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편(外篇) ------------> 프레이밍(Framing)
“이 몽매의 시간이 다하고 저문 길 어귀에라도 간다면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기를 바라네 마음은 머물지 않으니 다만 어디로 가는가 어지러운 세상길 뒹굴어 어느덧 화사한 폐허에 닿았네 정신, 그 미답의 파동, 꿈으로 피는 꽃 어느 옛 시인의 이력인가 저 바람에 새긴 불립문자.
마침내 나는 보았네, 생이 그 저열함을 감출 채 황망히 어둠 저편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을 그러나 다시 선연한 새 날이 밝으면 마치 떠도는 개처럼 서러이 지청구나 내뱉으며 잊힌 듯 되살아나리라”
-김두수, 무정유 中에서-
있을 재(在), 용서할 유(宥) 또는 너그러울 유(宥)라는 한자 뜻을 가지고 있다. 곽상(郭象)은 “있는 그대로 놔두면 다스려지고 억지로 다스리면 어지러워진다[宥使自在則治 治之則亂也].”라고 풀이했다. 있는 그대로 놓아둠이다. “천하는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지 다스려서는 안 된다고 한다. 천하를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은 천하 사람들이 그들의 본성을 잃게 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천하를 내버려 두는 것은 천하 사람들이 그들의 타고난 덕이 바뀔까 두렵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두어야 하는 것을 강조하는 장자에게는 연출은 아마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일지도 모른다. 사건에 개입하는 행위 또한 말이다. 재유는 있는 그대로 두라는 의미이고, 이것은 결국 본성을 잃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자연의 본성을 말한다. 황제(皇帝)와 광성자(廣成子)와의 도에 대한 대화에서, 광성자는 이렇게 말한다. “눈으로 보지 말고 귀로 듣지 말고 마음을 고요하고 맑게 간직해야 한다. 육신을 고되게 하거나 정신을 흔들리게 하지 말아야 오래 살 수 있다. 정신이 자기 몸을 지켜 아는 바도 없고 자아도 없게 되면 그대는 변화가 무궁한 태허광야에서 노닐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만물의 조화 속에서 자연과 하나가 되고 오래 살 수 있다.” 자연의 지혜를 따르는 지극한 사람은 “그의 형체는 자연과 하나를 이루기 때문에 움직임을 멈추어도 소리가 없고, 움직여도 흔적이 없다. 그래서 그는 미혹과 혼란 속에 있는 세상 사람들을 이끌어 도의 길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
눈 밝은 것(明)을 좋아한다면 이는 아름다운 색깔을 탐닉하는 것이고,
귀 밝은 것(聰)을 좋아한다면 이는 아름다운 소리를 탐닉하는 것이고,
인(仁)을 좋아한다면 이는 사람이 본래 타고난 덕(德)을 어지럽히는 것이고,
의(義)를 좋아한다면 이는 자연의 조리를 어기는 것이고,
예(禮)를 좋아한다면 이는 기교(技巧)를 조장(助長)하는 것이고,
악(樂)을 좋아한다면 이는 넘침을 조장하는 것이고,
성인(聖人)을 좋아한다면 이는 재주를 조장하는 것이고,
지식(知)을 좋아한다면 이는 헐뜯음을 조장하는 것이다.
이 여덟 가지(明·聰·仁·義·禮·樂·聖·知)는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다. 이 여덟 가지가 본성을 잃고 서로 엉키고 뒤섞이면서 천하를 어지럽힌다고 말한다.
자연(自然)의 풍경
사진을 크게 인물사진(portrait)과 풍경사진(landscape)으로 나눈다면, 풍경사진은 사진가가 카메라를 통해서 세상(풍경)을 보는 시각이자, 관점(point of view)이다. 프레임을 정하고, 렌즈의 초점을 맞추고, 노출을 측정하여 풍경사진을 찍은 행위는 대상(object)을 발견하고 이해하는 시각적인 과정의 시작이다. 인간이라는 주체와 자연이라는 대상과의 인식과정의 방법, 사진의 원근법적인 체계가 갖는 서구의 인간중심적인 세계관에서 자연과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풍경은 달라질 것이다. 스티글리츠의 스트레이트 사진에서 시작된 미국 서부 풍경사진의 전통은 1930년대 안셀 아담스와 에드워드 웨스턴의 F64 그룹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지형학적 사진(New Topographics), 뉴 컬러 사진(New Color)에 이르기까지 사진가들의 표현의 방법은 다양해졌다. 현대 사진에서의 심상적(심상적) 풍경은 소재가 무엇이든 사진가의 내면과 만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냈다. 종래의 의미에서의 아름다운 풍경에서 벗어나, 보잘 것 없는 풍경이든, 낯선 풍경이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사진가의 표현수단으로서의 풍경이다.
추출과 추상
2025년 12월 13일부터 2026년 3월 2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는 인상적인 전시하나가 열렸다. 한국과 캐나다 상호 문화교류의 해 기념 특별전이다. 이 특별전의 주제는 “추출(Extraction)과 추상(Abstraction)”이다. 전시 제목인 <추출과 추상>은 버틴스키 작업의 핵심을 압축한다. 광산, 정유, 제조, 농업, 폐기물 처리등 자원과 산업의 현장에서 포착한 장면은 <추출>이고, 화면 속의 색채와 질감, 구도의 조형성은 <추상>이다. 그의 사진은 크기면에서도 압도적이다. 멀리서 보면 추상적인 표현들이 마치 추상미술로 유화작업을 한 듯이 보인다. 그렇지만 가까이서 보니 사진으로 촬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니켈 광미 #34>는 마치 대지예술인줄 보였다. 붉은 색의 강은 물감으로 채색되었나 싶었다. 그러나 이 사진은 광산 폐기물이다. 니켈 매장지로 유명한 캐나다 서드베리 외곽에서 촬영되었다. 사실 강이 아닌 폭 1m 남짓의 작은 개울의 선명한 붉은빛은 산화철, 즉 녹이 만들어낸 색이다.
우리는 자연의 품에서 태어났다.
그 앞에서 겸허히 경외심을 지키는 일, 그것이 곧 우리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자연을 잃는 것은, 우리를 잃는 것이다.
-에드워드 버틴스키(Edward Burtynsky)-
에드워드 버틴스키, 제니퍼 베이철, 닉 드 펜시어 세명의 공동감독이 제작한 영화 <인류세: 인간의 시대(Anthropocene: The Human Epoch)>는 2019년 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소개되었다. 이 영화는 인류가 지구라는 행성에 남긴 거대한 흔적과 변형에 대한 영화적 명상을 보여준다. <아르얀 란버틴스키와 산업사회의 초상>(2006)과 <워터마크>(2013)으로 이어지는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일군의 과학자들과 예술가와 작가들이 4년 동안 작업한 결과물이다. <인류세>라는 말은 네덜란드의 대기화학자인 폴 크뤼천이 2000년 국제 회의에서 처음 사용한 이래로 사회와 과학계의 관심을 받고 있는 주제이다. 지구의 생물 지구화학적 순환에서 인간이 초래한 변화는 자연적 변이를 뛰어넘는 수준이기 때문에 현 세대를 ‘인류세’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지질학적 구분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인류세’라는 용어가 장자의 <인간세(人間世)>편에서 기계와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산목은 스스로를 해치고, 기름은 스스로를 태운다. 계수나무는 먹을 수 있어 베이고, 옻나무는 쓸모 있어 상처를 입는다. 사람들은 모두 유용함의 쓸모는 알지만, 무용함의 쓸모는 알지 못한다.”
지금의 내 작업은 두 가지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자연을 가공하는 산업들-양식장, 광산, 벌목 등이고 다른 하나는 장엄한 자연 그 자체다.
이 작업을 통해 나는 인간과 자연이 맞닿는 경계면에 빛을 비추고자 한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땅을 차지하고,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생명을 죽여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 이러한 행위를 이어오며 점차 환경으로부터 소외되어 왔다고 느낀다.
우리는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에드워드 버틴스키, 일기 중에서(1983년 10월)
말이라는 틀
“나는 말이라는 틀에 갇혀 있다.” <여행과 나날>(2025)이란 영화에서 극중 각본가인 이(李)의 독백이다. 이야기를 다루는 극본가에게 있어서 언어란 의사소통의 도구이자 사고의 한계를 규정짓는 감옥이다. 그런 감옥에서 벗어나 여행은 그녀에게 새로운 탈출구처럼 보인다. 말이라는 틀은 장자에게 있어서 세속적인 언어일지 모르겠다. 유가 사상(儒家 思想)의 어짊과 의로움을 비판하고, 말의 현란함이나, 지(知)를 비판하고 있고 자연스러움, 본성을 강조한다. 아마도 정의를 외치지만, 사실 정의의 껍데기를 좇을 뿐, 정의롭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다. 이것을 경계하고 있는 말일 것이다. 세상은 말뿐인 말들이 넘쳐나고, 말이라는 틀에 우리를 옥죄고 있을지 모른다.
https://youtu.be/Z3Vu2BgxmEU?si=Q_b_WJgbvTIWGfW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