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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천공의 벌>

영화 <천공의 벌> 2016년

by 노용헌

『천공의 벌』은 국민을 볼모로 원전 파괴를 요구하는 헬기 납치범과 일본 당국 간에 벌어지는 피 말리는 심리전을 그린 걸작 서스펜스다. 헬기 탈취부터 사건 종료까지의 10시간에 걸친 숨 막히는 드라마를 676쪽 분량의 장편으로 형상화했다. 『천공의 벌』출간 이후 16년이 지난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후쿠시마 원전 사고라는 대재앙이 실제로 발생한 것.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이 사고는 각국에 원전에 대한 심각한 반성을 불러일으켰고, 독일 등 일부 국가는 원전 정책을 완전히 폐기하기에 이르렀다. 영화 제작 발표 당시 “원전의 금기를 건드려 영화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일본 내의 중론이었으나, 중견감독 츠츠미 유키히코가 이런 우려를 무릅쓰고 영화 제작을 강행했고 결국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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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키 중공업 고마키 공장 부지는 126만 7천 제곱미터다. 이곳에는 항공기 사업 본부라는 부서가 있었다. 이름 그대로 항공기에 관련된 연구를 하고 그 부품이나 제품을 제조하는 곳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사업 본부에서 하는 거래의 대부분은 무한에 가까운 자산을 보유한 두 개의 조직을 상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조직 중 하나는 방위청이고 다른 하나는 우주 개발 사업단이다.

조금 전 유하라가 경비에게 보여 준 ID카드에는 항공기 사업 본부 기술 본부 회전익기 연구 개발과라는 명칭이 인쇄되어 있다. 이 부서는 방위청이 주 고객으로, 신형 헬리콥터 개발이 주된 업무다. (P12)


타이머는 제대로 작동했다. 격납고 정문 개폐용 전자 스위치가 ON으로 바뀌었다.

모터의 굉음이 격납고 안에 울렸다.

다카히코는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다. 헬리콥터 쪽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웅 하는 모터 소리가 들리자 그저 반사적으로 헬리콥터에서 멀리 달아났다. 안에 있는 게이타가 뭔가 엉뚱한 짓을 저지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변화는 헬리콥터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다카히코는 주위가 갑자기 밝아진 것을 느꼈다. 옆쪽에서 강한 빛이 새어 들어와 거대한 헬리콥터의 회색 동체를 비췄다. 다카히코는 빛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격납고의 커다란 문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문틈으로 보이는 빛의 띠가 점차 굵어지다가 마침내 다카히코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광활한 비행장과 그 너머의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게이타, 빨리 나와!”

다카히코가 큰 소리로 헬리콥터 안에 있는 게이타를 불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기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다카히코는 자신이 방금 저지른 사소한 장난이 떠올랐다. 트랩이 헬리콥터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P27)


“이상하네, 아이들이 어디 갔을까?”

“정말.”

불안한 표정으로 마치코도 사방을 살폈다. 다음 순간 그녀의 눈이 한 지점에 정지했다.

“아쓰코 씨, 저기!”

그녀가 제3격납고를 가리켰다.

아쓰코도 그쪽을 보았다. 다카히코가 그녀들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쟤가 저기서 뭘......”

그녀가 말을 하다 만 것은 아들의 모습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다카히코가 엉엉 울고 있었다.

그녀도 다카히코 쪽으로 달려갔다.

“다카히코, 왜 그래? 게이타는?”

“게이타, 게이타가.....”

다카히코는 얼굴이 눈물로 범벅인 채 딸꾹거리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헬리콥터 쪽을 가리켰다.

“저기에 탔어.”

“뭐, 뭐라고?”

마치코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남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다카히코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어 댔다.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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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라와 야마시타가 연구소를 나왔을 때 헬리콥터는 이미 지상에서 약 100미터 상공에 있었다. 그러고도 계속 상승하는 중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대체 누가 조종하고 있는 거야?”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유하라가 소리쳤다. 거대한 헬리콥터는 역광을 받으며 창공의 까만 점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야마시타가 중얼거렸다.

“마치코가 왜 저기에......”

유하라도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았다. 야마시타 마치코가 제3격납고 옆에 서 있었다. 멀어서 표정은 알 수 없지만, 마치 유령이 휘청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 역시 헬리콥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유하라의 아내와 아들이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아들은 우는 것 같았다. 야마시타 게이타는 보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유하라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상상할 수 없지만, 아무튼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을 품고 그는 아내에게 달려갔다. (P34-35)

유하라는 훌쩍거리는 다카히코를 간신히 달래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조종석에 아무도 타지 않은 헬리콥터가 제멋대로 움직였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무슨 착오가 있어서 누군가가 예정에 없던 비행을 시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도 타지 않았다’는 아들의 말을 믿을 수 없어 조종사 대기실에 문의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출근한 조종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러나 유하라는 그 가능성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헬리콥터에는 야마시타의 아들이 타고 있다. 그러나 경솔하게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궁리 끝에 기술 본부장인 가사마쓰에게 연락하기로 했다. 가사마쓰는 회사 근처에 있는 자택에 있었다. 출근 전에 걸려 온 전화에 이미 좋지 않은 예감을 했는지 전화를 받을 때부터 무척 언짢아하는 목소리였다. 긴장하면 목소리가 그렇게 바뀌는 것은 이 상사의 버릇이다.

유하라는 최대한 간결하게 사태를 설명했다. 그런데도 가사마쓰는 그 내용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되묻고, 헬리콥터 안에 아홉 살짜리 아이가 혼자 있다는 점도 집요하게 확인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지? 헬리콥터가 제멋대로 움직이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P47)


“협박장입니다. ‘신양’에 전화를 걸어 확인해 봤는데, 단순한 장난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쪽에도 이것과 똑같은 협박장이 왔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가나야마가 책상을 꽝 내리쳤다. 관자놀이 위로 혈관이 꿈틀거렸다.

“대체 어떤 놈이 이따위 터무니없는 짓을......”

가나야마를 흥분하게 만든 문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손으로 쓴 것이 아니라 워드 프로세서로 작성한 것이었다.

관계자 여러분

우리는 자위대 헬기 ‘빅 B'를 접수했다. 우리의 계산이 정확하다면 헬기는 현재 고속 증식 원형로 ’신양‘의 상공 약 800미터 위치에 호버링(항공기 등이 일정한 고도를 유지한 채 움직이지 않는 상태)을 하고 있을 것이다.

헬기의 조종은 우리가 완전히 장악했다. 어느 누구도 헬기를 지금의 위치에서 이동시킬 수 없다. 그리고 우리도 지금으로서는 헬기를 이동할 생각이 전혀 없다. 다만 연료가 소비됨에 따라 기체가 가벼워진다는 점을 계산해 단계적으로 호버링 고도를 상승시킬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2천 미터에 이르게 될 것으로 예상한다.

그대로 시간이 흐르면 당연히 연료가 바닥나 헬기는 추락하게 된다. 참고로 말하자면 헬기에는 대량의 폭발물이 실려 있다. 만일 추락하는 날에는 ‘신양’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위험을 피할 방법은 단 한 가지. 다음 요구 사항을 수용하고 즉시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요구가 관철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후 헬기를 안전한 장소로 이동할 것이다.

-현재 가동 중이거나 점검 중인 원전을 모두 사용 불능 상태로 만들 것. 구체적으로 가압수형 원전은 증기 발생기를, 비등수형 원전은 재순환 펌프를 파괴할 것.

-현재 건설 중인 원전은 건설을 중지할 것.

-상기 작업 상황을 전국 네트워크의 텔레비전 방송으로 중계할 것.

단, ‘신양’을 정지시켜서는 안 된다. 정지시킬 경우 헬기는 그 즉시 추락할 것이다.

헬기는 현재 보조 탱크까지 연료가 꽉 차 있는 상태다. 우리의 계산으로는 오후 두 시경까지 비행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일각의 유예도 허용치 않는다. 관계자의 결단을 기대하겠다.

그리고 맨 마지막 줄에 ‘천공의 벌로부터’라고 돼 있었다. (P65-67)

영화 천공의 벌 01.jpg

“범인이 타고 있지 않은가 봐.”

“타고 있지 않다니요?”

나카쓰카는 자신도 모르게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각도 때문에 헬리콥터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누가 조종하고 있다는 겁니까?”

“컴퓨터가 하고 있다는군. 범인이 헬리콥터에 타지 않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거야.”

“어떻게.....”

갖가지 생각이 나카쓰카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중에서도 그가 맨 먼저 떠올린 생각은 헬리콥터가 추락한다 해도 범인 측에는 아무런 희생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실은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어.”

그러면서 쓰쓰이가 마치 확인 사살 하듯 쏟아 놓은 내용은 나카쓰카를 경악케 했다. 헬리콥터 개발 팀 연구원의 아이가 헬기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아이가? 설마요.....”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인 것 같아. 경찰청에서도 연락이 왔어.”

헬리콥터에 아이가 타고 있다. 그리고 기체는 범인이 원격조종하고 있다....

나카쓰카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일이 그렇게 됐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헬리콥터의 추락을 막아야 하네.”

쓰쓰이는 다짐하듯이 못을 박았다.

“그럼 범인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겁니까?”

“그럴 수야 없겠지만, 일이 여기까지 오면 우리가 나설 문제가 아니야. 정부에 맡기는 수밖에 없겠지.” (P88-89)


“아니, 별건 아닙니다만.... ‘벌’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좀 걸리는군요. ‘천공의 벌’요.”

그리고 야마시타는 의견을 구하듯 유하라를 봤다.

“흠. 그렇군.”

유하라도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차렸다.

“듣고 보니 그래.”

“무슨 말입니까?”

다카사카가 물었다.

야마시타는 다소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도난당한 헬리콥터의 정식 명칭은 CH-5XJ입니다. 하지만 개조 전의 CH-5XE와 구별하기 위해 저희는 ‘빅 B'라고 부르죠. 프로젝트 명이 ’B 시스템 프로젝트‘라서요.”

“그런데요?”

“그런데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벌’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벌이 영어로 bee잖습니까. 발음이 같으니까 일종의 은어처럼 사용하는 거죠.”

“그거 재미있군요.”

경위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그걸 아는 사람이 누구누굽니까?”

“특별히 비밀로 하고 있지는 않아서.....”

야마시타가 도움을 청하듯 유하라를 봤다.

“프로젝트에 관련된 사람들과 그 주변 사람이라면 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P104-105)

그건 그렇고. 범인은 왜 하필 ‘신양’을 노렸을까.

전국의 원전을 모두 사용 불능 상태로 만들라고 한 것을 보면 ‘신양’만 눈엣가시로 여기지는 않는 듯했다. 오히려 국가의 원자력 정책 전체가 공격 대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신양’을 타깃으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역시 일본 원자력 정책의 상징적인 존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나카쓰카는 생각했다.

고속 증식로는 현재 일본의 상업용 원전에서 채용하고 있는 경수로와는 여러 면에서 크게 다르다. 무엇보다 큰 차이는 연료일 것이다. 경수로에서 사용하는 연료는 우라늄 235라는 물질이지만 고속 증식로에서는 플루토늄 239라는 물질을 연료로 사용한다.

플루토늄을 사용하는 이유는 우라늄 235는 천연 우라늄 중에 0.7퍼센트밖에 포함돼 있지 않기 때문에 필요한 양을 항구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어서다. 천연 우라늄의 나머지 99.3퍼센트는 우라늄 238이라는 물질인데, 이 물질은 연료로서는 거의 쓸모가 없다. 지금 이 추세로 전 세계에 원자력 발전소가 늘어나고 우라늄 235가 지속적으로 연소된다면 앞으로 약 75년 후면 완전히 고갈된다는 것이 과학 기술청의 계산이었다. (P140-141)


“교수님은 ‘신양’의 안전성에 대해서 예전부터 의문을 품어오셨죠? 그래서 그와 관련된 글을 쓰시기도 했고요. 반원전이라고 할까요. ‘신양’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는 분들에게 많은 조언도 하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이번 사건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그런 분들과의 관련성을 느끼셨나요?”

“아니요.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우메미야는 단언했다.

“이런 방식은 반핵 반원전 활동을 하는 분들의 방침과는 정반대 차원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군요. 실제로 사건이 공표된 직후 몇몇 시민운동 단체가 ‘범인은 자신들과 무관한 인물’이라는 성명서를 각 경찰서로 보냈다고 하더군요.”

“네, 무관할 겁니다.”

우메미야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알겠습니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죠. 교수님은 이런 상황을 상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원자력 발전소에 항공기가 추락하는 상황 말입니다.”

앵커의 질문이 끝나기 전에 우메미야는 이미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원자력 설비 부근에는 항공기가 비행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으니까요.” (P177-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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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은 시민 단체 사람이 아닐 겁니다.”

취조가 일단락되자 자신에 대한 혐의가 풀렸다고 생각한 쓰치무라는 입 주위에 돋아난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저희는 원전이 얼마나 취약하고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원자력 계획 전체를 재고하자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굳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를 리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범인은 어떤 인물일 것 같습니까?”

“제 생각엔 의외로 원전에 관심이 없는 놈 아닐까 싶습니다.”

“새로운 가설이군요.”

“범인은 컴퓨터로 조종할 수 있는 헬리콥터를 훔쳐서 뭔가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그리고 세상이 떠들썩해질 만한 뭔가를 생각하던 끝에 원전에 주목했다. 그런 거죠.”

“쾌락 범죄라는 거군요.”

“원전 근처에 사는 사람이라면 이런 짓은 상상도 못할 겁니다. 아마 원전과는 아무 연관성 없는 도시 사람의 짓일 거예요.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무로부시는 굳이 반론을 펼치지 않았다.

“저는 도시 사람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라서요.”

쓰치무라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코를 벌름거리면서 숨을 크게 내쉬었다.

“반원전 운동에 참가하게 된 것 역시 도시인들에 대한 반발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니, 무슨 이유로......” (P202-203)


말하면서 세키네는 히죽거렸다.

“당연히 상대방은 화를 내지. 경찰까지 한통속이 돼서 일본을 원전으로 뒤덮으려 한다고 소리소리 지르고 말이야. 어떤 책에 핵연료 수송을 추적하는 얘기가 쓰여 있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거기서도 그런 방법으로 자신들을 따돌렸다면서 권력의 무서움을 체험했다고 하더군. 하지만 그건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우리는 딱히 원전 추진파를 편들려는 게게 아니야. 그렇지만 핵연료가 운반되고 있다면 일단은 그걸 지키는 게 우리 임무잖아. 반대 운동을 하는 건 좋지만 안전을 방해해서는 곤란하지.”

“반대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요.”

“그러니까 말이지. 개인의 주의 주장이란 건 별 의미가 없어. 자신이 서 있는 땅이 무슨 색인지에 따라 그 인간의 색도 결정되는 거야.”

“아하, 땅의 색이라.....”

세키네는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이번 사건의 범인이 서 있는 땅은 무슨 색일까요?”라고 물었다.

“글쎄, 무지개 색 아닐까?” (P304)


‘전문가들이 장담했던 건물들도 대지진이 발생하면 붕괴된다는 사실이 증명된 마당에 어떻게 ‘신양’은 절대 파괴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반대파들의 주장은 오직 그 한마디에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에도 하나오카 기획부장이 노연 측 대표로 나섰다. 하나오카는 늘 하던 대로, ‘신양’을 건설하기에 앞서 지질 조사를 충분히 실시했다. 건축 기준법의 세 배에 이르는 강한 지진에도 충분히 견딜 수 있는 구조다. 진도 5 이상의 흔들림이 감지됐을 경우에는 자동으로 제어봉이 삽입된다 등의 얘기를 하고 또 했다. 거기서 그쳤으면 좋았을 것을, 흥분한 나머지 그 어떤 지진이 와도 끄떡없다는 표현을 하고 말았다. 그것이 좋지 않았다.

‘그 어떤 지진에도’란 무슨 뜻인가, 한신 대지진급 흔들림에도 견딜 수 있다는 말인가 등등의 질문이 쏟아졌다. 이에 하나오카는, 지질 조사와 지반 조사의 결과로 추정할 수 있는, 해당 장소에서의 가장 심한 지진에도 견딜 수 있다는 의미라고 변명했지만 반대파의 공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한신 대지진의 매커니즘조차 해명되지 않은 마당에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그런 식이니까 당신들이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라며 매도에 가까운 말들을 해 댔다.

지진 대책 이외의 문제에 대해서도 결국은 이와 비슷한 설전이 벌어지고 말았다. 반대파는 ‘기술에 절대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백 프로 안전하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논지로 반론을 펴면서 그 어떤 과학적인 설명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기술에 절대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절대’에 근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과학 기술청이나 노연의 대표는 설명하려 한 것이었다.

하기야 일이 그렇게 돌아갈 것을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지만, 하고 나카쓰카는 당시를 회상했다. 서로의 이해를 넓힌다는 것이 모임의 명분이지만 반대파가 주최 측의 얘기를 곧이곧대로 들어 주리라고는 애당초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았었다. 원전의 안전성에 관해서라면 여태껏 수많은 장소에서 수없이 설명해 왔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단 말인가.

“‘신양’을 멈춰, 이 바보들아!”

회장에서 자신들에게 쏟아졌던 야유가 지금도 나카쓰카의 귓가에 맴돈다. (P334-335)


“뛰어내렸다!”

누군가가 공중을 보고 외쳤다. 유하라는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고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봤다. 새파란 하늘에 조그만 점 같은 회색 그림자가 보였다. 그 점은 차츰 크기가 커졌다.

“낙하산이 무사히 펼쳐진 것 같아.”

여전히 시선을 공중으로 향한 채 유하라가 말했다. 옆에서 그와 마찬가지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야마시타에게 한 말이었다.

“게이타, 게이타는요? 같이 있나요?”

“글쎄, 그건 아직 잘 모르겠어.”

“아니, 있습니다. 보여요.”

망원경을 들여다보고 있던 야가미가 외쳤다.

“대원 몸 앞에 꼭 붙어 있습니다. 이제 안심하세요.”

“그래요?”야마시타가 내쉬는 긴 한숨 소리가 유하라의 귓가에 닿았다.

잠시 후,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육안으로도 보였다. 야가미의 말대로 대원의 몸 앞에 게이타의 몸이 꼭 붙어 있었다. (P363-364)


“추적을 피하기 위해 그쪽으로 문서를 보낸다. 받는 대로 ‘신양’ 발전소에 전송하기 바란다. 아이가 구출된 것을 확인했다. 이것으로 우리에게는 희생자가 나오게 할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이번에는 당신들에게 그런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 밝힐 차례다. 즉시 국내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를 사용 불능 상태로 만들 것이며, 그 파괴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중계하기 바란다. 파괴된 원전의 발전 출력에 상응하는 만큼 헬리콥터를 현재 위치에서 멀어지도록 하겠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발전 출력 10만 kW당 1미터를 이동한다. 즉, 100만 kW급 원전 1기를 사용 불능으로 만들면 10미터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당초 모든 원전의 파괴를 희망했던 우리로서는 최대한 양보한 것이다. 부디 잘 생각하고 결단을 내리기 바란다. 천공의 벌” (P368-369)

“네, 원자로가 정지되면 협박의 효과가 줄어들 거라고 판단해서 그렇게 적어 보냈을 겁니다. 원자로가 가동되고 있는지 어떤지 판단할 방법은 애당초 없을 거예요.”

범인이 내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마에다 경비 부장의 말 때문인지 고테라는 다소 감정적이 돼 있었다.

나카쓰카는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경관 한 무리가 종합 관리동 뒤쪽으로 돌아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변압기 주변을 조사할 모양이었다.

실은 나카쓰카 역시 모니터 따위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변압기 팬이나 해수 방출구를 지켜볼 수 있다는 말도 정답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범인이 그렇게 안이한 수단을 선택하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범인이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 편지를 써 보낸 이상은 반드시 원자로가 정지된 것을 확인할 수단이 있을 거라고 나카쓰카는 확신했다.

그렇다면 그건 무엇일까. 각 분야의 관계자가 모여 있음에도 아무도 생각해 내지 못한, 그러나 범인은 찾아낸 맹점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나카쓰카는 침을 삼켰다.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범행을 저지하지 못할 것이다. (P394-395)


“범인에게 또 연락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컴퓨터는 왜......”

“우선 이걸 좀 보시죠. 이게 먼저 왔습니다.”

나카쓰카가 종이 한 장을 유하라에게 내밀었다.

먼저 왔다고? 그게 무슨 뜻일까 생각하면서 유하라는 그 종이를 들여다봤다. 팩스 용지였다.

‘노연 질문함에 메일을 한 통 보냈다. 속히 열어 보기를 권한다. 천공의 벌’

“이것뿐입니까?”

“네.”

“노연의 질문함이라는 게 뭡니까?”

“‘신양’을 비롯한 노연의 사업에 관한 질문을 받는 곳입니다. 전화나 팩스, 우편으로도 받지만 최근에는 컴퓨터 통신에도 전용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메일이라는 말을 사용했으니 아마도 그쪽이 아닐까 싶어서 확인했더니 이런 영상을 보냈더군요.”

유하라가 컴퓨터 모니터 앞으로 다가갔다.

선명한 빨강과 파랑으로, 채색된 복잡한 영상에는 군데군데 숫자가 적혀 있었다.

“서모그래피 같군요.”

유하라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나카쓰카가 대답했다.

서모그래피는 물체의 표면 온도 차를 색으로 표현한 것이다. 유하라도 업무에 사용한 적이 있어서 알고 있다.

“이건 어떤 곳의 지형인가요?”

유하라가 다시 질문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고테라가 유하라에게 얇은 책자를 건넸다. 팸플릿이었다. 고테라는 그 팸플릿에 인쇄돼 있는 도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도면은 ‘신양’의 구내 배치도였다. 유하라는 화면에 비치고 있는 도형과 도면을 비교해 봤다. 두 형상이 완벽히 일치했다. (P428-429)

영화 천공의 벌 05.jpg

생각 끝에 그녀는 한 가지 절충안을 찾아냈다. 여행 일정을 하루 늦추는 것이었다. 출발을 8일로 하고, 그때까지 아무 일도 생기지 않으면 안심하고 떠나기로 했다. 서둘러 여행사에 변경을 요청했더니 마침 나고야에서 출발해 간사이 공항을 경유하는 항공편에 자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오늘, 출발일이 됐다. 그런데,

아침에 준코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신양’ 사건을 알게 됐다. 사건의 규모가 너무 큰 탓에 그녀는 그것을 곧바로 자신과 연결지어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큰일이 일어났네.’하며 방관했다.

숨이 멎을 듯한 충격에 휩싸인 것은 도난당한 헬리콥터가 니시키 중공업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였다. 그것도 사건이 제3격납고에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저께 그녀가 미시마의 부탁으로 어떤 물건을 옮겨 놓은 곳이 바로 그 제3격납고 뒤였다.

게다가 원자력 발전소. 그 모든 것이 미시마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가 계획하던 일이 이것이었단 말인가?

한편으로 설마 하는 의구심도 있었다. 그가 이렇게 엄청난 일을 저지를 리 없다. 거짓말 같은 우연일 뿐이다. 그 역시 사건을 알고서 크게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몹시 주저하면서도 그녀는 여행 가방을 끌고 공항으로 나갔다. 여행을 떠날 기분은 전혀 아니었지만, 달리 뭘 하면 좋을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공항에 도착해서는 식사도 거른 채 도착 로비의 텔레비전의 앞에 앉아 있었다. 사건의 추이를 지켜본 후에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하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경과로 미루어 사건이 미시마와 무관하다고 단언할 만한 근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미시마의 그림자를 짙게 느낄 수 있는 사건이 하나 더 있었다. 아이의 구출에 범인이 협력한 것이다. 그가 늘 지니고 다니던 사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견디다 못한 그녀는 전화를 걸어 보기로 했다. 그로 인해 미시마와 헤어지게 된다 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휴대 전화의 전원이 꺼져 있었다. (P500-501)


미시마는 그들에게서 떨어져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신양’ 상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빅 B는 몇 시간 전과 거의 똑같은 위치에서 호버링을 계속하고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추락할 기미가 없다. 하기야 사이카의 말에 따르면 ‘기미가 보였을 때는 이미 추락이 시작된 것’이라고 하지만.

무사히 도망친 모양이군.

아슬아슬했다. 경찰이 이렇게 빨리 사이카를 찾아낼 줄은 몰랐다. 발각돼도 자신이 먼저 발각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경찰이 ‘사이카’라는 이름의 남자를 추적하고 있다는 말을 유하라와 이마에다의 대화에서 듣고 급히 그에게 연락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계획이 전부 물거품이 됐을 것이다.

적어도 오늘 하루는, 아니 앞으로 한 시간이면 되니까 그동안만은 잡히지 않기를 그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파트너에게 바랐다. 사이카의 행방에 관해서는 그도 전혀 짚이는 바가 없었다.

실은 미시마도 그 남자의 본명조차 알지 못했다. 사이카라는 이름도 가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름도 당연히 가짜일 것으로 믿고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 알게 된 것은 올 1월이었다. 미하나 발전소 증기 발생기 교환을 위해 미시마가 미하마 마을에 간 지 반년이 지났을 때였다. 그날 그는 기후 시 노동 회관에서 열린 한 집회에 참석했다. 원전 말단 노동자들의 피폭 위험성을 호소하는 집회였다. 당시 미시마는 자기 나름의 이유로 반원전 관련 집회가 있으면 기회가 닿는 대로 참석하곤 했다. 그날 집회에서는 백혈병으로 사망한 한 원전 근로자의 형과 어머니가 그 근로자의 죽음을 노동 재해로 인정해 달라는 서명 운동을 펼쳤다. (P528-529)


어리석은 망상이다. 잘될 리 없잖아. 분명 내 인생이 파탄 날 거야.

아니야. 성공이 목적이 아니다. 실행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 며칠 동안 미시마의 마음은 계속 갈팡질팡하며 안절부절못했다. 결단을 내린 것은 사이카의 집을 찾은 지 엿새째 되는 날이었다. 그는 방에 놓여 있는 아들의 영정을 보며 결심했다.

그다음 날, 미시마는 사이카의 아파트를 다시 찾았다. 사이카는 집에 있었다. 미시마를 보고 얼핏 놀라는 눈치였지만 아무말 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일은 잘돼 가나?”

탁자 위를 보면서 미시마가 물었다.

“웬일이야?”

사이카는 마뜩잖은 표정이었다.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실은 제안할 게 있어서.”

“제안이라고, 뭔데?”

“당신이 계획에 나도 끼워 주면 안 될까?”

사이카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는 얼굴로 미시마를 보았다.

“무슨 뜻이지?”

미시마는 며칠 동안 생각한 것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CH-5XJ를 고속 증식 원자로 ‘신양’에 추락시키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빅 B를 원전 상공에서 호버링하게 하고 정부를 협박한다. 그 대단한 사이카도 놀라는 눈치였다. 그와의 만남에서 미시마가 심리적으로 우위에 선 것은 딱 이때뿐인지도 몰랐다.

“당신은 왜 그런 짓을 하려는 거지?”

사이카가 물었다.

“그쪽은 어떤데, 왜 그 헬리콥터를 갖고 싶어 하지?” (P556-557)


“안타깝게도 그렇게는 되지 않습니다.”

“왜죠?”

“가령 조종사가 사이클릭 스틱을 움직였다고 해 보죠. 센서는 그걸 감지해서 그 변위량을 전기 신호로 바꿉니다. 그 전기 신호가 다시 디지털 자료로 바뀌어 컴퓨터로 보내지는 것인데, 범인은 아마도 센서에서 나오는 배선을 절단하고 전기 신호를 보내는 장치를 따로 부착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 기계로 조종할 수 있도록 했겠죠. 다시 말해 조종간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는 현재 죽은 상태입니다. 그리고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그 센서가 신호를 보내지 않으면 자동 조종을 해제하는 건 불가능합니다.”“센서가 작동하지 않으니 해제도 할 수 없다?”

나카쓰카의 물음에 유하라는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런!”

이마에다 경비 부장이 옆에 있는 책상을 쾅 내리치며 내뱉듯 말했다.

“그럼 뭡니까. 이 기계는 이제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 아닙니까.” (P596)

영화 천공의 벌 06.jpg

“왜 원전 같은 게 존재하는 걸까요.”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아서겠죠. 미시마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 말에 구타니는 약간 거북한 표정을 지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미시마의 마음에 변화가 생겼다. 구타니 료스케를 동정해 도모히로의 일을 용서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일단 구타니 료스케가 아들을 괴롭힌 주범이라는 증거가 없었다. 그리고 누가 그 일에 가담했는가는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료스케의 고통이나 도모히로의 죽음이나 그 원인은 같은 것에 있지 않을까. 둘 다 피해자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그 피해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런 생각을 하던 미시마에게 한 가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집단 괴롭힘이 있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도모히로와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을 만났을 때 보았던 그 가면 같던 얼굴들.

아이들만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다수의 사람들이 어른이 돼서도 가면을 벗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침묵하는 군중’을 형성한다.

미시마는 답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도모히로는 그들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투쟁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미시마는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침묵하는 군중의 저 섬뜩한 가면을 향해 돌 하나라도 던질 수 있을까.

사이카를 만난 것은 바로 그즈음이었다. (P632-633)


빅 B.

기수에 붙어 있는 카메라와 해석 장치는 여전히 범인들의 계획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 시야에는 지금도 변함없이 ‘신양’ 발전소 전체의 모습이 들어와 있고, 그중에서도 가장 의미 있는 부분. 즉 방수구와 취수구의 해수 온도를 샘플링 하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었다.

오후 2시 33분이 조금 지났을 무렵 그 데이터에 변화가 나타났다. 해석 장치가 출수구와 입수구의 온도 차를 계산한 결과, 그 수치가 순식간에 제로에 가까워진 것이다. 그 순간 해석 장치가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그 신호는 케이블로 전해져 자동 조종 장치의 엔진 제어 회로로 보내졌다. 그리고 컴퓨터는 엔진을 정지시켰다.

UH-60J.

원자로가 정지됐다는 정보가 즉시 네가미 기장에게 전달됐다. 유하라는 그보다 조금 전에 조종기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때는 아직 빅 B의 자동 조종이 해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하라의 행위는 빅 B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원자로가 정지될 때부터 빅 B에 추락 신호가 송신될 때까지 몇 초간은 여유가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다. 해수의 온도가 그토록 급격히 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변화는 생각보다 급격히 찾아왔다. 순식간에 빅 B의 로터 회전수가 달라지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벌써 그 거대한 기체가 급강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엔진이 정지됐다고 외칠 틈조차 없이 유하라는 재빨리, 그러나 신중하게 조종기 레버를 조작했다.

빅 B의 로터는 아직도 회전하고 있었다. 밑에서 부는 바람 덕분이다. 빅 B가 균형을 잃지 않고 오토 로테이션 상태를 유지하려면 날개가 바람과 맞부딪치는 각도를 적절하게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유하라는 균형을 무시하기로 했다. 일단 지금은 조금이라도 헬기를 현재의 위치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었다. 유하라는 사이클릭 스틱에 해당하는 레버를 열심히 움직였다. 그러나 무선 조종기를 처음 다뤄보는 유하라로서는 요령도 무엇도 없이, 다만 실물을 보고 무엇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확인하면서 조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빅 B의 기체가 점점 크게 다가왔다.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래를 향해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스듬히 떨어지고 있었다. 로터 면의 각도가 변한 것이다. 성공이다, 라고 유하라는 생각했다. 엔진이 정지되고 나서 불과 5초밖에 되지 않는 시간이 그에게는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P664-666)


하이키 마을 어항.

폭발이 일단락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신양’ 직원들은 물론, 경찰 관계자와 자위대원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아니, 그런데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공중에서 갑자기 폭발이 일어났을 때는 간담이 서늘했어요.”

고테라가 야마시타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오토 로테이션으로 인해 헬기의 낙하 속도가 느려지는 걸 범인이 원치 않았던 거죠. 그래서 연료가 떨어지거나 적외선 열화상 장치의 명령으로 엔진이 정지되는 시점에 로터가 부서지도록 기어 박스에 작은 폭탄을 설치한 겁니다.”

“범인이 거기까지 생각해 뒀군요.”

“네, 그런데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폭탄에 신호가 약간 늦게 전달된 것 같습니다. 그 틈에 유하라 씨가 조종기로 로터 면의 각도를 바꾸어 헬기의 낙하 위치가 빗나간 겁니다.”

“맨 마지막 순간에 범인의 계산이 어긋났군요.”

고테라는 다시 한 번 바다를 봤다. (P669-670)


아이러니한 것은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고속 증식 원형로가 우리의 계획에서는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됐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원자로가 하나의 얼굴만 지닌 것이 아니라는 증거다. 원자로는 다양한 얼굴을 지녔다. 인류에게 미소를 보내는가 하면 송곳니를 드러낼 수도 있다. 미소만을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다.

다시 한 번 말한다. 침묵하는 군중이 원자로의 존재를 잊도록 해서는 안 된다. 항상 의식하고, 스스로의 길을 선택하도록 하라.

어린아이는 벌에 쏘이고 나서야 벌의 무서움을 안다. 이번 일이 교훈이 되기를 빈다.

다이너마이트가 항상 열 개에 그치리라는 보장은 없다.

천공의 벌 (P674-675)

영화 천공의 벌 07.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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