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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사탄탱고>

영화 <사탄탱고> 1994년

by 노용헌

Sátántangó는 영어로 사탄의 탱고로도 알려져 있으며, 헝가리 영화제작자 벨라 타르(Béla Tarr)가 감독한 1994년 영화이다. 흑백으로 촬영되어 7시간 이상 상영되는 이 영화는 헝가리 소설가 라슬로 크러스너호르커이의 1985년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타르는 1988년 영화 ‘저주’(Damnation) 이후 그의 작품을 자주 각색해왔다. 타르는 1985년부터 이 영화를 제작하기를 희망했지만 헝가리의 엄격한 정치 환경 때문에 제작을 진행할 수 없었다. 사탄탱고는 영화 평론가들로부터 광범위한 찬사를 받았고, 2012년 영국영화연구소가 선정한 ‘Sight & Sound Critics’ 상위 50개 영화에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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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슬픈 기분으로 불길한 하늘과 메뚜기 떼가 휩쓸고 간 지난여름의 잔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홀연 그는 환영처럼 아카시아 가지 위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마치 시간이 움직임 없는 영원의 원 속에서 유희를 벌이고 혼돈의 와중에 귀신이 재주를 피우듯 기상천외한 망상을 진짜로 믿게 하려는 것 같았다…. (P14-15)


후터키는 마음이 누그러져 양보를 해줄까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눈은 빛 속에서 맴도는 수많은 먼지들을 보았고, 코는 눅눅한 부엌 냄새를 맡고 있었다. 갑자기 혀 끝에 신맛이 느껴졌다. 그는 그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농장이 해체되고,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처럼 또 미련 없이 떠나가버린 뒤에 의사와 학교 교장을 포함해 오직 그와 몇몇 집들만이 남았는데, 누구도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랐다. 그때부터 그는 음식 맛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죽음은 무엇보다 수프와 고기 접시에, 그리고 담벼락에서부터 스며들어올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음식을 삼키기 전에 오랫동안 입안에 물고 있었고, 물이나 혹은 드물게 식탁에 오르는 와인을 마실 때도 아주 천천히 목구멍으로 넘겼다. 가끔씩 그가 사는 오래된 점프하우스의 기계실에서 석회 덩어리를 깨 한 조각 맛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는데, 그렇게 향과 입맛의 질서를 무참히 깨트릴 때 어떤 경고를 인식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는 죽음이 절망적이고 영구적인 종말이 아니라 일종의 경고라고 확신했다. (P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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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1년 반 전에 죽었는데. 1년 반 전이라고! 누구나 그렇게 알고 있어. 그런 사실을 가지고 장난치면 안 되지. 속임수에 넘어가면 안 돼! 이건 덫이야. 알겠어? 덫이라고!” 후터키는 듣고 있지 않았다. 벌써 외투의 단추를 잠그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제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가는 걸 보게 될 거야.” 한 치의 의심도 없는 확신의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후터키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슈미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그는 말했다. “이리미아시는, 위대한 마법사라네. 마음만 먹으면 소똥으로 성을 지을 수도 있지.” (P35)


슈미트가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크라네르 부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기들 계셨네! 그 얘기 들었어요?” 후터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고 모자를 머리에 눌러썼다. 슈미트는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 남편은 벌써 갔어요.” 크라네르 부인이 요란하게 말했다. “혹시 댁들이 모르면 알려주라고 날 여기로 보낸 거죠. 하지만 벌써 알죠? 헐리치 부인이 여기 들른 걸 봤어요. 난 방해할 생각없고 금방 갈 거예요. 아, 그리고 남편 말이, 돈은 훔쳐가려면 맘대로 하래요. 그런 건 우리한테 아무것도 아니래요. 그렇게 말했어요. 남편 말이 옳지요. 숨어 다니고 시치미 떼고 밤잠도 못 자고....., 우린 그러고 싶지 않거든요. 이리미아시가 뭔가 보여줄 거예요. 곧 보게 될 거라고요. 페트리너와 함께요. 난 그들이 죽은 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처음부터 알았어요. 아니면 내 손에 장을 지져요. 그 호르고시네 자식은 원래부터 믿을 수가 없었잖아요. 눈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이제 여러분도 보게 될 거예요. 전부 다 그 애가 지어낸 얘기라는 걸요. 그런데 우리가 그 말을 믿다니요.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요.” 슈미트는 기분이 상한 얼굴로 크라네르 부인을 훑어보았다. “그 얘기를 믿는다는 거예요?” 그는 이렇게 묻고는 짤막하게 웃었다. 크라네르 부인은 눈썹만 치켜세우더니 소란스럽게 문으로 나가버렸다. “가보겠나?” 그렇게 물은 뒤에 후터키는 잠시 문지방에서 기다렸다. 결국 슈미트가 앞장서 가기 시작했고 후터키도 비틀거리며 그의 뒤를 쫓아 걸었다. 바람에 코트 자락이 펄럭였다. 후터키는 어둠 속에서 지팡이로 길을 짚었고 다른 손으로는 모자가 진창에 떨어지지 않도록 꽉 눌러 붙들었다. 사나운 빗줄기 속에서 슈미트의 욕설과 후터키의 기대에 부푼, 기운을 북돋아주려는 말이 뒤섞였다. 후터키는 말하고 또 말했다. “짜증 내지 말라고, 보란 듯이 잘살 수 있게 될 테니까! 흥청망청 마음껏 즐기며 살 거야!” (P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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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컴한 수풀들이 듬성듬성 널려 있는 지평선까지의 길은 오로지 진창뿐이다. 모든 사물의 형태와 색을 쓰러뜨리고, 움직이지 않는 것을 움직이도록 만들며, 움직이던 것은 정지시키는 어둠이 짙게 깔린다. 이제 길은 진흙에서 만들어진 세상의 한복판에 고요하게 놓여 비밀스럽게 동요하는 한 척의 배와 같다. 납덩어리 같은 하늘에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짐승의 바스락거림조차 들려오지 않는 적막이 새벽안개처럼 들판을 꽉 채웠다. 다만 진흙이 숨을 쉬는 것처럼, 저 멀리 노루 한 마리가 솟았다가 지평선에 삼켜지고 만다. “하나님 맙소사!” 페트리너가 탄식한다. “내일 아침까지 계속 걸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다리에 쥐가 나네! 슈타이거발트에게 트럭을 빌렸으면 좋으련만, 게다가 이 코트! 무슨 역기라도 든 것처럼 무거워!” 이리미아시가 걸음을 멈추고 돌로 만든 이정표에 발을 올리더니 담배를 꺼낸다. 두 남자는 둥글게 주먹 쥔 손 모양을 하고 담배를 피운다. “뭐 좀 물어봐도 되나?” “음.” “우리 대체 뭐 하러 농장으로 가는 거지?” “뭐 하러 가냐고? 자네 잠잘 덴 있나? 먹을 것은? 돈은? 이제 그만 좀 징징거리지. 내가 목을 졸라버리기 전에 말이야.” “그래, 좋아. 알겠다고. 그렇다고 쳐도, 내일모레면 다시 돌아와야 하잖아, 안 그래?” 이리미아시는 그 말을 듣고 이를 꽉 깨물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페트리너가 한숨을 쉰다. “이보게. 친구, 자넨 머리가 좋으니까 무슨 생각이 있겠지! 나는 농장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싶지 않아. 난 한군데서만 머무는 성격이 아니야. 이 페트리너는 탁트인 하늘 아래 태어난 놈이고, 그렇게 자유롭게 살다가 그렇게 죽을 거라고.” 이리미아시가 그만하라는 손짓을 한다. “이봐, 우린 똥구덩이에 빠졌어, 한동안은 저 대위란 놈에게서 벗어나기가 어려울 거야.” 페트리너가 두 팔을 벌렸다. “대장!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내 심장이 졸아드네!” “바지에 오줌 지리지나 말라고. 농장에서 사람들 돈을 빼돌려서 사라질 계획이야.” 둘은 계속 걷는다. “그자들이 돈이 있다고?” 페트리너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묻는다. “농부들은 언제나 뭔가를 쟁여 두고 있지.” 두 사람은 몇 시간 동안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수킬로미터를 걷는다. 어쩌다가 하늘에 별 하나가 반짝이는 것도 같지만, 짙은 어둠이 내내 이어진다. (6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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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자들은 여전히 더러운 의자에 주저앉아 저녁마다 감자 요리나 먹으면서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의아해하고 있을걸. 의심에 가득 차 서로를 감시하고 조용한 방에서 큰 소리로 트림이나 하고. 그리고? 기다리는 거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끝도 없이 기다리다가, 누군가 자기들을 속인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겠지. 돼지를 잡는데 혹시 뭐 주워 먹을 거라도 떨어질까 싶어 바닥에 배를 댄 채 도사리고 앉아 기다리는 고양이처럼 말이야. 그자들은 옛날 성에서 시중을 들던 때와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어. 주인은 벌써 머리에 총알을 박고 자살했는데, 저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시체 주위에서 우왕좌왕하는 거야….” (P71)

고생대가 끝나가면서 중부 유럽 전체에 걸쳐 침강이 시작된다. 이 과정은 당연히 우리 헝가리에서도 일어난다. 이 새로운 지질 환경에서 고생대 지형은 계속 낮아져 바닷속 해양 침전물로 뒤덮인다. 침강이 계속되면서 오늘날 헝가리 영토는 남유럽을 덮는 바다의 북서부 분지가 된다. 바다는 중생대에도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의사는 창가의 차갑고 축축한 벽에 뺨을 대고 울적하게 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물려주신 꽃무늬 자수 커튼과 녹슨 창틀 사이로 바깥의 농장을 내다보기 위해서는 굳이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었다. 그저 책에서 눈을 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고, 아주 작은 변화라 할지라도, 그는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혹시라도 --생각에 골몰하거나 방의 다른 편에 가 있느라고-- 뭔가를 보지 못할 때는 그의 예리한 청각이 눈의 역할을 대신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생각에 깊이 빠지는 일은 별로 없었고, 겨울 외투와 이불을 채워 넣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었다. (P8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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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몇 달 전에 그는 더 이상의 실험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설령 자기가 원한다 해도 이제는 어떤 변화도 일으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저렇게 변화를 줘봐도 썩 흡족하지가 않았다. 시도는 무언가 변했으면 좋겠다는 욕구의 은밀한 현시거나, 혹은 기억력 쇠퇴의 증표일 뿐이었다. 실제로 그가 몰두한 것은 주변의 외적인 몰락에 맞서 자신의 기억력을 지켜내는 일이었다. 농장 해체가 통고되고 그를 정직 처분한 위원회의 결정이 철회되기를 기다리며 그곳에 남겠다고 결심한 이래로, 또 농장이 사망 선고를 받고 형편없이 몰락하자 사람들이 소란스레 짐차에 짐을 싣고 고함을 쳐대며 우왕좌왕하다 차를 타고 떠나가는 광경을 호르고시네 맏딸과 방앗간에서 지켜본 이래로 그는 자신은 무력하며, 점령해오는 몰락을 혼자서는 절대로 저지할 수 없다고 느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모든 것 --집들과 담장들, 나무와 들판, 공중에서 하강하며 나는 새들, 배회하는 짐승들, 육신을 가진 인간들, 욕망과 소망들--을 파괴하고 소멸시키는 힘에 맞설 수는 없었다. 그럴 능력이 없었다. 그는 인간의 삶에 대한 위협적인 공격에 헛된 저항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음험한 몰락에 자신의 기억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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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모든 것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하찮은 세부라도 놓쳐선 안 되었다.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고 간과하는 것은 몰락과 질서 사이에 놓인 흔들리는 다리 위에 아무런 대책 없이 서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담배 부스러기나 야생 거위가 날아간 방향이나 별 뜻 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행동 같은 것들도 그 연결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관찰해야 했다. 그래야만 자신도 어느 날 갑자기 흔적 없이 사라져서 저 끊임없이 무너져가는 질서의 말 못할 포로가 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다. (P88)


의사는 잡지에 실린 글에는 관심이 없었다. 지금처럼 시간을 죽이려 할때면 그는 사진들을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했다. 대개 그의 흥미를 끄는 것은 아시아 지역의 전쟁 르포 사진들로, 그에게는 그것이 멀리서 일어나는 일이나 이국적인 무언가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그 사진들이 가까운 곳에서 촬영되었다고 확신했고, 그중 어떤 얼굴들은 낯익게 다가올 정도였다. 그는 그 얼굴들을 알아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들에 순위를 매겨두었기 때문에 쉽게 펼쳐 찾아낼 수가 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선순위가 바뀌기도 했지만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언제나 항공사진이었다. 누더기 차림의 거대한 인간 행렬이 사막 같은 지역에서 길게 열을 지어 있고, 연기와 불길이 솟아오르는 배경에는 폭격을 맞고 파괴된 도시의 잔해가 있었다. 긴 행렬의 앞쪽에 있는 것은 위협적인 커다란 어둠뿐이었다. 그 사진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언뜻 불필요한 부분같이 사진 왼쪽 구석에 모습을 드러낸 군사용 감시 장비였다. 그의 생각으로는 이 사진은 특별히 자세하게 살펴볼 가치가 있었다. 사진은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여, 탁월하게 인간적인 추적 관찰에 있어서 거의 영웅적인 절정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거리는 최적이었고 관찰자의 면밀함도 느껴져서, 의사는 꿈에서 여러 차례 그 사진속 기계를 보는가 하면 확실한 동작으로 직접 사진기의 셔터를 누르기까지 했다. 지금도 그는 거의 정해진 행동처럼 그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사진을 세부까지 잘 기억했지만, 매번 볼 때마다 지금껏 알지 못한 부분을 새로이 발견하게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번엔 안경을 썼는데도 사진이 어쩐지 흐릿하게만 보였다. (P103-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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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그는 자신을 향해 공허하게 고정된 농부의 시선을 뜻 모를 위협으로 느끼며, 자기가 책임을 질 만한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는지 기억 속을 훑었다. 이처럼 숨 막히는 순간에 괴로워하며 자기 인식의 심연으로 던져진 그가 깨달은 것은, 뇌리를 스치고 가는 그의 파란만장한 쉰두 해의 삶이 불타는 집에서 피우는 담배 연기처럼 사소하고 무의미하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런 짧고 공연한 죄책감은 그를 깊숙이 뒤흔들어놓기도 전에 곧 사라져버렸다(그건 과연 죄책감이었을까? 죄책감이란 한번 혜성처럼 작열하고 나면, 이후엔 여명처럼 희미한 의식의 불편함 정도만 남기는 것이다). 만일 그러지 않았다면 죄책감은 히스테리를 일으켜 입과 목구멍, 식도, 위장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추위 때문에 모든 게 더 나빠졌다. 술집 주인의 등받이 없는 의자 옆에 놓인 와인 상자를 힐끗 본 것만으로도 상상력은 마구 날뛰어 그를 삼켜버릴 것 같았다. (P122-123)


끝나가는 시월의 밤은 고유한 리듬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말이나 상상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질서에 따라 나무들을, 비와 진창길을, 노을과 서서히 내려앉는 어둠을, 피로하게 움직이는 근육을, 정적을, 구부러진 길과 풍경을 두들겼다. 머리카락은 무리하게 움직여야만 하는 몸과는 다른 리듬을 따랐고, 성장과 몰락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럼에도 수없이 두들기고 되울리는 한밤의 소리들은 짐짓 절망을 가리는 한 가지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한 장면 뒤로 불현듯 또 다른 것이 모습을 드러내고, 눈에 보이는 경계를 넘어서면 현상들은 서로 관련이 없어졌다. 마치 영원히 닫히지 않는 문처럼, 틈이, 균열이 있었다.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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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에는 어리석을 정도로 과소평가되는 ‘고귀한 단순성’이랄지, 신비로운 효력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었다. 단순성과 효력 사이의 긴장으로부터 첨예한 각성이 일어났다. 그것은 ‘전망을 가질 수 있는 상태’를 뜻했다. 그런데 과연 이리미아시라고 하는 저 뼈만 앙상한, 잿빛 머리를 가진, 생기 없이 쳐다보는, 말상의, 쓰레기 같은, 아니 쓰레기인, 망종인, 쓰레기터의 바퀴벌레 같은 놈을 제압할 만한 숫자가 있을까? 과연 어떤 숫자가 지옥에서 곧장 온 사기꾼을 이길 수 있을까? 예측할 수도 없고 신뢰할 수도 없는 자를? 적당한 단어가 없었다. 어떤 말로 표현해도 충분치가 않았다. 그에게 제값을 치르게 하려면 말이 아니라 힘이 필요했다. 그는 자기가 쓴 것에 밑줄을 그었고 숫자들은 의미심장한 빛을 발했다. 숫자들의 역할은 상자 속에 남아 있는 포도주와 맥주, 레모네이드 병의 개수를 알려주는 것만이 아니었다. 절대로! 숫자들은 갈수록 많은 이야기를 그에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는 자신이 점점 커가는 걸 알 수 있었다. 숫자들이 해주는 이야기가 많을수록 그의 자아는 강대해졌다. 몇 년 전부터는 그의 탁월함에 대한 자의식이 스스로를 어색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제 그는 탄산수가 놓인 쪽으로 가서 자신의 기억이 정확한지를 확인했다. 왼손이 떨리기 시작하자 그는 불안해졌다. 이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마주하기 싫은 질문을 던져야만 했다. ‘이리미아시, 그자의 의도는 무엇일까?’ 그는 구석에서 들려오는,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에 일순 피가 얼어붙었다. 말하는 법을 배운 지옥의 거미를 상상했기 때문이다. (P136-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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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만 지나면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가 도착해 몇 년 동안 계속되어온 비참과 불행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었다. 음습한 정적과 아침에 그가 들었던 괴상한 종소리. 그로 하여금 황망히 침대에서 일어나 땀을 흘리며 창밖을 무력하게 바라보도록 만든 그 죽음의 종소리 또한 사라질 것이다. 술집에 들어온 후로 한마디도 하지 않던 슈미트는 고개를 쳐들고(그는 크라네르와 자기 아내가 시끄러운 술집에서 돈을 나누는 동안 사람들에게 등을 돌린 채로 앉아 있었다) 벌써 술에 취해 흔들거리는 아내에게 타박을 했다(“머리까지 취했다더니! 술에 곯은 건 당신이로군!”). 그러더니 그녀의 잔을 막 채우려는 후터키를 향해 말했다. “더 이상은 술 주지 말라고, 빌어먹을! 이 사람 취한게 보이지도 않나?” 후터키는 대답하지 않았고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으로 알았다는 시늉만 하고는 재빨리 술병을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후터키가 몇 시간 동안 설득하려 했지만 슈미트는 고집스레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슈미트의 생각으로는 그냥 술집에 얌전히 앉아서 상황을 주시하는 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선물처럼 주어진 선택이었다. 이리미아시가 도착하기 전의 혼란을 틈타 돈을 챙겨서 (가능하면 크라네르도 따돌리고) 농장을 뜨는 것보다는 그게 낫다는 것이었다. 후터키는 내일부터 모든 게 달라질 수 있다. 인생에 딱 한 번 찾아오는 운이 트이려는 순간인데 왜 그러나, 그저 조용히 내 말대로 따라주기만 하면 된다고 슈미트를 열심히 설득했지만, 그는 비웃는 표정으로 묵묵부답이었다. (P194-195)


불행은 너무나 오랫동안 그들을 비켜 가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후터키 역시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슈미트의 요지부동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리미아시가 모든 상황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맹목적인 희망 자체가 그 어떤 가능성들보다 더 값지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오직 이리미아시에게만 농장 사람들이 포기하여 내버린 일들을 다시 건져 올릴 능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인데, 그걸 갖지 못하게 된 게 무슨 대수랴?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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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나날의 삶 속에서 반복되며 우리를 안심시키는 명백함이라는 것이 (‘어떤 불가피한 황혼 무렵에’) 실은 도살자의 칼에서 번쩍이는 섬광에 다름아닌데도, 우리는 우리가 어떤 의심도 품지 않고 따라서 이해할 수도 없는 저 두려운 작별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구원의 손길, 도망칠 가능성 같은 건 없었다. 그는 부스스한 머리를 흔들어 두려운 생각을 떨쳐내려 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째서 어느 날 돌연히 땅에 얼굴을 처박고 어둠 속 냄새나는 늪에서 벌레들과 함께 영원을 보내야 하는 걸까? 대체 누가 그런 생각을 납득할 수 있을까?’ 후터키는 젊었을 때부터 ‘기계광’이었고, 오물을 묻히고 토하기까지 한 젖은 허수아비의 몰골을 한 지금도 그랬다. 간단한 펌프에조차 어떤 규칙성과 질서가 들어 있는지 아는 그는 이 혼란스러운 세계에도 (‘기계가 그렇듯이’) 희미하게나마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빗속에 망연히 서 있다가 스스로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후터키, 이 바보 같은 놈! 처음엔 돼지처럼 진흙에서 뒹굴더니 이제는 길 잃은 양처럼 여기 서 있구나, 백치가 돼버린 거냐? 마시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술을 퍼마시다니! 그것도 빈속에!’ 그는 짜증난 듯 고개를 젓고 자신의 몰골을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한심해하며 옷을 단정히 하려 했으나 바지와 셔츠가 온통 더러워져 있어서 소용이 없었다. (P210-211)


움직이는 대상에 거미줄을 치기는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손님이 가고 주인이 문을 걸어 잠그는 순간부터는 거미들은 활약을 재개했다. 유리잔을 씻어놓고 청소를 하고 장부를 덮은 다음이면 그는 다시 청소를 시작해야 했다. 가느다란 거미줄은 구석과 테이블, 의자 다리와 창틀, 난로와 쌓아놓은 상자들, 그리고 때로는 카운터에 놓은 재떨이에까지 그물을 쳤다. 상황은 갈수록 나빠졌다. 간신히 할 일을 마치고 창고에서 욕을 하며 잠을 청할 때도 거미들은 절대, 한시도 봐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결코 편히 쉴 수가 없었다. 그러니 거미줄을 연상시키는 것이면 무엇이든 그가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몇 번인가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광분하여 창문의 쇠창살을 쥐고 흔든 적도 있었다. 물론 맨손으로 창살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한번은 아내에게 이렇게 하소연하기도 했다. 가장 기분 나쁜 것은 한 번도 거미를 직접 목격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카운터 뒤에 도사리고 앉아 밤을 꼬박 새우며 지켜본 적도 있었지만, 그럴 줄 알고 있다는 듯이 그날 거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거미를 박멸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하지만 대체 어떤 놈의 거미인지 언젠가 한 번은 두 눈으로 보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계속 품고는 있었다.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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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보기만 해도 말할 수 없는 역겨움에 휩싸였다 다음 순간 어찌된 일인지 작은 남자는 눈앞에서 사라져버렸고 의사는 경멸의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말할 수 없이 피곤해져서 그만 가달라고 손짓했다 헐리치 부인은 슈미트 부인의 등을 씻겨주고 있었다 욕조 가장자리에 걸쳐진 장미 화환이 뱀처럼 천천히 물 속으로 미끄러졌다 창 너머에서 10대 남자아이가 웃고 있었다 슈미트 부인이 이젠 충분하다고 너무 문질러서 등이 화끈거린다고 말했지만 헐리치 부인은 그녀를 욕조에 밀어 넣고 계속해서 등을 문질렀다 헐리치 부인은 슈미트 부인이 자기에게 만족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갑자기 슈미트 부인이 성을 내면서 병에 걸려 죽어버리라고 말하며 욕조에 걸터앉았다 창너머에선 여전히 빙긋 웃는 악동 소년이 보였다 슈미트 부인은 한 마리 새였다 그녀는 행복하게 하얀 구름 속으로 날아올랐다 땅 위에서 누군가 손짓하는 걸 보고 고도를 낮추었다 그녀는 슈미트 부인이 지르는 소리를 들었다 왜 요리를 하지 않는 거야 이 게으른 여자야 어서 내려오지 못해 하지만 새는 그녀 위를 날아갔다 내일까지는 굶어 죽지 않을 거야 그녀는 햇살이 등을 따뜻하게 하는 걸 느꼈다 갑자기 슈미트 부인은 옆에서 그만두지 못해 당장 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좀 더 낮게 날았다 그녀는 벌레를 잡고 싶었다 후터키는 쇠로 된 채찍으로 누군가의 등을 때리고 있었다 그는 밧줄로 나무에 묶여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밧줄은 그의 열린 상처를 잡아 당겼고 그는 차마 그것을 볼 수 없어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굴착기 위에 앉아 있었다 굴착기는 엄청나게 큰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한 남자가 오더니 연료가 다 떨어져 더 달라고 해도 줄수 없으니 어서 서두르라고 말했다 그는 구덩이를 더 깊게 팠지만 구덩이는 자꾸만 허물어졌다 파고 또 파도 소용이 없었다 그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기계실 창가에 앉아 지금이 저녁 무렵인지 아니면 새벽인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희미하게 밝은 기운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는 앉아서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바깥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저녁이 깊어가지도 아침이 오지도 않았다 그저 끝없이 아침인지 저녁인지 알 수 없는 어스름만 이어지고 있었다..... (P298-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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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게! 나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자네의 친구였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 그래서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나는 당연히 감수할 거야. 맹세하네. 내 빌어먹을 평생 동안에 누군가 자네에게 불명예를 안긴다면 내가 그자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하지만..... 무모한 짓은 하지 말게나! 이번에는 내 말을 들어! 늘 자네의 친구였던 페트리너의 말을 듣게! 우린 즉시 여길 떠야 해! 첫 기차를 타고 도망치자! 안 그러면 비열한 수법에 넘어간 걸 안 그 사람들이 우릴 때려눕힐 거야!” “어림없지.” 이리미아시가 손을 저었다. “우리는 인간의 존엄을 위한 힘겹고도 희망 없는 싸움을 떠맡은 거야.” 그는 그 유명한 집게손가락을 치켜들어 페트리너를 위협했다. “이 귀 처진 양반아. 이제 우리의 시간이라고!” “어떻게 그래!” 불길한 예감이 맞았다고 느낀 페트리너가 우는 소리를 했다. “난 처음부터 믿었어! 이미 알고 있었다고! 난 언제나 한 번은 우리 시간이 올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 난 굳게 믿으며 희망했지. 자, 그리고 보라고. 이렇게 되고 만 것을!” “그러니까 잔말 마세요!” 뒤에 있던 소년이 끼어들었다. “기뻐할 일이잖아요. 얘기를 좀 진지하게 들으세요!” “나보고 하는 말이야?” 페트리너가 불끈 화를 냈다. “기뻐서 돌아버릴 지경이다!” 그는 이를 악물고 눈을 굴리더니 좌절한 듯 고개를 저였다. “좀 말해보게, 내가 뭘 잘 못했나? 누구한테 해를 끼쳤나? 욕을 한마디라도 했나? 대장, 내 나이를 생각해서라도 배려를 좀 해주게!” 하지만 이리미아시는 들은 척도 않고 비밀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물 조직이야, 처진 귀!” 페트리너가 귀를 쫑긋하고 들었다. “이제 알겠나?” 둘은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P306-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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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넨 그럴지 몰라도 난 아닐세. 지옥의 끓는 물을 생각하면 난 숨이 막혀온다고!” “우리가 뭘 알 수 있겠나?” 한참 뒤에 이리미아시가 말했다. “좀 전에 이상한 광경을 봤다고 그럴 필요는 없어. 천국? 지옥? 피안(彼岸)? 다 헛소리야. 난 그런 지어낸 얘기는 다 정신을 홀려놓기 위한 거라고 믿네. 그렇게 환상에 마음을 빼앗기면 진실은 영영 알 수 없는 법이야.” 이제 페트리너는 완전히 마음이 놓여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이리미아시가 자신감을 되찾도록 자기가 무슨 말인가를 해주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고함만은 치지 말게!” 그가 부탁했다. “안 그래도 곤란을 잔뜩 겪지 않았나?” “처진 귀, 신은 문자로는 나타나지 않아. 신은 무엇에도 나타나지 않지. 신은 자신을 보여주지 않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봐, 난 신을 믿는 사람이야!” 페트리너가 성을 냈다. “적어도 내 앞에 선 조심해주게. 이 무신론자야!” “난 예전에 잘못 생각했어. 얼마 전에야 깨달았다네. 나와 벌레, 벌레와 강물, 강물과 강을 넘어가는 고함 소리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것을. 모든 건 공허하고 의미가 없는 거야. 뿌리칠 수 없는 구속과 시간을 뛰어넘은 대담한 도약 사이에서, 영원히 실패하는 감각이 아닌 오로지 환상만이 우리로 하여금 비참한 구덩이에서 헤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끔 유혹하지. 하지만 도망칠 길은 없어. 귀 늘어진 양반!” “그 얘길 하필 지금 해야겠나?” 페트리너가 항의했다. “‘지금’이라고 했지? 지금 우리가 본 건, 우리가 본 게 틀림없어!” 이리미아시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서 난 우리가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한 거야. 왜냐하면 모든 게 너무 완벽하게 그럴듯하거든.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거고. 그다음엔 눈을 믿지 않는 거지. 페트리너, 그건 우리가 언제나 빠지고 마는 덫이야.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지.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이란 게 결국은 자물쇠를 바꿔 다는 일일 뿐이거든. 그렇게 덫은 완벽하다네.” (P32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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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엔진 소리와 바람 소리에 가려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는 척했고, 사람들의 그런 모습이 그녀에게는 멸망으로 가는 것을 즐기고 있는 광경처럼 보였다. 크라네르와 교장은 아이들처럼 재미있어했고 심지어 의기양양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들은 스쳐 지나는 황량한 풍경을 향해 오만하게 굽어보는 태도를 취했다. 그들이 상상했던 여행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모든 방해물을 등지고 속도에 취해 바람처럼 내달리며 거칠 것이 없는 그런 여행! 그들은 불쌍한 거지가 아니라 자기 운명의 고삐를 손에 쥔 승자들이었다! 그렇게 숭고한 감정에 취해 그들은 드넓고 황량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P352)


의사는 한숨을 쉬며 새로 희석주를 만들고 마개로 술병을 막은 다음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미심쩍음과 놀람이 뒤섞인 기분으로 또다시 중얼거렸다. “정말로 내가 정신을 어느 정도 집중하기만 하면 마을에서 일어날 일을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쓰기만 하면 그 일이 일어난다니. 사건이 일어나는 방향을 어떻게 정할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순간 다시 종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전날에 종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은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종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종소리는 울리기 시작함과 동시에 정적을 가득 채우는 탓에, 시작된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종소리가 멈춘 순간 그의 마음도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듯 텅 비어버렸다. 그는 멀리서 들려오는 기이한 음향이 마치 오래전에 상실하고 만 희망의 선율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내용을 알려주지는 않지만 용기를 북돋아주고, 전혀 이해할 수 없음에도 결정적인 메시지로 다가오는 그 소리가 ‘무언가 좋은 뜻을 담고 있고 나의 확실치 않은 능력에 어떤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임을 그는 감지했다. (P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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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슬픈 기분으로 불길한 하늘과 메뚜기 떼가 휩쓸고 간 지난 여름의 잔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홀연 그는 환영처럼 아카시아 가지 위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마치 시간이 움직임 없는 영원의 원 안에서 유희를 벌이고 혼돈의 와중에 귀신이 재주를 피우듯 기상천외한 망상을 진짜로 믿게 하려는 것 같았다..... 그는 요람과 관의 십자가에 결박되어 경련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런 그는 결국 냉혹한 즉결심판을 받고 어떤 계급 표식도 부여받지 못한 채, 시체를 씻는 사람들과 웃으면서 부지런히 피부를 벗겨내는 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가차 없이 인생사의 척도를 깨닫고 말리라, 돌이킬 수도 없이, 사기꾼들과 벌이는 게임에 발을 들여놓은 결과는 진즉에 결정되었고 끝내 그는 마지막 무기처럼 지녀온, 안식처로 한 번 더 돌아가고픈 희망마저 빼앗기고 말 것이다. 그는 마을 동쪽으로 시선을 향해 한때는 삶의 소음으로 부산했으나 지금은 버려진 채 무너져가는 건물들과 붉게 부푼 해의 첫 햇살이 부서진 농가의 기와 없는 지붕 틈새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비통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결단을 내려야 해. 여기서는 더 살 수가 없어.’ 그는 도로 따뜻한 침대로 기어들어 팔베개를 하고 누웠지만 눈이 감기지는 않았다. 유령 같은 종소리보다 그를 더 놀라게 한 건 갑작스러운 정적, 위협적인 침묵이었다. 이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움직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그 또한 침대에서 꼼짝하지 않았는데, 돌연 주위의 말없는 물건들이 신경을 건드리는 대화를 시작했다....” (P396-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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