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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그린의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영화 <안녕 헤이즐> 2014년

by 노용헌

열일곱 살 겨울 후반에 엄마는 내가 우울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마도 내가 집에서 거의 나가지 않고, 침대에서 상당히 많은 시간을 보내며, 같은 책을 읽고 또 읽고, 잘 먹지 않고, 내 어마어마하게 많은 자유 시간 대부분을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보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암에 대한 안내책자나 웹사이트나 기타 등등을 보면 항상 암의 부작용 목록 중에 우울증이 포함된다. 하지만 사실 우울증은 암의 부작용이 아니다. 우울증은 죽음의 부작용이다. (암 역시 죽음의 부작용이다. 거의 모든 게 다 그렇지, 뭐.) 하지만 엄마는 나에게 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주치의인 짐 선생님에게 데려갔고, 선생님은 내가 무기력증과 완벽한 임상학적 우울증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게 확실하기 때문에 처방전을 바꾸고 또한 일주일에 한 번씩 열리는 서포트 그룹 집회에 참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서포트 그룹에는 암으로 인한 질병의 여러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 참석하는데, 계속해서 바뀌는 것이 특징이다. 왜 계속 바뀌느냐고? 죽음의 부작용이지, 뭐.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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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어거스터스 워터스야. 열일곱 살이고, 일 년 반 전에 골육종이 조금 생겼고 오늘 여기는 그냥 아이작이 부탁해서 온 거야.”

“그래서 기분은 어떠니?”

패트릭이 물었다.

“오, 아주 근사해요. 난 위로만 올라가는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다고요. 형님.”

어거스터스 워터스는 입가를 치켜 올리며 미소지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내 이름은 헤이즐이야. 열여섯 살이고, 갑상선 암이 폐로 전이됐어. 그래도 아직은 괜찮아.”

한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기나긴 싸움 이야기, 전쟁에서는 확실히 지고 있지만 사소한 전투에서 승리한 이야기, 움켜쥐고 놓지 못하는 한줄기 희망, 기뻐하고 비난하는 가족들, 친구들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 대한 공감, 흐르는 눈물, 서로 간의 위로, 하지만 어거스터스 워터스와 나는 다시 말을 꺼내지 않았고, 마침내 패트릭이 말했다. (P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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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거스터스 워터스를 쳐다보았고 그도 나를 바라보았다. 그 애의 눈이 너무 파래서 눈 속까지 꿰뚫어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거야. 우리 모두 죽는 날이, 모두 다, 인류가 죄다 사라져서 누가 이 땅에 존재했다는 사실도, 우리 인류가 여기서 뭘 했다는 것도 기억할 사람이 전혀 없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 너희들은 고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나 클레오파트라를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어지는 거야. 우리가 하고 만들고 쓰고 생각하고 발견했던 모든 것들이 잊히고 이 모든 것들이 무(無)로 돌아가게 되는 거야.”

나는 주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런 날이 어쩌면 조만간 올 수도 있고, 아니면 수백만 년 후에 올 수도 있겠지. 우리가 태양이 사라져도 살아남을 수 있다 쳐도, 그렇다고 영원히 살아남지는 못해. 유기체가 지성을 얻기 전에도 세상이 존재했던 것처럼, 유기체가 사라진 다음에도 세상은 존재할 거야. 이런 필연적인 망각이란 게 걱정된다면, 그냥 무시하라고 충고하겠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이건 아까 말했던 나의 세 번째 절친 피터 반 호텐에게서 배운 것이다. 그는 나에게 있어서 거의 성경이나 다름없는 책 <장엄한 고뇌>를 쓴 은둔 작가이다. 피터 반 호텐은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서 (a) 죽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이해하면서, (b) 아직 죽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다. (P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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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좋아하지만, 계속 엄마가 옆에 있으려고 하는 건 가끔 기묘하게 짜증을 불러 온다. 그리고 케이틀린 역시 좋아한다. 정말로 좋아한다. 하지만 동년배들과 하루 종일 붙어 있어야 하는 학창생활에서 삼 년 간 떨어져 있었더니 우리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생긴 느낌이었다. 내 학교 친구들은 투병생활을 넘기는 걸 도와주고 싶어 했지만 결국에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 같다. 무엇보다도 ‘넘긴다’는 것 자체가 없다.

그래서 나는 지난 몇 년 간 케이틀린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날 때면 종종 그랬던 것처럼 고통과 피로라는 변명을 사용해서 빠져나왔다. 솔직히 언제나 괴롭다. 정상적인 사람들처럼 숨을 쉬지 못하고, 계속해서 폐에게 폐로서의 임무를 다하라고 상기시키고, 산소 부족이라는 속을 할퀴는 것 같은 해결 불가능한 사실을 받아들이라고 스스로를 다그치는 것은 항상 괴로운 일이다. 그러니까 내가 꼭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그저 사실 중에서 어느 하나를 골랐을 뿐이다.

나는 아일랜드 풍 선물 가게와 만년필 전문점, 야구모자 아울렛으로 둘러싸여 있는 벤치를 발견했다. 쇼핑몰 구석에 있어서 케이틀린이라 해도 절대 와서 쇼핑하진 않을 만한 가게들이었다. 거기 앉아 <자정부터 새벽>을 읽기 시작했다.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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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나는 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남자용 사각팬티와 티셔츠로 갈아입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인 베개를 얹어놓은 퀸 사이즈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런 다음에 백만 번째 <장엄한 고뇌>를 읽기 시작했다.

<장엄한 고뇌>는 안나(이야기의 서술자다.)라는 이름의 여자애와, 정원사 일을 하고 튤립에 집착하는 그 애의 한쪽 눈이 없는 엄마가 중부 캘리포니아의 작은 마을에서 평범한 중산층보다 조금 낮은 수준의 삶을 살다가 안나가 드문 혈액암에 걸리게 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건 암 이야기는 아니다. 암 이야기는 재미대가리 없기 때문이다. 암 이야기에서는 암에 걸린 사람이 암과 싸우기 위해 돈을 모으는 자선단체를 설립한다. 안 그런가? 그리고 이런 헌신적인 자선단체 활동은 암에 걸린 주인공의 내면에 있던 인간의 선량함을 일깨우고, 그 사람은 암 치료라는 유산을 남겼다는 면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과 격려를 받게 된다. 하지만 <장엄한 고뇌>에서 안나는 암에 걸린 사람이 암 자선단체를 만든다는 건 좀 자기도취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해서, ‘암에 걸렸지만 콜레라를 치료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안나 재단’이라는 이름의 자선단체를 만든다.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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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맞아. 왜 지금 형편없는 치즈 샌드위치를 먹고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내가 경멸하게 된 스포츠를 하는 네덜란드 출신 선수의 셔츠를 입고 있는 건지 넌 궁금하겠지.”

“그런 생각이 좀 들긴 했어.”

내가 대답했다.

“헤이즐 그레이스, 대단한 애정을 담아 말하겠는데, 넌 네 앞에 존재했던 수많은 아이들처럼 소원을 결과에 상관하지 않고 성급하게 사용했어. 저승사자가 너를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가상의 주머니에 여전히 소원을 담아둔 채 빌어보지도 못하고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네가 생각할 수 있는 첫 번째 소원을 성급하게 빌어버렸지.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테마파크라는 차갑고 인공적인 즐거움을 선택했어.”

“난 사실 그 여행이 굉장히 즐거웠었다고, 구피랑 미니도 만나고.......”

“난 독백을 하고 있는 중이야! 이 대사를 써서 암기까지 했다고. 네가 내 말을 자르면 완전히 망치고 말 거야.”

어거스터스가 지적했다.

“샌드위치나 먹으면서 이야기를 계속 들어.”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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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끊임없이 욱신거리는 어깨에 대해 생각했고, 또 두통도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아마 내가 뇌종양으로 죽은 여자애에 대해 계속 생각해서 그럴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생각을 정리하라고, 세상의 모든 케첩을 다 가져와도 충분히 뿌릴 수 없을 것 같은 늘어진 브로콜리와 검은콩 햄버거가 있는 지금 여기, 원탁에(세 사람이 앉기에는 지름이 살짝 크고 두 사람이 앉기엔 확실하게 컸다.) 집중하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내 뇌나 어깨에 암세포가 있다고 상상하는 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실제적 현상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고, 그러니까 극히 한정되어 있는 유한한 삶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시간 낭비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인터넷에 또 다른(그리고 죽어 버린)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쓴 글에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그리고 왜 내 뇌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게 만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가 정말로 아프긴 했지만 몇 년 간의 경험으로 고통이란 둔탁하고 일반적인 진단의 도구일 뿐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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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음, 소원 승인 전선에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

“좋아!”

내가 말했다.

“나쁜 소식은 네가 나아질 때까지 암스테르담에 갈 수 없게 되었다는 거야. 하지만 지니들은 네 건강이 나아지면 자기들의 그 유명한 마법을 부려줄 거야.”

“그게 좋은 소식이야?”

“아니, 좋은 소식은 네가 자는 동안 피터 반 호텐이 자신의 위대한 사상을 우리에게 좀 더 나누어 주었다는 사실이지.”

그가 다시 내 손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이번에는 위쪽에 <피터 반 호텐, 명예퇴직 소설가>라고 박혀 있는 두툼한 편지지 뭉치를 건네 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의료진이 방해할 일 없는 커다랗고 텅 빈 내 침대에 앉은 다음에야 편지를 읽어 보았다. 반 호텐의 기울어지고 엉망진창인 글자를 해독하는 데에는 한 세월이 걸렸다.

워터스 군에게,

4월 14일 자로 도착한 군의 전자 편지를 받고 지극히 셰익스피어적인 복잡함을 안은 군의 비극에 감탄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모든 사람들은 확고한 ‘비극적 결함’을 갖고 있더군요. 소녀의 경우에는 대단히 아프다는 것, 그리고 군의 경우에는 대단히 멀쩡하다는 것이죠. 소녀가 나아지거나 군이 아프게 된다면 별들이 끔찍하게 교차하지 않는 셈이 되겠지만, 별의 본질이라는 것이 서로 교차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고, 셰익스피어가 카시우스의 편지에 쓴 “친애하는 부루투스여, 잘못은 우리 별에 있는 것이 아닐세./ 우리 자신에게 있다네.” 라는 말은 틀려도 이보다 더 틀릴 수 없는 말입니다. 로마의 귀족이라면(혹은 셰익스피어라면!) 쉽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별에는 잘못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P119-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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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뭐라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내가 내 몸의 주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것은 마치 어린 시절 내가 내 책을 죄다 넣은 무거운 배낭을 어디든 항상 메고 돌아다니던 때에, 그 배낭을 한참 메고 있다가 벗으면 몸이 둥둥 떠오를 것 같은 느낌이었던 것과 비슷하다.

약 10초 후, 내 폐가 해질 무렵의 꽃처럼 안쪽으로 말려드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기계 바로 옆에 있는 회색 의자에 앉아서 호흡을 가다듬으려고 노력했다. 낮게 켁켁거리는 것 같은 기침이 나왔다. 케뉼러를 제자리에 부착할 때까지 나는 굉장히 비참했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도 아팠다. 고통은 항상 그 자리에서 나를 내 안으로 끌어당기며 느끼기를 종용한다. 바깥 세상에 갑작스럽게 평가나 주의를 요구하는 것이 생기면 항상 나는 고통에서 깨어나 그쪽을 보게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엄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셨다.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는데, 뭐라고 하신 거지? 그러다가 생각이 났다. 엄마는 무슨 일이냐고 물으셨다.

“아무것도요.”

내가 대답했다.

“암스테르담이야!”

엄마가 반쯤 소리를 치셨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암스테르담이에요.”

나도 대답했다. 엄마가 손을 뻗어 나를 일으켜 주셨다. (P15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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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을 하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눈가에 주름이 잡히는 것이 보였다.

“난 널 사랑하고, 진심을 말하는 그 간단한 기쁨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난 널 사랑해. 사랑이라는 게 그저 허공에 소리를 지르는 거나 다름없다는 것도 알고, 결국에는 잊히는 게 당연한 일이라는 것도 알고, 우리 모두 파멸을 맞이하게 될 거고 모든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는 날이 오게 될 거라는 것도 알아. 태양이 우리가 발 딛고 산 유일한 지구를 집어삼킬 거라는 것도 알고. 그래도 어쨌든 너를 사랑해.”

“어거스터스.”

달리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이 기묘하게 고통스러운 기쁨 속에 빠져들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위로 올라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어떤 말도 해줄 수 없었다. 그저 그를 쳐다보기만 했고, 그는 그대로 나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오므린 채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돌려 창문에 머리 옆쪽을 기댈 뿐이었다. (P163-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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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프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병원에서 내가 나을 가능성이 85퍼센트라고 말해 줬었어. 그게 꽤나 높은 확률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이게 러시안 룰렛 게임이라는 생각이 계속 드는 거야. 그러니까, 난 지옥 같은 6개월이나 일 년을 보내고 내 다리도 잘라내야 하지만 결국에는 그래도 효과가 없을 수 있었어. 무슨 말인지 알지?”

“알지.”

사실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처음부터 말기였기 때문이다. 내 모든 치료는 암을 낫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팔란키포가 도입되며 내 암 인생이 모호해지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어거스터스와 달랐다. 내 인생의 마지막 장은 진단을 받는 순간 쓰여졌다. 반면 거스는 다른 암 생존자들처럼 불확실한 상태로 살고 있는 거였다.

“그래, 그래서 난 준비를 하고 싶다는 그런 단계를 거쳤지. 우린 크라운 힐 묘지에 땅을 조금 샀고, 난 어느 날 아빠랑 그곳을 둘러보며 장소를 골랐어. 그리고 내 장례식 계획을 전부 다 세웠지. 그런 다음 수술 직전에 부모님께 내가 견뎌내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정장을, 진짜 좋은 걸로 사고 싶다고 말씀드렸어. 하지만 지금껏 입을 일이 없었지. 오늘밤까지는.”

그가 말했다.

“그러니까 그건 네 수의구나.”

“맞아, 넌 수의로 입을 옷 없어?”

“있어. 내 열다섯 번째 생일 파티 때 산 옷이야. 하지만 그걸 데이트할 때 입진 않아.”

내가 대답했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우리가 데이트 하고 있는 거야?”

그가 물었다. 나는 부끄러운 기분으로 시선을 내렸다.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마.” (P176-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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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입 다물게. 리더비히. 루돌프 오토(독일의 신학가이자 진보적 사상가)는 신성한 것을 발견해 보지 못했다면, 두렵고 떨리는 신비(mysterium tremendum)와 비합리적인 만남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면 자신의 저서를 읽을 자격이 없다고 말한 바 있지. 그리고 지금 내가 말하건대 어린 친구들, 너희들이 아파서 옥 필시의 두려움에 대한 용맹한 대응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내 작품은 너희를 위한 것이 아니야.”

나는 도저히 이 말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건 스웨덴 이라는 사실만 제외하면 완벽하게 평범한 랩 음악이라고.

“음, 그래서 <장엄한 고뇌>에 대해서 말인데요. 안나의 엄마요. 책이 끝난 다음에 그녀는....”

반 호텐이 내 말을 자르고 잔을 두드리며 리더비히가 다시 잔을 채워줄 때까지 말을 쏟아냈다.

“그래서 제노는 거북이 패러독스로 가장 유명하지. 내가 거북이와 달리기 시합을 한다고 상상해 보자. 거북이는 10미터 앞에서 출발하는 거야. 네가 그 10미터를 따라잡았을 때 거북이는 아마 1미터 정도 갔겠지. 그리고 네가 그 거리를 따라잡았을 때 거북이는 조금 더 갔을 거고, 그런 식으로 영원히 계속되는 거야. 네가 거북이보다 더 빠른데도 넌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해. 그저 거리를 좁힐 수만 있을 뿐이지.

물론 역학적인 고민을 하지 않고서 그냥 거북이를 제칠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대단히 복잡하지. 칸토어(게오르크 칸토어, 독일의 수학자)가 어떤 무한대는 다른 무한대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 문제를 풀 수 없었어.“

“음.”

내가 말했다.

“그 말이 네 질문에 대한 답이 될 것 같구나.” (P2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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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슬로의 욕구 단계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이 에이브러햄 매슬로라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어떤 종류의 욕구를 갖기 위해서는 우선 특정한 욕구가 채워져야만 한다는 이론으로 유명해졌다. 말하자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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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과 물에 대한 욕구가 충족되면, 다음 단계의 욕구인 안정으로 올라갈 수 있고, 그리고 그 다음, 또 그 다음으로 가지만 매슬로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사실은 생리적 욕구가 만족될 때까지 안정이나 사회적 욕구를 걱정할 처지도 못 된다는 것이다. 예술을 하거나 도덕심이나 양자물리학 같은 것들을 생각하게 되는 ‘자아실현’은 고사하고 말이다.

매슬로에 따르면 나는 피라미드의 두 번째 단계에서 멈춰 있다. 내 건강에 대한 안정감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이나 존경심, 예술 등에 대한 욕구는 아예 생각도 할 수 없다는 건데, 당연하지만 이건 완전히 거대 쓰레기 같은 소리다. 아프다고 해서 예술을 하거나 철학에 대해 고민하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욕망은 병에 의해 단지 변형될 뿐이다.

매슬로의 피라미드는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미개하다는 주장을 내포하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에게 동의하는 것 같다. 하지만 어거스터스는 아니었다. 나는 항상 그가 한때 아팠기 때문에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어쩌면 그가 아직도 아플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P224-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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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대부분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 울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데 소모되었기 때문에 어거스터스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았다. 이를 악문다. 고개를 든다. 사람들이 내가 우는 걸 보면 상처받을 거라고. 내가 그들의 사람에서 ‘슬픔’이라는 존재밖에는 되지 못할 거라고. 단순한 ‘슬픔’으로 전락할 수는 없으니까 울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천장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하고는 목이 메이는 상태라 해도 어쨌든 울음을 삼키고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쳐다보고 미소를 짓는다.

그가 비뚜름한 미소를 짓고서 말했다.

“난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빛났어. 헤이즐 그레이스, 내 가슴, 왼쪽 엉덩이, 간, 모든 곳이 다 빛났지.”

모든 곳이, 그 말이 잠시 허공을 맴돌았다. 우리 둘 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안다. 나는 일어나서 내 몸과 카트를 끌고 어거스터스보다 훨씬 오래 살았을 카펫을 지나 의자 아래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허리를 끌어안았다. (P226-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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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앰뷸런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우리 옆을 지나가 버렸다. 그래서 그들이 돌아와서 우리를 찾기를 기다리며 나는 유일하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를 읊어 주었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붉은 손수레에>였다.

아주 많은 것들이

붉은

손수레에

달려 있네.

빗물이

광이 나네

그 옆에 하얀

병아리들이 있네

윌리엄스는 의사였다. 이것은 딱 의사의 시처럼 느껴졌다. 시가 끝났지만 앰뷸런스는 여전히 우리 쪽으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시를 계속 지어내서 이어 나갔다.

그리고 아주 많은 것들이 달려 있네. 나무 위에 달린 가지로 나뉜 파란 하늘에, 아주 많은 것들이 달려 있네, 파란 입술의 소년의 배에서 튀어 나온 투명한 G-튜브에, 아주 많은 것들이 달려 있네. 이 우주의 관찰자에게.

반즘 의식이 없는 상태로 그가 나를 쳐다보고 웅얼거렸다.

“그러고는 네가 시를 못 쓴다고 그러는 거야?” (P259-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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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들이 매 분 매 초가 전보다 더더욱 끔찍했다. 나는 그저 계속해서 그에게 전화를 걸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혹시 누군가가 받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지난 몇 주 동안 우리가 함께 보낸 추억의 시간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추억하는 기쁨을 빼앗겨 버린 느낌이었다. 더 이상 함께 추억을 되살릴 사람이 없으니까. 함께 추억할 사람을 잃는 건 마치 추억 그 자체를 잃는 것 같았다. 우리가 했던 일들이 몇 시간 전에 떠올렸을 때보다 덜 중요하고 비현실적으로 변해 버린 것 같았다. (P274)


우리는 창조와 소멸, 인식에만 관심이 있는 우주에 살고 있어. 어거스터스 워터스는 기나긴 암과의 싸움으로 죽은 게 아니야. 그는 인간의 의식과의 기나긴 싸움 끝에 가능한 것을 모두 다 만들었다 없애려 하는 우주와 욕구로 인한 희생양으로써 죽은 거지. 너희들도 모두 그렇게 될 거고.

나는 이것을 게시하고 누군가가 댓글을 달기를 기다리며 계속해서 화면을 새로고침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달리지 않았다. 내 댓글은 새로운 게시물의 폭풍 속에서 사라졌다. 모두가 그를 대단히 그리워하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한다. 나는 반 호텐의 편지를 떠올렸다. ‘글은 되살리지 못한다. 대상을 묻어 버린다.’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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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은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내 생각을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내가 봐도 좀 촌스럽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우주가 자신을 알아주길 바란다는 것, 그래서 최대한으로 우주를 알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주에게 오로지 관심을 기울이는 것만으로 갚을 수 있는 빚을 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또한 더 이상 사람이 아니거나 아직까지 사람이 될 기회를 갖지 못한 모든 사람들에게도 빚을 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아빠가 말씀해 주셨던 거다.

나는 서포트 그룹의 남은 시간 동안 침묵을 지켰고, 패트릭은 나를 위한 특별 기도를 올려 주었다. 죽은 사람의 기나긴 명단 끝에 거스의 이름이 첨가되었고(우리 한 명단 죽은 사람 열네 명이었다). 우리는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겠다는 맹세를 했다. 그런 다음 나는 아이작을 데리고 차로 향했다.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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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영웅은 뭔가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진정한 영웅은 사물을 알아채고,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이죠. 천연두 백신을 발명한 사람은 정말로 뭔가를 발명한 게 아니에요. 그저 우두를 앓는 사람들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챈 거죠.

내 PET 스캔이 반짝거린 이후에 난 집중치료실에 숨어 들어가서 그 애가 의식이 없는 동안 지켜봤어요. 그냥 배지를 단 간호사 뒤를 따라 들어가서 들킬 때까지 한 십 분 정도 그 애 옆에 앉아 있었죠. 난 정말로 나 역시 죽어간다는 이야기를 하기 전에 그 애가 먼저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정말 끔찍했어요. 집중치료라는 기계화된 끊임없는 장광설이랄까요. 그 애의 가슴에서는 검은 암세포 수액이 계속 나왔고, 눈은 감겨 있고, 몸에 관이 삽입되어 있었어요. 하지만 그 애의 손은 여전히 그 애의 손이고, 여전히 따뜻하고, 손톱에는 짙은 파란색이 칠해져 있었죠. 난 그냥 그 애의 손을 잡고 우리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려고 했어요. 잠깐 동안 난 그 애가 먼저 죽어서 나 역시 죽어간다는 걸 절대로 모르길 바라는 착한 사람이 됐죠. 하지만 그러다가 우리가 사랑할 시간이 더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소망을 하게 됐죠. 난 나만의 상처를 남긴 거예요. (P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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