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편(外篇) ------------> 프레이밍(Framing)
“해가 뜨고 해가지면 달이 뜨고 다시 해가 뜨고 꽃이 피고 새가 날고 움직이고 바빠지고 걷는 사람 뛰는 사람 서로 다르게 같은 시간 속에 다시 돌고 돌고 돌고 춤을 추듯 돌고 노래하며 다시 돌고 돌고 돌고 돌고”
-전인권, 돌고 돌고 돌고 中에서-
천도(天道) 편은 ‘고요히 마음을 비워야 올바른 삶을 누린다’라는 내용이다. 마음을 비우고 공간을 있는 그대로 보자. 사진가는 그 공간의 작은 흐름도 눈에 들어오게 된다. ‘오래 보아야 보인다’라는 말은 ‘마음을 비워야 보인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하늘의 도(道)는 한 곳에 멈추는 일이 없이 운행한다. 그것을 관찰하는 사진가 또한 한 곳에 멈추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사진가의 마음이 고요하면 그의 눈을 밝게 비추며, 하늘과 땅을 비추는 거울처럼 맑을 것이다.
북을 치며 도둑을 쫓다(擊鼓追逃犯)
공자와 노담의 대화이다.
공자가 말했다. “이 열두 권의 경서의 핵심은 인의(仁義)입니다.”
노담이 물었다. “인의라는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인의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사심이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
노담이 말했다. “틀렸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천지는 본래 일정한 궤도가 있고, 해와 달은 보내 밝은 빛이 있습니다. 별은 본래 배열된 질서가 있고, 동물과 식물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습니까? 그대는 천지가 인간을 사랑하고 보호하지 않을까 걱정입니까? 그대처럼 인의를 떠들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서로 사랑하고 사심이 없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감옥에서 탈출한 도둑을 향해 북을 치며 돌아오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허나 결과는 어떻겠습니까? 북소리가 크게 울릴수록 도둑은 걸음을 재촉할 것이고 순식간에 자취를 감출 것입니다.”
공자의 생각은 사람들의 본성을 어지럽힌다고 노담은 신랄하게 비판한다. 사진가는 떠들고 유세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멀리서 지켜보는 존재이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가 사진가이다. 사진가의 존재를 북을 치며 알리는 순간 도둑(피사체)은 자취를 감출 것이다. 사진은 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 그 자체로 진실에 이르고자 한다. 생각하는 사진(思眞)은 사진의 진정한 의미, 진실된 것에 대한 의미를 깊이 있게 찾는데 있을 것이다. 또한 작가는 일관되게 진정성을 가질 때만이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요란하게 떠들고 다니지 않아도, 고요하게 꾸준히 일관된 작업을 하는 사진가만이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최민식은 “사진은 한 시대와 사회, 그리고 그 속에 사는 인간을 말한다. 사진은 인간의 삶의 기록이며 역사이다. 삶의 모든 진실이 사진 속에 들어 있다”라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화가이다. 추하다고 여기는 것들도, 사람들이 흔히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 만큼이나 아름답다.” 프랑스 화가 장 뒤뷔페(Jean Dubuffet)의 말이다.
수레바퀴를 만드는 노인(做車輪的老人)
제나라 환공(桓公)과 윤편(輪扁)의 대화이다.
윤편이 망치와 끌을 내려놓고 환공에게 물었다.
“지금 읽고 있는 것은 어떤 책입니까?”
환공이 말했다.
“성인의 경전을 읽고 있다.”
윤편이 탄식하며 말했다.
“지금 읽고 있는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로군요.”
환공이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무엄하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지 설명해 보아라. 만약 헛소리를 늘어놓는다면 살려두지 않겠다.”
윤편이 설명했다.
“우선 화를 거두시고 제 얘기를 들어 보십시오. 제가 수레바퀴를 만드는 방법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칼을 빠르게 놀리면 힘은 덜 들지만 바퀴 모양이 둥글지 않습니다. 칼을 천천히 대고 깎으면 힘은 많이 들지만 바퀴모양이 둥글고 매끄럽게 됩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최고의 기술은 칼을 잡은 손이 빠르지도 더디지도 않게 마음먹은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기술을 제 아들에게 전해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 나이가 일흔인데도 아직까지 수레바퀴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옛 성인이 깨달은 도(道) 또한 전해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옛사람의 찌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윤편이 칼을 쓰는 방법은 카메라를 다루는 사진가에게도 해당된다. 힘이 들어간 사진은 사진가의 욕망이 강하게 들어간 사진일 것이다. 좋은 사진을 만들겠다고 힘이 들어가다 보면 오히려 그 역효과가 있을 수 있겠다. 가장 좋은 방식은 공간의 흐름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야 좋은 사진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기존의 규칙들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선 옛사람의 찌꺼기가 아닌 자신만의 노하우(knowhow)를 체득해야 함은 진리인 듯싶다. 우리는 자아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다양한 공간과 마주하게 된다. 다양한 체험의 공간, 이러한 공간은 우리에게 어떤 공간일까? 물리공간(physical space), 생명공간(life space), 지성공간(intelligent space), 감성공간(emotive space), 영성공간(soul space). 그 어떠한 공간일지라도 우리는 그 공간적 관계 속에서 사유하게 된다.
“도를 배움에 있어서 세상에서 귀중히 여기는 것은 글이다. 글이란 말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 귀중한 것이 된다. 말이 귀중한 까닭은 뜻이 있기 때문인데, 뜻이란 추구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뜻이 추구하는 것은 말로써 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에는 그 때문에 말을 귀중히 여기며 글을 전한다. 세상에서는 비록 그것들을 귀중히 여기지만 귀중히 여길 것이 못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귀중히 여기는 것이 귀중한 것이 못되는 까닭이다.
그런데 눈으로써 볼 수 있는 것은 형체의 색깔이다. 귀로써 들을 수 있는 것은 명칭과 소리이다. 슬프다! 세상 사람들은 그 형체와 색깔과 명칭과 소리로써 그것들의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형체와 색깔과 명칭과 소리로써는 절대로 그것들의 진실을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고 있으니, 세상에서야 어찌 그것을 알 수가 있겠는가?”
https://youtu.be/QChw_dSHzag?si=7s2NM7QsVbMx4C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