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편(外篇) ------------> 프레이밍(Framing)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 봐 그래 나도 변했으니까 모두 변해가는 모습에 나도 따라 변하겠지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 봐 그래 너도 변했으니까 너의 변해가는 모습에 나도 따라 변한 거야 이리로 가는 걸까 저리로 가는 걸까 어디로 향해 가는 건지 난 알 수 없지만 세월 흘러가면 변해가는 건 어리기 때문이야 그래 그렇게 변해들 가는 건 자기만 아는 이유”
-봄여름가을겨울,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 中에서-
지식과 도(知識和大道)
‘지(知)’가 북쪽으로 가서 노닐다가 ‘무위위(無爲謂)’를 만났다. 지(知)가 무위위에게 물었다.
“그대에게 세 가지를 묻겠습니다. 어떻게 사색하고 고민해야 도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행동해야 도에 다다를 수 있습니까? 도를 얻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무위위는 이 세 질문에 대해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지가 이번에는 백수의 남쪽에 이르러 ‘광굴(狂屈)’을 만나 다시 물었다.
광굴이 답했다. “나는 그 답을 압니다. 내 마음으로는 그대에게 알려주고 싶지만 설명하려는 말을 잊고 말았습니다.”
여전히 질문의 답을 얻지 못한 채 황제의 궁으로 돌아와서 지는 황제에게 물었다.
황제가 말했다. “애써 생각하지 말아야 도를 깨달을 수 있소. 사심을 가지고 행동하지 말아야 도에서 편안할 수 있소. 비결을 따르려 하지 말아야 도를 얻을 수 있소.”
이에 지가 황제에게 물었다. “나와 당신은 도에 관해서 알았지만, 무위위와 광굴은 모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옳은 것입니까?”
황제가 말했다. “무위위는 도를 터득한 사람이고, 광굴은 도에 가까이 간 사람이오. 그러나 나와 그대는 도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소.” 도를 알고 있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자칫 도를 안다고 젠체하지 마라. 지식의 한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도라는 것은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또 다른 설명에서 도의 과정이 무위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역설한다.
“도는 취득할 수 없고, 덕은 이르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어짊은 행할 수 있지만, 의로움은 사람들을 해치게 되고, 예의는 사람들이 서로 속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잃은 뒤에야 덕이 중시되고, 덕을 잃은 뒤에야 어짊이 중시되고, 어짊을 잃은 뒤에야 의로움이 중시되고, 의로움을 잃은 뒤에야 예의가 중시된다. 예의라는 것은 도의 꽃과 같은 것이며, 혼란의 시발점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닦는 사람은 쓸데없는 일은 매일같이 버려야 한다. 그것을 버리고 또 버림으로써 무위에 이르러야 한다. 무위하게 됨으로써 하지 않는 일이 없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장자는 도라는 것은 지식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초월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불교의 전식성지(轉識成智)라는 수행법이 있다. 전식성지란, 분별하는 마음을 지혜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판단, 인식의 단계를 지혜(道)로 전환해서, 생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보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변한다. 이것을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말한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과연 옳은 것인가, 정말로 알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수없이 던진다. 지식은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고, 변화되기 때문이다. 사는데 정답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도에 대하여 널리 안다는 것은 반드시 옳은 지식은 아니며, 거기에 대하여 잘 논한다는 것은 반드시 밝은 지혜는 아니오. 도를 터득한 성인(聖人)들은 그런 지식과 이론을 끊어 버리오. 그리고 거기에 보태 주어도 더욱 증가하지 않고, 거기에서 덜어내도 더욱 줄어들지 않는 것이 성인이 보유하고 있는 상태요. 깊숙하기는 바다와 같고 지극히 높으며 끝나는가 하면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오. 만물을 운행케 하고 생성함에 빠뜨리는 것이 없으니, 군자의 도는 그 밖에 달리 있을 수가 있겠소? 만물은 모두 이에 의하여 성장 변화하면서도 다함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도라는 것이오.”
백구과극(白駒過隙)
백구과극이란 말은, 흰 망아지가 빨리 지나가는 순간을 문틈으로 언뜻 본다는 뜻으로, 세월과 인생이 덧없이 짧음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 사는 것은 마치 흰 말이 달려 가는 것을 문틈으로 보는 것처럼 순식간이다. 모든 사물은 물이 솟아나듯 문득 생겼다가 물이 흐르듯 사라져 가는 것이다. 즉 사물은 모두 자연의 변화에 따라 생겨나서 다시 변화에 따라 죽은 것이다.” 이어서 노자는 공자에게 말한다. “도라는 것은 아득하여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오. 분명한 물건들은 어둑어둑한 보이지 않는 것에서 생겨나며, 형체를 지니고 있는 것들은 형체가 없는 것에서 생겨나오. 사람의 정신은 도에서 생겨나며, 육체는 정기의 화합으로 생겨나오. 그리고 만물은 형체가 다시 형체를 서로 생성하오. 그것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 자취조차 없고 그것이 어디로 가는지는 한계도 없소.”
<백구과극>이란 말에서 사진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사진가는 순식간의 찰나의 순간을 고정하는 작업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의 말처럼 결정적 순간은, 사진가의 입장에서이다. 우리는 순간의 의미를 과연 <결정적 순간(Images à la sauvette)>으로 볼지, 제프 다이어의 <지속적인 순간(Ongoing Moment)>으로 볼지 생각의 여지를 가진다. 물론 사진가는 클레이 사격(shotgun shooting)을 하는 사격선수와 닮아 있다. 날아가는 물체를 또는 대상을 포착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대부분의 사진가들에게는 어떤 장면을 포착한다는 것이 흰 망아지가 빨리 지나가는 순간을 포착하는 <백구과극>의 상황인 셈이다. 사진가의 초점스크린과 사격의 표지판은 닮아 있다. 사격선수가 정확한 목표물을 겨냥하거나, 양궁선수가 과녁을 향해 화살을 쏘듯, 사진가는 프레임 안에서 초점을 맞춘다.
“우연은 우연이 아닌 게 될 때까지 얼마나 지속될 수 있나? 얼마 동안이 순간이고, 지속되는 순간인가?”
-제프 다이어, 지속의 순간들-
도는 똥오줌에도 있다(道在屎溺)
동곽자(東郭子)가 장자에게 물었다. “대체 도란 어디에 있습니까?”
장자가 대답했다. “도는 없는 곳이 없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십시오.”
“도는 땅강아지나 개미 몸에도 있습니다.”
“도는 벽돌과 기와에도 있습니다.”
“도는 똥과 오줌에도 있습니다.”
장자가 설명했다. “그대의 질문은 도의 본질과는 너무 멉니다. 도의 관점에서 만물을 보면 만물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땅강아지나 개미, 벽돌과 기와, 똥과 오줌 모두 같지요. 이것들이 도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결코 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 도는 없는 곳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도는 어디에나 있다고 부정의 부정으로 이야기한다. 도는 어디에나 있지만 발견하기가 어렵다. 아마도 도를 깨달은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어느 공간에서도 존재한 도를, 없는 것 같지만 있는 도를, 공간속에서 프레임을 발견하는 사진가는 아마도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s)의 공간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미셸 푸코가 말한 헤테로피아의 공간은 현실적인 동시에 유토피아적인 공간이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과 현실에 존재하는 공간. 이런 익숙한 공간과 낯선 공간, 그 공간과 시간은 씨줄과 날줄처럼 우리에게 얽혀져 있다. 그 공간을 사진가는 프레임하게 된다.
https://youtu.be/YB37rXMXslQ?si=XQDaMeKsExob0y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