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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에리 종케의 <독거미>

영화 <내가 사는 피부> 2011년

by 노용헌

티에리 종케의 1995년 소설 독거미를 원작으로, 영화 <내가 사는 피부>는 2011년 만들어진 페드로 알모도바를 감독의 스릴러와 멜로 드라마가 혼합된 장르의 영화이다. 칸 국제영화제 장편경쟁부문 진출작이다. 『독거미』는 한 성형외과 의사가 벌이는, 상식과 금기를 뛰어넘는 복수극이다. 영화적 긴장감과 속도감 있는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로, 얽히고설킨 거미줄이 하나로 수렴되는 서사 구조가 극적 쾌감을 안겨준다. 다수의 캐릭터가 등장하여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방식은 알모도바의 영화들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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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옆 기사 제목에는 이름이 큰 글자로 도드라졌다. 알렉스 바르니.

다른 사진도 있었다. 더 작은 사진. 아기를 안은 여자와 그 여자를 감싼 남자. 알렉스는 캑캑거리며 신문에 가래를 뱉었다. 담뱃진이 낀 침이 아기의 얼굴에 떨어졌다. 또 가래를 뱉었다. 이번에는 바라던 표적을 맞혔다. 가족과 함께 흐뭇이 웃는 경관의 얼굴. 이제는 죽은 경관....

알렉스는 남은 맥주를 신문에 부었다. 잉크가 번지고, 그림이 흐릿해지고, 신문지가 부풀었다. 알렉스는 신문지가 맥주를 점차 빨아들이는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신문을 발로 쾅쾅 밟아서 발기발기 찢었다. 분노가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눈이 젖어왔지만,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목에서 울음이 솟구쳤지만, 울음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신을 놓을 만큼 분하기만 했다. 알렉스는 붕대를 손 보았다. 붕대를 다시 잘 감고, 핀을 옮겨 꽂아서 단단히 동여맸다.

알렉스는 무릎에 손바닥을 댄 채 가만히 밤의 어둠을 노려보았다. 농장 주택에 도착한 처음 며칠 동안, 고독에 적응하기가 끔찍이 힘들었다. 상처 염증 때문에 미열이 있었다. 귓속에서 윙윙대는 소리가 매미 소리와 뒤섞여 기분 나빴다. 숲을 샅샅이 살폈다. 덤불에서 무엇이 움직이는 기분을 자주 느꼈다. 밤의 소리에 계속 움찔했다. 엎드려 잘 때에도 권총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러다가 미치는 게 아닌지 두려웠다.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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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실 위 유리창 너머에는 의자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오늘은 참관인이 많았다. 참관하러 온 의사들과 학생들은 리샤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스피커로 조금 다르게 들리는 리샤르의 목소리가 수술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자, 이 환자는 위발성 약품 폭발로 화상을 입어서 이마와 양쪽 볼에 커다란 흉터종이 남았습니다. 코뼈가 없어졌고, 눈꺼풀도 상했습니다. 지금 이 환자는 피부 이식으로 치료해야할 더없이 좋은 예입니다. 그래서 팔과 복부에서 필요한 피부를 채취하겠습니다.”

리샤르는 벌써 수술칼로 환자의 배에서 커다란 사각형으로 피부를 자르고 있었다. 위에서 참관인들이 유리에 얼굴을 딱 붙이고 지켜보았다. 1시간 뒤, 첫 결과를 보여줄 수 있었다. 환자의 팔과 복부에서 뗀 피부를 화상을 입은 얼굴에 이식한 것이다. 이제 앞으로 한 번 더 수술하면, 심하게 손상된 얼굴 피부도 재건될 것이다.

환자가 침대에 실려 수술실에서 나갔다. 리샤르는 수술 마스크를 벗고 설명을 마쳤다.

“이번 환자와 같은 경우에는, 가장 먼저 집중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사전에 결정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으려면 이런 경험을 수차례 반복해야 한다는 점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죠.”

리샤르는 참관인들에게 인사하고 수술실을 나갔다. 정오가 지났다. 리샤르는 가까운 식당으로 갔다. 가는 길에 향수 가게를 지나가게 되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향수를 샀다. 저녁에 이브에게 선물할 생각이었다. (P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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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숨을 꾹 참았지. 아주 작은 소리라도 들으려 귀를 기울였어. 갑자기 사람 눈에 들켜 겁먹은 바퀴벌레처럼 벽에 몸을 부티고 웅크린 채 꼼짝도 안 했어. 네 신세는 거미줄에 걸린 벌레나 다름 없었어. 거미의 발에 잡혀 결국 먹이가 되겠지만, 거미는 벌레의 약을 올려서 맛을 더 돋우려고 벌레를 그냥 거미줄에 두었던 것이지, 이제 여유가 생기자 거미는 벌레에게 다가온 거야. 너는 거미의 털북송이 다리를, 커다란 전구 같은 잔인한 눈을, 고기로 불룩해서 출렁출렁하는 부드러운 배를, 독이 든 턱을, 네 생명을 쪽쪽 빨 내장을 상상했지. (P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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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 부인은 매주 시계처럼 정확히, 의례를 치르듯 모에 있는 경찰서에 들러서 실종된 아들을 찾는 데 새로운 소식이 없는지 확인했다. 이제 4년이 흘렀고, 아들을 찾겠다는 희망은 모조리 사라진 뒤였다. 신문이라는 신문에는 모두 뱅상의 사진까지 실어 광고를 냈지만, 헛수고였다. 경찰에서는 프랑스에서 해마다 수천 명이 실종되며 실종된 사람은 못 찾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뱅상의 오토바이는 경찰 차고에 있었다. 경찰에서는 오토바이를 철저히 조사한 뒤 모로 부인에게 돌려주었다. 오토바이에 남은 지문은 뱅상의 것이었다. 오토바이는 둑에 쓰러진 채 발견됐다. 앞바퀴에는 죔쇠가 걸려 있고, 연료통에 기름은 없었다. 주변 숲을 수색했지만 발견된 것은 없었다.

알렉스는 마을에서 잤다. 토요일이고 댄스파티가 열렸다. 아니가 있었다. 어릴 때 빨강 머리 그대로였다. 팔다리는 조금 굵어졌다. 아니는 옆 마을 콩 통조림 공장에서 일했다. 알렉스는 느린 곳에 맞춰 아니와 춤추고, 근처 숲을 함께 산책했다. 알렉스의 차에서 좌석을 뒤로 젖히고 불편하게 누워 사랑을 나눴다.

이튿날, 알렉스는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났다. 여드레 뒤, 크레디타그리콜 은행 지점에 나타나서 경관을 죽였다. 마을 사람 모두가 신문 1면에 나온 알렉스의 사진을 스크랩했을 것이다. 그 사진 옆에는 죽은 경관의 가족사진도 실려 있었다. (P6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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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을 놓은 판 바로 옆 바닥으로 거미 한 마리가 기어갔다. 땅딸막하고 징그러운 거미. 거미는 벽 구석에 자리를 잡고 거미줄을 치기 시작했다. 둥근 배에서 실이 계속 나왔다. 거미는 조심스럽게 열심히 오갔다. 알렉스는 방금 완성된 거미줄을 성냥불로 태웠다. 거미는 어쩔 줄 모르며 주위를 확인하고 적을 살폈다. 하지만 거미의 유전자에는 성냥의 존재가 들어 있지 않으므로, 거미는 다시 거미줄을 치기 시작했다.

거미는 쉼 없이 실을 뿜어서 벽에 붙이고 매듭을 만들었다. 바닥에 있는 나무도 모두 활용했다. 알렉스는 죽은 모기를 발견하고, 새로 완성된 거미줄에 모기를 던졌다. 거미가 죽은 모기 앞으로 달려가서 주위를 맴돌았지만, 모기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알렉스는 왜 거미가 그 모기에게 무관심한지 직감으로 알았다. 이미 죽은 모기였기 때문이다. 알렉스는 절뚝거리며 현관 계단으로 나갔다. 바닥 타일에 숨은 나방 한 마리를 조심스레 잡은 뒤 거리줄에 놓았다.

나방은 사악한 올가미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거미가 얼른 다시 나타났다. 먹잇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제 몸에서 뿜은 실로 먹잇감의 몸을 감아 고치로 만들었다. 그리고 나중에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벽 틈새에 고치를 숨겼다. (P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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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는 자신의 매력을 거부하는 남자를 본 적 없었다. 이브의 눈길에 계속 무심할 수 있는 남자도 없었다. 이브의 분위기를 꿰뚫은 남자도, 이브가 황홀하고 모호하게 몸짓할 수 있는 이유를 알아챈 남자도 없었다. 이브는 그 남자들 모두를 끌어들였다. 남자들의 애를 태우고, 남자들의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이브를 보자마자 남자들이 느끼는 긴장을 이용했다.

이브는 이렇게 드러내고 남자를 유혹하면서도 무심한 태도를 취했다. 이브는 남자를 뿌리치고, 남자에게 싸움을 걸고, 남자로부터 놓여나고, 남자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다. 그 양면적인 면 때문에 이브의 유혹은 더 강해졌다. 한편, 바라지 않으면서도 남자를 사로잡는 것이 이브에게는 리샤르에게 던지는 복수였다. 효과는 아주 보잘것없지만 그래도 유일한 복수. (P66)


너는 마음속으로 네 주인의 이름을 지었어. 주인 앞에서는 감히 그 이름을 입에 올릴 수 없었지. ‘미갈’ 어릴 적 두려워 한 기억, ‘미갈’. 여성 명사. 주인은 남자이므로 성에 맞지 않고, 너를 위한 선물을 고를 때 주인이 보인 아주 세련된 취향에도 맞지 않는, 혐오스러운 동물의 이름. 그래도 너에게 주인은 ‘미갈’이었어. 독거미와 같았어. 은밀하게 슬금슬금 움직이고, 잔인하고 흉포하며, 강박적이면서도 자기 계획에 치밀하니까. 자기 소굴에, 이 호사스런 거미줄에, 자신은 간수고 너는 죄수인 이 화려한 감옥에, 몇 달 동안 너를 가두고 자신은 집 안 어디에 숨어 있을니까. (P72)


리샤르는 백조들의 고요를 부러웠다. 그렇게 조용히 마음을 치유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씁쓸한 눈물이 흘렀다. 리샤르는 바르네로이의 손에서 이브를 낚아챘다. 그 동정심(리샤르는 동정심이라고 여겼다)이 갑자기 미움을 깨트렸음을 리샤르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끝없이 순수한 미움, 리샤르의 유일한 삶의 이유인 미움.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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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는 리샤르가 경찰을 데려오지 않았다고 확신한 뒤에야 대화를 시작했다.

“의사 맞지?”

“성형외과 과장을 맡고.....”

“알아. 불로뉴에도 병원이 있잖아. 딸은 노르망디에 있는 정신병원에 있고, 댁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어. 댁의 아내에 대해서도, 아직 댁의 아내는 멀쩡해. 지하실 라디에이터에 묶여 있지. 순순히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안 그러면 다시는 아내를 못 봐. 요전에 텔레비전을 보니 댁이 나오더군.”

“한 달 전에 인터뷰를 했소.”

“코를 고치고 주름살을 매끈하게 펴는 법을 떠들었지.”

리샤르는 이제 이해했다. 한숨을 쉬었다. 이 멍청이의 관심사는 이브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내가 지금 경찰에 쫓기고 있어. 경관 한 명을 해치웠거든. 얼굴을 바꾸지 않으면 수배 사진 때문에 붙잡힐 판이야. 댁이 내 얼굴을 고쳐줘야 하겠어. 텔레비전에서 댁이 말했지? 시간도 오래 안 걸린다고. 나는 혼자야. 공범은 없어. 잃을 것도 없어. 댁이 경찰에 신고하려 하면, 댁의 아내는 지하실에서 굶어 죽게 돼. 수작 부리지 마.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잃을 것이 없어. 댁이 나를 신고해서 내가 체포되면, 나는 댁의 아내를 어디에 숨겼는지 절대 불지 않을 거야. 그러면 댁의 아내는 굶어 죽겠지. 그다지 편한 죽음은 아니야.” (P133)

리샤르와 알렉스는 다시 1층으로 올라왔다. 리샤르는 알렉스가 시키는 대로 로제의 집으로 전화했다.

리샤르가 전화를 끊자, 알렉스는 위층을 가리키며 리샤르를 이브의 방으로 몰았다.

“댁의 아내 말이야, 온전하지 않지? 왜 아내를 가둬?”

“아...... 정신이 좀...... 성하지 않소.”

“댁의 딸처럼?”

“가끔, 어떤 면에서는 그렇소.”

알렉스는 빗장 세 개를 잠그고 리샤르에게 잘 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른 방을 살핀 뒤, 정원을 산책했다. 이브라는 그 여자는 리브리가르강에서 괴로워하기 시작했겠지. 하지만 만사가 아주 순조로워, 열흘 뒤에 붕대만 풀면, 의사를 죽이고 영원히 작별 인사를 하면 돼. 열흘이면 이브는 이미 죽은 뒤가 아닐까? 뭐, 무슨 상관이야. (P139-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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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 한 번 더 경고하는데 수작 부리지 마. 그랬다가는 마누라를 다시 못 볼 줄 알아.”

박사가 문을 닫고 주사기를 가져왔다.

“이 주사를 맞으면 몸이 이완됩니다. 15분 뒤에는 마취 주사로 잠들게 할 겁니다.”

“알았어. 수작은 부리지 마!”

주삿바늘 끝이 혈관으로 살며시 들어오자 알렉스는 위에 있는 박사를 쳐다보며 헤벌쭉 웃었다.

“수작 부리지 마. 알았지?”

알렉스가 별안간 잠들었다. 마지막 남은 의식이 사라지는 찰나, 알렉스는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리샤르는 마스크를 벗었다. 스포트라이트를 껐다. 정신을 잃은 알렉스를 어깨에 짊어졌다. 수술실 문을 연 뒤, 복도로 나갔다. 알렉스의 무게 때문에 비틀거리며, 지하에 있는 다른 문으로 향했다.

자물쇠를 열고, 알렉스를 안으로 끌어갔다. 벽은 이끼로 덮여 있었다. 소파와 안락의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뱅상의 다른 물건들도 그대로였다. 리샤르는 알렉스를 벽에 묶었다. 쇠사슬을 몇 번 감아서 길이를 더 줄였다. 다시 수술실로 갔다. 주삿바늘과 도관을 가져와서 알렉스의 아래팔 혈관에 붙였다. 알렉스가 일단 정신을 차리면 쇠사슬에 묶여 있어도 심하게 몸부림쳐서 주사를 놓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리샤르는 확신했다. 이 사내는 경찰에 쫓기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으므로 ‘고전적인’ 고문을 받아도 견딜 것이라고. 결국 고문에 굴복한다 해도 시간이 걸릴 테고, 리샤르에게는 지금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리샤르도 가만히 기다렸다.

수술복을 바닥에 내던지고, 위층으로 가서 스카치위스키와 잔을 가져왔다. 지하 감방으로 돌아온 리샤르는 알렉스 맞은 편에 놓인 안락의자에 앉았다. 알렉스에게 주사한 마취제는 많지 않았다. 포로는 곧 깨어날 터였다. (P14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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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샤르는 망연자실했다. 이브는 꿇어앉은 채 양손으로 권총을 쥐고 리샤르를 겨냥하고 있었다. 쭉 뻗은 팔, 방아쇠를 쥔 집게손가락이 하얗게 질렸다.

이브가 건조한 목소리로 같은 말을 되뇌었다.

“너를 죽이겠어.”

“이브, 나는 몰랐어! 억울해!”

이브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리샤르의 하소연에 어쩔 줄 몰라서 잠시 긴장을 풀었다. 지켜보고 있던 리샤르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리샤르가 이브의 아래팔을 발로 찼다. 이브는 권총을 떨어뜨리고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 리샤르는 벌떡 일어서서 권총을 낚아채고 알렉스가 묶여 있는 방으로 뛰어들었다. 두 발을 쏘았다. 알렉스는 목과 심장에 총탄을 맞고 푹 쓰러졌다.

리샤르가 다시 복도로 나왔다. 이브의 상체를 부축해서 다시 바로 앉혔다. 그리고 리샤르 자신도 꿇어앉은 뒤, 이브에게 권총을 내밀었다. (P168-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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