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편(雜編) ------------> 타이밍(Timing)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가을 끝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송창식, 푸르른 날 中에서-
서무귀(徐無鬼)의 대화
서무귀(徐無鬼)가 여상(女商)의 소개로 위나라 무후(武侯)를 만났다.
서무귀가 말했다. “제가 개와 말을 감정할 줄 아는데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무후가 말했다. “그거 좋지요. 어서 과인에게 들려주십시오.”
서무귀가 말했다. “개는 세 등급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품의 개는 배가 부른 것에 만족합니다. 중품의 개는 눈빛이 밝게 빛나고 늠름합니다. 상품의 개는 자신이 개라는 사실조차 잊은 것처럼 어디에도 얽매임 없이 자유롭습니다.”
무후가 듣고는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서무귀가 이어서 말했다. “말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나라의 말(國馬)이고, 다른 하나는 천하(天下)의 말입니다.”
“말의 이빨, 등, 머리, 눈의 생김이 모두 규정에 들어맞고, 앞으로 달리고 뒤로 물러설 때는 자를 댄 듯 반듯하고, 회전할 때는 원을 그리듯 둥글게 돈다면 그 말을 나라의 말이라고 합니다.”
“말의 동작이 움직이는 것도 같고 멈춘 것도 같고, 기운이 있는 듯하면서 없는 듯하고, 마치 자신을 잊은 듯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달릴 때는 쏜살같아서 먼지마저 일으키지 않는 이런 말을 두고 천하의 말이라고 부릅니다.”
무후는 크게 기뻐하면서 웃었다.
천하마(天下馬)처럼, 최고의 경지는 천성의 재질을 지니고 있어서 고요하고 모든 것을 잃은 듯하며, 자기 자신도 잃은 것처럼 언제나 한결같음에 있다.
행운과 불운 사이
자기(子綦)에게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앞에다 불러 앉혀 놓고 구방인(九方歅)을 불러 말하였다.
“나를 위하여 내 자식들의 관상을 봐 주십시오. 누가 행운을 타고 났습니까?”
구방인이 말하였다.
“곤(梱)이 행운을 타고났습니다.”
자기는 놀라운 듯 기뻐하면서 구방인에게 말하였다.
“어떠한 행운입니까?”
“곤은 장차 나라의 임금과 같은 식사를 하면서 그의 일생을 마칠 것입니다.”
자기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내 자식이 어찌 그러한 불행에 이르게 된다는 말입니까?”
얼마 후, 곤은 연나라로 가다가 도중에 강도에게 붙잡혔다. 강도가 말했다.
“완전한 몸으로 팔면 도망칠 우려가 있으므로, 네 발을 베어야겠다. 그래야 달아나지 못할 것이 아니냐.” 그러고는 곤의 발을 잘랐다. 후에 곤은 절름발이가 되어 제나라로 팔려갔다. 제나라에서 곤은 거공(渠公)의 문지기가 되어 평생 고기를 먹으며 살았다.
우리는 곧잘 흙수저다, 금수저다 이야기를 하곤 한다. 돈과 재물이 많은 것이 과연 행복한 삶인가, 그렇지 않은가는 그 사람의 체감온도에 달려 있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없이 부족할 것이고, 만족하는 사람은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지도 모르겠다. 곤(梱)의 운명은 과연 행복한 삶이었을까?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돈과 재물이 쌓이지 않으면 탐욕이 많은 자들은 근심하고, 권세가 세어지지 않으면 뽐내기 좋아하는 자들은 슬퍼하며, 형세를 잘 좇는 무리들은 변란을 즐긴다. 이들은 때를 만나야 쓰일 곳이 있게 되며, 어떤 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가 시간의 변화를 따라 이끌리는 자들이며, 사물의 변화에 얽매이는 자들이다. 자기의 육체와 본성을 고달프게 하고, 밖의 만물에 대하여 몰두하며, 평생토록 본성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자들이니, 슬픈지고!” 사람의 불안과 괴로움은 부귀(富貴)에 의한 것이 아니다.
세 사람(훤주, 유수, 권루)
이 세상에는 남의 말을 잘 따르는 사람들이 있고, 일시적인 안락을 꾀하는 사람들이 있고, 세상 일에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1.훤주(暖姝): 남의 말을 잘 따르는 사람들이란 한 선생의 이론을 배우기만 하면 얌전히 그것을 따라 자기의 학설로 받아들여 만족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만족하고서는 처음의 물건이 있지 않았던 상태가 있었음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은 줏대가 없이 유연하다.
2.유수(濡需): 일시적인 안락을 꾀하는 사람들이란 돼지 몸에 붙은 이와 같은 자들이다. 길게 털이 자라 있는 장소를 골라서 스스로 넓은 궁전의 광대한 정원이라 생각한다. 말굽 모퉁이나 사타구니 사이 또는 유방 사이나 넓적다리 사이를 안락한 방이나 편리한 장소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 때건 도살자가 팔을 휘둘러 돼지를 잡은 뒤 마른 풀을 깐 다음 불을 붙이고 그 위에 돼지를 놓으면 자기도 돼지와 함께 타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들은 자기가 사는 구역 안에서 살기도 하고 또 죽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은 일시적인 안락을 꾀한다.
3.권루(卷婁): 세상 일에 애쓰는 사람들이란 순임금과 같은 자들이다. 양고기는 개미를 좋아하지 않지만 개미들은 양고기를 좋아하되 모여드는데, 양고기가 노리기 때문이다. 순은 어짊과 의로움이라는 노린내 나는 행동을 하여 백성들은 그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순은 사는 곳을 세 번이나 옮겼으나, 그때마다 도시를 형성하였다. 등(鄧)이란 고장으로 옮겼을 때에는 십여만 가호(家戶)나 모여들었다. 순은 불모의 땅을 맡은 다음 늙고 귀와 눈도 어두워졌으나 돌아가 쉬지를 못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 몸이 망가지도록 애쓰기만 한다.
그러나, 참된 사람(眞人)은 눈에 보이는 대로 물건을 보고 귀에 들리는 대로 소리를 들으며, 마음은 본성으로 되돌아가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이러한 사람은 그의 마음은 먹줄 친 듯 평평하며, 그의 변화는 자연을 따르기만 한다. 자연스러움으로써 인간을 대하지, 인위적인 행위로 자연의 변화에 참견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훤주도, 유수도, 권루도 아닌 그 어떤 사람? 노자는 이렇게 충고한다. ‘화광동진(和光同塵)’, 자신의 재주를 과시하지도 말고, 지혜를 뽐내지도 말고, 자신의 덕과 재능을 감추고 세상과 어울리라고 말이다.
자연의 변화, 무(無)의 원리
만물의 근원이 하나라는 대일(大一)을 알고, 만물의 근원이 지극히 고요하고 움직임이 없다는 대음(大陰)을 알고, 만물을 분별없이 하나로 보는 대목(大目)을 알고, 자연의 조화가 균등히 작용한다는 대균(大均)을 알고, 자연에는 일정한 법도가 있다는 대방(大方)을 알고, 자연이란 진실하다는 대신(大信)을 알고, 자연이란 안정된 것이라는 대정(大定)을 알면, 지극한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대일은 도로 통하게 해 주며, 대음은 모든 분규를 해결케 해 주며, 대목은 자연을 달관케 하며, 대균은 그의 본성을 따라 스스로 터득하게 하며, 대방은 모든 법도를 터득하게 하며, 대신은 모든 의혹을 없애 주며, 대정은 자신을 안정되게 유지해 준다.
사람의 지능이 다한 곳에 자연의 변화가 있고, 무(無)의 원리가 어둠속에도 작용하고 있고, 만물을 생성케 하는 원리가 있고, 그러한 것들을 존재케 하는 법칙이 있는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는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과 같고, 그것에 대하여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과 같은 것이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경지에 이른 뒤에야 그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자연의 변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간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은 현존재의 삶에서 존재자의 마음속에서도 시계는 작동한다.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순간, 시간은 멈췄다가 다시 진행된다. 시간은 어쩌면 없을(無)지도 모른다. 시간이 우연적인 찰나인지 영겁(永劫)의 시간인지는 그 사진가의 마음속에서만 존재한다. 날아가는 화살을 멈추게 하는 것도 사진이고, 흐르는 강물처럼 지나가게 하는 것도 사진이다. 일시적인 시간(일시성) 안에는 수많은 사건과 과정이 들어있다. 우주의 시간에서 보면 인간의 시간이란 덧없이 짧다. 시간이 가지는 의미를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지 모른다.
https://youtu.be/G80Z9ysLNuA?si=YWqSlnqaY2tI4O6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