았지만 실랑이를 벌일 틈조차 없었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면 그들이 먼저 나를 봤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자신들의 머릿속 기록보관소에는 들어 있지 않은 새 얼굴임을 감지했던 것이리라. 내 무덤덤한 얼굴에 흥미를 느꼈는지, 형사 가운데 하나가 내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이놈들은 모두 여기에 살도록 저주를 받은 셈이죠. 마약이며, 절도며, 장물 취급이며, 강도질..... 어떤 놈은 심지어 매춘까지 한다니까요. 전과 없는 놈은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 여기서 놈들이 더 많이 죽을수록, 이 세상을 위해서는 더 좋은 셈이죠.” (P40-41)


나는 파스콸레가 거리에 서서 마치 신발에 묻은 눈을 털어내듯 발을 툭툭 구르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삶이란 것이 이토록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난생처음 발견한 어린아이 같은 그의 모습을 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을 다스리고 있었다. 자기 일을 하기 위해, 그 일을 하고 싶어지도록, 다른 누구보다 그 일을 잘하도록 말이다. 하지만 자기가 만든 의상을 본 순간, 그가 어루만지던 바로 그 옷감 속에서 움직이는 몸을 본 순간, 그는 고독을, 크나큰 고독을 느끼고 말았다. 단순히 자신의 살과 피 안에서만 무언가를 알고 있을 경우, 우리는 그걸 진정으로 알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일이라는 것이 그저 살아남기 위한 것에 불과할 때, 일 그자체가 목표가 되어버리면 최악의 외로움에 잠길 수밖에 없는 법이다. (P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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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국제 의류시장, 이탈리아의 기품 어린 거대한 군도(群島)를 먹여 살리는 것은 바로 시스템이다. 인력과 생산품을 통해 시스템의 손길은 지구상 구석구석 미치지 않는 데가 없다. ‘시스템’. 여기서는 누구나 알아듣는 말이지만, 다른 곳에서는 여전히 설명이 필요하니, 지하경제가 어찌 돌아가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카모라’는 이 세상에 없는 말이다. 다만 마약단속반이나 판사 또는 언론인과 각본가 등이 즐겨 사용하는 경멸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그 일반적인 의미, 그러니까 학술 용어로서의 의미는 이미 한참 낡아버렸다. 오늘날 카모리스티 앞에서 그 말을 들먹인다면 그들도 피식 웃어버리지 않을까. 그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용어는 ‘시스템’인데 --가령 “난 세콘딜리아노 시스템 소속이야”라고 말한다-- 이는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는 것이, 시스템이란 어떤 구조라기보다는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이 범죄조직은 경제와 마찬가지이며, 통상(通商)의 변증법이야말로 조직의 골조이기 때문이다.

세콘딜리아노 시스템은 의류 제조 과정 전체를 통제하고 있으며, 실제 생산지와 사업 본거지는 나폴리 외곽에 있다. 다른 곳에서라면 계약, 법률, 그리고 저작권 때문에 불가능했을 일조차 이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북부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일족들의 경제력에 의지하는 이곳에서는 어떤 합법적인 거대 복합기업도 상상할 수 없는 천문학적 규모의 자본이 모인다. 일족들이 수립한 직물, 피혁, 신발 등의 상호 연관된 시스템을 통해 주요 패션업체들의 정품과 똑같은 의류와 액세서리가 생산된다. (P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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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콘딜리아노 일족들은 자신들의 의류사업이 보유한 국제적 유통망과 판매망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심지어 마약 운송보다 큰 자산임을 깨달았다. 마약과 의류는 종종 똑같은 경로를 통해 운반되었다. 시스템의 사업 역량은 기술 분야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2004년 수사 결과 일족들은 자신들의 거래망을 이용해 중국제 첨단 상품을 수입해서 유럽시장으로 유통시키고 있었다. 즉 유럽은 형식(브랜드, 명성, 그리고 광고)을 중국은 내용(실제 상품, 값싼 노동력, 저렴한 재료)을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시스템은 이 둘을 하나로 합침으로써 양쪽 모두에서 이득을 얻었다. 나아가 경제가 침체 직전이라는 사실을 자각한 일족들은 이미 서구 대기업들의 하청을 받아 상품을 생산하던 중국의 산업지대를 표적으로 점찍어놓고 있었다. (P68-69)


유럽시장에 소개되는 마약들은 하나같이 세콘딜리아노를 거쳤다. 만약 나폴리와 캄파니아 주민들 상대로만 그런 매상을 올렸다면, 이곳의 통계수치는 그야말로 황당무계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가령 가구당 코카인 중독자 두 명과 헤로인 중독자 한 명씩이 있어야 했으니 말이다. 그것도 해시시, 마리화나, 코브레트, 그리고 약한 마약은 통계에 넣지도 않은 채로 말이다. 각성제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엑스터시’라는 이름을 고집하지만, 사실 그 종류만 해도 179가지나 된다-- 는 세콘딜리아노에서 엄청나게 많이 팔렸는데, 이곳에서는 보통 X파일이니, 토큰이니, 사탕이니 하는 은어로 통한다. 각성제로 얻는 이익은 그야말로 막대하다. 생산원가는 개당 1유로에 불과하지만, 한 묶음은 개당 3~5유로에 팔리는데, 밀라노나 로마 또는 여타 나폴리 지역에서는 개당 50~60유로에 팔리기 때문이다. 스캄피아에서는 개당 15유로에 판매된다.

세콘딜리아노는 전통적인 마약시장의 한계를 넘어 코카인 쪽을 개척하기로 했다.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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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4월 26일. 비차로는 호텔 빌라 줄리아 4층에서 애인과 함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똘마니들은 경찰 복장을 하고 들이닥쳤다. 호텔 지배인은 경찰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말할 엄두도 못 내고 그만 마그네틱 키를 건네주고 말았다. 이들은 문을 퉁퉁 두들겼다. 비차로는 아직 속옷 차림이었다. 그가 문간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나자 총질이 시작되었다. 두 발의 총알이 문을 꿰뚫고 그의 몸을 관통했다. 납탄과 산탄이 그의 살을 찢었다. 이들은 총을 쏴서 문을 박살내고, 확인사살차 머리에 한 방 갈겼다.

이제는 학살만 남았고 비차로는 시작일 뿐이었다. 감히 디 라우로 일족에 도전하거나 동맹을 깨뜨리려 하거나 사업 협정을 위반하려는 자는 누구든 그꼴이 될 판이었다. 분리파들의 전략은 아직 완전히 모양새를 갖추지 못했을뿐더러 그들은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공기 중에서는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았지만, 상황은 마치 그들이 뭔가를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전쟁은 2004년 10월 20일에야 윤곽을 드러냈다. 비차로가 피살된지 몇 달이 지난 다음이었다. 풀비오 몬타니노와 클라우디오 살레르노가 무려 열네 발이나 총을 맞고 피살되었다. 이들은 공개 마약시장을 운영했으며, 코시모의 절대 충성파였다. 코시모와 그의 아버지를 유인해서 제거하려던 계획은 이제 유야무야 되어버렸고, 몬타니노와 살레르노의 피살로 본격적인 전투의 막이 올랐다. 갈등이 폭발한 것이다.

피를 보고 난 다음에야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조직 내의 모든 간부들이 디 라우로의 아들들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P11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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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급차가 오기 전에 시신이 있는 장소에 도착해,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아는 누군가의 최후를 목도하면, 나는 항상 <암흑의 핵심>을, 그러니까 커츠를 사랑했던 여자가 그의 마지막 말이 무엇인지 말로에게 묻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러자 말로는 거짓말을 한다. 그는 커츠가 죽으면서 그녀에 관해 물었다고 둘러댔지만, 사실 커츠는 달콤한 말이나 고귀한 생각을 내뱉은 것이 아니라 그저 ‘공포’라는 말을 반복했을 뿐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마지막 말이 가장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생각을 담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즉 인생이란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언급해주리라고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죽을 때에는 오로지 공포만을 느낄 뿐이다. 모두, 거의 모두 똑같이, 단순하고도 진부하며 급박한 말을 반복할 뿐이다. “난 죽기 싫어.” 이들의 얼굴은 커츠의 얼굴과 겹치며, 입에서는 하필 이 지구상 최악의 장소에서, 이처럼 공포스럽게 끝을 맺어야 하는 데 대한 고뇌, 혐오, 그리고 거부가 드러나는 것이다.

피살자를 열두어 번쯤 보고 나서 --자기 피와 오물에 뒤범벅이 된 모습이며,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악취를 내뿜는 모습, 호기심이나 전문가다운 무관심이 깃든 눈으로 관찰되며, 마치 위험한 폐기물처럼 외면당하거나 흥분된 외침 속에 누워 있는 모습까지-- 나는 한 가지 확실한 결론에 도달했다. 바로 죽음은 역겹다는 것이다.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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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들이 야간 경비 근무를 마치고 왔으며, 그 와중에 환각제를 복용했음을 즉시 깨달았다. 잠을 쫓기 위해, 그리고 하루에 두 번 식사할 시간조차도 빼앗기 위해 일족들은 아이들에게 MDMA 알약 --엑스터시--을 먹였던 것이다. 하긴 독일의 제약회사 메르크(Merck)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MDMA를 만들었던 것도 참호 속의 병사들 --그들을 ‘멘센마테리알(Menschenmaterial), 즉 ’인간 실험재료‘라고 불렀다-- 이 허기와 추위, 공포를 잊기를 바라서였다. 나중에는 미국인들이 똑같은 약을 첩보 작전에 사용하기도 했다. 이제는 이 꼬마들이 그걸 정기적으로 복용함으로써 인공적인 용기와 힘을 얻는 것이다. 그들은 피자를 잘라서 쩝쩝대며 먹었다. 소리만 들으면 마치 노인네들이 수프를 게걸스레 퍼먹는 것만 같았다. 소년들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물을 더 달라고 했다. 그때 나는 자칫 폭력을 유발할 수도 있는 행동을 시도했는데, 예상되는 일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모두 아이들에 불과했으니까. 비록 납판으로 온몸을 두르고 있지만, 그럼에도 결국 아이들에 불과하니 말이다. 나는 녹음기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그들 모두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일부러 다 들으라고 말이다. (P157-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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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라는 함정에 빠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결국 아내의 부정을 발견하거나, 폴란드인 간호사를 한 명 얻게 마련이었다. 도대체 왜 아무 득도 안 될 놈의 일자리를 얻기 위해 노심초사하다가 절망에 빠지거나, 파트타임 전화상담원으로 일하다 인생을 마감해야 하는가? 차라리 사업가가 되는 게 어떤가. 진짜 사업가 말이다. 무슨 물건이든 사고 팔며, 공짜로라도 사업을 하는 사람, 에른스트 윙거(Ernst Junger)라면 위대함이란 다름 아닌 폭풍 속에 노출되는 것이라고 말했으리라, 카모라 두목들 역시 마찬가지로 대답할 것이다. 모든 행동의 중심, 권력의 중심이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는 모든 것을 수단으로 삼고, 심지어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는 일이었다. 그것이 비도덕적이라고, 인생이란 윤리 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고, 경제에는 한도가 있으며 특정한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단지 명령하는 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 다시 말해 시장에서 패배한 사람에 불과하리라.

윤리는 실패자들의 한계이며, 패배자들의 보호수단이며, 모든 것을 걸고 도박을 해서 크게 따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변명일 뿐이었다. 법률은 규칙을 정해두었지만, 정의는 그렇지 않았다. 정의란 모든 사람이 관여된 추상적인 원칙, 그리고 인간을 사면하거나 단죄하기 위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견딜 만한 것이었다. 결국 목사들과 교황들, 성자들과 이단자들, 혁명가들과 반동분자들 모두 유죄선고를 받을 것이다. 그들 모두는 배신과 살인과 오류를 저질렀기에 유죄였다. 늙고 죽기 때문에 유죄였다. 시대에 뒤처지고 패배했기에 유죄였다. 역사적 도덕의 보편법정에서는 그들 모두 유죄이며, 필요의 또다른 법정에서만 사면될 뿐이었다. 현실에서 정의와 불의는 단 한 가지 의미만을 지니고 있었다. 승리냐 패배냐, 또는 뭔가를 하느냐, 아니면 견디느냐.

누군가 나를 불쾌하게 만들면, 그는 내게 불의를 행하는 것이다. 반대로 나를 선의로 대하면, 정의를 행하는 것이다. 일족들이 지닌 가치 판단의 틀이 있다면 바로 이것뿐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해야만 했다. 이거야말로, 정의를 평가하는 유일하게 현실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 나머지는 단순히 종교이고 고해소의 일일 뿐이었다. 이것은 경제적 규범을 형성한 논리였으니, 카모리스티가 거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거래가 카모리스티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범죄사업의 논리, 또는 두목들의 논리는 가장 적극적인 신자유주의 원칙과도 일치했다. 유일한 법칙은 사업, 이윤, 그리고 모든 경쟁에서의 승리뿐이며 나머지는 무가치했다. 그 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P165-166)

언론을 의식한 까닭인지, 전쟁은 신속히 살인을 토해냈다. 겨우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열두어 명의 희생자가 추가되었다. 마치 거기 모인 특파원들 수에 맞춰서 한 사람당 한 건씩 골고루 이야깃거리가 돌아가도록 살인을 저지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완벽한 성공이었다. 수많은 수습기자들이 현장 경험을 위해 이곳으로 파견되었다. 마이크와 카메라가 곳곳에 진을 치고 마약판매상과 인터뷰를 실시하고, 벨레 주택의 무시무시한 외관을 포착했다. 몇몇 수습기자들은 마약밀매꾼을 자처하는 자들과 인터뷰하며, 그들의 뒷모습을 카메라로 촬영했다. 그러고는 각자의 이야기를 주절거리는 헤로인 중독자들에게 그 대가로 푼돈을 건넸다. 두 명의 젊은 여기자는 불타버린 승용차 앞에 서서 그 모습을 카메라맨에게 찍게 했다. 자신들의 경력에서 최초로 작은 전쟁에 기자로 참전한 데 대한 기념 촬영이었다. 어느 프랑스인 기자는 내게 전화를 걸어서, 코시모 디 라우로의 빌라를 촬영하러 갈 때 방탄조끼를 입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방송사 사람들은 차를 몰고 다니며 촬영을 했는데, 마치 졸지에 모든 것이 무대로 변해버린 숲속을 탐험하는 것처럼 보였다.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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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언제 진실을 바라보는지, 아무런 매개도 없이 어떻게 온몸의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지는, 우리 몸속의 무언가가 이야기해주는 듯 하다. 널리 이야기되고 보도된, 그리고 사진으로 촬영된 진실이 아니라 우리 앞에 스스로 드러나는 날것의 진실을 바라보는 것 말이다. 그것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자각과도 같다. 카모라 전쟁을 눈앞에서 보고 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너무 많은 기억들이 부풀어 오르는 통에 모든 이미지들이 일순간에 혼란스럽게 뒤섞인 채로 넘쳐흐른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게 된다. 카모라 전쟁은 끝났다. 건물의 잔해는 물론이고 땅에 고였던 피도 톱밥이 모두 빨아들여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그 전쟁을 목격하고,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이 자기뿐인 것 같다고 느낀다. 마치 누군가 자신에게 손가락질하며 “그건 사실이 아니야”라고 말할 것만 같다. (P198-199)


AK-47의 발명 이후로는 누구도 무기를 구할 수 없어서 패배했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전장을 평준화시킨 것이다. 전쟁은 더 이상 정규군만이 독점적으로 행세하는 영역이 아니었다. 세콘딜리아노 일족들이 자기네 구역에서 코카인을 완전 자유화함으로써 누구나 마약밀수업자, 사용자, 밀매꾼이 되게 하여, 범죄적이고 위계적인 중개에서 시장을 해방시켰듯이 AK-47 역시 비슷한 역할을 했다. AK-47은 어린 소년에서 말라깽이 소녀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병사로 만들었고, 기껏해야 양 열두어 마리나 몰면 그만일 작자들을 졸지에 장군으로 만들었다. 총을 구입해 쏘고, 사람이며 사물을 파괴하고 나서 다시 돌아가 좀더 구입하는 것이다. 그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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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국에 협조하지 않기로 결심한 두목들은 가공의 권력을 지닌 채 살아가게 마련이고, 이들은 자신들이 후원했고 출세시켰던 사업가들. 그러나 일족의 구성원이 아닌 까닭에 처벌을 모면한 사람들에 관한 일은 깡그리 잊어버리기 위해 무슨 수라도 쓸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두목들은 그 사업가들 역시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감방에서 평생 썩도록 만들 수 있었지만, 일단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눠보아야 했다. 자칫하면 자신들의 지고한 권위도 끝장나는 것은 물론이고, 밖에 있는 식구들까지도 위험에 노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도 자신들의 돈과 합법적인 투자 경로를 그려낼 수 없었다. 비록 자신들의 위력을 자백하고 폭로한다 하더라도, 자기네 돈이 과연 어디에 박혀 있는지 결코 알 수 없을 터였다. 항상 당하는 것은 두목들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사람을 죽이고, 군사조직에 지시를 내렸으며, 불법 자본을 추출하는 사슬의 맨 처음 고리였기 때문이다. 이는 곧 그들의 범죄가 항상 추적당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두목들은 결코 영원불멸하지 못했다. 쿠톨로는 바르델리노에게, 바르델리노는 산도칸에게, 산도칸은 차가리아에게, 차가리아는 라 모니카에게, 라 모니카는 디 라우로에게, 디 라우로는 에스파냐 파에게 밀려났으며, 심지어 에스파냐 파조차도 또다른 누군가에게 밀려날 터였다. 카모라 시스템의 경제적 능력은 지도부의 지속적인 교체와 범죄의 선택에 달려 있는 셈이었다.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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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역학에 관한 가장 예리한 관찰자 가운데 한 사람인 언론인 리카르도 오리올레스가 한 말은 두고두고 기억될 만하다. “범죄행위는 그 자체로 권력이 아니라, 단지 유사권력일 뿐이다.” 아무리 강력한 권력을 틀어쥔 두목이라 하더라도, 정부에 한 자리를 얻으려 하지는 않는다. 만약 카모라가 모든 권력을 장악한다면, 이들의 합법, 비합법 활동에 필수적이었던 그들의 사업은 결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에 대한 체포와 대재판은 이 시스템을 파괴하는 행위라기보다는, 왕초를 갈아치우고 사업의 주기를 깨뜨리는 방법에 불과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다음날 신문에 나란히 게재된 이들의 얼굴은 극악무도한 범죄자 집단이 아니라, 지난 20년 동안 감히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던 권력의 모자이크 몇 조각이었다. 스파르타쿠스 재판 이후, 투옥된 두목들은 은밀하거나 공개적으로 판사며 치안판사 그리고 언론인 등을 협박해왔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평범한 시멘트와 모차렐라 회사를 운영하는 사업가들을 졸지에 법 앞에서 살인자로 만드는 데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말이다. (P283)


일족의 권력은 시멘트의 권력으로 남아 있었다. 건설현장에서 나는 그들의 권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몇 해 여름에 걸쳐 이런저런 건설현장에서 일했다. 시멘트 섞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도급업자에게 내 출신지를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캄파니아는 이탈리아 전역을 통틀어 최고의 건설노동자를 제공하는 곳이었으니까. 가장 실력 있고, 가장 빠르고, 가장 값싸고, 가장 덜 짜증나게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일은 매우 고되었고, 나는 일을 능란하게 해내는 법까지는 배우지 못했다. 상당한 돈을 모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근육을 혹사하고 에너지를 모두 쏟아야만 했다. 날씨와 상관없이 항상 일하고, 때로는 스키마스크를 쓰거나 속옷차림으로 일해야 했다. 내 코와 손을 시멘트 가까이 갖다대보는 방법이야말로 그들의 권력이 어디에 구축되어 있는지를 이해하는 유일무이한 방법이었다.

건설업에서 일하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진정으로 이해한 것은 프란체스코 이아코미노가 사망한 다음이었다. 서른셋이었던 그는 에르콜라노에 있는 콰트로 오룰로지 거리와 가브리엘레 단눈초 거리 사이 교차로에서 작업복 차림으로 발견되었다. 비계에서 떨어진 것이다. 사고 직후에 모든 사람이, 심지어 건축설계사까지도 현장에서 도망쳐 버렸다. 혹시나 구급차가 너무 일찍 도착하면 자신들이 도망치는 데 방해가 될까봐 신고조차 하지 않았다. 폐에서 올라온 피를 내뱉으며 아직 살아있는 그를 거리에 내버려둔 채, 그들은 모두 사라져버린 것이다. (P294-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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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다. 나는 증명할 수 있다. 나는 경제가 어떻게 생겨나며, 어디서 그 향기를 얻는지 안다. 나는 성공과 승리의 향기를 안다. 나는 무엇이 이득을 짜내는지를 안다. 나는 안다. 말의 진실은 결코 타협하지 않을 것이니, 그것은 모든 것을 게걸스레 삼키고, 모든 것을 증거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크로스체크를 하거나 수사를 지시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관찰하고 고려하며 바라보고 귀 기울인다. 그것은 징역형을 선고받지 않으며, 목격자들은 자신들의 증언을 철회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참회하지 않는다.

나는 안다. 나는 증명할 수 있다. 나는 경제 매뉴얼의 페이지들이 어디서 사라지는지, 그 프랙털들이 원료며 물건이며 철이며 시간이며 도급계약으로 어디서 변신하는지를 안다. 나는 안다. 이 증거는 어느 땅 속에 감춰진 플래시 드라이브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접근할 수도 없는 산간마을 헛간 속에 충격적인 비디오테이프를 숨겨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나는 비밀첩보부의 문서 사본을 소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증거들은 반박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편파적이고, 내 눈에 기록되었으며, 내 입으로 새어나오며, 쇠와 나무의 반향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직접 보고 듣고 주시하고 말했으며, 이런 식으로 증언할 것이다. 추악한 단어이긴 하지만, 듣기 좋은 권력의 자장가에만 귀 기울이는 사람들의 귀에 대고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속삭여줄 때에는 여전히 유용한 한마디, 바로 진실을, 진실은 편파적일 수밖에 없다. 만약 진실을 객관적 공식으로 축약할 수 있다면, 그건 아마 화학의 영역에 속할 것이다. 나는 안다. 나는 증명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말한다. 이 진실들을. (P297-298)


카살디프린치페, 산치프리아노, 카사페센나, 그리고 파레테에서 포르미아에 이르기까지, 일족들이 다스리는 여러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하얀 홑이불을 떠올린다. 모든 베란다며, 난간이며, 창문마다 늘어뜨린 홑이불을. 하얀, 온통 하얀 색깔이었다.

1994년 3월, 그 새하얀 천의 폭포는 돈 페피노 디아나의 장례식을 애도하는 분노의 표현이었다. 당시 나는 열여섯 살이었다. 그날 아침에도 이모가 나를 깨웠는데, 평소와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마치 살라미 소시지의 껍질이라도 벗기듯 내가 두르고 있던 홑이불을 거칠게 벗겨갔다는 점이다. 나는 그 서슬에 그만 침대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이모는 아무 말도 없이, 당신의 짜증을 발뒤꿈치로 배출하기라도 하려는 듯, 쿵쾅거리면서 나가버렸다. 이모는 홑이불을 베란다에 꽉 붙잡아 맸다. 토네이도가 몰려와도 결코 날려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히, 이모가 창문을 열자, 거리의 목소리가 집 안으로 밀려들어오고, 집 안의 소음이 거리로 빠져나갔다. 이모는 심지어 찬장 문까지도 모조리 열어놓았다. (P307-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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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땅이 카모라의, 반드시 척결해야 할 거대한 고모라의 것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카모라의 사람들, 짐승이 아니라 우리 모두와 똑같은 사람들이여. 우리는 당신들의 다른 곳에서는 합법적인 행위인 것을 유독 이곳에서는 불법적인 에너지의 원천으로 삼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다른 곳에서는 세워지는 것을 당신들이 유독 여기서는 파괴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자신의 빌라 주위에 사막을 만들고 있으며, 당신들과 당신들이 원하는 것 사이에는 오로지 극도로 이기적인 욕망만 놓여 있을 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는 그 도시들을, 그 들판을, 그 도시들의 주민들을, 심지어 그 땅 위에 자라나던 모든 것들을 진멸하셨습니다. 롯의 아내조차도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창세기 19장 24~26절). 우리는 소금이 될 위험을 각오해야만 하며,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하늘에서 고모라로 무엇이 내리고 있는지 뒤돌아봐야 합니다. 당신들의 경제활동으로 인해 생명이 이어지거나 끊기는 그 처절한 파괴의 현장을 말입니다. 당신들은 이 고모라가 보이지 않습니까? 전혀 보이지 않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이 땅이 모두 유황에 소금 천지이며 불타오르고 있음을 깨달은 다음에는, 이미 씨를 뿌리지도 싹이 트지도 풀도 자라나지 못할 것임을 말입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직후의 모습처럼, 또는 주님께서 당신의 분노와 노여움을 내리셨다는 아드마와 스보임의 모습처럼 말입니다(신명기 29장 22절). 사람들이 ‘예’ 또는 ‘아니요’라는 대답에 따라 죽고, 다른 누군가의 명령이나 결정 때문에 목숨을 내놓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죽음의 권력을 성취한 대가로 수십 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합니다. 산더미 같은 돈을 벌어서 자신이 결코 살지도 못할 여러 채의 집에 투자하고, 결코 들어가보지도 못할 은행에 넣어놓고, 운영하지도 못할 식당에 투자하고, 경영하지도 못할 회사에 투자합니다. 당신들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권력을 휘두르지만, 정작 당신들은 지하에 숨은 채, 경호원에 둘러싸인 채 살아야 합니다. 당신들은 체스판에서처럼 누군가를 죽이고, 또 누군가에 의해 죽지만, 당신들은 결코 왕들이 아닙니다. 왕들은 당신들에게 부를 앗아가고, 당신들을 서로 먹고 먹히게 만들어서 어느 누구도 체크메이트를 부르지 못하고 체스판에는 폰만 남게 만듭니다. 이곳에서 삼킨 것들을 당신들은 다른 어디에선가 뱉어내야 합니다. 마치 어미새가 자신이 먹은 것을 뱉어내서 새끼들에게 먹이듯 말입니다. 하지만 당신들로부터 먹이를 얻어먹는 것들은 새끼들이 아니라 콘도르들이고, 당신들은 어미새가 아니라 단지 피와 힘이 승리의 조건인 곳에서 기꺼이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고자 하는 물소떼에 불과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고모라가 되기를 중단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치프리아노는 읽기를 멈추었다. 마치 이 말들을 퍼부어주고픈 사람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떠올려보는 것만 같았다. 그는 마치 천식 환자처럼 가쁘게 숨을 쉬었다. 그리고 공책을 덮은 다음,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 (P336-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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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프 픽션>에서, 마셀러스 윌리스의 귀중한 가방을 사라지게 한 남자를 죽이기 직전, 줄스 윈필드가 내뱉는 대사였다.

정의로운 사람의 길은 그 사방에 이기적인 자의 불의와 악독한 자의 학대가 있을 것이라. 자비와 선의의 이름으로 약한 자를 인도하여 어둠의 계곡을 통과하는 자는 복되나니, 왜냐하면 그는 진정으로 그 형제를 지키는 자이며 잃은 자녀를 찾는 자이기 때문이니라. 그리고 나는 거대한 복수와 격렬한 분노를 지니고 너희를 공격하니, 너희는 내 형제를 독살하고 파멸시키려 했기 때문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복수를 내릴 때 너희는 내 이름이 주임을 알리라.

주세페와 로메오는 마치 영화에서처럼 이 대사를 낭송하고 나서 총격을 개시했다. (P35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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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족들은 상당한 자산을 축적한 다음에는 범죄활동을 중단하고, 어떻게든 자신들의 유전암호를 해체해서 완전히 합법적인 형태로 변환시키는 것 같았다. 비유하자면 금주법 시기에 밀주 판매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 다음, 나중에는 범죄세계와의 관계를 모두 청산하고 명문가로 급부상한 케네디 일가와 같은 방식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탈리아 범죄사업의 위력은 일종의 복선을 유지하는 데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범죄적인 근원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애버딘에서는 이런 시스템을 ‘스크래치(긁기)’라고 부른다. 마치 래퍼나 DJ가 레코드판 위에 손가락을 갖다 댐으로써 판이 제 속도로 돌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카모라 사업가들은 합법적인 시장의 활동을 잠시 멈춘 다음(스크래치를 한 다음) 곧이어 평소보다 더 빨리 돌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나폴리 마피아 단속 검찰수사본부가 밝힌 바에 따르면, 라 토레 일가의 합법적인 쪽이 위기에 처하면 범죄적인 쪽이 곧바로 가동되는 것이다. 가령 현금이 부족하면 위조지폐를 찍어낸다. 자본이 급히 필요하면 위조 장기채권을 판매한다. 그들은 갈취를 통한 경쟁을 폐지하는 대신, 이제는 상품을 면세로 수입했다. 합법적인 경제의 기록을 ‘스크래치’한다는 것은 고객들이 안정된 가격에 물건을 살 수 있으며 은행 대출이 항상 인정된다는 뜻이었다. 더불어 돈이 계속 회전되고 상품이 소비된다는 뜻이었다. ‘스크래치’하기는 법과 경제 규범의 분리를, 규제가 금지하는 것과 돈이 요구하는 것의 분리를 흐릿하게 했다. (P369-370)


모든 경제 주기에서 가장 구체적인 상징물은 바로 쓰레기이다. 일찍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것을 쌓아본다면, 쓰레기야말로 소비의 진정한 결과이며, 단순히 생산품이 지구에 남기는 흔적 이상의 무엇임을 알 수 있으리라. 이탈리아 남부는 생산의 찌꺼기, 쓸모없는 자투리, 유독성 폐기물이 도달하는 경계의 맨 끄트머리에 자리 잡고 있다. 이탈리아 환경단체인 레감비엔테(Legambiente)에 따르면, 검사를 받지 않은 그 모든 쓰레기를 한 장소에 모은다면 무게 1400만 톤에 높이 1만 4600미터, 에베레스트의 높이는 8848미터다. 따라서 이 규제되지도 않고 보고되지도 않은 쓰레기 더미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이 거대한 산은 나로 하여금 경제의 DNA를, 그 상업적 거래와 이익 배당, 회계장부에서의 추가와 공제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이는 마치 이 산이 폭발해서 이탈리아 남부에 산산이 흩어진 것과 비슷했다. 특히 캄파니아, 시칠리아, 칼라브리아, 풀리아처럼 막대한 건수의 환경 범죄가 벌어지고 있는 지역에 말이다. 이 지역들은 바로 범죄조직의 규모가 가장 크고 실업률이 가장 높은, 그리고 군대나 경찰 지원자의 숫자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영원하고도 불변하는 순위다. 지난 30년 동안 카세르타 인근 지역, 그러니까 가릴리아노 강과 파트리아 호수 사이의 지역 --또는 마초니 일족의 땅-- 에는 수톤의 일반, 유독성 쓰레기가 매장되었다. (P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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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장, 구덩이, 채석장 이미지는 인근 주민들에게는 극도의 위험을 알리는 표지나 마찬가지였다. 나폴리 인근의 줄리아노와 빌라리카, 콸리아노의 삼각지대는 이른바 ‘불의 땅’으로 알려졌다. 서른아홉 개소의 쓰레기장 가운데 스물일곱 개소에 위험한 폐기물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지역에서는 쓰레기장의 수가 매년 30퍼센트씩 증가한다. 어느 한 곳의 용량이 거의 다 찰 지경이 되면, 쓰레기에 불을 붙인다. 이 검증된 기술은 정기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이 일에는 집시 소년들이 적격이다. 일족들은 이들이 쓰레기 더미 하나를 태울 때마다 50유로씩을 지불한다. 기술은 간단하다. 이들은 쓰레기 언덕 주위에 비디오카세트에서 빼낸 테이프를 길게 두르고, 거기에 알코올과 휘발유를 뿌린 다음, 테이프의 맨 끝을 꼬아 커다란 퓨즈를 만든다. 그런 뒤에 뒤로 물러서서 거기에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것이다. 불과 몇 초 만에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아, 마치 네이팜탄에 맞은 형국이 된다. 그러고나면 주물 찌꺼기라든지 본드, 나프타 부산물 등을 불 속에 던져 넣는다. 짙고 검은 연기와 불길로 근처의 땅은 온통 다이옥신으로 오염된다. 멀리 스칸디나비아까지 수출되는 그 지역 농작물은 완전히 망쳐질 수밖에 없다. 농작물의 싹이 말라죽고, 땅은 점차 불모지가 된다.

이런 끔찍한 재난과 농부들의 분노는 오히려 카모라에게는 또다른 기회일 뿐이다. 자포자기한 지주들이 땅을 팔면 일족은 새로운 쓰레기장 부지를 아주 낮은 가격에 매입하는 것이다. 그사이에 사람들은 계속해서 종양으로 죽어간다. 이처럼 느리고도 조용한 학살극은 감시하기도 쉽지 않은 것이, 오래 살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 북부에 있는 병원으로 가버리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보건협회 보고서에 따르면, 캄파니아 주 도시들 가운데 다량의 유독성 쓰레기가 유기된 지역의 암 사망률은 최근 수년간 무려 21퍼센트나 늘어났다. 폐에 염증이 생기고 기관이 충혈되어 병원에 가서 CAT 스캔을 받아보면, 종양이 보인다. 이런 질병들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를 추적해보면, 십중팔구 이곳에 쌓인 쓰레기들의 유통경로와 일치할 것이다. (P41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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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의 감정이 과연 그처럼 거대한 권력 기계를 감당할 수 있는지를 한번 재보려 했다. 그 권력의 역학 밖에서 사는 방식으로, 그렇게 사는 것이 가능할지 가늠하려 했다. 나는 그것에 삼켜지거나 파괴되지 않고도 그것을 이해하고, 발견하고, 알 수 있을지를 파악해보려고 머리를 혹사시켰다. 아니면 아는 것과 타협하는 것 사이에서 양자택일해야 하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공식적인 발표에만 귀를 기울이고, 반신반의하며, 괴로운 듯 그저 한숨이나 쉬는 것 말이다. 나는 과연 행복한 삶의 가능성을 품게 하는 뭔가가 있는지, 아니면 일탈과 무정부적 자유를 꿈꾸는 짓을 포기하고 차라리 투기장에 몸을 던져야 하는지, 바지춤에 반자동 권총을 하나 찔러 넣고 나만의 사업을 시작해야 하는지 자문해보았다. 나 자신을 이 시대의 상호 연결된 망의 일부가 되도록, 매사에 판돈을 걸도록, 지배하고 또 지배되도록, 이윤을 좇는 짐승이 되도록, 금융의 맹금이 되도록, 일족의 사무라이가 되도록 납득시켜야만 했다. 내 삶을 생존의 희망이란 없고, 그저 잘 싸운 다음에 쓰러져 죽을 수밖에 없는 전투로 변모시켜야 했다.

나는 카모라의 땅에서 태어났다. 유럽 내에서도 살인사건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영토에서, 야만성과 상업이 손잡은 곳에서, 권력을 낳는 것을 제외하면 가치 있는 것은 전혀 없다고 여겨지는 곳에서 말이다. 모든 것이 최후의 결전 분위기를 띠고 있는 곳에서, 이곳에서는 일순간도 평화를 누릴 수 없다. 이곳에서는 모든 몸짓이 곧 항복이고, 모든 필요가 금세 허약함으로 변환되며, 무엇을 하든 이빨과 손톱으로 싸우지 않을 수 없다. 카모라의 땅에서는 일족들에게 반대하는 것이 단순한 계급투쟁, 권리 주장, 시민적 의무의 탈환이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명예를 자각한다거나, 자존심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뭔가 모질게도 육체적인 것이다. 카모라의 땅에서는 일족들의 성공 메커니즘, 갈취 양식, 투자를 이해하는 것이 곧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아는 길이다. 일족들에 반대하는 것은 곧 생존을 위해 전쟁을 벌이는 일이다. 마치 존재 그 자체가, 그러니까 내가 먹는 음식, 키스하는 입술, 듣는 음악, 읽은 책이 삶의 의미가 아니라 오로지 생존의 방법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을 ‘안다’는 것은 더는 도덕적 참여를 상징하지 못하며,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그 무엇이 된다. 나 자신이 숨 쉴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면, 이것만이 유일하게 필요한 것이다.

내 발은 진창 속에 깊이 빠져들어가 있었다. 물이 허벅지까지 차올랐고, 발뒤꿈치는 계속 빠져들었다. 내 앞으로 커다란 냉장고 한 대가 떠내려왔다. 나는 그 위에 엎드려서 양팔로 냉장고를 꽉 끌어안고 둥실둥실 떠내려갔다. 문득 앙리 샤리에르가 쓴 소설을 스티브 매퀸 주연으로 영화화한 <파피용>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다. 나 자신이 코코넛 자루에 올라타고 해류를 따라 프랑스령 기아나를 탈출하는 파피용이 된 것만 같았다. 부조리한 생각이지만, 내가 선택한 게 아닌, 그저 감내할 수밖에 없는 순간에는 나 자신의 헛소리조차 유머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마치 파피용처럼 소리를 지르고, 폐가 찢어져라 외치고 싶었다. 나는 뱃속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는 함성을 내지르고 싶었다. 내 몸속에 남아 있는 그 모든 목소리로 목이 터져라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야, 이 개새끼들아! 난 아직 여기 있다!” (P415-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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