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이, 로봇> 2004년
수잔 캘빈 박사가 태어난 해가 1982년이라고 하니까 지금 일흔 다섯 살일 것이다. 이건 누구나 아는 내용이다. 로렌스 로버트슨이 인류 역사상 가장 희귀한 거대 산업체가 된 회사의 설립 신청서를 제출한 해와 같다. 그러니까 ‘주식회사 U.S.로보틱스’도 일흔다섯 살이 된 셈이다. 으흠, 이것도 누구나 다 아는 내용이다.
수잔 캘빈 박사는 스무 살 때 까다로운 ‘심리수학’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그 자리에서 ‘U.S.로보틱스’의 알프레드 래닝 박사가 선보인 음성 기능이 들어간 이동 로봇을 처음 보았다. 몸체가 크고 볼품없게 생긴 로봇이었다. 수성에서 개발하는 탄광에 보내려고 만든 것인데, 기계 기름 냄새가 심했다. 하지만 내용을 알아듣게 말할 수는 있었다. (P8)
“마음대로 해요. 선생에게 로봇은 로봇일 뿐이겠죠. 기어가 달린 금속, 전기와 양전자, 마음을 가진 쇳덩이! 인간이 만든 물건! 그래서 필요하면 내버려도 되는 대상! 선생은 로봇하고 함께 일해본 적이 없어서 모를 거예요. 로봇은 우리보다 훨씬 깨끗하고 우수한 종족이라는 걸.”
나는 점잖게 끼어들었다.
“저희는 로봇에 대한 박사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수잔 박사님, 저희 <행성 신문>은 태양계 곳곳에 전달됩니다. 독자가 30억 명이나 되니까요. 저희 독자들은 로봇에 대한 박사님의 견해를 듣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굳이 대답을 유도할 필요도 없었다. 박사는 내가 원하는 얘기를 알아서 꺼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지구에서만 사용하는 로봇을 판매했어요. 내가 일하기 전에 말이에요. 물론 말을 못하는 로봇이었죠. 그 후에 인간과 좀 더 비슷한 로봇이 나오면서 반대 운동이 시작되었어요. 노동조합은 일자리를 놓고 로봇과 경쟁하는 걸 당연히 반대하고, 이런 저런 종교 집단들은 미신적인 이유를 들먹이며 반대했지요. 어리석고 생각할 가치도 없는 주장이었지만, 분명 그런 시대가 있었어요.”
나는 손가락이 움직이는 걸 들키지 않으면서 휴대용 녹음기를 눌러 박사의 말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P12-13)
웨스커 부인은 상상하는 것조차 끔찍하다는 듯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웨스턴은 자신도 모르게 짜증을 내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말도 안 돼요. 정말 얼토당토않은 얘기군. 로비를 살 때 ‘로봇공학 제1원칙’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했잖아요. 로봇이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건 불가능하다는 원칙! 제1원칙을 어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생기기 전에 로봇이 완전히 멈춰 버린다는 걸 당신도 잘 알 거예요. 잘못될 가능성은 수학적으로 있을 수가 없어요. 게다가 회사에서 기술자가 해마다 두 번씩 찾아와서 저 불쌍한 기계를 완전히 분해해 검사까지 하잖아요. 로비가 잘못될 가능성은 당신이나 내가 갑자기 이상하게 변할 가능성보다 훨씬 적어요. 게다가 글로리아한테서 로비를 무슨 수로 떼어 낼 수 있겠어요?”
웨스턴이 잡지를 집으려고 손을 내밀자 부인은 화를 내며 잡지를 옆방으로 던져 버렸다.
“그게 문제예요! 글로리아가 다른 애들하곤 놀려고 하질 않아요. 주변에 또래 아이들이 열 명도 넘는데 도무지 어울릴 생각조차 안 한다고요. 억지로 시키지 않으면 옆에도 가질 않고...... 이건 뭔가 잘못된 거예요. 당신도 우리 애가 정상적으로 자라길 바라죠? 당신도 글로리아가 사회생활에 잘 적응하길 바라잖아요.”
“너무 나쁜 쪽으로 생각하지 말아요. 그레이스. 로비를 그냥 강아지라고 생각해 봐요. 자기 아빠보다 강아지를 더 좋아하는 아이도 수없이 많잖아요.”
“강하지하곤 달라요, 웨스턴. 저 끔찍한 물건을 꼭 없애야 해요. 회사에 되팔면 되잖아요. 물어봤는데 그래도 된대요.”
“진정해. 그레이스, 흥분하지 말자고요. 글로리아가 다 클 때까지는 우리 집에 둬야 해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이 문제를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웨스턴은 단호하게 말을 끝내고 바깥으로 나갔다. (P24-25)
“자, 다 왔습니다! 로봇들끼리 일하는 곳입니다! 다섯 사람이 감독을 하는데 여기 머물진 않습니다. 우리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후 지난 5년 동안 단 한 건의 사고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여기서 조립하는 로봇이 좀 단순하긴 하지만.....”
글로리아에게 공장장의 목소리가 웅얼거리는 자장가처럼 들리기 시작한 건 이미 한참 전부터였다. 공장 견학은 아주 따분하고 무의미했다. 많은 로봇들이 보였지만 로비를 조금이라도 닮은 로봇은 단 한 대도 없었다. 글로리아는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로봇들을 바라보았다.
글로리아는 이곳에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다가 넓은 공간 중앙에 있는 둥그런 탁자에서 바쁘게 일하는 로봇 예닐곱 대에 눈길이 멈추었다. 그 순간 글로리아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넓은 공간이라 확실히 보이진 않았지만 로봇 가운데 하나가 마치..... 마치.... 그래. 맞아!
“로비!”
글로리아의 날카로운 외침이 공중을 가르자 탁자 주변에 있던 로봇 가운데 하나가 들고 있던 장비를 떨어뜨리며 비틀거렸다. 글로리아는 기뻐서 넋이 나갈 정도였다. 부모가 미처 잡기도 전에 글로리아는 난간을 빠져나와 약간 아래 있는 바닥으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런 다음 두 팔을 흔들고 머리칼을 날리며 로비에게 달려갔다.
세 어른은 공포에 질려 얼어붙었다. 흥분한 아이가 미처 못 본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예정된 길을 따라 무자비하게 다가오는 육중한 트랙터를!
웨스턴도 거의 동시에 정신을 차렸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글로리아를 구해 낼 방법이 없었다. 웨스턴은 재빨리 난간을 뛰어넘었다. 하지만 소용없을 게 분명했다. 스트루더 씨는 조정실의 감독들에게 트랙터를 멈추라고 필사적으로 신호를 보냈으나 감독들도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즉시 정확하게 움직인 건 로비밖에 없었다.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금속 다리를 재빨리 움직여 어린 아가씨가 있는 곳으로 내달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모든 일이 한순간에 일어났다. 로비가 속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은 채 달려오며 한 팔을 흔들어 글로리아를 낚아챈 것이다. 글로리아는 숨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웨스턴은 로비가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 비틀거리며 멈추는 장면을 눈으로 보기보다 마음으로 느꼈다. 트랙터는 로비보다 1초 늦게 글로리아가 있던 곳을 지나 3미터 정도를 끼익거리며 더 굴러간 뒤에야 마침내 멈추었다.
글로리아는 호흡을 되찾고는 부모의 열정적인 포옹에 몸을 맡겼다가 로비에게 시선을 돌렸다. 글로리아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마침내 친구를 찾아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었다. (P43-45)
“그런 소리 하지 마. 우리가 함께 내린 결정이야. 자네도 알잖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셀레늄 1킬로그램. 평온 절연판, 그리고 세 시간 정도의 시간이야. 순수한 셀레늄 웅덩이가 태양면 사방에 널려 있어. 맥도걸의 스펙트럼 반사 망원경으로 5분 만에 웅덩이 광산을 세 개나 발견했어. 안 그래? 제기랄! 구조대가 올 때까지 못 기다리는데......”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죠? 파웰? 혹시 좋은 생각이 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느긋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요. 대장은 훌륭한 영웅이잖아요. 그러니까 어서 말해 봐요!”
“우리가 스피디를 직접 찾아 나설 방법은 없어, 도노반. 태양면에서는 태양 방열복을 입는다 해도 살인적인 태양 광선을 20분 이상 못 견뎌. 하지만 ‘로봇은 로봇으로 잡는다.’는 옛말이 있잖아.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을 수도 있어. 지하층에 로봇 여섯 대가 있으니까 그걸 사용하면 될 거야. 가동만 된다면, 가동만 된다면......”
놀란 도노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1차 탐험대가 가져온 로봇 여섯 대 말이에요? 진심이에요? 그건 로봇이라고 할 수도 없는 고물이에요. 대장도 알다시피 로봇 개발에서 지난 10년은 엄청난 시간이라고요.”
“그래도 로봇은 로봇이야. 하루 종일 살펴봐서 잘 알아. 양전자 두뇌도 들어 있어. 원시적이긴 하지만.” (P52-53)
파웰의 무선 목소리가 도노반의 귀를 파고들었다.
“이봐, 로봇공학의 3원칙부터 시작해 보자고. 로봇의 양전자 두뇌 깊숙이 심어 놓은 세 가지 원칙 말이야.”
장갑을 낀 파웰은 사방이 어두운 곳에서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제1원칙,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간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맞아요!”
“제2원칙, 제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맞아요!”
“제3원칙, 제1원칙과 제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로봇 자신을 지켜야 한다.”
“맞아요! 그런데 그게 왜요?”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 거야. 세 가지 원칙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면 두뇌에 들어 있는 서로 다른 회로가 그것을 해결해야 해. 가령 어떤 로봇이 위험한 곳으로 다가가다가 그곳이 위험하단 사실을 깨달았다고 쳐. 그럼 제3원칙이 이 로봇을 돌아서게 만드는 거야. 이번엔 인간이 그런 위험 속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했다고 해 보자. 그러면 제2원칙이 다른 것보다 강하게 올라가기 때문에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명령을 따르겠지.”
“으흠, 그건 저도 알아요. 그런데 그게 어떻다는 거예요?”
“스피디는 최신 모델이야. 전문 능력이 탁월하고, 제작비가 전함 한 척 만드는 비용만큼이나 비싸. 쉽게 파괴돼선 안 되는 물건이지.”
“그래서요?”
“그래서 제3원칙이 강하게 주입된 거야. SPD 모델 사전 숙지 사항에도 특별히 이 내용이 들어 있어. 그래서 스피디는 위험 회피 능력이 유별나게 강해. 그런데 자네는 스피디에게 셀레늄을 구해 오라고 보내면서 특별히 강조하지 않고 평범하게 명령했어. 그래서 제2원칙 비율이 약하게 구성된 거야. 일단 들어 봐. 지금 구체적인 사실만 말하는 거니까.” (P68-69)
파웰은 자리에서 일어나 로봇 옆에 있는 탁자 모서리로 가 앉았다. 갑자기 이 이상한 기계에 대한 동정심이 솟구쳤다. 큐티는 다른 로봇과는 완전히 달랐다. 하기야 우주 기지 관리라는 특별한 임무를 양전자 두뇌 깊숙이 새겨 넣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했다. 파웰은 큐티의 금속 어깨에 손을 올렸다. 차갑고 단단한 금속성이 느껴졌다.
“큐티, 몇 가지 설명할 게 있어. 넌 자신의 존재에 대해 호기심을 보인 최초의 로봇이야. 나는 네가 바깥세상을 충분히 이해할 지능을 갖춘 최초의 로봇이라고 생각해. 자, 이리 따라와.”
로봇은 똑바로 유연하게 일어나 스펀지 고무를 두껍게 댄 발바닥으로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고 파웰을 따라갔다. 지구인이 단추를 누르자 금속으로 된 정사각형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는 두껍고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우주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별들이 반짝였다.
“기관실에 있는 관측창에서 본 적이 있어요.”
큐티가 말하자 파웰이 물었다.
“나도 알아. 저게 뭘 것 같아?”
“보이는 그대로겠지요. 반작이는 작은 점을 사방에 붙인 유리 건너편 검은 물질. 나는 우리 전송 장치가 저 점 가운데 일부에, 항상 똑같은 점에 에너지 빔을 보낸다는 사실을 알아요. 그 점이 움직이면 에너지 빔까지 함께 움직인다는 사실도요. 그게 전부예요.”
“훌륭해! 이제 내 말을 잘 듣도록 해. 검은 곳은 텅 빈 곳이야. 무한하게 뻗어 나간 광활한 공간, 반짝이는 저 조그만 점 하나하나는 에너지가 가득한 거대한 물질이야. 모든 공처럼 동그란 모양인데, 어떤 건 지름이 1킬로미터에 불과해. 저것들은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저렇게 조그맣게 보이는 거야. 그리고 우리가 에너지 빔을 보내는 점 몇 개는 거리가 비교적 가깝고, 크기도 훨씬 작고, 차갑고, 단단해. 나 같은 인간이 그 표면에서 살지. 수십억에 달하는 인간이 말이야. 우린 그런 세계 중 한 곳에서 왔어. 우리 에너지 빔은 열을 내뿜는 거대한 행성 가운데 한 곳에서 끌어당긴 에너지를 저 세계에 전달하는 거야. 우리는 그 행성을 태양이라고 부르는데, 기지 반대쪽에 있기 때문에 네 눈에는 보이지 않아.”
큐티는 금속 조각상처럼 관측장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P85-86)
도노반은 붉은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면서 짜증 난다는 듯 피웰을 바라보았다.
“걸어다니는 저 깡통이 도대체 뭐라는 거예요? 뭘 못 믿겠다는 거죠?”
파웰은 쓰디쓴 표정으로 콧수염을 잡아당기며 대답했다.
“의심이 많아. 우리가 자기를 만들었다는 것도. 지구가 있다는 것도, 우주나 별도 믿지 않아.”
“제기랄, 미친 게 분명해요.”
“모든 사실을 자신이 직접 알아봐야겠다는군.”
“그래요? 그렇다면 이제 저놈이 모든 사실을 파악한 다음에 나한테 친절하게 설명해 주기만 바라고 있어야겠네요.”
도노반이 부드럽게 말하다가 갑자기 분노를 터뜨렸다.
“잘 들어 두세요! 만일 저 쇳덩어리가 나한테 그런 식으로 입을 놀렸다간 크롬 두개골을 박살 내고 말겠어요.”
도노반은 거칠게 자리에 앉더니 윗옷 안주머니에서 보급판 추리 소설을 꺼내 들었다.
“어쨌든 저 로봇 때문에 엄청 오싹하군요. 빌어먹을 호기심이 너무 많아서!” (P88-89)
휴가는 2주보다 길었다. 파웰과 도노반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려 6개월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유급 휴가였다. 하지만 사실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뿐이었다. ‘U.S. 로보틱스’는 다기능 로봇의 버그를 모두 제거해야 했는데, 그 버그가 아주 많았다. 그리고 늘 현장 테스트를 앞두고 최소한 다섯 개 이상의 버그가 문제를 일으켰다. 그래서 설계소와 수학 계산실 직원이 ‘이상 없음’을 최종 확인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쉬어야 했다. 그런 다음 파웰과 함께 행성으로 파견을 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다기능 로봇은 ‘이상 없음’이 아니었다. 도노반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져 수십 차례 이렇게 반복했다.
“대장, 제발 현실을 똑바로 보세요. 설계 내역서에 집착해서 테스트가 엉망이 되는 걸 지켜보는 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이제 형식적인 절차 따윈 집어치우고 실질적인 작업에 들어가자고요.”
그러면 그레고리 파웰은 머리 나쁜 아이에게 전자공학을 설명하는 사람처럼 꾹 참으며 말했다.
“설계 내역서에 따르면 저 로봇은 행성에서 감독 없이 채굴 작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을 뿐이야. 우리가 감독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라고.”
도노반은 털이 부숭부숭한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면서 말했다.
“좋아요. 논리적으로 따져 보자고요! 첫째, 저 신형 로봇은 본사 연구실에서 모든 실험을 통과했어요. 둘째, ‘U.S. 로보틱스’는 저 로봇들이 행성의 구체적인 업무 테스트를 모두 통과할 거라고 장담했어요. 셋째, 지금 저 로봇은 그런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어요. 넷째, 저 로봇들이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면 ‘U.S. 로보틱스’는 현금으로 천만 크레디트, 그리고 이미지에서 1억 크레디트에 달하는 손실을 입어야 해요. 다섯째, 만일 저 로봇들이 통과하지 못하고 우리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면, 우리는 좋은 일자리 두 개를 잃을 게 뻔해요.”
파웰은 억지로 웃으면서 묵직한 신음을 뱉었다. ‘U.S. 로보틱스’의 불문율은 유명했다. ‘어떤 직원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없다. 첫 번째 실수로 해고당하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이었다. (P118-119)
알프레드 래닝 박사는 조심스럽게 시가에 불을 붙였다.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회색 눈썹이 불거져 나온 얼굴로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이 로봇은 마음을 정확히 읽습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어떻게 이런 능력이 생긴 거요?”
래닝 박사는 수학자 피터 보거트를 바라보며 물었다.
“할 말이 없소?”
보거트는 두 손으로 까만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그건 우리가 제작한 서른네 번째 RB 모델입니다. 래닝 박사님, 동종의 다른 로봇은 모두 정상입니다.”
회의석상에 앉아 있던 세 번째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밀톤 애쉬는 ‘주식회사 U.S. 로보틱스’의 최연소 중역으로, 자신의 지위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잘 들으세요. 보거트 박사님, 조립 라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문제없습니다. 장담합니다.”
보거트의 두꺼운 입술이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머금었다. (P157)
수잔 캘빈은 자신이 어떻게 정신을 차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안개에 싸인 비현실적인 세상이 갑자기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 세상으로 변한 것 같았다. 그래서 허비를 옆으로 밀어내고, 금속 팔을 강하게 밀쳤다. 그리고 두 눈을 크게 떴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수잔 캘빈이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자 허비가 뒷걸음질을 쳤다.
“도와 드리고 싶어요.”
심리학자는 로봇을 노려보았다.
“도와줘? 이게 꿈이라고 말하는 걸로? 나를 정신분열증 환자로 만들어서? 이건 꿈이 아니야! 꿈이길 바랄 뿐인 거지!”
갑자기 히스테리가 일었다. 수잔 캘빈은 숨을 급히 들이쉬었다.
“잠깐! 그래..... 그래, 알겠어. 맙소사! 바로 그것 때문이야.”
“어쩔 수 없었어요!”
로봇의 목소리에 공포가 어렸다.
“난 널 믿었어! 단 한 번도 네가.....”
문밖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잔 캘빈은 행동을 멈추고 순간적으로 주먹을 움켜쥐며 고개를 돌렸다. 보거트와 래닝이 들어올 즈음, 수잔은 창가 쪽으로 물러나 있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허비에게 다가갔다. 래닝은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고 보거트는 싸늘하게 비웃고 있었다. 공장 책임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 허비. 내 말 들어 봐!” (P181)
“로봇의 역사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요.”
“슬슬 정곡을 찌르기 시작하는군요. 선생.”
“네, 하지만 지금까지 들은 사건은 요즘 시대에 그다지 적합한 내용이 아니에요. 마음을 읽는 로봇은 그때 이후로는 나온 적이 없고, 우주 공간에 만든 기지는 이미 구식이 되어 더 이상 사용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광산을 채굴하는 로봇은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고요. 초원자 엔진을 이용한 항성 간 여행은 어떤가요? 초원자 엔진이 개발된 게 불과 20년 전이고, 그것도 로봇을 이용한 개발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니까요. 그 내막을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항성 간 여행이라.....”
수잔 캘빈 박사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어느덧 휴게실에 들어섰다. 나는 푸짐한 식사를, 박사는 커피를 주문했다.
“로봇을 이용한 개발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브레인을 개발하기 전까진 모든 일이 지지부진했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정말 열심히 노력했어요. 내가 항성 간 여행. 그러니까 초공간 이동에 처음 관여한 건 2029년이었어요. 로봇이 사라져 버렸을 때.” (P192-193)
블랙이 말했다.
“네스터 10호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저라며 물어볼 게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캘빈 박사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블랙을 살펴보았다.
“확실하지 않다는 듯 들리는군요. 그 로봇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자신인지 아닌지 모르나요?”
“그 로봇은 현장 발전소에서 저하고 함께 일했습니다. 박사님, 사라진 날 아침에도 저하고 있었고요. 정오 이후에 로봇을 본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직까지 봤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로봇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제가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
블랙의 검은 눈동자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이건 책임 문제가 아니에요. 로봇은 명령에 따르도록 제작되었기 때문에 명령대로 행동한 거죠. 우리는 로봇을 찾으려는 것뿐이에요, 블랙 씨. 그러니 다른 건 잊어버리세요. 그동안 계속 함께 일했으니 당신이 그 로봇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을 거예요. 혹시 평상시와 다른 특이한 점은 없었나요? 전에도 다른 로봇과 함께 일한 적이 있었지요?”
“이곳에 있는 다른 로봇하고 계속 함께 일했습니다. 간단한 로봇들 말입니다. 네스터도 다른 로봇과 별 차이가 없어요. 아주 똑똑하고요. 그래서 좀 귀찮기는 하지만.”
“귀찮다? 어떤 점에서요?” (P205-206)
심리학자가 대답했다.
“수정된 로봇은 제1원칙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인간에게 무거운 물체를 떨어뜨릴 수 있어요. 자신의 힘과 속도라면 무거운 물체가 사람을 깔아뭉개기 전에 너끈히 낚아챌 수 있다는 걸 알고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물체가 로봇의 손가락을 떠나 무섭게 떨어지는 순간, 정작 로봇은 재빨리 움직이길 거부하는 거예요. 무지막지한 중력의 힘만 신속하게 움직이는 거죠. 로봇이 마음을 바꿔 게으름을 부리며 떨어지는 물체를 구경만 한다고요. 수정된 제1원칙에 따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에요.”
“상상력이 너무 풍부하군요.”
“제 분야에는 이런 상상력이 필요할 때가 많아요. 보거트 박사님, 말사움은 그만두고 일합시다. 박사님은 로봇이 자신을 잃게 만든 자극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아요. 그리고 최초의 정신 상태에 대한 기록도 갖고 있어요. 그러니 수정 로봇이 제가 방금 말한 유형과 비슷하게 행동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알려 주세요. 특정한 사례가 아니라 가능한 모든 행동 유형에 대해 최대한 빨리 파악해서 알려 주세요.”
“그동안 박사는......”
“그동안 전 제1원칙에 대한 반응을 파악할 수 있는 구체적인 행위를 실험해야겠죠.” (P214-215)
“로봇이 반응을 조작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해요. 실험을 반복하면서 조건을 추가하는 거예요. 피실험자와 로봇 사이에 네스터 모델을 감전사시킬 수 있는 고압 전선을 설치하는 거죠. 뛰어넘을 수 없을 정도로 충분하게, 그래서 전선에 닿으면 죽는다는 걸 로봇에게 미리 알리는 거예요.”
순간 보거트가 갑자기 화를 내며 반발했다.
“찬성할 수 없소. 네스터 10호를 찾기 위해 2백만 달러나 되는 로봇을 감전사시킬 순 없어요. 다른 방법을 찾아봐요.”
“다른 방법이라고요? 좋은 생각이 있으면 박사님이 말씀해 보시죠. 감전사 문제는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어요. 계전기를 설치해 물체가 닿는 순간에 전류를 차단하면 그만이니까요. 그러면 로봇이 전선에 닿아도 죽을 가능성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로봇들이 이 사실을 알면 절대 안 돼요. 아시겠어요?”
장군의 눈에 희망의 빛이 반짝였다.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겁니다. 이런 조건이라면 네스터 10호는 자기 자리에 그냥 앉아 있어야 할 거예요. 전선에 닿아서 죽으라는 명령을 받으면 어쩔 수 없겠지만요. 복종을 강제하는 제2원칙이 자기를 보호하는 제3원칙보다 중요하니까요. 하지만 그런 명령은 내리지 않을 거예요. 다른 로봇들처럼 내장된 프로그램에 맡기는 거예요. 일반 로봇이라면 인간의 안전을 강제하는 제1원칙 때문에 명령이 없어도 죽음을 감수하고 달려들겠지만, 네스터 10호는 안 그래요. 제1원칙 일부를 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이 부분에 관해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는 제3원칙이 제일 강하게 작용할 것이고, 그러면 네스터 10호로선 선택의 여지도 없이 그대로 자리에 남을 수밖에 없어요. 그것도 강제된 반응이니까요.”
“그럼 오늘 밤에 하실 건가요?”
심리학자가 대답했다.
“오늘 밤에 전선이 제대로 설치되면요. 지금은 로봇들에게 앞으로 할 실험에 대해 설명해 줘야겠어요.” (P221-222)
“그런데 왜 네스터 10호가 벌떡 일어난 거죠?”
“그건 저와 장군님의 젊은 직원 블랙 씨가 한 가지 약속을 했기 때문이에요. 저와 로봇 사이에 흐른 건 감마선이 아니라 적외선이라서 아무 해가 없다는 걸 알고 튀어나온 거예요. 제1원칙에서 강제하는 내용에 의해 다른 로봇들도 그럴 거라고 예상한 거죠. 정상적인 NS-2는 방사선을 감지할 수는 있어도 방사선 종류는 구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건 바로 다음이었어요. 하이퍼 본부에서 인간에게 훈련받은 덕분에 파장의 길이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아마 무척 창피했겠지요. 우리가 위험하다고 미리 경고했기 때문에 정상 로봇은 그곳을 아주 위험한 지역이라고 생각했지만, 네스터 10호는 우리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네스터 10호는 다른 로봇들이 인간보다 무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거예요. 아니면 떠올리기 싫었거나, 결국 자신의 우월감 때문에 잡히고 만 거죠.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장군님.“ (P241)
수잔 캘빈의 목소리는 낮고 힘이 없었다.
“딜레마에 빠졌을 때 로봇이 보이는 반응은 당혹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로봇심리학은 아직 많은 결점을 갖고 있지만, 전문가로서 자신 있게 말하는데, 로봇의 양전자 두뇌에 입력된 모든 복잡한 장치에도 불구하고 로봇을 만드는 건 인간이며, 따라서 로봇은 인간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부분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합니다.
좌절감에 빠진 인간은 현실에서 도피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환상의 세계에 빠져 들거나, 술을 마시거나, 히스테리를 부리거나, 다리에서 뛰어내리곤 합니다. 상황을 정면으로 마주할 능력이 부족하거나 마주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로봇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사소한 딜레마가 발생하면 계전기 절반이 고장 나고, 최악의 딜레마가 발생하면 양전자 두뇌 경로 전체가 수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타 버리게 됩니다.“ (P246-247)
수잔 캘빈 박사가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었어. 아, 결국 우주선을 비롯한 관련 자료 전체가 정부 재산으로 넘어가고, 초공간 이동도 완벽하게 성공해 지금은 여러 별에 인류의 식민지를 건설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요.”
나는 식사를 끝내고 담배 연기 사이로 수잔 캘빈 박사를 쳐다보았다.
“정말 중요한 건 지난 50년 사이에 이곳 지구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이에요. 내가 태어난 해는, 선생, 마지막 세계 대전이 막 끝나던 시기였어요. 역사상 최악의 시기였지만...... 민족주의가 끝나는 시기이기도 했지요. 지구는 국가로 분류하기에는 너무 좁았고, 결국 여러 나라가 지역 단위로 묶이기 시작했어요.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지요. 내가 태어날 때만 해도 미합중국은 북부 지역의 일부이면서 하나의 국가로 존재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 회사도 계속 ‘U.S.로보틱스’라는 이름을 쓴 거예요. 그런데 국가 단위에서 지역 단위로 바뀌면서 경제가 안정돼 금세기는 지난 세기에 비해 황금시대를 누릴 수 있었어요. 우리 로봇들도 황금시대를 구가하는 데 많이 기여했고요.”
“‘슈퍼 컴퓨터’ 얘기를 하시는 건가요? 그런 의미에서 박사님께서 언급하신 브레인은 최초로 만든 일종의 슈퍼 컴퓨터였고요. 그렇죠?”
“그래, 맞아요. 하지만 내가 말하려는 건 그런 기계가 아니에요. 오히려 인간이라고 하는 쪽이 어울리죠. 작년에 죽었지만.”
수잔 캘빈 박사의 목소리에 갑자기 깊은 슬픔이 어렸다.
“아니, 스스로 죽음을 준비했다는 게 옳아요. 자신이 우리 인간에게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스테판 바이어리.”
“네, 저도 그 사람을 말씀하시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가 공직 생활을 시작한 건 2032년이에요. 선생은 그때 너무 어려서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모를 거예요. 그가 벌인 시장 선거 운동은 역사상 가장 이상한 것이었지요......” (P286-287)
퀸이 눈썹을 슬며시 치켜 올렸다.
“그건 또 왜 그런가요. 박사님?”
“로봇의 세 가지 원칙은 인간 세상의 윤리 기준에 합당한 기본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보호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로봇에게 이것은 제3원칙입니다.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의식과 책임감을 지닌 ‘좋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합당한 권리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의사나 직장 상사, 정부 기관, 심리 상담원과 동료의 말을 존중하고, 법을 지키고, 규칙을 따르고, 전통에 순응할 것입니다. 설사 그것 때문에 자신의 안위와 평안이 손상되더라도 말입니다. 로봇에게 이것은 제2원칙입니다. 그리고 ‘좋은’ 사람이라면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를 보호하며, 타인을 구하기 위해 모든 위험을 감수할 것입니다. 로봇에게 이것은 제1원칙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만일 바이어리 씨가 로봇의 세 가지 원칙을 모두 따를 경우에 그는 로봇일 수도 있고, 아주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퀸이 반박했다.
“그렇다면 그가 로봇이라는 사실을 결코 증명할 수 없다는 겁니까?”
“그가 로봇이 아니라는 사실은 증명할 수 있을 겁니다.”
“그건 내가 바라는 증명이 아닙니다.” (P305)
“완전히 우연은 아니에요. 작업은 대부분 퀸이 한 셈이에요. 저는 제가 사람을 때린 적이 한 번도 없고 아무리 화를 돋워도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조용히 퍼뜨렸어요. 그게 바로 제가 로봇이라는 구체적인 증거임을 덧붙여서요. 그래서 일부러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군중 앞에 서서 연설을 하려고 준비한 겁니다. 온갖 고함이 터져 나와 결국에는 어떤 바보가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말예요. 이런 것을 책략이라고 하지요. 인위적으로 조성한 분위기에 의해 모든 일이 스스로 진행되도록 하는 것, 그래서 의도한 대로 급격한 여론의 변화에 힘입어 선거에서 이기는 것.”
로봇심리학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정치인들처럼 당신도 내 전문 영역을 침범하는군요. 하지만 그렇게 돼서 참 안타까워요. 물론 난 로봇이 좋아요. 인간보다 훨씬 좋아하지요. 만일 로봇이 공직 생활을 해도 된다면 정말 훌륭한 공직자가 될 거예요. 로봇의 기본 원칙 때문에 인간에게 해를 끼칠 수 없고, 독재나 부정부패는 물론이고 멍청한 편견도 갖지 않을 테니까요. 임기를 훌륭하게 채운 다음에는 공직에서 물러나면 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불멸의 존재나 로봇이 자신들을 통치했다는 사실을 알고 상처를 받으면 안 되니까요.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죠.”
“선천적으로 두뇌가 우수하지 못해서 실패할 수 있다는 사실만 빼면 말입니다. 양전자 두뇌는 인간의 복잡한 두뇌를 결코 쫓아갈 수 없으니까요.” (P325-326)
조정자의 서재에는 골동품인 중세의 벽난로가 있었다. 중세 인간은 우리와는 다른 방법으로 벽난로를 사용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벽난로에 지금과 같은 기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투명한 석영 뒤 깊숙한 곳에서 불길이 조용히 넘실거리며 피어올랐다.
아주 멀리서 도시의 모든 건물에 조금씩 보내는 에너지 빔이 통나무에서 타오르는 불길처럼 보였다. 점화를 제어하는 장치가 먼저 타오른 재를 치우고 새 통나무가 들어올 자리를 만드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아주 가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벽난로였다.
하지만 불은 진짜였다. 소리 장치까지 있어서 나무가 딱딱 타는 소리도 나고, 불길이 산소를 향해 달려들기도 했다.
조정자가 들고 있는 빨간 유리잔에 점잖게 뛰노는 불길이 조그맣게 반사되고, 깊은 생각에 잠긴 그의 눈동자는 더 조그맣게 반사되었다. 그리고 조정자가 손님으로 초청한 ‘U.S.로보틱스'의 수잔 캘빈 박사의 쌀쌀맞은 눈동자도 반사되었다. (P329)
“수잔 캘빈 박사님. 인간 사회는 각각의 발전 단계마다 독특한 갈등을 겪었고, 그 모든 갈등은 결국 힘으로 해결했어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권총의 힘이 아니라 눈물의 힘으로’라는 속담처럼 경제와 사회 환경이 변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갈등이 나타나고 사라졌어요. 그래서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고, 새로운 전쟁이 일어났지요. 끝없는 악순환처럼 말예요.
비교적 가까운 역사를 봅시다.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왕족 가문끼리 계속 전쟁을 벌였는데, 이때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대륙을 지배한느 가문이 합스부르크 왕가인가 발루아 부르봉왕가인가 하는 문제였어요. ‘피할 수 없는 갈등’ 가운데 하나였지요. 유럽을 두 쪽으로 나눌 순 없었으니까요. 이 전쟁을 비롯한 그 어떤 전쟁도 기존의 문제를 깨끗이 쓸어 버리고 새로운 문제를 설정하지 못했어요. 1789년 프랑스 사회에 새로운 분위기가 일어 처음에는 부르봉 왕가, 그리고 나중에는 합스부르크 왕가까지 역사의 소각로에 들어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말예요.
그리고 같은 기간에 유럽에서는 구교냐 신교냐 하는 중요한 문제를 둘러싸고 아주 야만적인 종교 전쟁이 일어났지요. 이번에도 유럽이 반반으로 나뉠 순 없으니 결국은 칼부림을 할 수밖에 없는 ‘피할 수 없는 갈등’이었어요. 그런데 그다음에는 달랐어요.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대륙 전체에 민족주의가 고양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오늘날까지 유럽이 절반으로 나뉘어 있지만 이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요. 19세기와 20세기에는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났는데, 이 시기에 가장 중요했던 문제는 유럽의 어느 나라가 어떤 비유럽 지역의 경제 자원과 소비 자원을 통제하느냐 하는 것이었지요. 비유럽 지역 전체가 영국의 일부이면서 프랑스의 일부, 그리고 독일의 일부로 존재할 순 없으니까요. 그러다가 마침내 민족주의 세력이 활발하게 일어나 비유럽 지역의 전쟁으로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종식하고, 마침내 비유럽 사람으로 편하게 살아가는 방식을 찾아냈지요. 그래서 우리는 일정한 형태로......“ (P331-333)
“그렇다면 왜 슈퍼 컴퓨터를 따르지 않는 걸까요? 그 동기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세요.”
“제가 볼 때 그건 분명해요. 수잔 캘빈 박사님도 분명히 알고 계실 겁니다. 인류가 올라탄 보트를 의도적으로 흔들려는 겁니다. 슈퍼 컴퓨터가 통치하는 한 지구에는 심각한 갈등이 생길 수 없고, 어떤 집단이 필요 이상의 권력을 장악한 다음 인류 전체의 이익은 외면한 채 자신의 이익만 추구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오류로 시작해서 점점 슈퍼 컴퓨터에 대한 대중의 믿음이 깨져 간다면 다시 정글의 원칙이 통용될 수 있습니다. 네 지역 가운데 적어도 한 곳은 이런 상황을 원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동부 지역에는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살고 있고, 열대 지역에는 지구 자원의 절반 이상이 있습니다. 각자 자기네가 지구 전체를 통솔해야 한다고 느낄 수 있지요. 게다가 둘 다 북부 지역에 지배당한 아픈 역사가 있으니까 무분별하게 복수를 꿈꿀 수도 있고요. 반면에 유럽 지역은 위대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때 지구를 통치했으니까요. 그리고 권력에 대한 추억만큼 오래가는 것도 없지요.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동부와 열대 지역 모두 각자의 영토 안에서 급격히 팽창하는 중이니까요.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고 있단 말입니다. 군사적인 모험을 할 만한 역량이 남아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거죠. 그리고 유럽은 다른 건 하나도 없이 꿈만 남아 있고 말입니다. 군사력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있지요.“
수잔 캘빈이 끼어들었다.
“북부 지역을 빼먹었어요.”
바이어리가 열심히 대답했다.
“네, 그래요. 북부 지역은 백 년 전부터 현재까지 가장 강한 지역으로 군림해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힘이 약해지고 있는 중이지요. 파라오 시대 이후 처음으로 열대 지역이 문명의 중심에 들어서고 있는데, 북부 사람들 중에는 이 사실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로 북부 사람이 모여 만든 조직인 ‘인간을 위한 사회’는 로봇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수잔 캘빈 박사님, 그들은 수는 적지만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소위 ‘로봇의 심부름꾼’으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를 증오하는 공장 책임자나 산업과 농업을 합병한 회사의 이사 같은 사람들이지요. 모두 야심만만한 사람들이에요. 자신에게 가장 좋은 걸 스스로 결정하고, 다른 사람한테 바람직한 길을 제시할 능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죠. 한마디로 슈퍼 컴퓨터의 다양한 결정을 거부하는 방법으로 순간적으로나마 세상을 뒤흔들 수 있는 사람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인간을 위한 사회’ 회원들입니다.
수잔 캘빈 박사님, 이제야 모든 게 하나로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세계 철강’ 이사 다섯 명이 ‘인간을 위한 사회’ 회원인데, ‘세계 철강’은 과잉 생산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알마덴에서 수은을 채굴하는 ‘연합 수은’은 북부 지역 회사인데, 현재 회사 구성원을 조상 중이긴 하지만, 책임자 가운데 적어도 한 명 이상이 그 모임 회원일 겁니다. 혼자서 멕시코 해협을 두 달 동안 지연시킨 프란시스코 빌라프랑카 역시 ‘인간을 위한 사회’ 회원이라는 건 벌써부터 알고 있고, 그리고 라마 브라사야나도 그 모임 회원인 게 분명합니다.“
수잔 캘빈이 차분하게 말했다. (P362-364)
수잔 캘빈 박사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이게 전부예요. 나는 말도 못하는 불쌍한 로봇이 생긴 초창기부터 로봇이 인류의 안녕과 파괴 사이에 존재하는 현시점까지 계속 지켜봐 왔어요.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을 것 같군요. 내 생명이 끝나 가고 있으니 말이에요. 선생은 앞으로 다가올 세상을 볼 수 있겠지만.”
이제 나는 수잔 캘빈 박사를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 지난달에 여든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P369-370)
<아이, 로봇>은 아시모프가 1940년부터 10여 년 동안 여러 SF잡지에 발표했던 로봇소설들을 한데 모아서 1950년에 처음 단행본으로 펴낸 책이다. 이 책은 오늘날 가장 유명한 로봇소설 모음집으로서 첫 출간 뒤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수록 단편의 일부가 영국과 옛 소련에서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작된 바 있고, 미국에서도 여러 차례 영화화 시도가 있다가 마침내 2004년에야 ‘20세기 폭스사’에서 윌 스미스 주연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과 내용상 직접적인 연관은 거의 없으며, 로봇공학의 3원칙을 비롯한 몇몇 구성요소들만 차용해서 시나리오를 쓴 것이다. (P3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