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편(雜編) ------------> 타이밍(Timing)
“수많은 시간이 지나가도 늘 같은 자리에 있는 나무처럼 아무리 흔들고 흔들어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그네처럼 내 사랑은 변하지 않아요 언제든 힘이 들 땐 뒤를 봐요 난 그림자처럼 늘 그대 뒤에 있어요 바람이 되어 그대와 숨을 쉬고 구름이 되어 우 그대 곁을 맴돌고 비가 되어 우 그대 어깨를 적시고 난 이렇게 늘 그대 곁에 있어요”
-한영애, 바람 中에서-
외부적인 것과 내부적인 것
외부적인 것에 휩쓸리는 사람이나 중심이 있어 흔들리지 않는 내면적인 사람과 우리는 어떤 사람일까. 우리 밖의 일이나 대상들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이다. 외물편은 무용지용(無用之用)을 말하고 있다. 자신의 밖의 요인들에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안의 요인들에서도 욕망을 부치기도 한다. 외부적인 것들은 과연 쓸모있는 것들인가? 이기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이용하려고 한다. 쓸모없음의 쓸모있음이란 무엇일까. 시간은 우리에게 외부적인 것인가, 내부적인 것인가. 적절한 타이밍을 놓쳐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을지도 모른다. 사진에서 타이밍도 중요하다. 셔터찬스란 단순히 셔터를 누르는 순간의 것만이 아니라 카메라를 육체화하여 현실을 엄격한 내용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결정적 순간>의 앙리 까르띠에 브레쏭은 이렇게 말한다. “.... 사진에는 새로운 종류의 조형성이 있는데 그것은 대상의 움직임에 의해 생긴 순간적인 선들의 산물이다... 움직임 속에는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는 한순간이 있다. 사진은 이 순간을 포착하여 그 순간의 균형을 부동의 상태로 고정시켜 두어야 한다...”
장자가 집이 가난하여 감하후(監河侯)에게 곡식을 빌리러 갔다. 감하후가 말했다. “좋소. 내 머지않아 세금을 거둬들일 텐데 그러면 선생께 삼백금쯤 빌려드리죠. 그러면 되겠죠?”
그러자 장자는 낯빛이 달라지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이리로 오다 보니 도중에 나를 부르는 자가 있었습니다. 뒤돌아보니 길가에 수레바퀴 패인 자국에 붕어가 있더군요. 붕어가 말하기를, ‘나는 동해의 소신(小臣)이오. 지금 목이 마르니 그대가 물을 좀 주면 나를 살릴 수 있을 거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다, 내가 이제 남쪽 오나라와 월나라로 가는 길인데 가서 촉강(蜀江)의 물을 끌어다가 너를 맞게 해주지. 그럼 되겠지?’ 그러자 붕어는 불끈 성을 내며 제게 말했습니다. ‘나는 늘 나와 함께 있던 물을 지금 잃었기 때문에 있을 곳이 없는 거요. 나는 지금 한 말이나 한 되의 물만 있으면 살아날 수 있소. 당신이 그렇게 말하다니, 차라리 건어물 가게에나 가서 나를 찾는 게 나을 거요!’”
욕망이라는 그릇
용봉(龍逢)은 충신이면서도 하(夏)나라 걸왕(桀王)에게 처형당하였고, 비간(比干)은 충성스럽게 올바른 말을 하다가 은(殷)나라 주와(紂王)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그리고 주왕의 서형(庶兄) 기자(箕子)는 미친체하며 살았고, 주왕의 간신 오래(惡來)도 죽음을 당했으며, 걸왕과 주왕도 결국은 멸망하였다. 임금들이란 모두가 그의 신하들이 충성스럽기를 바라지만, 충신이라고 반드시 신임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오나라 오자서(伍子胥)는 충신이면서도 사형을 당하여 시체가 강물에 던져졌고, 주(周)나라 장홍(萇弘)은 죄 없이 촉(蜀) 땅에서 죽었는데, 그를 장사지낸 지 삼 년 만에 그의 피가 변화하여 푸른 옥이 되었다 한다. 부모된 사람이면 누구나 그의 자식이 효성스럽기를 바란다. 그러나 효자라고 반드시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은나라의 효기(孝己)는 계모로 말미암아 근심속에 살아야 했고, 증삼(曾參)은 아버지의 미움을 사서 슬픔 속에 지내야 했다.
나무와 나무를 마찰시키면 불이 붙는다. 쇠가 불 속에 오래 있으면 녹는다. 음과 양의 기운이 엇섞여지면 하늘과 땅이 크게 놀라 움직인다. 그래서 이에 번개와 천둥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빗속에도 벼락이 쳐서 느티나무를 불태우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이로움과 해로움이라는 매우 큰 우환이 있는데 두 가지 중 어느 편에 빠져도 그 피해로부터 도망칠 곳이 없는 것이다. 언제나 두려워함으로써 아무 일도 이룩하지 못하게 되며, 그의 마음은 하늘과 땅 사이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불안하다. 또 고민이 마음에 엉겨 근심에 잠기게 되며, 이로움과 해로움이라는 생각이 서로 마찰을 일으켜 너무 과다한 불 같은 욕망을 낳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마음 속의 화기(和氣)를 불태우게 된다. 마음이 달처럼 맑고 고요해도 본시 사람은 불 같은 욕망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다.
사진은 시간을 담는 그릇이고, 욕망을 담는 그릇이다. 이미지나 기억은 이런 욕망의 발현일지 모른다. 사진은 시간을 담고 있고, 공간을 담고 있다. 오롯이 모든 걸 담고 있지는 않을지 몰라도, 부분적이나마 담고 있다. 우리는 그 그릇만 보이고, 거기에 담겨진 내용은 사실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보인다. 기억이란 시간이 흘러 그 기억은 부정확해졌기 때문이다. 카메라라는 그릇이 단순히 대상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의 무언가의 본질을 드러내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영혼을 담는 그릇인지, 그냥 물건들을 담는 그릇인지, 쓰레기만 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진을 찍는 순간 우리는 무언가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릇과 내용은 불가분의 관계다. 여전히 우리는 ‘사진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있다.
득어망전(得魚忘筌)
통발은 물고기를 잡는 도구이다.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은 버려진다.
올가미는 토끼를 잡을 때 필요한 수단이다. 토끼를 잡고 나면 올가미는 잊힌다.
언어와 문자는 생각을 전달하는 데 쓰인다. 생각이 이미 전해지면 언어와 문자는 잊혀진다.
장자는 “사욕 때문에 본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세상이 바뀌면 상대방을 천하게 여기고, 옛날을 존중하고 현대를 낮게 보는 사람들에게 지극한 사람은 행적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희위씨(狶韋氏)의 입장에서 지금 세상을 본다면 그 누가 편벽되지 않은 자가 있겠는가? 오직 지극한 사람만이 세상에 노닐면서도 편벽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순응하면서도 자기의 본성은 잃지 않기 때문이다. 지극한 사람은 세상의 가르침을 배우지는 않지만, 세상 사람들의 뜻을 따르고 그들을 배척하지는 않는다.”
https://youtu.be/HEDtbPQMPE4?si=u_mFQVhshryuzvN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