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353
사진은 기록장치로서 필름을 사용했었다. 디지털 시대인 오늘날은 필름에서 메모리 칩(memory chip)으로 바뀌었다. 필름은 기본적으로 한번 현상하게 되면 더 이상 기록을 할 수 없지만, 메모리 칩은 쓰고 지우는 반복된 행위를 계속 할 수 있다. 기억은 순식간에 지워졌다가, 다시 어딘가에 저장되어진다. 사진은 과연 기억을 얼마나 저장하고, 그 기억을 환기(喚起)시켜 줄까? 사람의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면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 같을 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기억은 흩어져, 망각되어 진다. 누군가는 그 먼지의 끝자락을 붙잡으려고도 하고.
며칠 전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이란 글을 보게 되었다. 그 기행문은 괴테가 1년 10개월가량의 이탈리아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글 중에서 <흩어진 기록>과 <수집된 기록>이란 용어가 눈에 띄었다.
“어제 제가 막 프라스카티를 떠나려는 참에 여러분의 편지와 책들이 동시에 도착했습니다. “흩어진”이라기보다는 “수집된” 기록들(헤르더의 저서 <흩어진 기록들> 중 제 3권을 가리킨다) 그리고 <고찰>(역시 헤르더의 저서 <인류 역사의 철학적 고찰>을 가리킨다) 그리고 네 권의 가죽 장정본(앙겔리카 여사에게 증정한 괴테 전집을 가리킨다)들인데, 제가 별장에서 지내는 동안 보물이 될 것입니다.” (괴테, 이탈리아 기행, P224)
여기서 헤르더는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Johann Gottfried von Herder)를 말한다.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은 이탈리아 각 지역의 예술과 역사, 식물과 풍광, 각 지역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기록한 여행 일기 형식이다. 그가 기록했던 것들은 <수집된 기록>들인 셈이다. 기록에 남긴다는 행위는 결국 무언가의 기억들을 수집하는 것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행위)은 아마도 흩어져 가는 기억들을 주체인 사진가가 남기고자 하는 기억들의 수집된 기록일 것이다. 그 사진들에 남겨진, 그리고 수집된 기록들은 증명의 수단으로, 감정의 기록으로, 표현으로 전달되어진다. 사진에 남겨진 정보들은 하나하나가 기호로서 해석되길 바라는 채 남겨져 있다. 낙서장에 씌여진 글처럼 하찮고, 진부한 내용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를 가질려면 수집가와 관찰자의 시선이 필요하다. 무수히 많은 도서관의 책들 사이로, 나름의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수집가로서의 관찰이 필요한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책들은 고유의 운명을 가졌다’고 말하면서 ‘수집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발터 벤야민의 말을 달리말하면, ‘사진에 찍힌 정보는 하나의 운명, 하나의 삶, 하나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해석하는 사람, 분류하는 사람, 관찰하는 사람만이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사진이라는 매체는 시각적인 요소 외에, 청각적인 것, 후각적인 것, 촉각적인 것들에 대한 기록은 쉽지 않다.
“어머니는 둥그스름하고 앙증맞은 작은 케이크, 즉 세로로 홈이 파인 조개껍데기 모양의 예쁜 마들렌을 주셨다. 기력이 빠진 나는 마지못해 입을 열고 마들렌을 적신 차를 조금 맛보았다.
케이크 부스러기가 섞인 따뜻한 차가 입천장에 닿자마자 나는 이내 몸서리쳤다.
갑자기 그 맛이 기억났다. 그 맛은 콩브레에서 일요일 아침에 먹는 작은 마들렌 조각의 맛과 비슷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그는 마들렌의 맛과 기억에 대해 표현하고 있다. 프루스트가 기억했던 마들렌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게 되면, 그가 느꼈던 마들렌의 모습을 표현하기란 어려울 듯싶다. 마치 AI로 다시 기억을 살려보려고 하지만, AI가 만들어낸 기억은 뭔가 부자연스러운, 종합적이고, 인위적인 기억일지 모르겠다. 사진은 과연 잃어버린 기억들을 담아 낼 수 있을까. 그중 일부의 기억들은 <흩어진 기억>들이다. 카세트 테이프의 돌려가며 들었던 늘어진 노랫소리라든지, 스크래치가 난 LP판의 소리를 들어본 기억들은 그런 경험을 했던 이들의 <흩어진 기억>이자 <잃어버린 기억>, <사라진 기억>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