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편(雜編) ------------> 타이밍(Timing)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장림깊은 골로 대한 짐승이 내려온다 몸은 얼숭덜숭 꼬리는 잔뜩 한 발이 넘고 누에머리 흔들며 전동같은 앞다리 동아같은 뒷발로 양 귀 찌어지고 쇠낫같은 발톱으로 잔디뿌리 왕모래를 촤르르르르 흩치며 주홍 입 쩍 벌리고 워리렁 허는 소리”
-이날치, 범 내려온다 中에서-
장자는 세 가지 이야기 전달방식으로 우언(寓言), 중언(重言), 치언(巵言)에 대해 설명한다. 우언(寓言)은 다른 사물에 가탁(假託)해서 하고 싶은 말을 서술하는 방식이고, 중언(重言)은 세상 사람들이 중시하는 인물의 말을 빌려 무게를 더한 말이고, 치언(巵言)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 같은 말이다.
친아버지는 아들의 중매를 설 수가 없다
내 글에는 다른 일에 빗대어 한 말이 십 분의 구 정도이고, 세상에서 중히 여겨지는 말이 그 중의 십 분의 칠 정도이다. 그리고 그때그때의 일에 알맞은 말을 매일같이 한 것은 자연의 실상과 잘 조화되는 것이다.
십 분의 구나 되는 다른 일에 빗대어 한 말은 밖의 사물을 인용해서 도를 논한 것들이다. 친아버지는 그의 아들의 중매를 설 수가 없다. 친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칭찬하는 것은, 그의 아버지 아닌 다른 사람의 칭찬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란 자기와 같은 입장에 대해서는 순응하지만, 자기와 같은 입장이 아니면 반대를 한다. 자기와 같은 생각은 그것을 옳다고 인정하고, 자기와 다른 생각은 그것을 그르다고 부정한다.
세상에서 중히 여겨지는 말 중의 십 분의 칠은 사람들의 논쟁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옛 분들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다. 나이가 많으면서도 일에 대한 이치와 앞뒤를 뒤에 올 사람들에게 보여 주지 못한다면, 그는 선배가 아니다. 사람으로서 선배가 될 수 없다면 사람으로서의 도가 없는 것이다. 사람으로서의 도를 지니지 않고 있다면, 그런 사람을 진부한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에 따라 매일같이 한 말들은 자연의 실상과 잘 조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을 따라 무궁함으로써 영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시비를 말하지 않으면 사물들과 조화되게 된다. 처음과 끝을 둥근 고리의 처음과 끝처럼 구분할 수 없고, 그 이치는 터득할 수도 없는 것이니 이것을 자연의 균형이라 하는 것이다. 자연의 균형이란 자연의 실상에 합치되는 것이다.
사진의 세 가지 표현 방식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진 이미지의 수사학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비유(은유)와 상징을 통해서 보여지곤 한다. 사진가가 프레임에 담는 모든 정보를 기호로 본다면, 소쉬르의 두 양태,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e)의 유사성으로 인한 연상관계로 의미는 확대된다. 사진의 프레임속에 담겨진 요소중 하나아 다른 하나는 그 비교(compare)와 대조(contrast)를 통해서 만들어진다.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사물에 반영하는 것(假託)에서 보면 사진은 은유의 과정을 거친다.
도를 얻는 단계(得道的階段)
안성자유(顔成子游)가 동곽자기(東郭子綦)에게 말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 도를 닦기 시작한 처음 일 년은 마음이 야생마와 같았습니다. 두 번째 해가 되어서야 마음을 다스리고 절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해에는 마음에 거리끼는 바가 없어졌습니다. 네 번째 해에는 외물과 나를 하나로 여기게 되었고, 다섯 번째 해에는 많은 무리가 저를 스승으로 따랐습니다. 여섯 번째 해에는 신명(神明)으로 만물을 깨우쳤고, 일곱 번째 해에는 자연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여덟 번째 해에는 삶과 죽음을 잊었고, 아홉 번째 해에는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내가 광화문광장을 주제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지도 10년이 넘었다. 그 첫해는 세월호로 사진기록이 시작되어 현재는 광장에서 벌어지는 이모저모를 다 담고 있다. 나는 과연 무엇을 찾았을까, 깨달음을 얻었을까. 아직 많이 부족한 것 같다. 야생마처럼 무작정 찍었던 것은 아닌지, 과도하지 않고 적절하게 절제하면서 찍었는지, 아직도 사진의 도(道)를 깨우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듯하다.
얽매이지 않는 마음(無牽無掛的人)
증자(曾子)가 두 번째 벼슬을 하게 되자 그 마음이 예전과 달라졌다.
증자가 말했다.
“내가 처음 벼슬을 했을 때 봉록(俸祿)이 삼 부(釜, 약 12리터)에 그쳤다. 그래도 그때는 부모님이 살아계셔서 마음만은 즐거웠다. 지금 다시 벼슬길에 올라 봉록이 삼천 종(鍾, 약 50리터)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부모님이 이미 세상을 떠나셔서 마음이 슬프다.”
이 말을 들은 공자의 제자가 공자에게 물었다. “증삼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를 두고 마음에 얽매임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는 봉록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다른 일에 마음이 얽매어 있다. 진정으로 마음에 얽매임이 없는 사람이 어찌 슬프고 기쁠 수 있겠느냐? 마음에 얽매임이 없는 사람은 봉록이 삼 부(釜)이든 삼천 종(鍾)이든 모두 새와 벌레가 날아가는 것쯤으로 여긴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삶,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마음. 다양성의 시대 현대, 우리는 과연 어디에 위치하고 있을까. 다양한 목소리의 외침들이 있고, 복잡한 갈등의 구조속에 놓여져 있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하기보다는 혐오와 극단의 시대에 사사무애(事事無碍)의 지혜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서로가 서로를 비추면서 융합하는 시대. 그런 시대는 과연 올 것인가.
https://youtu.be/SmTRaSg2fTQ?si=wF50FwYDPpLkgVq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