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영화 <이탈리아 여행> 1954년

by 노용헌

『이탈리아 기행』은 괴테가 1786년 9월부터 1788년 6월까지 약 20개월 동안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독일의 지인들에게 보낸 서한과 일기, 메모와 보고를 손질하여 엮은 것이다. 본래 3부 구성으로 된 이 책은 1816년에 제1부가, 이듬해 10월에 제2부가 출간되었으며, 당시 제목은 “나의 삶으로부터, 제2편 1부와 2부”였다. 1829년, 괴테 나이 80세에 제3부 ‘두 번째 로마 체류기’를 탈고한 다음에야 비로소 『이탈리아 기행』이 완성되었다. 괴테가 이탈리아 여행에서 관심 깊게 살펴본 것은 자연환경, 사회, 그리고 예술이었다.

영화 <이탈리아 여행(Journey to Italy)>는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 잉그리드 버그만, 조지 산더스 주연의 영화이다. 이 영화는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깨뜨린 현대 영화의 출발점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나폴리의 웅장한 유적과 조각상들이 주인공의 내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실제 부부였던 두사람의 묘한 긴장감이 영화 속에 투영되었고, 여행이라는 설정이 어떻게 인간의 내면을 흔들어 놓는지 보여준다. 소설과는 제목만 같다.

[1]

1786년 9월 3일, 레겐스부르크에서

새벽 3시, 나는 칼스바트를 몰래 빠져나왔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나를 떠나지 못하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8월 28일 내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려던 그 친구들에게는 나를 만류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수 없었다. 여행 가방 하나와 오소리 가죽 배낭만을 꾸려서 홀로 우편 마차에 몸을 실으니, 아침 7시 30분에는 츠보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안개가 가득 낀 아름답고 조용한 아침이었다. 하늘 위쪽 구름은 부드럽게 줄이 간 양털 같았고 아래쪽 구름은 무겁게 처져 있었다. 그것은 좋은 징조로 보였다. 여름내 좋지 않았던 날씨가 지나가고 이제는 상쾌한 가을을 맞이할 거라는 예보 같았다. 나는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12시에 에거라는 곳에 도착하여, 이곳이 나의 고향과 같은 위도 상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또다시 북위 50도의 맑은 하늘 밑에서 점심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다. (P31-32)

예수회 신자들의 행동이나 태도는 끊임없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그들이 세운 교회, 뾰족탑, 그 밖의 건축물들은 그 규모가 크고 완벽하다는 점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저도 모르게 외경심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금, 은, 청동, 조탁된 돌 등으로 눈부시도록 화려하게 장식해 놓고 있어서 가난한 계층 사람들이 현혹되지 않을 수 없다. 가끔 이곳저곳에서 환심을 사기 위해 일부러 몰취미하게 만들어놓은 점도 없지는 않았다. 이런 것이 가톨릭교의 총체적 예배 의식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회 교파의 경우처럼 지혜와 완전무결함이 발휘된 것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다른 교단의 성직자들처럼 무감동하고 케케묵은 예배 의식을 고집하지 않고 시대정신에 적응해서 화려한 장식물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독특한 돌이 건축 자재로 사용되고 있는데, 겉보기에는 죽어 있는 무생물체 같지만 사실은 좀 더 오래된 반암 같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돌은 푸른빛에 석영이 섞여 있으며, 구멍이 많고 속에 아주 단단한 벽옥으로 된 커다란 반점들이 있다. 또 그 반점 안에는 각력암 종류의 조그맣고 둥근 반점들이 비쳐 보인다. 이런 돌 조각을 채집할 수 있다면 연구에 도움도 될 것이고 수집하고 싶은 욕심도 났지만, 너무 견고하게 붙어 있어서 떼어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는 돌 수집은 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P35)

우리는 산을 관찰할 때 산꼭대기에서 햇빛이 빛나거나, 혹은 안개가 끼어 있거나, 광분하는 구름이 가득하거나,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리거나 하는 모든 현상이 대기의 작용 때문이라고 말한다. 대기의 움직임이나 변화는 눈으로 확실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산들은, 우리들이 외적 감각으로 판단하기에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모습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산을 생명 없는 존재로 본다. 휴식하고 있다는 이유로 활동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오래전부터 대기 중의 변화라는 것은, 실은 그 원인의 대부분이 산 내부의 조용하고도 신비로운 작용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즉 내가 믿는 바에 의하면 지구라는 덩어리, 특히 지반이 융기해 있는 부분은, 모든 지점에 항상 똑같이 지속하는 인력이 미치는 것이 아니다. 그 힘은 일종의 파장을 이루어 나타나며, 내부의 필연적 원인 혹은 외부의 우연적 원인 때문에 때로는 증대하고 때로는 감소한다. 이 진동을 명증하려는 모든 실험이 너무나 한정되고 조잡하다고 해도 대기는 산이 가지고 있는 비밀스러운 작용을 우리들에게 교시하기에 충분한 민감성과 넓이를 가지고 있다. 인력이 조금이라도 감소하면, 대기의 중력과 탄력이 줄어들고 그 영향은 우리들에게까지 전해지게 된다. 대기는 화학적으로, 역학적으로, 배분되어 있던 습기를 지탱할 수 없게 됨으로써 구름이 아래쪽으로 내려와 비가 쏟아지고, 빗물은 저지대로 흘러간다. 그러나 산의 중력이 증가하면 곧 대기의 탄력성이 복구되고 그리하여 두 가지 중요한 현상이 일어난다. 하나는 산들이 거대한 구름 덩어리를 주위에 집합시켜서 마치 제2의 산정처럼 산 위쪽에 단단히 붙들어 매어두는 것이다. 결국 내부에서 일어난 전기력의 투쟁으로 인해 이들 구름은 소나기, 안개 또는 비가 되어 지상으로 내려온다. 곧 이어 나머지 구름에 탄력 있는 공기가 작용하는데 이 공기는 수분을 더 많이 포함하고, 분해하고,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이러한 구름이 사라지는 모습을 나는 똑똑히 관찰했다. 그때 구름은 높은 산정에 걸려 석양빛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점차 그 끝 부분이 찢겨져 분리되면서 몇 개의 구름 조각이 상공으로 흘러 올라가 끝내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구름 덩어리는 점차 흩어져 없어졌고, 내 눈앞에서 마치 어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실이 완전히 다 풀려버린 실타래처럼 되어버렸다. (P45-46)

1786년 9월 11일 아침, 트렌토에서

나는 꼬박 오십 시간 동안 활동을 계속하며 쉴 새 없이 돌아다니다가 어제 저녁 8시에 이곳에 도착하였다. 그 후 곧 잠을 잤기 때문에 지금은 다시 이야기를 계속할 기력이 생겼다. 9일 저녁 내 일기의 1장을 다 쓰고 나서, 다시 나의 숙소였던 브레너의 역사(驛舍)를 스케치해 보려고 하였으나 잘되지 않았다. 그 특성을 글로 옮기지 못하여 기분이 상한 채로 다시 돌아왔다. 주인은 달도 밝고 길도 좋은데 출발할 생각이 없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주인이 내일 아침에 목초를 운반하는 데 말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때까지 돌아오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제안에는 이기적인 계산속이 들어 있기는 했지만 내 마음속 움직임과 일치하였기 때문에 받아들이기로 했다. 태양이 다시 모습을 나타냈고 공기는 나쁘지 않았다. 나는 짐을 꾸려서 7시경에 출발하였다. 대기가 구름을 쫓아내 버려서 야경이 아름다웠다. (P53-54)

저녁에 시원한 바람 속을 산책하였다. 지금 나는 정말 새로운 곳에, 전혀 낯선 지방에 와 있음을 느낀다. 사람들은 모두 태평하게 도원경에서 살고 있다. 첫째로 문에는 자물쇠가 없다. 그래도 주막집 주인은 조금도 걱정할 것이 없다고 나에게 장담하였다. 심지어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이 모두 다이아몬드로 되어 있다 하더라고 염려 없다는 말까지 하는 것이었다. 둘째로 창에는 유리 대신 기름종이가 발라져 있다. 셋째로 무엇보다도 긴요한 변소가 없다. 이곳 사람들은 대자연과 가깝게 생활하고 있다. 내가 하인에게 용변 볼 자리를 물었더니 그는 안뜰을 가리키면서 “저기서 하십시오.”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어디 말이오?”라고 물으니 “아무 데나 맘에 드는 곳에서!”라고 친절히 대답하는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어디서나 천하태평의 분위기였으나, 그러면서도 활기 있고 부지런하기도 하였다. 하루종일 이웃 아낙네들은 수다를 떨고 소리를 지르지만, 동시에 모두 항상 무엇이든 지금 해야 할 일과 이루어야 할 일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P63-64)

9월 13일 저녁

오늘 새벽 3시에 두 사람의 뱃사공과 함께 토르볼레를 떠났다. 처음에는 순풍이었기 때문에 돛을 달 수 있었다. 아침 경치가 기가 막히게 좋았다. 약간 흐렸지만 해가 뜨기 전에는 조용했다. 우리는 리모네 옆을 통과해 지나갔다. 계단식으로 레몬 나무를 심어놓은 리모네의 산비탈 과수원은 풍요롭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과수원 전체에 걸쳐서 몇 줄의 하얀 사각형 지주가 줄지어 있었고, 각기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계단 모양으로 산허리를 향해 뻗쳐 있었다. 그 지주 위에는 튼튼한 막대기가 걸쳐 있는데 겨울이되면 그 안에 심긴 나무를 덮어주도록 되어 있었다. 배가 천천히 움직였기 때문에 이러한 재미있는 광경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벌써 말체시네 근방을 통과하였을 때, 바람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고 늘 그랬듯이 낮 바람이 되어 북풍이 불기 시작했다. 아무리 노를 저어도 그 강력한 힘에는 대항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는 수 없이 말체시네 항구에 배를 댔다. 이곳은 호수 동쪽에 위치한 최초의 베네치아(Venezia) 부락이다. 뱃길은 오늘 어디에 닿는다고 미리 예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곳에 체재하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이용할 작정이다. 특히 호숫가의 성은 좋은 피사체이므로 그림을 그려보려 한다. 오늘 배를 타고 지나 오면서도 벌써 한 장의 스케치를 그렸다. (P65)

일찍이 에터스부르크의 극장에서 내가 트로이프로인트 역할을 할 때 종종 놀려주던 새들의 합창대를 바로 눈앞에서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아주 명랑해져서, 영주가 비서를 데리고 도착하였을 때 당당한 태도로 인사하고, 무엇 때문에 그 성채를 그렸느냐는 질문에 이곳은 예전에 성이 있었던 자리이지 성채로는 인정할 수 없다고 상냥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 밖의 사람들에게도 탑도 무너져 있고 성벽도 허물어져 있는 것을 지적하면서, 성문도 없거니와 아무런 방비도 되어 있지 않은 점을 강조하고 그곳은 폐허에 불과하며 나는 다만 폐허를 스케치해 볼 생각이었을 뿐이라고 단언하였다.

폐허라면 대체 무엇이 신기해서 그리려고 했느냐고 묻기에, 나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이해하기 쉽도록 세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즉 얼마나 많은 여행자들이 단지 폐허를 보기 위해 이탈리아로 오는지, 세계의 수도인 로마(Roma)는 야만인들에 의해 파괴된 폐허에 지나지 않지만 그 폐허야말로 백 번 천 번 훌륭한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P67)

1786년 9월 16일, 베로나에서

고대의 중요 유적 중에서 내가 처음으로 본 원형극장은 정말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안에 들어가서 구경하였을 때, 그리고 극장 위로 올라가서 주위를 거닐었을 때는, 내가 어떤 웅대한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그러면서도 사실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이곳은 사람들이 없이 텅 비었을 때 구경하면 안 된다. 최근 요제프 2세와 피우스 6세를 위하여 행사를 거행했을 때와 같이 사람들로 극장이 가득 차 있을 때 보아야 한다. 군중들 앞에 서는 것에 익숙한 황제도 그 광경을 보고는 대단히 놀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 원형극장이 완전한 효과를 발휘했던 것은 역시 옛날이다. 고대에는 민중이 지금보다도 훨씬 더 민중적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이러한 원형극장은 민중들로 하여금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는 기분이 들게 하고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 즐기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평지에서 무언가 신기한 일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면 뒤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앞 사람보다 높은 위치에 서려고 애쓴다. 의자 위에 올라서거나 술통을 굴려 오고 마차를 끌고 오는 사람도 있고 널판을 여기저기 걸쳐놓고 올라서거나 근처 동산에 올라가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그 자리는 금세 하나의 분화구 같은 모양이 되어버린다.

구경거리가 같은 장소에서 자주 생기게 되면 요금을 낼 용의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간단한 좌석이 마련된다. 돈을 못 내는 사람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재주껏 구경을 하려고 한다. 이러한 일반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건축가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건축가가 그 분화구 같은 것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놓은 것이 바로 원형극장이다. 그것도 되도록 단순하게 장식해서 민중 자신이 그 장식이 되게끔 해놓는다. 그렇게 해서 극장을 가득 메운 군중이 자신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경탄하게 되는 것이다. 보통 때에는 질서도 규율도 없이 항상 이리저리 뒤죽박죽이 되어 돌아다니는 것만을 보아오다가, 머릿수도 많고 마음도 제각기 달라서 흔들흔들 여기저기 방황하던 동물이 합쳐져서 하나의 고귀한 신체가 되고, 통합된 하나의 정신으로 존재하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타원형을 이루고 있는 극장 형태의 단순성은 누구의 눈에도 기분 좋게 느껴지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는 전체 관객의 규모가 얼마나 방대한가를 일깨워 주는 척도의 구실을 한다. 이렇게 텅 비어 있는 상태로는 기준이 없기 때문에 큰지 작은지 판단하기 어렵다.

이렇게 위대한 작품을 오래도록 보존해 온 점에 있어서 베로나 사람들은 찬양 받아 마땅하다. 건물은 붉은색을 띤 대리석으로 지어져, 비바람에 시달림을 받고 있다. 그로 인해 부식된 계단들은 그때그때마다 항상 수복되어 왔기에 거의 전부가 마치 새것처럼 보인다. 히에로니무스 마우리게누스의 이름과, 그가 이 기념물에 바친 보기 드문 열성을 새겨놓은 비문이 있다. 외벽은 일부만 남아 있는데 과거에 완성된 적이 있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아래쪽의 아치형 지하 공간은 ‘일 브라’라고 불리는 큰 광장에 연결되어 있는데, 수공업자들에게 세를 주고 있다. 동굴 같은 빈 공간들이 이처럼 다시 활용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P79-81)

해 질 무렵 나는 분화구형 원형극장 언저리를 거닐면서 시내와 근처의 시골 마을이 멀리 보이는 경치를 즐겼다. 나는 완전히 혼자였다. 아래에 펼쳐진 일 브라 광장의 돌로 포장된 도로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각 계층의 남자들과 중류 계층의 여자들이 산책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까만 겉옷을 입고 있었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면 미라같이 보인다.

청결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여자들, 교회에 가야 한다. 산보를 나간다 하면서 늘 사람들 모이는 곳에 나타나기를 좋아하는 여인들에게 적합한 옷차림은 첸달레라는 모자와 이 계층의 여자들에게는 전천후 만능 복장으로 쓰이는 베스테를 생각하면 된다. 이 베스테라고 하는 것은 저고리 위에다 입는, 검은 호박단으로 만든 겉치마다. 만일 이 옷 밑에 깨끗한 흰 치마를 입고 있는 부인이라면, 자랑스럽게 검은 겉치마를 한쪽으로 추켜올릴 것이다. 이 겉옷은 띠로 묶는데, 허리를 꽉 졸라매서 가지각색 코르셋의 자락 부분에 덮이도록 되어 있다. 첸달레는 수염같이 생긴 기다란 장식이 붙은 커다란 모자로 모자 자체는 철사에 의해 머리 위로 높이 받쳐져 있지만 수염 장식은 장식 띠처럼 몸에 감아 붙이고 있어서 그 끝이 등 뒤에 매달려 있다. (P85-86)

성 조르조는 좋은 그림이 있는 화랑이다. 전부가 제단으로서 가치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 다 주목할 만한 수준의 작품이다. 하지만 이 불행한 예술가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혹은 누구를 위해 붓을 잡아야 했던 것일까? 가로 30피트, 세로 20피트짜리 대작 <만나의 비>, 그것과 한 쌍을 이루는 <다섯 개 빵의 기적>을 살펴보자. 이런 제목으로 무엇을 그릴 수 있었을까? 얼마 안 되는 곡물을 향해 쇄도하는 굶주린 민중들, 그리고 빵을 받고 있는 또 다른 무수히 많은 사람들. 화가들은 이런 시시한 제목으로 훌륭한 작품을 만들려고 고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도리어 이런 무리가 자극이 되어서 천재들은 걸작을 만들어 냈다. 일만 일천의 동정녀를 거느린 성 우어줄라를 그리게 되었던 한 화가는 정말 요령 좋게 그 일을 해냈다. 성녀는 국토를 수중에 넣은 승리를 과시하듯 전면에 내세워져 있다. 그 모습은 대단히 고귀하고 아마존족처럼 순결할 뿐만 아니라 자극적인 점은 조금도 없다. 한편 배에서 올라와 행렬을 이루고 있는 동정녀들의 무리는 모두 원경으로 축소되어 작게 보인다. 대성당에 있는 티치아노의 그림 <마리아의 승천>은 몹시 거무튀튀하게 보이지만, 승천하는 마리아가 하늘을 쳐다보지 않고 지상의 친구들을 내려다보게 한 그 착상은 칭찬할 만한 가치가 있다. (P87-88)

올림피코 극장은 고대인의 극장을 소규모로 재현한 것으로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그러나 이것을 독일의 극장과 비교하는 것은, 고귀하고 부유하고 교양 있는 아이와 그다지 고귀하지도 부유하지도 않고 교양도 없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무엇을 달성시킬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세속적 능력자를 비교하는 것과 같다.

지금 여기서 이 위대한 팔라디오의 건축물을 관찰하고, 그것이 이미 인간들의 편협하고 불순한 욕망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는 것, 실제의 수준이 종종 건설업자의 능력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 또 고매한 인간 정신의 귀중한 기념품이 사람들의 실생활에 적용되는 바가 얼마나 적은가를 볼 때, 결국 다른 모든 일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대중들의 내적 욕망을 승화시키고 자존심을 고취하며, 진실하고 고귀한 삶의 가치를 느끼게 하려는 노력을 해보았자 그들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듣기는 어려운 것이다. 반면 무지한 대중들을 속이고, 황당무계한 이야기나 들려주고, 매일 그들의 뒷바라지를 해서 속된 길로 떨어뜨리면 금세 인기가 올라간다. 그러므로 현 시대는 이렇게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에 만족하고 있는 셈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 나라의 친구들을 모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그들이 현재 그런 상태라는 것, 또한 만사가 그런 식이라는 것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을 말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팔라디오의 바실리카 회당이 균형이 맞지 않는 창문을 가득 붙여놓은 성채풍의 낡은 건물 --이것은 팔라디오가 탑과 함께 철거하려고 했던 것이 확실하지만-- 과 나란히 서서 어떠한 광경을 만들고 있는지 표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기묘한 표현으로 내 생각을 말할 수밖에 없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여기서 또다시 보고 싶지 않은 것과 보고 싶은 것이 병존하는 상태를 발견한 셈이다. (P99-100)

내가 1786년 9월 28일 저녁, 독일 시간으로 5시에 브렌타 강에서 갯벌로 진입하면서 처음으로 베네치아의 마을을 멀리서 바라보고, 계속하여 이 놀라운 섬의 도시, 비버 공화국에 발을 들여놓고 구경을 하게 된 것은 내 운명의 책 한쪽에 쓰여져 있던 바다. 그리하여 다행스럽게도 베네치아라는 도시는 이제 나에게 결코 하나의 단어. 공허한 이름 --나는 공허한 말에 대한 불구대천의 원수로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던 것일까-- 이 아니게 되었다.

내가 타고 있는 배에 처음으로 곤돌라가 다가왔을 때(바쁜 승객들을 빨리 베네치아로 운송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약 이십 년 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옛날의 장난감을 다시 회상하였다. 아버지는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아름다운 곤돌라 모형을 가지고 계셨다. 아버지는 그것을 퍽 귀중히 여기셨고 언젠가 그것을 가지고 놀아도 좋다고 허락하셨을 때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지금 반짝이는 철판의 곤돌라 뱃머리와 검은 선체, 모든 것이 옛 친구처럼 나에게 인사를 한다. 나는 오랜만에 그립던 소년 시절의 기억을 다시 맛볼 수 있었다.

나는 ‘영국의 여왕’이라는 이름의 여관에 만족하며 유숙하고 있다. 성 마르코 광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점이 이 숙소의 최대 장점이다. 내 방의 창문은 줄지어 있는 높은 집들 사이로 좁은 운하를 향하고 있으며 창문 바로 밑에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가 놓여 있고 그 건너편에는 좁고 번화한 골목이 있다. 독일에 보낼 나의 소포(9월 18일과 10월 14일 소포에는 슈타인 부인에게 보내는 일기와 괴테가 베네치아에서 마치고자 했던 <이파게니에>의 개작 원고가 들어 있었다)가 다 완성될 때까지,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이 도시 상(像)을 맘껏 맛보게 될 때까지 그냥 이곳에 머무르려고 한다. 지금까지 여러 번 갈망하였던 고독을 이제야 제대로 맛볼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군중 사이를 홀로 헤치고 지나다닐 때처럼 절실히 고독을 느낄 때는 없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에서 나를 아는 사람은 아마 단 한 사람일 뿐일 것이고 그 사람도 나를 곧 만나게 되지는 못하리라. (P116-117)

식사를 마치고 우선 시내 전체의 인상을 확실히 하기 위해 나는 황급히 숙소를 나왔다. 안내자도 없이 다만 방향만을 주의하면서 시내의 미로 속으로 들어섰다. 시내는 크고 작은 운하들로 관통되고 있지만, 그 밖에 크고 작은 다리에 의해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전체에서 느끼는 협소함과 옹색함은 이곳을 본 사람이 아니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골목의 넓이는 보통 두 팔을 벌리면 닿을까 말까 할 정도다. 아주 좁은 골목에서는 팔을 양쪽으로 뻗으면 팔꿈치가 닿고 만다. 물론 가다 보면 더 넓은 곳도 있고, 여기저기에 조그마한 광장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비교적 좁다.

대운하와 그 위에 걸쳐 있는 리알토 대교는 곧 알아볼 수 있었다. 이 다리는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활모양 다리다. 그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참으로 멋있다. 운하는 각종 필수품을 육지로 운반해 와서 이곳에 정박하고 하역을 하는 선박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사이를 곤돌라가 꿈틀거리고 다닌다. 특히 오늘은 미카엘 축일이라 말할 수 없이 활기찬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 광경을 어느 정도라고 이해시키려면 다소 자세한 사전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대운하에 의해 분단되어 있는 베네치아 시의 중요한 두 부분은 리알토 대교라는 하나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P123-124)

10월 6일

오늘 아침에 나는 터키에 대한 승리(1571년 10월 7일 레판토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이날 성 유스티나 교회에서 거행하는 장엄 미사에 참석하였다. 이 미사에는 총독도 참석한다. 우선 총독과 일부 귀족을 태운 작은 황금색 배가 이상스럽게 차려입은 뱃사공들이 붉은 칠을 한 노를 힘들여 젓는 가운데 소(小) 광장에 도착하고, 강변에서는 성직자와 신도들이 막대기 끝이나 휴대용 은 촛대에 불을 붙인 촛불을 꽂고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기다리고 있다. 다음으로 양탄자를 깐 다리가 배에서 육지로 놓여지고 제일 먼저 긴 보랏빛 예복을 입은 장관들, 그 뒤에 길고 붉은 예복의 참의원 의원들이 다리를 건너서 포도에 줄지어 서고, 마지막으로 금색 프리기아 모자를 쓰고 가장 긴 황금색 성직복을 입고 족제비 외투를 걸친 노 총독이 세 명의 시종으로 하여금 옷자락을 받쳐 들게 하고 배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일이 작은 광장의, 문 앞에 터키 깃발이 세워져 있는 교회 정문 앞에서 전개되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도안과 채색이 섬세한 오래된 고급 태피스트리를 보는 것 같다. 북쪽 나라에서 흘러온 나에게 이와 같은 의식은 아주 재미있었다. 모든 예식이 짧은 옷을 입고 행해지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의식이 어깨에 총을 매고 거행되는 독일에서는 이런 형식이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옷자락을 길게 끄는 예복이나 평화로운 의전이 참 잘 어울린다. (P146-147)

10월 8일

어떤 화가의 그림이 내 마음에 인상을 주면 그 화가의 눈을 통해서 세계를 볼 수 있는 예전부터의 재능이 나를 어떤 독특한 생각으로 인도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대상에 따라 우리들의 눈이 발달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로, 베네치아의 화가는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모든 것을 명료하고 쾌활하게 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반대로 불결하고, 먼지투성이거나 생동하는 색채가 없는, 반사를 방해하는 바닥 위에서 또는 비좁은 방에서 생활하는 우리들 독일인은, 그렇게 명랑한 눈초리를 우리들 자신으로부터 만들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한낮의 해맑은 햇볕 아래 배로 갯벌을 건너면서 화려한 복장을 한 곤돌라의 뱃사공이 뱃전에 서서 노를 젓는 모습이 엷은 녹청색의 수면으로부터 새파란 하늘에 뚜렷하게 떠올라 있는 모양을 바라보았을 때, 거기에서 베네치아 파의 가장 훌륭하고 선명한 그림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햇빛은 각자의 국부적 색조를 눈부시도록 돋우었고 그늘에 해당되는 부분도 대단히 밝아서 빛 부분을 돋우어 줄 정도였다. 같은 원리가 바다같이 녹색이 진한 물의 반영에서도 나타난다. 모든 것이 밝은 속에서도 더 밝게 그려져 있기 때문에 화룡점정하기 위해서 거품이 이는 파도라든가 번개 같은 것을 덧붙여 그려 넣을 필요가 있을 정도다.

티치아노와 파올로는 이 명랑함을 최고도로 갖고 있었다. 만약 그들의 작품에서 그것이 발견되지 않을 때는, 그 그림은 실패작이든가 그렇지 않으면 개작된 것이다.

성 마르코 교회의 둥근 지붕이나 둥근 천장에는 측면과 더불어서 많은 그림이 그려져 있다. 모두가 금색 바탕 위에 가지각색의 인물상을 모자이크 세공으로 그린 것이다. 밑그림을 그린 화가의 기량에 따라 아주 좋은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

역시 모든 것은 최초의 고안에 달려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최초의 고안에는 올바른 규범과 진실한 정신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슴 깊이 느꼈다. 왜냐하면 이곳 모자이크의 경우 결코 정교하다고는 할 수 없더라도 사각 유리 조각을 사용하면 좋은 것이건 좋지 않은 것이건 간에 모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날 고대인을 위해 마루판에 이용되고 그리스도 교도를 위해 교회의 둥근 천장을 형성해 주었던 이 모자이크 예술은, 지금은 상자라든가 팔찌 제작 따위로 근근히 명백을 유지하고 있다. 시대는 상상 이상으로 악화되었다. (P151-152)

오늘 밤 저번에 말했던 대위에게 고별 인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볼로냐에서 꼭 그를 방문하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그는 자신의 나라 사람들을 대표하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다. 특히 확연하게 드러나는 점을 몇 개 적어둔다. 가끔 침묵하고 명상에 잠기는 내게 그가 해준 말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무얼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인간은 절대 생각하면 안 됩니다. 생각을 많이 하면 늙을 뿐이죠.” 그리고 얼마 동안 서로 이야기를 나눈 다음에는 이런 말이 나왔다. “인간은 한 가지 일에 너무 매달리면 안 됩니다. 머리가 돌아버리기 때문입니다. 천 가지 일을 잡다하게 머리에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선량한 사나이는 내가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 이유가 바로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잡다하게 내 머리를 혼란시키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도리가 없었다. 이런 이탈리아인의 교양은 다음 일에서 보다 확실히 인식할 수 있다. 그는 내가 신교도라는 것을 알았던 모양으로, 얼마간 완곡하게 이런 질문을 용서해 주기 바라며 자기는 독일의 신교도에 관해서 이상한 소문을 많이 들었는데 한번쯤은 이 문제에 대해서 확신을 얻고자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물어왔다. “당신들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고도 아름다운 처녀와 친하게 지내도 괜찮은 겁니까? 당신네 나라 성직자는 그것을 용서합니까?” 그에 대해서 나는 대답했다. “우리들의 성직자는 현명한 사람들로서 그런 자질구레한 일에는 신경을 안 씁니다. 물론 그런 일을 그들에게 묻는다면 용서하지는 않겠지요.”

“그럼 당신들은 성직자에게 묻지 않아도 되는군요.” 하고 그는 외쳤다.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 당신들은 성직자에게 고해성사를 하지 않으니 성직자들이 알 도리가 없지.” 장교는 그때부터 자기 나라 성직자들을 욕하고 비난하고 우리들의 행복한 자유를 찬양했다. 그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고해성사 문제입니다만, 그건 도대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인간은 누구나, 설혹 기독교도가 아니더라도, 참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완미(頑迷)한 나머지 선악을 판별하지 못하고 한 그루의 노목을 향하여 참회하는 자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우스운 일이고 신을 모독하는 일입니다만 그래도 인간이 참회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는 증거는 되겠지요.” 거기서 나는 우리들의 참회의 개념과 그것을 어떻게 행하는가를 설명했다. (P194-196)

11월 1일, 로마에서

드디어 나는 세계의 수도에 도착하였다! 만약 내가 훌륭한 동행자와 함께, 아주 견식 있는 사람의 안내를 받으면서 십오 년 전에 이 도시를 구경할 수 있었다면 나를 행운아라고 불러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안내자도 없이 혼자 방문해야만 할 운명이었다면 그 기쁨이 이렇게 늦게서야 베풀어진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티롤의 고개는, 말하자면 뛰어넘어 온 셈이다. 베로나, 비첸차, 파도바, 베네치아 등은 자세히 구경하였지만, 페라라, 첸토, 볼로냐 등은 주마간산 격으로, 특히 피렌체는 거의 구경하지 못했다. 그것은 로마로 가고자 하는 나의 욕구가 너무나 강하고 순간마다 더 고조되어서 잠시도 멈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피렌체에는 겨우 세 시간밖에 머무르지 못하였다. 이제 이곳에 도착하니 마음도 안정되고 평생 동안 안정될 듯이 생각된다. 왜냐하면 부분적으로 잘 알고 있던 것을 실제로 눈앞에 전체로서 바라볼 때, 거기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나의 젊은 시절의 모든 꿈이 생생하게 내 눈앞에 되살아난다. (P211-212)


우리들은 시스티나 성당에 들어가 보았는데 그곳은 밝고 해맑게 충분한 광선을 받고 있었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과 그 밖의 천장화를 보고 우리들은 다 같이 감탄했다. 나는 쳐다보면서 그저 경탄할 따름이었다. 거장의 내면적인 확실함과 남성적인 힘, 위대함은 도저히 필설로 다할 수 없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관찰한 다음 우리들은 이 성당을 떠나, 성 베드로 성당으로 향했다. 하늘에서 밝은 빛을 받아 구석구석까지 성당 전체가 선명하게 보였다. 우리들은 감상하는 사람으로서 지나치게 불쾌하고 분별깨나 있는 척하는 취미에 의해 오류를 범하는 일 없이, 그 위대함과 화려함을 즐기고 날카로운 비평 같은 것은 억눌렀다. 우리는 다만 즐길 것을 즐겼던 것이다. (P235)

1월 20일

처음에 겉으로만 보았을 때에는 즐거움이던 것도, 근본적인 지식 없이는 결코 진실한 기쁨을 맛볼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면 도리어 골칫거리로 변한다.

해부학에 대해서 나는 상당한 준비도 했고, 인체에 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은 꽤 고생해서 획득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우리는 항상 조각상을 봄으로써 끊임없이 보다 고도의 방법으로 암시를 받고 있다. 우리의 의학적, 외과적 해부학에 있어서는 단순히 부분을 아는 것이 중요해서 겨우 한 편의 근육이라도 족히 소용에 닿는 것인데, 로마에서 각 부분이란 것은 하나의 고귀하고 아름다운 형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면 아무 의미도 없다.

광대한 성 스피리토 병원에는 미술을 위해 매우 아름다운 근육체가 비치되어 있는데 얼마나 훌륭한지 경탄할 수밖에 없다. 그건 정말 피부를 벗겨 놓은 반신(半神) 마르시아스(아폴로와 피리 불기 내기에서 진 벌로 껍질이 벗겨진 마르시아스는 그리스 조각이 즐겨 다루는 제재다)와 같다. 이곳 사람들은 또한 고대인의 지시에 따라 골격을 기술적으로 조합된 뼈의 집단으로 보지 않고, 골격에다 생명과 운동을 부여하는 인대와 함께 연구하는 것을 관습으로 하고 있다. (P270)

2월 27일, 나폴리에서

어제는 하루 종일 누워 쉬고 우선 몸의 회복을 기다렸다. 오늘은 비할 데 없는 경관을 실컷 즐기고 지냈다.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건, 이야기하건, 그림으로 그리건, 이곳의 경관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해 있다. 해변과 만과 후미, 베수비오, 시가, 교외, 성, 유락장! 그리고 우리는 저녁에 포실리포(전장 689미터의 동굴로, 아우구스투스가 조당한 후 확대되었다. 나폴리의 서쪽 산등성이를 관통한다)의 동굴에 갔다. 마침 저무는 태양이 반대쪽에서 비쳐 들고 있었다. 나폴리에 오면 모두들 머리가 이상해진다고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가 오늘 내가 처음으로 보았던 사물에서 특별히 불멸의 감명을 받았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했다. 유령을 만난 사람은 두 번 다시 즐기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와는 반대로 아버지는 노상 나폴리를 그리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 불행해질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내 식대로 태연하게, 주위가 아무리 열광하고 있을 때에도 다만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볼 따름이다. (P306)


오늘은 발데크 후작과 카포 디 몬테(나폴리에 솟아 있는 왕궁. 1738년에 카를 3세가 기공하여 1839년에야 겨우 완공했다. 당시에는 불본 가의 유산인 많은 작품이 있었으나 후에 국립 박물관으로 옮겨졌다)에 갔다. 여기에는 회화, 화폐 등이 많이 수집되어 있다. 진열 방식은 마음에 안 들지만 모두 귀중품뿐이다. 수많은 전통적 개념이 이제야 내 머릿속에서 명확한 형태를 잡아간다. 북유럽에는 레몬 나무 분재처럼 간혹 가다 들어올 뿐인 화폐, 보석, 화병도 여기 이렇게 보물의 고향에 많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면 완전히 느낌이 색다르다. 예술품이 희귀한 곳에서는 희귀하다는 것 자체가 예술품에 일종의 가치를 부여하는데, 이곳에서는 정말로 훌륭한 것만을 존중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애톨리아 화병은 근래 고가에 팔리고 있다. 확실히 그중에는 일품이라 할 만한 아름다운 것도 있다. 여행객이라면 누구라도 이것을 손에 넣고자 할 것이다. 집에 있을 때보다 여행을 하면 누구라도 씀씀이가 헤퍼진다. 나 자신도 유혹에 빠질 듯한 염려를 느낀다.

참신하든지 뜻밖이라든지 하면 보통 일이라도 기이한 일같이 느껴지는 것은 여행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P322-323)

지금까지 많은 것을 보고, 또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해 왔다. 세상은 점점 더 넓게 눈앞에 전개돼 온다.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도 이제야 겨우 나의 것이 되었다. 인간이란 어찌 이렇게 아는 것에는 빠르되 행하는 것에는 느린 동물인 것인가!

자기가 관찰한 것을 순간순간마다 전할 수 없다는 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물론 티슈바인은 나와 함께 있지만 그는 인간으로서, 또 화가로서 수많은 사상에 의해 이리저리 쫓기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갖가지 요구를 받는다. 그의 입장이야말로 독특하고도 기묘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노력의 범위가 매우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타인의 존재에 대해 자유로운 기분으로 관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역시 세계는 하나의 차륜에 지나지 않는다. 그 주변은 어디나 평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우리들도 같이 회전하기 때문에 아주 이상한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P343)

일기에도 적혀 있듯이 우리는 이 짧은 항해에서 여러 가지 변화의 상황을, 말하자면 뱃사람의 운명이란 것을 적게나마 경험했다. 여하튼 우편선의 완벽함과 편리함은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선장은 지극히 용감하고 훌륭한 사람이다. 같이 탔던 승객들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의 집합으로 마치 하나의 극장 같았으나, 예의 바르고 느낌이 좋은 상당한 수준의 사람들이었다. 나의 동반자 예술가는 기운이 좋고 성실하고 선량한 사람으로서 극히 세밀한 스케치를 한다. 그는 눈앞에 나타나는 섬이나 해안을 모조리 스케치했다. 내가 그걸 모두 가지고 갈 수 있다면 여러분들을 크게 기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그는 항해하는 동안 장시간의 무료를 달래려고 지금 이탈리아에서 유행하는 수채화 기법에 관해 나에게 적어주었다. 그는 어떤 색조를 내기 위해 어떤 물감을 써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데 만약 이 비결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물감을 섞어도 불가능한 일이다. 나도 로마에서 상당히 배웠으나 별로 계통을 세워서 한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같은 나라에 있으니, 예술가는 이 비결을 연구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아름답게 갠 오후, 우리가 팔레르모 항으로 들어왔을 때 해변 일대에 떠 있던 엷은 안개의 청명함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윤곽의 맑기, 전체의 부드러움, 색조의 분리, 하늘과 바다의 조화, 이것을 본 사람은 평생 잊을 수 없다. 이제야 비로소 나는 클로드 로랠(2월 19일 일기 참조)의 그림을 이해할 수 있다. (P374)


1787년 4월 13일, 팔레르모

시칠리아 없는 이탈리아란 우리들 마음에 아무런 심상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시칠리아야말로 모든 것을 푸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

기후는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지금은 우기지만 그래도 맑을 때가 있다. 오늘은 천둥 번개가 있었다. 모든 것이 세차게 녹색을 더해 가고 있다. 아마는 일부는 열매를 맺고 일부는 꽃이 한창이다. 낮은 곳에 작은 연못이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실은 밑으로 퍼져 있는 아마 밭이 그처럼 아름답게 청록색을 띠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흥미를 끄는 사물은 무수히 많다! 그리고 나의 동반자는 훌륭한 인물로, 내가 성실하게 트로이프로인트 역을 하는 한 그는 진정한 호페구트일 것이다. 이미 그는 참으로 훌륭한 스케치를 했으며, 앞으로도 최상의 것을 그려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여러 가지 보물을 안고 언젠가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P405)

4월 25일, 수요일, 지르젠티에서

아침 해가 뜨자마자 우리들은 아래로 내려갔는데 한 발 옮길 때마다 아름다운 경치가 그림처럼 전개되었다. 우리가 틀림없이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안내하는 작은 사나이는 풍부한 초목 속을 가로질러서, 이 일대 풍경에 목가적인 색채를 더해주고 있는 수천 가지 풍물을 쉴 새 없이 안내하며 지나갔다. 땅이 평탄하지 않고 파도치듯 폐허를 덮어 감추고 있는 것 또한 목가적 풍경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 폐허는 옛날 이곳에 있었던 건물이 가벼운 패각 응회암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더 빠른 속도로 옥토로 덮이는 중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도시의 동쪽 끝에 도달했는데 거기 있는 헤라 신전(기원전 5세기경의 것으로 시칠리아의 다른 신전과 마찬가지로 도리아식 건축양식이다)의 폐허는 부서지기 쉬운 돌이 비바람을 맞아 부식하는 탓에 해가 갈수록 황폐해질 뿐이다. 오늘은 한차례 쭉 둘러보기만 할 참이었는데 크니프는 내일 그릴 지점을 벌써 선정해 놓았다.

신전은 현재 풍화된 암석 위에 서 있고, 여기서부터 도시의 성벽이 일직선으로 서쪽에 걸쳐 석회암 층까지 뻗어있다. 이 암석 층은 평평한 해변 위에 수직으로 서 있는데 바다가 암석 층을 형성하고 그 밑을 들락날락하다가 뒤에 모래사장을 남기고 간 것이다. 성벽의 일부는 암석을 깎아내서 만들고, 나머지 부분은 바위를 쌓아서 축성했으며 배후에는 신전이 일렬로 솟아 있다. 그 때문에 지르젠티의 낮은 부분이나 융기한 부분이 가장 높은 부분과 하나가 되어서, 바다에서 보았을 때 그렇게 멋진 광경을 보여주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콘코르디아의 신전(고대 신전 중 가장 보존이 잘된 것의 하나로 주노 신전보다 나중에 건축되었다. 중세부터 예배당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보존이 잘돼 있다)은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왔다. 그 섬세한 건축법은 이미 미와 쾌감에 관한 우리들의 기준에 근접해 있다. 이 신전과 페스툼 신전의 관계는 바로 신들의 모습과 거인 상의 관계와 유사하다. 이 기념물을 보호하려는 근래의 칭찬할 만한 계획이 몰취미한 방법으로 실행에 옮겨져, 벌어진 틈새를 눈이 부실 정도의 흰 석고로 수리한 것에 대해서 비난할 심산은 아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이 기념물이 다소 파괴된 듯한 외관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석고가 풍화된 돌의 색조를 띠게 하는 것은 간단한 일인데 말이다. 원주나 장벽에 사용하고 있는 부서지기 쉬운 패각 석회를 보면 이렇게 긴 세월 동안 잘도 보존되었구나 하고 경탄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을 세운 사람은 자기와 같은 자손이 있을 것을 기대하고 예방공사를 해놓았다. 즉 기둥에 남아 있는 순 양질의 덧칠은 눈을 기쁘게 하는 동시에 장기 보존을 위한 것이다.

다음에 들른 곳은 제우스 신전(신전 중에서 제일 큰 것으로 기원전 406년 이 도시가 파괴되었을 때에는 아직 완성되어 있지 않았다)의 폐허였다. 이 신전은 생울타리에 둘러싸여 크고 작은 수풀이 무성한 몇 개의 작은 언덕의 내부나 하부에 있으며 마치 거인의 해골 덩어리같이 넓고 멀리 뻗어 있다. 대단히 큰 트리글리프와 그에 걸맞은 반원주의 일부 외에는 건조물은 모두 이 폐허에서 사라져 있다. 트리글리프를 양팔을 벌려서 측정해 보았는데 다 잴 수가 없었다. 그 대신 원주의 홈은 그 안에 들어가면 마치 작은 벽감과 같이 하나 가득 차서 양어깨가 벽에 닿는다고 하면 대강 상상이 될 것이다. 스물두 사람이 둥글게 둘러싸면 대강 이 기둥의 둘레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화가로서는 여기서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는 불쾌한 감정을 안고 우리는 자리를 떴다. (P437-439)

[2]

4월 28일, 토요일, 칼타니세타에서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시칠리아가 어떻게 해서 이탈리아의 곡창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획득할 수 있었는지 명확한 대답을 얻었다고. 지르젠티를 떠나서 조금 가면 풍요한 토지가 전개된다. 큰 평야는 아니지만 완만하게 서로 대치하고 있는 연이은 산이나 언덕등성이 곳곳에 밀이나 보리가 심겨 있어서 풍요로운 광경을 끊임없이 제공해 준다. 이들 식물에 적합한 토지는 한그루의 나무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이용되고 잘 손질되어 있으며, 작은 촌락이나 가옥은 모두 언덕 등성이 위에 산재해 있는데, 그곳은 석회암의 열이 뻗쳐 있어서 집을 짓는 것밖에는 달리 용도가 없는 땅인 것이다. 여자들은 일년 내내 이 땅에 살면서 실을 뽑고 피륙을 짜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 이에 반해 남자들은 농번기에 토요일과 일요일을 부인과 함께 지낼 뿐, 다른 날에는 아래쪽에 머물며 밤에는 오두막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희망은 충분히 채워졌다. 오히려 이 단조로움에서 탈출하기 위해 트리프톨레모스의 익차(경작의 여신 데메테르가 준 날개가 달린 수레)를 갖고 싶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P29-30)


그런데 벽에다 연필로 예쁜 글씨의 영어 낙서가 적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길손이여, 당신이 어떤 사람이건, 카타니아의 ‘금사자 여관’에는 머물지 않도록 조심하라. 키클롭스, 세이렌, 스킬라와 같은 괴물의 발톱에 한꺼번에 당하는 것보다도 무서운 일을 당하리라.” 이 호의에 찬 충고를 남긴 사람은 위험을 다소 신화적으로 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아무튼 괴물이라고 예고하고 있는 금사자 여관은 피하자고 우리는 마음을 정했다. 그러므로 노새를 끄는 사나이가 카타니아에서는 어디에 묵을 것이냐고 물었을 때, 우리는 금사자 여관만 아니면 어디라도 좋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노새를 묶어두는 곳이라도 괜찮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면서, 우리들이 지금껏 해왔듯이 같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덧붙였다. 우리는 모든 것을 승낙했다. 사자의 복수를 피하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소원이었으니까. (P39)

우리가 이 경치를 감탄의 눈으로 보고 있으려니까. 어떤 사람이 왼쪽 멀리 물이 움직이고 있는 곳이 카리브디스이며, 오른쪽에 그것보다 좀 가까이 해안에서 솟아 있는 바위가 스킬라(카리브디스는 시칠리아 섬 서부의 산에 있는 소용돌이이며 스킬라는 칼라브리아 쪽에 있는 바위 위에 세워진 도시다)라고 가르쳐주었다. 자연에서는 이렇게 떨어져 있는 이 둘이 시인이 쓴 글에는 매우 가까이 있는 명소로 묘사된 것을 보고 시인의 허구라고 불평을 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인간의 상상력이 대상을 보다 현저하게 표상하려 할 때에는 폭보다도 높이를 중시해서, 그 필법으로 대상의 모습에 더한층 성격이나 엄숙성이나 가치를 부여하는 법이다.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알게 된 대상은 현실 세계에서는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하는 불평을 자주 듣는데, 그 이유도 마찬가지다. 상상과 현실의 관계는 시와 산문과의 관계와 매한가지로, 전자는 대상을 웅대 준험하게 생각하는 데 반해 후자는 항상 평면으로 펼쳐가는 것이다. 16세기의 풍경화가를 현대 화가에 비교해 보면 이 사실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요스 드 몸퍼(안트베르펜 출신의 플랑드르 파 화가. 그가 그리는 풍경화는 자연의 묘사라기보다는 공상의 산물이다)의 그림을 크니프의 스케치와 비교하면 이 대비는 명백해질 것이다. (P76)

5월 28일, 나폴리에서

저 훌륭하고 매우 유익한 폴크만의 안내서에는 가끔 나와 의견을 달리하고 있는 대목이 있다. 예를 들자면, 그는 나폴리에는 삼사만 명 정도의 무위도식하는 떼거리가 있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누구나 그같은 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남국의 사정에 정통해짐에 따라서 이것은 하루종일 악착같이 일하지 않는 자는 모두 빈둥거리고 있는 떼거리라고 생각하는 북극인의 견해일지도 모르겠다고 추측했다. 그래서 나는 활동하고 있든 휴식하고 있든 불문하고 일반 대중을 세심하게 관찰해 보았더니, 남루한 옷차림을 한 사람은 실제로 상당히 많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무수하다는 무위의 떼거리를 확인해 보려는 생각에 두세명 친구에게 물어보았으나 그들도 가르쳐줄 수가 없었다. 이런 조사는 도시의 관찰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나는 몸소 탐구에 나서기로 했다.

나는 대단히 혼잡한 장소에 자리를 잡고 여러 종류의 인간을 관찰하며 그 얼굴과 모양, 의복, 언동, 직업에 의해 그들을 판단하고 분류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각자가 비교적 제멋대로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허용되고 있으며 외견으로 말하더라도 신분에 상응하는 복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작업은 다른 곳에서보다 훨씬 용이했다.

나는 이른 아침부터 관찰을 시작했다. 여기저기에 서성거리고 있거나 휴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한눈에 직업을 알 수 있는 삶들이었다. (P103-104)

저기 산꼭대기 위에 겐제리히의 성이 폐허가 되어 어둠이 내리기 직전의 푸른빛 속에 서 있었습니다. 지나간 과거지사가 생각났고, 저는 불행했던 콘라딘이 탈출을 간절히 원했던 것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곳에서 두려워했던 키케로와 마리우스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바닷가에 비치는 달빛을 받으며, 굴러 떨어진 거대한 바윗돌 사이를 가는데 산길이 아름다웠습니다. 올리브 나무, 야자수, 폰디 근교의 잣나무들이 무리를 지어 있는 것이 또렷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레몬 나무 숲을 볼 수 없어 유감이었습니다. 레몬 나무가 가장 예쁠 때는 황금색 열매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일 때지요. 산을 넘으니 많은 올리브 나무와 구주 통 나무가 서 있습니다. 벌써 날이 밝아오고, 우리는 고대 도시의 폐허에 도착했습니다. 묘비들의 잔해가 많았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묘석은 키케로의 것인데, 그가 살해된 바로 그 장소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몇 시간 후 우리는 몰라 디 가에타 만에 도착해서 반가웠습니다. 벌써 어부들이 잡은 생선을 싣고 귀향하고 있어서, 해변은 몹시 활기에 넘쳤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선과 해산물을 바구니에 담아 실어 나르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다음 번 출어를 위해 그물을 손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가릴리아노를 향해 떠났습니다. 귀족 베누티가 묻힌 곳입니다. 여기서 하케르트 씨는 카세르타로 급히 가야 했기에 저희와 헤어졌습니다. 저희는 길에서 아래쪽 바닷가로 걸어 내려갔습니다. 저희를 위해 아침 식사가 차려졌는데, 점심때가 다 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고대 물품들이 발굴되어 보관되어 있는데, 민망할 정도로 파손된 상태였습니다. 볼 만한 것들 중에 입상의 다리 하나가 있었는데, 벨베데레의 아폴로 상과 가히 견줄 만했습니다. 그 다리 외에 나머지 부분을 찾아낸다면 행운이겠지요. (P140-141)

1787년 7월 5일, 로마에서

현재 제 삶은 완전히 젊은 시절에 꿈꾸었던 그대로입니다. 이 꿈이 제가 만끽하라고 정해진 것인지, 아니면 한참 후에 이 역시 다른 일들처럼 제멋대로 생각한 것임을 깨닫게 될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티슈바인은 떠났고, 그의 아틀리는 짐이 빠지고 깨끗이 청소가 되어서, 이젠 제가 거기에서 기거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요즈음 들어 쾌적한 집이 필수적입니다. 더위가 극성입니다. 저는 아침이면 해가 떠오를 때쯤 일어나 아쿠아 아체토사, 즉 탄산수 샘터로 갑니다. 제가 사는 성문에서 약 한 시간 걸립니다. 거기서 물을 마시는데, 슈발바허 지방의 물맛이 약간 납니다. 지금 같은 기후에 상당히 효과가 좋은 물이랍니다. 8시경 저는 다시 집에 돌아와, 기분만 나빠지지 않는다면 열심히 일합니다. 저는 아주 잘 있습니다. 흐르는 것이라곤 더위가 모두 증발시켜 버리고, 몸속에 짠 것이라고는 모두 피부 밖으로 짜냅니다. 그래서 환부는 갈라지거나 옥죄지 않고 가렵답니다. 그림 그리는 데 취향과 기량을 계속 길러나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저한테 놀랍도록 쉬워집니다. (이건 생각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연습의 경지를 넘어서려면 한평생이 걸리니까요) 가장 좋은 일은 저는 독단이나 자만심이 없었고, 여기 왔을 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매사가 말이나 개념으로만 남아 있지 않도록 애쓰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 위대한 것, 경외심을 일으키는 것들을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인식하려고 합니다. 이 일은 모방 없이 불가능합니다. (P151-152)

7월 20일, 로마에서

평생 저를 따라다니며 괴롭힌 커다란 결함 두 가지를 요즘에야 찾아냈습니다. 첫째는 내가 계획했거나 해야만 하는 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작업 방법을 전혀 배우려 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타고난 재주가 많았음에도 이룬 일이 별로 없습니다. 정신력으로 억지를 부렸기 때문에 행운이 따를 때는 성공했지만, 우연에 따라 실패도 했습니다. 아니면 어떤 일을 심사숙고하여 잘하려고 작정하면 겁이 나서 완성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둘째 결함은 제가 일이나 사업에 요구되는 만큼의 시간을 기꺼이 투자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많은 것을 단시간에 생각하고 연결할 수 있는 재주가 있기 때문에, 한 걸음씩 일한다는 것이 지루하고 견딜 수 없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저의 단점을 개선할 최상의 시기인 것 같습니다. 제가 예술의 나라에 와 있으니, 이 분야를 정말 깊이 있게 공부해 보아야겠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우리 인생에 안식과 기쁨이 깃들고, 다른 일을 또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로마는 그런 목적에 적합한 도시입니다. 온갖 종류의 사물들뿐 아니라, 별의별 인간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진지하게 올바른 길을 가는 사람들인데,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마음 편히 그리고 조속히 발전할 수가 있답니다. 다행히 저는 다른 사람들한테서 배우고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P158-159)


1787년 5월 17일, 나폴리에서

나아가 당신한테 털어놓는 얘기인데, 나는 식물의 생성과 조직의 비밀에 아주 가까이 근접하고 있다. 그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단순하다. 우리는 이 하늘 아래서 최상의 관찰을 할 수 있다. 어디서 싹이 트는 지, 그 중요한 문제를 의심할 여지 없이 명쾌히 찾아냈고, 그 나머지 문제점들은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몇 가지만 확정되면 된다. 원형 식물은 세상에서 가장 기상천외한 존재가 될 것이며, 자연조차 그걸 발견한 내게 질투심을 느낄 것이다. 이 모델과 열매를 가지고 한없이 식물을 만들어낼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식물들은 다음과 같은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식물, 그림이나 시로 표현되는 영상이나 그림자가 아니라 내적인 진리와 필연성을 가지고 있는 식물, 같은 법칙을 나머지 모든 생물에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P167)

단테가 화제에 올랐을 때에는 훨씬 더 불쾌한 일이 일어났다. 사회적 지위도 있고, 지성도 갖춘 젊은이가 예의 탁월한 시인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나의 찬사와 풍조를 탐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이탈리아인들도 단테를 모두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외국인들은 모두 그렇게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를 이해하려는 것을 단념해야 한다고 거리낌 없이 주장했다. 찬반 토론이 오갔으나, 결국 나는 심사가 뒤틀려 나야말로 그의 말에 동의하는데 적당한 사람임을 고백해야만 하겠다며 나섰다. 왜냐하면 그의 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지금까지 모르고 있기 때문에, <지옥편>은 혐오스럽고, <연옥편>은 의미가 분명치 않고, <천국편>은 지루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나의 말에 그는 몹시 만족해서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폈다. 나의 발언이야말로 외국인은 단테 시의 깊이와 탁월함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헤어질 때 우리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심사숙고해서 마침내 의미를 깨우치게 된 몇몇 어려운 부분을 내게 알려주고 설명해 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P174-175)


로마가 예술 활동의 중심지로 인정 받는 것은 나름대로 훌륭한 장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교양 있는 여행자들이 들르게 되면, 이들이 보낸 체류 기간이 길거나 짧거나 상관없이 이곳에 많은 빚을 지게 된다. 그들은 계속해서 여행하고 활동하고 수집해서 시야를 넓혀 집에 돌아가서 사 들고 간 물건들을 진열하고,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교사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념물들을 나열하는 것을 명예롭고 기쁜 일로 생각하게 된다.

프랑스 건축가인 카사 씨가 동방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그는 아주 중요한 고대 기념 건축물들을, 특히 아직 출판되지 않은 기념 건축물들을 측량했고 그 주변 지역도 그림으로 그렸다. 오래되어 파손되고 파괴된 상태를 그림으로 재현시켰는데, 치밀하고 기품 있는 작품들이었다. 그 가운데 일부는 펜으로 스케치하거나 생동감 있게 수채화 물감으로 채색된 것이었다. (P207-208)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사실과 그것의 진지한 의미를 꼭 피력하고 싶다. 그것은 이미 기술한 것에 빛을 주고, 앞으로 기술할 것에도 빛을 확산시켜 준다. 자기 수양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로 인해 자신을 점검해 보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활기차게 정진하는 사람들은 향락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을 갈구한다. 이러한 욕망은 사람들을 활동적으로 만들고, 결과가 어떠하건 간에 자신이 직접 만들어낸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어떠하다고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이 문제를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릇된 노력을 하게 되고, 그 의도가 성실하고 순수하면 할수록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이 기간에 회의와 억측이 나를 사로잡기 시작하여, 쾌적한 상태에 있는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렇게 느낀 이유는 내가 여기에 체류하는 원래의 의도와 희망 사항이 이루어지는 것이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P219-220)


10월 5일, 알바노에서

이 편지를 내일 로마로 떠날 우편 마차에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가운데 천만 분의 일이나마 적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제 제가 막 프라스카티를 떠나려는 참에 여러분의 편지와 책들이 동시에 도착했습니다. “흩어진”이라기보다는 “수집된” 기록들(헤르더의 저서 <흩어진 기록들> 중 제 3권을 가리킨다) 그리고 <고찰>(역시 헤르더의 저서 <인류 역사의 철학적 고찰>을 가리킨다) 그리고 네 권의 가죽 장정본(앙겔리카 여사에게 증정한 괴테 전집을 가리킨다)들인데, 제가 별장에서 지내는 동안 보물이 될 것입니다.

<페르제폴리스>(<흩어진 기록들>의 제3부 4장)를 어젯밤에 읽고 몹시 기뻤습니다. 그러한 양식과 미술품이 이곳에 유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에 관해 제가 덧붙일 말은 없습니다. 인용된 책들이 어떤 도서관에 있는지 찾아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에게 바라건대, 정진하고 또 정진하십시오. 여러분의 빛으로 세상을 밝게 하는 것이 여러분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P224)

첫 번째 사람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자신 이외의 어떤 것에 의해 산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 벌을 받지 않을까요? 두 번째 사람은 개념에 혼란을 일으키고, 또 지식과 신앙, 관습과 체험이라는 단어들을 혼동하고 있으니 부끄럽지 않을까요? 세 번째 사람은 무력행사를 해서 어린양의 옥좌 주위(요한 묵시록 5장 6절)에 자리를 잡으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면 몇 자리 아래로 내려가야 되지 않을지요? 이 땅에서는 누구나 자기만큼의 존재밖에 안 되고, 또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기에 그들은 자연의 견고한 땅을 밟는 데 있어서 조심스러운 마음가짐을 가져야 될 것 같습니다.

반면 <고찰>의 제3부와 같은 책을 펼쳐 그 내용을 읽고 나서 ‘저자가 과연 신에 대한 확실한 개념 없이 이런 책을 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 대답은 단연코 ‘그럴 수 없다’입니다. 왜냐하면 이 책이 갖고 있는 순수한 것, 위대한 것, 내적인 것은 신과 세상에 대한 개념 속에, 그 개념으로부터, 그 개념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딘가 부족함이 있다면 그것은 상품 탓이 아니고 구매자에게 결점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기계에 흠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한테 있습니다. 형이상학적인 대화를 할 때, 그들이 저를 완벽하지 못하다고 여길 때마다, 저는 조용한 미소를 지으며 내버려 두었습니다. 저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저와 그다지 상관없는 일입니다. 제게 훨씬 중요한 일은 그 원리가 밝혀지지 않은 것입니다. 저의 창작품은 그 원리에서, 그리고 그 원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개인은 각자 지렛대를 쓰고 있는데, 저는 이미 오래전부터 만년 나사를 쓰고 있습니다. 요즈음엔 더 많은 즐거움과 편리함을 느낍니다. (P231-232)

아름다움에 관해서도 그는 다른 예술가들과 의견 충돌을 자주 겪게 되었다. 그는 같은 근거로 특징적인 것을 주장했고, 그러자 모든 예술 작품에는 근본적으로 특징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그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들은 작품을 제작하는 데는 미적인 감각과 취향에 맞아야 하고, 그럼으로써 각각의 특성이 적절하고도 우아하게 표현되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예술이란 작업에 의해 탄생되는 것이지 말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행동보다는 말을 훨씬 더 많이 한다는 점을 우리는 쉽사리 간과하곤 한다. 그런 식의 대화가 당시에 끊임없이 이어졌는데, 오늘날까지 그러한 현상은 여전하다. (P269)


1787년 12월 1일, 로마에서

적어도 이것만큼은 그대(헤르더를 가리킨다)에게 단언합니다. 저는 아주 중요한 문제점들을 매우 확실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인식이 무한정으로 확장될 수 있긴 하지만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에 관한 저의 생각은 확실하고 명료하고 또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아직도 극히 비상한 일들을 계획하고 있고, 저의 인식능력을 억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행동력만이 얼마간 진전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경탄할 만한 일이 있고, 우리가 그것을 포착했다고 하면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P273)

예술적 취향의 변동 그 자체, 단순한 위대성의 추구, 복잡한 세부로의 복귀, 이 모든 것은 삶과 움직임을 의미한다. 예술사와 인류사가 동시성을 가지고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위대한 것은 덧없이 사라져버린다는 생각이 우리를 엄습한다 하더라도 낙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덧없이 사라진 것이 훌륭했다고 우리가 인식할 때, 다음과 같은 사실에 용기를 얻어야 한다. 우리 자신이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설령 언젠가 파괴되어 쓰레기가 된다 할지라도 이제부터 후손들에게 고귀한 작업을 하게끔 동기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의 선조들을 보면 이런 인식이 결여된 적이 절대로 없었다. (P292)


코르소 가

로마의 사육제는 코르소 가에 집중된다. 축제 기간 동안 공식적인 행사를 치르기 위해 이 거리가 통제된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각기 다른 축제가 열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코르소 가를 묘사할 수밖에 없다.

이 거리의 이름은 이탈리아 도시들의 많은 기다란 거리들과 마찬가지로 경마에서 유래되었다. 로마에서는 사육제가 끝나는 며칠 동안은 경마가 열려 하루를 끝맺는다. 다른 도시에서는 다른 행사, 즉 수호 성자 축제 아니면 성당 개원 축제 등으로 끝을 맺는다.

이 거리는 피아차 델 포폴로에서 베네치아 궁전까지 일직선으로 뻗어 있다. 약 380보 정도 길이의 이 거리에는 대부분 구간에 화려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이 거리의 폭은 도로나 건물들의 높이에 비해 좁은 편이다. 거리의 양쪽에는 보도가 있는데, 각 여섯 내지 여덟 걸음 넓이로 높여져 있다. 거리 중앙은 통행로로서 대부분 열둘 내지 열네 걸음 너비여서, 최대한 마차 세 대가 나란히 지나갈 수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육제 기간에는 포폴로 광장의 오벨리스크가 거리의 제일 아래쪽 경계선이 되고, 베네치아 궁전이 제일 위쪽 경계선이 된다. (P333-334)

아름다움의 특성은 그 본질상 사고력의 한계 밖의 것이고 그 생성 자체가 형성되는 과정에 있다. 사고력은 무엇이 왜 아름다운지에 대해 질문할 수 없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아름답다. 사고력이 완전히 결여된 것은 아름다움을 평가하고 관찰할 수 있는 비교 관점이다. 위대한 자연 전체의 조화로운 상호 관계 외에 진짜 아름다움을 비교할 수 있는 것이 대체 있을 수 있을까? 이는 사고력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모든 개별적인 자연 이곳저곳에 산재한 아름다움은, 위대한 전체의 온갖 관계를 많든 적든 보여주는 개념이라는 의미에서만 아름다울 뿐이다. 이는 절대로 조형미술의 아름다움을 비교하는 관점이 될 수가 없으며, 아름다움을 진실하게 모방하는 데 있어서 모범으로 사용될 수도 없다. 부분적인 자연이 최고로 아름답다 할지라도, 모든 것을 내포하는 자연 전체의 크고도 존엄한 상호 관계들을 당당히 모방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움은 인식될 수 없다. 그것은 표출되어야 하고, 아니면 감지되어야 한다. (P408)

모든 거대한 것은 독특한 인상을 남기는데, 그 인상은 고귀하면서도 평범하다. 나는 순회 관람을 할 때마다 내 여행에 관해서 광범위하고 총체적인 결론을 내리곤 했다. 이렇듯 나의 영혼은 동요되었고, 깊고도 강한 느낌은 영웅적이고도 비가적인 분위기에 젖었다. 이런 분위기가 시적인 형태로, 비가 한 편으로 표현되고자 했다.

그런 순간에 오비디우스의 비가(<트리스티아> 1권에 실린 세 번째 시)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역시 추방을 당해 달밤에 로마를 떠나야 했다. “그날 밤을 회상하며!” 그가 멀리 떨어진 흑해 연변에서의 서글프고도 비참한 상황에서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쓴 시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나는 그의 시를 되뇌어 보았다. 어떤 구절은 정확하게 생각이 났지만, 어떤 구절은 내 자신의 시 구절과 섞여 정확히 기억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시도해 보았지만 나의 시를 결코 완성시킬 수가 없었다.

그날 밤이 슬픈 광경이 내 영혼 앞에 펼쳐지네.

로마에서 내가 보낸 그 마지막 밤이.

소중한 것을 많이 남겨두고 온 그날 밤을 되새겨 보니,

지금도 눈물이 주르륵 흐르네.

사람 소리도 개 짖는 소리도 이미 잠들어 버렸는데,

높이 뜬 달이 밤 마차를 인도했노라.

달을 쳐다보고, 카피톨리노의 성당을 보니,

로마의 수호신 가까이 허무하게 서 있었네. (P435-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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