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편(外篇) ------------> 프레이밍(Framing)
“승냥이 울음따라 따라간다 별빛 차가운 저 숲길을 시냇가 물소리도 가까이 들린다 어서 어서가자 길섶의 풀벌레들 저리 우니 석가세존이 다녀가셨나 본당의 목탁소리 귀에 익으니 어서 어서가자 이 발길 따라오던 속세의 물결도 억겁속으로 사라지고 멀고 먼 뒤를 보면 부르지도 못할 이름 없는 수많은 중생들 추녀끝에 떨어지는 풍경소리만 극락왕생 하고 어머님 생전에 출가한 이몸 돌계단에 발길도 무거운데 한수야 부르는 쉰 목소리에 멈춰서서 돌아보니 따라온 승냥이 울음소리만 되돌아서 멀어지네”
-정태춘, 탁발승의 새벽노래 中에서-
천지일월(天地日月)
하늘은 움직이는 것일까? 땅은 정지해 있는 걸까? 해와 달은 서로 장소를 놓고 다투고 있는 것인가? 무엇이 하늘, 땅, 해와 달을 주재하는 것일까? 구름이 비를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비가 구름을 만드는 것일까?
장자가 말했다.
“하늘에는 육극(六極)과 오상(五常)이란 것이 있다. 모든 것이 ‘스스로 그러한 것(自然)’이다.”
인간은 자연을 벗어나서는 살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연을 거스리고 스스로 인위적으로 살아간다. 아마도 사진가도 카메라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재단(裁斷)하려고 한다. 장자가 말한 자연적이게(또는 자연스럽게) 사진에 담을 수는 없을까. 우리는 프레임이라는 틀에 갇혀 있다. 프레임을 벗어나 생각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과연 자연이라는 프레임으로 볼 수 있는 것인가.
“제가 이제껏 세상 사람들 속에서 헤매느라 오랫동안 자연의 조화와 벗하지 못했습니다. 이러니 제가 어찌 사람을 감화할 수 있었겠습니까?”
노담이 말했다.
“맞습니다. 이제 선생은 도(道)를 깨달았습니다.”
갈매기와 까마귀(海鷗和烏鴉)
공자가 노담(老聃)을 찾아가 인의(仁義)를 논했다.
노담이 말했다.
“갈매기는 날마다 목욕해서 하얀 것이 아니며, 까마귀는 날마다 검은 물을 들여서 저리 검은 것이 아닙니다. 검은 것과 흰 것 모두 자연의 본질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흰 것이 예쁘고, 검은 것이 예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도를 깨달은 사람이 볼 때, 인의로써 선악을 구분하는 선생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이치 때문입니다.” 인의로써 구분한다는 것이 어쩌면 인위적인 사고방식에서 출발하는 것일지 모른다. 장자는 인의를 뛰어넘어(초월하여) 지극한 도에 이르러야 한다고 역설한다.
“효도와 공경, 어짊과 의로움, 충성, 신용, 정절, 청렴의 덕목은 사람을 서로 아끼게 한다. 허나 이것은 최고의 경지가 아니다. 물고기가 서로를 잊고 자유롭게 헤엄치며 지내는 것처럼, 사람이 지극한 어짊의 경지에 오르려면 앞서 말한 세속의 덕목을 초월해야 한다.” 이에 덧붙여 장자는 말한다. “지극히 존귀한 사람은 벼슬을 원치 않습니다. 지극히 부유한 사람은 재물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행복한 사람은 명예를 외면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극한 경지의 도입니다.”
상황(狀況)과 상태(狀態)
‘상태(狀態)’는 사물 현상이 놓여있는 모양이나 형편이고, ‘상황(狀況)’은 일이 되어 가는 과정이나 형편을 뜻한다. 상황은 사건의 순간을 말한다면, 상태는 그 순간이든, 결과이든 처해진(그 결과) 것이다. 상황은 시간적인 의미가 강하다면, 상태는 공간적인 의미가 강하다. 프레임속에는 상황과 상태 둘 다 담겨져 있다. 바람이라는 우연적(시간적) 요소가 프레임에 들어오면서 상태가 형성된다. 바람은 북쪽에서 생겨나서는 서쪽으로 불었다. 동쪽으로 불었다 하기도 하고, 위쪽으로 불면서 빙빙 돌기도 한다. 햇빛은 동쪽에서 비추었다가, 서쪽에서 비춘다. 지나가는 행인은 왼쪽 프레임 밖에서 프레임 안 오른쪽으로 지나가기도 하고, 오른쪽 프레임 밖에서 프레임 안 왼쪽으로 지나가기도 한다. 프레임은 정지되어 있는 것 같지만, 조금한 미세한 요소들이 지나간다. 방향이 없는 작용인 상태는 프레임 안에서 변화와 움직임을 가지고 있다. 사진가가 그러한 요소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진가는 그러한 움직임을 관찰하고, 기록할 뿐이다.
https://youtu.be/K6Jz9jhGqiA?si=4EVjBCWX8I_9F04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