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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 매킨타이어의 <스파이와 배신자>

영화 <스파이들의 전쟁> 2019년

by 노용헌

밴 매킨타이어의 <스파이와 배신자>는 2019년 첫 방영한 다큐멘터리 시리즈 「스파이들의 전쟁Spy Wars」 첫 번째 에피소드 〈세상을 구한 남자〉의 원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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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GB의 방첩 담당 부서 K부에서 이것은 일상적인 도청 작업이었다.

KGB 장교들이 가족과 함께 사는 모스크바의 고층 아파트, 레닌스키 대로 103번지의 8층 아파트 자물쇠를 따는 데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위아래가 붙은 작업복을 입고 장갑을 낀 두 남자가 아파트를 체계적으로 수색하는 동안 기술자 두명은 눈에 띄지 않는 도청장치들을 신속하게 설치했다. 벽지와 굽도리 널 뒤에는 엿듣는 장치를 심고, 수화기 송화구에는 실시간 중계가 가능한 마이크를 끼워 넣고, 거실과 침실과 부엌의 조명등에는 비디오카메라를 설치했다. 한 시간 뒤 그들의 작업이 끝났을 때 이 아파트의 거의 모든 구석에 KGB의 눈과 귀가 심겨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옷장 안의 옷과 신발에 방사성 가루를 뿌렸다. 방사능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KGB가 방사능 탐지기를 사용하면 착용자의 움직임을 추적할 수 있는 농도의 방사성 가루였다. 그들은 밖으로 나와 아파트 문을 다시 잘 잠갔다.

몇 시간 뒤 러시아의 고위급 정보 요원 고르디옙스키가 런던에서 출발한 아에로플로트 항공기를 타고 모스크바에 셰레메티예보 공항에 착륙했다.

KGB의 올레크 안토니예비치 고르디옙스키 대령은 한창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소련 정보국의 천재인 그는 스칸디나비아, 모스크바, 영국에서 근무하며 거의 단 한 번의 오점도 없이 부지런히 승진을 거듭했다. 이제 마흔여섯 살의 나이에 KGB에서 가장 좋은 보직인 런던 지부장으로 승진해, KGB 국장에게서 정식 임명장을 받기 위해 모스크바로 돌아온 길이었다. 직업 스파이인 고르디옙스키는 소련을 좌지우지하는 그 거대하고 가차 없는 공안 및 정보 네트워크에서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갈 생각을 품고 있었다.

단단한 운동선수 같은 몸집의 고르디옙스키는 북적거리는 공항에서 자신 있게 성큼성큼 걸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미약한 두려움이 부글거렸다. KGB 베테랑이며 소련의 충실한 비밀 요원인 올레크 고르디옙스키가 사실은 영국의 스파이였기 때문이다. (P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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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크 고르디옙스키의 인생은 KGB 그 자체였다. KGB가 그를 형성하고, 사랑하고, 비틀고, 망가뜨리고, 나중에는 거의 죽일 뻔했다. 소련의 첩보 기관 KGB는 그의 심장과 혈관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평생 이 첩보 기관을 위해 일한 그의 아버지는 매일, 심지어 주말에도 KGB 제복을 입었다. 고르디옙스키 일가는 배정된 아파트 단지에서 마치 스파이 클럽에 소속된 듯한 삶을 살았으며, 요원들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을 먹고, 여가 시간에는 다른 스파이 가족들과 어울렸다. 올레크는 KGB의 아이였다.

KGB (<국가 보안 위원회>를 뜻하는 Komitet Gosudarstvennoy Bezopasnosti의 머리글자를 딴 이름)는 지금껏 만들어진 모든 정보 기관 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가장 광범위한 곳이었다. 스탈린이 만든 첩보망의 직속 후계자인 KGB에는 국외와 국내 정보 수집, 국내 보안 강화, 국가경찰의 역할이 모두 결합하여 있었다. 억압적이고, 신비에 싸여 있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KGB는 소련인들의 삶 구석구석으로 뚫고 들어가 모든 면을 통제했다. 내부 불만 세력을 뿌리 뽑고, 공산당 지도자들을 지키고, 강력한 적국을 상대로 첩보 활동과 방첩 활동을 하고, 국민을 위협해 비굴한 복종을 받아 냈다. 전 세계에서 간첩을 포섭하고 전 세계에 스파이를 파견해 군사, 정치, 과학 분야의 기밀을 수집하거나 사들이거나 훔쳐 왔다. 100만 명이 넘는 요원, 간첩, 정보원을 거느리고 한창 위세를 떨치던 시절 KGB는 소련 사회에 그 어떤 기관보다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서방 세계의 눈에 KGB라는 머리글자는 공포 정치와 대외 공격 및 체제 전복의 다른 이름이었으며, 얼굴 없는 관료 마피아가 경영하는 전체주의 정권의 모든 만행을 짧게 줄여서 부르는 말이었다. 그러나 KGB의 엄격한 통치하에 사는 사람들의 시각은 달랐다. 그들이 공포 속에 복종한 것은 사실이지만, 서구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공격을 막아 내는 보루, 공산주의를 수호하는 친위대로 KGB를 우러러보는 마음도 있었다. 이 특권 엘레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자부심을 느끼며 경탄의 대상이 되었다. (P23-24)


KGB가 해외에서 운영하는 스파이들은 두 종류로 또렷이 구분되었다. 첫 번째 종류는 소련 외교관이나 영사관 직원, 문화 담당관이나 무관, 공인된 언론인이나 무역 대표 등 공식적인 위장 신분을 갖고 활동했다. 외교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이 <합법적>인 스파이들이 설사 발각되더라도 간첩 혐의로 기소될 위험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해당 국가에서 외교상 기피 인물 판정을 받고 추방될 뿐이었다. 반면 <불법> 스파이(러시아어로 넬레갈)에게는 공식적인 지위가 전혀 없었다. 대개 그들은 가명으로 만든 가짜 여권으로 돌아다녔으며, 어떤 나라에 배치되든 눈에 띄지 않게 섞여 들어갔다(서구에서 이런 스파이들은 공식적인 위장 신분이 없다는 뜻의 non-official cover를 줄여 NOC라고 불린다). KGB가 전 세계에 심어 놓은 불법 스파이들은 평범한 시민 행세를 하며 신분을 숨기고 파괴적인 활동을 했다. 합법 스파이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정보를 수집하고, 정보원을 포섭하고, 다양한 형태의 간첩 활동을 했다. 때로는 오랫동안 <동면 상태>로 신분을 숨기고 있다가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이들은 또한 동서(東西)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 경우 전투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는 잠재적인 제 5열이었다. 그들은 공식적인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곳에서 활동했으므로, 흔적이 남는 방식으로 자금을 지원받을 수도 없고 외교관의 보안 채널로 통신을 주고받을 수도 없었다. 따라서 대사관에서 신분을 인정받은 스파이들과 달리, 그들은 방첩 수사관들이 추적할 수 있는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모든 소련 대사관에는 상설 KGB 지부, 즉 레디덴투라가 있고, 다양한 공식 신분을 지닌 KGB 요원들이 레지덴트(MI6와 CIA의 표현으로는 지부장)의 지휘를 받아 움직였다. 서구 방첩 기관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 중 하나는 소련 관리 중 누가 진짜 외교관이고 누가 스파이인지를 가려내는 것이었다. 불법 스파이를 찾아내는 것은 이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P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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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는 이미 KGB 사람이었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그에게 1962년 7월 31일부터 KGB로 출근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는 이데올로기에 이미 의문을 품기 시작했으면서 왜 그 이데올로기를 집행하는 기관에 들어갔을까? KGB 일은 해외여행의 가능성을 약속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비밀은 사람을 유혹하는 법이다. 올레크는 또한 포부가 있었다. 어쩌면 KGB가 변할지도 모른다. 그가 변할지도 모른다. 소련이 변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봉급과 특권도 훌륭했다. (P37)


KGB의 <붉은 깃발> 엘리트 훈련 아카데미는 모스크바에서 북쪽으로 80킬로미터 떨어진 숲속 깊은 곳에 위치했으며, 101 학교라는 암호명으로 불렸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당이 죄수가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에 죄수를 노출시켜 저항 의지를 꺾어 버리는 지하 고문실 101호를 무의식적으로 연상시키는 얄궂은 이름이었다.

여기서 올레크는 다른 훈련생 120명과 함께 소련 첩보 활동의 가장 깊은 비밀을 배웠다. 첩보와 방첩, 첩자 포섭과 활용, 합법 스파이와 불법 스파이, 첩자와 이중 첩자, 무기, 비무장 격투와 감시, 이 기묘한 직업의 불가해한 기술과 언어 등이었다. 가장 중요한 가르침 중 감시 감지와 회피는 KGB 용어로 프로베르카, 즉 〈드라이클리닝〉이라고 불렸다. 미행당할 때 그 사실을 감지하는 법, 우연인 것처럼 감시를 피하는 방법 등을 배우는 과목이었다. <감시를 의식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면 훈련된 첩보원임이 드러날 수 있다. <첩보요원은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을 하면 안 된다.> KGB 교관들은 분명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어떤 외국인이 대놓고 미행을 걱정한다는 사실을 감시 기관이 눈치챈다면, 한층 더 비밀리에, 더 집요하게, 더 독창성을 발휘해서 작업하게 될 것이다.>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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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칸디나비아의 KGB 불법 스파이망은 치밀하지 않았다. 올레크의 업무 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버려진 편지함에 돈이나 메시지 남기기, 신호 장소 감시하기, 비밀 스파이들과 은밀한 접촉 유지하기 등 행정적인 일이었다. 비밀 스파이 중 대부분은 그가 직접 얼굴을 맞대고 만난 적도 없고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만약 어떤 불법 스파이가 공원의 특정한 벤치 아래에 오렌지 껍질을 두고 간다면, 그것은 <내가 위험에 빠졌다>는 뜻이었다. 반면 사과 심이 떨어져 있다면 <내가 내일 이 나라를 떠난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복잡한 체계 때문에 가끔은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 올레크는 신호 장소인 공중화장실 창턱에 구부러진 못을 놓아두었다. 어떤 불법 스파이에게 미리 지정된 버려진 편지함에서 현금을 가져가라고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 불법 스파이가 이 메시지를 잘 받았다고 답하려면, 같은 장소에 맥주병 뚜껑을 놓아두어야 했다. (P51)


모스크바의 KGB 본부는 체코의 개혁 실험을 공산주의 자체에 대한 실존적 위협으로 보았다. 냉전에서 소련에 불리한 쪽으로 저울을 기울일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본 것이다. 체코 국경에 소련 군대가 점점 더 많이 배치되었다. KGB는 크렘린의 신호를 기다리지 않고, 소수의 스파이를 동원해 체코의 <반혁명>과 싸우기 시작했다. 이 스파이 중 한 명이 바실리 고르디옙스키였다.

동생은 프라하의 봄이 꽃을 피우는 것을 보며 점점 열광하고 있을 때, 형은 그 꽃봉오리를 잘라 버리기 위해 파견되었다.

1968년 초, 서른 명이 넘는 KGB 불법 스파이들이 체코슬로바키아로 침투했다. KGB 국장 유리 안드로포프는 그들에게 체코의 개혁 운동을 방해하고, <반동적인> 지식인 서클에 침투해 프라하의 봄을 지지하는 저명인사들을 납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KGB의 공작원들은 대부분 서방 관광객으로 위장하고 체코슬로바키아로 갔다. 체코의 <선동가들>이 자신에게 공감하는 것처럼 보이는 외국인에게 계획을 털어놓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아서였다. 그들이 겨냥한 사람들은 지식인, 학자, 언론인, 학생, 작가였다. 밀란 쿤데라와 바츨라프 하벨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것은 KGB가 바르샤바 조약으로 맺어진 동맹국을 상대로 벌인 최대 규모의 첩보 작전이었다.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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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적인 면에서 올레크는 KGB의 사다리를 타고 매끈하게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말이 아니었다. 모스크바에서 2년을 보내면서 공산 정권에 대해 느끼는 거리감이 더욱 심해졌고, 덴마크로 돌아온 뒤에는 소련의 속물근성, 부패, 위선에 대한 절망이 깊어졌다. 그는 독서 범위를 더욱더 넓혀, 소련에서는 결코 소유할 수 없는 책들을 수집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블라디미르 막시모프, 조지 오웰의 작품들과 스탈린주의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서방의 역사책들이었다. 카플란이 캐나다로 망명했다는 소식도 틈을 비집고 들려왔다. 체코슬로바키아 군사 법정은 궐석 재판을 열어, 카플란에게 국가 기밀 누설죄로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올레크는 충격받았으나, 프라하의 봄 이후 자신이 외친 항의의 뜻을 서방이 알아차렸는지 궁금해졌다. 만약 알아차렸다면 왜 아무 반응이 없을까? 만약 서방의 정보국들이 그의 의사를 타진하려 한다면, 그는 그들의 접근을 받아들일까 거부할까? 나중에 올레크는 자신이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저쪽 편에서 자신의 어깨를 두드려 주기를 기다렸다고 주장했지만, 현실은 그의 기억보다 더 복잡했다. 원래 항상 그런 법이다.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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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관으로 돌아온 브롬헤드는 MI6 본부로 통신을 보냈다. <세상에, 그자가 나를 포섭하려는 것 같아!>

하지만 올레크는 단순히 자신의 위장 신분에 맞게 행동했을 뿐이었다. 그도 대사관으로 돌아와 레지덴트인 모길렙치크에게 물었다. <영국 대사관 사람이 점심을 같이 먹자는데, 어떻게 할까요? 받아들일까요?> 이 질문이 모스크바로 전달된 뒤, 곧바로 회색 추기경 드미트리 야쿠신에게서 단호한 답변이 날아왔다. <받아야지! 적극적으로 굴어. 상대방 정보 요원을 피하지 말고. 만나지 못할 이유가 뭔가? 공격적인 자세를 취해! 영국은 우리가 아주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나라야.> 이것이 올레크에게 보험 역할을 했다. 계속 추진해도 좋다는 공식적인 허락이 떨어졌으니, 이제 그는 KGB에 충성심을 의심받을 걱정 없이 MI6와 <인가된 접촉>을 할 수 있었다.

첩보 세계의 가장 오래된 책략 중에 〈미끼〉가 있다. 한쪽이 상대편의 누군가를 노리고 다가가 그를 꾀어서 공범으로 만들고 신뢰를 얻은 뒤 그의 정체를 폭로해 버리는 책략이다.

브롬헤드는 자신이 KGB 미끼 작전의 대상이 된 건가 싶었다. 아니면 올레크가 진심으로 그를 포섭하려 하는 걸까? 브롬헤드가 흥미 있는 척하면서, 소련 측이 어디까지 가는지 지켜봐야 할까? 한편 올레크 입장에서는 위험이 훨씬 더 컸다. 카플란의 방문에 이어 브롬헤드가 접근한 것이 모두 정교한 계획의 일부일 수 있었다. 여기서 그가 자신의 패를 보였다가는 속내만 들키게 될 수 있었다. 야쿠신의 허락이 그를 어느 정도 보호해 주기는 하겠지만, 그리 강력한 보호는 아니었다. 만약 올레크가 MI6 미끼 작전에 넘어간다면, KGB에서 그의 경력은 끝이었다.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상대방이 포섭하려 하는 자는 누구든 명백히 의심스럽다는 KGB 논리에 따라 분명히 희생될 터였다. (P90-91)


사람은 왜 스파이가 되는가? 안락한 가정과 친구, 안정적인 직장을 포기하고 위험하고 어스름한 비밀의 세계에 뛰어드는 이유가 무엇인가? 특히 한 나라의 정보국에서 일하던 사람이 상대국을 위해 일하기로 마음을 바꾸는 이유가 무엇인가?

올레크가 KGB에서 비밀스럽게 변절한 사례와 가장 비슷한 것은 아마 킴 필비의 사례일 것이다.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한 영국인인 그는 올레크와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MI6 요원이면서 비밀리에 KGB를 위해 일했다는 뜻이다. 필비처럼 올레크도 근본적인 이념의 변화를 겪었다. 필비는 공산주의에 끌린 반면, 올레크는 공산주의에 혐오를 느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그러나 필비는 1940년 MI6에 들어가기 전에 공산주의로 전향했으며, 자본주의 서구에 맞서 KGB를 위해 일하겠다는 분명한 뜻이 있었다. 올레크는 충성스러운 소련 국민으로서 KGB에 들어갈 때, 자신이 언젠가 이 기관을 배신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세상에는 다양한 스파이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념, 정치, 애국심 때문에 스파이가 되지만 탐욕 때문에 행동으로 나서는 사람이 놀라울 정도로 많다. 경제적 보상의 매력이 그 정도다. 반면 섹스, 협박, 오만, 복수심, 실망감 때문에 첩보의 세계로 끌려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다. 비밀스러운 세계에서 맛볼 수 있는 동지 의식과 자신이 남보다 앞서 있다는 독특한 느낌이 동기가 되기도 한다. 용감하고 원칙을 지키는 스파이가 있는가 하면, 욕심 많고 비겁한 스파이도 있다. (P105-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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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의 말이 거짓인지 시험하는 최고의 방법은 이쪽이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이다. 호킨스는 KGB의 구조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고르디옙스키는 모스크바 중앙 내부에서 복잡한 관료 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부서를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설명했다. 개중에는 호킨스가 이미 아는 사실도 있었지만, 그가 모르는 정보도 아주 많았다. 사람들의 이름, 직책, 여러 기법, 훈련 방법, 내부의 경쟁 관계와 분쟁, 승진과 강등에 대한 이야기가 워낙 상세해서 고르디옙스키가 정직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미끼>라면 감히 이렇게 많은 정보를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그는 호킨스에게 단 한 번도 MI6의 정보를 묻지 않았을뿐더러, 이중 첩자가 적국의 정보기관에 침투하기 위해 할 법한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MI6 본부의 고위 간부들은 곧 고르디옙스키의 진심을 믿게 되었다. 거스콧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선빔은 진짜였다. 그는 공정하고 정직했다.> (P114)


소련은 사실상 거대한 교도소였다. 경비가 삼엄한 국경선 안에 2억 8천만 명이 넘는 국민이 갇혀 있고, 100만 명이 넘는 KGB 요원들과 정보원들은 간수였다. 국민들은 항상 감시받았으며, 특히 KGB는 소련 사회의 어떤 부문, 어떤 기관보다도 면밀한 감시의 대상이었다. KGB의 내부 감찰 담당 부서인 제7부의 직원들은 모스크바에만 약 1천5백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의 완고한 공산주의 통치하에서 정권의 의심증이 거의 스탈린 시대 수준으로 높아져, 모두를 모두와 싸우게 하는 스파이 국가가 만들어졌다. 전화는 도청되고, 편지도 당국이 미리 열어보고, 국민들에게는 언제 어디서든 다른 사람을 고자질하는 일이 장려되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그로 인한 국제적 긴장 고조는 KGB의 내부 감시를 더욱 강화했다. <밤에는 두려움에 떨고, 낮에는 거짓으로 점철된 체제에 열광하는 척 미친 듯이 가식을 떠는 것이 소련 국민들의 영구적인 상황이었다.> 로버트 콘퀘스트는 이렇게 썼다.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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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에게 기름칠을 할 때 문제점은 상사가 새로운 사람으로 바뀔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기름이 아주 많이 낭비되는 셈이었다.

미하일 류비모프가 갑자기 KGB에서 불명예스러운 해고를 당했다. 중앙의 도덕주의자들과 충돌한 것은 고르디옙스키와 같았지만, 그의 죄가 더 컸다. 두 번째 결혼 생활이 삐걱거리는 와중에 다른 요원의 아내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걸 발령받기 전에 KGB에 알리지 않은 죄, 그에게는 항변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류비모프는 고르디옙스키에게 유용한 기밀 공급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보호자이자 조언자이자 동맹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눌러도 쉽게 눌러지지 않는 류비모프는 소설가가 되어 소련의 서머싯 몸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빅토르 그루시코는 제1주요부 차장으로 승진했고, 제3부의 부장 자리는 겐나디 티토프가 이어받았다. 전(前) 오슬로 레지덴트로 아르네 트레홀트 담당관이던 그의 별명은 <악어>였다. 영국-스칸디나비아과의 새로운 팀장은 니콜라이 그리빈이었다. 매력적인 인물인 그는 1976년 코펜하겐에서 고르디옙스키의 부하 직원으로 근무했으나, 그 뒤로 그를 앞질러 승진했다. 그리빈은 호리호리하고 깔끔한 미남이었다. 파티에서는 기타를 들고 방 안의 사람들이 모두 흑흑 울 때까지 슬픈 러시아 발라드를 연주하곤 했다. 그는 유난히 야망이 커서 상급자들과 친분을 쌓는 솜씨가 남달랐다. <상사들은 그를 대단한 친구로 생각했다.> 반면 고르디옙스키는 그리빈을 기분 나쁜 놈, <아첨꾼이자 출세주의자>로 보았다. 그래도 그에게는 그리빈의 도움이 필요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마구 아부를 쏟아냈다. (P168-169)


티토프는 대사관의 공식적인 외교관이 아니라 러시아 주간지 <뉴 타임스>의 특파원으로 신분을 위장해 활동했다. 모스크바에 있을 때 티토프를 알게 된 고르디옙스키는 그를 <진정 사악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이 세 명의 상사가 레지덴트의 사무실에서 고르디옙스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으 악수는 미지근하고, 인사말은 형식적이었다. 국은 새로 부임한 직원을 보자마자 교양 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반감을 품었다. 니키텐코는 아무도 신뢰하지 않도록 훈련받은 사람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티토프는 새로 부임한 부하 직원을 잠재적인 라이벌로 보았다. KGB는 심히 부족적인 공동체였다. 국과 니키텐코 모두 KR 라인 출신이라서 방첩 전문가의 사고방식이 머릿속에 박혀 있었으므로 새로 부임한 직원을 본능적으로 위협으로 간주했다. 별로 자격도 갖추지 못한 자가 <남을 밀어내고 억지로> 이 자리에 들어왔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다.

의심증은 선전, 무지, 비밀주의, 두려움에서 태어난다. 1982년 KGB 런던 지부는 지구상에서 가장 의심증이 깊은 곳 중 하나로 심리적 압박과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그런 심리 상태의 기반이 된 것은 대체로 공상일 뿐이었다. KGB는 모스크바에 와 있는 다른 나라 외교관들을 염탐하는 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쏟는 만큼, MI5와 MI6도 런던에서 틀림없이 똑같은 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국 정보기관이 KGB 요원으로 의심되는 자들을 감시하고 미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소련 측이 상상한 삼엄한 감시와는 거리가 멀었다. (P206-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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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5와 MI6가 이렇게 협력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이 두 정보기관의 의견이 항상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아마도 스파이를 잡는 일과 스파이를 관리하는 일을 양립시키기가 쉽지 않고, 때로는 두 임무가 서로 중복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갈등을 빚는 경우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두 정보기관은 각자 독특한 전통, 행동 규칙, 기법을 갖고 있었다. 경쟁의식이 아주 깊어서 일에 방해가 될 때도 많았다. 역사적으로 MI6의 일부 인사들은 국내를 담당하는 MI5를 경찰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고 상상력과 열정이 부족한 조직으로 낮잡아 보는 경향이 있었다. 한편 MI5는 해외 정보를 담당하는 요원들을 사립 학교 출신의 실수 많은 모험가로 보았다. 그리고 두 기관 모두 상대 기관에서 <비밀이 잘 샌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MI5가 MI6 요원 킴 필비를 오랫동안 조사하면서 두 기관의 상호 의심이 한층 깊어져 명백한 적대감으로 변했다. 그러나 녹턴 작전을 위해 그들은 서로 협력해야 했다. 하루하루 고르디옙스키를 관리하는 것은 MI6의 책임이고, MI5에서는 선택된 소수만이 이 작전에 대한 정보를 계속 받으면서 보안 문제를 담당하기로 했다. (P213)


미국의 강경 자세가 소련의 의심을 더욱 부채질하는 바람에 이러다가는 세상이 핵전쟁으로 인한 아마겟돈으로 끝나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미국의 대외 정책 분석가들은 소련이 선전을 위해 일부러 과장된 표현을 하는 것이며, 그들의 경고성 표현은 오랫동안 이어져 온 허세 대결의 일환이라고 가볍게 생각해 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의 생각과 달리, 미국이 핵전쟁을 시작할 계획을 짜고 있다는 안드로포프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영국은 소련에서 온 스파이 덕분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크렘린의 걱정이 비록 무지와 의심증에서 싹튼 것이기는 해도 진심이라는 사실을 미국에도 알려 줘야 할 것 같았다.

영국과 미국 첩보 기관의 관계는 형제 관계와 조금 비슷하다. 서로 친하지만 경쟁심이 있고, 서로 잘 지내면서도 질투하고, 서로를 응원하면서도 싸움을 벌이기 일쑤라는 점이 그렇다. 영국과 미국은 모두 과거에 공산주의자가 고위직에 침투한 사건을 겪었으며, 서로 상대를 다 믿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의심을 계속 품고 있었다. 이미 확립된 합의에 따라 두 나라는 중간에 가로챈 적국의 통신 정보를 공유했으나, 인간 정보원에게서 수집한 정보의 공유에는 그리 후하지 않았다. 미국도 영국도 모두 상대가 전혀 알지 못하는 스파이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런 정보원에게서 나온 <생산물>은 꼭 알아야 하는 사람에게만 제공되었는데, <꼭 알아야 하는 사람>의 정의는 언제든 바뀔 수 있었다. (P23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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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9월 1일 새벽에 소련 요격기가 소련 영공으로 잘못 들어온 대한항공 여객기 KAL 007편을 격추했다. 이 사건으로 승객과 승무원 269명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동서 관계는 위험한 수준으로 급전직하했고, 소련은 처음에 격추와의 관련성을 부인했으나 나중에는 그 비행기가 일부러 소련을 도발하려는 미국의 작전으로 소련 영공을 침범한 첩보기였다고 주장했다. 로널드 레이건은 이 <한국 여객기 학살>이 <야만적인 행위이며 (...) 비인간적인 만행>이라고 비난해 국내외의 분노에 불을 지피며, 나중에 한 미국 관리가 <자신이 철저히 옳다는 기쁨>이라고 묘사한 상태를 즐겼다. 의회도 국방비 증액에 동의했다. 한편 소련은 KAL 007편 사건에 대한 서방의 분노를 만들어진 도덕적 히스테리로 해석하며, 공격의 준비 절차로 보았다. 그래서 크렘린은 사과하지 않고, 오히려 CIA가 <도발적인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런던의 KGB 지부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긴급한 전문들이 번쩍번쩍 쏟아졌다. 공격이 시작될 경우 소련의 자산과 국민을 보호하고, 그것이 미국의 탓임을 분명히 하고, 소련이 생각하는 음모론을 뒷받침하는 정보를 수집하라는 지시가 담겨 있었다. 런던 KGB 지부는 나중에 <남한 여객기와 관련된 반(反)소 캠페인을 방해하려 노력>했다는 중앙의 칭찬을 받았다. 그때 이미 병이 들어 병상에 누워 있던 안드로포프는 이른바 미국의 <터무니없이 군국주의적인 정신병>을 거세게 비난했다. 고르디옙스키는 이 전문들을 대사관에서 몰래 가지고 나와 MI6에 넘겼다.

KAL 007편 격추 사건은 한국 조종사와 소련 조종사의 인간적인 무능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그러나 고르디옙스키가 MI6에 제출한 보고서는 점점 고조되는 긴장과 상호 몰이해의 압박 때문에 평범한 비극이 위험한 정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과정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극도의 불신과 오해, 공격성이 뒤섞여 끓고 있는 이 냄비 속에 어떤 사건이 하나 더 첨가되면서 냉전은 실제 전쟁의 문턱으로 치달았다. (P278-279)


만약 적이 우리 측에 스파이를 심어 놓았고 우리도 적 진영에 스파이를 심어 놓았다면, 세상이 아주 조금 더 안전해질 수는 있어도 궁극적으로 우리는 출발점을 벗어나지 못한다. <내가 그것을 안다는 사실을 네가 안다는 것을 나도 안다.....>라는 식의 불가해하고 측량할 수 없는 스펙트럼 어딘가에 머무른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주 가끔 역사에 심오한 영향을 미치는 스파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에니그마 암호의 해독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을 적어도 1년은 앞당겼다.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과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성공적인 첩보전과 전략적인 기만술의 뒷받침을 받았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스탈린은 소련이 서방 정보기관에 침투한 덕분에 서방을 상대할 때 중대한 이점을 누릴 수 있었다.

세상을 바꿔 놓은 스파이들의 전당에는 소수의 선별된 사람들만 들어가 있다. 그 사람 중 한 명이 올레크 고르디옙스키다. 그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KGB의 내부를 열어젖혀, 소련 정보기관이 무슨 일을 하는지(그리고 하지 않는지)뿐만 아니라 크렘린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계획을 꾸미는지까지 보여 주었다. 그 덕분에 서방은 소련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꿨다. 고르디옙스키는 목숨을 걸고 조국을 배신해 세상을 조금 더 안전한 곳으로 만들었다. 기밀로 분류된 CIA 내부 검토서는 에이블 아처 사건을 <냉전의 마지막 격동>이라고 표현했다. (P286-287)


도박에 성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직관이다. 육감은 우리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할 수 있게 해주고, 상대의 마음도 읽을 수 있게 해준다. KGB가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을까?

사실 모스크바 중앙은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방첩을 담당하는 K부의 빅토르 부다노프 대령은 <KGB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었다. 1980년대에 그는 동독에서 근무했는데, 당시 그의 휘하에 있던 젊은 요원 중 한 명이 바로 블라디미르 푸틴이었다. K부에서 부다노프가 맡은 일은 <평소와 다른 일들>을 조사하고, 제1주요부 내 여러 부서의 보안을 유지하고, 부패한 직원을 제거하고, 첩자를 소탕하는 것이었다. 빈약하고 생기 없는 외모의 헌신적인 공산주의자인 그는 여우의 얼굴과 고도로 훈련된 변호사의 머리를 갖고 있었다. 그는 체계적이고 꼼꼼한 방식으로 업무를 수행했다. 자신은 징벌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라, 규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탐정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우리는 항상 법조문을 엄격히 따랐다. 적어도 내가 소련 KGB의 방첩 부서와 정보 부서에서 일할 때는 그랬다. 소련 영토에서 시행되는 법을 어길 수도 있는 작전을 시작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증거와 연역법으로 첩자를 잡아내려고 했다. (P333-334)


잠시 뒤 그리빈이 들어왔다. 그루시코의 방에서 그 기괴한 일이 벌어지는 동안 그리빈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가 슬픈 얼굴로 고르디옙스키를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고르디옙스키는 이것이 함정임을 간파했다.

“콜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당 지도자들을 비판하는 걸 누가 엿들은 것 같습니다. 거대한 음모가 진행 중인 것 같아요.”

“그런 거라면 오죽 좋겠습니까.” 그리빈이 말했다. “당신의 경솔한 말이 마이크에 녹음됐을 뿐이라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훨씬 더 심각한 일인 것 같습니다.”

고르디옙스키는 다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빈이 그를 강렬하게 바라보았다. “모든 걸 철학적으로 받아들여요.” 사형 선고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아파트로 돌아온 뒤 고르디옙스키는 낮에 있었던 일을 해석해 보았다. KGB는 자비를 베푸는 취미가 없었다. 그들이 진실을 손톱만큼만 안다 해도 그는 죽은 목숨이었다. 하지만 그가 아직 루뱐카 지하실로 끌려가지 않은 것을 보면, 조사관들이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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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지쳐서 만취한 채 아파트로 돌아온 고르디옙스키의 머릿속에서 의문들이 마구 날아다녔다. 스치는 접선이 왜 실패했지? MI6가 날 버린 건가? KGB는 왜 아직도 날 가지고 노는 거지? 누가 내 정체를 알렸을까? 내가 도망칠 수는 있을까?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살면서 겪는 문제 대부분에 답을 내놓았다. 영어권의 가장 위대한 작가인 그는 <햄릿>에서 인생이 내민 도전이 압도적으로 보일 때 운명과 용기의 본질에 대해 숙고했다. <슬픔이 올 때는 스파이 하나가 아니라 대부대로 온다.>

1985년 7월 15일 월요일, 올레크 고르디옙스키는 자신이 갖고 있는 셰익스피어 소네트집에 손을 뻗었다. 그는 부엌 개수대에 옷을 한 아름 쌓아 두고 물에 흠뻑 적신 다음, 책을 그 아래의 비눗물 속에 슬쩍 밀어 넣었다. 10분 뒤 책이 흠뻑 젖었다. (P392-393)


고르디옙스키는 화제를 바꿨다.

“서머싯 몸의 <해링턴 씨의 세탁물> 읽어 보셨습니까?”

이것은 어샌든 시리즈의 단편 중 하나였다. 류비모프는 고르디옙스키와 함께 덴마크에 근무하던 10년 전 몸의 작품들을 그에게 소개해 준 사람이었다. 고르디옙스키는 그가 몸의 전집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주 좋은 작품입니다. 다시 읽어 보세요.” 고르디옙스키가 말했다. “4권에 있습니다. 찾아서 읽어 보세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실 겁니다.”

그 뒤로도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는 전화를 끊었다.

이 통화에서 고르디옙스키는 류비모프에게 암호처럼 변형한 작별 인사와 뜻이 아주 명확한 문학적 단서를 하나 전달했다. “해링턴 씨의 세탁물”은 영국 스파이가 러시아 혁명 때 핀란드를 통해 탈출하는 이야기다.

1917년을 배경으로 한 이 단편에서 영국의 비밀 요원 어셴든은 임무를 위해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러시아로 향한다. 여행 중 그와 같은 칸을 사용하게 된 미국인 사업가 해링턴 씨는 기분 좋게 수다를 떠는 사람이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꼼꼼해서 화가 치밀 정도다. 혁명이 러시아를 집어삼키자, 어셴든은 해링턴에게 혁명 세력을 피해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가라고 촉구하지만, 해링턴은 호텔 세탁실에 맡긴 자신의 옷을 찾기 전에는 떠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옷을 찾은 직후 거리에서 혁명 군중이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둔다. 이 소설은 위험부담(<사람들은 항상 구구단을 배우기보다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편이 더 쉽다고 생각한다>)과 늦기 전에 탈출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어셴든은 기차를 타고 핀란드를 통해 빠져나온다. (P412-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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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케이시와의 점심 식사 이후로도 CIA와 많은 만남이 이어졌다. 겨우 몇 달 뒤에 고르디옙스키는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워싱턴으로 날아가 국무부, 국가 안보 회의, 국방부, 정보기관 등의 고위 관료들과 비밀회의를 했다. 그는 마구 쏟아지는 질문에 참을성 있게 전문가다운 태도로 대답했다. 유례없이 상세한 대답이었다. 그는 단순한 망명자가 아니라, 오랫동안 깊숙한 곳에 침투해 활동한 스파이였으므로 KGB에 대해 백과사전 같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미국 관리들은 그에게 감탄하며 고마워했다. 영국 쪽 관계자들은 자기들이 보유한 최고 스파이의 전문적인 지식을 나눠 주며 뿌듯해했다. <고르디옙스키가 제공한 정보는 아주 좋았다.> 레이건 정부의 국방 장관 캐스퍼 와인버거의 말이다.

하지만 그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누가 그의 정체를 알린 배신자인가?

랭글리의 CIA 본부에서 고르디옙스키는 고위 관리들에게 연달아 브리핑을 했다. 한번은 키가 크고 안경을 쓰고 연한 콧수염을 기른 남자를 소개받았는데, 그는 유난히 친절하게 굴면서 고르디옙스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조용히 참을성 있게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고르디옙스키가 보기에 CIA 관리 대부분은 다소 형식적인 태도를 취했고, 심지어 조금 의심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다른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서 온화함과 친절함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너무 인상이 깊어서 미국의 가치를 보여 주는 산증인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는 내가 그동안 그토록 많이 들어 본 개방성, 정직성, 품위 그 자체였다.>

고르디옙스키는 10여 년 동안 이중생활을 했다. 국가에 헌신하는 직업 정보 요원이면서 다른 편에게도 비밀리에 충성하는 생활이었다. 이런 생활을 해내는 솜씨도 아주 좋았다. 그건 올드리치 에임스도 마찬가지였다. (P479-480)


<나는 그렇게 겁에 질린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날 메시지를 전달한 MI6 요원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덜덜 떨면서 자리를 떴다.>

조건은 간단했다. 고르디옙스키 덕분에 영국은 이제 영국에서 활동하는 KGB와 GRU 요원의 신원을 모조리 파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반드시 영국을 떠나야 했다. 하지만 소련 당국이 <고르디옙스키의 가족을 풀어준다면, 이들을 오랜 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철수시킬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이 영국의 제안이었다. 그러면 크렘린은 체면을 지킬 수 있고, 스파이들은 외교적인 소란 없이 조용히 영국에서 퇴출될 것이며, 고르디옙스키의 가족은 다시 모여 살 수 있었다. 만약 소련이 이 제안을 거부하고 레일라와 딸들을 석방할 수 없다고 나온다면, 런던에서 활약하는 소련 스파이들이 대거 한꺼번에 추방될 것이다. 영국은 KGB에 2주 동안 생각해 보고 답을 달라고 말했다. (P514)


서방의 정보기관들에게 고르디옙스키의 사례는 스파이를 포섭해서 관리하는 법, 정보를 이용해서 국제 관계를 향상시키는 법, 그리고 가장 극적인 상황에서 위험에 처한 스파이를 구하는 법을 보여 주는 교과서적인 예가 되었다. 그러나 누가 그의 정체를 소련에 알렸는가 하는 의문이 아직 남아 있었다. 고르디옙스키는 나름대로 가설을 세워 첫 아내인 옐레나나 체코인 친구인 스탄다 카플란이 비밀을 폭로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베터니가 MI5 내부의 첩자라는 자신의 정체를 폭로한 사람을 스스로 알아냈을 수도 있고, 아르네 트레홀트가 체포되면서 KGB가 경계심을 품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르디옙스키도 MI6도 그가 장기간에 걸쳐 CIA에 브리핑을 하는 동안 탁자 맞은편에 자주 앉아 있던 친절한 미국 요원을 의심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P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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