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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영화 <컨택트> 2016년

by 노용헌

테드 창의 SF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는 8편의 단편이 있다. <바빌론의 탑>, <이해>, <영으로 나누면>, <네 인생의 이야기>, <일흔두 글자>, <인류 과학의 진화>, <지옥은 신의 부재>,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이다. 영화 <컨택트>는 이 단편 중에서 〈네 인생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이다. 2014년에 영화화가 확정되었고 2016년에 개봉. 연출은 드니 빌뇌브 감독이며, 에이미 애덤스, 제러미 레너, 포레스트 휘태커가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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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버지가 지금 내게 어떤 질문을 하려고 해. 이것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고, 나는 온 정신을 집중해서 모든 것을 빠짐없이 기억에 새겨두려고 하고 있지. 그이와 나는 밖에서 디너쇼를 복 방금 돌아온 참이란다. 자정을 넘은 시각. 우리는 보름달을 보기 위해 파티오에 나와 있어. 춤을 추고 싶다고 네 아버지에게 말하자 그이는 쾌히 응했고, 그래서 지금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춤을 추고 있어. 달빛 아래에서, 십대들처럼, 삼십대의 남녀가 앞뒤로 천천히 몸을 흔들면서. 밤의 한기는 전혀 느끼지 않아. 이윽고 네 아빠는 이렇게 말해. “아이를 가지고 싶어?”

네 아버지와 나는 결혼한 지 이 년쯤 된 부부이고, 지금은 엘리스 애비뉴에 살고 있어. 이사를 갈 무렵 너는 아직 너무 어려서 이 집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네게 사진을 보여주고 이 집 얘기를 해줄 거야. 오늘밤의 이야기. 너를 잉태했던 이 밤의 이야기를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단다. 하지만 그런 얘기는 네가 너의 아이를 가질 준비가 되었을 때나 할 수 있는 얘기이고, 우리는 결국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하겠지.

그보다 더 이른 시기에 네게 얘기해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을 거야. 네 인생의 거의 모든 기간에 걸쳐서, 너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이렇게 로맨틱한 --너라면 감상적이라는 표현을 쓰겠지--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하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네가 열두 살 때 내놓게 될 너의 탄생 시나리오를 기억해. (P15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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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무실 밖의 복도에서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묘한 콤비였다. 한 사람은 짧은 머리에 군복 차림이었고, 알루미늄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다. 냉철한 눈초리로 주변을 관찰하고 있는 듯했다. 다른 한 사람은 한눈에 보기에도 학자였다. 턱수염과 콧수염을 길렀고, 코듀로이 소재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옆의 게시판에 스테이플러로 고정시킨 여러 장의 게시물을 훑어보고 있었다.

“웨버 대령님이시죠?” 나는 군인과 악수를 나눴다. “루이즈 뱅크스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뱅크스 박사님.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군인이 말했다.

“천만에요. 무슨 핑계든 간에 교수 회의에서 빠질 수만 있다면 대환영입니다.”

웨버 대령은 동행한 남자 쪽을 가리켰다. “이분은 게리 도널리 박사입니다. 통화할 때 말씀드린 물리학자입니다.”

“게리라고 부르십시오.” 물리학자는 나와 악수를 나누며 말했다. “당신이 어떤 의견을 내놓을지 정말 궁금하군요.”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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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테이프에 입각해서 뭔가 추측할 수는 없습니까?“

“힘들어요. 그들이 후두(喉頭)를 이용해 소리를 내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것만으론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추측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든, 무엇이든 좋으니 우리에게 얘기해주실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웨버 대령이 물었다.

그가 민간인의 조언을 얻는 일에 익숙지 않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해부학적인 차이 탓에 커뮤니케이션을 성립시키는 일 자체가 극히 힘들 거라는 사실밖에는 얘기할 수 없군요. 그들이 인간의 성도가 만들어낼 수 없는 소리를 사용하고 있다는 건 거의 확실하고, 그 소리는 인간의 귀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인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초저주파나 초음파를 얘기하시는 겁니까?” 게리 도널리가 물었다.

“꼭 그렇다는 뜻은 아녜요. 단지 인간의 청각 시스템은 완벽한 음향 기관이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인간의 귀는 결국 인간의 후두가 내는 소리를 인식하는 데 최적화된 기관이라는 뜻이죠. 따라서 외계인의 발성 시스템의 경우. 추측은 별 의미가 없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충분히 연습을 한다면 어쩌면 우리도 외계인 언어의 음소(音素) 차이를 인식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귀로는 그들이 의미 있다고 간주하는 차이를 아예 식별조차 못할 가능성 또한 있습니다. 그럴 경우 외계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위해서는 음향분석기가 필요할 겁니다.”

웨버 대령이 말했다. “만약 제가 박사님께 한 시간 분량의 녹음테이프를 드린다고 가정한다면, 우리에게 그 음향분석기가 필요한지 여부를 결정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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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병은 내 배지를 확인하고 회람판의 서류에 뭔가를 기입한 다음 게이트를 열어주었다. 나는 오프로드 차를 몰고 캠프 안으로 들어갔다. 볕에 바싹 마른 농장 목초지에 육군 천막이 잔뜩 들어차 조그만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이 캠프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체경((looking glass)이라는 별명이 붙은 외계인의 기계장치였다.

사전 브리핑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미국 전역에는 이런 체경이 아홉 개, 전 세계에는 백열두 개가 있다고 했다. 쌍방향 통신 장치로서 기능하고, 아마 궤도상의 우주선들과의 연락에 쓰일 거라고 했다. 외계인들이 우리와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가 옮는 것을 두려워하는 건지도. 물리학자와 언어학자가 각기 한 명씩 포함된 과학자 팀 하나가 체경 하나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 캠프의 팀에는 게리 도널리와 내가 포함되어 있었다.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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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은 일곱 개의 가지가 맞닿은 지점에 올려놓은 통처럼 보였다. 방사상으로 대칭이었고, 가지는 모두 팔이나 다리로 기능할 수 있었다. 내 앞에 있는 그것은 네 다리를 써서 걷고 있었고, 나머지 세 개의 가지는 팔처럼 측면에 말려올라간 상태였다. 게리는 이들을 ‘헵타포드’라고 불렀다.

사전에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본 적이 있었지만 나는 여지없이 넋이 나간 채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의 수족에서 관절은 딱히 눈에 띄지 않았다. 해부학자들은 이것들이 척추 모양을 한 기둥에 의해 지탱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고 있었다. 내부 구조가 어떻든 간에, 헵타포드의 수족은 보는 사람이 당황스러울 만큼 유동적으로 움직였다. 헵타포드의 ‘몸통’은 그 수족 위에 올라타 호버크라프트처럼 매끄럽게 파도를 탔다.

눈꺼풀이 없는 일곱 개의 눈이 헵타포드의 몸통 꼭대기를 둘러싸고 있었다. 헵타포드는 방금 들어온 입구를 향해 돌아가더니 짧게 풋 풋 소리를 냈고, 다른 헵타포드를 대동하고 다시 방 중앙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몸의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기괴하면서도 논리적이었다. 모든 방향으로 눈이 있으므로, 헵타포드에게는 어느 방향도 ‘전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P160-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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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0년 쿡 선장이 지휘하는 범선 인데버호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퀸즐랜드 해안에서 좌초했어. 쿡은 부하들 일부에게 수리를 맡겨놓고, 탐험대를 이끌고 상륙해서 원주민들을 만났지. 선원 중 한 사람이 새끼를 배의 주머니에 넣고 껑충껑충 뛰며 돌아다니는 동물들을 가리키며 원주민에게 그 이름이 무엇인지를 물었어. 그러자 원주민은 “캥구루(Kanguru)”라고 대답했어. 이때부터 쿡과 그의 부하 선원들은 이 동물을 이 이름으로 불렀어. 그들은 나중에야 이 말이 실은 “방금 뭐라고 했지?”라는 뜻이라는 사실을 알았지.

내가 맡은 기초 강좌에서 매년 나는 이 이야기를 하곤 해. 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고 나 역시 나중에 그 점을 알려주지만, 이것이 고전적인 일화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어. 물론 내가 가르치는 학부생들이 정말로 듣고 싶어하는 것은 헵타포드에 관한 일화야. 내가 교직에 머무는 동안 그들 중 다수가 바로 그 이유에서 내 수업을 택했지. 그래서 나는 내가 참여한 체경 대화 세션 및 다른 언어학자들이 수행한 세션들을 녹화한 오래된 비디오테이프를 그들에게 보여주게 돼. 테이프에는 배울 점이 많아. 우리가 다시 외계인들의 방문을 받는다면 쓸모가 있겠지. 하지만 아까 그 캥거루 얘기 같은 그럴듯한 일화와는 그리 인연이 없지. (P164-165)


시간이 흐르면서, 각 체경을 담당하는 연구 팀들은 헵타포드의 기초적인 수학과 물리학 용어 습득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성과 발표회에서 언어학자들은 의사소통 절차에, 물리학자들은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협력했다. 물리학자들은 외계인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과거에 고안되었던, 수학 기반의 시스템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문제는 이것이 전파 망원경용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대면용으로 개량했다.

우리 팀은 기초 산수 분야에서는 성과를 올렸지만, 기하학과 대수에서는 장벽에 부딪쳤다. 직각좌표계 대신 구면좌표계를 쓴 것은 헵타포드의 해부학적 구조에는 이쪽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됐지만, 이 접근법은 별다른 결실을 맺지 못했다. 헵타포드들은 우리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물리학 토론에서도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그나마 성공을 거둔 것은 원소의 명칭 같은, 아주 구체적인 용어를 사용했을 때로 국한되었다.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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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기적으로 헵타포드들에게 지구에 온 이유를 물었다. 그럴 때마다 ‘보기 위해’ 혹은 ‘관찰하기 위해’ 왔다고 대답했다. 사실 그들은 우리 질문에 대답하기보다는 말없이 우리를 바라보는 쪽을 선호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들은 과학자일 수도 있고, 관광객일 수도 있었다. 국무성에선 우리에게 인류에 관한 정보는 가급적 발설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향후 교섭시 그들에게 유리한 협상 카드로 사용되는 것을 경계해서였다. 우리는 이 지시에 따랐지만 어차피 별로 힘든 일은 아니었다. 헵타포드들은 그 어떤 것에 관해서도 질문을 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체가 과학자이든 관광객이든 간에, 그들에게는 지독하게도 호기심이 없었다.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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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건 빛이 공기에서 물속으로 들어갈 때의 경로야. 빛은 수면에 달할 때까지는 일직선으로 나아가지. 물의 굴절률은 공기와도 다르기 때문에 빛은 이런 식으로 방향을 바꿔. 예전에도 들어본 적 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자, 이 빛의 경로에는 흥미로운 특성이 있어. 이 경로는 이 두 지점 사이 가장 빠른 경로야.”

“뭐라고?”

“그냥 웃자는 얘기쯤으로 생각하고 빛이 이런 경로를 따라 움직인다고 가정해봐.” 게리는 도표에 점선을 하나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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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상의 경로는 빛의 실제 경로보다 짧아. 하지만 빛은 공기보다 물속에서 더 천천히 움직이고, 이 경로에서는 물속에 있는 부분이 더 길지. 따라서 빛이 이 경로를 따라 움직이려면 실제 경로를 따라가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려.”

“응, 이해했어.”

“자, 이번에는 빛이 이것과는 또 다른 경로를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해봐.” 게리는 두 번째 점선 경로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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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로에서는 물속에 있는 부분의 비율이 줄어들지만, 전체 길이는 늘어나지. 이 경로로 가도 실제 경로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려.”

게리는 분필을 내려놓고 백묵가루가 묻은 손가락으로 칠판의 그림을 가리켰다. “그 어떤 가상 경로도 실제로 선택된 경로보다 시간이 더 걸려. 바꿔 말하자면, 빛의 경로는 언제나 최소 시간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경로라는 뜻이지. 이걸 ‘페르마의 최단 시간의 원리’라고 해.”

“재미있네. 헵타포드들이 이것에 대해 반응을 보였다는 거야?” (P189-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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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알아야 하는 내용에 관해서 우리가 잘못된 추측을 했던 거야.“ 게리는 얼굴빛도 바꾸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사실, 페르마의 원리가 최초의 돌파구를 제공했다는 점은 흥미로워. 설명하기 쉬운 건 사실이지만, 수학적으로 이걸 기술하기 위해서는 미분이 필요하거든. 그것도 보통 미분이 아니라 변분법이. 우린 기하나 대수의 단순한 정리가 돌파구가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정말 흥미롭네. 무엇이 단순하지에 대한 헵타포드의 생각이 우리와 다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바로 그거야. 그래서 난 페르마의 원리에 대한 그들의 수학적 기술을 보고 싶어서 돌아버릴 지경이야.” 그는 이렇게 말하며 사무실 안을 왔다 갔다 했다. “만약 헵타포드식 변분법이 그들의 대수학보다 더 단순하다면, 우리가 물리학에 관해 소통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웠던 이유가 설명될지도 몰라. 그들의 수학 체계 전체가 우리 것과는 완전히 반대일 가능성도 있는 거야.” 게리는 물리학 책자를 가리켰다. “저걸 개정하게 될 것만은 확실해.”

“페르마의 원리에서 물리학의 다른 분야까지 확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어쩌면. 페르마의 원리를 닮은 물리학 원리는 많이 있으니까.”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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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관계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사실을 내가 매일 자각하게 되는 것은 네가 처음 걷기 연습을 하면서부터야. 너는 쉬지 않고 어딘가로 달려나가겠지. 네가 문지방에 부딪치거나 무릎이 까질 때마다 나는 너의 아픔을 내 것처럼 느끼게 돼. 마치 말을 안 듣고 멋대로 행동하는 팔이나 다리가 하나 더 생긴 듯한 느낌이지. 내 몸의 연장이니까 지각 신경이 느끼는 아픔은 고스란히 나한테 전달되지만, 운동신경은 전혀 내 명령에 따르지 않는 꼴이야. 정말 불공평해. 나의 본을 떠 빚은 움직이는 부두 인형을 낳은 기분이랄까. 계약서에 서명할 땐 이런 조항을 읽은 기억이 없어. 이것도 계약의 일부였단 말이야?

반대로 네가 웃는 것을 볼 때도 있겠지. 이를테면 쇠그물 울타리 사이로 손을 집어넣고 이웃집 강아지와 놀 때, 어찌나 웃어대는지 너는 급기야 딸꾹질을 하기 시작하지. 강아지가 옆집 안으로 들어가면 너의 웃음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너는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쉬기 시작해. 그러다 강아지가 다시 밖으로 나와서 네 손가락을 핥고, 그럼 너는 또 꽥 소리를 지르고 웃기 시작할 거야. 그 소리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소리이지. 내가 분수나 샘이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만들어주는 소리란다.

자기 몸의 안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너의 행동을 목격하고 심장마비를 일으킬 지경이 될 때 내가 그 소리를 기억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P193-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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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선은 자신의 정확한 목적지를 알아야 해. 목적지가 다르다면 가장 빠른 경로도 바뀔 테니까.”

게리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목적지가 없다면 ‘가장 빠른 경로’라는 개념은 무의미해지지. 그리고 해당 경로를 가로지르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그 경로 중간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이를테면 수면이 어디 있는지 등의 정보도 필요해.”

나는 냅킨에 그려진 그림을 계속 응시했다. “그리고 광선은 그런 것들을 사전에 모두 알고 있어야 해. 움직이기 전에, 맞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빛은 이전의 지점을 향해 출발한 다음 나중에 진로를 수정할 수는 없어. 그런 행위에서 야기된 경로는 가장 빠른 경로가 아니니까. 따라서 빛은 처음부터 모든 계산을 끝마쳐야 해.”

나는 마음속으로 이 사실을 곱씹었다. 광선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선택하기 전,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무엇을 떠오르게 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게리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고민하던 것도 바로 그거였어.” (P2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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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이 먼 지구까지 온 데는 틀림없이 무슨 이유가 있을 겁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호스너의 목소리는 실제보다 작게 들렸다. “지구 정복이 목적은 아닌 듯하니 천만다행이지만요.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이유로 온 걸까요? 자원 탐사자? 인류학자? 선교사? 그들의 동기가 무엇이든, 우리에게 그들에게 제공 가능한 것이 있다는 점만은 틀림없습니다. 태양계 채굴권일지도 모르겠군요. 아니면 우리 자신에 관한 정보일지도 모릅니다. 인류에게 설교를 할 수 있는 권리일 가능성도 있고, 하여간 뭔가 있다는 점만은 확실합니다.

제 얘기의 요점은, 그들의 동기가 무역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무역을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왜 이곳에 왔는지, 우리가 가진 것 중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반드시 알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일단 정보를 획득하면 무역 교섭을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헵타포드와의 관계가 적대적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들의 이익이 곧 우리의 손실을 의미한다거나 그 반대가 성립하는 상황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적절하게 대처한다면 우리와 헵타포드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이게 논 제로섬 게임이란 소린가?” 게리는 짐짓 경악한 어조로 말했다. “하느님 맙소사.” (P204-205)

미래를 아는 일이 정말로 가능한 것일까? 단지 추측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절대적으로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실제로 아는 것이 가능할까? 물리학의 기본 법칙들은 시간 대칭적이며, 과거와 미래 사이에 물리적인 차이는 없다는 이야기를 게리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얘기를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론적으로는 맞다”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인 얘기로 들어가면 대다수는 자유의지의 존재를 근거로 내세워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보르헤스풍의 우화적 이야기를 통해 반론을 전개해보겠다. 과거와 미래에 걸친 모든 사건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세월의 책> 앞에 한 여자가 서 있다고 치자. 원본을 작게 복사한 것이지만, 이 책은 여전히 거대하다. 한 손에 확대경을 든 이 여자는 자기 인생의 이야기를 찾기 위해 티슈처럼 얄다란 책장을 넘긴다. 자신이 책장을 넘기고 있는 것을 기록한 대목을 찾아낸 그녀는 다음 대목으로 넘어간다. 그곳에는 그날 그녀가 나중에 하게 될 일들이 자세히 적혀 있다. 그녀가 책에서 읽은 정보를 바탕으로 경주마인 ‘될 대로 되라’에 100달러를 걸고 스무 배에 달하는 배당금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P208-209)


자유의지의 존재는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는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의지란 의식의 본질적인 일부인 것이다.

아니, 정말로 그런 것일까? 미래를 아는 경험이 사람을 바꿔놓는다면? 이런 경험이 일종의 절박감을, 자기 자신이 하게 될 행동을 정확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불러일으킨다면?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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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한 각도로 수면에 도달하고, 다른 각도로 수중을 나아가는 현상을 생각해보자. 굴절률의 차이 때문에 빛이 방향을 바꿨다고 설명한다면, 이것은 인류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빛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간을 최소화했다고 설명한다면, 당신은 헵타포드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완전히 다른 두 가지의 해석이다.

물질 우주는 완벽하게 양의적인 문법을 가진 하나의 언어이다. 모든 물리적 사건은 완전히 상이한 두 방식으로 분석될 수 있는 하나의 언술에 해당된다. 한 가지 방식은 인과적이고, 다른 방식은 목적론적이다. 두 가지 모두 타당하고, 한쪽에서 아무리 많은 문맥을 동원하더라도 다른 한쪽이 부적격 판정을 받는 일은 없다.

인류의 헵타포드의 조상들이 맨 처음 자의식의 불꽃을 획득했을 때 양측은 모두 동일한 물질세계를 지각했다. 하지만 지각한 것에 대한 해석은 각자 달랐다. 세계관의 궁극적인 상이함은 이런 차이가 낳은 결과였다. 인류가 순차적인 의식 양태를 발달시킨 데 비해, 헵타포드는 동시적인 의식 양태를 발달시켰다. 우리는 사건들을 순서대로 경험하고, 원인과 결과로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지각한다. 헵타포드는 모든 사건을 한꺼번에 경험하고, 그 근원에 깔린 하나의 목적을 지각한다. 최소화, 최대화라는 목적을. (P212-213)


네 인생의 이 단계에서 네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어. 내가 너에게 젖을 먹이기 전까지 네 안에는 과거의 만족감에 관한 기억도, 미래의 충족에 대한 기대감도 존재하지 않아. 그러다 젖을 빨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역전되겠지. 너는 세상에 대해 아무런 불만도 느끼지 않게 돼. 네가 지각하는 유일한 순간은 오로지 지금뿐이야. 너는 현재 시제 속에서만 살아. 여러 의미에서 실로 부러운 상태라고 할 수 있지.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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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버 대령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무슨 일입니까? 어디로 갔습니까?”

“헵타포드들이 이제 떠날 거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말했다. “아까 그 헵타포드뿐만 아니라, 모든 헵타포드가.”

“여기로 다시 불러와요.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보십시오.”

“음, 래즈베리가 호출기를 차고 다닐 것 같진 않군요.” 나는 말했다.

체경에 나타난 방의 이미지가 너무나도 느닷없이 사라진 탓에 나는 한순간 후에야 그곳에 무엇이 보이는지를 깨달았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체경 반대편이었다. 체경 자체가 완전히 투명해졌던 것이다. 재생 스크린을 에워싼 사람들의 대화가 일시에 끊겼다.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웨버 대령이 말했다.

게리는 체경 쪽으로 걸어가 그 주위를 빙 돌아 반대편으로 갔다. 그는 한 손을 체경 뒷면에 갖다댔다. 체경에서 그의 손가락들이 닿은 부분에 희끄무레한 타원형들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게리가 말했다. “우리가 방금 원격 물질 변환을 목격한 것 같군요.”

마른 풀을 밟는 육중한 발소리가 들렸다. 텐트 문으로 병사 하나가 들어왔다. 커다란 워키토키를 든 그는 달려왔는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대령임, 본부에서 연락이--”

웨버는 병사의 손에서 워키토키를 낚아챘다.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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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헵타포드가 왜 떠났는지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무슨 이유에서 지구로 왔는지, 왜 그들이 그런 식으로 행동했는지에 관해서도 알아내지 못했다. 나 자신의 새로운 인식은 그런 종류의 지식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헵타포드의 행동을 순차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았지만, 그 이유는 알아내지 못했다.

나는 헵타포들의 세계관을 좀더 많이 경험하고, 그들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느끼고 싶었다. 그랬더라면 아마 나는 그들처럼 사건들의 필연성의 바다에 완전히 몸을 담글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남은 일생동안 얕은 물가에서만 철벅거리는 대신에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체경 프로젝트에 참여한 다른 언어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헵타포드의 언어들을 계속 학습하겠지만, 우리 중 누구도 헵타포드들이 이곳에 있었을 때보다 더 앞의 단계로 나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헵타포드들과의 공동 작업은 나의 인생을 바꿔놓았어. 나는 너의 아버지를 만났고, ‘헵타포드 B'를 배웠어. 이 두 가지 사건은 내가 지금 너의 존재를 아는 것을 가능하게 해. 달빛에 물든 이 파티오에서 말이야. 훗날, 세월이 흐른 뒤에는 네 아버지도 떠나가고, 너도 떠나가게 될 거야. 이 순간으로부터 내게 남겨질 것은 오직 헵타포드의 언어밖에는 없어. 그래서 나는 주의를 기울이고, 그 어떤 세부도 놓치지 않을 작정이야.

나는 처음부터 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에 상응하는 경로를 골랐어. 하지만 지금 나는 환희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아니면 고통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내가 달성하게 될 것은 최소화일까, 아니면 최대화일까?

이런 의문들이 내 머리에 떠오를 때, 네 아버지가 내게 이렇게 물어.

“아이를 가지고 싶어?” 그러면 나는 미소 짓고 “응”이라고 대답하지. 나는 내 허리를 두른 그의 팔을 떼어내고, 우리는 손을 마주잡고 안으로 들어가, 사랑을 나누고, 너를 가지기 위해. (P229-230)

영화 컨택트 2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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