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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인어가 잠든 집>

영화 <인어가 잠든 집> 2018년

by 노용헌

《인어가 잠든 집》(人魚の眠る家)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2015년작 장편소설로, 작가의 데뷔 30주년 기념 작품이다. 딸의 뇌사라는 비극과 맞닥뜨린 부부의 충격적인 선택을 그린다. '죽음'을 판정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이며, '사랑'이라는 이유로 인간이 어디까지 시도할 수 있을지 묻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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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몹시 불던 날이었다.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평소처럼 걷고 있는데, 머리에 쓰고 있던 야구 모자가 뒤로 휙 날아갔다. 얼른 뒤돌아보니 모자가 담장을 넘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 저택의 담장이었다.

어쩌지, 소고는 생각했다. 인터폰을 눌러서 이 집 사람에게 주워 달라고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다가가 보니 평소에는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이 어쩐 일인지 살짝 열려 있었다. 마치 ‘어서 들어와’하고 말하는 듯했다. 무서운 문지기는 보이지 않았다.

소고는 조심조심 문을 밀어 보았다. 들키면 모자가 날아가서 찾으러 왔다고 말하면 되겠지 생각하면서.

대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다음 저택을 바라보았다. 외국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2층 건물이었다. 수영장은 없지만 마당이 무척 넓었다.

발밑에 평평한 돌을 깔아 만든 길이 있고 그 길 끝에 현관이 있었다. 거기서 시선을 옆으로 조금 돌렸을 때 모자가 보였다. 저택 벽 앞에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 벽에는 창문이 있었다.

누가 있지는 않을까 창문에 신경을 쓰면서 모자를 향해 다가갔다. 창문은 커튼이 열려 있어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창가에 빨간 장미가 꽂혀 있었다.

허리를 굽혀 모자를 주우면서 다시 한 번 창문을 힐끔 쳐다보았다. 몸을 쭉 뻗으면 안이 들여다보일 만한 높이였다. 창문 아래 서서 창틀을 붙잡고 발뒤꿈치를 천천히 들었다.

천장에 매달린 등이 보였다. 그리고 벽에 걸린 시계가 보였다. 조금 더 아래쪽을 보려고 목을 쭉 빼니 사람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깜짝 놀라 급히 목을 움츠렸다.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은 방금 본 사람이 어린 소녀였고 게다가 잠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다시 목을 쭉 빼고 보니, 역시 그랬다. 빨간 스웨터를 입은 소녀가 휠체어에 앉아 자고 있었다.

나이는 소고와 비슷해 보였다. 하얀 두 뺨에 분홍색 입술, 긴 속눈썹, 가슴이 희미하게 오르내렸다. 숨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왜 휠체어에서 자고 있지. 혹시 걷지 못하는 걸까.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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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택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아니 뭘 하다가도 불쑥 소녀의 모습이 뇌리에 떠올랐다.

다리가 불편하지는 않지만, 이라고 엄마인 듯한 여자는 말했다. 그런데도 걸을 수 없다는 건 도대체 무슨 뜻일까.

언제부터인가 그 소녀를 생각할 때마다 소고의 머릿속에는 인어 이미지가 떠올랐다. 인어는 걷지 못한다. 그래서 그 저택에서 소중히 보호받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정말로 그 소녀가 인어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있었던 때는 그 무렵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고는 ‘인어’를 떠올릴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소고가 다시 인어를 떠올린 것은 시간이 한참 흐른 후의 일이다. (P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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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도내 의료 기관에 근무하는데, 평일 오전 8시 대에 전철로 출근한다고 한다. 시력은 거의 없지만 길거리를 다니는 데는 별로 문제가 없는 듯했다.

이윽고 첫 번째 장애물이 나타났다. 종이 상자에 진로가 가로막혀 있다. 여성이 그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성과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데, 전방에 장애물이 있다는 사실을 흰 지팡이로 더듬지 않고 알아차린 것이다. 그 비밀은 고글에 부착된 카메라와 전극이 설치된 헬맷에 있었다. 카메라가 포착한 영상을 컴퓨터가 특수한 전기 신호로 처리해, 전극을 통해 여성의 뇌를 자극한 것이다. 물론 그것이 그녀가 영상을 그대로 인식했다는 뜻은 아니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평소에는 감지하지 못했던 뭔가가 떠오르는 듯한 감각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시각 장애인에게는 대단한 정보다. (P25)


5년 전 사장으로 취임한 가즈마사는 회사가 큰 전환기를 맞았다고 느꼈다. 이대로는 생존 경쟁에서 이기기 힘들며, 살아 남으려면 다른 기업과의 차별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냉정한 분석이었다.

그가 긴급 처방의 하나로 기대를 걸었던 분야는 자신이 기술부장이던 시절부터 주력해 온 브레인 머신 인터페이스, 약칭 BMI 부문이었다. 뇌와 기계를 신호로 연결해 인간의 생활을 혁신적으로 개선하려는 시도가 미래에는 반드시 주력 상품이 될 거라고 그는 확신했다.

BMI는 기본적으로 누구든 대상이 될 수 있지만, 그 효과를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는 데는 장애인을 지원하는 시스템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생각해 지금은 그 분야에 온 힘을 쏟고 있다. 조금 전에 실험이 있었던 인공 눈에 관한 연구도 그 일환이다. 여러 기업과 대학이 그와 비슷한 연구에 나섰지만, 하리마 테크는 그들보다 한발 앞서 나간 덕분에 후생 노동성으로부터 보조금을 얻어 내는 데도 성공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즉, 기업인으로서 하리마 가즈마사는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정의 일원으로서는 어떨지.

그는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다음 주 스케줄을 체크했다. 토요일 오후 1시에 ‘면접 놀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어른스럽지 못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면접 예행연습이라니, 가오루코도 하고 싶지 않을 터였다. 하물며 가즈마사와 사이좋은 부부 행세를 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겠지. (P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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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에서 온 전화예요. 긴급한 용건이라는데요.”

가오루코가 가즈마사의 얼굴을 힐끗 보더니 안내 창구로 뛰어가 수화기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몇 마디 주고받은 후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어디에요, 병원이? ..... 잠깐만요.”

가오루코는 창구에 비치된 뭔지 모를 팸플릿을 움켜쥐듯 집어 와 옆에 놓여 있던 볼펜으로 그 여백에 뭔가를 적어 넣었다. 가즈마사가 옆에서 들여다보니 병원 이름인 듯했다.

“알았어요. 병원 위치는 내가 알아볼게. .....응, 아무튼 곧장 갈게요.”

가오루코가 수화기를 사무원에게 돌려주면서 가즈마사를 바라봤다.

“미즈호가 수영장에서 물에 빠졌대.”

“물에 빠졌다고, 어쩌다가?”

“몰라. 일단 이 병원이 어디 있는지 알아봐.”

팸플릿을 가즈마사에게 넘겨준 후 가오루코는 면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채 가즈마사는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 검색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가오루코가 면접실에서 나왔다. (P39-40)


“미즈호가 안 보이길래 와카바한테 물었더니 갑자기 없어졌다고 했잖아. 그래서 부랴부랴 찾아 나섰는데 어떤 사람이 알려 준 거지.”

아아, 그래, 라고 하면서 치즈코가 얼굴 앞에서 두 손을 모았다.

“맞아, 그랬지. ...... 머릿속이 뒤죽박죽이구나.”

너무 놀라 기억이 엉킨 듯했다.

그다음은 미하루가 설명했다. 미즈호는 정확히 말해 물에 빠진 게 아니라 배수구 철망에 낀 손가락이 빠지지 않아 수영장 바닥에서 몸을 움직일 수 없었으며, 가까스로 손가락을 빼내고 물 밖으로 꺼냈을 때는 이미 심장이 멈춰 있었다고 한다. 즉시 구급차를 불러 이 병원으로 이송한 후 집중 치료실로 옮겨졌는데, 그 후의 상황이라고는 심장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밖에 모른다고 했다. 의사는 심장이 다시 움직인다고 해서 곧 소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미하루가 몇 번이나 가오루코에게 전화를 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면접 예행연습을 앞두고 가오루코가 스마트폰 전원을 꺼 놓았기 때문이다. 치즈코는 가오루코의 일정을 대강은 알고 있었지만 그 장소 등은 자세히 몰랐고, 미하루가 아버지에게 전화하자 아버지는 미즈호가 다니는 교실이 어딘지 안다면서 당신이 가오루코에게 연락할테니 미즈호를 잘 돌보라고 했다. (P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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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도 아주 특이한 법이죠. 다른 여러 나라에서는 뇌사를 죽음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뇌사라고 확인되는 단계에서 치료를 모두 중단합니다. 설사 심장이 움직인대도 말이죠. 그리고 장기 기증 의사를 밝힐 경우에만 연명조치를 합니다. 그런데 일본은 아직 거기까지 국민의 이해를 구하지 못한 터라 장기 기증을 승낙하지 않는 경우에는 심장이 정지되어야 사망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두 가지 죽음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죠. 제가 처음에 권리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 말은 따님을 어떤 형태로 보낼지, 그러니까 심장사와 뇌사 중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의사의 설명에 그제야 상황이 이해되는지 가오루코의 어깨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가즈마사를 보았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뭘 말이야?”

“뇌사에 대해서. 뇌사했다는 건 이미 죽었다는 뜻인가? 당신 회사에서 뇌와 기계를 연결하는 연구를 하고 있으니까 이런 것도 잘 알지 않아?”

“우리 회사에서는 뇌가 살아 있다는 전제하에 연구하는 거야. 뇌사한 경우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뭔가가 가즈마사의 머릿속을 퍼뜩 스쳤다. 그러나 그 뭔가는 확실한 형태를 이루기 전에 사라지고 말았다.

“가족이 장기 기증을 승낙하는 이유는 신체의 일부나마 이 세상에 계속 살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서인 것 같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싶다는 이유도 없잖아 있겠지만요.”

그러나, 하고 신도가 말을 이었다.

“승낙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받을 일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장기 기증은 권리입니다. 따라서 서둘러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P5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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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쓰로와 주고받은 대화를 되새겨 보았다. 나 자신의 장기라면, 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다시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키워드 몇 개를 인터넷 창에 입력해 봤다. 뇌사, 장기 제공 등의 단어였다.

금세 다양한 자료가 나왔다. 그중 내용이 있어 보이는 것을 골라 죽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자신들이 왜 이렇게 고심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장기 이식법이 개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는 환자 자신이 장기 기증 의사를 밝힌 경우에 한해 뇌사를 죽음으로 인정했다. 그러다가 본인이 의사를 밝힐 수 없는 경우 가족의 승낙이 있으면 되는 것으로 법이 개정된 것이다. 그에 따라 미즈호처럼 장기 의식과 관련된 지식이 없고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게도 법 적용이 가능해졌다.

뇌사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분분하지만, 본인이 장기 기증 의사를 밝힌 경우에는 본인의 뜻을 존중하면 되므로 가족으로서는 판단이 수월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 가족에게 판단을 강요하는 일이 과연 옳을까.

생각할수록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가즈마사는 스마트폰을 내던지고 일어서서 거실을 나섰다. (P7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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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가즈마사의 손바닥 위에 놓인 미즈호의 손이 움찔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한순간의 감각이라 움직였다고 확신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의 손바닥 위에는 미즈호의 손뿐만 아니라 가오루코의 손도 놓여 있었다. 가오루코의 움직임이 전해진 건지도 몰랐다.

가즈마사는 고개를 돌려 가오루코를 봤다. 그녀도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움직인 게 뭐지? 그렇게 묻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즈호의 손이 움직인 것처럼 느꼈는데 당신이 손을 움직인 거야? 미즈호의 손이 움직일 리 없잖아. 그렇지?

착각이야. 가즈마사가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쿠토가 갑작스레 부르는 소리에 감각이 혼란을 일으킨 것이다. 어쩌면 나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P92-93)


“살아 있어요. 죽지 않았습니다.”

“여보.......”

그녀가 가즈마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도 알잖아. 미즈호는 살아 있어. 살아 있는 게 틀림없어.”

그녀의 눈빛이 자신의 생각에 동의해 달라는 바람으로 가득했다. 부부가 이토록 진지하게 마주 보는 것이 몇 년 만일까.

그 애타는 바람을 가즈마사는 외면할 수 없었다. 아내의 마음을 받아 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지 않은가.

그가 이와무라를 보았다.

“죄송합니다만 돌아가 주세요. 장기 기증을 거부하겠습니다.”

이와무라는 일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신도를 봤다. 신도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와무라는 그대로 아무 말 없이 집중 치료실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신도가 가즈마사 부부에게 말했다.

“치료를 계속하겠습니다.”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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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I, 즉 브레인 머신 인터페이스.....

뇌와 기계의 융합이라니, 얼마나 꿈 같은 얘기인가. 가령 신체에 중대한 손상을 입은 사람이라도 뇌 기능만 살아 있으면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삶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 뇌 기능만 살아 있다면.

가즈마사는 부하 직원의 설명에 집중하자고 마음먹었지만,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미즈호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일이 바빠 면회를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될 수 있으면 잠시라도 틈을 내어 가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물론 면회를 간다고 해도 자신이 해 줄 것은 없고 그저 잠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P131-132)


“내 말은 의식 장애로 누워 있다든가 하는 환자는 없었냐는 뜻이야.”

“그게, 저........”

호시노는 가즈마사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빠르게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갸윳했다.

“확인해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아마 없을 겁니다. 의식이 없는 환자가 그토록 정밀한 페이스메이커를 사용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 장치는 환자가 일상생활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개발된 거니까요.”

“하지만 의식이 없는 사람에게 장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지?”

“그건......”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호시노가 마음을 정했다는 듯 가즈마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 그렇습니다. 혼수상태에 있는 환자에게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횡경막 페이스메이커를 작동하는 데 뇌에서 보내는 신호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하니까요.”

그의 진지한 눈초리를 보며 가즈마사는 부하 직원이 자신을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장 딸이 사고를 당해 식물인간 또는 그보다 위중한 상태일 수 있다는 소문을 대부분의 사원이 들었을 터였다. 호시노도 사장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짐작했기에 두툼한 파일을 들고 왔을 것이다.

“고마워, 얘기 잘 들었네.” (P14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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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이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 게이메이 대학 부속 병원에서 AIBS를 미즈호의 몸에 이식하는 수술을 했다. 가즈마사와 가오루코, 치즈코는 대기실에서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수술이 세 시간 정도 걸릴 거라는 사전 설명을 들었다.

기다리는 내내 장모 치즈코는 얼굴 앞에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수술이 성공하기를 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무엇이 성공일까.

물론 AIBS가 무사히 기능해 준다면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기관을 절개해서 인공호흡기를 장착하면 그만이다. 최근 미즈호의 상태가 안정적이어서 수술을 견딜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하고 결정한 수술이니 큰 사고가 없는 한 미즈호는 살아서 수술실을 나올 것이다.

살아서......

수술을 검토하고 있다고 얘기하자 주치의를 비롯한 모두가 똑같은 의문을 나타냈다. 뭘 위해서 그런 수술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인공호흡기로도 충분한데.

본인이 자발적으로 호흡하게 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데.

앞으로 며칠이나 살지 모르는데.

그럴 때마다 가즈마사는 대답했다.

“부모의 자기만족입니다.”

그러면 상대는 대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즈호를 그 상태로 살려 두는 것 자체가 부모의 자기만족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집도를 담당하는 게이메이 대학 연구 팀의 대응은 사뭇 달랐다. 그들이 이 수술로 미즈호의 인생에 커다란 변화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들의 연구에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기대하는 눈치였다. 협의 단계에서부터 미즈호를 환자가 아니라 실험 대상으로 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실패가 허용되는 실험이다. 가즈마사와 가오루코는 수술로 인해 미즈호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연구 팀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서약서에 사인했다. (P160-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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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요?”

“그런 일에 동조하는 거 말이야. 나도 장애가 있는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에 이 일을 하고 또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지만, 상대가 뇌사 환자라면 어떨지 모르겠어. 의식도 없고 회복할 가망도 전혀 없는 환자의 팔다리를 컴퓨터와 전기 신호로 움직이면 뭐 하겠어. 나는 프랑켄슈타인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밖에 안 들 것 같아.”

호시노가 선배의 얼굴을 외면한 채 대답했다.

“프랑켄슈타인은 의식이 있다는 설정일 텐데요.”

“그럼 프랑켄슈타인조차 못 되는 거지. 의식이 없는 사람의 몸을 이용해서 자기만족을 얻으려는 것뿐이야. 주모자는 사장 부인이고, 내 말을 들어서 나쁠 게 없어. 한시라도 빨리 손을 때는 편이 좋아.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그럴싸한 실험을 몇 개 하고 나서 ‘역시 무리입니다. 따님의 팔다리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될 거 아니야.”

호시노는 도중에 누군가 승강기에 올라타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승강기는 한 번도 서지 않고 곧바로 1층까지 내려갔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승강기에 내리고 나서 호시노가 선배에게 말했다.

“우리가 뇌가 내보내는 신호에 관여하는 연구를 하고는 있지만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전 세계 학자 누구도 몰라요. 그렇다면 그 부분은 건드리지 말고 요구에 부응하는 일만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요?” (P19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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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 대로예요. 딸의 팔을 움직인 거죠. 호시노 씨가 개발한 최신 기술을 이용해서요. 호시노 씨 덕분에 딸이 여러 근육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어요. 덕분에 건강도 되찾았고요. 이제는 골밀도도 거의 정상이에요.”

부인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하고 나서 덧붙였다.

“호시노 씨는 저희 은인이에요. 딸에게는 구세주이자 제2의 아빠죠.”

마오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 앉아 있는 소녀를 망연히 바라볼 뿐이었다.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나, 미안해요. 차를 마시자고 해 놓고서 아무것도 안 내왔네요.”

그녀가 방을 나갔다.

마오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식물인간 상태, 아니 뇌사라고 했던가. 그런 사람이 움직이다니. 부인은 ‘움직일 수 있게’ 했다고 표현했다. 그게 호시노의 일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는 이삼 일마다 이 방에 찾아와 소녀의 육체를 움직인다.

구세주로서, 제2의 아빠로서.

도대체 어떤 장치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소녀에게 한 걸음 다가갔을 때였다.

소녀의 오른손이 아까처럼 올라갔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등골이 오싹했다. 악,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왔다.

현관으로 가서 스니커즈를 신은 그녀는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대문을 향해 뛰면서 애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유야 씨, 저게 당신이 지키려는 세계야? 그 세계의 끝에 뭐가 있는데? (P241-243)


평소에 미즈호 몸에는 바이털 사인을 나타내는 기기가 몇 개 붙어 있었다. 요네카와 선생은 그중 혈압과 맥박 수, 호흡 빈도를 나타내는 기기에 주목했다. 미즈호의 몸이 무엇에 반응하는지 알아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의식에 장애가 있는 상태에서도 무의식의 의식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해요.”

요네카와 선생이 가오루코에게 말했다.

“식물인간 상태의 남자아이 귀에 대고, ‘깨어나면 스시를 먹으러 가자.’라고 매일매일 얘기한 여자아이가 있었답니다. 얼마 후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은 남자아이가 맨 처음 내뱉은 말이 뭔지 아세요? 스시를 먹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본인은 그런 얘기를 들은 기억이 전혀 없다고 하더래요. 굉장한 얘기 아닌가요?”

그러니까 설령 지금은 미즈호에게 의식이 없을지라도 무의식의 의식에 호소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P260-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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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는 하지만 시간을 낼 수는 있어. 이래 봬도 내가 사장이거든, 인맥을 동원하는 일에도 자신이 있고.”

“가도와키.......”

에토가 말을 잇지 못했다. 입술을 꾹 다문 그의 눈이 벌게지는 모습을 보며 가도와키도 가슴이 뜨거워졌다.

“나, 사실 그동안 내내 후회했어.”

가도와키가 말했다.

“그때 왜 축하한다고 말하지 못했을까 하고 말이야. 유카리 씨를 행복하게 해 달라고 왜 말하지 못했는지. 지금도 내 자신에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 네가 친척들만 초대한 채 결혼식을 치른 이유도 성대하게 하려면 야구부 동료들, 그중에서도 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어서 그랬잖아. 그 사실을 알고서 너한테 얼마나 미안했는지 몰라. 그러니까 내게 만회할 기회를 줘. 고통에 빠진 투수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포수뿐이란 말이야.”

미간을 찡그리고 가도와키의 말을 듣던 에토가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양쪽 눈머리를 꾹꾹 눌렀다. 잠시 후 고개를 든 그는 후, 숨을 내쉬고 나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모금을 생각했을 때 네 얼굴이 맨 먼저 떠올랐어. 솔직히 말하면 의논하고 싶었지. 하지만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어. 너에게만은 매다릴 수 없다고 말이야. 지금도 그런 마음은 마찬가지야.”

“아니, 잠깐, 나는.......”

들어 봐, 하며 에토가 가도와키를 제지하듯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매달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데,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어, 하지만 누구에겐가 매달리지 않으면 유키노는 살아날 가망이 없잖아. 그러니 이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야.” (P288-289)

"물에 빠지는 사고는 어떨까요?“

“물에 빠지는 사고요?”

“일본 최초의 심장 이식은 물에 빠지는 사고를 당한 청년이 기증자였어요. 그 청년처럼 마쓰모토 씨의 아들이 물에 빠져 의식 불명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죠. 몸에는 인공호흡기를 비롯해서 온갖 생명 유지 장치가 연결되어 있어요. 하지만 눈에 띄는 외상은 없어요. 그저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죠. 의사는 아마도 뇌사 상태일 것이다. 장기 기증에 동의하면 뇌사 판정을 내리겠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신쇼 후사코는 마치 그런 상황을 겪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거침없이 말했다.

마쓰모토 게이코가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은 채 턱을 괴었다.

“글쎄요, 어떻게 할까..... 뇌사 판정을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그대로 두겠죠. 실제로 뇌사했다면 언젠가는 심장이 멈춰서 통상적인 의미의 죽음을 맞게 됩니다.”

“판정 과정을 거쳐 뇌사가 아닌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지 않겠어요?”

“물론이죠. 그래서 판정 절차를 진행하는 거예요. 도중에 뇌사가 아니라고 인정되면 그 시점에 판정이 중지됩니다. 판정은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지고, 두 번째에도 뇌사가 확인되면 비로소 사망한 것으로 확정해요. 물론 그 후에 장기 기증을 철회해도 사망 판정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망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연명 치료도 하지 않고요.”

마쓰모토 게이코가 고개를 크게 기울이며 눈을 허공으로 향했다. 자신의 아이가 그런 상태가 되었을 경우를 상상하는지도 몰랐다.

어렵네, 하고 그녀가 중얼거렸다.

“살아날 가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런 생각은 할 필요가 없을 테고......”

“살아날 가망이 있다면 의사가 뇌사 판정 얘기를 꺼내지도 않아요. 그 말을 꺼냈을 때는 이미 손을 쓸 방법이 없어서 오직 죽음만을 기다리는 상태이기 때문이죠.”

신쇼 후사코의 목소리에 그녀답지 않은 짜증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외견상 상처가 없고 그저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대로 지켜보고 싶은 것이 부모의 심정 아닐까요?”

그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가도와키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쓰모토 게이코의 심정이 이해되는 것이다. (P306-307)


그때 에토가 “신쇼 씨” 하고 유카리의 말을 가로막았다.

“오해가 없었으면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저희는 누군가가 하루빨리 뇌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따위는 전혀 없습니다. 아내와도 의견 일치를 보았습니다. 돈이 모여서 미국에서 이식할 수 있게 되더라도 기증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지는 말자고요. 적어도 그런 말을 입에 담지는 말자고 했습니다. 기증자가 나타난다는 건 어딘가에서 아이 하나가 죽었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슬퍼할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식 수술은 ‘선의’라는 베풂을 받는 것이지 요구하거나 기대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뇌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간병을 계속하는 사람들을 비난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 아이 부모에게는 아이가 살아 있다고 여겨질 테니까요. 그 또한 소중한 생명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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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호의 수업을 인수인계할 때 그분과 마주 앉아 차분히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요. 그분이 그러더군요. 미즈호는 지금까지 맡았던 아이들과 전혀 다르다고요.”

“어떻게 다르다는 건가요?”

역시 식물인간 상태가 아니라 뇌사한 것이라고 말했을까.

“약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고요.”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식물인간 상태인 아이는 대개 팔다리의 근육이 거의 없거나 퉁퉁 부어 있어요. 욕창으로 인해 피부염이 생긴 경우도 많고요. 그래서 말할 수 없이 약해 보이니 마음이 참 아프죠. 그런데 미즈호 양은 그렇지 않다고 했어요. 근육이 탄탄하고 피부도 좋다고요. 건강한 아이가 그저 눈을 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예요. 아무리 첨단 과학이 동원된 결과라지만 참 건강해 보인다는 게 요네카와 선생님 얘기였어요. 그리고 저도 처음 미즈호 양을 봤을 때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게 어째서 문제인가요?”

신쇼 후사코가 고개를 저었다.

“문제는 요네카와 선생님 자신에게 있었던 거예요. 식물인간 상태의 아이들에게 그래 온 것처럼 미즈호를 대하다 보니 자신이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소리를 들려주고 몸을 만져서 바이털 사인에 약간의 변화가 있다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아이가 살아가는 데는 훨씬 더 신비한 무엇이 작용하는 것 아닐까. 자신이 하는 식으로는 이 아이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그렇게 고민하기 시작했대요.”

생각지도 못했던 얘기에 가오루코는 대꾸할 말을 잃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요네카와 선생을 오해한 것 같았다. 그녀가 무리를 했던 것이다.

“미즈호를 맡고 얼마 되지 않아 저 역시 요네카와 선생님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어요. 제가 할 일은 미즈호에게서 의학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다 싶었죠. 그렇다면 매주 한 번씩 여기 와서 뭘 해야 할까.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저 자신이 미즈호에게 해 주고 싶은 일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일이 책을 읽어 주는 것이었어요. 제가 읽어주는 이야기가 미즈호에게 들린다면 행복한 일이죠. 만약 그렇지 않다 해도 여기서 책을 읽으면 저는 마음이 아주 평온해집니다. 그런 제 마음이 어떤 형태로든 미즈호에게 전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어머니가 함께 들어 주신다면 제가 수업을 마치고 돌아간 다음 미즈호와 얘기를 나눌 재료가 될 거라고 생각했고요.”

여전히 억양 없는 말투였지만 신쇼 후사코의 목소리는 가오루코의 가슴속에 따스하게 울려 퍼졌다. (P344-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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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그만두라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더냐. 대체 어쩔 셈이야?”

다쓰로는 1년 넘게 미즈호를 보러 오지 않았다. 자기 자극으로 손녀의 손발이 움직이는 모습을 본 후로는 가오루코를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전기 장치라고 말한 일에 대해 표면상으로는 사과했지만 내심으로는 여전히 불쾌했던 모양이다. 다쓰로는 가오루코의 행위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딸의 몸을 도구로 삼는 것’이라고 했다.

“간병하고 있는 장본인은 가오루코예요. 제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습니다.”

“돈을 대는 사람은 네가 아니냐. 그렇게 오래 살려 둬서 도대체 뭘 할 작정이야? 이제는 단념할 때도 되지 않았니?”

“뭘 말입니까?”

“앞으로도 의식이 돌아오는 일은 없을 테지. 그렇다면 미즈호를 위해서도 보내 줘야 한다. 나는 이미 마음을 정리했다. 이제 그 아이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야.”

“아버지 마음대로 그 아이를 죽였단 말입니까?”

“그럼 그 아이가 살아 있다는 거냐? 정말 그렇게 생각해? 대답해 보거라.”

아버지가 다그치는데 가즈마사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런 사실이 스스로에게도 충격이었다. (P368-369)

“뇌사란 뇌의 모든 기능이 정지된 상태를 말합니다. 뇌사 판정은 그런 상태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절차고요.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명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뇌에 관해 모르는 부분이 많거든요. 어디에 어떤 기능이 잠재되어 있는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모든 기능이 정지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군요, 라고 가즈마사가 중얼거렸다.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뇌사라는 말은 장기 이식 때문에 만들어졌습니다. 1985년에 다케우치 교수를 필두로 한 후생성 뇌사 연구반이 뇌사 판정 기준을 발표했고, 그 이래 기준을 충족시키는 상태를 뇌사로 부르게 된 겁니다. 분명하게 말해서 뇌사가 뇌의 모든 기능이 정지된 상태와 동일한지는 불명확합니다. 그래서 판정 기준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뇌사를 인간의 죽음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대략 그렇습니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어 보이는군요.”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다케우치 기준은 인간의 죽음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 제공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는 기준일 뿐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연구반의 리더였던 다케우치 교수가 가장 중요시한 점은 포인트 오브 노 리턴, 즉 소생할 가능성이 있는가 없는가였습니다. 그래서 그 표현도 ‘뇌사’가 아니라 ‘회복 불능’ 또는 ‘임종 대기 상태’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장기 이식 문제를 진전시키고 싶었던 관리들로서는 ‘죽음’이라는 말을 꼭 넣고 싶었겠죠. 그 탓에 문제가 쓸데없이 복잡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장기 이식은 뇌사가 인간의 죽음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와 관계가 없다는 말씀인가요?”

“바로 그 점입니다.”

이제야 뜻이 통했다는 듯 신도는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죽음의 기준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인 문제를 끌어들이지 말아야 했어요. 어떤 조건을 충족하면 장기를 기증할 수 있느냐, 그 점에 포인트를 두어야 했죠. 물론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서 장기를 적출하는 행위를 법률로 인정하기는 쉽지 않겠죠. 그래서 우선은 ‘그 사람은 이미 죽었다’라고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이미 죽었다....... 그러니까 미즈호도 뇌의 일부 기능은 살아 있을지 모르지만 판정 기준에 비춰 보면 아마도 뇌사라는 판정이 나올 것이다. 즉 이미 죽은 것으로 인정된다. 그런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P380-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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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에 갔던 날의 일이 되살아났다.

왜 사고가 났는지는 자세히 기억하지 못한다. 미즈호가 물에 빠졌다는 것을 안 순간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켜서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억의 단편 중에는 확실히 남아 있는 것도 있다.

그 여름, 와카바는 비즈로 만든 반지를 끼고 다녔다. 유치원때 친했던 친구가 여름 방학에 들어가기 전에 준 것인데 와카바는 그 반지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수영장에 갔을 때도 반지를 낀 채로 헤엄쳤다. 미즈호도 반지를 보더니 예쁘다고 했다.

둘은 신나게 놀았다. 누가 물속에 더 오래 있나 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반지가 빠졌다. 어쩌다가 그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와카바가 물에 떠 있을 때 쏙 빠져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안돼! 하고 소리를 지르며 아카바는 허둥지둥 잠수했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미즈호도 따라서 물속으로 들어왔다. 반지를 빠뜨리는 모습을 봤을 것이다.

반지는 수영장 바닥에 있는 배수구 철망 위에 떨어져 있었다. 와카바가 부랴부랴 주우려 했지만 손에 잡히지 않았고 그 바람에 반지가 철망에 끼이고 말았다. 아무리 끄집어내려 해도 철망에 걸려서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미즈호가 옆에서 거들어 줬지만 마찬가지였다. 결국 와카바는 숨이 차서 물 밖으로 나왔다. 그 와중에 코에 물이 들어가고 말았다. 너무 아파서 코를 풀려고 와카바는 수영장을 벗어났다.

에이, 할 수 없지, 뭐, 하고 생각했다. 반지는 포기다. 친구에게는 미안하다고 사과해야겠다.

한숨 돌리고 나서 주위를 둘러봤다. 미즈호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참에 할머니가 달려왔다. 미즈호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데 그저 갑자기 없어졌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주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누군가 아이가 물에 빠졌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미즈호의 몸이 끌어 올려졌다.

그다음 기억은 희미하다. 다만 나중에, 수영장 바닥에 있는 배수구 철망에 미즈호 손가락이 끼여 빠지지 않았던 것 같다는 말을 듣고 겁에 질렸던 기억은 있다. 와카바가 숨이 차서 물 밖으로 나왔을 때 미즈호 역시 숨이 찼을 것이다. 그런데 손가락이 빠지지 않아서 올라오지 못한 것이다. 미즈호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자신이 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미즈호를 찾았더라면, 주위에 있는 누군가에게 미즈호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더라면......

병원에서 미즈호를 봤을 때는 깊은 구멍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실수가 사촌의 행복한 나날을 앗아 간 것이다.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와카바만의 비밀이었다. (P412-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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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가 가오루코와 가즈마사를 번갈아 보았다.

“아마 뇌사일 거라고 했을 뿐 정식으로 그런 판정이 있었던 건 아니죠? 그렇다면 아직 살아 있다는 전제하에 생각해야겠죠.”

“그럼 만약 제가 이 아이의 가슴에 칼을 꽂으면, 그래서 심장이 멈추면 제가 딸을 죽인 게 된다는 말씀이죠?”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딸을 죽게 만든 사람이 저란 말씀이죠?”

“그렇습니다.”

“확실한가요. 틀림없어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자 자신이 없어졌는지 와타나베가 의견을 구하듯이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부하들도 확신이 없는 듯 애매하게 고개만 갸웃거렸다.

만약, 하고 가오루코가 소리를 더 높였다.

“우리 부부가 장기 기증에 동의하고 뇌사 판정 테스트를 받았다면 뇌사로 확정되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법적으로 뇌사가 확정되었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도 딸을 죽게 만든 사람이 저일까요? 심장을 멈추게 한 사람은 저일지 몰라도 아이가 죽은 시점은 이미 오래전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도 죽인 사람이 저일까요? 이런 경우 무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는 거 아닌가요?”

차분히 얘기를 풀어 나가는 가오루코를 보며 가즈마사는 정말 머리가 좋은 여자군, 하고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표면적으로는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고는 무서우리만치 냉철하다.

관할 서에서 나온 경찰들의 우두머리는 완전히 압도된 표정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초조함과 낭패한 기색이 엿보였고 관자놀이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P436-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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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가 조금 넘었을 때 나도 모르게 눈을 떴어. 누가 부르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랬더니 미즈호가 옆에 서 있었어.”

가즈마사는 할 말을 잃었다.

물론 모습이 보인 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거기 서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미즈호의 말이 마음으로 전해졌다.

엄마, 고마워.

지금까지 고마웠어.

그리고 행복했어.

아주 행복했어.

고마워, 엄마, 정말 고마워.

헤어질 때다, 하고 가오루코는 깨달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슬프지 않았다.

그녀가 물었다.

“가는 거니?”

응, 하고 미즈호가 대답했다.

안녕, 엄마, 잘 지내.

안녕, 하고 가오루코도 인사했다.

그러자 한순간에 미즈호의 기척이 사라졌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가오루코는 침대에서 나와 미즈호의 몸으로 다가갔다. 불을 켜고 각종 바이털 사인을 확인했다.

모든 수치가 악화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부터 한숨도 자지 않고 지켜보았지만 호전되는 기미가 없었다. (P472-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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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이식만 하면 다시 기운차게 뛰어놀 수 있어.”

엄마의 말이 소고에게는 거짓말처럼 들렸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상황은 뻔했다.

심장을 이식하면 살 수 있다고 하지만 그건 누군가 심장을 기증했을 때나 가능한 얘기다. 게다가 일본에서는 어린아이의 장기 기증을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실정이다. 방법은 해외에서 이식하는 것뿐이다. 당시에 부모님이 걸핏하면 그런 대화를 나눴다.

엄청난 비용이 드는 데다 소고의 상태로는 장거리 여행을 하기도 힘들다고 아빠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하자 엄마가 가까스로 눈물을 참던 기억이 선명하다.

입원해서 반년쯤 지나자 소고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의식이 오락가락했고, 머리맡에서 누가 부르는 것 같은데 대답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죽나 보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죽는 것 아닐까 싶었다. 그래도 괜찮다는 마음도 있었다. 하루하루가 이렇게 괴롭고 부자유스러우며 아무런 즐거움이 없다면 살아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간신히 목숨은 붙들고 있었지만 위험한 상태에는 변함이 없었다. 죽음을 각오하는 나날이었다.

그러다가 기적이 일어났다.

장기 기증자가 나타나서 이식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든 것이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지만 사실이었다. (P503-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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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는 그 저택이었다.

아름다운 소녀가 휠체어에 잠들어 있는 집. 웬일인지 수술을 받은 후로 몇 번이나 그 집이 꿈에 나타났다. 거기서 누군가 소고를 부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가 보니 저택은 사라지고 없었다. 건물도 담장도 대문도 사라지고 공터만 남아 있었다. 아주 조그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그 저택이 환상이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소고는 한숨을 내쉬며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 어디선가 장미향이 풍겨 왔다.

또 그러네, 하며 걸음을 멈췄다. 수술 후로 자주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장미는 보이지 않았다.

소고는 가슴에 살며시 손을 댔다. 장미향은 이 심장의 원래 주인이 가져온 것 아닐까.

그리고 확신했다.

내게 소중한 생명을 준 아이는 깊은 사랑과 장미향에 둘러싸여 행복했을 거라고. (P506-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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