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르느와르> 2014년
1880년 7월 20일.
그가 탄 증기자전거가 위태위태하게 언덕을 따라 동쪽으로 달렸다. 파리의 돔과 첨탑들이 쏜살같이 스쳐지나갔다. 곧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부지발(Bougival)과 센 강 마을을 향해 비탈진 언덕을 곤두박질치듯 내달렸다. 오른팔에 한 깁스 때문에 한 손은 핸들에 닿지도 않았지만, 그는 센 강으로 가야 했다. 다음 주는 안 된다. 내일도 안 된다. 바로 지금이다. 깁스를 한 붕대 밑의 살이 간질거리는 것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고통은 바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림에 빠져야만 이 두 가지 고통에서 모두 벗어날 수 있었다. 엔진에서 쉭, 하고 증기 빠져나오는 소리가 났지만 자전거는 쓰러지지 않고 계속 달렸다.
그는 팔을 뻗어 조절판을 더 열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센 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전의 부드러운 햇살이 다 사라지고 한낮의 강렬한 빛만 남아 있을 것이다. 실린더의 피스톤이 더 재게 오르락내리락하다 윙 하는 소리를 냈다. 길가에 늘어선 포플러나무와 밤나무가 온통 풀빛으로 뭉개지고 꽃이 활짝 핀 양골담초는 노란 불길처럼 타올랐다. 청록색 강물이 점점 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인동덩굴 향기를 실은 따뜻한 여름 공기가 콧속을 가득 메웠다. 예인선의 낮은 기적소리에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언덕 아래에 다다라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접이식 이젤과 캔버스, 바지유의 나무 물감상자가 잘 묶인 채 그 자리에 있었다. (P11-12)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완벽했다. 테라스 아래로는 강둑에 묶인 작은 배 열두어 척이 강물 위로 우아한 잔물결을 만들어내고, 비탈진 뱃도랑에서 강물 위 창고까지 뱃머리와 뱃고물을 맞대고 늘어선 돛배들은 사막의 대상들처럼 운치가 있었다. 뤼에유(Rueil) 동쪽 강변으로는 흰 돌로 지은 건물에 빨간 타일지붕을 얹은 여인숙 ‘메르 르프랑’이 오후의 햇살을 흠뻑 받고 있었다. 일요일이 되면 파리 사람들은 그곳 작은 과수원에 차려진 식탁에서 점심을 즐겼다. 강 하류 쪽으로는 배들에 둘러싸인 지켈 요트 공작소가 물 위에 떠 있었고, 채소밭 뒤로는 집 몇 채가 보였다. 상류 쪽으로는 조악한 황토색 마차공장 굴뚝에서 잿빛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클로드 모네라면 공장 앞에 배를 한 대 놓고 그릴 것이다. 귀스타프라면 강둑은 없는 셈 치고 경주용 배의 뾰족한 끄트머리에서 본 조금은 이상한 시점으로 노잡이들을 그리겠지. 늙은 공산주의자 피사로라면 공장 굴뚝을 그림 한가운데 놓을 것이 틀림없다. 노동자계급의 상징이니까.
그렇다면 자신은 무엇을 그려야 좋을까? 도시와 시골이 만나는 이 지점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잘 그려낼 수 있을까? 배 탄 파리지엥들의 강 풍경을 한 번 더 그릴까? 먹고 마시는 사람들이 뒤섞여 노는 모습? 춤추고 있는 모습? 아니면 배 안에 있는 누군가에게 소리치는 모습? 그는 친구들이 맛있는 점심을 먹은 뒤 함께 모여 앉은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흥에 겨워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아름다운 오후를 즐기고 있는 모습. 이것이 바로 일요일마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바로, 라 비 모데른.
하지만 어떻게? 그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것이 요즘 그를 괴롭히는 진짜 문제였다. 인상주의냐, 전통 화법이냐. 나머지는 모두 이 문제 하나에 달려 있었다. 인상파 모임과 완전히 헤어지고 친구들을 배신한 채 살롱전에 계속 출품하느냐, 아니면 창립 멤버였던 인상파 모임으로 다시 돌아가느냐, 그는 아직도 ‘인상파’라는 말이 싫었다. 평론가 루이 르루아가 그들을 가리켜 그저 대강의 인상밖에 그리지 못한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 아닌가. 하지만 그가 사랑하는 친구들, 클로드 모네와 귀스타프 카유보트, 카미유 피사로, 알프레드 시슬레, 폴 세잔과 베르트 모리조는 ‘인상파’라는 말을 모두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인상파의 짧은 붓질이 자신의 모든 그림들을 특징짓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P21-23)
결정해야 할 순간이었다.
벨루아 부부의 일이 순조롭게 되지 않으면? 그러면 분명 초상화를 그리는 안전한 선택으로 센 강의 이 좋은 여름 햇볕을 낭비한 자신을 책망할 것이다. 하지만 구상 중인 샤투 섬의 그림이 영 시원치 않게 나오면 그의 명성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자신감은 산산조각 날 것이며, 그러면 벨루아 부부의 제안을 거절한 자신을 원망하게 될 것이다. 프랑스 남부의 빛은 가히 마법과 같다. 세잔을 보면 알 수 있잖은가. 그곳에 가면 세잔과 함께 그릴 수 있다. 남부에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으니 잘된 일이지. 새로운 곳에서 그리다보면 요사이 그의 딜레마에 해답을 얻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마음속에 그려가고 있는 테라스 그림의 모티프가 훨씬 더 근본적인 해답이 될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진정한 천재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단지 졸라가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는 문제만이 아니었다. 자존감의 문제였다. 발전할 수 있는가 하는 자기 확신의 문제, 메종 푸르네즈의 그림을 버린다면 그는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겁쟁이라고밖에! (P56)
전에 아주 어린 소녀였을 때, 한번은 동생이 돌멩이를 하나 들어 보이더니 세 개의 만곡부를 이루며 커브를 틀고 있는 지렁이 같은 모양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 봐, 누나, 센 강이야.”
“아냐, 바보. 그건 지렁이야. 강이기도 하지만, 강은 곧 지렁이라고.” 알폰진이 엉뚱한 대답을 했다.
강이 지렁이도 될 수 있다고 한 것, 혹은 한 낱말이 강뿐 아니라 지렁이도 가리킬 수 있다고 한 것은 사실 일부러 억지를 부린 것이었다. 하지만 알폰진이 보기에는 분명 지렁이 형상이었다. 알폰진이 발까지 구르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고집을 피워대는 통에 결국 알퐁스는 지도를 보여달라겠다며 아버지에게 뛰어갔다. 물론 알퐁스 말이 맞았다. 아버지는 동생에게 바보라고 한 벌로 알폰진에게 숙제를 내주었다. 섬이 둘로 갈라져 서쪽 강둑으로는 샤투, 동쪽 강둑으로는 뤼에유가 되는 지점부터 파리에 이르는 강가 마을의 이름을 모두 외우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름을 아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알폰진의 마음에 남은 것은 똑같은 사물을 보고도 서로 다르게 보거나, 서로 다르게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전율이 일었다. 그때부터 알폰진은 공공연히 배를 나무 신발이라고, 수련 잎을 개구리 침대라고, 나무에 난 흰 버섯을 자연의 머랭(달걀 흰자로 만든 과자)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 강의 모습은 메종 프르네즈를 파리에 매어주는 푸른 리본 같았다. 기차가 뤼에유 말메종으로 지나기 때문에 중간에 끊기기는 했지만 알폰진은 리본을 떠올렸다. 여기서 보낸 어릴 적 기억에서 시작해 파리에서 학교를 다닌 기억, 남편 루이와의 기억, 그리고 공포의 시간을 거쳐 결국 모자가게 문을 영원히 닫을 수밖에 없었던 기억의 고리들이 상상의 리본을 구성하는 삶의 연대기를 이루고 있었다.
아니면 강은 많은 지류를 한데 묶고 있는 끈 같은 것이었다. (P70-71)
물론 그랬다. 지난 십 년간 그들을 지탱해준 끈끈한 동지애뿐 아니라 함께 이루어낸 예술적 영향력도 잃게 되리라. 이렇게 분열되고 만다면 그들은 대담한 새 예술의 선구자가 아니라 그저 한 사람 한 사람의 괴짜로 남을 뿐이었다. 인상파를 떠날까 하는 생각을 할 때마다 이 점이 그의 마음을 괴롭혔지만, 지금 귀스타프에게 이것까지 말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는 우리 그룹이 깨질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겠지.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위험해. 그리고 내가 다음 그룹전에 참가하지 않는다면......”
“형이 우리와 함께 전시하지 않는대도 거기엔 충분한 이유가 있어. 모네도 그렇고, 난 모네가 다음 전시에 작품을 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올해 전시에도 내가 일일이 그림을 추려서 직접 액자를 해야 했는걸. 내년이라고 더 쉬울 것 같진 않아. 모네는 의욕을 너무 많이 잃었더군. 내가 다 놀랄 지경이었어.”
“너야말로 너무 실망하고 있잖아. 내가 다 놀랄 만큼.”
“나를 위해 이러는 게 아니야. 난 내가 이류라는 걸 알아. 그건 상관없어. 시작부터 함께한 형과 다른 동료들을 위해서 이러는 거지. 우리 그룹이 이렇게 무너지게 놔둘 순 없어.”
귀스타프는 발로 맘므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내게 계획이 하나 있긴 해. 그게 이루어지면 형은 루브르에 갈 거야.”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귀스트는 당치 않다는 듯 소리 높여 웃었다. “꿈도 크시지.”
귀스타프가 결연한 얼굴로 오귀스트를 쳐다보았다. “나 유언장을 썼어. 내가 모은 그림 전부를 국립박물관에 기증할 거야. 이십 년간은 뤽상부르 박물관에 전시되고, 그다음부터는 루브르로 옮겨온다는 조건하에, 유언장은 형이 집행해줘.”
“하하! 그전에 내가 먼저 굶어 죽을걸.” 그는 껄껄 웃다가 귀스타프의 심각한 얼굴을 보고 멈추었다. 요 이삼 년 사이 귀스타프의 부모님과 남동생이 죽었다. 그는 작년에는 내내 붓에 손 한번 대지 않았다. “대체 무슨 말이야. 네 나이에 유언장이라니?”
귀스타프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난 우리 집안이 그렇게 수명이 길지 않다고 생각해.”
“말도 안 돼. 나보다도 어리면서.”
“내 유언장 집행인 해줄 거야. 말 거야?”
“캔버스 만드는 거 도와준다고 하면.”
“내일. 메종 푸르네즈에서 하자. 미리 만들어놓으면 그 큰 걸 기차에 실을 수가 없잖아.”
“그래. 아, 하나 더. 네가 모델을 좀 서주어야겠어.”
귀스타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센 강변의 어느 일요일 오후, 뱃놀이하러 나온 이들의 흥겨운 잔치. 알겠어? 너도 있어야 해.”
“어떤 나? 어떤 옷을 입은.....?”
“카노티에(canotier, 뱃놀이하는 사람)지, 물론.”
귀스타프가 웃었다.
오귀스트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기운 내고, 다시 그림 그려, 내일 시간될 때 내 작업실로 오고. 이젤 옮기는 것도 도와줘야 해.” (P98-99)
여자들을 그리는 화가. 그는 이렇게 알려지고 싶었다. 하지만 이는 곧 그에게 영감을 줄 모델들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자신의 눈이 보고 몸이 느끼고 손으로 만지고 싶은 충동이 솟는 대상 말이다. 그릴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샤르팡티에 부인의 말은 아팠다. 그가 여자들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난봉꾼이 아니라는 걸 그녀는 정말 모르는 것일까? 이건 누를 수 없는 생의 열망이었다. 그가 그리는 대상을 사랑하려는, 기교가 아니라 열정으로 명작을 그려내려는, 몸속을 꽉 채우는 뜨거운 충동을 느끼려는 갈망이었다. 그는 자신이 그리는 여자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랑했다. 그녀들이 있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몽마르트에서 사람들은 한곳에 머물지 않았고 그녀들과의 연락도 쉽게 끊어졌다.
삶의 많은 것들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것들을 그림으로 기억하고 싶었지만, 운이 좋아 그림이 팔리고 나면 남는 것은 허무함뿐이었다. 그는 순간의 감정을 그림으로 잡아두어 인상파의 이상을 이루었는지는 몰라도, 늘 마음 한 구석은 텅 빈 느낌이었다. (P110-111)
“그 작자에게?”
“아뇨. 그 사람 안 본지는 반년도 넘었어요. 샤르팡티에 부인에게 말이예요. 부인 말로는 이 그림이 살롱전에 걸릴 수도 있는데, 그 기회를 거절한다면.....”
“살롱전에 걸리고 싶으면 다른 화가에게 모델을 서도 되잖소.”
“부인 말로는 그만한 사람이 없대요.”
“무슨 뜻이지?”
“내 말은, 화가로서 말예요.”
그는 그렇게 해야만 잔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그녀 앞에 우뚝 버티고 섰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일까? 남자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게 하면서도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면 현명하게 처신해야 한다. 상대방이 의심할 만한 일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 그의 자존심을 지켜줄 수 있을 것이다. 남자들은 자존심이 지켜질 때 행복해한다. 물론 그녀는 행복한 남자와 살고 싶었다.
“11시에 뵙기로 했소. 부모님께 경우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아.”
조제프 폴은 양산을 가지러 집으로 가자는 뜻으로 잔의 팔을 붙잡고 잔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흠, 행복한 남자와 결혼하는 행복한 여자가 되려면 여간 똑똑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 (P127)
오귀스트는 자기 잔은 옆으로 치워놓았다. 결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음식을 나르던 안이 접시를 다 치우고 무화과와 금빛 배, 보랏빛 포도가 담긴 과일접시를 내왔다. 포도송이에는 빛이 날 정도로 윤기가 흐르는 포도잎이 아직 붙어 있었다. 완벽했다.
알퐁스가 테라스로 올라왔다. “난 어디로 가면 돼요?”
“저기 난간으로, 난간에 등을 기대고 서서 엘렌을 바라봐.”
엘렌이 손을 들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나예요.”
알퐁스는 팔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부자연스럽게 내려뜨리고 있었다.
“난간을 좀 잡아보겠어?”
안토니오가 일어서더니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는지 앙젤에게 몸을 숙였다. 눈은 그녀의 앞가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앙젤은 입은 거칠어도 옷차림은 단정한 여인이었다.
쥘은 식탁 뒤로 물러가더니 폴과 피에르를 데리고 뒤쪽으로 가서는 하얀색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온 세상이 테라스요, 모든 남녀가 그대로 모델이로군.” 쥘이 말했다. 또 혼자만의 공상에 잠겨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피에르와 폴에게 돌아서더니 그들을 번갈아가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자, 멋쟁이 친구분들, 로즌크랜츠와 친절한 길드스턴(햄릿에 나오는 햄릿의 친구들), 아니 길드스턴과 친절한 로즌크랜츠였던가? 아무튼 멋진 포즈를 한 번 보여주세요.”
피에르는 즐거운 듯 웃었다. 그리고 남은 와인을 단번에 털어넣고는 수염을 한번 긁어주고 정지한 듯 자세를 잡았다. 귀스타프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라울은 알폰진 옆에 서 있었다. 알폰진은 몸을 숙여 난간에 팔꿈치를 괴고 서 있었다. 그녀가 버릇처럼 하는 자세였지만, 라울로서는 그렇게 오래 서 있는 게 힘들 것이었다.
“라울, 앉으세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베로네세는 인물을 식탁 주변에 U자형으로 좌우 대칭이 되도록 배치했다. 하지만 오늘 모인 모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와인 병과 와인 잔, 빵 조각들과 과일접시, 앙젤이 높이 쌓아올린 냅킨을 중심으로 좌우 비대칭의 U자형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세잔의 정물화만큼이나 독특했다. 오귀스트는 완벽에 가까운 구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깝다’는 건 아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가만, 이제부터 움직이지 말아요.”
마음 같아서는 한껏 흥에 취해 있는 그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용.” 알퐁스가 한숨을 쉬듯 내뱉었다.
설마 벌써 강가로 달려나가고 싶어진 걸까?
바로 지금이야.
“다들, 그대로. 움직이지 말아요.”
“그런데 난 지금 접시를 내려다보고 있는데요.” 세실이 우는소리를 했다.
“다른 데를 보면......”
“안토니오를 봐요. 아니, 귀스타프를 봐요.”
“르누아르 씨, 당신을 보면 안 되나요? 옆모습이 나오는 건 싫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세실은 그를 애처롭게 쳐다보며 콧소리를 냈다. 그림을 시작하려면 허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P142-143)
“이 많은 사람들, 그 사이를 쏜살같이 지나가는 한순간을 붙잡으려는 거라고나 할까? 내 붓은 그렇게 빨리 움직이지 못하거든. 여기 모인 이들과 병과 잔, 식탁보와 과일, 나뭇잎과 강, 배들과 맞은편 강둑까지를 단번에 그리려면 팔이 열 개라도 모자라지. 그 모든 것들이 담긴 한순간을 분절된 붓질로 포착해내려는 노력이라니.”
“재미있는 설명이군요. 인상파의 핵심을 말씀하신 것 같아요. 시간의 흐름에서 한순간을 잡으려는 시도. 제가 쓰고 있는 글에 좀 활용해도 괜찮겠어요?”
“날 이론가로 만들지만 않는다면. 난 화가들이 이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게 제일 싫어. 화가는 그림을 그려야지. 말하다 죽을 게 아니잖나.”
오귀스트는 놀리는 듯한 쥘의 시선을 보고 자기가 어느새 자기 이론에 대해 목청을 높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사람들 쪽으로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잠깐만.” 피에르가 수염을 긁으며 말했다. “오늘 열넷이 있었던가? 맞아?”
“응, 하지만 잔의 애인은 그리지 않을 거야.”
“그럼 좀 위험해지는 거 아닌가? 식탁을 둘러싼 인물 열셋이라. ‘최후의 만찬’이다 뭐다 거론되기 십상인걸.”
“알아, 화가라면 그걸 모를 리 없지.”
“열세번째는 유다 아닌가. 13이라는 숫자는 우리 중 누구 하나에게는 안 좋을 수밖에 없을 텐데. 올해 안에 죽게 된다든지.”
“미신이야, 피에르. 걱정이 지나쳐, 자넨.”
“그렇게 쉽게 단정할 문제가 아니야. 징조라는 건 괜히 있는 게 아니라고. 이건 옛날부터 이어져온 거야. 13은 죽음의 숫자야. 마녀들의 집회에도 열셋이 모이잖아.”
오귀스트는 웃었다. “난 마녀가 아니라 신들을 그리고 있는걸.”
“파리에 13이라는 주소를 가진 집이 없는 데는 다 까닭이 있어. 그리고 왜 현명한 안주인들이 손님 열넷을 초대하고서도 언제나 한 명을 더 초대하겠어? 손님 하나가 도착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는 거잖아. 이게 다 의미 없는 짓이라고 생각해?”
“물론, 그건 괴짜들이나 광신자들이 만들어낸 속임수일 뿐이야.” 오귀스트가 말했다. 하지만 그도 이 문제가 가볍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샤를에프뤼시가 더욱 간절했다. (P164-165)
“가끔 난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뭘까 생각해. 그림에서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말이야. 내가 물어보지 않는 것들. 너무 많은 것이 새어나가는 기분이야. 흐름에 맡기고 그저 떠다니다보면 막다른 골목에 닿을 수도 있지. 그럼 그렇게 갇혀서 끝없이 제자리를 맴도는 거야. 중요한 것을 깨닫지 못한 채로 얼마나 더 가게 될까?”
“예를 들면요?”
“화가로서 내 길을 찾는 것이라든지.”
그는 정직했다. 그녀는 그것이 고마웠다.
“아니면 한 인간으로서.” 그녀가 말했다. 자기도 얼마나 더 지나야 그 길을 찾게 될까 궁금해하면서.
그는 물 저편을 바라보았다. “그것도 맞아.”
“당신은 강물 위 코르크처럼 모든 걸 맡겼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별로 그런 것 같지 않아요. 당신이 날마다 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걸. 모르겠어요? 작은 것이든, 실제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든, 하지만 그 모든 게 삶이라는 흐름 속에서 한데 어우러지고 있잖아요?”
“난 그렇게 계속 표류하는 기분이 들어. 내 삶의 마지막이 어떨까 생각하면 막막하기도 하고.”
“그런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없어요.” (P184-185)
“그는 예술가란 일종의 사회교육가라 생각하고 있소. 난 그 점을 높이 사지요.”
“그래요. 좋습니다. 이 그림도 마찬가지로 사회교육에 이바지할 겁니다. 우리 파리 사람들이 다시 삶을 즐기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지요. 적어도 대중들은 그래요. 라파엘 리가 보고 싶은 현실이 진흙구덩이라면, 부랑아와 넝마주이에 관심을 쏟는 것. 좋아요. 잘못될 것 없어요. 하지만 새들은 배가 고플 때조차 노래합니다.”
“무슨 뜻이오?”
“예쁜 것에는 목적이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기쁨을 주는 것이죠. 그리고 한 가지 더, 라파엘리는 인상주의자가 아닙니다.”
“드가는 그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소.”
“그룹이 갈라지는 위험을 감수할 만큼 적절한 사람일까요? 난 동의하지 않아요.”
“난 동의하오.”
샤를의 입꼬리가 일그러지는 것을 보니 그 말은 진심이었다.
“모델 서러 올 건가요. 아니면 색에 홀릴까봐 두렵나요? 오지 않겠다면 캔버스 천을 잘라내서 그 조각을 다시 쓰든가 하겠습니다.”
“지금은 답할 수 없군요.”
“귀스타프도 모델을 서요. 드가나 라파엘리에 대한 이야기는 그 친구와 하면 될 겁니다.” (P214-215)
에밀, 잔, 엘렌. 이제는 키르케까지. 앞으로 누가 또 떠나게 될까?
귀스타프와 앙젤이 다시 자세를 잡았다. 쥘과 피에르도 이들을 보고 다시 포즈를 취했다. 폴이 잔의 빈자리를 향해 고개의 각도를 잡았다. 알폰진은 난간에 몸을 기댔다. 샤를과 라울은 뒤를 돌았다. 그들은 오귀스트에게 계속 그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붓을 집어들었다. 어디를 칠해야 하나? 그림 뒤쪽의 쥘과 샤를, 피에르와 폴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림에서 빠질 염려 없는 안전한 모델들이었다. 그쪽을 그리면 속 쓰린 빈자리를 바라보지 않아도 되겠지.
알퐁스가 위층으로 올라왔다. “미안해요. 설득시키지 못했어요.”
“괜찮아. 자네도 그만 배 손질하러 가봐. 어차피 그릴 수가 없어. 빈자리 때문에.....”
알퐁스는 그만 하라는 뜻으로 오귀스트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그는 잠시 그러고 있다가 일층으로 내려갔다.
앙젤은 포즈를 취한 채 부드럽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두 번 다시 말하지 마오. 그 여자의 정조에 대해.” 지조 없는 애인 리제트를 주인공으로 한 베랑제의 곡이었다. ‘그 여자의 정조에 대하여 우리 두 번 다시는 말하지 말자.’ 좋은 조언이었다.
그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그림에만 집중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그렸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졸라가 비웃는 소리를 떨쳐낼 수 없었다. ‘그들은 스스로 장담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계속 이류로 남아 있다. 이류로 남아 있다. 이류로 남아 있다.....’
머릿속에서 되풀이되는 그 마지막 문장이, 인상주의운동의 운명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이 모든 노력을 쏟아붓는 게 실수일까. 샤르팡티에 부인의 살롱에서 내린 결정은 열정이 지나친 무모한 것이었을까.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이렇게 흔들리는 마음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것은 여기 모인 모든 이들의 노력을 욕보이는 것이었다.
모델들은 쉬는 시간도 마다했다. 오귀스트는 빛이 사라질 때까지 쉬지 않고 그렸다. (P334-335)
소름 돋게 하는 쇳소리. 알폰진이 화들짝 놀랐다. 물감 긁는 나이프의 그 넓은 날이 튕겨져 나올 때 나는 높은 소리가 ‘팅’하고 울렸다. 알폰진은 벌떡 일어나 옷 단추를 채웠다. 겁이 덜컥 났다. “제길!” 오귀스트는 캔버스를 내리치다시피 하고 있었다. 물감이 벗겨져 얼룩덜룩해진 부분들로 그림은 흉측했다. 상처들. 커다란 것 하나는 키르케였고, 더 작은 부분들이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앙젤의 얼굴이 알아볼 수 없게 뭉개져 있었다. 알퐁스는 머리 윗부분이 지워지고 없었다. 악몽 속 한 장면 같았다.
알폰진은 칼을 쥐고 있는 오귀스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만 해요. 무엇이 남았는지 나도 봐야겠어요. 살릴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그는 알폰진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더니 그림 속 그녀의 턱과 코를 긁어냈다. 마치 현실의 자신도 지워지는 것만 같았다. “내가 포즈를 잘못 섰나요?” 그녀가 소리쳤다.
“아니. 내 실수야.”
“조금씩 손을 보면 되잖아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좀더 라울 쪽을 바라보게 해야 해. 그건 당신 모자와 손도 바뀌어야 한다는 뜻이야.”
“앙젤은 뭐가 잘못됐는데요?”
“머리 각도가 틀렸어. 눈이 귀스타프를 정면으로 보고 있지 않아. 그와 안토니오 사이 어디쯤에 시선이 가 있지. 모자도 머리에서 너무 왼쪽으로 가게 그렸어. 실제로 저렇게 쓴다면, 고개라도 잠깐 들라치면 곧장 벗겨지고 말겠지.”
“하지만 앙젤의 표정을 마음에 들어했잖아요.”
“엘렌은 훨씬 더 오른쪽으로 가야 해. 쥘과 샤를 사이로. 쥘 바로 앞이 아니라.” 그는 물감을 계속 긁어냈다. “엘렌은 나중에 시간이 나면 그때 내 작업실에서 다시 해야겠어.”
“그럼 다 조금씩 손보면 되는 거네요.” 이번 것은 분명 질문처럼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P346-347)
“남은 시간은 삼 주뿐이야. 빛도 바뀔 거야. 대작에 얼추 비슷하기는 하지만 결국 능가하지는 못하는 그림을 그려낸다면, 내 재능은 <물랭 드 라 갈레트> 이후로 사그라지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꼴이 돼. 수명 짧은 화가. 어설픈 그림. 어리석게 야망만 높아 양식을 뒤죽박죽 뒤섞어놓았다고 언론은 혹평을 해대겠지. 인물들이 정체불명의 마술 담요를 타고 하늘을 떠다닌다고 할 거야. 아니면 바지선인가? 서로 다른 계급의 사람들이 도시와 시골 중간 어딘가에 한데 섞여 있다는 주제는 생각 없다 비웃음을 사겠지. 게다가 정부가 지원하는 살롱전으로서는 곱게 봐넘기지 못할 사회적 위협일 테고, 만평이나 그려다는 작자들은 <최후의 만찬>을 저급하게 재탕했다면서 모델 중 누군가는 끔찍한 일을 당할 거라고 신나서 입을 놀리겠지. 그 누가 계획했는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한데 섞인 음산한 분위기, 장렬한 실패. 뭘 보여주려는지 알 수 없는 애매함.”
“그만 해요! 당신, 지금 자기한테 화내고 있어요.”
팔레트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덜그럭 소리를 냈다.
“모파상이나 드가가 틀렸다는 거 증명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의 생각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결국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당신의 그 철학일지도 몰라요. 이 불행한 현실을 달래주는 거요.”
“난 철학자가 아냐. 화가일 뿐이야.” (P348)
“내 생각에 인상파에는 두 부류가 있는 것 같아.” 그가 말했다. “하나는 내가 ‘종합주의자’라고 부르는 부류인데, 형태를 중요시하지. 세잔처럼 말이야. 다른 하나는 ‘광선주의자’라고 하는데, 빛과 색깔의 문제에 더 치중하는 이들이야. 모네와 피사로처럼. 내가 맞나?”
“네, 그렇게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이 그룹은 조금씩 계속 변하고 있어요.”
“하지만 자네는 어디에 넣어야 하나?”
“글쎄요. 중간에 서서 왔다갔다 계속 흔들리고 있는 것 같네요.”
“이것을 좀 보게!” 탕기 영감은 마치 아이를 자랑하는 엄마처럼 행복에 겨운 얼굴로 사과와 배를 그린 정물화를 보여주었다. “난 이걸 보고 하마터면 울 뻔했다네. 명작 중에도 이런 명작이 없어. 저 접혀 있는 식탁보는 꼭 눈 덮인 생 빅투아르 산 같지. 탁자의 각도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 그는 안경 너머로 오귀스트를 쳐다보았다. 반쯤 넋이 빠진 모습이었다. “저이는 성자야.”
이 가게에 있는 그림은 단지 캔버스 위의 물감이 아니라, 세잔 그 자신이었다. 산처럼 거대한 것뿐 아니라 사과 한 알처럼 보잘것없는 것의 본질을 꿰뚫기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그리고 사과와 그, 혹은 산과 그 사이의 영적인 관계를 표현하려는 그의 겸손한 자세. 그는 고독과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 자신을 캔버스 위에 쏟고 또 쏟음으로써 자기만의 열반을 찾아가고 있었다. (P363-364)
알폰진은 너무 놀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아주머니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마치 상처가 다 아물어 이제는 희미한 흔적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있었다. 알폰진은 그 마음을 모자가게에 다녀온 지금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삶에는 우리 손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 알폰진은 생각했다. 우리가 강물 위를 떠다니는 코르크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하지. 그러니 유쾌하게 떠다녀야 해.
알폰진은 모자 둘레를 한 번 감을 수 있도록 그물처럼 얇은 명주를 1미터 집어들었다. 화사해 보이도록 실크로 만든 양귀비도 세 송이 집었다. 앞쪽 가운데가 검은 다홍색 양귀비였다. 뒤쪽을 장식할 것으로 흰 장미를 세 개 골랐다. 그것은 티레 아저씨에 대한 추억이었다.
“자네 그 예쁜 얼굴에 쓰면 아주 멋진 모자가 되겠구먼.” 부인이 물건들을 신문지에 싸며 말했다.
“제가 쓰려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예쁜 얼굴의 여자이기는 해요. 지금은 더 예쁘죠.” (P444-445)
열네번째 인물말고 무슨 문제가 더 남았는가? 그늘을 더 짙게 하고, 흰색으로 하이라이트를 더 두껍게 주고, 붉은빛을 더 돌게 하고, 균형을 맞추고, 여기저기 강조를 주었다. 특히 실내의 빛이 지금 여기서 보는 것처럼 색깔을 살려주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두루 색조를 더 밝게 했다. 이 작업은 아직 더 남아 있었고, 그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안도감일까. 하지만 그림 전체를 망쳐버릴 수 있는 치명적인 문제가 아직도 그의 머릿속을 울리고 있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여기 메종 푸르네즈 테라스에서 그림 그리기를 삼 년이나 미워왔었다. 이 테라스가 공중에 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영락없이 조롱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손가락 관절이 갑자기 욱신거렸다.
“마무리는 나중에 작업실에서 할게요. 실내에 전시될 거라 안에서도 괜찮은지 봐야 해요.”
“그럼 우리 이제 모델은 다 선 건가요?” 알폰진이 몸을 일으켰다. 꼭 닫힌 입술은 모나리자처럼 알 듯 모를 듯한 웃음을 보였지만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괘였다. 입술과 이마는 서로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오귀스트는 그 얼굴에서 그림을 끝낸다는 것이 그녀에게 어떤 뜻인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의 마음도 둘로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차마 대답이 떨어지지 않았다. “모여서 그리는 일은 끝났다고 합시다.”
앙젤이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피에르가 모자를 던졌다. 자크 발랑탱이 짖어댔다. 폴은 두 손을 번쩍 들고 소리쳤다. “이제 구경할 일만 남았구나!”
푸르네즈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위층으로 올라왔다. 그림을 보려 모두가 일어섰다.
“세상에! 아름답구나. 오귀스트. 정말 아름다워.” 루이즈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이게 우리예요?” 알린이 소리쳤다. 그녀는 강아지를 들어올렸다. “저기 봐, 자크 발랑탱 아리스티드 데수아 쉬르 루르스. 저게 너야!”
“마네가 그린 것과는 정말 다르네요.” 엘렌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그저 카페에 외로이 앉아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렸는데, 이것은 마치 내가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한 모금 마시는 중인 것 같아요.”
“우리의 르누아르 씨는 분열되어가는 사회는 마네와 드가, 라파엘리에게 떠넘겨버렸어요. 여기엔 진정한 친교가 있지요.” 귀스타프가 말했다. (P519-522)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그가 말했다. “내 남은 평생 여기 산다면 만족스럽겠죠.”
“누가 그러지 않겠어요.”
“아뇨. 그런 사람이 있지요. 오귀스트는 아닐 거예요. 그는 하나에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이것에서 저것으로 마음이 옮아가죠. 풍경을 그릴 땐 나무숲을 배경으로 흐르는 강물을 사랑해요. 배를 사랑하고, 강물에 비친 그 모습도 사랑하죠. 빛이 만들어내는 모습도 사랑하고, 여자를 그릴 땐 그 여자를 사랑해요. 정물을 그린다면 꽃잎 하나하나를 사랑하죠. 그와 대상과 빛이 합작으로 만들어내는 것.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셋이 함께 빚어내는 그것을 바라보며 기뻐하죠. 하지만 그걸 끝낸 순간에는 다른 것에게로 가버려요.”
“아님 다른 사람에게? 지금 그 말이에요?”
“그는 다음, 다음, 또 다음으로 상대를 바꾸어가며 그림의 영감을 받아요. 그의 관심을 독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여자는 불행할 수밖에 없어요.”
알폰진 역시 짐작은 하고 있었다. 특히 알린이 오고 나서부터는. 하지만 이렇게 남의 입으로 듣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알폰진. 오귀스트와 어떤 사이인지 지켜보았어요.” 귀스타프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세심하게 그림을 도우면서 언젠가부터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려 했지요.” (P578)
“빛이 필요했어.”
귀스타프가 물을 퍼내듯 팔을 휘둘렀다. “문제를 해결했구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여기가 건물의 일부라는 걸 알겠어. 브라보!”
처음으로 그림을 멀리서 보았다. 각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난간의 대각선과 식탁 가장자리. 그리고 차양이 인물들을 한 공간 안에 모아주는 것이 보였다. “왜 이 간단한 해답이 처음부터 떠오르지 않았던 걸까?”
“원래 답은 산전수전 겪으며 씨름한 다음에야 나오는 거니까.” 귀스타프가 대답했다.
“그렇고말고요.” 쥘이 끼어들었다. “난 감히 이렇게 말하겠어요. 진정한 예술가라면 자기 작품에 필요한 걸 찾으려는 노력으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영국의 어떤 시인은 이런 말을 했지요. ‘내가 가진 것, 가장 초라하구나.’(셰익스피어 <소네트> 29번의 한 구절) 고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진짜 예술가와 가짜 예술가의 차이예요. 어떤 분야에서든.”
그들은 이해했다. 오귀스트가 아무리 기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그리지 않겠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해도 그림에는 모든 걸 쏟아붓는 고통스러운 노력이 필요했다. 그림을 계속 그려내기 위해서는 그 고통을 참는 수밖에 없었다.
“저 베네치아의 거장들 이후로 이렇게 눈부시도록 빛나는 그림은 없었소이다.” 샤를이 말했다.
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 전체가 진동하는 색깔들의 향연이지요. 수천가지 색조와 붓질들이 미묘한 음영으로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어요.”
오귀스트는 쏟아지는 찬사에 그저 자신을 내밀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동안 얼마나 몸이 지쳐 있었는지, 얼마나 근육이 긴장되어 있었고 관절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리고 싶은 친구들의 모습이 그 앞에 있었고, 바로 그 덕분에 오늘까지 올 수 있었다. 거의 두 달 동안, 오늘까지 포함해 여덟 번의 점심, 스무 개가 넘는 물감들, 여자 다섯과 남자 아홉, 그리고 푸르네즈 ‘어머니’와 ‘아버지’. 그를 도운 모든 이들의 모습에 그의 마음은 다시 기쁨으로 넘쳤다. 두 달 동안 모델들은 그의 것이었고, 그는 그들의 것이었다. 지금이야말로 그의 인생의 정점이었다.
완벽한 구성과 완벽한 붓질. 완벽한 색과 모델, 그리고 완벽한 여자를 찾던 그의 노력. 감히 그 답을 찾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일 아침, 아니면 아주 먼 훗날 아침이 되면 그는 잠에서 깨어나 이 모든 것이 간밤의 꿈이었다고 생각하게 될까? 너무 매혹적이어서 현실로 착각할 수밖에 없었던 환상이었노라고?
앞으로 지금만큼 행복한 순간이 다시 올까? 지금처럼 희망으로 가득 찬 그런 날이? 진심으로 그렇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는 바뀌어야 했다. 이 그림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인상주의를 일으켜 세워야 했다. 적어도 인물에서는, 눈앞에 흐려지며 이런 생각이 희미해졌다. 그는 혁명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 그를 떠난다. (P610-611)
“수만 명이 보게 될 겁니다. 아주 멀리서도 이 그림을 보러 오게 될 거요.”
알린과 엘렌, 앙젤, 잔 알폰진이 한 줄로 서 있었다. 알폰진을 가운데 두고 서로 팔짱을 끼고 선 그들의 얼굴은 환하게 빛이 났다. 코러스라인. 그는 목이 메었다.
“내 모든 사랑하는 여인들이여.” 평소보다 높은 목소리로 말이 튀어나왔다. 그가 사랑한 모든 여자들은 모두 자신의 방식대로 용감했다.
“앞으로 이 그림을 보게 될 사람들이 여기서 뭘 보기를 원합니까?” 뒤랑 뤼엘이 물었다.
“삶의 아름다움.”
혹은 사랑의 그림. 그리고 그림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둘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그림은 그가 결국 포기해야만 하는 모든 것들의 상징이었다. 그의 태평함, 보헤미안적 삶, 그리고 인상주의. 이 모든 것들을 포기할 날이 어쩌면 생각보다 더 빨리 올지도 몰랐다. 이 그림은 새로운 도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지표 그 자체였다.
가만히 정지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인생에든 예술에든. (P616)
르누아르는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을 1881년에 완성하고 서명했으며, 폴 뒤랑 뤼엘은 1881년 2월 14일에 그림을 사들여 한 파리지엥 컬렉터에게 팔았다가 1882년 초에 다시 사들였다. 뒤랑 뤼엘은 르누아르의 뜻과는 반대로 (결국엔 마지못해 동의하기는 했지만) 이 그림을 1882년 3월에 열린 제7회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했으며, 그 뒤에는 런던, 취리히, 뉴욕 등지에도 선보였다. 살롱전에는 출품하지 않았다. 뒤랑 뤼엘은 이후 죽을 때까지 그림을 개인소장했다. (P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