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편(雜編) ------------> 타이밍(Timing)
“정주고 떠나시는 님 나를 두고 어데가나 노을 빛 그 세월도 님 싣고 흐르는 물이로다 마지못해 가라시면 아니 가지는 못하여도 말 없이 바라보다 님 울리고 나도 운다 둘 곳 없는 마음에
가눌 수 없는 눈물이여 가시려는 내님이야 짝 잃은 외기러기로세 님을 향해 피던 꽃도 못내 서러워 떨어지면 지는 서산해 바라보며 님 부르다 내가 운다”
-김수철, 별리 中에서-
노자는 자기를 과시하지 말고, 제 주장만 고집하지 말고, 제 자랑을 일삼지 말라고 했다. 그의 제자중 경상초(庚桑楚)는 노자의 가르침을 따른 제자였다. 우리는 자신을 끊임없이 홍보하는 미디어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경상초와 같이 숨은 고수들은 우리 주변에도 많다.
명성을 피한 경상초(庚桑楚逃名)
노자의 제자 경상초가 외뢰산(畏壘山)으로 들어가 산 뒤로 그곳 백성들이 풍성한 수확을 얻게 되었다. 백성들은 이를 그의 공로로 여겨 경상초에게 감사하며 그를 떠받들기 시작했다.
경상초가 이 사실을 알고 나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봄이 되면 만물이 소생하고 가을이 되면 만물이 열매를 맺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이곳 백성들이 자연의 도를 나의 공로로 여기며 나를 현인으로 떠받들려고 한다. 도를 아는 내가 어찌 나자신을 내세우는 인간이었는가? 나는 그래서 노자의 말씀에 어긋나게 되는 것이므로 석연치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 후 그는 거처를 깊은 산속으로 옮겼다.
사람들에게는 유명세를 타고 싶어 한다. 누구나 명예욕, 권력욕, 사치욕, 과시욕 이러한 욕망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욕망들이 재앙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명성을 얻기 좋아하고 여인은 장신구로 치장하는 것을 좋아한다. 경상초를 통해서 장자가 말하는 것은, ‘명성은 모두에게 멍에에 다름 아니다’라는 것이다. 매우 뛰어난 궁수였던 후예(后羿)는 날아가는 새의 두 눈을 관통할 만큼 재주가 훌륭했지만, 이런 그에게도 세상의 명성을 피할 재주는 없었다고 말이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곧 지극한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박수칠 때 떠나라’라는 말이 생각나기도 한다. 경상초는 어쩌면 무위의 역설을 말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무위자연(無爲自然). 그리고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으로 갔다. 아무것도 없는 마을, 무위의 들판에서 노닐고, 얻지도 않고 잃지도 않으며,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 그곳으로 말이다.
그 순간의 삶을 설명하는 몇 마디의 말과 그 순간의 삶을 단 번에 우리 앞에 끌어내는 폭력 사이에 간신히 낀 채로 존재하는 삶들이다.
-아를레트 파르주, 아카이브 취향, P36-
유명한 사람도, 명예로운 사람도, 모든 사람은 결국 죽는다. 삶이 화양연화(花樣年華)처럼,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도 결국은 꽃잎처럼 떨어진다. ‘새옹지마(塞翁之馬)’ 고사(故事)처럼, 복이 화가 되고 화가 복이 되는 것이 인생인데, 우리는 눈앞의 일에만 매달려 일희일비한다. 삶의 주체자인 존재자는 시간이라는 길 위에 놓여져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시간 속에 개별자로서 ‘거기 있는’ 기분(Stimmung)에 사로잡히는 존재자라고 보았고, 이를 ‘현존재(Dasein)’라고 말했다. 현존재라고 부르는 이 존재자는 ‘시간적인 동시에’ 공간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존재자는 공간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시간을 떠나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삶을 보양하는 방법
노자가 말하였다.
“삶을 보양하는 방법이란 위대한 도 하나를 지니는 것이며, 자기 본성을 잃지 않는 것이오. 점치는 것에 의하여 자기의 길흉(吉凶)을 판단하려 들지 않아야 하고, 자기 분수를 지킬 줄 알아야 하고, 인위적인 행위를 그만둘 수 있어야 하오. 남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자기를 충실히 지닐 수 있어야 하오. 행동이 자연스러워야 하고, 마음은 거리낌이 없어야 하며, 아이처럼 순진할 수 있어야 하오. 아이는 하루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데, 그것은 지극히 자연과 조화가 되어 있기 때문이오. 또 하루 종일 주먹을 쥐고 있어도 손이 저려지지 않는데 그것은 자연의 덕과 일치되어 있기 때문이오. 하루 종일 보면서도 눈을 깜빡거리지 않는데, 밖의 물건에 대하여 치우쳐져 있지 않기 때문이오. 길을 가도 가는 곳을 알지 못하고, 앉아 있어도 할 일을 알지 못하오. 밖의 물건에 순응하고, 자연의 물결에 자기를 맡기오. 이것이 삶을 보양하는 방법이오.”
진정으로 삶을 보양하는 방법은, 채움이 아니라 비움에서, 행함이 아니라 행하지 않음에서 찾을 수 있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는 것, 무하유지향에 이르는 것이 삶을 보양하는 방법이다.
시간에 대해 말하다
“만물이 태어나지만 그 근본은 없는 것이며, 이승을 떠나는 것도 들어가는 구멍이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는 하고 있지만 차지하는 곳은 없고, 영원히 존재하기는 하지만 시작과 끝이 없는 것이다. 태어나기는 하지만 들어갈 구멍은 없기 때문에 존재가 있는 것이다. 존재는 하고 있지만 차지하는 곳은 없다는 것은 상하 사방의 공간이 한없이 넓음을 뜻한다. 영원히 존재하되 시작과 끝이 없다는 것은 예부터 지금까지 계속되는 시간을 뜻한다.”
노자가 남영에게 말했다.
“천부(天府)를 지키고 천문(天門)을 열어라. 천부는 하늘의 창고로서 텅 비어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마음이다. 천문은 하늘의 문으로서 열려 있으면서도 닫혀 있는 무위의 상태다.” 천부의 개념은 텅 비어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담는 마음을 말하며, 삶과 죽음은 기(氣)에 의한 모임과 흩어짐이라는 순환의 관점으로 이해된다.
현대 물리학의 두 축인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은 공간과 시간을 대하는 관점에서는 좀처럼 합을 맞추지 못했다. 상대성이론이 공간과 시간을 ‘시공간’으로 묶어 다뤄온 반면, 양자역학은 공간에 대해서만 ‘양자상태’(Quantum State)를 정의하고 시간은 그저 흘러가는 변화의 ‘과정’(채널)으로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공간상의 양자 ‘상태’와 시간상의 양자 ‘과정’에 대한 차이이다. 사진 또한 빛이라는 물질로 촬영하게 된다. 빛이 비춰지는 상태는 공간이고, 빛이 전달되는 과정은 시간이다. 빛이라는 입자가 카메라를 통해서 전달되고, 필름이라는 입자에 상을 고정시킨다. 모든 원자, 입자(빛)는 입자성과 파동성을 가진다. 빛이 입자인가, 파동인가 하는 논란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
https://youtu.be/p-nPC9UsCBI?si=AJdi1sBVc_XaqHW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