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차Kasha> 2011년
한국 영화 <화차Helpless>(2012)
혼마는 자기도 모르게 양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휴직중인 형사에게 ‘전문가’ 운운하며 부탁하는 일이라면 내용은 들어보나마나 빤하다.
“폭력단과 얽혔다거나, 가볍게 맡아준 친구의 물건이 알고 보니 장물이었다거나, 도난당한 차가 번호판만 감쪽같이 바뀌어서 팔렸다거나..... 뭐, 그런 일인가?”
“아니, 그런 일은 아닙니다.”
곧바로 부정하는 말이 날아들었다.
“그럼, 대체 무슨 일이지?”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가즈야가 말했다. “저 약혼했습니다.”
너무나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어서 웃어넘길 수도 없었다.
“아하, 그래. 축하하네.”
“그런데 전혀 축하받을 상황이 아닙니다.” 가즈야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약혼자가 사라져버렸으니까요. 그래서 그녀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혼마 씨가 하시는 일에는 사람 찾는 것도 있지 않나요? 이런 데 익숙하실 테고, 저 같은 놈이 혼자 버둥거리는 것보다는 훨씬 빨리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그녀를 찾아주십시오.”
애원하듯 탁자 위에 손을 얹고 몸을 앞으로 내민 채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가즈야를 보며, 혼마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눈을 깜박거리며 시선을 피한 후 창을 올려다보았다. 눈발이 세차게 쏟아지고 있다.
“전후 사정을 잘 몰라서.....”
그렇게 말문을 열자 가즈야가 달려들 듯한 기세로 나섰다.
“그건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P19)
“그래서 이것저것 장을 보고 내친김에 옷도 구경했죠. 그녀가 스웨터를 사서 계산하려고 했는데, 어느새 돈을 다 써서 남은 현금이 없었습니다.”
뭐가 그리 괴로운지 가즈야는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보고 뜸을 들였다.
“결국 제가 계산했지만,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기 때문에 문제될 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처음으로 쇼코한테 신용카드가 한 장도 없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습니다. 우리 은행에도 카드회사가 있고 영업 할당량도 있지만, 저는 공사 구분을 확실히 하고 싶어서 그녀는 물론이고 친한 친구에게도 회사 카드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런데도 상사에게 유능하다고 인정받는 영업 담당자라고 하니, 반대로 친구나 지인이 아닌 고객에게는 상당히 강인하게 밀어붙이는 편일지도 모른다. 혼마는 불현 듯 그런 생각을 하고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서 그날 의논했습니다. 앞으로는 결혼 준비를 하려면 물건을 살 일이 많을 텐데 매번 나랑 함께 다닐 수는 없다. 그렇지만 쇼코 혼자 큰 돈을 들고 다니는 건 위험하다. 그러니 이참에 신용카드를 만들어두자, 라고요. 어차피 결혼하면 성(姓) 변경 신청서만 내고, 그녀가 쓰던 은행 계좌를 생활비 계좌로 쓸 예정이었으니까요. 저도 제 재량으로 쓸 수 있는 계좌와 카드가 필요할 테고.” (P26)
“쇼코는 카드를 되도록 빨리 발급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다나카는 흔쾌히 승낙했죠. 그런데 지난주 월요일에 전화가 왔습니다.”
월요일이면 13일이다. 곁눈으로 슬쩍 달력을 보고 확인했다.
“미안하지만 발급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가즈야의 입술이 또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그뿐이 아니었어요. 그 여자랑 결혼할 생각이라면 좀더 찬찬히 알아보는 게 낫겠다고 충고까지 하는 겁니다.”
“무슨 이유로?”
깊은 한숨을 토해내고, 스스로를 격려하듯 어깨를 위아래로 들썩거린 후에야 가즈야는 대답했다.
“은행과 신용판매회사의 신용정보기관 양쪽 모두에서, 세키네 쇼코라는 이름이 ‘요주의자 명단’에 올라 있었기 때문입니다.” (P27)
“이건 세키네 씨가 빚 독촉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만둔 회사인가요?”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혼마가 메모지를 챙겨넣자 변호사가 말했다.
“나중에 일이 어떻게 마무리됐는지 저에게도 알려주시겠습니까? 정보를 제공한 이상 신경이 쓰여서요.”
“약속드리겠습니다.”
다음 고객이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변호사는 의자 옆에 선 채로 말했다. 혼마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저히 못 찾겠다 싶으면 신문에 세 줄짜리 광고라도 내보는 게 어떨까요?”
“‘쇼코, 대화하고 싶다. 당장 돌아와라’ 같은 식으로요?”
“뜻밖에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죠. 세키네 씨가 평소 보던 신문에 내보면 좋을 것 같은데.”
해볼 가치는 있을지도 모른다.
“세키네 씨가 돌아와서 구리사카 씨를 만난 뒤 왜 개인파산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관한 설명이 필요하다면 제가 얼마든지 협력할 수 있습니다. 그건 꼭 그녀만의 잘못이 아니니까요. 현대사회의 신용대출 파산은 어떻게 보면 공해 같은 겁니다.”
공해.
흥미로운 말이었다. 혼마는 시간이 더 없는 게 못내 아쉬웠다.
“혹시 나한테 연락이 오면, 구리사카 씨와 당신이 찾고 있다고 전해드리죠.”
그러나 그녀가 어디 있는지 당신에게 가르쳐줄 수는 없다. 변호사는 무언중에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세키네 씨가 당신들을 만나느냐 아니냐는 어디까지나 본인 스스로 결정할 일입니다. 하지만 나도 설득은 해보죠. 무작정 피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니까.” (P73-74)
“하지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닙니다. 호적은 형법에 저촉되는 어떤 범죄를 막아주니까요.”
이사카가 눈을 깜박거렸다. “그게 뭡니까?”
“중혼(重婚)이죠.” 혼마가 웃었다. “외국 영화나 소설에 곧잘 나오잖아요. 그쪽에는 출생증명과 결혼증명밖에 없고 무엇보다 나라가 워낙 넓다보니 중혼이 생기기 쉽다고 할까, 저지르기 쉬운 겁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호적을 조사하면 곧바로 혼인 사실이 드러나죠.”
“상대 여성을 속일 수 없다는 얘기군요.”
“그렇죠. 기껏해야 호적을 옮겨서 이혼 경험을 감추는 정도예요.”
“아하, 하지만 효과라 해도 그 정도 아닙니까. 번거롭기만 한 제도라면 없애는 게 나을 텐데.”
이사카의 말을 들으니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좀더 간편하고, 사생활을 확실하게 보호해줄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된다면.....
“그렇죠..... 양자결연 사실을 호적에 올리네 마네 하는 문제도 있었고, 특별양자제도가 도입된 것도 불과 사오 년 전이잖아요.”
이사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역시나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이다.
사토루는 혼마와 지즈코의 친아들이 아니다. 아직 젖먹이일 때 양자로 들인 아이였다. 특별양자제도라는, 아이의 친부모 성명을 호적에 기재하지 않는 제도가 인정되기 전의 일이었다.
인간은 본래 잔혹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른 점을 누군가에게서 발견하면 흠을 들춰내며 괴롭히려 든다. 사토루가 유치원에 다닐 때, 어떤 경로로 새나갔는지 몰라도 (아마도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제출한 호적등본 때문이겠지만) 사토루가 양자라는 소문이 퍼졌다. 아직 네 살 때라 아이들 사이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엄마들 사이에서는 역시나 화제가 되었는지, 지즈코가 한동안 몹시 화를 내거나 풀이 죽어 있곤 했다.
그때 둘이 상의해서, 어차피 언젠가 알게 될 일이고 남의 입으로 듣는 게 더 가여우니 사토루가 열두 살이 되면 사실을 털어놓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삼 년쯤 지나 지즈코가 변을 당하는 바람에 결국 혼마 혼자 사정을 밝혀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기한까지는 앞으로 이 년 남았다.
이사카가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손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가즈야 씨의 약혼자였던 여자는, 세키네 쇼코라는 사람이 개인파산한 사실을 몰랐던 겁니까?”
혼마는 퍼뜩 제정신을 차렸다.
“아마 몰랐겠죠. 본인이 가장 놀라지 않았을까요.”
큰 오산이었을 게 틀림없다. 그래서 더더욱 새파랗게 질린 것이다.
“파산 건을 조사하면 자기가 신분을 위장했다는 것. 사실은 세키네 쇼코가 아니라는 것이 들통 날 테니까 곧바로 도망쳤다는 거군요.” (P97-98)
그녀의 호난초 집에 남아 있던 작은 가솔린 병을 떠올렸다. 집안일을 완전히 어머니에게 맡기고 사는 가즈야는 그게 뭔지 잘 모르는 듯했지만, 혼마는 금방 감이 왔다. 지즈코가 예전에 쓰던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그 가솔린은 환풍기 날개에 찌든 기름때를 벗겨내기 위한 것이다. 날개가 반짝반짝 빛났던 건 그 때문이다.
집에서 도망칠 때 환풍기 날개까지 청소할 여유가 있었을 리 없다. 가즈야의 약혼자는 일상적으로 꼼꼼하게 청소를 해왔을 것이다. 집 상태만 봐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
그건 단순히 깔끔한 성격 때문일까..... 과연 그것뿐일까.
흔적을 남기지 말 것.
그러나 그대로 별일 없이 가즈야와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다면, 그때는 어떻게 됐을까? 온전히 뿌리를 내린 후에 과거를 들킨다면 그녀는 어떻게 할 작정이었을까? 그래도 도망쳤을까?
그럼에도 도망쳐야만 하는 사정이 있는 걸까? (P100-101)
“이 호적등본을 본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구라사카 가즈야 씨의 약혼자는 단순히 ‘세키네 쇼코’라는 사람의 호적을 이용한 것만이 아니라, 그걸 모조리 자기 걸로 만들어벌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
“굳이 분가까지 했으니까요?”
혼마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분가 사실에 어렴풋이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던 것이다.
“네, 그리고 부모란의 이 ‘사망’이라는 글씨도 그래요. 이건 신고자의 희망이 없으면 굳이 붙이지 않거든요.”
이사카가 “허어, 그래?” 라며 놀랐다.
“우리 어머니도 일찍 돌아가셔서 잘 알아요. 사망신고서를 내면 담당자가 물어요. 호적 부모란에 ‘사망’ 표기를 하겠느냐 안 하겠느냐, 라고.”
혼마는 슬쩍 이사카를 쳐다보았다. 섬뜩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호적등본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런데 굳이 표기했다는 건..... 뭔가 주장하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요? 이 호적에는 나 혼자라는 주장. 아니면 설령 서류상일지라도 남의 부모 이름을 같이 올리는 게 싫어서 적어도 두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밝혀두고 싶었거나.... 좀 지나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당신은 그런 생각 안 들어?” 히사에가 쳐다보며 묻자 이사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혼마는 다시 한번 나란히 늘어선 ‘사망’이라는 글씨를 내려다보았다. 히사에가 하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결코 지나친 생각이 아니다.
타인의 호적, 타인의 부모, 타인의 신분.
돈으로 샀을까, 아니면......
‘어떤 방법을 써서 가로챘을까.’
어느 쪽이든 이 ‘세키네 쇼코’는 주도면밀하게 손을 써서 감쪽같이 진짜 행세를 한 것이다.
“그렇지만 한 인간이 완전히 다른 타인의 행세를 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일까요?” (P114-115)
“진짜 세키네 쇼코의 생활을 더듬어가볼 생각입니다. 그녀가 어떤 생활을 했는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알아내면 그녀의 신분을 가로채려 했던 여자의 존재도 자연스럽게 드러나겠죠.”
“파산한 여자 아닙니까. 생활이 꽤 어지러웠을 텐데. 조사가 잘 될까요?”
불안해하는 이사카에게 혼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글쎄요..... 그래도 그녀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알아내는 건 그녀로 변신하려던 여자를 알아내는 일과 연결될 겁니다. 일단은 거기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세키네 쇼코는 타인의 신분을 원하는 여자가 주목할 만한 뭔가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별안간 이사카가 노래하는 듯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화차여.....”
“화차?”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혼마에게 이사카가 천천히 뒷말을 이었다.
“화차여, 오늘은 내 집 앞을 스쳐 지나, 또 어느 가여운 곳으로 가려하느냐.”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어젯밤에 집사람이랑 개인파산 얘기를 나누던 중에 문득 떠올랐어요. 옛날 노래예요. <슈코쿠슈>에 있던가.”
돌고도는 불수레.
그것은 운명의 수레였는지도 모른다. 세키네 쇼코는 거기서 내리려했다. 그리고 한 번은 내렸다.
그러나 그녀로 변신한 여자가 그것도 모르고 또다시 그 수레를 불러들였다. (P144-145)
“앞서 말했듯이 금융시장은 보내 환상입니다.” 변호사가 다시 한번 반복했다. “그러나 그것은 말하자면 현실 사회의 ‘그림자’로서의 환상이죠. 때문에 자연히 한계가 있어요. 사회가 허용하는 한계가. 그걸 생각하면 소비자신용의 이런 비정상적인 팽창 양상은 아무래도 수상쩍어요. 본래 부풀 일이 없는 곳을 무리한 방식으로 부풀리지 않는 한, 이 정도로 급격하게 성장할 리가 없죠. 이 환상은 정상적인 크기보다 훨씬 크게 팽창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혼마 씨, 당신은 키가 꽤 크지만 그렇다 해도 이 미터는 안 되잖아요? 그런데 당신의 그림자가 십 미터나 드리운다면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P151-152)
“부채가 불어나는 과정은 일반적으로 이렇습니다. 먼저 신용카드를 만들죠. 편리하게 사용합니다. 쇼핑, 여행, 뭐든 카드 한 장으로 간편하게 할 수 있죠. 그러는 사이 매수가 점점 늘어납니다.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일단 심사에서 걸리지는 않으니 백화점, 은행, 슈퍼마켓 할 것 없이 앞다퉈 카드를 만들라고 권유합니다. 카드 회원이 되면 할인 아니 우대 등 각종 다양한 혜택이 따라오죠. 그래서 카드 매수를 늘려나가는 겁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신용카드의 ‘공급처’는 사방에 널려 있으니까요.”
변호사는 포동포동한 손을 들어올리고, 한 장 두 장 헤아리듯 손가락을 꼽았다.
“그러다보니 쇼핑만이 아니라 현금서비스까지 이용하게 됐죠. 편리하니까요. 다시 말해 ‘신용판매’뿐만 아니라 ‘소비자금융’에도 손을 뻗치게 된 겁니다. 그렇다고 딱히 대단한 각오가 필요한 것도 아니에요. 은행 계열 카드의 경우에는 계좌의 돈을 인출하는 은행 CD기에서 바로 현금서비스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판매나 유통 계역 같으면 은행 CD 코너 같이 알록달록한 인출기가 가게 안팎에 설치되어 있죠. 신용카드를 넣고 비밀번호를 누르기만 하면, 자기 계좌에서 돈을 꺼내듯 간단히 빚을 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P154-155)
“소비자신용의 산업구조 말이죠?”
“그렇죠. 당신은 지금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 소비자신용 세계에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는 건 잘 알았다. 구조적인 문제, 금리 문제, 서투른 행정, 부족한 교육. 그건 충분히 이해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갚을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돈을 빌리고 곤경에 빠지는 건 결국 개인의 문제가 아닌가. 그 개인에게 약점이 있으니까. 세상을 우습게 보는 면이 있으니까 그렇게까지 추락하는 것이다. 그 증거로 일본 국민 전체가 다중채무자가 된 건 아니지 않은가. 나만 해도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았다. 성실하고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전혀 문제될 게 없다. 다중채무를 떠안은 것은 역시 본인에게 어떤 결함이나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아닙니까?” (P161)
“다중채무자들을 한데 싸잡아서 ‘인간적으로 결함이 있기 때문’이라고 단죄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동차 사고를 당한 운전자에게 전후 사정을 전혀 참작하지 않고 ‘너희 운전이 시원찮았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에게는 면허를 내주지 말았어야 한다’고 쏘아붙이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봐라, 그 증거로 한 번도 사고를 안 낸 사람들이 허다하지 않느냐, 그런 사람들을 보고 배우라는 말이죠.” (P164)
돈의 멍에는 거리의 발목까지 휘감는다. 하물며 사람의 발목에는 얼마나 강하게 얽혀들까. 낚아채인 인간이 바짝 말라 죽어갈 때까지일까. 아니면 죽을힘을 다해 칼을 휘둘러서 발목을 끊어내고 도망칠 때까지일까.
미조구치 변호사가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고 뒤를 돌아보았다.
“오 년 전에 개인파산 수속을 시작하고 부채가 늘어난 과정을 문서로 작성할 때, 세키테 씨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 선생님, 어쩌다 이렇게 많은 빚을 지게 됐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난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이다.”
혼마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변호사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별 참고는 안 되겠지만.”
걸음을 다시 내디디며 말했다.
“그녀가 근무한 회사의 주소 등, 우리 사무실에서 아는 건 다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언제든 연락하세요. 사와키 씨에게 미리 말해둘 테니까.”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 대신이라고 하면 뭣하지만, 일의 경과를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저도 마음에 걸리는군요.”
“네. 곡 말씀드리겠습니다.”
“세키네 쇼코 씨는..... 무사할까요?”
그 질문은 표면적으로는 별다른 생각 없이 불쑥 입 밖에 낸 것처럼 들렸다. 그런 식으로밖에 물어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혼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변호사도 그 이상 묻지 않았다. (P170-171)
지즈코는 “당신은 도쿄 사람이잖아”라고 했지만 혼마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스스로를 도쿄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가정을 꾸린 지리상의 도쿄와, ‘도쿄 사람’ ‘도쿄 토박이’라는 말에 붙는 ‘도쿄’ 사이에는, 너무도 명백해서 정의할 필요조차 없는 차이가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 차이는 예를 들면 ‘삼대가 잇달아 살지 않고서는 에도 토박이라 할 수 없다’는 식의 천박한 구분법에서 비롯한 것은 아닌 게 분명했다.
그 사람이 ‘도쿄와 피가 이어져 있다’고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 전적으로 그 한 가지에 달린 일이다. 그리고 그때의 ‘도쿄’는 ‘고향으로서의 도쿄’ ‘인간을 낳아 키울 수 있었던 도쿄’다.
그러나 현재의 도쿄는 더 이상 인간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수 있는 토지가 아니다. 땅의 기운이 사라지고, 비도 내리지 않고, 경작할 괭이도 없는 척박한 황무지다.
이곳에 존재하는 것은 대도시로서의 기능뿐이다.
그것은 자동차와 매우 흡사하다. 제아무리 고급 사양에 성능이 뛰어나다 해도 사람이 그 안에서만 살아갈 수는 없다. 자동차는 타고 다니며 편리하게 사용하고, 이따금 정비를 맡기고 세차를 해주고, 수명이 다 되거나 질리면 새것으로 바꾸면 그만이다. 그것뿐이다.
도쿄도 그와 마찬가지다. 어쩌다보니 이 도쿄라는 차에 필적할 만한 성능을 지닌 다른 차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있더라도 개성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사용하게 된 것뿐이지, 본래는 언제든 갈아끼울 수 있는 부품 같은 것이다.
인간은 새것을 사서 대체할 수 있는 대상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새로 바꿀 수 있는 것을 고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도쿄에 있는 인간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뿌리 없는 풀이며, 대부분은 부모, 혹은 그 부모의 부모가 가지고 있던 뿌리의 기억에 매달려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뿌리의 대부분은 이미 힘을 잃었고, 이들을 부르는 고향의 소리도 이미 쉬어버린 지 오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부초 같은 인간이 늘어만 간다. 혼마는 자기도 그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P198-199)
가짜 쇼코는 진짜 쇼코의 신분을 가로채기 전에 그녀의 개인정보를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주도면밀한 여자가 여권이나 운전면허를 염두에 두지 않고 행동했을 리 없다. 반드시 필요한 정보를 먼저 손에 넣은 후에, 이 정도면 괜찮다고 판단하고 세키네 쇼코의 신분을 가로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세키네 쇼코의 개인적인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을만큼 가까운 곳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말이 된다.
역시 골드나 가사이 통상에 다닐 무렵의 동료일까. 그렇지만 그래서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골드나 가사이 통상에서 알게 된 여자라면, 세키네 쇼코의 여권과 운전면허 소지 유무, 어쩌면 호적지 주소까지도 간단히 알아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가 개인파산 경험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게 빤하다.
골드의 동료라면 반드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가사이 통상은 파산신청 전에 퇴직했으니, 그곳 사람들은 빚 때문에 고통받은 것은 알아도 개인파산한 사실까지는 모를지도 모른다.
그래도 쇼코의 신분을 노리고 그녀가 되려고 마음먹었다면, 사전에 빚에 관해 캐묻는 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후에 빚 문제는 잘 해결됐느냐고.
그때 쇼코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사실대로 대답했다면 쇼코가 되려한 여자도 개인파산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빌려서 같았다거나, 술집에서 일하다 후원자가 생겨서 그 남자가 대신 갚아줬다는 식으로 적당히 둘러댔다면.....
그래도 가짜 쇼코는 한 번 더 확인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중대한 문제다. 신분을 가로채는 것까지는 좋았어도, 큰 빚이 남아 빚쟁이들에게 쫓기고 진짜 쇼코가 아니라는 사실까지 발각 나면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만 신경 써서 조사하면 세키네 쇼코의 개인파산 사실을 밝혀내는 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작정하고 캐묻는 것만으로 본인에게 자백을 받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파산 사실을 알면서도 굳이 쇼코로 변신했다면, 지금 와서 누가 그걸 들이댄다고 기겁을 하며 도망칠 이유는 없다. 또한 가즈야가 아무리 권해도 신용카드를 만들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그러면서도 파산을 한 과거는 알 수 없을 정도의 거리.
과연 그런 동성 친구가 있을 수 있을까. (P209-210)
“이건 저의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쇼와 50년대 후반의 대란 이면에는 ‘좋은 집에서 살고 싶다. 남들보다 좀더 호화롭게 살고 싶다. 안락한 생활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허영심도 있었겠죠. 그러한 심리에, 무시무시한 기세로 팽창해가는 소비자신용이 발판을 제공한 느낌이랄까요. 그렇지만 지금 상황은 완전히 ‘정보파산’이란 생각이 들어요.”
“정보파산?”
“네. 이렇게 저렇게 하면 돈을 왕창 벌 수 있다. 주식을 해라, 아니, 집을 사라, 아니, 골프회원권이다 하는 식으로요. 그리고 한창 놀고 싶을 나이의 젊은이들은 요새는 어느 나라가 재미있다느니, 어디로 여행을 가는 게 현대적이라느니, 사는 곳도 이 지역에서 살아야 폼이 난다, 맨션도 이런 세련된 곳이 좋다. 입는 옷은 이게, 차는 저게 좋다..... 이런 것들이 다 정보잖아요? 다들 들떠서 정보를 쫓기에 여념이 없어요. 그런 상황에서 아직 제도와 법률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소비자신용이 자기 회사의 이익만 노리고 돈을 빌려주죠. 정말 어처구니없는 얘기를 해드릴까요. 지금 은행이 개별회사를 만들어서 신용대출 같은 형태로 무담보 융자를 해주잖아요? 그건요. 은행이 경영하면 신용대출 규제법에 안 걸리기 때문이에요.”
전화 통화를 하는 중에도 그녀의 등뒤에서 사람들 목소리와 전화기 벨소리가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이런 사무실이 마지막 남은 선로 전환기를 지나쳐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관차를 아슬아슬하게나마 세워주는 브레이크가 되고자 애쓰는 것이다. 당장 눈앞에서 솟구치는 불길을 잡기 위해, 제대로 쉬지도 자지도 못하고 일하는 것이다. (P220)
이렇듯 죽은 자는 살아 있는 자에게 흔적을 남긴다.
인간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벗어던지 웃옷에 체온이 남듯이, 빗살 사이에 머리카락이 끼어 있듯이, 어딘가에 무언가가 남는다.
세키네 쇼코에게도 분명 그런 것이 있을 터이다. 그래서 그녀도 이용했을지 모르는 도호쿠 신칸센의 진동에 몸을 맡기며 이렇게 우쓰노미야로 향하는 것이다. 그녀의 이름을 가로챈 여자 역시 똑같은 목적을 품고 진짜 세키네 쇼코가 되기 위해, 그녀에 관해 보다 많은 정보를 모으기 위해 그녀의 고향으로 가고자 이 신칸센을 타고서 도망치듯 스쳐지나는 마을들을 바라보았을지도 모른다. 혼마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쇼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한 젊은 여자가 사고 현장을 맨 먼저 발견하고 구급차를 불러줬었대요.’
지레짐작은 좋지 않다고 스스로를 진정시키면서도, 우쓰노미야로 향하는 전철 속에서 혼마는 ‘쇼코’가 세키네 쇼코의 신분을 확실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녀의 어머니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P223)
“혹시..... 시짱이 살해당했더라도 시체가 안 나오면 소용없다는 뜻입니까?”
“사건으로 다루려면 그게 가장 빠른 길이지.”
다모쓰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는 쇼코 씨를 ‘시짱’이라고 부르나?”
“네.”
고개를 끄덕이는 청년의 매끈한 이마를 바라보며 혼마는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드디어 세키네 쇼코의 진짜 친구를 찾아낸 모양이다.
시짱이라는 호칭에서는 소꿉친구의 울림이 묻어났다. 이카리가 지즈코를 ‘지짱’이라고 부를 때의 그답지 않은 부드러운 말투와도 비슷했다.
“그런데 저는.....” 다모쓰가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시짱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그후에 가와구치로 찾아가 그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터무니없는 상상을 했습니다.”
그는 용서를 구하는 듯한 시선으로 혼마를 바라보았다.
“아, 역시 시짱이 어머니를 죽였구나, 그래서 도망쳤구나, 라고요.”
구슬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튕겨나간 느낌이었다. 풍경화라 생각하며 바라보고 있는 그림을 옆에서 누가 가리키며 “이거 인물화죠?” 라고 말한 듯한 느낌이기도 했다.
“그건...... 쇼코 씨가 한때 신용대출 때문에 쫓겼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보험금을 노리고 저지른 짓일지도 모른다고.”
다모쓰는 고개를 끄덕였다. 몹시 괴로워 보였다.
“그리고 이쿠미한테 들은 말도 있어서요. 시짱 어머니가 계단에서 떨어졌을 때, 구경꾼 중에 웬지 수상쩍어 보이는 여자 하나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선글라스로 얼굴을 감추고 있었대요. 그게 혹시 시짱이 아니었을까 하고.”
혼마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잠깐만, 이쿠미 씨는.....”
“제 아내입니다.”
“그녀도 쇼코 씨 친구였나?”
다모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쿠미는 시짱 어머니를 발견하고 구급차를 불렀어요. 지나가던 길에, 그 인연으로 장례식에도 왔고. 우리는 그 일을 계기로 알게 돼서 결혼했죠.” (P241-242)
빌딩 앞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 “혼마 씨 다리 상태로는 올라가기 힘들어요.”라는 다모쓰 말에 문제의 계단은 밑에서 올려다보기만 하고 지나쳤다. 그래도 분위기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콘크리트 계단은 눈사태처럼 무너져내릴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급경사였고, 조명까지 흐려서 발밑이 어두웠다. 난간이 있기는 하지만 워낙에 경사가 급하고 계단 폭이 좁아서, 꼭 술에 취하지 않았더라도 자칫 균형을 잃으면 멈출 새도 없이 바닥까지 굴러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존재 자체가 흉기 같은 계단이죠?” 이쿠미가 몸서리치듯이 목을 움츠리며 중얼거렸다. “그런 일이 생기기 전부터, 저는 이 계단 밑을 지나갈 때마다 <엑소시스트>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엑소...... 뭐라고요?”
이쿠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영화를 잘 안 보시는군요.”
빌딩 한구석에 초라하게 숨어 있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1,2층의 은행은 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는 모양이다. 엘리베이터 바닥에는 싸구려 다홍색 카펫이 깔려 있고, 벽 여기저기에 지저분한 낙서들이 보였다. (P262)
“그렇지만 그 사진에서는.....”
재미있다는 듯 히사에가 말을 가로막았다. “아, 그러니까 전제조건이 틀렸던 거죠. 당신은 그 사진을 봤을 때 ‘이 집은 야구장 근처에 있다. 조명등이 보이니까’라고 말했죠?”
“네, 그랬죠. 사실 그대로니까.”
“그래요. 그렇지만 그 뒤가 잘못됐던 거예요. ‘그런데 조명이 이 집을 향하고 있으니, 이 조명등은 야구장 바깥쪽을 비추고 있는 셈이다. 야구장 안에 집이 있을 리는 없으니까’ 라고 했죠?”
“그랬죠. 그야.....”
“글쎄, 그게 잘못됐다니까.”
사토루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한껏 들떠 있었다. 히사에에게 지지 않을 만큼 큰 목소리로, 한 마디 한 마디 끊어서 강조하며 말했다.
“있잖아. 마치코 선상님이 가르쳐줬는데, 지금 야구장 안에 집을 지을 수 있는 곳에 전국에 딱 한 군데 있대. 아빠, 무슨 말인지 알겠어? 조명등 방향은 맞았어. 야구장 안을 비추고 있으니까. 그런데 거기에 집이 있었던 거야. 야구장 안에.”
너무 생뚱맞은 소리라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웃을 수도 없었다. 사토루의 기세를 보아하니 농담도 아니다.
“그런 희한한 장소를 마치코 선상님이 알고 있었다고?”
“응, 선상님은 오사카의 스포츠우먼이고 열광적인 야구팬이기도 하니까.”
“그렇다면..... 오사카에 있다는 소린가?”
“응.” 사토루가 말했다. “있대. 안 쓰는 야구장이. 아빠는 몰라? 1988년 9월에 난카이 호크스가 다이에에 매수돼서 후쿠오카로 옮겼잖아? 그래서 오사카 구장이 비어버린 거야. 그런데 헐지 않고 놔둬서 지금도 그대로 있대. 이벤트 회장으로도 쓰고, 중고차 판매 전시장으로도 쓰면서 말이야. 그리고 그런 행사들 중에 ‘리빙 페스타’라는 게 있댔어.”
“리빙.....”
“요새도 또 하고 있나봐. 그러니까 아빠, 주택 전시장 말이야. 원래는 오사카 야구장이었던 곳을 주택 전시장으로 만든 거라고. 그러니까 거기서 일본에서 딱 한 군데 야구장 안에 집이 있는 장소인 거지. 내 말 듣고 있어? 그 폴라로이드 사진에 찍힌 건 그 안에 있는 모델하우스야!” (P274-275)
혼마 쪽으로 내밀었다.
“봐주십시오. 틀림없을 겁니다.”
복사지는 세 장이었고, 한쪽 귀퉁이가 스테이플러로 찍혀 있었다. 혼마는 그것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맨 첫 장은 이력서 복사본이었다. 그렇다, 이력서.
벌써 닷새 전 일인가. 이마이 사무기기에서 처음으로 ‘세키네 쇼코’의 이력서를 보았다. 그때의 증명사진, 그 얼굴.
똑같은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이력서 왼쪽 위에 자리 잡은 조그만 증명사진 테두리 안에서 미소 짓고 있다. 혼마가 가지고 있는 사진과 머리 모양이 다르지만 얼굴은 똑같다. 동일 인물이다.
신조 교코.
성명 칸에는 이마이 사무기기에서 본 ‘세키네 쇼코’의 이력서와 똑같은 글씨체로 그렇게 적혀 있었다.
“신조, 교코.”
혼마가 중얼거리자 가타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신조 씨예요. 확실하게 기억납니다. 우리 회사에 다닐 무렵에는 웨이브진 머리였지만.”
1966년, 쇼와 41년 5월 10일생. 올해로 스물여섯 살이다. 세키네 쇼코보다 실제로는 두 살 아래였던 것이다.
본적지는 후쿠시마 현이었다. 고리야마 시에서 중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도 그곳에서 다니고 졸업했다. (P297)
혼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난 처음부터 끝까지 신조 교코 혼자 행동했다고 봐. 이렇다 할 근거는 없지만. 그런 예감이 들어.”
강한 의지가 엿보이는 신조 교코의 눈빛. 구리사카 가즈야 곁에서, 또는 로즈 라인의 가타세 앞에서 사라졌을 때의 그 비정함. 민첩함. 그것은 그녀가 모든 의미에서 고독했다는 인상을 자아냈다.
또한 혼마는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신조 교코는 고독했기 때문에, 외톨이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신분을 사칭하고 가로챌 수 있지 않았을까. 쫓기고 도망치는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고 구원의 손길을 뻗어주려는 남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곁에 있었다면 그녀는 ‘신조 교코’라는 자기 이름을 버리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협력자의 힘을 빌려 온전히 신조 교코인 채로 도망치는 길을 고민했을 것이다. 이름이란 타인에게 불리고 인정받음으로써 비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신조 교코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그녀와 떨어질 수 없는 인간이 주위에 존재했다면, 그녀는 결코 펑크 난 타이어를 버리듯 간단하게 ‘신조 교코’라는 이름을 내동댕이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이름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공범자는 없단 말이지?” (P319)
후미에는 말을 이었다. “남자들 중에도 그런 부류가 있어요. 오히려 여자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죠. 죽어라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회사에 들어가려 애쓰는 것도 그런 거 아닌가요? 다 착각이에요. 다이어트에 미친 여자를 비웃을 순 없어요. 다들 착각에 빠져 사니까.”
혼마는 불현 듯 떠올렸다. 쇼와 50년대 후반의 신용대출 대란의 근저에는 내 집 마련 소망과 그것에서 비롯한 무리한 주택자금대출이 있었다는 사와키의 말을.
그것 역시 착각 아니었을까. ‘내 집만 마련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 풍요로운 삶이 보장된다’라는 착각.....
“옛날에는 자기 착각대로 살아볼 만한 군자금이 아무한테나 없었잖아요? 그런 군자금을 투입할 대상도.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요인도 적었고요. 예를 들자면 미용도, 성형도, 강력한 입시학원도. 명품들을 늘어놓은 카탈로그 잡지도 없었으니까.”
후미에는 담뱃불을 붙이는 것을 어느새 잊어버렸다.
“그렇지만 지금은 별것 아니에요. 꿈을 꾸기로 마음먹으면 간단하죠. 하지만 그러려면 군자금이 필요하고, 돈이 있는 사람이야 자기 돈을 쓸테죠. 그러니까 자기 돈 없이 ‘빚’이라는 형태로 군자금을 만드는 사람은 쇼코처럼 되는 거예요. 그애한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넌 설령 자전거조업으로 돈을 빌리더라도 맘껏 쇼핑하고, 사치하고, 비싼 물건에 둘러싸이면 네가 꿈꾸던 고급스러운 인생을 실현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행복했던 거지? 라고.” (P345)
“언젠가 남편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제법 그럴듯한 소리를 하는구나 생각했죠. 저기, 뱀이 탈피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탈피?”
“뱀은 허물을 벗잖아요? 그거 실은 목숨 걸고 하는 거래요. 그러니 에너지가 엄청나게 필요하겠죠. 그런데도 허물을 벗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혼마보다 다모쓰가 대답했다. “성장하기 위해서 아닌가요?”
후미에가 웃었다. “아니에요. 목숨 걸고 몇 번이고 죽어라 허물을 벗다보면 언젠가 다리가 나올 거라 믿기 때문이래요. 이번에는 꼭 나오겠지, 이번에는, 하면서.”
다리 따위 없어도 상관없잖아요. 뱀은 뱀이니까. 그냥 뱀이니까, 후미에가 중얼거렸다.
“그런데도 뱀은 생각해요. 다리가 있는 게 좋다. 다리가 있는 게 행복하다고. 거기까지가 우리 남편의 학설, 그리고 여기부터는 내 학설인데, 이 세상에는 다리를 원하지만 허물벗기에 지쳐버렸거나 게으름뱅이거나 벗는 방법을 모르는 뱀이 수없이 많다는 거죠. 그래서 그런 뱀들에게 다리가 있는 것처럼 비춰주는 거울을 파는 뱀도 있다는 말씀, 그리고 뱀들은 빚을 내서라도 그 거울을 사고 싶어하는 거예요.”
난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세키네 쇼코는 미조구치 변호사에게 그렇게 말했다.
혼마는 기억을 떠올렸다. 예의 선로 전환기의 이미지를, 사람들은 대체 거기서 무엇을 보고 정보를 쫓아가는 걸까라는 의문을.
이번에는, 이번에는 꼭. (P346-347)
“교코의 가족은 옛날에 빚을 져서 온 식구가 뿔뿔이 헤어졌습니다.”
구라타가 말했다. 미세하게나마 목소리 톤이 기묘해졌다. 마치 그 이야기를 하려면 일상적으로 쓰지 않는, 전혀 조율되지 않은 건반을 끄집어내야 한다는 것처럼.
“주택대출을 못 갚아서 일가족이 함께 고향 고리야마에서 야반도주했어요. 교코가 저랑 이혼한 이유도 그것 때문입니다.”
무릎 위에서 주먹을 움켜쥐며 말을 이었다.
“그녀가 결혼해서 혼인신고를 하면, 태어난 고향 관청 호적에 그 사실이 기록되잖습니까? 후쿠시마에 지독하게 집요한 빚쟁이가 있었던 모양인데, 그쪽에서 정기적으로 호적을 점검하다 교코의 현주소를 알아내고 우리가 사는 곳에까지 들이닥친 겁니다. 교코의 가족이 야반도주를 한 것은 쇼와.... 58년 봄이라고 하니까, 그때 이미 사 년이나 지난 일이었습니다. 그 사이에도 꼬박꼬박 이자가 붙어서 빚은 이제 손쓸 도리가 없는 금액으로 불어나 있었죠. 그 돈을 갚으라며 온갖 수단을 동원해 난리를 쳤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안전을 위해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당신들 두 사람은 같은 부류였다.
혼마의 뇌리에 스친 말은 그것이었다. 세키네 쇼코와 신조 교코. 당신들 둘은 같은 고통을 짊어진 인간이었다. 같은 족쇄에 묶여 있었다. 같은 것에 쫓기고 있었다.
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당신들은 서로를 잡아먹은 것이나 다름없다. (P367-368)
“그리고 저는, 이 앨범을 받은 날짜 같은 건 생각할 것도 없이 금방 감이 왔습니다. 시짱이 가즈짱에게 이걸 보냈을 리가 없다고.”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말투는 단호했다.
“워드프로세서로 쓴 편지를 읽었을 때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다. 이건 시짱이 쓴 게 아니다.”
“왜지?”
“내가 아는 시짱은 옛일을 그리워하는 성격이 아니에요. 앨범을 보면 지금의 자기 생활과 비교하게 돼서 슬퍼진다니.....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애가 아니었다니까요. 시짱은 학창시절에 즐거운 추억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을 정도니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혼마는 생각했다. 세키네 쇼코는 어린 시절부터 행복을 실감한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옛날의 자신도 지금의 자신도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기 위해 늘 조바심을 냈던 것이다.
그것은 쇼코가 우연히 편모 가정 출신이었다거나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았다거나 하는 개별적인 요인에서 비롯한 조바심은 아니었을 거라고 혼마는 생각했다. 그것은 누구나가 마음속 깊이 숨기고 있는 소원이자 살아가는 원동력이며, 한 사람의 ‘개인’으로 존재한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세키네 쇼코는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그다지 현명하지 못한 방법을 선택했다. ‘자기 본연의 모습’을 찾는 대신, 그런 모습을 찾아낸 듯한 착각을 일으켜주는 거울을 사버린 것이다.
그것은 플라스틱으로 지은 사상누각 위에 살면서......
“시짱은 죽었어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저는 이제야 비로소 그런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P396)
조금은 뜻밖의 견해였다. 평소의 이사카답지도 않다. 사토루의 마음의 상처를 달래주려고 일부러 엄격하게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겉보기와 달리 이사카는 엄격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히사에와 둘이 즐겁고 마음 편히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삶을 지탱하는 척추는 뜻밖에도 단단한 철로 만들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이사카 아저씨는 가사도우미 일을 하잖아? 게다가 사실은 부자지만 이사 가기가 번거로워서 아줌마랑 계속 이 단지에 사는 건데, 그런 것 갖고도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대. 그래도 이사카 아저씨는 그런 사람들을 가만 놔둔댔어. 그렇지만 그 사람들이 단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만으로 아저씨를 방해하려고 하거나 못된 짓을 하려 들면, 절대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울 거라고 했어.”
단숨에 말을 쏟아놓더니 사토루는 다시 잠깐 생각에 잠겼다.
“남한테 못된 짓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왜 그러는지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대. 다사키도 그렇대. 그래서 못된 짓을 할 수 있다는 거야. 그렇게 말했어.”
“그럼, 다사키를 절대 용서하지 말라고 했니?”
사토루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녀석이 자기가 한 짓을 곰곰이 반성하고 사과하러 오면 용서해주랬어.”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었다. “그래. 아빠 생각도 마찬가지야.”
사토루도 마음이 놓인 표정을 지었다. (P413)
“교코가 로즈 라인에 다니면서 그때 말고 긴 휴가를 낸 적이 또 있나요?”
혼마는 메모를 살펴보았다. 가타세가 조사해준 내용이었다.
“없군요.” 금방 알 수 있었다. “사흘 이내의 휴가는 있지만, 구 일간 낸 건 그때뿐입니다. 11월 18일부터 26일까지.”
스도 가오루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살짝 의기양양해 보이기도 했다.
“아, 그거라면 알아요. 저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니지만, 교코가 그때 말고 긴 휴가를 낸 적이 없다면 틀림없어요.”
혼마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무렵 교코 씨한테서 무슨 연락이라도?”
“있었죠. 우리집에 왔었어요. 휴가 둘째 날이었으니까. 19일 밤이겠네요. 그런데 상태가 굉장히 안 좋았어요. 다쳤더라고요.”
다쳤다?
“어딜 어떻게 다쳤습니까?”
“화상이었어요. 다행히 그리 심하진 않았지만.” 가오루가 말했다. “그런데 결국 입원까지 했죠. 열이 너무 높아서.”
순간 잘못 알아들은 줄 알았다. 입원까지 했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병원에 갔어요. 구급차로.” 스도 가오루가 천진난만하게 눈을 크게 뜨고 설명했다. “이 근처에 있는 큰 종합병원이요. 26일 오전에 퇴원할 때까지 계속 입원해 있었어요. 구 일간 휴가를 낸 건 그것 때문이에요. 틀림없어요. 제가 병원에 데려갔고, 줄곧 옆에 붙어 있었으니까.”
폭탄이었다. (P428-429)
신조 교코에게 세키네 쇼코는 몇 번째 후보였을까?
그렇다. 처음부터 그녀가 첫 번째 후보였을 리는 없다. 실제로 쇼코의 데이터는 7월 정보인데, 교코는 가타세에게 8월 것까지 빼내달라고 부탁했다.
후보는 세키네 쇼코를 포함해 여러 명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조건이 좋은 표적을 노려 교코는 당초 행동을 시작했을 것이다.
이론상으로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생각했다. 교코가 로즈 라인에서 정보를 빼내고, 그중에서 눈에 띄는 ‘표적’을 찾아냈을 거라고.
그러나 그것은 그저 생각일 뿐이다. 좀더 일찍 이렇게 직접 160명의 정보를 눈으로 보고, 출력된 종이의 무게를 느꼈어야 했다. 그랬다면 훨씬 전에 깨달았을 것이다.
신조 교코에게 세키네 쇼코가 두 번째 이하의 후보였다면?
그녀가 ‘이거다’ 하고 목표로 삼은, 훨씬 더 적합한 다른 여자가 존재했다면?
다른 넘버원이 존재했다면? 그 표적을 ‘없애기’ 위해 착실하게 준비했었다면?
그런데 그러던 와중에, 너무나 우연히도 세키네 쇼코의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신조 교코는 도쿄 지방 신문을 받아 보았다고 했다. 건축법 위반이 원인이 된 세키네 요시코의 죽음은 작게나마 도쿄의 신문에 보도되었다.
교코가 그것을 보고 쇼코의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적어도 호적상으로는 쇼코가 천애고아의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렇다. 세키네 요시코의 죽음은 역시 사고사였다. 자살일 가능성도 있지만, 여하튼 남의 손에 살해당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발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신조 교코는 세키네 요시코의 죽음을 계기로 다른 표적에서 방향을 바꾸어 쇼코를 노리게 된 것이다.
쇼코가 요시코의 죽음으로 인해, 계획을 실행하는 데 손을 더럽힐 필요가 적고 그만큼 위험성이 낮은 표적이 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모든 것이 앞뒤가 맞는다. (P458-460)
신조 교코가 1989년 11월 19일에 스도 가오루에게 한 교통사고 얘기는 날조된 것이었다. 아무런 근거 없는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 것이다.
남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게 아니다.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남자는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았으니까. 드라이브 여행도 교통사고도 없었으니까.
혼마는 섬뜩한 느낌에 등을 곧게 펴면서 다시 종이 다발을 내려다보았다.
그날, 1989년 11월 19일, 신조 교코는 도쿄나 요코하마나 가와사키 주변에 있었고, 이 인쇄지 속에 숨겨진 여성 중 한 사람. 교코가 첫 번재 ‘표적’으로 정한 최적의 후보자를, 혹은 그 여성의 신분을 가로챌 때 방해될 측근을 처리하려 했던 게 아닐까?
‘가볍긴 해도 꽤 넓게 화상을 입었어요.’
‘스웨터가 타버렸다고 했어요.’
호난초 빌라에서 본 조그만 가솔린 병. 그것을 손에 들었을 때 풍기던 자극적인 냄새. 반짝거리던 환풍기 날개.
가솔린.
방화다. (P461-462)
“먼저 말을 걸겠다며?”
혼마가 재촉하자 다모쓰는 교코가 앉은 의자 등받이를 바라보며 일어섰다.
그리고 누가 끈으로 잡아끌기라도 한 것처럼 곧장 걸어가더니 말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영 어색한 걸음걸이였다. 주위 손님들이 포크를 입으로 가져가던 것을 멈추고, 혹은 잔을 들어올리려던 것을 멈추고, 혹은 일행과 나누던 대화를 뚝 끊고 다모쓰의 넓은 등을 올려다보았다.
혼마도 탁자 옆으로 일어섰다.
반대편 플로어에서 이카리도 몸을 일으키고, 자리에서 벗어나 천천히 계단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혼마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고즈에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쉴새없이 뭐라고 얘기하는 신조 교코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얼마나 작고 가냘픈 사람인가.
마침내 찾아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끝에 이르렀다.
계단을 내려간 다모쓰가 고즈에와 교코의 자리로 다가갔다. 고즈에는 미리 약속한 대로 현명하게 인내하며 이쪽을, 다모쓰 쪽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 교코의 귀고리가 반짝거리고, 가냘픈 어깨가 즐거운 듯 흔들렸다.
너무 커서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표식을 막 발견한 것 같은 신선한 경이로움을 느끼며, 혼마는 생각했다.
이쪽에서 뭐라고 묻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나는 당신을 만나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당신 혼자 짊어져온 이야기를. 이리저리 도망쳐온 세월에. 숨죽여 살아온 세월에. 당신이 남몰래 쌓아온 이야기를.
시간은 충분하다.
신조 교코.....
다모쓰가 지금 막 그 어깨에 손을 얹었다. (P482-483)