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테이션 일레븐> 2021년
《스테이션 일레븐》(Station Eleven)은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의 2014년작 장편 SF 소설이다. 독감 바이러스가 지구를 휩쓸어 인류가 거의 절멸한 후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셰익스피어 유랑극단이 겪는 이야기를 다룬다. 아서 C. 클라크상을 수상했고, 조지 R. R. 마틴, 얀 마텔 등이 이 작품을 호평하였다.
[극장]
왕은 푸른 조명이 만들어낸 동그라미 안에 홀로 서 있었다. 겨울 밤 토론토의 엘긴 극장에서 상연되고 있는 <리어 왕> 4막, 왕이 실성하는 장면이다. 조금 전, 관객들이 입장하는 동안 무대 위에서 손뼉을 치며 놀던 어린 공주 역 여자아이 세 명은 지금 환영으로 돌아와 있었다. 왕이 손을 뻗으며 비틀비틀 다가가자 소녀들은 그늘 속에서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리어 왕 역할을 맡은 배우는 51세의 아서 리앤더로, 머리에 꽃을 꽂고 있었다.
“저를 아시겠습니까?” 글로스터 역의 배우가 물었다.
“네 눈은 잘 알지.” 아서가 어린 코딜리아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바로 그때였다. 그의 표정이 변하더니 몸이 휘청했다. 기둥을 잡으려고 팔을 뻗었지만 거리를 잘못 가늠했는지 손 옆면이 기둥에 세게 부딪쳤다.
“허리 아래로는 켄타우로스여.” 아서가 말했다. 엉뚱한 대사였을 뿐만 아니라 쌕쌕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려서 잘 들리지도 않았다. 그는 날개가 부러진 새를 쥐듯 손을 살짝 오므려서 가슴에 가져다 댔다. 에드거로 분한 배우가 그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아직 연기하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상황인데, 오케스트라석 맨 앞줄에서 한 남자가 일어섰다. 응급구조사가 되려고 교육을 받는 사람이었다. 여자친구가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질책했다. “지반! 뭐하는 거야?” 지반도 처음에는 자기가 뭘 하려는 건지 깨닫지 못했다. 뒷줄에 앉은 관객들이 앉으라고 속삭였다. 좌석안내원이 그를 향해 걸어왔다. 무대에서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굴뚝새도 그 짓을 한다.” 아서가 중얼거렸다. 그 희곡을 달달 외울 만큼 잘 알고 있는 지반은 그가 열두 줄 앞의 대사를 다시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굴뚝새도.....”
“선생님.” 좌석안내원이 지반을 불렀다. “죄송하지만......”
아서 리앤더를 살릴 수 있는 골든타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의 눈은 초점을 잃었고 몸은 흔들렸다. 그가 더 이상 리어 왕이 아니라는 사실이 지반에게는 분명히 보였다. 지반은 좌석안내원을 밀치고 무대로 연결된 계단을 향해 뛰어갔다. 하지만 다른 좌석안내원이 복도를 달려오고 있어서 계단을 포기하고 그냥 무대 위로 몸을 던졌다.
무대는 생각보다 높았다. 처음 그를 불렀던 좌석안내원이 옷소매를 붙잡는 바람에 발로 차서 뿌리쳐야 했다. 이 눈, 비닐로 만든 거네. 그 순간 지반이 한 생각이었다. (P10-11)
“모르겠어, 지반. 짧게 대답하자면 그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어. 독감이야, 지반. 그것만큼은 확실해. 근데 이런 건 처음 봤어. 너무 빨라. 전파력이 너무 빨라서.....”
“상황이 악화되고 있어?”
“응급실이 환자들로 넘쳐나고 있어.” 후아가 말했다. “그게 문제야. 왜냐면 지금 응급실 의료진 중 절반 정도가 너무 아파서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거든.”
“환자들한테서 옮은 거야?”
프랭크의 아파트 건물 로비에서 야간 경비원이 신문을 뒤적이고 있었다. 경비원 뒤쪽 벽에는 회색과 빨간색으로 그린 추상화가 조명등 불빛을 받고 있었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로비 바닥에 경비원과 추상화가 기다린 줄무늬 형상으로 반사되어 보였다.
“잠복기가 이렇게 짧은 건 처음 봤어. 방금 환자 하나를 진료했는데, 우리 병원 잡역부야. 오늘 오전에 첫 환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근무하고 있었는데 한두 시간 지나니까 몸이 아프더래. 그래서 조퇴하고 집에 갔다가 두 시간 전에 남자친구가 차에 태워서 데려왔어. 지금은 사소 호흡기를 달고 있고 일단 노출되면 몇 시간 안에 증상이 나타나.”
“병원 밖으로 퍼질 거라고 생각해?” 침착함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아니, 이미 병원 밖에 퍼져 있어. 이건 대유행 단계에 접어든 전염병이야. 여기 우리 병원에 퍼지고 있다면, 도시 전역에 퍼지고 있다는 뜻이지. 이런 전염병은 본 적이 없어.” (P32-33)
“미란다, 아서가 어젯밤에 심장마비로 죽었어요.” 바다 위에 떠 있는 불빛이 흐릿해지더니 빛의 동그라미가 서로 겹쳐지며 한 줄로 늘어섰다. “정말 유감입니다. 이 소식을 뉴스를 통해 알게 하고 싶지 않아서 전화했어요.”
“얼마 전에 만났는데요.” 그녀가 말했다. “2주 전 토론토에서요.”
“받아들이기 힘들 겁니다.” 그가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충격이죠, 정말……. 우린 열여덟 살 때부터 친구였어요. 나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요.”
“어쩌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건가요?” 그녀가 말했다.
“실은, 음…… 불쾌하게 듣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실은 이런 게 아서가 원하던 죽음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무대에서 죽었거든요. 〈리어 왕〉 4막 중간에, 급성 심장마비로요.”
“연기하다가 쓰러졌다고요?”
“네. 관객 중에 의사가 두 명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고 급히 무대로 뛰어 올라가서 아서를 구하려고 애써봤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하네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사망이 선언되었답니다.”
이렇게 끝이 날 수도 있구나. 통화가 끝나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렇게 시시한 결말이라니. 그러자 마음이 진정되었다. 한때 함께 늙어갈 거라고 생각했던 남자가 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머나먼 타국에서 전화 한 통으로 알게 될 수도 있는 거였다.
근처의 어둠 속에서는 스페인어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배들은 여전히 수평선 위에서 빛을 발했고, 여전히 바람 한 점 없었다. 뉴욕은 아침이겠지. 그녀는 클라크가 맨해튼에 있는 자기 사무실에서 수화기를 내려놓는 모습을 상상했다. 전화기 버튼 몇 개만 누르면 지구 반대쪽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었던 시대의 마지막 달에 일어난 일이었다. (P44-45)
사라진 것들의 목록:
바닥에서 초록색 불빛이 올라오는 수영장의 염소 처리된 물속으로 다이빙하는 일. 야간 조명등 아래에서 하는 야구 경기. 여름밤 나방이 몰려들던 현관 등. 엄청난 전력을 소비하며 도시 아래를 달리던 지하철. 도시. 영화. 다만 아주 드물게, 발전기를 돌리느라 대사가 절반 이상 안 들리는 영화를 볼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연료가 완전히 소진되기 전까지였다. 자동차 연료는 이삼 년 지나면 오래되어 못 쓰게 되었고, 비행기 연료는 좀 더 오래가지만 구하기가 어려웠다.
콘서트 무대를 찍기 위해 사람들이 머리 위로 휴대전화를 들어올릴 때 어스름 속에 빛을 내뿜던 액정화면. 다채로운 할로겐 조명이 밝혀주던 화려한 무대, 전자음악, 펑크록, 전기 기타.
의약품. 손을 살짝 긁히거나 저녁을 차리려고 야채를 썰다가 손가락을 살짝 베이거나 개한테 물렸을 때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확신.
비행. 하늘에서 여객기 창문을 통해 반짝이는 불빛이 수놓인 도시들을 내려다보는 일. 10킬로미터 상공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며 그 시각 불을 밝히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상상하는 일. 비행기. 좌석 테이블을 접어서 잠가달라는 요청. 아니, 사실 비행기는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활주로와 격납고에, 잠든 채로. 날개에는 눈이 쌓여갔다. 겨울에 비행기는 식품저장고로 안성맞춤이었다. 여름이면 과수원 근처에 있는 비행기는 더위에 말라버린 과일을 담은 쟁반들로 가득 찼다. 10대들은 그 안에 숨어들어가 섹스를 했다. 녹이 꽃처럼 활짝 피고 줄줄 흘러내렸다.
국가. 국경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방서와 경찰. 도로 보수 작업과 쓰레기 수거 작업. 케네디 우주센터와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와 반덴버그 공군기지, 플레세츠크 우주기지, 다네가시마 우주센터에서 발사되어 솟아오르던 우주선. 그 우주선이 대기층을 통과하며 만들어내던 불꽃.
인터넷. 소셜 미디어. 화면을 스크롤하며 지루하고 장황한 꿈 이야기와 불안한 희망과 음식 사진과 자살 예고와 자기 자랑과 하트 아이콘으로 된 연애 상태 업데이트와 곧 보자는 말과 각종 청원과 불평과 욕망과 할로윈에 곰이나 피망 모양의 옷을 입힌 아기들 사진을 보는 일. 다른 사람의 삶을 읽고 댓글을 다는 일. 그럼으로써혼자가 아니라고 느끼던 일. 아바타. (P46-47)
[한여름 밤의 꿈]
독감이 핵폭탄처럼 지구 표면을 강타한 후 충격적인 문명의 몰락이 이어졌다. 입에 담기조차 힘든 처음 몇 년 동안 사람들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아무리 걸어도 과거와 같은 삶이 지속되고 있는 곳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다들 정착 가능한 곳을 찾아 정착했다. 그들은 안전을 위해 화물트럭 휴게소나 대형 레스토랑, 낡은 모텔 같은 곳에 함께 모여 살았다. 유랑악단은 완전히 바뀐 세계의 정착지들을 돌아다녔다. 악단이 처음 결성된 것은 문명이 몰락하고 5년이 지나서였다.
지휘자가 군악대에서 근무하던 동료 서너 명을 모았고, 그들은 그때까지 살던 공군기지를 떠나 미지의 풍경 속으로 길을 떠났다. 그때쯤엔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딘가에 정착했는데, 문명 몰락 후 3년이 되자 휘발유가 다 못 쓰게 된 데다 계속 방랑만 하고 다닐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을에서 마을로 옮겨 다닌 지 6개월이 흐른 후 --네다섯 가족이 화물트럭 휴게소였던 곳에 모여 사는 것도 마을이라고 부를 정도로 ‘마을’이라는 단어는 막연하게 사용되었다-- 지휘자가 이끌던 교향악단은 길이 이끌던 셰익스피어 극단을 우연히 만났다. 단원들은 모두 시카고에서 도망친 사람들로, 몇 년 동안 농장을 일구다가 3개월 전부터 여기저기를 전전하던 중이었다. 교향악단과 극단은 전격적으로 합병했다.
문명이 몰락하고 20년이 지난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길 위에 있었다. (P53)
아서 리앤더가 커스틴에게 준 만화책은 <닥터 일레븐 1권 1호: 스테이션 일레븐>과 <닥터 일레븐 1권 2호: 추격>인데 악단의 다른 단원들은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시리즈였다. 문명 몰락 후 20년이 되었을 무렵 커스틴은 이 두 권을 몽땅 외우다시피 했다.
닥터 일레븐은 물리학자다. 그는 작은 행성과 유사하게 설계된 첨단 우주정거장에 산다. ‘스테이션 일레븐’이라는 이름의 그 우주정거장에는 깊고 푸른 바다와 바위섬들이 있으며 섬들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수평선에는 두 개의 달이 떠 있고 하늘에는 붉은 노을이 진다. 문명 몰락 전에 인쇄업에 종사했던 콘트라바순 연주자는 커스틴에게 이 만화책은 인쇄 질이 아주 좋고 기록용 보관용지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대량 생산된 것이 아니고 누군가가 사비를 들여 출간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누군가가 누구였을까? (P59)
문명의 종말은 거의 모든 것과 거의 모든 사람을 앗아갔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들은 아직 남아 있다. 바뀐 세상의 황혼녘 풍경, 물가의 세인트데버러라는 수수께끼 같은 이름을 가진 마을에서 상연되고 있는 〈한여름 밤의 꿈〉, 80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반짝이는 미시간 호. 요정 여왕 티타니아로 분한 커스틴은 짧게 친 머리에 꽃으로 만든 왕관을 썼다. 광대뼈에 난 들쭉날쭉한 모양의 흉터는 촛불 때문에 흐릿하게 보인다. 관객들은 말이 없고, 사이드는 커스틴이 이스트조던이라는 마을 근처의 어느 집 벽장에서 찾아낸 죽은 남자의 턱시도를 입고 그녀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다. “멈춰라, 이 뻔뻔하고 난잡한 여자야. 내가 남편이거늘.”
“그렇다면 난 부인이거늘.” 셰익스피어가 1594년, 두 계절에 걸친 전염병이 지나가고 난 뒤 런던 극장들이 다시 문을 열었던 해에 쓴 대사다. 어쩌면 그다음 해인 1595년에, 셰익스피어의 외동아들이 죽기 1년 전에 쓴 것인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몇 세기 뒤 바다 건너 다른 대륙에서 커스틴은 분노와 사랑에 갈팡질팡하며 구름을 그린 천이 배경으로 걸려 있는 무대 위를 돌아다닌다. 뉴페토스키 근처의 어느 집을 뒤져서 찾아낸 시폰과 실크로 된 웨딩드레스에는 파란색 수채화 물감 자국이 있다.
“당신은 어디서건 우리가 모여 바람에 맞춰 춤을 추려고 하면 방해를 했죠.” 커스틴은 이렇게 무대 위에 있을 때 가장 생기가 넘친다. 무대에서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헛된 반주에 성난 바람은 독기 가득한 바다 안개를 대지 위에 뿜어대고…….”
대본에는 ‘독기 가득한’ 옆에 ‘역병 같은’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다. 유랑악단이 갖고 있는 세 가지 판본의 대본 중 커스틴이 제일 좋아하는 판본이다. 셰익스피어는 셋째로 태어났지만 유아기가 지난 뒤 첫째가 되었다. 형제자매 네 명이 어렸을 때 죽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 햄넷은 열한 살 때 죽었고 쌍둥이 딸만 남았다. 극장들은 전염병 때문에 문을 닫았다 열었다를 반복했다. 전역에서 죽음이 두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전기의 시대가 왔다 가고 다시 한 번 촛불로 불을 밝힌 황혼녘에, 티타니아가 돌아서서 요정의 왕을 마주본다. “홍수 관리자, 노기 띤 달의 파리한 얼굴, 습해진 공기, 도처에 깔린 신경통 환자.”
오베론은 수행원인 요정들과 함께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 이제 티타니아는 오베론을 잊고 독백하듯 말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말없는 관객들과, 무대 왼쪽에서 조용히 큐 사인을 기다리고 있는 현악 파트 덕분에 높고 선명하게 들린다. “이 같은 날씨 이변에 계절도 뒤죽박죽이 되었죠.”
악단의 마차 세 대 모두 양면에 흰색 페인트로 ‘유랑악단’이라고 적혀 있는데, 선두 마차에는 한 줄이 더 적혀 있다. ‘생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P80-81)
“나의 백성들이여.” 예언자가 말했다. “나는 오늘 독감에 대해서, 그 강력한 전염병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그대들에게 묻고 싶다. 그대들은 그 바이러스의 완전함에 대해 생각해보았는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놀라서 숨을 헐떡이는 소리도 들렸지만, 예언자가 한 손을 들자 조용해졌다. 예언자가 말했다. “생각해보라, 조지아 독감 이전의 세상을 기억하는 사람들이여, 그전에 수도 없이 반복되던 질병들을, 그대들이 어릴 때 예방주사를 맞아 면역을 갖추게 된 질병들을, 과거의 독감들을 생각해보라. 1918년 발생한 독감은, 백성들이여, 얼마나 시의적절했는가.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엄청난 자원 낭비와 대량학살에 대해 하나님께서 내리신 벌이다. 그 후에는 어땠는가? 계절마다 독감이 유행했지만, 악하고 비효율적인 바이러스라 노약자들과 병자들만 걸렸을 뿐이다. 그러고 나서 복수의 천사 같은 바이러스가 나타났다. 한번 걸리면 생존이 불가능한 그 바이러스가, 그 미생물이 인구를 급격히 감소시켜 세상을 멸망시켰다. 정확한 통계는 없어도, 인구의 99.99퍼센트가 사라졌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건 250명 중에 혹은 300명 중에 단 한 명만 살아남았다는 뜻이다. 나는 이 완벽한 죽음의 대리인을 내려보내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믿는다. 이 땅의 정화에 대해 성경에도 나오지 않는가?”
커스틴은 무대 건너편에 있는 디터와 눈이 마주쳤다. 테세우스역을 맡은 그는 불안한 듯 셔츠 소매에 달린 단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20년 전 우리가 겪은 독감은 거대한 정화의 의식이며 우리의 홍수였다.” 예언자가 말했다. “우리 안에 있는 빛이 노아의 방주라고, 온 세상을 잠기게 한 그 무서운 물 위를 떠다니던 방주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빛을 가져오고 빛을 전파하기 위해서, 나아가 빛 자체가 되기 위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나는 믿는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졌다. “우리가 빛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다. 우리가 순결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다.” (P83-84)
[왕관 쓴 당신이 더 좋아]
그러다 분열이 있었다. 줄곧 황혼 녘만 계속되는 나날을 15년이나 보낸 사람들은 집으로 가고 싶어 했다. 외계인들이 지배하는 지구로 돌아가 사면을 청하고 살 방법을 도모해보기를 원했다. 그들은 스테이션 일레븐의 바다 밑에, 거대한 방사능 낙진 대피소들의 연결망인 언더시에 살고 있다.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은 300명 정도 된다. 미란다가 스케치하고 있는 장면에서 닥터 일레븐은 정신적 스승인 로너건 선장과 함께 노 젓는 배에 타고 있다.
닥터 일레븐: 이쪽 바다는 위험합니다. 지금 우린 언더시 출입구 위를 지나가고 있어요.
로너건 선장: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보게. (다음 장면은 클로즈업된 그의 얼굴이다.) 그들이 바라는 건 다시 태양을 보는 것뿐이야.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할 수 있겠나.
이다음에는 전면 그림이 필요하다고 그녀는 결론짓는다. 이미 그림을 그려서 색칠까지 마쳐놓았다. 눈을 감으면 집에 있는 이젤에 고정시켜놓은 그 그림이 보이는 듯하다. 컵받침처럼 동그랗고 멍한 눈을 가진 거대한 녹빛 해마가 있다. 반은 동물이고 반은 기계인 해마의 머리 옆쪽에는 푸른빛이 반짝이는 무선 송신기가 달려 있다. 언더시에 사는 인간이 해마의 등에 걸터앉아 아름답고도 악몽 같은 물속을 조용히 움직인다. 그림 맨 위쪽까지 깊고 푸른 물결이 넘실거린다. 수면 위에 떠 있는 닥터 일레븐과 로너건 선장이 탄 배는 깊은 바닷속 기기묘묘한 풍광에 비하면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보인다. (P114-115)
미란다가 서재로 돌아오니 벌써 동틀 무렵이다. 닥터 일레븐. 풍경, 개, 닥터 일레븐의 독백을 위해 아래쪽에 마련한 텍스트 상자.
로너건이 죽은 후로, 삶이 내겐 낯설게 보였다. 내가 나 자신에게 이방인이 된 것이다. 그녀는 문장을 지우고 새로 쓴다. 로너건이 죽은 후로, 나는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감정은 맞는 것 같은데, 그림이랑 좀 안 어울리는 것 같다. 이 전에 새 그림이 한 장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언더시의 암살자가 로너건 선장의 시신 위에 놓아둔 쪽지를 클로즈업한 그림. 우리는 이곳에 어울리는 사람들이 아니었소. 우리를 집에 가게 해주시오.
그다음 그림에서 닥터 일레븐은 그 쪽지를 들고 불쑥 솟은 바위 위에 서 있고, 작은 개가 그 옆에 있다. 그의 생각: 암살자의 쪽지에 적힌 첫 문장은 사실이었다. 우리는 이곳에 어울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나는 내 도시로, 나의 부서진 삶으로, 부서진 집으로, 나의 외로움에게로 되돌아갔고, 달콤했던 지구에서의 삶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너무 길고 산파적이다. 그녀는 그 문장들을 지우고 부드러운 연필로 다시 쓴다. 나는 파괴된 내 집을 바라보면서 달콤했던 지구에서의 삶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P144-145)
[우주선]
“그러니까 내 말은 선두 마차 옆면에 적힌 인용문이 <스타 트렉>에서 따온 게 아니었다면 훨씬 더 심오했을 거라는 거야.” 물가의 세인트데버러를 떠난 지 열두 시간쯤 되었을 때 디터가 말했다. 그는 커스틴과 어거스트와 함께 걷고 있었다.
생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커스틴은 열다섯 살 때 이 말을 왼쪽 팔뚝에 문신으로 새겼고 그 이후로 줄곧 문신을 놓고 디터와 말다툼을 벌였다. 디터는 문신을 하는 것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언젠가 문신한 부분에 세균이 감염되어 죽은 사람을 봤다고 했다. 커스틴은 그 외에도 오른쪽 손목 바깥쪽에 검은 칼 두 개를 문신했는데, 이것들은 훨씬 더 작고 구체적인 사건들을 기념하기 위해서 새긴 것이기 때문인지, 디터는 이 문신들에 대해서는 별로 시비를 걸지 않았다.
“네, 디터 생각이 어떤지 알지만, 그 문구는 여전히 제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예요.” 커스틴은 디터를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으로 생각했다. 문신에 관한 말싸움은 이미 오래전에 가시를 잃어버렸고 그들이 만나는 익숙한 방 같은 의미가 되었다.
오전도 중반쯤 지났는데 해가 아직도 나무들 위로 완전히 떠오르지 않았다. 유랑악단은 거의 밤새도록 걸었다. 커스틴은 발이 아팠고, 너무 지쳐서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예언자의 개가 그녀가 갖고 있는 만화책에 나오는 개와 이름이 똑같다는 사실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루리라는 이름은 지금껏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거 봐, 그게 바로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거라고.” 디터가 말했다. “이 지역 최고의 셰익스피어극 여배우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가 <스타 트렉>에 나온 거리니.” (P160-161)
커스틴과 어거스트는 대체로 침묵하며 걸었다. 사슴 한 마리가 길을 건너다 멈춰 서서 그들을 쳐다보다가 숲속으로 사라졌다. 인간이 거의 모두 사라진 세상의 아름다움. 타인이 지옥이라면. 사람이 거의 없는 세상은 뭘까? 머지않아 인류가 멸종되고 말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도 커스틴은 슬프기보다는 평화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도 많은 생명의 종(種)이 이 지구상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는데, 거기에 하나 더 보태는 게 뭐 어떻다고. 그나저나 현재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
“그 사람 흉터 말이야.” 어거스트가 말을 꺼냈다.
“나도 봤어. 그건 그렇고 악단은 어디 있는 거야? 왜 경로를 바꿨을까?” 어거스트는 대답이 없었다. 유랑악단이 계획한 경로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을 이유는 열 가지도 넘게 댈 수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위협을 받아 에둘러 가는 길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면밀히 검토한 결과 다른 경로가 더 빠르고 커스틴과 어거스트는 공항에서 만나면 된다고 결론지었을 수도 있다. 길을 잘못 들어서 풍경 속으로 사라졌을 수도 있다. (P201-202)
“그러니까 제 말은요, 선생님이 댄을 지도하면 분명히 많이 좋아질 거라고 믿어요. 구체적인 여러 분야에서 개선되겠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쁨을 모르는 개자식일 거예요.”
“기쁨을 모르는…….”
“아뇨, 잠깐만요. 그건 쓰지 마세요. 다르게 표현할게요. 네, 그러니까 선생님이 그를 지도하면 분명히 조금 바뀔 거예요. 그래도 성공했지만 불행한 사람인 건 바뀌지 않아요.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고 집에 가고 싶지 않아서 매일 밤 9시까지 일하는 불행한 사람 말이에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아느냐고 묻지 마세요. 불행한 결혼생활은 티가 나기 마련이거든요. 그건 구취가 있는 사람이 가까이 오면 알 수 있는 거랑 마찬가지예요. 전 지금 인생을 좀 달리 살았으면 어땠을까, 뭐라도 좀 다른 것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고 후회하는 사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제 말이 너무 심한가요?”
“아뇨, 계속하세요.”
“좋아요. 전 제 일을 사랑해요. 제 상관이 제 인터뷰 내용을 알아볼까 봐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에요. 익명으로 해도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차릴 순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어찌 됐든 가끔 주위를 둘러보면, 기업에는 유령들이 가득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정말로요. 아니, 수정할게요. 학계도 다르지 않아요. 부모님이 학계에 계셔서 그 호러쇼를 앞자리에서 똑똑히 지켜봤거든요. 그러니까 어른들의 세계는 유령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네요."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인지 잘…….”
“전 지금 자기가 선택한 삶에 깊은 실망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 얘기를 하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그들은 남들이 기대하는 대로 살았어요. 이제 와서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고 한들 불가능하죠. 은행 대출도 있고, 자식도 있고, 등등. 덫에 걸린 거죠. 댄이 바로 그런 경우예요.”
“당신은 댄이 자기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군요.”
“맞아요.” 그녀가 말했다. “게다가 자기가 그렇다는 걸 깨닫지도 못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 있어요. 본질적으로 고기능 몽유병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 말의 어느 부분이 클라크로 하여금 울고 싶게 만들었을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의 말을 최대한 곧이곧대로 받아 적었다. “그가 자신은 직장에서 불행하다고 묘사할까요?” (P221-222)
[토론토]
유명인의 사진을 찍고 인터뷰하는 것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때가, 돌이켜 생각해보면 있을 법하지 않은 그런 때가 있었다. 인류의 역사에서 한순간보다도 더 짧은, 눈 깜짝할 새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짧은 순간이었다. 세상의 종말이 있기 7년 전, 지반 차드하리는 아서 리앤더와의 인터뷰를 잡았다.
지반은 그전부터 여러 해 동안 파파라치로 활동하면서 그런대로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었지만, 인도의 화분 뒤에 숨거나 주차한 차 속에 숨어서 기다리면서 유명인을 스토킹하는 일에 넌더리가 나서 연예 기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물론 기자 일도 지저분하기는 마찬가지지만 파파라치보다는 덜 지저분하다고 생각했다. “나 이 사람 알아요.” 예전에 그의 사진을 몇 장 사준 적 있는 편집자와의 술자리에서 아서 리앤더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가 말했다. “이 사람 나오는 영화는 모조리 봤어요. 어떤 것들은 두 번씩도 봤고, 그리고 어딜 가나 따라다니면서 사진을 찍었죠. 이 사람 부인들 사진도 많이 찍었어요. 인터뷰 따올 수 있습니다.” 편집자는 그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약속한 날 지반은 호텔로 차를 몰고 가서 펜트하우스 밖에 대기하고 있는 젊은 매니저에게 자신의 신분증과 자격증을 보여주었다.
“15분 드립니다.” 매니저가 지반을 안으로 안내했다. 쪽모이세공 바닥이 깔린 스위트룸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방 하나에는 탁자에 카나페가 차려져 있고 기자들이 자기 휴대전화를 노려 보고 있었다. 다른 방에는 지반이 자기 세대 최고의 배우라고 믿는 남자가 로스앤젤레스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의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중후한 휘장으로 장식된 고급스러운 안락의자와 아서가 입고 있는 명품 정장이 지반의 눈에 들어왔다. 자기가 미란다의 사진을 찍은 사람이라는 것을 아서가 어떻게 알겠느냐고 지반은 계속 자신을 다독였지만,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그날 밤 미란다에게 자기 이름을 말해준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연예 기자가 되겠다니, 꿈도 야무졌지. 쪽모이세공 마룻바닥을 걸어가면서 그는 아서가 고개를 들기 전에 어디가 아픈 척하고 도망쳐버릴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도 했다. (P226-227)
나는 배우들이 명성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이용하는 것을 보고 싶다. 몇몇 배우들은 자선재단을 갖고 있고, 아프가니스탄 여성들과 소녀들의 곤경에 주의를 집중시키려고 노력하거나, 아프리카 흰코뿔소를 구하려고 애쓰거나, 성인 문맹 퇴치 사업에 열정을 기울이거나 한다. 물론 모두 가치 있는 일이고, 그들의 명성이 홍보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정직해지자. 그들 중 세상에 나가 착한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만 해도 출세하기 전에는 자선활동은 생각도 못 했다. 내 배우 친구들은 유명해지기 전에는 오디션을 보러 다니고 눈에 띄려고 애를 쓰면서 생계유지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친구들 영화에 우정출연을 하고 식당이나 출장 뷔페에서 서빙을 했다. 그들이 연기를 한 것은 연기를 사랑하기 때문이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주목받기 위해서기이도 했다. 그들이 원한 것은 남들 눈에 띄는 것뿐이었다.
요즘 나는 불멸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기억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나는 무엇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기억과 명성에 관한 질문들이 내 머릿속을 맴돈다. 나는 옛날 영화 보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화면에 나오는 오래전에 죽은 배우들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영원히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진부한 표현인 건 알지만 정말이다. 클라크 게이블, 에바 가드너 같은 모두가 아는 유명한 배우들뿐만 아니라, 쟁반을 들고 가는 하녀, 집사, 술집에 앉아 있는 카우보이들, 나이트클럽 안 왼쪽에서 세 번째에 있는 아가씨 같은 단역배우들도 마찬가지다. 내겐 그들 모두가 불멸의 존재다. 처음에 우리는 세상의 주목을 받기만을 원하지만, 일단 주목을 받게 되면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다음에는 기억되기를 바란다. (P252-253)
[비행기]
어거스트는 다원우주론을 믿었다. 그는 그 우주론이 물리학의 주류는 아닌지 몰라도 진짜 물리학 이론이며 양자역학과도 약간 관련 있는 거라고 주장했고, 절대로 자기가 만들어낸 터무니없는 이론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난 잘 모르겠는데.” 몇 년 전에 커스틴이 확인차 물어보았을 때 튜바가 말했다. 알고 보니 우주론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랑악단에서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하는 단원들 중 과학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 사람들이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에 인터넷 검색을 얼마나 많이 했나를 생각해보면 솔직히 말해 대단히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길 감독은 확실히는 기억 안 난다면서 언젠가 읽었던 기사 내용을 말해줬다. 기사의 골자는 아원자입자들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지속적으로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말은 우리가 사는 이 우주 말고 또 다른 곳이 존재한다는 뜻 아니겠느냐면서, 이론적으로 한 사람이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유사 우주에서 그림자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는 뜻일 거라고 추측했다. “근데 사실 난 과학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어.” 길 감독이 말했다.
어찌 됐든 어거스트는 유사 우주가 무한히 존재한다는 가능성을, 그 유사 우주가 사방에서 줄 지어 늘어서 있다고 상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커스틴은 이런 우주 이론이 거울 두 개가 서로를 반사할 때 생겨나는 연속적인 평면들 같은 것이 아닐까. 거울 속 이미지가 반사를 거듭할수록 더 초록색으로 변하고 더 흐릿해지다가 결국에는 무한으로 사라져버리는 그런 현상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언젠가 그녀는 버려진 쇼핑몰의 의류매장에서 이런 현상을 본 적 있었다.
어거스트는 무한한 유사 우주가 있다고 전제할 때, 세계적인 전염병이 발생하지 않았고 자신은 성장해서 계획대로 물리학자가 된 유사 우주가, 혹은 전염병은 발생했지만 바이러스가 미묘하게 다른 유전자 구조를 가지고 있고 아주 미세한 변화를 일으켜서 인간이 그 바이러스에 감염되더라도 생존할 수 있게 된 그런 유사 우주가 있지 않겠느냐고 주장했다. 어찌 됐든 문명이 그토록 난폭하게 중단되지 않은 우주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늦은 오후에 둑 위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커스틴이 그 집에서 가져온 잡지들을 뒤척이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P267-268)
[터미널]
세번시티 공항에 있는 사람들은 처음에 자기들이 일시적으로 발이 묶인 것처럼 날짜를 계산했다. 어째서 그랬는지 그다음 수십년 동안 젊은이들에게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공정하게 말하자면 원래 공항에서 발이 묶이는 일의 역사는 결국 묶인 발이 풀려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 일의 역사이기도 하지 않았던가. 처음에는 모두들 국경수비대가 곧 담요와 식료품이 들어 있는 상자들을 가져오고, 공항 직원들은 업무에 복귀하고, 비행기들이 다시 이착륙하기 시작할 거라고,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고 믿었다. 하루, 이틀, 48일, 90일. 그때까지는 정상적인 상황으로 돌아갈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다가 1년, 2년, 3년이 지났다. 그러다 시간이 재설정되었다. 그들은 날짜와 달은 예전처럼 쓰면서도 해는 3년 1월 1일, 4년 3월 17일 하는 식으로 세었다. 4년째에야 클라크는 앞으로 계속 해가 이런 식으로 기록이 될 것임을, 재앙의 순간을 기준으로 한 해 두 해 세어갈 것임을 깨달았다.
세상이 과거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거라는 깨달음은 더 빨리 왔다. 그 깨달음은 기억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공원에서 햇빛을 받으며 아이스크림콘을 베어 물었던 때, 마지막으로 클럽에서 춤을 췄던 때, 마지막으로 움직이는 버스를 봤던 때, 마지막으로 비행기에, 주거용이 아니라 실제로 날아다니는 비행기를 탔던 때, 마지막으로 오렌지를 먹었던 때. (P308-309)
공항에 발이 묶인 사람들 중에는 비행기 조종사가 세 명 있었다. 공항에서 생활한 지 15일째 되는 날 그들 중 한 명이 비행기를 몰고 로스앤젤레스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눈이 다 녹았으니까 제빙 장치 없이도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뉴스에서 보니까 로스앤젤레스는 상황이 매우 안 좋은 것 같았다면서 그를 만류했다.
“그렇긴 한데요. 뉴스를 보면 다 나빠 보이지 좋아 보이는 곳이 어디 있나요.” 조종사가 말했다. 그의 가족이 로스앤젤레스에 있었다. 그는 가족을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함께 가고 싶은 분들, 환영합니다.” 그가 말했다. “로스앤젤레스까지 공짭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상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은 사람들이 짐을 부치는데도, 머리 위 짐칸이 짐으로 가득 차기 전에 짐을 밀어 넣기 위해 일찍 탑승을 하는 데도, 생사의 기로에 설 때 남을 도와줄 의무가 있는 비상구열 좌석에 앉아 발 뻗을 공간을 5센티미터 더 확보하는 특혜를 누리기 위해서도 추가로 돈을 내야 하는 세상이 아니던가.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연료는 가득 채워져 있어요.” 조종사가 말했다. “보스턴에서 샌디에이고로 비행하다가 이곳으로 왔거든요. 그리고 정원을 채워서 비행하게 될 것 같지도 않고요.” 클라크는 공항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와 함께 가더라도 비행기에 빈 좌석이 많이 남을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할 시간을 하루 드리겠습니다.” 조종사가 말했다. “내일 기온이 또 떨어지기 전에 이륙할 겁니다.”
물론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P330-331)
그들은 서로에게 언어를 가르치고 배웠다. 80일 정도가 되자 영어를 모른 채 이곳에 온 사람들 거의가 하나둘씩 짝을 지어 영어를 배우고 있었고, 영어 사용자들은 루프트한자, 싱가포르 항공, 캐세이퍼시픽, 에어프랑스가 싣고 온 언어들 중 하나 이상을 공부하고 있었다. 클라크는 루프트한자 승무원이었던 아네트로부터 불어를 배웠다. 그는 하루하루 살아내기 위한 잡일을 하면서, 물을 끌어오고, 세면대에서 옷을 빨고, 사슴 가죽을 벗기는 법을 배우고, 모닥불을 피우고, 청소를 하면서 배운 표현들을 입속말로 익혔다. 주 마펠 클락, 좌 비트 당 레호포트. 튀 므 멍크, 튀 므 멍크, 내 이름은 클라크입니다. 나는 공항에 살아요. 나는 당신이 그리워요. 나는 당신이 그리워요. 나는 당신이 그리워요. (P341)
“전염병이 창궐한 게 다 이유가 있어서라고 생각하더군요.” 클라크가 말했다.
“이유가 있어서 일어난 거 맞잖아요.”
“맞지요. 근데 지구상의 거의 모든 인간이 지극히 치명적인 돼지 인플루엔자 돌연변이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사실 말고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더라니까요. 타일러는 이 일이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타일러의 생각이 맞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잠깐 뜨개질을 멈추고 뜨개질한 줄 수를 셌다.
클라크는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엘리자베스, 이런 일에 무슨 이유가 있을 수 있겠어요? 무슨 계획이 필요하겠어요.....?” 그는 자기 목소리가 높아졌고 주먹을 꼭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일은 이유가 있어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우리 인간이 그 이유를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요.”
그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 남쪽으로 향하던 종교집단이 공항에 들렀다. 그들 종교의 정확한 본질은 잘 알 수 없었다. “새 세상에는 새로운 신들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말했다. “우리는 계시에 의해 인도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호와 꿈에 대해 모호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P353-354)
[예언자]
예언자는 어디 있을까? 그들은 큰 슬픔에 멍해진 상태로 말없이 걸었다. 사이드는 비틀비틀 걸으면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기울였다. 공항 표지판을 따라 걸으니 호수와 시내에서 벗어나 목골 구조의 주택들이 늘어선 주거 지역이 나타났다. 지붕 몇 개는 위만 살짝 무너졌고, 대부분은 쓰러진 나무에 깔려 있었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낡아버린 주변 풍경 속에도 아름다움이 있었다. 햇빛이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진입로의 자갈 사이로 튀어 올라온 꽃들을 비췄고, 앞 베란다는 이끼가 잔뜩 깔려 밝은 초록색으로 변했으며, 흰 꽃이 핀 관목에는 나비들이 날아들었다. 이 찬란한 세상. 커스틴은 갑자기 목이 메었다. 갈수록 집들이 드문드문해지고, 잡초가 무성한 진입로들 사이의 거리가 점점 더 넓어졌다. 도로의 오른쪽 차선에는 자동차들이, 구멍 난 타이어 위에 얹혀 있는 녹슨 외골격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커스틴이 자동차 창문을 들여다보니, 구겨진 감자 칩 봉지, 피자 상자, 단추와 화면이 있는 전자기기 등 구세계의 쓰레기들이 보였다.
고속도로에는 공항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도 있었지만, 어차피 꽉꽉 막힌 차들을 따라가면 되니까 공항을 찾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모두들 마지막 순간에 공항으로 가려고 애를 쓴 것 같았다. 그러다가 휘발유가 떨어져서 차를 버리고 떠났거나, 운전석에 앉은 채 독감으로 죽어갔을 것이다. 예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끝도 없이 늘어선 자동차들 사이에서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P403-404)
“이 세상은 암흑의 바다다.” 예언자가 말했다.
커스틴은 권총을 쥐고 있는 소년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거스트에게 말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린 함께 정말 먼 길을 걸어왔지. 네 우정이 내겐 너무나 소중했어. 아주 힘들었지만 아름다운 순간들도 있었지. 모든 것은 끝이 있게 마련이야. 나는 두렵지 않아.
“누가 오고 있습니다.” 예언자의 추종자들 중 한 명이 말했다. 커스틴도 소리를 들었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고속도로 방향에서 말 두세 마리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예언자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커스틴에게서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누가 오는 건지 아는가?” 예언자가 물었다.
“아니.” 그녀가 중얼거렸다. 말들이 얼마나 멀리 있는 것일까? 그녀는 가늠할 수 없었다.
“누가 오는 건지는 몰라도 너무 늦게 도착할 것이다.” 예언자가 말했다. “너는 인간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일출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우리는 바다의 수면 위를 움직이는, 언더시의 어둠 속을 움직이는 빛이기 때문이다.”
“언더시?” 커스틴이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지만, 예언자는 더 이상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완벽하게 고요하고 평화로운 표정이었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니 그녀 너머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우린 집에 가고 싶을 뿐이야.” 커스틴이 말했다. <스테이션 일레븐> 1권에 나오는 말이다. 닥터 일레븐과 언더시의 대결 장면에서, “우린 햇빛을 꿈꿔. 지구를 걷는 꿈도 꾸고.”
예언자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녀가 한 말이 <스테이션 일레븐>에 나온 말이란 것을 알아차렸을까?
“우린 너무도 오랫동안 길을 잃고 헤맸어.” 커스틴은 그 장면에 나온 대사를 계속 인용했다. 그녀가 예언자를 지나쳐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두 손에 꼭 쥐고 있는 총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는데, 자신에게 무언가를 확신시키려는 듯 했다. 그녀는 계속 말했다. “우린 단지 우리가 태어난 세상을 원할 뿐이야.”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늦었다.” 예언자가 말했다. 그가 숨을 들이쉬더니 소총을 다잡았다. (P411-412)
[스테이션 일레븐]
클라크는 고개를 들어 비행장에서 진행되는 저녁 활동과 20년째 땅에 발이 묶여 있는 비행기들과 창유리에 비친 반짝이는 촛불을 바라본다. 그의 생전에 비행기가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게 될 거라는 기대는 전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배가 항해를 시작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다시 가로등을 밝힌 마을이 있다면, 악단과 신문이 있다면, 이 서서히 깨어나는 세계가 다른 것들도 갖고 있지 않을까?
어쩌면 바로 지금 배들이 출발해서 그를 향해 오고 있거나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도와 별에 대한 지식으로 무장한 선원들이 키를 잡고 있을지도, 필요나 단순한 호기심에서 항해를 시작한 배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 다른 편에 있는 나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적어도 그 가능성을 생각해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는 배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세상을 향해 바다를 건너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흐뭇해한다. (P452-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